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옥에서 돌아온 벼락쟁이
오악 중 남악에 해당하는 형산(衡山). 그 형산에서도 깊고 깊은 곳. 온통 울창한 나무와 풀로 가득한 가운데 하늘을 뚫을 듯 솟아 있는 절벽이 있었다.
우르르르르!
어느 순간부터인가 마치 지진이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절벽이 흔들렸다.
은은한 우레 소리와 함께 한참이나 흔들리던 절벽은 결국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콰과과광!
사방이 돌가루로 뒤덮였고, 울창한 나무들이 부서진 바위에 맞아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
이내 돌가루가 가라앉고 다시 나타난 광경은 실로 놀라웠다. 절벽은 앞부분만 무너져 내렸고 뒷부분은 멀쩡하게 서 있었다.
마치 원래 있던 절벽을 누군가 잘라낸 듯한 모습이었다. 그만큼 절벽의 단면이 매끄러웠다.
그리고 그 절벽에는 커다란 동혈이 뚫려 있었다.
휘이이이!
동혈에서 한 줄 바람이 흘러나왔다. 그 바람은 절벽 주변을 한 번 훑은 후 사라졌다. 그리고 바람이 사라짐과 동시에 동혈 입구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얇은 가죽으로 만든 듯한 흑의(黑衣)를 입은 사내였다.
허리춤에는 역시 낡아 보이는 검을 매달고 있었는데, 검집조차 없는 맨검이었다. 다만 검에서 흘러나오는 예기만큼은 심상치 않았다.
"결국 나왔나......"
사내는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이 사내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얼마 만에 보는 건지......"
사내는 움직이지도 않고 그러헤 한참 동안을 서서 하늘을 쳐다봤다. 한 시진이 넘는 시간을 그렇게 하늘만 쳐다보던 사내가 다시 고개를 내렸다.
"혼란스럽군."
사내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몇 걸음 걸어갔다. 일단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들을 다시 기억해내야만 했다.
사내는 최대한 평평한 땅을 찾아 걸음을 멈춘 후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자연스레 서서 눈을 감는 것, 이것은 그동안 사내가 취할 수 있었던 가장 편한 자세였다. 그리고 모든 것의 시작이기도 했다.
사내는 눈을 감은 채 기억 깊은 곳으로 스며들어갔다.
처음은 아무리 애써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열 살 무렵인 듯했다. 처음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은.
"난 천기자라고 한단다. 지금부터 너희들은 내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자신을 천기자라고 밝힌 노인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눈앞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백 명의 아이들을 둘러봤다.
사내 역시 아이가 되어 그곳에 서 있었다.
"지금은 아무리 얘기해 봐야 이해할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겠지만 너희들은 십 년 후에 천하를 구해야 하는 사명을 띠고 있단다."
사내는 분명히 당시에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더 이상 먼 과거가 기억나지 않는 걸로 봐서는 어쩌면 고아였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오늘은 푹 쉬도록 해라."
말을 마친 천기자가 사라졌고, 아이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몸을 뉘었다. 동굴 안은 상당히 넓었다. 몇몇 아이들이 도망가려는 시도를 했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동굴 입구에는 인자한 표정의 천기자가 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하는 수 없이 억지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하지만 그날이 아이들이 탈출할 기회가 남아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다음 날 동굴 입구가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동굴 입구는 바위절벽으로 막았다. 혹시라도 누가 침입해 오면 큰일 아니냐. 허허허헛."
너무도 대단한 일을 별것 아니라는 듯 말하는 천기자 앞에 아이들은 모두 쥐죽은 듯 조용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무공수련이라는 이름이 붙은 고행이 시작되었다.
먹고 자는 것에서 시작해서 모든 것이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아이들이 스스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천기자에게 배운 무공은 숨쉬는 법, 칼 쓰는 법, 그리고 몸을 움직이는 법이었다.
처음에는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았지만 그 무공을 대충이라도 흉내 낼 수 있는 경지에 오르자 알아서 알려 주었다.
숨 쉬는 법의 이름은 삼재기공(三才奇功), 칼 쓰는 법의 이름은 삼재검법(三才劍法), 그리고 몸을 움직이는 법의 이름은 삼재보(三才步)였다.
어쨌든, 그렇게 무공을 익히는데 보낸 시간이 대충 삼년쯤 된 듯했다.
무공은 생각보다 간단치 않아서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죽어라 수련을 했는데도 크게 진전이 없었다. 그것은 대부분의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천기자는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도 흡족해했다.
그렇게 삼 년째 되는 날, 천기자는 백 명의 아이들을 한 곳에 불러 모아 작은 단약을 하나씩 나눠 주었다.
"자, 너희들의 무공을 도와줄 약이다. 어서 먹도록 해라."
아이들은 별 의심 없이 그 약을 삼켰다. 그것은 사내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이 모두 약을 먹은 것을 확인한 천기자가 빙긋 웃으며 말을 시작했다.
"오늘이 딱 삼 년째 되는 날이다. 그리고 너희들의 무공도 어느 정도 완성이 되었다. 이제는 그것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만 남았구나. 내가 가르쳐 준 그 무공은 정말로 훌륭한 것이다. 제대로만 익히면 그야말로 무신(武神)이 될 수도 있는 그런 무공이다."
천기자는 아이들을 죽 훑어봤다. 아이들은 그동안 꽉 자인 틀에서만 살아서 자유로움이 전혀 없었다. 어찌 보면 인형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제 남은 칠 년 동안 너희들은 각자 무공을 완성해야 한다. 그리고 그 후, 세상에 나서서 천하의 겁난을 해결해야만 한단다."
천기자는 그렇게 말한 후 아이들을 어딘가로 데리고 갔다. 동굴의 더욱 깊숙한 부분인데, 그곳에는 기이하게 생긴 문이 있었다.
"이제부터 모두 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그곳에서 무공을 수련해라. 자유롭게."
천기자의 말에 아이들은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은 안개로 꽉 차 있었다. 한치 앞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도 아이들은 끊임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모든 아이들이 안으로 들어가자 천기자는 문을 닫았다.
쿵!
문이 닫히자 천기자가 바닥에 조용히 앉아서 한숨을 쉬었다.
"후우, 모든 안배가 끝났군. 이제 남은 것은 저 아이들을 나중에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이지. 혈마자(血魔子)여, 어쩌자고 그런 일을 벌이려 한단 말인가. 십 년 후 저 아이들이 세상에 나와 자네의 야욕을 산산히 부숴 버릴 걸세."
천기자는 숨을 고른 후 조용히 일어섰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적당한 시기에 저들을 부릴 수 있는 힘을 세상에 흘려야만 했다. 문제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점이었다.
"이제 열흘쯤 남았는가? 저 아이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지 않은가. 천하의 내가 고(蠱)를 이용하게 되다니."
천기자가 아이들에게 먹인 단약은 사실 고였다. 그것도 상당히 특수한 고였다. 천기자가 직접 개발해낸 것으로써 음양고(陰陽蠱)라는 이름을 가졌다.
아이들에게 먹인 고는 음(陰)의 성질을 가진 고였고, 만일 양(陽)의 성질을 가진 고를 흡수한 사람이 있다면 아이들은 그의 명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천기자는 작은 목함을 하나 꺼냈다. 그 안에는 양의 성질을 가진 음양고가 들어 있었다.
"이젠 이것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문제만 해결하면 되겠군."
천기자의 신형이 순식간에 동굴 안에서 사라졌다. 동굴에는 그만이 알 수 있는 비밀통로까지 있었다.
물론 십 년 후 사람들은 그 통로를 통해서 이 안으로 들어와야 할 것이다.
천기자까지 사라진 동굴 안에는 기괴한 모양의 문만이 기이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사내가 눈을 떴다.
"그렇군. 천기자...... 이제 생각이 났다. 우리가 왜 그 지옥에 들어가야 했는지."
사내의 몸에는 서리가 어려 있었다. 사내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기억 속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안개 속에서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저 무공을 수련하는 것뿐.
처음에는 그저 안개인 줄 알았던 것이 사실은 높은 기의 결정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덕분에 그들의 무공 수준은 하루가 멀다 하고 높아져 갔다.
그렇게 수련에 매진하던 어느 날 이변이 일어났다.
그것은 천기자조차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천기자가 아이들을 몰아놓은 곳은 각종 진법으로 주변의 기운을 밀집시켜 놓은 장소였다.
형산의 기운을 비롯해서 세상에 퍼진 기운을 한 곳으로 몰아넣었으니 당연히 안에는 높은 밀도의 기(氣)가 차 있었고, 그곳에서 무공을 수련하면 높은 성취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섬영도 역시 그와 비슷한 방법으로 단숨에 고수를 만들 수 있었으니 이곳에서 수련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갖게 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너무 과해서 문제가 되었다. 아이들이 있는 동공 안의 기가 지나치게 많아졌다.
아이들을 모으기 전부터 세상의 기운을 끌어당겼으니 얼마나 많은 기운이 모였을 것인가. 기의 결정이 안개처럼 보일 정도였으니 뭔가가 틀어져도 하나 이상할 것이 없었다.
천기자는 그것이 적어도 십 년은 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들의 재능이 문제였다.
아이들 몸속에까지 기가 쌓이고 매일 그 기를 강렬하게 분출해대니 동공 내부의 기는 포화상태를 넘어 주변을 왜곡시킬 정도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바닥에 시커먼 구멍이 생겨났다. 그 구멍은 동공 내부에 있던 모든 기운을 깨긋이 잡아먹었다. 더불어, 함께 있던 아이들마저 말끔히 잡아먹었다.
그때부터가 지옥의 시작이었다.
사내가 몸을 부르르 떨며 눈을 떴다. 그곳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해맸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함께 있던 아이들도 요괴들에 먹혀 하나둘 죽어 나갔다.
다행히 그때까지 꽤 대단한 실력을 쌓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대항할 수 있긴 했찌만 그래도 역부족이었다.
그날부터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고, 지독한 생존의 투쟁이었다. 마치 인형 같던 아이들의 천진한 눈에는 독기가 어렸고, 몸의 예기는 깊이 안으로 갈무리되었다.
살아남기 위해 그들이 어쩔 수 없이 익히게 된 것들이었다.
삼재기공과 삼재검법, 그리고 삼재보는 너무나 대단한 무공이었다. 안개 동굴에서 수련할 때보다 훨씬 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 무동들이 아니었다면 아마 사내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함께 있던 아이들은 모두 죽었고, 사내는 세 무공의 끝을 보았다.
"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것일까."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아니, 그동안 헤아릴 틈이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십 년은 훨씬 넘었다는 것이었다.
처음 지옥에 떨어지고 십 년 동안은 아이들 중 누군가가 매일 날짜를 헤아렸다.
그 아이가 죽고 난 후에는 더 이상 헤아리는 사람이 없어 기억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만큼의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지났을 것이다.
사내가 홀로된 후에도 어마어마한 시간이 지났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 이름까지 잊을 정도였으니.....
사내는 다시 기억을 조금씩 되짚어갔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동료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그리고 그들이 그동안 했던 이야기들이 조금씩 떠올랐다. 그들이 자신을 부르던 이름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형우...... 그래, 날 형우라 불렀지."
사내가 다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단형우. 내 이름은 단형우였어."
사내의 눈가와 입가에 미미하게 움직여다. 오랜만에 이름을 되찾아 기분이 좋아졌다.
"일단 그들을 찾아가 봐야겠군."
단형우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혼잣말은 단형우가 혼자 살아남으며 가지게 된 버릇 중 하나였다.
단형우는 속으로 이 버릇을 빨리 없애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몸을 날렸다.
단형우의 몸이 꺼지듯 사라졌다. 마치 원래 그곳에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사라졌다. 바람도 흔적도 남기지 않고.
무림맹(武林盟).
삼백 년 전, 혈교의 발호로 결성된 정파 무림의 구심점이다.
당시 천하제일검이라 칭송받던 구룡신검(九龍神劍) 벽운학을 중심으로 정(正)을 추구하는 모든 무인이 모여들었고, 그들은 자연스러게 맹(盟)을 결성했다.
벽운학은 무림맹 초대 맹주가 되어 혈교를 혈겁을 막아냈다. 혈교의 마지막 공세를 막아내다가 장렬하게 산화하긴 했지만 그의 신념과 정의는 아직까지 무림인들의 입에 회자될 정도로 대단했다.
어쨌든 그 이후로 삼백 년이 흐르는 동안 세상도 사람도 많이 변했다. 무림맹도 당연히 변해 한때는 그 영향력이 아예 없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천하에 두루 힘을 미쳤다.
현 무림맹주 파산검(破山劍) 독고운은 별 볼일 없던 삼류문파인 백검문(百劍門) 출신이었다.
그는 일신의 능력으로 백검문의 영향력을 높였고, 결국 무림맹주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
평화로운 시기의 무림에서 그가 맹주로 추대되기까지 겪고 행한 일은 일반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독고운은 무림맹 장로들을 모았다. 무림맹에는 총 아홉장로가 있었다.
구대문파에서 각각 한 명씩 장로가 되는 것이 관례였다.
덕분에 구대문파 중에서 힘이 있는 문파의 장로와 그렇지 않은 문파의 장도들 간에는 발언권의 차이도 존재했다.
아홉 장로를 모은 독고운은 품에서 종이를 꺼내 서탁 위에 놓았다.
"맹주, 그게 무엇이오?"
장로 중 한 명이 종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그는 화산파 장로 출신의 매화검(梅花劍) 정천이었다.
독고운은 정천의 질문에 잠시 뜸을 들였다. 장로들의 시선이 독고운의 입에 집중되었다.
"장보도요."
독고운의 말에 장로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밑도 끝도 없이 장보도라고 하면 누가 알아듣는단 말인가.
"장보도라니, 무슨 천하제일 무공이라도 나왔소? 아니면 무영신투의 무덤이라도 발견했소?"
정천이 다시 물었다.
독고운은 그런 정천을 보며 슬쩍 미소를 흘렸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천기자의 마지막 무공이 담긴 곳이오."
독고운의 말에 장로들이 일순 숨을 멈췄다. 천기자의 마지막 무공이라는 말은 그만큼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그것이 사실이오?"
"내가 무엇 때문에 장로들을 모아놓고 농담을 한단 말이오. 천기자의 마지막 무공이 담긴 곳을 나타낸 장보도요. 그리고 그곳으로 들어가는 기관도해도 함께 있소. 대충 읽어보니 천기자의 비밀병기도 있다는 것 같았소."
"천기자의 비밀병기!"
한동안 장내가 술렁였다.
아무리 장로들이 나이를 먹고 수양을 쌓았다고 하지만 천기자라는 이름 앞에서는 그들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뭔가 좀 이상하지 않소이까?"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무당파 장로 영호자가 말을 꺼냈다.
"천기자가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을 만들었단 말이오? 그리고 비밀병기라니, 천기자는 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가 없구려. 십 년 전에 천기자는 이미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그동안 숨어서 그런 것을 만들고 있었다는 뜻 아니오? 여기에는 숨겨진 뭔가가 있음이 분명하오."
영호자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독고운은 그 말에 고개를 지었다.
"일단 이 장보도를 모두 돌려보시오."
독고운의 말에 장로들이 떨리는 마음을 진정하고 조심스럽게 장보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한 명 한 명 돌아가면서 장보도를 유심히 살폈다.
"세상을 겁난에서 보호하기 위해 남긴 안배라니 놀라운 일이로군요. 하지만 이것을 곧이곧대로 믿을 이유 또한 없다고 생각하오."
영호자는 여전히 부정적인 의견을 냈다. 그리고 그 말에 다른 장로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천기자의 무공, 그리고 비밀병기라는 말에 혹하긴 했지만 그래도 뭔가가 찜찜했다.
그것은 이 장보도를 만든 사람이 다름 아닌 천기자였기 때문이었다. 천기자는 그만큼 어디로 튈지 알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장로들의 반응에 독고운이 장내를 한 번 슬쩍 둘러봤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럼 이대로 포기하겠다는 말이오?"
"포기가 아니라 일단 조사를 해 봐야 하지 않겠소?"
독고운이 고래를 끄덕였다.
"당연히 조사가 먼저요. 하지만 너무 늦으면 곤란하오. 이 장보도를 가진 곳이 우리 무림맹뿐이 아닐 수도 있소."
독고운의 말은 장내에 충격을 던져 주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오? 그럼 장보도가 또 있다는 듯이오?"
"그건 확실치 않소. 하지만 최근 사도련(邪道聯)과 녹림(綠林)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소. 그들의 정예 무사들이 형산으로 은밀하게 이동 중이라는 정보가 있었소."
"형산?"
"그 장보도가 가리키고 있는 곳이 바로 형산이오."
독고온의 말에 장내에 싸한 기운이 감돌았다. 적들은 벌써 비밀병기를 얻기 위해 움직였는데 무림맹만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는 뜻 아닌가.
"그럼 우리도 가만있을 수는 없지 않소."
정천이 나서서 말하자 영호자가 다시 나섰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천기자의 음모일 수도 있지 않소? 세 힘을 격돌시켜 무림에 혼란을 가져올 목적일 수도 있소이다."
영호자의 말에 장로들이 심각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결론은 쉽게 났다. 사도련과 녹림이 움직이는데 무림맹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장로들은 부디 장보도에 쓰여 있는 대로 천기자가 무림의 안위를 생각해서 남긴 안배이기만을 빌었다.
"비밀병기라니...... 대체......"
장로들은 하나같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그렇게 무림맹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림맹이 위치한 무한에서 형산까지는 무려 천 리에 달한다. 하지만 경공에 능한 고수들이 쉬지 않고 달려간다면 하루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다.
물론 쉴 수가 없으니 당연히 조금은 무리를 해야 했다.
하지만 무림맹은 서둘되 무리하지는 않았다. 그들 역시 은밀하게 움직였다. 최대한 사도련이나 녹림에 움직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연막을 많이 쳤다.
물론 정보를 아예 막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적절하게 조절을 했다.
그것은 무림맹의 군사로 있는 제갈중천의 생각이었다.
제갈세가는 무림맹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문이다.
대대로 무림맹의 군사 역할을 해 왔기 때문이었다. 무림맹 같은 큰 단체의 군사를 하기 위해서는 머리도 좋고 통찰력도 있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정보에 밝아야 한다.
그리고 제갈세가는 그 점을 충분히 인식했다.
정보에 밝다는 얘기는 정보를 이용할 줄 안다는 뜻이고, 이는 정보를 얻는 것뿐 아니라 감추는 데도 능하다는 뜻이다.
현재 무림맹이 사도련이나 다른 단체에 비해 월등히 앞서나가는 이유가 바로 제갈세가의 그런 능력 때문이다.
물론 제갈세가가 이 정도 정보력을 갖추기까지는 독고운의 아낌없는 지원이 배경으로 작용했다.
현재 무림맹에서 출발한 사람들은 장사(長沙)에 있는 취운루에 머물려 형산 근처로 움직이는 사도련과 녹림의 움직임을 조용히 파악했다.
덕분에 취운루는 대호황을 맞이했다.
무림인들이 몰려들어 술과 고기를 동내고 있으니 주인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지금도 취운루의 1층에는 수많은 무림임들이 진을 치고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무림맹에서 동원한 인원을 꽤 많았다. 천기자의 무공을 조사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도련과 녹림을 견제해야 하기 때문에 강력한 무사들을 이끌고 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틈에 조가장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무림맹의 위세가 정말 대단하긴 대단하네요. 그렇죠? 오라버니?"
조설연의 말에 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대단하구나. 설마 맹주님이 직접 움직이시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숙부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사마철은 둘의 말을 들으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하남표국(河南驃局) 국주인 그가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은 조가장주 조일현의 부탁 때문이었다.
조가장주는 자신의 권한으로 이번 형산행에 조인과 조설연을 참가시켰다. 무림맹주의 허락을 구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어찌 되었던 장보도를 무림맹에 아무런 조건 없이 넘겨준 사람이 바로 그였으니까.
하남표국은 조가장의 사업체 중 하나였다.
조일현은 사마철에게 두 아이를 돌봐달라고 부탁했고 사마철은 흔쾌히 허락했다. 조인과 조설연은 사마철에게 있어서도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는 조만간 형산으로 출발할 것 같구나. 사도련 무사들이 근처에 있으니 너희는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알겠느냐?"
사마철의 말에 조설연이 귀여운 표정으로 혀를 삐죽 내밀었다.
"인 오라버니도 충분히 강해요. 그리고 숙부님께서 지켜주실 거잖아요, 헤헷."
조설연의 모습에 사마철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헛. 그 녀석 참, 어쨌든 내 말을 명심하도록 해라. 세상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질 때도 있는 법이다. "
"네. 명심할게요, 숙부님."
조설연은 얌전히 대답하며 빙긋 웃었다. 얼굴도 예쁜 소녀가 미소를 띠자 주루 안이 환해지는 듯했다. 사마철은 그 모습에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떤 행동을 해도 귀여우니 큰일이었다.
"어? 숙부님 저 사람 좀 보세요."
조설연이 작은 목소리로 말하자 사마철과 조인이 그녀의 눈이 향한 곳을 쳐다봤다.
그들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막 취운루에 들어서는 사내가 서 있었다. 사내는 안에 들어서자마자 주변을 둘러보며 빈자리를 찾았다.
금세 점소이가 달려가 마침 비어 있는 자리로 안내했다.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조설연이 눈을 빛냈다.
"겁집도 없이 검을 차고 있어요."
조설연의 말대로 사내의 허리춤에 있는 검이 시린 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검은 상당히 훌륭해 보이는군."
사마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 사내에 대한 호기심은 일지 않았다.
"왜 검집을 안 가지고 다니는 걸까요?"
조설연의 물음에 사마철이 고개를 저었다
"글쎄다."
"검을 뽑는 시간도 아까워서 그런 거겠죠? 나름대로 열심히 궁리를 한 모양이네요."
조설연의 말에 조인이 고개를 저으며 제동을 걸었다.
"그건 그렇지 않다. 검을 뽑는 것도 중요하다. 검집에서 검이 나오는 순간 훨씬 더 빠른 속도와 강한 힘을 얻을 수 있어."
조인의 말에 조설연이 눈을 동그렇게 떴다.
"정말요?"
조인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설연의 표정이 너무나 귀여웠기 때문이었다. 조설연은 조인의 말을 듣고서 놀란 표정으로 사마철을 쳐다봤다.
사마철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다시 고개를 돌려 멀찍이 앉아 있는 사내를 쳐다봤다.
"그럼 돈이 없어서 검집을 못 만든 걸까요?"
조설연의 말에 조인과 사마철은 결국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시간이 지나갔다.
단형우는 구석진 자리에 어색하게 앉아 탁자 위에 놓인 소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얼마 만에 보는 제대로 된 음식인지 알 수 없었다.
그동안 먹었던 것들은 정말로 맛을 무시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그나마도 많이 먹지 않았다. 그리고 나중에는 거의 먹지 않아도 움직이는 데 지장이 없었다.
단형우는 어렵게 젓가락을 움직여 소면을 모아서 입에 넣었다.
사르르.
마치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취운루의 음식 솜씨가 상당하긴 했지만 지금 단형우가 느끼는 정도로 맛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단형우는 그렇게 느꼈다.
그동안 먹던 것들은 질겨서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 씹지도 삼키지도 못할 것들뿐이었다. 그런데 이 소면은 그대로 입에서 녹아 버리는 듯했다. 소면을 먹는 동안 단형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리고 이내 소면 한 그릇을 뚝딱 비워버렸다.
어찌나 맛있게 먹었는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멍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소면을 주문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맛있군."
단형우가 나직히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점소이가 쪼르르 달려왔다.
"맛있게 드셨습니까요? 닷 푼입니다요."
점소이의 말에 단형우가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점소이는 단형우의 반응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단형우의 허리춤에 걸려 있는 날선 검을 쳐다봤다.
단형우는 점소이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돈이었어."
단형우의 눈가가 살짝 흔들렸다. 새로운 단어가 하나 떠올라 기쁜 것이다. 그동안 잊고 살았던 단어였다.
단형우에게는 기쁨을 던져 준 단어였지만 점소이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점소이는 주인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주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취운루에 가든 찬 사람들은 다름 아닌 무림맹의 무사들이었다.
정(正)을 대표한다는 무림맹에서 무위도식하려는 자를 가만둘 리 없었다. 그리고 점소이가 죽게 내버려 둘리 없었다.
점소이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조금 강하게 나갔다.
"손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식사를 하셨으면 돈을 내셔야지요."
점소이의 목소리는 상당히 컸기 때문에 1층에 있는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단형우는 수중에 가진 돈이 하나도 없었다. 없는 것이 당연했다.
"없다."
단형우의 거침없는 대답에 점소이가 고개를 저었다.
"하아, 참으로 당당하시군요. 그럼 그 허리춤에 있는 검이라도 내놓으시죠."
점소이의 말에 단형우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이건 줄 수 없군. 내 마지막 친구의 목숨과 바꾼 검이라서."
단형우의 말에 점소이가 순간 흠칫 했지만 주변 무림인들이 움직일 기미가 보이자 더욱 강력하게 나갔다.
"아니, 그럼 원래부터 공자로 밥을 먹을 속셈이었단 말입니까?"
점소이의 커다란 목소리에 단형우의 눈가가 아주 살짝 일그러졌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주루에 있던 무림맹 무사들 몇몇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소란을 피우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때 꾀꼬리처럼 예쁜 목소리가 주루 안을 울렸다.
"그만 하세요. 고작 닷 푼 가지고 이렇게 무안을 주다니요."
사람들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공에게로 향했다. 그곳에는 조설연이 눈을 살짝 치켜뜨고 서 있었다. 그 모습조차 아름다워 사람들의 표정이 금세 풀어졌다.
"하, 하지만 아가씨. 아무리 적은 돈이라도 저희에게는......"
"됐어요, 그 돈 내가 내죠. 이제 됐죠?"
조설연의 말에 점소이는 금세 한 발 물러났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조설연은 점소이의 손에 돈을 쥐어준 후 단형우를 쳐다봤다.
단형우는 크게 당황했다. 이 상황에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어쨌든 지금까지 겪어본 적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동안은 돈을 쓸 일도 없었을 뿐더러 이렇게 어딘가에 들어와 뭔가를 먹어본 것도 처음이었다. 그러니 이런 상황 역시 당연히 겪어본 적이 없었다.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제는 그냥 나가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단형우는 그냥 취운루에서 나가 버렸다.
"저, 저런......"
사람들의 입에서 어이없다는 듯 분노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조인과 사마철도 마찬가지였다.
"도와줬으면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고 갈 것이지."
"경우가 없는 사람이군."
조설연은 그런 두 사람의 말에도 그저 단형우가 나간 문을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역시 돈이 없었던 거예요, 그렇죠?"
조인은 자신의 철없는 여동생의 말에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너도 참 대단하구나."
"그나저나 그 사람 눈 봤어요?"
"눈?"
조인과 사마철은 의아한 표정으로 조설연을 쳐다봤다. 조설연의 눈이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다.
"대단했어요."
조인과 사마철은 대체 뭐가 그리 대단하다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 사내에게서는 전혀 기세나 예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검을 들고 다니는 무사로서는 완전히 실격이었다.
"게다가 내공도 없는 듯 하던데......"
사마철이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검집이 꼭 필요할 것 같아요."
조설연의 말에 사마철과 조인이 깜짝 놀랐다.
"그게 무슨 말이냐?"
"지금 그 사람 따라가 봐야겠어요. 검집을 사 주고 싶어요."
"네가 왜?"
조인이 결국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너와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경우도 예의도 없는 사람이야. 그런 사람에게는 호의조차 아깝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함부로 움직여선 안 된다는 걸 벌써 잊은 것이냐?"
조인의 단호한 말에 조설연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안 돼요, 오라버니?"
"안 된다."
"나도 인이와 같은 생각이다. 지금 이들과 떨어져 돌아다니는 것은 너무 위험해."
둘의 반대가 너무 심해서 조설연도 결국 뜻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가만 생각해 보면 처음 보는 사람에게 검집을 사준다는 것은 정말로 이상했다.
"할 수 없죠. 두 분의 뜻을 따를게요."
조설연의 표정이 조금 더 시무룩해졌다. 사마철과 조인은 조설연의 표정을 보고서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 역시 조설연이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단형우는 취운루에서 나와 발길 닿는 대로 빠르게 걸었다. 방금 겪었던 그 생소한 경험 때문에 절로 몸이 움직였다.
훨씬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너무 빨리 움직여서 이 도시를 벗어나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이런 평화로운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안락한 기분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었다.
어쨌든 오늘의 경험으로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소녀에게...... 그러니까...... 빚을 졌군."
단형우는 간신히 떠올린 단어로 살짝 기뻐했다. 그리고 자신이 진 빚은 훨씬 전부터 꽤 많았다는 것이 기억났다.
자신과 함께 있던 친구들, 그들의 목숨 빚이 있었다. 그들 덕분에 살아날 때마다 하나씩 늘어난 빚이었다.
"갚아야지. 모조리 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갚아야 할 빚이 있었다. 자신을 그 지옥에 떨어뜨린 장본인 천기자에 대한 빚이었다.
그 역시 목숨 빚이었다. 아흔아홉의 목숨에 대한 빚을 받아내야만 했다.
단형우는 조금씩 걸음을 늦췄다. 그리고 장사 시내를 지루한 줄 모르고 돌아다녔다.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편안한 분위기를 만끽하며.
"그들이 형산으로 가는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제갈중천의 말에 독고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예상했던 바다. 그들과의 충돌도 충분히 예상했다.
결코 두려움이 없었다. 독고운이 이끌고 온 고수들은 사도련과 녹림이 함께 덤벼도 이겨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철저히 대비헀다.
"그럼 우리도 형산으로 가야겠군. 헌데 그들이 과연 이것과 같은 장보도를 가지고 있을까? 천기자가 이렇게 일을 허술하게 처리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군."
"그랬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천기자는 예측이 불가능한 사람입니다. 어쩌면 정말로 무림맹과 사도련, 그리고 녹림을 한데 충돌시키려는 것이 목적일 수 도 있습니다."
독고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오히려 그것은 바라던 바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준비해서 오지 않았습니까?"
제갈중천의 말에 독고운이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렇지. 천기자가 무슨 수를 썼던 전혀 관계가 없지. 오히려 그들을 이용해서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위험을 제거할 수도 있고 말이야."
"그렇습니다."
"그럼 이제 슬슬 출발해야 하나?"
독고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으니 형산 근처까지 간 다음, 적당한 마을에서 머무는 걸로 하지."
"그렇게 알리겠습니다."
제갈중천이 서둘러 밖으로 나갔고, 순식간에 취운루가 비었다.
단형우는 자유와 평화를 만끽하며 걷다가 어느새 다시 취운루 앞으로 돌아왔다. 걸어 다니면서 앞으로의 일에 대한 계획도 대충 세우려 했는데 그렇게 하기에는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
"다시 여긴가."
단형우는 습관적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취운루의 문을 쳐다봤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조설연 역시 그들 틈에 섞여서 나오고 있었다. 당연히 조설연 근처에는 조인과 사마철이 함께 있었다.
무림맹 사람들은 빠르게 이동을 시작했다. 단형우는 그들이 가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그들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저 걷는 것뿐인데도 무림맹 무사들이 신법을 발휘해 나는 듯 이동하는 속도와 큰 차이가 없었다.
단형우는 본능적으로 그들과 멀리 떨어져 걸었다. 무림맹에 있는 누구도 단형두가 쫓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는군."
무림맹 사람들이 가는 곳은 당연히 형산이었다. 하지만 단형우는 여전히 그들을 뒤쫓았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단형우는 해가 지는 모습을 보며 살짝 놀랐다.
"그래, 이것이 바로 밤이로군. 밤......"
이곳에는 밤낮이 존재했다. 지옥에 없던 것 중 하나였다.
하도 오랜 시간을 밤낮없이 회색의 세상에서만 살아오다보니 점점 어두워지고 있는 모습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물론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기억에도 없던 시절에는 분명히 알고 있었겠지만.
밤이 되자 무림맹 사람들은 형산 초입에서 진을 치고 노숙을 준비했다. 사실 별달리 준비할 것도 없었다.
대충 품에 넣어둔 육포조각을 씹어 먹은 후, 적당한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는 것이 다였다. 물론 운기조식을 통해 피로는 풀어 줘야 했다.
단형우는 무림맹 사람들과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상당히 떨어진 곳이었지만 무림맹 사람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 수 있었다. 그는 가만히 서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시간이 계속 흘러 어느새 미명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단형우는 그때까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점점 밝아오는 하늘은 단형우의 마음을 거세게 흔들어댔다.
하늘이 점점 밝아오자 깊숙이 숨어 있던 기억들도 조금씩 올라오려 했다. 단형우는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한순간 단형우의 몸에 서기가 어렸다.
단형우는 다시 눈을 뜨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무림맹 사람들도 하나둘 잠에서 깨어나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림맹 사람들이 막 다시 출발하려고 할 무렵, 단형우는 그들과는 다른 사람들이 근처에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꽤 많군. 그래도 평화로워."
단형우의 신형이 주변에 녹아 들어갔다.
무림맹 무사들이 출발할 준비가 모두 끝날 무렵, 독고운은 인상을 찌푸렸다.
"기분이 좋지 않군."
독고운이 즉시 제갈중천을 불렀다. 제갈중천은 맹주의 부름에 서둘러 달려왔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무래도 기분이 좋지 않네. 사도련과 녹림의 움직임은 완전히 파악한 건가?"
"예, 그렇습니다. 그들은 우리와는 정 반대쪽에서 목표를 향해 다가가고 있습니다."
제갈중천의 말에 독고운이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흐음, 이런 기분이 들 때는 항상 위험했는데......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일단 주변을 한 번 정찰해 보게."
"그럼 출발이 너무 늦어질 텐데요."
제갈중천이 걱정스럽게 독고운이 고개를 저었다.
"늦어봐야 우리가 얼마나 늦겠나. 실수를 하는 것보다는 그게 차라리 나아."
독고운의 말에 제갈중천은 더 이상 토를 달 수가 없었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갈중천은 일단 출발을 늦추고 주변 정찰을 시작했다.
무림맹 무사들 중, 경공에 능하고 기감이 좋은 사람들을 뽑아 주변을 철저히 조사하라 시켰다. 하지만 그들이 얻은 소득은 아무것도 없었다.
제갈중천이 맹주에게 다시 보고를 하자 독고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출발을 명했다.
"그것 참 이상하군. 내 감도 이젠 다 한 것인가."
독고운은 출발하는 무사들을 보며 천천히 뒤를 따랐다. 무림맹 최고 정예라 일컬어지는 청룡단을 모조리 이끌고 왔으니 사실 두려울 것은 없었다.
청룡단의 무사들은 일류를 넘어서는 고수들이었고, 각종 검진에도 능했다.
게다가 청룡단과 함께 승룡단도 이끌고 왔다. 승룡단은 후기지수들의 모임으로 검진에는 미숙해도 개개인이 지닌 능력은 청룡단 무사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청룡단만 해도 일백에 달했고, 승룡단은 오십에 달했다. 무려 백오십의 고수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겠는가.
"게다가 현무단도 있고......"
현무단은 독고운이 제갈중천과 함께 심혈을 기울여 키운 무사단이었다.
주로 잠입과 암습에 능했다. 그렇다고 해서 살수는 아니었고 다만 은밀한 일을 수행할 때 쓰기 위해 만든 무사단이었다.
그 현무단도 지금 조용히 형산 근처에 매복해 있었다. 만일의 사태가 벌어지면 그들까지 나서서 일대를 제압할 것이다.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승산이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독고운은 불길한 생각을 털어 버렸다. 그리고 가볍게 몸을 날렸다. 해가 중천을 넘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해야만 했다.
"맹주님께서는 너무 걱정이 많으셔서 탈이라니까. 안 그런가?"
승룡단의 부단주 중 하나인 팽철영의 말에 남궁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맞네. 감히 누가 우리를 기습하겠는가. 무림맹과 척을 지고도 살아갈 수 있는 곳은 없는데 말일세."
남궁진 역시 승룡단의 부단주였다.
팽철영과 남궁진은 각각 하북 팽가와 섬서 남궁세가의 기대주였다. 지닌바 무공도 대단했고, 외모도 뛰어나 인기도 많았다.
그런 두 사람의 말에 끼어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주인 하원후를 제외하고는.
"맹주니께서도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는 게 좋지 않겠나. 원래 누구나 저쯤 되는 자리에 앉다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은 법일세."
하원후의 말에 남궁진과 팽철영도 더 이상 그것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다. 이중 누구도 말로 하원후를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하원후는 승룡단장답게 머리도 좋았고, 화술도 능수능란했다.
팽철영과 남궁진은 근처에서 함께 움직이고 있는 조설연을 힐끗 쳐다봤다. 조설연 앞에는 조인과 사마철이 철통같이 붙어 있어서 쉽게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조설연이 아직 나이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미모가 예사롭지 않았다.
만일 여기서 조금만 더 나이를 먹어 성숙해지면 따라올 사람이 없을 듯했다. 그것이 그동안 수많은 여인들을 섭렵해 온 두 사람의 결론이었다.
어쨌든 그들은 어떻게든 조설연에게 접근을 시도했다. 덕분에 지금은 이렇게 옆에서 함께 달릴 수 있었다. 다른 승룡단원들 역시 조설연을 호위하듯 진형을 짜고 달렸다.
조설연은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가장 무위가 떨어졌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속도를 따라가기가 사실 조금 버거웠다. 그리고 그것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다.
"조 소저가 힘들어하는 듯 한데 조금 쉬어가는 것이 좋을 듯하오. 내 맹주께 말씀드려 보리다."
남궁진이 말하자 조설연이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세요! 따라갈 수 있어요!"
맹주가 그 말을 들어줄 리도 없을뿐더러 자신 때문에 쉬어야 한다는 말이 맹주 귀에 들어가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조가장의 자존심에 관계된 문제였다.
'아이, 이럴 줄 알았으면 수련을 좀 더 열심히 하는 건데.'
조설연의 생각도 모르고 남궁진과 팽철영은 고집을 꺽지 않았다.
"그 무슨 말씀이오. 이렇게나 힘들어하시는데 내 어찌 사내로서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있겠소."
팽철영은 당장이라도 맹주에게 달려갈 태세였기에 조설연이 기겁을 했다.
"아니에요, 절대 그러지 마세요. 전 정말로 괜찮다니까요."
"그만 두십시오.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결국 조인까지 나섰다. 남궁진과 팽철영은 그제야 물러났다. 사실 그들도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조금이나마 점수를 따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럼 제가 조금 도와드릴까요?"
남궁진이 조설연을 향해 슬쩍 손을 뻗었다. 진기를 나누어 줄 생각이었다. 남궁진 정도 되는 고수라면 이렇게 달리는 와중에도 진기를 나눠 줄 수가 있었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신체에 손을 대야만 했다.
턱!
조인의 손이 남궁진의 팔을 가로막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조인이 눈을 부라리자 남궁진이 머쓱한 표정으로 손을 뺐다.
"그저 진기를 조금 나눠 줄까 했을 뿐입니다. 조 소저를 조금이라도......"
"됐습니다.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그냥 두십시오. 그리고 이제 거의 목적지에 도착한 듯합니다."
조인의 말에 남궁진과 팽철영이 고개글 돌렸다. 그러고 보니 조금씩 전체적인 속도가 줄어들고 있었다.
전체 움직임을 지휘하는 사람은 당연히 제갈중천이었다. 청룡단 무사들이 제갈중천의 손짓에 따라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그제야 살짝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들 역시 이번에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상황인지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들도 칼밥을 먹고 사는 무림인이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변하자 조설연이 조인과 사마철을 이끌고 한쪽 구석으로 피했다. 아무래도 남궁진과 팽철영 근처에 있기가 껄끄러웠다.
그렇게 속도를 완전히 죽인 무림맹 무사들이 울창한 나무와 풀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높다란 절벽이 있는 곳까지 도착했다.
"대단하군."
독고운이 중얼거리자 제갈중천이 심각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주변에는 커다란 바위에 만신창이가 된 나무들이 즐비했다.
대충 정황을 살펴보건대 절벽 일부가 무너지면서 나무들을 덮친 듯했다.
무림맹 무사 몇이 몸을 날려 절벽 근처를 정찰했다.
"이곳에 동굴이 있습니다!"
독고운과 제갈중천은 그 말을 듣자마자 몸을 날려 동굴 앞에 섰다.
"조금 얘기가 다르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절벽까지는 맞지만 동굴이 아니라 절벽 뒤쪽에 있는 비밀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한다고 나와 있는데......"
"잠시만 기다리게."
제갈중천의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독고운이 몸을 돌려 한 곳을 노려봤다.
"아무래도 불청객들이 도착한 것 같군."
독고운이 말하는 의미는 확실했다.
"모두 준비하라!"
채채챙!
제갈중천의 외침에 청룡단 무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순식간에 검을 뽑은 후, 방어에 유리한 검진을 짜며 사방을 노려보았다.
승룡단은 청룡단에 비해 훨씬 느릿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들은 날카로운 안광을 번득이며 언제라도 출수할 준비를 했다.
"그만들 나오시게!"
독고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내공이 가득 담겨 숲을 온통 뒤흔드는 듯했다.
"으하하하! 과연 파산도로군!"
절벽 옆에서 커다란 웃음소리와 함께 한 사내가 나타났다. 얼굴은 전형적인 산적이었고, 등에는 보통 사람 몸통만한 도를 매달고 있었다.
그의 웃음소리를 신호로 나무들 틈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험악한 인상이었으며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한 무기를 들었다.
"녹림인가."
제갈중천의 섬뜩한 눈으로 그들을 훑어봤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녹림도들 사이사이로 또 다른 사람들이 나타났다. 흑의를 입은 사람들이었는데 그 수가 녹림의 산적들만큼이나 많았다.
"사도련까지 합세했군."
제갈중천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리 걱정되지는 않았다. 아무리 그들이 힘을 합한다 하더라도 현무단이 뒤를 치면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었다.
"으하하하핫! 여전히 자신 있는 얼굴이군. 제갈 늙은이!"
절벽에 붙어 있던 사내가 등에 매달린 도를 꺼내들었다.
"설마 우리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응? 제갈 늙은이."
사내의 말에 무림맹 무사들 모두가 놀랐다. 지금만 해도 어려운 싸움이 될 듯 한데 이보다 더 많은 적이 있다면 절대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긴장감이 장내를 한바탕 휩쓸었다.
단형우는 무림맹 사람들이 절벽 근처로 가는 것을 확인한 후 움직임을 멈췄다. 가만 생각해 보니 자신이 왜 이들을 따라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대체 내가 왜 여기까지 온 걸까?"
단형우는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눈을 감으려다가 다시 눈을 떴다.
자신이 있는 곳을 향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의 몸에는 예리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살기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겠지만 단형우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리 미약한 살기라도 감지하지 못한다면 그대로 죽음과 연결되는 지옥에서 살아남았다.
"수는...... 서른인가."
단형우는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그들이 무엇을 하건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살기글 뻗어내는 목표는 결코 자신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단형우가 있는 곳을 서른의 그림자가 뒤덮였다.
그들은 단형우를 보며 흠칫 놀라며 검을 휘둘렀다. 설마 그곳에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상당히 놀랐다.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었다. 소리라도 지르기 전에 죽여버려야만 했다.
쉬각!
날카로운 검이 단형우의 목을 양단했다. 검을 휘두른 사내는 자신의 검이 단형우의 목을 정확히 양단하는 모습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는 놀라 눈을 크게 떠야만 했다. 단형우의 신형이 마치 안개처럼 흩어졌기 때문이었다.
"이형환위(以形換位)?"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른 움직이었다. 그리고 사내는 눈앞에 떨어지는 벼락을 보았다.
번쩍!
단형우는 검을 허리춤에 매달았다. 그의 몸을 중심으로 토막 난 사람 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피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마치 불로 지진 듯한 자국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다시 평화로워졌군."
단형우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쨌든 이런 자리는 좋지 않았다. 그 지옥에서도 휴식만큼은 깨끗한 곳에서 했다. 단형우의 몸이 또 주변에 녹아들어갔다.
한참을 떨어진 곳에 도착한 단형우가 다시 움직임을 멈추고 서 있었다.
가만히 팔을 내리고 서 있는 모습은 너무도 자연스러워 얼핏 보면 마치 자연의 일부분처럼 보일 정도였다.
"소란스럽군."
단형우는 고개를 돌려 한쪽을 쳐다봤다. 그곳은 절벽이 있는 곳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단형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단 한 사람만 제외한다면.
단형우는 조설연을 살폈다. 아직까지는 멀쩡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리 몸이 상할 일은 없을 듯했다.
"크아악!"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목숨 하나가 또 쓰러졌다. 벌써 대부분의 녹림도들은 바닥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고, 사도련 무사들은 크고 작은 상처투성이였다.
너무도 일방적인 싸움이었다. 결과가 이렇게 된 데에는 현무단의 힘이 컸다.
사도련과 녹림의 뒤를 급습한 현무단 덕분에 그들은 제대로 진형도 갖추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져 버렸다.
"으아아아! 대체 왜 오지 않는 것이냐!"
산적들을 이끌고 온 사내는 절벽 앞에서 괴성을 지르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도를 휘둘러 댔다.
그는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함께 치기로 한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
그들 때문에 이 일에 끼어들었고, 그들 때문에 이 일이 성공할 거라 믿었는데 그들이 오지 않으니 이런 피해를 입는 것도 당연했다.
사내의 기세에 청룡단 무사 몇이 단숨에 쓰러졌다. 독고운은 그 모습을 보며 몸을 날려 사내 앞에 섰다.
"슬슬 끝을 낼 때가 되지 않았는가?"
독고운의 말에 사내가 크게 웃었다.
"으하하핫! 웃기지 마라!"
사내가 달려들었고, 독고운이 무거운 도를 들어올렸다.
콰과광!
거센 폭음과 함께 사방으로 검기 조각이 비산했다. 주변에 있던 무사들이 급히 뒤로 물러났다.
콰과광!
펑! 펑!
연달아 울리는 폭음과 함께 산적 우두머리의 목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일개 산적두목이라 하기에는 대단한 무공을 가졌지만 파산도 독고운을 상대하기에는 한참이나 멀었다.
사내의 목이 떨어지자 녹림과 사도련의 잔당이 결국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무단이 그 뒤를 쫓았다.
"맹주님, 고생하셨습니다."
제갈중천이 다가와 말하자 독고운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한 게 뭐가 있는가. 그나저나 별 피해는 없지?"
"예, 생각보다 피해가 적습니다. 역시 현무단을 은민히 이끌고 온 것이 주효했습니다."
독고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천기자의 비밀병기를 볼 시간이로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