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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카페지기 서봉석(소선)의 블로그
"소선의 음악이야기" blog.naver.com/bongarr 에서 옮긴 것입니다.
KBS관현악단의 역사(1948~2016)
2016년에 발간 된 "KBS관현악단의 역사"
저자의 글
필자가 KBS관현악단에서 33년(1969~2002)간 근무하며 느낀 것은 방송악단에 관한 자세한 내용이 그 어느 곳에도 기록되지 않
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본인 나름대로 역사 정리에 필요한 서적 또는 KBS의 악단을 운영했던 분들을 만나서 최대한 자세하고 정
확한 내용을 정리하고저 애를 쓰기는 했습니다만 증언을 해 주실 분들이 모두 연로하셔서 오래 전 기억을 잘 못하시고 또 기록된
것이 없다보니 자료 정리에 부족한 것이 많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이 점 널리 이해해 주시면서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참고자료: 한국방송60년사. 황문평 저서. 손석우 구술, 김강섭 구술, 서봉석 보관자료, 이장춘 블로그 “춘하추동방송”)
1950년대 중반에 악단지휘자로 활동하신 손석우님을 직접 뵙고 증언을 들을 때에 90이 넘은 고령이신데도 당시 단원 이름을 기
억하시는걸 보고 정말 놀래기도 했습니다. 이 역사를 정리하는 데에는 인터넷 “다음”에 “춘하추동방송” 이라는 1인의 블로그 라
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거창한 규모의 방송사 전체 내용의 역사를 정리하신 블로그 운영자 이장춘 放友會 이사(전 KBS기획실관리
부 차장)께서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방송역사의 오래 전 사진들을 많이 확보하고 계시기에 사진 사용을 부탁드렸더니 악단 역사책에 게재할 수 있도록 기꺼이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간 자료정리에 도움을 주신 KBS관현악단의 반동수 총무, MBC관현악단의 이호성 단장, SBS관현악단의 유용준 총무, 그리고
레코딩악단의 윤영인 총무, 한국저작권단체연합회 송순기 이사장, 한국음악실연자연합회의 김원용 회장, 이 외에도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진자료 중에는 인터넷에서 사용한 것도 몇 컷 있는데 어느 분이 올리신 것인지를 몰라 임의로 사
용케 되었지만 최초로 올리신 분께 지면으로나마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필자가 이 책을 쓴 이유는 KBS관현악단의 어제와 오늘을 재조명하여 은퇴자에게는 힘든 시절이었지만 아름다운 추억을, 현역단
원들에게는 관현악단의 역사를 바로 알게 함으로서 지난 날 보다 더 나은 발전적인 연주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미
력한 힘이지만 부디 KBS관현악단이 날로 발전하는데 이바지했으면 좋겠습니다.
2016년 8월 30일
저자 서 봉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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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관현악단의 역사
(1948~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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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KBS관현악단은 1927년 조선총독부 시절의 JODK 방송 개국부터 1948년 정부수립과 동시에 KBS가 탄생된 이후 현재까지 우리
나라의 대중음악의 방향을 이끌어 가는 선두에 항상 자리하고 있었다.
어느 나라 사람이 들어도 이해가 되고 공감이 갈 수 있는 우리나라 대중음악 연주의 올바른 주법과 스탠다드한 연주기법을 기본
으로 항상 연주에 임한 결과가 지금의 관현악단을 있게 한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악단의 음
악을 책임지는 단장 또는 지휘자가 同時代의 서구식 대중음악을 빨리 접하고 연주해 온 최고 인기 연주자였고 작곡가였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다.
放送社에서 대중음악을 연주하는 음악인들은 방송사에서 주로 하는 업무인 가수의 노래 반주에서 탈피하여 자신들이 추구하는
음악세계로의 길을 가기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고 그렇지 않은 현실과 항상 부딪치면서 그 돌파구를 찾기 위해 오늘도 연구와 연
습에 몰두하고 있다. 단순히 노래 반주만을 한다면 어려운 연습을 할 필요도 없지만 연주자의 자존심과 욕심은 보다 더 어렵고 음
악적인 그 무엇을 얻기 위해 당연히 노력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KBS관현악단을 국내 최고의 악단으로 성장하게끔 만
든 연주단원들의 저력인 것이다.
하지만 현재 또는 과거에도 그랬듯이 단원들은 자신이 근무했던 그 시절 밖에는 악단에 대해 알 길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 역사
책을 만들어 자신의 앞과 뒤에 대해 자세히 알고 더구나 현재 활동하고 있는 현역단원들은 과거의 악단 선배들이 남겨 놓은 업적
을 통해 자긍심도 갖게 될 것이고 더 나은 악단의 앞날과 자신의 앞날에 대해서 밑그림을 그리며 보다 발전적인 연주자로서의 계
획을 세울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이러한 것들이 곧 KBS관현악단을 발전시킬 것이고 아울러 자기 개인의 발전도 병행 발전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 바이다.
2016.08. KBS관현악단 출신모임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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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
사실상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저 자신, 부끄럽지만 악단의 과거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저를 도와 22년간 악단총무로 수고한 서봉석 前총무가 자신이 일일이 정리해 놓은 자료를 중심으로 악단의 예와 지금을
한권의 역사책으로 만들어 내는 것을 보니 오로지 놀랍고 또 자랑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과거에 함께 방송음악을 하며 동고동락했
던 단원들의 모임인 “KBS관현악단출신모임”에서 이 책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 준 것도 대단히 훌륭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964년에 악단장이 되어 1995년에 은퇴이지만 KBS로부터 그간 방송내외 음악계의 업적들을 참작, 국내 방송 악단장으로서 처
음으로 명예단장의 직분이 주어져 3년간을 더 근무했고 그 이후에는 2005년까지 “가요무대”의 객원지휘자로 활동하다 보니 어
언 42년간을 KBS와 함께 했습니다. 이제 80대 중반의 나이가 되어 지난 날 들의 기억을 되살리려고 해도 잘 되지 않음을 느낄 때
에 이 역사책을 대하게 되니 참으로 감개무량하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군요.
아무쪼록 이 책을 통하여 KBS관현악단의 지나 온 68년의 역사가 더욱 빛나게 기억되기를 바라며 KBS관현악단이 도전하는 오늘
과 새로운 각오로 다가가는 내일을 위해 선후배 모두가 KBS관현악단의 발전을 위해 큰 박수를 보냅시다.
2016년 8월31일
前 KBS-TV관현악단장
現 KBS관현악단 출신모임 회장 김 강 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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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의 글
우선 오랜 역사가 깃든 KBS관현악단의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기는 힘든 작업을 혼자의 힘으로 완성한 서봉석 필자의 노고를 치하
하며 이 책의 발간에 대해 진심으로 축하를 드립니다.
30대초반의 젊은 나이에 당시 국내에 하나 밖에 없는 방송국이었던 KBS라디오의 전속경음악단을 맡으면서 평소에 하고 싶은 연
주와 가요 창작곡들도 방송을 통해서 마음껏 발표하면서 대중음악인으로서 크나 큰 기쁨을 느꼈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50
여년이 되어 까마득한 옛날이 되었습니다.
TBC-라디오악단장으로 근무하다가 방송통합으로 인해 다시 KBS로 와서 그간에 많이 달라진 KBS의 위상을 보면서 대한민국 방
송계의 발전상을 느끼기기도 했습니다. 방송을 하면서 힘들었던 일, 즐거웠던 일, 안타까웠던 일들도 많았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
보니 그 모두가 아름다웠던 추억으로만 남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기도 합니다.
이제 발간되는 “KBS관현악단의 역사”를 통해서 얻은 교훈과 지혜를 KBS관현악단의 새로운 성장 밑거름이 되도록 현역단원들
께서 최선을 다 해 노력하기를 바라며 우리 은퇴단원들과 함께 KBS관현악단의 발전을 위해 꾸준히 기원하겠습니다.
2016년 8월 30일
前 KBS라디오관현악단장 김 인 배
현 방송음악동우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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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 2016년
KBS관현악단의 역사
[발행처 : KBS관현악단출신모임]
-차 례-
머리말 KBS관현악단출신모임 일동
발간사 김강섭
축사 김인배
저자의 글 서봉석
제1장 KBS관현악단이 걸어 온 길
※ 조선총독부 시절의 경성방송국(JODK) 전속관현악단
1.창단과 성장기(1948~1973)
서울중앙방송국(KBS)의 탄생
KBS전속경음악단
KBS전속경음악단 초대 단장 서영덕(지휘자 박시춘,손목인
KBS전속가수 제도
6.25전쟁과 그 직후
라디오 최초의 공개방송(1955)
KBS전속경음악단 지휘자 손석우,송민영,노명석
남산의 서울중앙방송국(KBS)
전속경음악단 단장 김광수(1958~1961)
전속경음악단 단장 김인배(1962~1963 –- 1981~1995)
전속경음악단 단장 김강섭(1964~1995+명예단장 1995~1998)
전속경음악단 출연 프로그램(1960년대)
KBS-TV 개국
KBS-TV 초기의 외부악단 출연
전속악단 월급여제 시행 (1962)
전속악단 계약제 시행 (1973)
전속악단 출연 프로그램(1960년대~1973 공사창립 이전)
라디오부
텔레비전부
외부행사
2.시련과 발전기(1973~1995)
한국방송공사(KBS)의 창립(1973)
여의도 신사옥으로 이전(1976)
KBS경음악단 연주곡 독집음반 제작
악단전용연습실과 악단실 입주
악단전용악기 구입
35인조 관현악단으로의 편성확장과 부단장 김기웅
방송악단 친선축구대회(1970~1979)
제5공화국의 언론사 통폐합(1980)
KBS에 전속악단 4개 단체 존립
TV관현악단장 이봉조
단원오디션 제도(1984~)
이봉조단장 재직중 별세(1987)
악단 총무(라디오와 TV)
KBS-TV관현악단의 국내 첫 팝콘서트
김강섭단장 대한민국문화훈장 서훈기념 일본공연
월례조회 관현악단 연주 참여
악단야유회→단합대회→체력단련회
관현악단 퇴직금 지급 청구소송 - 승소
김인배 라디오관현악단장 퇴임식
악단은퇴자 홍덕표와 서봉석의 환송연
방송악단 초유의 명예단장 김강섭
전속악단 출연 프로그램 (1973~1995)
라디오부
텔레비전부
해외동포위문공연
외부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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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전속악단 출연 역대 인기 프로그램(1950년대~현재)
라디오 - 수요일 밤의 향연, 아마츄어 노래자랑
텔레비전 - 백분쇼, 가요무대, 열린음악회, 빅쇼, KBS전국노래자랑,
모이자 노래하자
3.도약 및 비상기(1995~현재)
KBS관현악단 단장 정성조(1995~2005)
객원지휘자 최선용, 이경구 (1996~2011)
KBS 재즈빅밴드
단원 오디션제 폐지(~2002)
관현악단 총무(정성조 단장 시절)
KBS관현악단 노조 가입
관현악단 출연 프로그램 (1995~2005)
라디오본부
텔레비전본부
해외동포위문공연
KBS관현악단 단장 김대우(2005~현재)
KBS교향악단 단원의 합류
관현악단 총무(김대우 단장 시절)
관현악단 출연 프로그램 (2005~현재)
텔레비전본부
해외동포위문공연
음악연습 및 녹화
KBS관현악단 단원 명단(60명) (2016.09.현재)
KBS관현악단이 가야 할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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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KBS관현악단 사람들
1. KBS관현악단의 역대 단장
2. KBS관현악단의 역대 단원 명단(은퇴 및 현역)
3. KBS관현악단 출신들의 모임 두가지
(KBS관현악단출신모임 / 방송음악동우회)
(가) KBS관현악단출신모임(2006~ )
(ㄱ) 모임 결성과 참가회원
(ㄴ) 모임의 인터넷 카페(다음=daum) 개설
(ㄷ) 모임 대표인 회장 선출
(ㄹ) 모임 첫 번째 사업-선배회원 건강기원모임
(ㅁ) 모임 두 번째 사업-“KBS관현악단의 역사“ 책 발간
(ㅂ) 모임에 나오는 회원들의 모습(사진)
(ㅅ) 미국 거주 김판덕,김대봉 캐나다 거주 홍명호회원(사진)
(나) 방송음악 동우회 결성(2010~ )
(ㄱ) 모임의 결성과 참가회원
(ㄴ) 모임의 인터넷 카페(다음=daum) 개설
(ㄷ) 모임대표인 회장 선출
(ㄹ) 모임에 나오는 회원들의 모습(사진)
4. 관현악단 출신의 대표적 음악활동
(가) 바이올린의 대가 신상철
(나) 대중음악에서 클래식으로 -트럼펫 김광길
(다) 악단 지휘자로 활동한 회원
(라) Jazz 및 Pop 연주 활동
(마) 섹션 리더
5. KBS 역대 편곡자
6. 민영방송사 전속악단의 간추린 역사
(MBC, DBS, TBC, SBS)
MBC라디오전속경음악단
MBC-TV전속경음악단-TV관현악단(1969~1983)
MBC-TV관현악단 – MBC관현악단(1983~2008)
DBS전속경음악단(동아라디오)
TBC라디오전속경음악단
TBC-TV전속경음악단
SBS전속관현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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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KBS관현악단이 걸어 온 길
※ 조선총독부 시절의 경성방송국(JODK)전속관현악단
“한국방송60년사”에 보면 KBS창설 이전인 경성방송국(1927년 개국) 초기에는 『황성옛터의 작곡가로 유명한 전수린도 가요 프
로그램이 있을 때 김교성의 클라리넷과 함께 바이올린을 연주하기도 했으나 단조로운 연주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나중에는 김준
영의 피아노 연주가 합세했었다. 유행가 반주도 1928년4월13일 18인조로 창단된 클래식 위주의 JODK전속관현악단의 반주로
대치되었었는데 1934년 JODK전속관현악단이 재편되고 홍난파가 지휘를 맡게 되면서 부터 제법 반주다운 반주를 하게 되었다』
고 기술되어 있다.
또한 한국인 최초의 방송출연 악단의 모습을 1984년7월호 방송지에 실린 (이장춘의 춘하추동방송 블로그에 소개) 황문평 체험담
을 요약해 보면, 『우리말 방송이 시작되던 날인 1933년4월29일(토) “2중방송 축하 특별방송”프로에 유행가 방송이 있었는데 당
시 인기배우였고 레코딩 가수였던 강석연(월북)이 노래를 부르는데 그 반주하는 악단에는 가요작곡가로 이름난 전수린(Vln.) 김
교성(Clar.) 백 견(Gt.) 문호월(Dr.)등이 중심이었다.』라는 설명이 있다.
이런 것을 미루어 보면 순수오케스트라가 대중음악도 겸해서 연주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홍난파는 순수음악과 대중음악을 다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29년 홍난파는 국내에서 재즈를 연주했다는 기록과 사진이 있으며
1934년에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홍난파가 JODK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방송활동,
1941년 말 태평양전쟁 중에는 능력없는 일본인 지휘자가 적당히 방송을 하고 있었으며
1945년 8.15 광복 이후에는 미군정청에서 방송국을 관리했는데 이때에는 미국식의 프로그램들로 시간 편성이 되어 가던 시기였
으며 부정기적으로 일반 클럽에서 연주하는 경음악단이 방송에 출연했었다는 기록이 있다.
1.창단과 성장기 (1948~1973)
서울중앙방송국(KBS)의 탄생
1920년 미국 피츠버그에서 세계 최초로 라디오방송국(KDKA) 개국,
1925년 일본 도쿄에 라디오방송국(JOAK) 개국에 이어 일제 강점기인
1927년 京城(서울)에는 JODK라는 호출부호로 경성방송국이 개국되었는데 이것이 KBS의 모체이다.
처음에는 일본어와 한국어를 병행했으며
1933년 조선어 방송이 제2방송으로 되었고
1945년 해방이 되면서 3년간 미군정청 관리 하에 있다가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 서울중앙방송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당시 KBS는 공보처 내의 1개 局이었음)
1945년 해방이 되고 미군의 3년간 군정 체제하에서도 한국인의 손으로 방송을 이어 갔으며 일본식 제작형식에서 미국식 제작형
식으로 서서히 바뀌어 갔다. 이때부터 가장 시급한 것이 국민들이 가장 즐겨 부르고 접하게 되는 대중가요의 일본색 탈피와 그 추
방이었다. 밝고 경쾌한 음악으로 건전하고 밝은 한국적 가요를 만들기 위한 방송국의 노력이 가요계에 큰 바람을 일으키는 중요
한 역할을 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KBS에서는 새로운 가요의 보급을 위해 전속가수를 뽑았고, 당시 유행하던 악단의 경음악연주
및 가수 노래를 반주할 전속악단도 구성하게 되고 당시 유명 작곡가를 내세워 새로운 노래의 작곡과 전속가수 지도 및 악단 지휘
를 맡게 하는 일석삼조의 지혜를 짜내게 된다.
(아래는 당시 전속경음악단의 피아니스트인 황문평님의 저서를 참고)
<KBS전속경음악단>
이에 따라 KBS에서는 국내 최초로 대중음악을 위한 전속악단을 두게 되었는데 실제로는1년 전인 1947년6월에 악단모집을 통해
16인조로 구성되었고 악단장에는 당시의 유명 악단장이었던 서영덕(테너색스)이 결정되었다. 그 시절 우리나라 대중가요는 일제
하에서 만들어진 곡들이 대부분이어서 방송국 처음으로 전속가수(KBS전속가수제도를 참조)를 두게 되고 그 가수에게 신곡을 주
어 연습시키고 그 곡의 반주를 지휘 할 수 있도록 당시 유명 악단장이면서 작곡가인 박시춘, 손목인을 지휘자 겸 작곡가로 활동케
했다.
[※ 이 시점에서 어느 단장 시절부터 정식 단장으로 간주하느냐 하는 문제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전속된 악단이, 일반 출연자처럼
출연료를 받던 시절, 또는 월급여제로 받던 시절, 그리고 정식계약을 체결했던 시절의 악단이건 간에 그것은 그 때의 시대적 환경
때문이었기에 “KBS전속경음악단”이라는 정식 명칭으로 방송에 출연하여 전속악단으로 활동을 한 1948년의 단장을 초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초대 전속경음악단장 서영덕, 지휘자 박시춘, 손목인>
서영덕(徐永德)단장은 1930년 일본 댕까스(天勝)에서 국내 최초의 발레리나인 배구자 레뷰단의 악단장이었으며 당시 테너색소폰
의 1인자였다. 정부 수립후인 1948년의 KBS경음악단 에서는 악단장이 악단 운영관리의 책임자인 동시에 단원과 같이 앉아서 연
주하는 형식으로 운영되었으며 음악프로의 경우 프로그램 별로 박시춘, 손목인이 맡아서 지휘했었다.편곡은 이봉룡(드럼) 황문평
(피아노)이 담당했었다.
서영덕단장은 KBS개국 1년 전인 1947년 6월에 단원들을 모집해서 16인조 악단을 구성하게 된다. 지금처럼 음악프로가 많은 것
도 아니고 주말에 한 번 출연하는 것이기에 현재의 시각으로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시절에는 경음악단이 출연하는 방송은 매주 토요일 또는 일요일에 특집형식의 생방송으로 진행되었으며 월급여제는 아니었지
만 1개월에 한번씩 출연회수에 따라 전속료를 받았다고 한다.(회당 출연료 2천원 정도) 악단 편성은 Sax.(4) Brass(3) Rythm(4)
Accordion(1) Violin(4)등 16인조.
1950년1월 방송문화사(KBS직속 문화단체의 집합체)에서는 극작가 유치진을 운영위원장으로 세워 연극인,악극인,가수,전속경음
악단을 총망라하여 그해 4월에 명동의 시공관에서 음악극 “10 용사“를 공연하기도 했다.
<KBS전속가수 제도>
우리나라에 대중음악이라는 장르는 1920년대 중반에 태동하였고 서양의 레코드산업 발달과 때를 같이하여 1930년대에는 대중
음악의 황금기라고 말 할수 있을 정도로 번성했지만 일제 압박 하에서의 설움과 그리움 등의 비탄조 분위기의 가요와 일제강점기
에 만들어진 왜색풍 가요를 추방하고 또한 해방된 조국에서 국민들이 즐겁게 부를 수 있는 우리의 새로운 가요와 서양풍의 수준
높은 가요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에 방송국에서는 새로운 가요 제작 및 보급을 위한 일환으로 KBS전속가수 제도를 만들게 되었
고 또 KBS가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발전을 위한 방안을 모색한 결과 그 방향을 제대로 잡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박시춘,손목인을 전속 작곡가 겸 지휘자로 하고 유명 작사가 김영수,유 호,이 익,김화랑 등이 좋은 가사를 썼다. 제1기 전속가수로
는 이예성,김백희,옥두옥,원방현,이계운,송민도,금사향 등이었으며 작곡가는 자신이 만든 곡으로 전속가수를 지도하고 또 직접
편곡하여 악단을 지휘하였다. 전속경음악단의 연주에 비중을 둔 것이라기 보다는 전속가수를 육성하기 편리하게 작곡가가 악단
지휘까지 맡게 된 것이다.
이렇게 만든 건전하고 신선한 대중가요가 방송을 통해 보급되기 시작하자 전속가수로 하여금 새로운 곡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청취자들에게 대단한 호응을 얻었으며 이를 계기로 가요계의 새로운 스타들이 속속 등장한다.
이러한 전속가수제도는 1965년까지 이어졌다.
6.25전쟁과 그 직후
전속경음악단 창단 2년 후인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자연히 악단도 해산되었지만 KBS는 피난지 부산으로 옮겨서 방송을
이어갔다. 피난지 부산에서도 당시 유명 악단인 김광수악단 또는 부산에 상주하던 이재호악단 등이 대중음악을 또 해군정훈음악
대(해군교향악단)를 초청하여 클래식음악을 연주하는 등 방송을 이어 나갔다. 이때의 악단은 클럽 위주로 일을 하고 필요시에 방
송에 출연하는 형태였다. 하지만 연주단원들은 클럽 연주시간 때문에 방송에 지장이 있을 때에는 적은 출연료이지만 자기 돈을
얹어서라도 반드시 대리 연주자를 출연시키는 등 방송연주자로서의 예의를 지켰다고 한다.
[※ KBS가 1.4후퇴때 부산에서 부산방송국(HLKB)에서 곁방살이 하던 시절, 그곳에서 활동하던 김광수악단이 수시로 KBS프로
에 출연했었다. 이 시절에는 부산 시내 곳곳에 검문소가 있어 시,도민증 이외에 직장신분증이 따로 있어야 편리했었는데 방송전
속악단도 HLKA라고 씌여진 신분증 덕에 특별대우를 받아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고 한다.]
<라디오 최초의 공개방송 1955>
6.25전쟁으로 인한 가장 큰 피해는 1927년부터 사용하던 정동의 방송국 건물이 완전 파괴된 것이다. 원래의 방송국 자리인 조선
방송협회 옆에 임시로 방송연주소(스튜디오)를 지어 그 건물에서 1957년11월까지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장소가 협소해 관객의
동원이 필요한 공개방송은 할 수가 없어 동화백화점(현신세계백화점) 가톨릭문화관(명동), 대한공론사(태평로-1957년7월에 개관
한 강당)등을 임시 KBS공개홀로 사용하게 된다. 대한공론사 강당은 1970년대 초에도 공개홀 중복 시에는 가끔 사용했었다.
1955년에는 방송사상 처음으로 동화백화점에서 노래자랑과 재치문답이 열리게 되었는데, 시작 전의 관객동원에 관한 염려와 달
리 몰려드는 방청객 인파에 방송스탭 모두가 놀랬고 그 이후 최고의 인기 프로가 되었다. 노래자랑의 경우 노래자랑 출연자가 과
연 몇 명이나 올지 몰라서 교육중인 KBS전속가수 몇 명을 객석에 대기시켜 놓기까지 했는데 너무나 많은 출연희망자가 몰려 즐
거운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당시에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한다는 것이 남자의 경우 불량스럽게 느껴지고 여자의 경우 천박한 여
자로 보여지던 시대였기에 그랬었다고 한다.
[ ※1949년 늦가을에 명동의 시공관(현 명동예술극장)에서 오후 5시부터 계속, 방송국에서 하는 것처럼 그대로 방송의 신
비스러움을 시민들에게 직접 보여주는 형식으로 여러 프로그램들을 생방송으로 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국내 최초의
공개방송이라 할 수 있겠다. 여기에는 뉴스, 어린이 프로, 드라마, 쇼프로 등이 선을 보였으며 이날은 생전 처음 보는
방송진행의 모습을 보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초대권으로 발행된 입장권들이 암표로 둔갑하는 등 진풍경이 연출
되기도 했다.]
[ ※ 조선방송협회- 1927년 2월 16일 일본방송협회의 승인을 받은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이 1932년 4월 7일 조선방송협회
로 이름을 바꾸어 설립한 사단법인. 결국 조선방송협회의 산하에 경성방송국을 비롯 부산,평양,원산등 지방방송국을
모두 관장하게 된 조직체였다.
[※ 정동연주소 -정동스튜디오의 한자식 표현이며 정동방송국의 현업 위주의 표현이다.]
[※ 대한공론사 -1953년 발족한 정부의 해외 홍보업무의 언론사로서 태평로에 위치, 1957년7월에 강당을 개관했으며
1978년 코리아헤랄드로 변신하게 됨]
(아래는 당시 전속경음악단의 지휘자/작곡가/기타리스트 손석우님의 증언을 참고)
<전속경음악단 지휘자 송민영,손석우,노명석>
1953년7월27일 휴전이 성립되고 같은 해 8월에 서울로 돌아온 KBS는
1955년 전속악단을 다시 두게 되었는데 현재처럼 악단장 체제가 아니고
1948년 KBS전속경음악단의 운영체제와 같은 방식으로 운영이 되었다. 방송국 음악계(계장 김창구)에서 주선한 악단원들을
송민영(트롬본) 손석우(기타)노명석(아코디언) 등 3인이 프로그램별로 지휘를 했고 지휘를 안 할 때에는 악단석에서 함께
해당 섹션에 참여하여 연주를 했다고 한다.
이들은 당시 음악계의 젊은 엘리트들로서 미국의 재즈와 팝 분위기의 음악을 빨리 받아들여 우리 가요에 접목하는 등 각 악기의
대가의 위치에서 또한 인기 작곡가로서 1950~60년대를 풍미했으며 당시의 방송음악과 국내 대중음악계에서 지대한 공을 세웠
다.
단원으로는 강순원(A.sax.)김익수(T.Sax.)박주근(Trpt.)노갑동(Trpt.)권영호(Pf.)황병갑(D.Bs)등 국내의 베스트급 연주자들이 수
고했으며 당시 라디오의 악단출연료라야 보잘 것 없는 것이었지만 모두가 방송음악을 위해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
으로 모였다고 한다.
당시 작곡가/기타리스트이셨던 손석우님의 증언(필자가 직접 인터뷰 2014.11.02.)에 의하면 音樂係의 김창구 계장(서울음대성악
과 출신)은 악단의 방송 출연료가 적다보니 평소 안면 있는 음악인들인 작곡가(지휘자 겸)와 유명 연주자들을 일일히 만나 애걸하
다 시피하며 출연 승락을 받아 함께 방송하기를 권유함으로서 정상급 연주자들로 방송에 임할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도 마찬가지이지만 1950년대에도 클럽이나 공연단체의 악단출연료 보다 방송출연료가 현저히 낮았기에 대부분의 음악인들
이 방송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시대이다 보니 방송국에서는 연주자 섭외가 대단히 힘들었었다. 공연단체는 시간상 방송 위주로
일을 할 수 없고 또 클럽의 악단은 낮에는 가능하지만 늦어지면 안 되는 어려움이 있어 난색을 표하곤 했었다고 한다.
전속악단에는 악단장은 별도로 없었고 음악계 직원이 악단원에게 연락하여 모이는 방식으로 1958년까지 운영을 하게 된다. 이때
의 악단 편성은 보편적으로 4 sax. 4 Brass, 4 Rythm, Accordion 1, Vibraphone 1 등이었고 현악기,목관악기가 필요할 경우에
는 KBS교향악단에서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 참여해 준 교향악단 단원 중에는 후에 유명 대학교의 교수가 된 분도 있고 대중
음악 분야로 성공한 분들도 있다.
[※수요일의 “노래와 경음악“ 편곡 지휘 송민영, 토요일의 대북방송은 지휘 노명석, 편곡 지휘 황병갑, 일요일의 “노래수첩”과 특
집은 편곡,지휘 손석우]
라디오의 인기 음악프로인 “수요일 밤의 향연“(지휘 손석우) 초기에는 요즘의 ”KBS열린음악회”처럼 성악가들도 출연을 했었는
데 이 경우에는 김희조의 객원지휘로 성악가 코너를 진행했다고 한다. 음악프로 녹음은 공개홀이 없기 때문에 제일 큰 제1스튜디
오에서 사회자,가수,코미디언,악단 등이 모여 앉아 사회자의 멘트로 노래와 경음악 연주,만담 등의 사이사이 출연자와 대담하며
진행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이 때에 방송국 음악계는 김창구계장이 이끌었으며 그가 방송음악 발전에 남긴 업적은 실로 크다
하겠다. 1954년에 KBS음악계에 투신한 송영수 PD 또한, 이후 1970년대 까지 국내 인기가수들의 산파 역할을 하며 라디오의 가
요 프로를 이끌어 온 KBS의 전설적인 라디오연출자 이기도 하다.
전속악단과는 다르게 1957년 서울방송관현악단(지휘 박시춘) KBS관현악단(지휘 김희조)등이 잠시 활동한 적도 있었지만 임시
로 조직, 수차례 방송을 했던 것으로 상설단체는 아니었다. 김희조 지휘의 관현악단은 소편성으로서 그의 편곡으로 팝스오케스트
라 스타일의 연주를 선보였었다.
[※ 여기에서 “서울방송”이라 함은 KBS의 지역방송과 구분하기 위해 서울중앙방송국이란 명칭에서 줄인 표현임.]
지금은 악단의 인원도 많아져서 관현악단이라고 자신 있게 명칭을 쓰지만 방송 초기에는 10~20명 정도의 소편성으로 대중음악
을 주로 연주하다 보니 경음악단이란 용어를 사용했었다.
[※ 輕音樂(Light Music)이란 말은 1930년대에 생겨난 용어로서 순수음악에서 문자 그대로 듣기 편하고 가볍게 느껴지는 소품류
의 곡들을 일컫는 일본식 표현이지만 일본에 歐美의 음악문화가 들어오면서 재즈,샹송,칸쏘네등의 연주곡을 輕音樂이라고 일
컬었으며 그 시절엔 약간 적은 Big band 편성에 소수의 String Section을 보충한 편성이 보통이었다.
이런 편성은 국내 방송사의 전속악단 대부분도 70년대 까지 이어져 왔었다.]
남산의 서울중앙방송국(KBS)
1957년12월에 남산연주소가 완공되어 남산 KBS시대가 열리면서 방송국에 객석 340석의 공개홀도 구비되었다. 이때부터는 프
로그램도 버라이어티 쇼 형식으로 바뀌었고 방청객이 공개홀을 가득 메운 가운데 생동감 있게 녹음을 하는 공개방송이 시작되면
서 전속악단의 역할이 커지게 되고 따라서 악단의 운영과 음악을 책임지게 되는 악단장 중심의 체제로 바뀌게 된다. 당시 미국에
서 유행하던 베니 굿맨(Clarinet)이나 글렌 밀러(Trombone) 그리고 해리 제임스(Trumpet)처럼 유명 연주자가 악단을 리드하면
서 독주도 하는 멋있는 악단의 형태가 국내에도 도입된 것이다. 외국에서 유행하는 연주곡 등이 자주 소개되며 방송국 악단장의
인기 또한 인기가수 못지않게 드높아졌다.
종전에는 유명 작곡가 겸 악단장에게 전속악단의 지휘도 맡기며 전속가수를 통해서 신곡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것을 전제로 적은 출연료이지만 스타 작곡가를 섭외했지만 김광수악단부터는 유명 악단장을 확보하기 위해 가요의 작곡 또는 주
제가 작곡의 기회가 자연스럽게 악단장에게 주어졌다 하겠다.
< 전속경음악단장 김광수(1958~1961)>
김광수(Violin)악단은 당시 유행하던 라틴음악과 박력있고 정열적인 탱고음악의 진수를 보여 주었고 특히 악단장이 가벼운 율동
과 함께 마라카스를 흔들며 악단을 리드하는 김광수 단장의 매력은 장안의 인기를 독차지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단원으로는 엄규홍(A.s) 박호일(T.s) 노갑동→최상룡→김인배(Tp) 최용익(Gt) 노원구(Bs) 권창호,김강섭(Pf) 등 당대의 쟁쟁한 멤
버들로 8~15인조였다. 이 시절에도 전속가수제도가 유지되었기 때문에 라화랑, 손석우, 황문평 등의 작곡가가 전속가수를 지도
했는데 이들의 곡을 연주할 때에는 가끔씩 작곡가가 직접 지휘하기도 했었다.
1961년12월 KBS-TV가 시작되면서 밤에도 생방송을 해야 하는 부담 때문에 당시 클럽 운영자이면서 악단을 이끌었던 김광수는
KBS를 포기하게 되고 1962년부터 김인배(트럼펫)악단이 바톤을 이어 받는다.
[※ 당시의 TV방송은 녹화시설이 없어 모두 생방송으로 방영했음.]
<전속경음악단장 김인배(1962~1964 - 1981~1995)>
당시 최고의 인기 아나운서였던 임택근은 “철의 입술을 가진 사나이”라고 김인배단장을 소개 했듯이 그는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
던 라틴음악의 트럼펫 솔로를 자주 연주해서 인기를 모았다. 당시의 음악 프로에는 경음악 연주가 필수였기 때문에 악단장의 역
할이 대단히 중요했었다. 김인배단장은 2년간 근무 후 사직하고 작곡에 전념하게 된다.
단원으로는 안병철, 김창일(A.s) 이동혁(B.s) 오창환(Tp.) 최영호(Tb.) 백곡(Gt.) 이만성(Bs) 이종명(Dr.) 엄기돈(Pf) 이복윤(Acc.)
정필모(Vib.)김정상,송일남(Vln.) 등 15인조였다.
<전속경음악단장 김강섭(1964~1995 + 명예단장 1995~1998)>
1964년에는 당시 팝피아니스트로 유명한 김강섭이 전속악단장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 시절에는 미국에서 유행하던 재즈와 라틴
음악등이 대세였었기에 외국 음반에서만 듣던 멋진 연주곡들을 실제로 우리나라 연주자들이 그와 똑같이 연주하는 것에 매력을
느끼던 시기였기에 김강섭 단장도 로저 윌리엄즈 같은 외국의 인기 팝 피아니스트들의 피아노곡을 세련되게 연주함으로서 대단
한 호평을 받았다.
[※ 지금은 악단장이 지휘만 하게 될 정도로 인원이 많지만 당시에는 인원이 적기 때문에 악단장도 지휘하다가 독주가 아
니드라도 단원들과 함께 섹션연주에 참여했었다. 이러한 모습은 미국의 빅밴드에서도 자주 볼수 있는 것으로서 베니
굿맨, 글렌 밀러,해리 제임스 등이 곡 중 독주 이외에도 섹션에 참여하는 경우가 있었듯이 자연스럽고보기 좋은 광경이
었다.]
단원으로는 종전의 멤버가 대부분 근속했으며 60년대 말까지의 교체된 단원을 보면 허찬구(A.s.) 김길재,이규식(T.s.) 이창수,이
창배(Tp) 전주환,조인상,서봉석(Tb) 임상신,방석근(Gt.) 김영수(Dr.) 이복윤,유종성(Acc.) 신상철,김정상,송일남(Vln.)등으로 18인
조를 유지했었다.
※ KBS전속경음악단 출연 프로그램(1960년대)
KBS향연(수요일밤의 향연), 노래의 꽃다발, 재치문답, 통일무대, 아마츄어 노래자랑, 위문열차(군방송 제작)
KBS-TV 개국
텔레비전 방송은
1936년 영국 BBC가 세계최초로 흑백TV방송을 시작했고
1954년에는 미국 CBS와 NBC가 세계 최초로 컬러TV 방송을 선보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956년 HLKZ KORCAD-TV에서 흑백TV로 첫 선을 보였고
1980년에 KBS와 MBC가 컬러TV로 방송을 하게 된다.
1961년12월31일에 KBS에서는 TV채널 9로 지상파 처음으로 TV 시대를 열었다.
당시 공보부 오재경 장관의 절대적인 관심과 추진 속에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특별지시가 내려 세계에서 71번째의 TV 방송국 보
유국가가 되었다. 1956년 국내 처음으로 TV화면을 선 보였던 HLKZ-TV 개국 때만 해도 15번째 국가였는데 5년 동안 세계는 엄청
나게 변모해 가고 있었다.
최고회의에서는 KBS에 TV국을 금년(1961) 내로 완성 개국하라는 강력한 지시를 내린 터이었고 국내에서 당시의 TV 방송제작
경험자는 HLKZ 출신의 국내 TV-PD 1호인 최창봉 뿐이었기에 그를 주축으로 한 주요 멤버들이 개국 준비요원으로 맹활약 한 덕
분에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3개월이란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우여곡절 끝에 12월31일 KBS-TV가 개국되었다.
[※ 최창봉은 1956년에 국내 처음으로 생긴 TV 방송인 HLKZ KORCAD-TV 가 뽑은 국내 TV 연출자 1호이다. 그의 방송운영 능력
이 뛰어나서 동아방송, 문화방송, KBS-TV등이 개국할 때 선봉장으로서 개국 작업을 이끌어 왔으며 서울중앙방송국장(1971) 한
국방송공사 부사장(1973) 문화방송 사장(1989) 등을 역임한 전설적인 방송인이다]
[※ 1956.05.12.에 국내에 처음으로 미국 RCA서울지사와 한국RCA대리점대표가 합작으로 HLKZ KORCAD-TV 라는 이
름으로 TV 방송을 시작했으나 국내 전체에 TV수상기가 200대 미만이다 보니 경영란으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한국
일보가 인수하여 1957.05.06.대한방송(DBC-TV)으로 이름 짓고 운영을 하며 점점 호전되다가 1959.02.에 원인 모를 화
재로 전소되면서 방송이 중단되었다.]
<KBS-TV 초기의 외부악단 출연>
KBS-TV部에서는 TV전속경음악단을 별도로 두지 않고 프로그램별로 외부 악단을 거의 고정적으로 출연시켰으며 (KBS전속 김
강섭악단, 송민영악단, 엄토미악단, 김인배악단, 노명석악단, 길옥윤악단 등) 이 때에는 KBS전속경음악단도 TV출연의 경우 출연
료를 별도로 받았었다.
1973년 공사 창립과 더불어 그간 라디오 중심으로 활동하던 KBS전속경음악단에 인원을 늘려 라디오와 TV 프로를 커버할 수 있
도록 복수 편성하였으며 이때부터 전속악단의 출연이 라디오프로 중심에서 TV프로 중심으로 역할이 옮겨지며 외부악단의 활용
도가 적어지게 된다.
[※ 위의 TV부 란, 당시에는 KBS의 조직이 단순했기 때문에 방송국장 밑에 TV部와 라디오部가 있었다.]
<전속악단 월급여제 시행>
전속악단의 출연료는 초기에는 악단출연 프로그램마다 수시 출연료를 받는 형식이었으며 1957년12월부터 고정 출연한 김광수
악단도 출연 프로그램에 따라 수시 출연료를 받는 전속악단으로서 활동을 했었다. 1962년 김인배악단부터는 종전과 달리 라디오
部에서 월정액을 악단에 전속출연료로 지급하는 형식이었으며 1973년 공사창립 이전까지 같은 형식으로 이어졌다. 한 가지 웃지
못할 일은 전속악단의 계약이 공사 이전까지는 서면계약이 아닌 구두계약으로 유지 됐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
일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사회가 대부분 그렇게 움직여졌었다.
<전속악단 계약제 시행>
전속경음악단 초기에는 단순히 구두계약에 의하여 KBS에 전속으로 출연한 경우였고 정식계약은 공사가 발족된 1973년부터 단
장(김강섭)을 대표로 1년 단위로 공사 측과 단체계약이 이루어졌다. 매년 재계약때 가장 힘든 부분이 급여인상 문제였다. 특히 그
시절에 KBS는 민영방송에 비해 임금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서봉석총무는 매년 비교 대상인 TBC-TV와 MBC-TV의 악단관련부서
에 가서 악단급여 정보를 얻어오는 것이 주요 업무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KBS악단은 힘들게 성장해 왔지만 이런 환경에서도 유능한 단원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단원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김강섭 단장만의 특유한 리더십과 악단의 최고화에 대한 집념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 KBS전속경음악단 출연 프로그램 (1960년대 후반~1973년3월 공사창립 이전)
-라디오부-
기본녹음, KBS향연, 명랑오락회, 통일무대, 재치문답, 명랑초대석, 위문열차(군방송 제작)
-텔레비전부-
즐거운 일요일, 즐거운 저녁한때, KBS그랜드쇼, 생방송 쇼 삼천리, 고요한 밤에, 장기자랑, 토요초대석, KBS노래자랑,
노래의 메아리, 일요휴게실, KBS가요제, 생방송 주택복권 추첨,
-외부 행사-
미스코리아 대회(1965~1985, 1989~1992 한국일보 주최) 앤 마그릿 (미국 유명 미모의 가수,배우) 공연(1971-시민회관)
밀바 (이태리 칸소네의 여왕) 공연(1972-시민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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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련과 발전기(1973 공사창립~1995)
한국방송공사의 창립(1973)
1948년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KBS가 국영방송으로 탄생하여 민영방송이 없는 상태에서 독주를 했지만 1960년대
들어 민영방송사가 속속 설립되고부터는 국영방송 체제로는 KBS가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는 한계를 느껴왔고 또한 민영방송사
의 새로운 방송 시스템으로 KBS보다 부분적으로는 앞질러 가는 경쟁구도가 형성되자, 정부에서는 오래 전부터 KBS의 공영화를
주장하던 윤주영 문화공보부 장관의 구상대로 문공부 산하에서 벗어나 공사로 전환, 명실공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세계 수준의
KBS로 만들기 위해 오랜 준비 끝에 1973년3월3일 남산방송국에서 “한국방송공사“ 창립식을 가졌다.
이때부터 KBS는 전국적인 송신망을 갖게 되며 곧 이어 순차적으로 민영방송 보다 모든 면에서 앞서가는 행보를 걷게 된다.
공사창립 이후 모든 프로그램과 제작 분위기가 바뀌게 되고 악단 활용도도 많아지면서 라디오 프로와 TV 프로가 간혹 겹치는 경
우가 생기자 리듬섹션과 윈드섹션을 2팀으로 분리할 수 있도록 복수편성을 하여 라디오와 TV의 모든 음악프로를 단일 악단이 커
버하도록 했다.
<여의도 신사옥으로 이전(1976)>
공사창립 직후부터 착공한 여의도 신축건물이 1976년에 완공되면서 중구 예장동(남산)에서 영등포구여의도동의 신사옥으로 12
월1일 이전하였고 모든 시설과 기재 그리고 스튜디오와 공개홀 등이 국내 최고의 시설로 바뀌었다. 본관 뒤에는 축구장 크기의 운
동장도 있어 사원들이 틈나는 대로 운동도 즐겼으며 사내체육대회 때마다 이곳 저곳 운동장을 빌려 대회를 치루던 것을 본사의
운동장에서 치루게 되었다.
남산의 비좁은 공간과 따로 떠러져 있던 TV스튜디오 등의 불편했던 점들이 여의도 본관의 한 건물에 다 수용되니 너무나 편리했
고 특히 녹음실이 별도로 5층 RS-17(현재의 교향악단 연습실)의 넓은 공간이어서 좋았다. 하지만 1982년 국립교향악단이 KBS교
향악단으로 다시 이관되어 오면서 그 곳을 연습실로 사용하게 되자 음악전용 녹음실이 그 옆의 RS-16(현재의 폴리 사운드)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공간이 넓은 녹화 스튜디오와 본관 TV공개홀도 당시에는 시설이나 기자재면에서 국내 최고의 수준이었다. 이 시절에는 지금처럼
쇼 프로를 공개방송 형식으로 제작하는 것이 아니고 음악 한곡 한곡에 의미를 살려서 Scene by Scene 형식으로 녹화를 했기에
공개홀이 아닌 대형 스튜디오에서 대부분의 음악프로 녹화가 이루어졌다. 신관 TV공개홀과 라디오공개홀은 1991년 말경 완공하
여 사용하게 된다.
<KBS경음악단 연주곡 독집음반 제작(1978)>
1978년에는 방송공사 창립5주년기념으로 경음악단을 비롯, 어린이합창단, KBS합창단,국립교향악단(전 KBS교향악단) 등이 참
여하여 “건전가요모음“이란 타이틀로 제6집까지를 제작하였고 우리 전속경음악단의 연주곡 독집도 이때 처음으로 오아시스레코
드사에서 음반으로 만들어졌다.(지휘 김강섭 / 편곡 김강섭,서봉석)
<악단 전용 연습실과 악단실 입주(1991)>
남산 시절인 1976년 이전에는 악단실이 존재하지도 않았고 방송이 있을 때, 본관 라디오공개홀 무대 뒷편 출연자 대기실(협소한)
에서 큰 악기만 벽장에 넣어 두는 정도였고 대기실 통로 또는 방청석 의자에서 대기하는 식으로 지내다가 1976년에 여의도 본관
으로 옮기면서 5층 RS-17(현재의 심포니홀)을 녹음실 겸 연습실로 쓰고 그 뒤쪽의 화장실이 딸린 구석방(현재 교향악단 지휘자
실)을 악단실로 쓰게 되었다.
1982년에는 국립교향악단으로 이관되었던 교향악단이 다시 KBS로 오면서 이 두가지를 모두 교향악단에 넘겨주고 악단실은 지
하1층 지하차고 옆의 사무실로 옮겨 갔다. 1984년에는 방송통합 이전의 KBS악단과 TBC-TV악단이 TV관현악단으로 통합되면서
과거 TBC-TV악단이 쓰던 별관3층 사무실로 옮겨 갔다. 이 사무실은 현재의 악단실로 옮기기 전까지 사무실로 사용했고 악단연
습실은 별도로 없이 주로 녹음실에서 악단연습을 했었다.
1988년 올림픽 주관방송사(IBC)로서 필요한 IBC건물을 짓고 그 후에 현재의 신관 건물을 지을 때, TV공개홀과 라디오공개홀을
지으면서 관현악단,합창단,무용단 등의 연습실도 한 건물에 짓게 되었다. 1991년12월4일에 관현악단은 악단사무실과 넓은 연습
실이 함께 있는 현재의 공간으로, 별관3층 사무실과 별관 TV공개홀 지하대기실을 정리하여 옮기게 된다. KBS에 전속악단이 생
긴지 43년 만에 우리 악단만의 공간이 처음으로 주어진 것이다. 현재의 연습실은 1993년에 시작된 열린음악회의 전용 연습실처
럼 애용되고 이따금 대형 특집프로그램의 음악 연습과 함께 평소에는 악단 합주 및 섹션별 연습과 개인연습 등을 하게 되는 관현
악단의 가장 소중한 공간이다. 개인연습에 필요한 1인용부스도 비치되어 있다.
<악단전용악기 구입>
이전에는 리듬섹션의 주요 품목인 기타와 베이스의 앰프세트와 드럼세트 그리고 키보드와 앰프 등을 개인이 준비했었는데 비용
이 많이 드는 좋은 것을 장만하기 힘들었고 또 지방출장을 자주 가다보니 악기부품들의 고장이 잦으면서 악단 운영에 애로가 많
았었다. 이러한 상황을 공사 이전에는 TV부에서 편법으로 약간씩 지원하기도 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고 공사 이후 부터는 공
사에서 악기 구입예산을 매년 책정해 달라고 꾸준히 건의한 결과 그것이 실현되었다.
공사로 전환되면서 KBS도 민영방송처럼 쇼 프로그램을 중시하게 되고 악단의 역할도 커졌다. 여의도로 옮겨서는 전속악단 처음
으로 공사에서 단체악기를 구입하게 되었다. 민방에서는 60년대 창사 때부터 단체악기를 사측에서 구입했는데 KBS는 늦게나마
예산이 책정되어 다행이었다.
악기구입 과정에서의 어려움은, 예산 책정 및 집행 과정에 관계되는 부서장들이 공사에서 필요한 일반적인 업무에 대해서는 뛰어
난 분들이지만 평소에 접하지 않던 악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관계로 해당 부서마다 다니면서 구입악기에 대해 설명하고 이해를
시키는 일이었다.
당시 악기 구입에 관한 자문을 담당하던 명문음대 출신의 어느 위원은 전공분야가 다르다 보니 악기의 디테일한 부분까지는 잘
몰라 구입 품목에 있는 팀파니 4개에 대해 “똑같은 악기가 왜 4개씩이나 필요한가” 고 하여 4개의 음정이 다 다르고 크기도 다 다
르다고 하니 “팀파니에 무슨 음정이 있느냐 한 개만 사면 되지” 하며 말씨름을 벌인 적도 있었다고 김강섭 前단장은 저간의 애로
를 회고 한다.
이 이후부터는 매년 악기구입과 악기수리에 관한 예산이 책정되어 편리하게 새로운 악기와 부품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한
가지 문제점은 악기는 100% 외국 제품을 신청하게 되는데 그 모두를 수입하는 절차가 까다로워서 그 악기가 악단에 도착하려면
보통 1년이 넘게 걸리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모델이 수시로 변하는 키보드(신디사이저)와 앰프 등은 사용의 편리성과 악기에
따른 유행의 시기가 지나버리는 경우가 많아 안타까웠다. 당시에 민방의 전속악단에서는 신청 즉시 구입이 가능했기에 우리와 조
직의 구조가 다르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35인조 관현악단으로의 편성 확장과 부단장 김기웅>
1978년에는 비올라와 첼로를 추가했고 브라스와 색스섹션은 완전 빅밴드 편성으로 되는 등 35인조로 국내 방송계에서는 그 당시
처음으로 대편성의 악단으로 편성되었으나 1980년2월에 예산 관계로 다시 30인조로 축소하며 첼로와 비올라를 제외하는 안타까
움을 겪어야했다. 이때부터 악단에 스트링섹션이 많아지면서 종전의 악단 명칭이었던 “전속경음악단”이란 악단명칭이 자연스럽
게 “전속관현악단”으로 바뀌게 된다.
이때의 단원 증원 때에 “비둘기 집”의 작곡가 김기웅은 부단장으로 재직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라디오공개방송 출장시 기타를 연
주하며 리드하는 등 악단에서 근무하다가 악단편성 축소시 퇴단하여 마침 공석 중이던 합창단장으로 자리를 옮겨 잠시 근무하다
KBS를 떠난다.
<방송악단 친선축구대회(1970~1979)>
국내에 민영방송이 많이 생기고 방송사에 전속악단이 6개나 되다 보니 악단장들 간에 방송음악을 하는 전속악단들끼리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을 갖자는데 의견을 같이 하게 되었다. 1970년에는 TBC-라디오의 최창권단장 제의로 방송악단 친선축구대회를 열
기로 하여 같은 해 7월26일 효창경기장에서 제1회 방송악단 친선축구대회를 TBC-Radio악단(단장 최창권) 주최로 6개 방송전속
악단이 가족과 친지들이 응원하는 가운데 축구대회를 개최하여 뜻 깊은 시간을 가졌다.
참가한 6개 방송악단은
KBS (단장 김강섭),
TBC-TV (단장 이봉조),
TBC-Radio (단장 최창권)
MBC-TV (단장 여대영),
MBC-Radio(단장 엄기돈),
DBS-Radio(단장 노명석) 가 참가했다.
이날의 우승은 KBS였었는데 이는 개개인이 축구를 잘 해서가 아니라 축구에 일가견이 있는 드라마 PD와 KBS탤런트 중에 축구
를 잘 하는 친구들이 악단의 축구연습을 지도해 준 덕분이었다.
제2회 부터는 점점 이 대회에 열기가 오르면서 악단들이 축구연습을 얼마나 많이 했던지 웬만한 조기축구회보다 나은 수준이었
고 TBC-라디오(단장 김인배)팀은 대단히 훌륭한 실력의 소유자들이 몇 명 있어서 우승을 여러 번 했었다. 매번 경기 때 마다 단원
들이 가족과 함께 하면서 악단별로 불고기를 구워 먹는 등 점심시간도 풍성했으며 일찌감치 패한 팀은 핑계 김에 소주잔만 비우
는 광경을 연출하여 회를 거듭할수록 흥미를 더했다.
윤번제로 주최를 맡았는데 합창단과 무용단이 있는 KBS와 TBC-TV, MBC-TV악단이 주최할 때에는 젊고 아름다운 합창단과 무
용단이 악단 피켓을 들고 입장식을 도와주고 응원도 하는 등 전체의 분위기가 흥미로웠고 즐거웠다. 입장식 때에 경찰악대가 우
정출연하여 연주를 해 준 적도 있었다.
이 대회는 효창경기장을 시작으로 수유리의 은행연수원운동장과 장충동의 자유센터 운동장 등에서 계속되다가 1980년 제10회
까지 이어졌으나 1980년12월 방송통폐합이 되면서 중단되었다. 이런 것을 보면 1970년대가 방송악단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제5공화국의 언론사 통폐합(1980) 이후
1980년5월 조직된 신군부의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서는 언론 장악의 수단으로 그동안 사회적부조리등 잡음이 많았
던 언론사들의 정화를 이유로 1980년12월1일, 방송인에게는 역사적으로 치욕적인 방송사 통폐합이라는 대사건을 발표한다. 동
아방송(DBS)과 동양방송(TBC)등을 KBS에 통합시키고 문화방송(MBC)의 주식은 KBS가 대주주로서 보유하는 등 신군부가 방
송을 장악하게 된다.
<KBS에 전속악단 4개 단체 존립>
이로 말미암아 KBS는 기존의
Radio+TV (김강섭악단)
동양Radio(김인배악단)
동양TV (이봉조악단)
동아Radio(노명석악단) 등 4개 악단이 KBS로 통합된다.
언론사 통폐합으로 4개의 악단이 모이게 되다보니 악단장이 모두 당대의 유명한 스타 플레이어였고 노명석, 김인배 단장은 과거
KBS에서 활약하던 분들이었다.
<TV관현악단장 이봉조(1980~1987)>
1964년부터 TBC-TV전속경음악단장으로 근무하면서 국내 최고의 테너색소니스트 인기악단장으로 또 많은 히트곡 작곡과 일본,
칠레, 그리스등 국제가요제에 출전, 입상함으로 작곡가로서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다. 안타깝게도 통합 후에 KBS에서 근무하면서
건강이 서서히 나빠지다가 1987년 재직중 순직하게 된다.
통합 초기에는 통합 전의 각 방송사 악단별로 운영되다가 1981년4월부터
제1악단(이봉조단장-별관[前TBC건물]녹화 위주)
제2악단(김강섭단장-본관[KBS건물]녹화 위주)
제3악단(김인배단장-前 동양라디오 위주)
제4악단(노명석단장-前 동아라디오 위주)으로 재편성하여 운영되었고 1982년 6월에는 제1악단과 제2악단을 통합하고
제3악단과 제4악단을 통합하여 2개 악단으로 축소 통합했다.
제4악단의 노명석단장은 이 시점에서 건강과 노령을 이유로 사퇴하게 된다.
[※ 1976년부터 쇼를 주로 녹화하던 본관 TV공개홀의 활용도가 1980년에 새로 지은 TBC-TV공개홀 보다 뒤떨어지게 되다보니
본관에서 녹화하던 “백분쇼”와 TBC의 간판 쇼프로인 “쇼쇼쇼“를 모두 TBC-TV공개홀(KBS별관)에서 녹화하게 되었다.]
축소통합 과정에서 여러명의 단원들이 퇴단하게 된다. 그동안 각 악단에서 오랫동안 동고동락하던 단원들을 자신의 손으로 내보
내야 하는 단장들의 마음은 그 누구보다도 미어지듯 아팠다. 이때에는 두 개의 단체로 나눈 것 뿐이고 통합운영 형식이었다. 그러
다 보니 TV의 경우 프로그램 녹화일자가 중복되는 경우가 많아서 악단을 둘로 나누어야 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1983년4월에는 제1악단 25인조, 제2악단 16인조, 제3악단 19인조 등 3개 악단으로 조정했다. 하지만 이것도 불합리하여 1984년
2월에는 제1,2악단을 통합하여 TV관현악단(44인조-이봉조,김강섭)으로 재편하였고 제3악단을 Radio관현악단(35 인조-김인배,
김인협)으로 재편케 되었으며 이때부터 악단 공식명칭이 TV관현악단, Radio관현악단 으로 불리우게 된다.
TV관현악단은 1987년 김강섭,김용선 체제로 바뀌었다.
전속단체를 관리하는 제작지원부서에서는 방송통합 후 국내 최고의 거물급 악단장 4명을 확보했다는 그 자체는 좋은 일이지만,
특히 KBS의 간판격인 김강섭단장과 TBC-TV가 자랑하는 이봉조단장의 경우 방송사 내외로 대단한 인기와 파워를 자랑하던 악
단장 들이었기에 한 단체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라디오악단의 경우 노명석단장이 노령과 건강을 이유
로 사퇴함으로서 해결되었지만 TV악단의 경우, 당시 이 두 단장의 문제는 사측에서도 처리하기가 대단히 난감한 일이었다. 이 일
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당시 이 업무를 담당하던 지원부장이 “두 분 모두 우리나라의 대중음악계와 방송음악계를 대표하는 거
물급 인사들이시니 어떻게 해야 옳을지 정말로 모르겠다. 나를 다른 데로 보내 줬으면 좋겠다“ 라는 하소연을 당시 악단총무이던
필자에게도 자주 한 것만으로도 짐작이 간다.
1984년 TV관현악단을 재편성하는 과정에서 한 단체에 두 단장이 있을 수 없기에 이에 따른 궁여지책으로 종전에 없던 지휘자 직
책을 두기로 했으나 문제는 누구에게 어떤 직책을 맡기는가였다. 사측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하여 통보할 수도 없고 담당부서에서
는 두 단장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즈음 김강섭단장이 “내가 지휘자를 맡아 음악을 전담하겠으니 이봉조단장은 단체 운영을 위
주로 하는 것으로 하자”고 나섬으로서 골치 아픈 인사문제는 해결되었다. 하지만 악단 내부적으로는 종전 방식대로 운영하는 수
밖에 없었다.
<단원 오디션 제도 1984~>
KBS를 비롯 모든 방송악단은 단원 채용에 있어서 악단에 적합한 연주자를 총무가 인맥을 통해 정보를 얻어 악단장에게 추천하면
악단장이 결정한 후 방송사에 보고하는 형식으로 운영되었었다. 이러던 것이 1984년부터는 악단의 운영에 공정성과 투명성을 기
하고 공식적으로 단원 채용의 폭을 넓혀서 우수한 예능자를 선발하여 전속단체를 수준 높게 육성,운영하기 위해 공사는 전속단체
모두에게 단원 오디션제를 도입하게 된다. 이 오디션제는 신입단원 모집 때는 물론이고 기존의 단원들도 매년 오디션을 해야 한
다는 것이었다.
기존의 단원을 오디션 대상에 올리려니 각 섹션 별로 국내 일류급 주자들이 많아 개인 오디션은 단체 내의 반대 의견이 팽배, 단체
합주로 대신했다. 매년 말 오디션을 통해서 새해 1월에 재계약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해를 거듭할수록 상황이 달라져 각 섹션 별로
합주를 하다가 몇 년 후에는 각 섹션별로 앉은 상태에서 개인별로 연주하는 방법으로 변경되었다.
심사위원으로는 제작지원국장, 예능국장 과 소속 단장이 참여하였고 외부 심사위원으로는 대중음악의 이해가 넓은 김희조 선생
이 참여하기도 했다.
<이봉조 단장 재직 중 별세>
1987년8월31일 이봉조단장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별세하였다. 담배는 무척 많이 피우는 편이었으며 50대에 들어서면서 건강이
별로 좋지 않았고 평소 술을 못하는 편에 속하는 그였지만 개인적으로 압구정동에 “봉”이란 클럽을 운영하다보니 음주의 기회도
잦아지면서 건강이 더 안 좋아진 것 같았다. 음악생활 속에서 대중음악계에 남긴 업적도 많았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도 많았는데
55세의 나이로 너무 일찍 우리의 곁을 떠나는 그를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 했고 애통해 했다.
장례는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에서 5일장으로 치루었으며 대학로의 마로니에공원에서 한국연예협회장으로 영결식을 성대히 치룬
후, 대형 영정사진을 앞세운 찝차 뒤로 운구차량과 조문차량이 뒤따랐으며 그의 정든 방송 출연무대였던 KBS별관(방송통합 직전
TBC에서 새로 지은 방송사옥)에서 노제를 치룬 후 천안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악단에서는 탈상 때까지 매년 김강섭단장과 단원
들이 공원묘지를 참배했었다.
영결식은 한국연예협회장으로 거행키로 하여 이상우 회장과 KBS의 김강섭단장이 공동 장례위원장을 맡았고 김동건 아나운서의
사회로 진행되었으며 KBS빅밴드가 김용선 지휘로 조악을 연주, 고인과의 마지막 정을 나누었다.
<악단 총무 (라디오와 TV)>
1980년12월 방송 통합 당시 각 악단의 총무진은
KBS <서봉석>
TBC-Radio <김인협>
TBC-TV <신정식>
DBS-Radio <이정은>
1984년에는
TV관현악단 <신정식><서봉석> Radio관현악단 <김춘광>이었으며 TV관현악단 신정식총무의 퇴직으로 그 후임에
권혁순(1986)→김대봉(1990)→김권식(1991)→차순철(1991)등으로 이어짐.
1992년 서봉석의 총무직 자퇴로 <서봉석,차순철>에서 차순철 혼자 TV의 살림을 꾸려나가게 되었고
Radio에서는 김춘광 후임으로 오동원(1991)→김완수(1994)로 이어졌다.
※ 20년 이상 악단총무 직책을 수행한 신정식과 서봉석
1980년12월 방송통합 시기를 전후하여 악단총무 직책을 수행한 TBC-TV(단장:이봉조)의 신정식(1965~1986)과 KBS(단장:김강
섭)의 서봉석(1972~1993) 등 두 사람은 KBS악단 사상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단장을 보필하며 악단을 운영해 왔다. 신정식총무는
이봉조단장을 도와 사업가적인 수완으로 악단 안팎의 일들을 두루 잘 처리하여 방송음악인들로부터 “신봉조”라는 닉네임을 들으
며 악단살림을 이끌었다. 한때 자신의 악단을 리드하기도 했고 은퇴 후에는 여행사를 직접 운영하는 등 사업 수완을 발휘했었다.
서봉석총무는 김강섭단장을 도와 정확성과 친화력으로 악단 살림을 꾸려나가는 한편 편곡과 지휘로 방송음악에 참여하였으며,
평소 김강섭단장이 주창했던- 노래 반주 일색인 방송악단을 방송악단 사상 처음으로 콘서트를 겸하는 오케스트라로 탈바꿈 시키
는데 크게 일조하였다. 은퇴 후에는 민영팝스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또 방송편곡자로 활동 중에 있다.
<KBS-TV관현악단의 국내 첫 팝 콘서트 1984년>
우리나라의 방송전속악단은 KBS로 통폐합되기 이전인 70년대에는 6개나 되었지만 어느 악단이든, 가수 반주가 주 임무였고 어
쩌다 한곡 정도 악단연주가 프로그램에 끼는 정도로 악단의 색깔을 표현할 수 없는 시대였다.
방송전속악단이란 곳이 국내의 대중음악 연주계에서 유능한 연주자들만이 모인 단체인데 자신들의 음악성을 표현하는 기회는 거
의 없이 노래 반주만 한다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웠고 서글픈 일이었다.
김강섭단장과 서봉석총무는 이러한 방송의 풍토를 원망만 할 일이 아니라 악단 자체의 힘으로 이 문제를 돌파해서 “연주음악 활
성화운동”을 벌여 보자는데 뜻을 같이 했다. 여기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곧바로 김강섭 단장은 공연 장소를 물색 하고 서봉석 총무
는 콘서트에 적합한 곡목을 선정, 편곡작업에 들어갔다. 공연장소로는 김강섭단장이 평소에 잘 알던 호텔롯데의 상무와 의견이
맞아 소공동 호텔롯데 크리스탈 볼룸에서 매월 두 번째 일요일 오후 2시에 1회만 공연하는 것으로 하고 점심 직후 시간이므로 간
단한 다과를 서비스하는 것으로 결정을 지었다.
콘서트 타이틀은 KBS 차원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악단 자체에서 하는 것이기에 “김강섭 Pops & Jazz Concert" 로 이름 지었다.
악단연습은 간단하지가 않았다. 평소에 악단이 연습하던 장소인 본관, 별관녹음실에 녹음 스케줄이 계속 있는 관계로 장안평에
있는 코스모스악기점의 연습실을 빌려 수일간 콘서트 연습을 했다.
드디어 1984년3월11일 오후 2시. ‘84신입생 환영 Pop & Jazz“ 라는 이름으로 2시간 동안 공연을 했다.
출연은 재즈의 서울재즈퀸텟,(이판근,신관웅,유영수,김수열,강대관) 가수로는 송창식,진보라, 국악의 박동진 명창 등이었으며 콘
서트 사회자로 이름 난 이백천이 사회와 구성을 담당했다.
빈자리 없이 만원을 이룬 이날 관객들은 예상보다 훨씬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왜 이렇게 좋은 콘서트를 이제야 하느냐, 진작
했어야지“하며 좋아했다. 이때까지 국내에서 팝콘서트는 어떤 방송전속악단도 하지 못 했었기에 우리 악단의 공연 시도에 대해
언론에서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각 신문사와 TV에서 김강섭 단장과 인터뷰가 있었고 필자도 KBS-TV 아침생방송프로에서 인터
뷰를 하기도 했다.
첫 공연 이후로 매월 인기가수들이 기꺼이 출연에 응해 줌으로서 콘서트에 활기를 불어 넣어 주었으며 유명 연주자인 길옥윤,이
봉조,노명석,길형원,이생강 등의 훌륭한 솔로 연주가 콘서트의 매력을 한껏 고조시키기도 했다.
재즈팀은 “국내 재즈1 세대” 라는 팀이 형성되기 이전이었기에 당시 국내의 재즈 붐을 일으키기 시작한 “재즈계의 대부“ 이자
KBS관현악단 단원이었던 신관웅이 고정 출연을 했고 미국 유학에서 돌아 온 정성조도 재즈코너에 수차례 출연을 했으며 이때 막
재즈계의 신예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김강섭악단 출신인 테너색소폰의 이정식이 출연, 그리고 일본의 빅밴드“Clear Tones”도
출연했었다.
우리가 콘서트를 계속하며 소문이 좋게 나자 社內에서도 관심을 갖게 되고 이듬해인 1985년10월20일 오후 2시50분부터 4시20
분까지 90분간 쇼프로의 전설적 PD 진필홍 연출로 덕수궁에서 “가을맞이 고궁음악회”를 생방송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드디어
김강섭 단장과 단원들의 노력으로 방송 프로로서 악단 위주의 콘서트가 설 자리가 생긴 것이다. 이 이후에도 수차례 야외에서 방
송을 위한 콘서트를 하게 되었고 지방방송국 초청으로 순회연주를 했으며 방송사 이외의 기관에서도 초청을 받는 등 많은 콘서트
를 하면서 악단의 퀄리티가 업그레이드 되었지만 이러한 콘서트 활동은 1995년 김강섭 단장이 은퇴하면서 중단되었다.
[※ 김강섭 단장의 KBS-TV관현악단이 팝콘서트를 시작 한 이후, 장익환이 리드하는 MBC-TV관현악단은 1984년 가을부터 단원
을 크게 증원 68인조 팝스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정기연주회를 정례화 했으며, 1988년 개인 단체로서 하성호가 이끄는 서울
팝스오케스트라가 창단되면서 민영 팝스오케스트라로서 많은 활동을 하기도 했다.]
[※ 1983년 여름, 서울시향은 미국 보스턴팝스처럼 국내 교향악단 사상 처음으로 팝스콘서트를 시작, 1986년 KBS교향악단, 1990
년 부천시향이 팝스콘서트를 가짐으로서 국내 교향악계에 팝의 붐을 일으키자 기다렸다는 듯이 많은 순수음악 오케스트라들
이 팝스콘서트를 열게 되어 지금은 자연스럽게 모든 오케스트라들의 팝스공연이 정례화 되어졌다.]
<김강섭단장 대한민국문화훈장 서훈기념 일본공연>
1993년10월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수여받게 된다. 1993년10월30일 서울르네상스호텔에서 문화훈장 서훈 축하연을
가졌고 1994년3월25일에는 일본에 있는 지인들의 초청으로 KBS-TV관현악단을 이끌고 東京의 프린스호텔에서 축하공연을 가
졌다. 가수 나훈아는 자신의 히트곡인 “흰 구름 가는 길”을 작곡한 김강섭단장의 훈장 서훈을 축하하는 의미로 일본 공연에 필요
한 악단 전원의 왕복항공권을 선물했다.
<월례조회 관현악단 연주 참여>
공사에서는 매월 초에 본관 TV공개홀에서 직원들이 모인 가운데 월례조회를 가진다. 처음에는 악단 없이 진행되었지만 1986년3
월3일 공사창립 13주년에 별관 TV공개홀에서 김강섭단장 지휘의 TV관현악단이 식전과 식후의 연주 및 의식곡 등의 연주를 했는
데 직원들로부터 대단히 좋은 평이 나왔다.
이 이후부터 악단과 합창단이 월례조회에 항상 참여하여 식전,식후에 사원들과 음악으로 소통하는 좋은 분위기가 창출되어 현재
에 이르고 있다. 처음에는 교향악단과 교대로 하자고 하여 몇 차례 시도하기도 했었으나 계속되지 않았고 처음 한동안은 TV관현
악단만이 참여하였으나 몇 년 후 부터는 라디오관현악단과 교대로 참여하게 되었다.
월례조회 이외에도 명예퇴직제도가 생기면서 많은 사원이 단체로 퇴직하게 되자 공사에서는 그들을 위로 겸 축하하는 차원에서
악단을 출연시켜 분위기를 격조 높고 부드럽게 이끌어 가는 행사를 시작하였고 그 후 부터는 일상의 은퇴자 축하 행사에도 계속
참여하고 있다.
<악단야유회 → 단합대회 →체력단련회>
1975년6월에 kbs버스를 타고 첫 악단야유회를 퇴촌으로 갔었다. 가수들과 예능부서에서 경품도 내 놓고 비용도 지원해서 비교
적 풍요롭게 하루를 자연 속에서 즐기고 오니 답답한 마음이 시원해지는 것 같아서 좋았고 한동안 그날의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모
르고 웃고 떠들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도 계속 매년 장소를 옮겨 가며 야유회를 다녀 왔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회사에서 단합대회의 성격으로 약간의 경비를 단체별로 지원해 주었고 1990년대 중반부터는 체력단련비
라는 명목으로 인원수에 맞게 지원을 받게 되었다. 악단의 사정에 따라 야외로 나가 즐기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회식을 하기도 했
다.
남산방송국 시절엔 KBS에서는 매년 장소를 빌려서 전 직원과 전속단체가 참가하는 체육대회를 치루었는데 1976년 여의도로 옮
기고부터는 본관 뒤편 (KBS홀 자리와 신관 자리)에 있던 큰 운동장에서 악단이 응원연주를 하는 가운데 성대히 치러지기도 했으
나 1980년대에 들어서 그 곳에 건물이 들어서게 되면서부터 각 부서별로 인근의 장소를 택해 체력단련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후부터 서서히 그런 풍조가 없어지게 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관현악단 퇴직금지급 청구소송 – 승소>
정부에서는 1953년부터 모든 직장에서 1년 이상 근무한 근로자에 대하여 퇴직금을 지급하라는 근로기준법 조항이 있었으나 그
당시 중소기업이나 악단에서는 사실상 이러한 사항에 대해 관심을 갖지도 못했었고 1970년대 중반에 들어와서 퇴직금 적용대상
에 대해 사회적인 이슈가 되면서 악단에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공사에서는 1년 단위로 계약하는 전속단체라는 이유로
매년 체결되는 단체계약 때에 퇴직금 관련 조항 조차도 넣을 수가 없었다.
KBS관현악단의 퇴직금 건은 1978년10월에 퇴직한 수석 트럼펫 이창배(TBC-TV악단 입단)의 공사를 대상으로 한 퇴직금지급소
송에서 승소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된다. 그는 1968년부터 KBS경음악단에 근무했으나 공사(1973) 이전의 것은 해당이 안 된다고
결론이 내려 공사 이후부터 누진제를 적용하여 퇴직금을 수령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단체 계약 조항에 퇴직금 문제는
적용이 되지 못했다.
1995년5월에는 라디오와 TV 2개 악단이 하나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단원들이 대거 퇴직하게 되면서 관현악단 퇴직자들이 단체로
소송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앞서 TV관현악단에서 1992년에 퇴직한 유진영(Violin)은 1995년 초에 개인적으로 퇴직금 지급 건으로 노동청에 문의한 결
과 거대한 KBS를 상대로 하려면 소송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그 준비 중, 1995년5월에 퇴직한 라디오관현악단의 김광남
(Guitar)을 만나서 함께 소송에 나선다. 당시 1차적으로 10명이 동참하여 변호사를 선임하고 구의동 소재 동부지원에 1995년9월
에 KBS를 상대로 하는 퇴직금 지급청구 소송을 시작하였다.
얼마 후 유진영은 개인사정으로 쉬고 김광남(단체사무장 격)이 혼자서 담당 변호사와 작업을 같이 해 나갔다. 이때에 라디오관현
악단의 이홍재(A.Sax.)가 합세하여 뒤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소송에 필요한 자료들을 수집할 때 KBS에서는 가능한 한 악단관
련 자료 유출을 막는 작전을 썼고 이에 맞서 김광남은 관련 자료수집에 박차를 가한 결과 필요로 하는 자료를 대부분 수집할 수 있
었다.
동부지원에 소장을 제출했기 때문에 관할구역의 거주자인 최인재(TV관현악단-T.Sax.)를 단체대표(고소인)로 하고 재판을 시작하
였다. 1차로 장기근속자 10명(TV악단: 김용선.김정상,김종택,유진영,정종락,최인재, 라디오악단: 이홍재,김효식,김광남,백종호)
이 단체 소송에 참여했으며 KBS에서는 패할 것을 뻔히 알지만 감사에 대비하여 항소를 계속할 수 밖에 없었다. 1차 소송 10명에
대한 판결은 14개월 후인 1996년11월에 관현악단 승소 후, 담당변호사가 KBS에 퇴직금 지급명령에 의한 강제집행 절차를 밟으
므로 인해 1심에서 퇴직금을 수령케 되었다. 1차 소송팀이 승소하는데 힘입어 전국노래자랑팀과 1995년에 퇴직한 나머지 단원들
도 단체소송을 하게 되었고 1차 소송 중 퇴직금 누진제 적용 부분을 추가로 넣었다. 고법항소심과 대법에서(2,3심) 누진제 적용 소
송분에 대해서만 패하였다. 1차 소송팀의 승소에 힘입어 2차는 6개월 정도(조정)로 기간이 단축되었으며 3차에서는 1995년 이전
퇴직단원들도 동참하게 되어 모두 단기간 내에 승소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 일을 치루는 동안 마음 아팠던 것은 KBS관현악단
이 승소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와 같은 변호사에게 맡긴 MBC관현악단 퇴직금 소송은 악단이 완전 패소했다는 소식이었다.
1차부터 3차까지 3년이나 걸린 소송에서 대법원은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KBS는 관현악단원에게 퇴직금을 지불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KBS에서는 전속단체를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가 아니라는 논리로 접근하였었다.
[판결요지-관현악단원이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에 해당하는가에 대한 판결 –이전,이후 생략, 요점만 이해하기 쉽게 재구성함.]
『KBS와 전속계약을 체결하고 입사한 관현악단원은 자신들의 의사에 따라 독립적으로 연주라는 노무를 제공하여 온 것이 아니라
공사의 구체적인 출연 지시에 따라 방송출연을 한 점, 출·퇴근 등의 복무 및 기타 행정적인 사항에 대하여 공사의 직접적인 지휘·
감독을 받아 온 점, 비록 일정한 근무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고 출·퇴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으며 회사의 승인 하에 다른 출연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회사가 필요로 할 때에는 수시로 그리고 일방적으로 특정의 프로그램 또는 사업에 악단원으로 출연하도록 지
시할 수 있고, 그 경우 악단원으로서는 그 지시에 따라야 할 의무를 부여한 점, 공사로부터 노무 제공의 대가로 매월 일정한 기준
에 의한 기본급과 수당, 상여금 등을 지급 받고 근로소득세를 원천징수 당한 점 등에 비추어 볼 때, 방송공사에 대하여 사용·종속
관계에 있는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본다.』
지금은 관현악단이 KBS노조에 가입되어 모든 복지 관련 사항들이 사측과 협상테이블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지만 당시에는 사막
에서 우물 파는 것 만큼이나 힘든 것이었기에 그 퇴직금지급소송과 관련하여 1979년 처음으로 개인적으로 승소한 이창배, 그 뒤
의 유진영, 김광남의 역할이 너무 크고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특히나 나중에 혼자서 소송에 필요한 자료수집과 변호사와의 공조 및 많은 단원들과의 긴밀한 연락 등 힘든 일을 마다 않고 끝까
지 수고한 김광남에게 우리 모두는 큰 절을 하고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야 할 것이다. 이로 인해 이 이후의 퇴직자는 계약서에 퇴직
금 관련 조항이 명시되어 자연스럽게 퇴직금을 수령하게 되었다.
<김인배 라디오관현악단장 은퇴식>
1995년2월에는 정든 KBS를 떠나는 김인배단장을 위한 환송식이 사측의 주선으로 신관 6층 회의실에서 있었다. 30대 초반에 방
송음악에 큰 뜻을 품고 KBS경음악단장으로 부임하여 2년간 활동하다가 한동안 작곡에 전념했으며 TBC라디오악단장으로 재직
중 1980년 방송통폐합 때 KBS로 다시 오게 되어 15년간을 근무하고 64세에 은퇴를 하게 된 것이다.
젊은 시절 “철의 입술을 가진 사나이” 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방송과 음반을 통해서 다른 연주자에게서는 들을 수 없는 힘찬 비브
라토의 트럼펫 소리를 선사하던 그가 KBS를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단원들의 마음이 한 없이 착잡하기만 한 것 같다.
<악단 은퇴자 홍덕표와 서봉석의 환송연>
1992년 국내 트롬본의 독보적인 기능의 보유자로서 트롬본의 전설인 홍덕표수석이 퇴단하게 되자 악단에서 처음으로 환송잔치
를 열었다. 관현악단 연습실에서 식탁을 세팅하고 도시락을 주문하여 그럴듯한 환송연을 가졌다.
홍덕표수석은 퇴단 후 국내 제1세대 재즈맨으로서의 중추 역할을 하다가 2007년 별세하게 된다. 그의 트롬본을 다루는 솜씨와 트
롬본 쇼는 지금도 흉내 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탁월했다.
2001년12월에는 다음해 1월에 퇴단하게 될 트롬본 주자이며 악단총무를 23년간 담당했고 편곡자로도 활동했으며 33년이란 악
단 최장기 근속자인 서봉석이 관현악단 연습실에서 뷔페음식을 주문하여 환송연을 가졌다.
서봉석은 퇴단 후 팝스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또 KBS편곡자로 계속 활동중에 있다.
<방송악단 초유의 명예단장 김강섭>
1995년 은퇴하게 된 김강섭단장은 1964년부터 32년간 KBS에 공헌한 바와 국내외에 한국의 대중음악 발전을 위해 헌신한 공로
가 인정되어 공식 명예단장으로서 유급으로 3년간 대우를 받았으며 아울러 3년간 가요무대 지휘를 전담하였고 그 후에도 가요계
의 산 증인으로서 2005년까지 가요무대 객원지휘를 맡는 등 도합 42년이란 긴 세월을 KBS와 함께 하며 방송계에서 전무후무한
최장기 근속자로서의 대기록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방송사에서 주선하겠다는 은퇴식(2005년)을 고사하여 방송악단 사상 최장기
근무 악단장의 은퇴에 관한 아무런 자료도 없는 것이 아쉽기도 하다.
<전속악단 출연 프로그램(1973 공사창립 ~1995.02)>
-라디오부-
기본녹음, (KBS향연→노래의 성좌→노래의 향연) 명랑초대석, 재치문답,목요일 밤에, 직장오락회(직장순회)
노래고개 세고개, 유쾌한 오락회, 한낮의 휴게실, 위문열차(군방송 제작)
-텔레비전부-
KBS가요제, 토요초대석, KBS노래자랑, 노래의 메아리, 우리들의 새노래,생방송 주택복권추첨, 모이자 노래하자, 새마을잔치(전
국 순회) 내고장 만세. 정다운 노래, 신인탄생, 웃으며 노래하며, 내 마음의 노래 30년,송년큰잔치,
외국인 노래자랑, 새노래 고운노래, 캘린더 품평회,KBS가요대행진,여의도 쳥백전, 우리집 만세, 하나둘셋, 즐거운 인생, 행운의
선물,가요앨범, 월요응접실, 정다운 맞수, 백분쇼, 젊음의 행진, 새시대 쇼출발, 신나는 토요일, 즐거운 날 신나는 날, 근로자가요
제, 가요대상, 행운의 스튜디오, 가요무대, 쇼 특급, TV유치원, 장수만세, 쇼 일요특급, 가요 톱 텐,가족오락관, 유모어 극장, 나이
트쇼, 재미있는 금요일, 즐거운 가족, 모여라 딩동댕, 즐거운 7시, 여러분, 쇼86, 한밤의 희망음악,
스타 데이트, 자니윤 쇼, 청소년창작가요제, 여의도공개홀, 외국인예능경연대회, 둘이서 한마음, 노래에 사랑 싣고, 토요대행진,
노래는 내친구, 열린음악회, 청소년 열린음악회, 홈런 일요일, 대전EXPO공연, 혼자서도 잘해요, 빅쇼,
-해외동포 위문공연-
리비아 근로자 위문공연 (1987.사리르)
재미동포 위문공연(1988.L.A,샌프란시스코,하와이)
재미동포 위문공연(1992.L.A.흑인폭동 피해 동포 위로)
브라질동포 위문공연(1994.상파울루)
재미동포 위문공연 (1994.뉴욕)
* 재일동포위문공연(1980. 일본 전국(동포 밀집도시 순회-정부행사)
* 재미동포위문공연(1980. 미국 전국(동포 밀집도시 순회-정부행사)
-외부 행사-
미스코리아 대회(1965~1985 1989~1992 한국일보 주최)
앤디 윌리엄즈 공연(1981-세종문화회관-한국일보 초청)
한국연극영화상 시상식(한국일보 1976~1985 현재의 백상예술대상)
청룡영화상 시상식(조선일보)
재일동포(조총련) 위문공연(1976~1980)
Kim's Pops 콘서트(롯데호텔 1984~1992)
프레올림픽 쇼(잠실주경기장 1988.05.08.봅 호프, 브룩 쉴즈,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자니윤 등 출연)
올림픽공원 축제공연(全기간)
올림픽 기간 IBM 워커힐 공연(全기간)
신한은행 팝콘서트 3회
제11차 국제도로연맹세계총회서울대회(롯데호텔)
남북고위급회담대표단 환영연 공연(1990-신라호텔)
YWCA초청음악회(팝콘서트)
민자당 전당대회(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1992.05.19.)
대종상 시상식
※ KBS전속악단 출연 역대 인기 프로그램 (1950년대~현재)
-라디오-
“수요일 밤의 향연” (→ KBS향연)
1955년에 새로 생긴 라디오프로로서 TV가 없었던 시절 이 프로의 인기는 대단했다. 가수와 악단연주, 코미디, 국악, 가곡 등 여러
가지 예능이 버라이어티 쇼로 펼쳐지는 이 프로를 통해 많은 가수와 출연자들이 인기 가도를 달리게 되기도 했다.
악단지휘 : 손석우, 김광수, 김인배, 김강섭.
“아마츄어 노래자랑” (→ KBS배 쟁탈 전국노래자랑)
1950년 5월에 노래자랑을 2회 방송하고 6.25전쟁으로 중단 되었다가 1955년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에서 다시 시작되었
으며 이때부터 노래자랑이 기본프로로 편성되었다. 그 인기는 장안의 화제가 될 정도였다고 한다.
사회는 당시 방송계의 스타인 임택근 아나운서.
악단 :노명석(Acc.) 손석우(Gt.) 송민영(Trb)등 스타 악단장이 연주 겸 심사
명동 가톨릭문화관과 태평로의 대한공론사 등을 옮겨 다니며 공개방송을 하다가 1957년12월 공개홀이 구비된 남산 KBS가 문을
열면서 공개방송이 활기를 띠게 된다. 년말이 되면 각 지방 방송국에서 선발된 참가자들이 후라이보이 곽규석의 사회로 서울 시
민회관에서 거행되는 그 해의 톱싱거 경연대회에 출전하게 되는데 우승자 그룹에게는 가수협회에서 가수회원증이 수여되는 등
이 프로의 인기가 대단했다.
1970년대 들어서는 라디오와 TV공동으로 방송을 하게 되었으며 1980년 부터는 TV 공개녹화로 전국을 순회하는 인기프로로 자
리잡게 된다.
악단 리더 : 1970년대 이규식(T.Sax.) → 목원선(Gt.)
-텔레비전-
“백분쇼” (1980~1986)
1980년 이원홍사장 시절 국내 처음으로 방영시간 100분의 쇼프로를 방영하는 “백분쇼”가 시청자들에게 민방쇼를 능가하며 어필
한 KBS의 본격적인 첫 인기 쇼 프로였다. “KBS 쇼의 전설” 로 알려진 명 PD 진필홍의 작품.
100 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트럼펫과 색소폰만 100명이 동원되기도 했다.
악단 지휘 : 김강섭, 이봉조.
“가요무대” (1985~현재)
1985년 박현태사장의 아이디어로 생긴, 중년 이상의 시청자를 대상으로 흘러간 옛 노래 위주로 꾸민 프로그램. 명 PD 조의진이
가요무대의 포맷을 확실하게 자리 잡아 놓았고 당시 교양프로만 주로 다루던 스타 아나운서인 김동건의 예의바르고 공손한 말씨
의 매력에 전 국민이 흠뻑 빠져들게 한 프로이기도 하며 현재도 노년층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받는 시청률 부동의 프로이다.
1987년 리비아 사리르 근로자 위문공연, 1988년 재미동포 위문공연, 미국 LA의 쉬라인 오디토리움을 비롯 샌프란시스코, 오렌지
카운티, 하와이의 공연 때에는, 아메리칸 드림을 펼치려고 미국으로 이민 간 동포들 앞에 그들이 평소 고국에서 보고 듣던 가수와
노래를 접하게 되자 환호와 눈물로 공연장이 들끓었었다. 이러한 대규모의 공연단도 처음이거니와 가요무대의 포맷이 그들이 꿈
속에서도 그리워하던 고국의 모습을 옮겨 놓은 것 같이 느껴져 더욱 더 목이 메였나보다.
그 후로도 미국 뉴욕, 독일, 일본, 브라질 등의 해외동포 위문공연도 이어졌다. 2013년에는 독일 보쿰에서 서독파견 광부와 간호
사의 파독 50주년과 한독수교100주년을 기념하는 동포 위문공연에서도, 그곳에 파견되었다가 정착한 동포들이 너무나 절실하게
고국을 그리워하며 그들이 젊은 시절 즐겨 부르던 노래를 들으며 눈물짓는 모습을 볼 때 조국을 떠난 그들의 고향 그리움이 생생
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2016년6월에는 1994년 브라질 상파울루 동포위문공연에 이어 22년 만에 2016브라질 리우올림픽기념공연으로 동포들을 위문하
여 리우올림픽기간에 맞춰 8월15일과 22일 2회에 걸쳐 방영했다.
악단 지휘 : 김강섭, 이봉조 → 정성조 → 김대우.
“열린음악회” (1993~현재)
1993년 홍두표사장 지시로 모든 세대가 다 즐길 수 있는 수준 높은 음악프로를 만들자는 취지 위에 시작된 장수 음악프로.
이전의 쇼 프로는 대부분 대중음악 위주였지만 클래식 코너를 가미하고 또 신중하게 음악을 선곡하면서 1,000회를 넘기는 기록
을 세웠다. 이 프로를 통해 클래식음악과 거리감을 느꼈던 대중들에게서 성악가들이 많은 사랑을 받게 되기도 했으며 지금도 팝
과 클래식을 좋아하는 많은 시청자들의 사랑을 꾸준히 받고 있다.
관현악단도 순수음악과 대중음악을 아울러 연주하면서 악단의 수준을 높이 평가 받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겠다.
처음에는 KBS홀에서만 공개녹화 하다가 가을에 야외공개방송을 처음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의자가 수천개 준비되어 있는데 놀
랐다. 그 이전에는 그냥 땅바닥에 앉아서 보거나 서서 보았는데........
또 한번은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녹화를 하는데 낮부터 비가 내렸다. 그런데 주최측에서 모든 관객들에게 비닐로 만든 일회용 비
옷을 나누어 주고 예정대로 진행하는 것을 보았다. 이런 것들이 지금은 모든 공연장소에서 당연히 행해지고 있는 일이지만 20여
년 전에는 처음 보는 일들이라 적잖이 놀란 적이 있다.
해외동포 위문공연은
오스트리아 빈(1996)
일본 도꾜(2002)
미국 하와이(2003)
러시아 모스크바(2004)
북한 금강산(2005)
중국 심양(2010)
미국 뉴욕(2011) 등지로 수준 높은 대형 음악회를 공연했다.
악단 지휘 : 김강섭 → 정성조 → 김대우 (클래식 객원 지휘 : 최선용 → 이경구)
“빅 쇼” (1994년~1998년)
1998년1월에 끝낸 3년 정도의 길지 않은 프로였지만 스타 1명을 위주로 완전 라스베가스 쇼처럼 화려하게 꾸며지며 매주 1명씩 소개되는 개인 리사이틀 형식의 쇼프로였다.
악단 지휘 : 김강섭 → 김용선 → 정성조
“KBS전국노래자랑” (1981~현재)
이 프로그램의 모체인 50년대 라디오 시절의 노래자랑은 방송스튜디오 위주의 공개녹화 방식이었고 이따금씩 외부에서도 공개녹화를 했지만 1980년11월부터는 “KBS전국노래자랑“ 이라는 명칭으로 본사의 제작팀과 출연팀이 직접 전국을 순회하며 야외 위주로 공개녹화하는 형태로 전환하면서 더욱 인기 있는 프로가 되었다.
TV프로이지만 라디오관현악단에 출연 배정이 되어 노래자랑 전담팀이 구성되었다. 사회자 중 단일 프로 최장수 출연 기록의 원로 코미디언 송해의 사회 솜씨가 일품인데다가 전에 없던 최고령 방송인이어서 더욱더 많은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악단 리더 : 김인협(Keyboard)
[※ 노래자랑 전담 악단은 1995년 라디오관현악단에서 퇴단 후 “노래자랑 전속악단”으로 재편성하여 운영되고 있다.
악단장 : 김인협(Acc.) → 신재동(E.bs)]
“모이자 노래하자” (1973~1986)
방송공사 창립과 더불어 어린이 프로를 쇼처럼 신나게 어른과 어린이가 함께 즐길 수 있도록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개발된 어린이
쇼프로다. 이전에는 교양국에서 담당하던 어린이 프로를 쇼의 간판 PD인 진필홍 연출로 시작되었다. 악단도 이전에는 소편성의
실내악 편성의 악단으로 클래식 풍으로 연주했으나 이 프로에는 경음악단을 투입하여 대중음악을 좋아하는 어린이들의 취향에
맞게 제작했던 성공한 어린이 쇼프로였다.
악단 지휘 : 김강섭 → 서봉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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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도약 및 비상기(飛上期-1995~현재)
KBS관현악단장 정성조
1995년3월에는 새로운 악단장으로 미국 유학파 재즈맨 정성조가 부임한다. 그가 단장으로 부임하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두
개의 악단을 단일화하는 작업이었다. Radio의 악단 출연 프로그램의 감소로 인해 Radio와 TV관현악단을 통합하여 단일 악단으
로 새로 구성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라디오관현악단과 TV관현악단의 편성이 비슷하다 보니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같
은 종류의 악기群에서는 중복 인원이 나오게 되어 부득이 구조조정을 해야 했고 4월16일 이교숙(前 이대교수)외래 심사위원과 정
성조단장이 단원들의 실기 심사를 통해서 단원 평가에 대한 기초적인 자료를 만들게 되었다.
Radio관현악단 단원의 일부는 새로이 구성된 “KBS전국노래자랑” (단장: 김인협)의 프로그램 전속악단으로 옮기게 되고 TV관현
악단의 일부는 신임단장과 나이 차이가 많은 선배단원들이 오디션에 응하지 않았던 관계로 비교적 순조롭게 구조조정이 되었다.
곧 이어 부족한 악기群을 증원, 바이올린을 12명으로 늘리고 그간 없었던 비올라 6명, 라틴타악기와 리듬섹션의 주자를 영입하는
등 새로운 분위기의 관현악단을 구성하게 되었다.
이때에도 악단 편성은 프로그램 중복 출연 시 2팀으로 나눌 수 있도록 부분 복수편성을 했고 열린음악회에서만 필요로 하는 프랜
치혼과 바순 및 오보에 등의 부족 인원은 2관 편성에 맞춰서 객원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이때(1995)의 악단은 단일팀으로는 전속
악단 사상 가장 많은 63인조로서 이때부터 악단의 공식 명칭이 라디오 혹은 TV 를 붙이지 않는
KBS관현악단이라고 칭하게 된다.
[ ※정성조단장은 KBS관현악단장 사임 후에는 부임 전 근무처인 서울예술대학 실용음악과 교수로 다시 자리를 옮겨 후학을 양성
하다가 2011년 정년퇴임했으며 그 후에도 재즈 연주활동을 하다가 서울종합예술학교 학과장으로 재직 중 근육암으로 2015년
별세하게 된다.]
<객원 지휘자 최선용, 이경구 (1996~2011)>
199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있었던 열린음악회 공연때 독일 지휘자를 클래식 담당 지휘자로 세운 이후부터 클래식 전문 지휘자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곧 이어 고정 객원지휘자로 뮤지컬,오페라 지휘자로 이름난 최선용, 1997년부터 2011년까지 세밀한 조련사
역할을 한 인천시향 부지휘자인 이경구가 담당했었다. 이들이 지휘를 맡으면서 단원들은 대중음악 사운드와 클래식 사운드를 병
행 창출하는 좋은 경험을 하게 되었고 어떤 음악이든 모두 무난하게 연주할 수 있는 만능 관현악단으로 성장하는데 큰 도움이 되
었다고 하겠다.
<KBS 재즈 빅밴드>
고교시절부터 재즈의 천재라고 불리워졌던 정성조 단장은 KBS에 재직 중에도 재즈만을 고집했고 재즈만을 사랑했고 단원들도
재즈를 좋아하기를 바랐다. 그는 관현악단 내에서 빅밴드를 구성하여 옛 가요와 오리지널 재즈넘버를 그의 편곡으로 강도 높게
연습을 시켰고 KBS홀에서 “빅밴드 재즈콘서트” 를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지방공연과 클럽 순회연주 등 단원들에게 재즈에 관한
한 많은 경험의 기회를 제공했다.
관현악단 전원이 연주하는 재즈오케스트라 음반도 제작했고 또 빅밴드만의 음반을 제작하는 등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세계에 한
걸음씩 다가가기 위해 많은 애를 썼으며 2001년에는 희망자에 한해 재즈이론을 강의하며 단원들이 재즈를 접할 수 있도록 노력
을 아끼지 않았다. 단원들은 평소에 많이 접하는 가요나 팝, 클래식에서 다루어지지 않는 재즈 특유의 음계와 주법등을 연습하면
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난해한 Chord Scale 혹은 Tension 에 익숙해지면서 방송음악에서 필요한 어떤 장르의 음악이던 간에
용이하게 연주 할수 있는 밑거름이 된 것이 큰 수확이었다고 생각된다.
[※ 정성조 단장은 재즈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방송음악 편곡도 재즈의 수준에서 여러 번 시도했지만 가수들 중 몇 사람을 제외하
고는 대부분 불편해 했고 연출자들도 고개를 저었다. 음악프로에서도 연주곡을 한 프로에 한 곡이라도 넣자고 하여 시도했었
으나 이 또한 이지리스닝 계열의 음악에 익숙해 있는 팬들이나 연출자들에게는 거리가 먼 분위기의 연주곡들이었기에 성공하
지 못 했다. 요즘 실용음악이라고 일컬어지는 재즈를 기초로 만들어진 대중음악을 들으면서 자란 지금의 청소년 세대들이 주
시청자가 되는 시대가 되면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는 음악적 세계를 그가 선구자적으로 조금 일찍 시도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
도 해 보게 된다. 그가 10년간 KBS에 있으면서도 풀지 못한 음악적 고뇌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나 싶다. 방송음악에 관한한,
도가 트인 단원들과의 음악적인 해석에서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머지 않아 그가 추구하던 음악세계가 우리나라도
글로벌시대이니 만큼 틀림없이 올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단원 오디션제 폐지 ~2002>
1995년에 정성조 단장이 부임하면서 라디오와 TV악단을 하나의 악단으로 조정해야 하기때문에 기존의 모든 단원을 오디션 하게
되었다. 대중음악을 가장 잘 이해하는 유명 음악인인 김희조,이교숙 두 분과 정성조단장이 심사를 하여 그 결과로 구조조정을 했
으며 매년 연말에는 기존의 단원을 재심사하여 재계약의 기본자료로 삼았다. 2002년에는 그간 오디션으로 인해 발생된 폐단이
단체의 불만으로 노출되어 관현악단노조에서는 이러한 오디션의 폐단을 들어 사측과 협의, 폐지키로 합의가 되어 그 이후 부터는
오디션이 없는 안정적인 단체가 되었다.
<정성조단장 시절 총무>
1995년부터 <차순철,김완수><차순철,오동원><차순철,이재권><차순철,전문식>이 맡았었고 2004년에는 <최춘호,이계군>이 뒤
를 이었다.
<KBS관현악단 노조 가입>
악단의 계약형식은 종전의 단체계약에서 1995년부터 개인계약으로 변경되었으며 그동안 호봉에 기초를 두고 조정되던 월 급여
를 년봉제로 변환하면서 호봉을 무시, 단원등급을 5등급으로 하다 보니 등급 간의 급여격차가 심하게 되었다. 단원들의 급여와 복
지에 관한 불만이 팽배했던 2000년에는 젊은 단원들이 주축이 되어 기존의 예술단 노조와 함께 한국노총 산하의 KBS 전문직 단
체노조에 가입하게 된다. (악단 측 부위원장 이영우)
전속단체의 노조가입을 저지하려는 사측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본사 정문과 사장의 주거지역에서 전속단체 전체가 시위를 하는
등, 결국 사측과 악단노조 대표가 협상 테이블에 앉음으로서 방송악단 사상 처음으로 본격적인 노조활동이 시작된다.
2005년에는 3개 전속단체의 기능과 요구사항이 다른 것에서 비롯된 많은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한 수단으로 관현악단만 별도로
방송언론인노조(위원장 이재권-2008)로옮겼으며 2011년에는 종전의 방송언론인노조에서 탈퇴하고 KBS노조(관현악단지부장
이재권-2013 김유강 2015-정광철)에 가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동안 악단의 봉급 인상문제와 그 외의 복지 문제 등 많은 어려운 일들을 노조에서 처리하게 되어 단원 복지향상 처우에 물꼬를
트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복지와 급여에서 직원들과의 격차가 심해 그것을 조금이라도 줄여 보려고 노조 운영위원들은 지금도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있다.
※ 관현악단 출연 프로그램 (1995~2005)
-라디오본부-
한낮의 휴게실. 라디오 쇼. 스튜디오 891
-TV본부-
가요무대, 열린음악회, 빅쇼, 도전! 주부가요열창, 사랑의 리퀘스트, 혼자서도 잘 해요, 열려라 동요세상, 누가누가 잘하나, 장애인
가요제, 근로자가요제.
-해외동포 위문공연-
1996. 오스트리아 빈 열린음악회
2002. 일본 동경 열린음악회
2003. 미국 하와이 열린음악회
2004. 러시아 모스크바 열린음악회
KBS관현악단장 김대우(2005~2019)
2005년3월에는 정성조 단장의 갑작스런 자진사퇴로 인하여 방송계에서 처음으로 악단장 선출을 위한 TV자막광고와 인터넷 공
모가 있었고 지휘 오디션을 통해 유럽 유학파 색소포니스트 김대우를 단장으로 영입하게 (2005년 6월) 되었다.
그는 원래 대학에서 바순을 전공했으나 네델란드로 유학, 클래식색소폰을 수학하고 또 지휘 석사과정을 마쳤으며 귀국 후에는 국
내에서 처음으로 클래식색소폰의 활성화운동을 벌여 많은 후학들을 양성했던 색소포니스트이다.
그는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로 방송음악 편곡과 잠시 대중음악을 접했던 경험이 방송악단을 지휘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며 유학
길에 오르기 전, 윈드오케스트라의 지휘 경험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특히 작곡가이며 KBS-라디오관현악단장을 역임하신 부친
(김인배 단장)의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대중음악을 어릴 때부터 들어 왔었기에 클래식을 전공한 그에게 대중음악이 낯설지만은
않은 것들도 또한 큰 도움이 되었다 하겠다.
클래식을 전공한 만큼 대중음악과의 사이에서 번뇌도 있었지만 대중음악을 고급화하여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열린음악회에서 1996년부터 객원지휘자가 지휘하던 클래식 코너를 2011년 부터는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지휘를 모
두 맡게 되었다.
<KBS교향악단 단원의 합류>
2014년에는 KBS교향악단이 재단법인체로 바뀌는 과정에서 발생된 구조조정 관계로 2015년 4월과 7월 두 차례에 걸쳐서 과거
교향악단 단원 중 14명이 관현악단으로 발령 받아 근무하게 되었다.
(바이올린 3, 비올라 2, 첼로 2, 더블베이스 1, 바순 2, 호른 2, 타악기 1, 악기관리 1)
<김대우 단장 시절 총무>
2005년 <김희현,이기영> <김희현,이계군>
2007년 <이계군,이영우> <이계군,유경혜> <이계군,전문식>
2009년 <김유강,박상욱>
2011년 <남영국,반동수>
2013년 <이계군,반동수>
2014년 <X X X,반동수>
※ 관현악단 출연 프로그램 (2005~2016 현재)
-TV 본부-
가요무대, 열린음악회, 누가누가 잘하나, 장애인 가요제, 근로자가요제.
<해외동포 위문공연(녹화 방송)>
2005. 금강산 (북한) 열린음악회
2010. 중국 심양 열린음악회
2011. 미국 뉴저지 열린음악회
2013. 독일 보쿰 가요무대
2016. 브라질 상파울루 가요무대
<음악 연습 및 녹화>
관현악단은 열린음악회와 가요무대 및 대형특집프로그램의 경우 녹화 또는 생방송 전에 연습일정을 별도로 택해서 음악연습을 하게 된다. 보통 3시간 정도가 소요되지만 그 이상의 연습시간이 필요할 경우도 가끔 있게 된다. 연주회 중심의
오케스트라와 달리 방송악단은 모두가 매회 처음 대하는 악보를 初見연주로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단원들의 독보력은 대단한 수준에 있다고 하겠다. 독보력이 약하면 불필요한 연습을 자꾸 반복해야 하기 때문에 신입단원의 오디션 때에도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독보력이다.
지방 출장도 자주 있으며 비가 와도 공연이 진행되기 때문에 이런 경우 어려움이 많이 따른다. 지방 출장 후 곧 이어 방송 계획이 있으면 잠시의 휴식도 없이 곧 바로 상경하여 방송출연에 임하여야 하기에 이 또한 어려움 중의 하나다.
음악연습을 마치면 해당 프로그램의 녹화 때에 현장(스튜디오 또는 지역의 가설무대나 정규 공연장)에서 음악리허설을 다시 하게
되고 그 후에는 잠시 휴식을 가진 후 카메라리허설을 실제 공연처럼 하게 된다. 그런 후에 대부분 저녁식사 후인 오후 7시경에는
관객들 앞에서 본 공연을 하게 되고 이 공연이 녹화되어 연출진의 세밀한 편집을 거쳐 시청자에게 전달이 되는 것이다. 음악이 위
주인 쇼 프로그램에서 가수의 그늘에 가려 겉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관현악단원의 음악적인
능력과 그들의 자존심은 그들이 걸어 온 길 만큼 대단하다. 누구든지 그것을 인정해야 하고 그래야 그들에게서 좋은 사운드의 음
악이 창출되는 것이다.
<KBS관현악단 단원 (64명) - ~ 2016.07.까지>
단장 김대우
총무 반동수
Violin 하정원 김유정 윤희영 송숙경 유경혜 김나연 조연아 한지연 박종홍 양 현 신유미 양희성 김숙희 이광일
문경아 홍종연 이해성 이 윤
Viola 김현서 박위숙 장은아 정혜윤 김주영 장정운 김정신
Cello 김미경 오경희 김선영 박미령 신숙희 최원선 이화준 김희경
D.Bass 김정아 박정호
Oboe 전문식
Bassoon 강새봄 이상돈 김상기
A.Sax. 신광식 박상욱
French Horn 김만식 김지환
Trumpet 이재권 이계군 구본기 이영우 정광진
Trombone 김경범 이기영 김유강 유동완
Piano 오동한
Keyboard 김종호
Guitar 이병윤
E.Bass 남영국
Set Drum 정광철
Percussion 정 훈
Timpani 윤창덕
Staff 지충환 박시연
내용을 이동중입니다. 내용이 길어서 시간이 걸리겠사오니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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