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창작교실 - 당신도 시를 쓸 수 있다 - /이형기, (주)문학사상사, 1991.
<시는 무엇을 표현하는가?>
- 시는 마음의 거울에 비친 세계를 표현하는 것.
- ‘마음의 거울에 비친 세계’란 우리가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본 결과이다. ‘마음을 투사한 사물의 이해’=‘마음을 투사하여 대상을 이해한다는 것’
== 시에도 공짜는 없다.
- 시는 오직 인간만이 쓰고 있다. 모든 인간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시를 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그리고 그 때문에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특이한 존재이다.
-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을까?”
- 조지훈, “그건 방치할 수밖에 없는 일이오.”
- 미국의 작가 싱클레어 루이스, 소설창작론 강좌, “정말 소설을 쓰고 싶다면, 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뭐든지 쓰기 시작하라.”
- G. 플로베르, <<보봐리 부인>>, “나의 경우는 그것이 보잘 것 없는 실개천입니다. 폭포를 만들이 위해서는 엄청난 대공사가 필요합니다. 나의 인생은 자신의 심장과 두뇌를 짜서 마침내 그것을 고갈시키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의 불후의 명성은 재능의 소치가 아니라 그러한 전력투구의 노력이 스스로 얻어낸 결과이다.
- 시를 좋아하는 그 마음속엔 반드시 시에 대한 재능이 잠재해 있다. 무슨 일이든 그 일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그 일에 대해 잠재적 재능을 가졌다는 뚜렷한 징표이다. 문제는 재능이 아니라 자기 속에 이미 잠재해 있는 재능을 자기가 얼마만큼 열심히 키워갈 수 있느냐 하는 그 노력의 의지이다. “천재는 1%의 재능과 99%의 노력의 소산이다.”(에디슨)
== ‘가치있는’ 감정을 표현해야
- 시가 감정을 표현한다는 말은 오직 감정 그것만을 표현한다는 뜻이 아니다. 감정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저속하거나 무가치한 감정은 배제하고 의미있는 감정, 가치있는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
-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차원높은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철학적 명상과 지적 사고를 쌓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표현 효과를 드높이기 위한 기술적 고려는 오히려 우리에게 감정의 억제를 요구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또 시대의 발달이 인간에게 더 많은 지적 활동을 촉구하고 있다. 지적 사고가 일찍이 유례를 볼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현대인의 정신상황이다. 시라는 이름의 마음의 거울이 이러한 우리 시대의 현실적인 인간의 삶을 도외시한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우주와 인생 그 모두를 마음의 눈, 즉 가장 인간적인 눈으로 비쳐내는 것이 시이다.
- 따라서 시는 감정표현을 내용의 기본 특성으로 하되, 사물과 세계에 대한 지적 분석과 비판정신도 아울러 수용하는 문학양식이다.
- 이상은 시 창작의 실제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말하자면 ‘시가 무엇을 표현하는가’라는 시의 원리에 대한 설명이다.
<시를 쓰는 마음의 바탕>
== 감수성을 기르는 바탕
- 사물에 대한 인간의 감정반응은 다양하다. 감정을 주된 표현대상으로 하고 있는 시는 얼마든지 다양한 내용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시가 될 수 있는 감정과 그렇지 않은 감정이 처음부터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다.(사랑, 분노, 미움 등)
- 그러나 그렇게 종류를 가리지 않는 감정도 그것이 우러났다고 해서 그대로 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표현 행위’를 통해서만 비로소 한 편의 시가 태어난다.
- 시를 쓰기 위해서는 우리의 자발적 의사, 즉 시를 쓰고자 하는 의욕을 촉발하는 계기가 우리의 마음속에 먼저 생겨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일종의 심리적 충격이다. 인상적인 느낌이다.
- 인간의 삶은 끊임없이 무수한 느낌을 쌓아가는 과정이다. 느낌을 바탕으로 해서 사고가 형성된다. 그러나 그 느낌의 결과가 모두 마음속에 뚜렷한 인상으로 새겨지지 않고, 대부분은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평소와는 다른 특별한 일이나 어떤 극적 사건을 경험하면 거기서 강한 충격을 받게 된다. 강한 충격이란 마음속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는 느낌이다. 그리고 시를 쓰려는 사람에겐 그러한 느낌이 표현의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시를 쓰려는 사람을 평소와는 다른 특별한 일이나 극적사건을 자주 경험할수록 좋다.
- 하지만 외형으로 보아서 누구나 그것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이나 극적 사건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남보기엔 유별난 경험도 그것이 반드시 그 당자에게 강한 충격을 준다는 보장도 없다.
- 그러므로 문제는 객관적 현상으로서 경험대상이 아니라 경험주체인 우리들 자신의 감수성이라 할 수 있다. 감수성이 잘 발달해서 그것이 남보다 예민하고 또 유연한 사람이 시를 쓸 수 있는 계기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 그렇다면 ‘감수성을 어떻게 발달시키느냐’
- 감수성은 타고난 일면이 있으나, 후천적 노력이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노력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훌륭한 수준으로 향상될 수 있다. 그 방법의 핵심은 어떤 사물, 현상도 그것을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상식이나 고정관념의 잣대로 재단하지 말고, 난생처음 보듯 바라보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다. 신선하고 신기한 느낌. 시를 쓰는 계기가 될 있는 충격. 시심. 동심.
- 31쪽, 정지용의 <호수 2>, 32쪽, 졍 콕토의 <귀>
== 상상력과 낯설게 하기
- 33쪽 한용운의 <나룻배와 행인>
- 불교의 보살정신이라는 사상적 내용을 갖는 시. 곰곰이 새겨야만 이해할 수 있는 시.
- 실제로는 결코 나룻배일 수 없는 인간이 이처럼 나룻배로 변용된 것은 시인의 그 마음의 운이 새상을 상식이나 고정관념의 틀로부터 해방시켜 새롭고 신선하게 바라본 결과이다.
- 무슨 일이든 난생 처음 보듯 신선하고 신기하게 바라볼 수 있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그런 눈을 갖게 하는데, 그러한 마음을 바탕으로 해서 불교의 보살정신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사상과 철학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것이 <나룻배와 행인>이다.
- 34쪽, 폴 발레리는 현실적 이해를 초월한 의식으로 사물을 관조할 때 얻게 되는 느낌을 ‘우주적 감각’이라 말한다. 뜨거운 분노, 예리한 비판, 인간의 고독과 고민 등과 더불어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그리고 그것들의 총체인 세계를 상식과 고정관념의 틀로부터 해방시켜 마치 어린아이가 그러하듯 새롭게 바라보고 있는 시각이다. 새로운 인식.
- 즉, ‘낯설게 하기’
-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시의 기능을 ‘사물의 낯설게 하기’라고 규정한 데서 따온 말이다.
- 사물을 낯설게 만드는 그 새로운 인식은 언제나 그 대상을 실제로는 그렇게 있지 않은 다른 무엇으로 변용시킨다. 예컨대, 사람이 ‘나룻배’, 귀는 ‘소라껍질’ 등.
- 상상력의 소산.
- 보들레르는 상상력은 “인간이 가진 여러 능력의 여왕이며, 세계가 또한 그 힘에 의해 만들어졌다.”라고 말한다. 무엇인가는 새로 만드는 창조의 원동력.
- 그러므로 시를 쓰는 데 있어 기본이 되는 마음의 바탕은 바로 그 상상력을 통해 사물과 세계를 바라보는 자세라고 규정될 수 있다. 상상력은 언제나 인간의 감정과 더불어 작용한다. 어린아이들의 경우는 그 상상력이 거의 천방지축이라할 만큼 자유자재로 날개를 펴고 있다.
- 한편 상상력을 위축시키는 것은 ‘우주적 감각’을 마비시키는 현실적 이해의식과 상식과 고정관념이다.
- ‘동심’과 ‘우주적 감각’, ‘낯설게 하기’ 등과 시의 주된 표현대상인 ‘감정’이 모두 상상력으로 수렴되는 것들이다. 그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을 사소한 일에서도 신선한 충격을 받곤하기 때문에 시르 쓸 수 있는 계기 역시 남보다 많이 얻어낼 수 있다.
<인습적 시각과 상상적 시각>
== 상상력을 키우는 훈련
- 시를 쓰는 마음은 사물을 관조하고 그리하여 그것을 상상적으로 변용시키게 된다. 상상력은 사물을 상식이란 이름의 인습의 거울에 비친 대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거부하는 태도로 여태까지와는 달리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힘이다. 그렇게 새로워진 사물은 이미 낯설게 변용되어 있는 것이다.
- 인습의 거울에 비친 대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을 지각의 자동화 현상이라 한다. ‘일상 생활을 지배하는 원리’
- 인간의 삶은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사물과의 교섭과정이다. 사물을 새롭게 바라본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그 사물과의 새로운 교섭, 즉 새로운 삶, 창조적 내포를 갖는 삶을 뜻한다. 이러한 지각의 자동화를 거부하는 상상적 시각은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문화와 역사를 창조하는 핵심요인.
- 38쪽, 세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
== 사물을 보는 시각의 차이 : 그 아홉 가지 유형
1. 나무를 그냥 나무로 본다.
2. 나무의 종류와 모양을 본다.
3. 나무가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가를 본다.
4. 나무의 잎사귀들이 움직이는 모양을 세밀하게 살펴본다.
- 나무의 외형적 관찰, 일상적 상식적 차원.
5. 나무속에 승화되어 있는 생명력을 본다.
6. 나무의 모양과 생명력의 상관관계를 본다.
7. 나무의 생명력이 뜻하는 그 의미와 사상을 읽어본다.
- 나무의 내면을 바라보는 시각, 나무의 생명력, 생명력의 의미나 사상.
8. 나무를 통해 나무 그늘에 쉬고 간 사람들을 본다.
9. 나무를 매개로 하여 나무 저쪽에 있는 세계를 본다.
- 비약적 변용. 인생 만사와 우주의 삼라만상 모두 포괄. 발견.
== 상상력은 사물에 새로운 의미의 지평을 열어준다.
- 41쪽, 미국 시인 A. 킬머, <나무>, 신의 섭리에 순응하는 삶의 아름다움.
- 유념해야 할 것은 나무의 변용이 다만 현상을 바꾸어 놓는데 그치지 않고, 역시 그 변용에 상응하는 어떤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의미를 뒷받침하는 것은 철학이다.
- 따라서 상상력은 단순히 사실 아닌 허구를 만들어내는 힘이 아니라, 사물에 새로운 의미의 지평을 열어주는 능력이기도 하다.
- 사물은 비록 하찮은 것이라도 그 자체로 고립되어 있는 것이 없다. 예컨대, 볼펜도 플라스틱과 종이와 문자 등 다른 사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이렇듯 수많은 다른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하여 끝없이 확대되는 사물 상호간의 관계의 그물이 세계를 이루고 있다. 이는 곧 세계의 의미를 새롭게 창조한다는 뜻으로 발전한다.
- 또한 상상력은 비록 동일한 대상이라 할지라도 그에 대한 작용의 결과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그것은 상상력이 우리들 각자의 개성과 밀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상력은 언제나 대상을 종합적, 직관적으로 파악한다.
- 사물을 상상적으로 본다는 것은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 시를 쓰려는 사람은 물론 이러한 상상력을 키우지 않으면 안 된다. 훈련하면 키울 수 있는 것이 상상력이다. 앞에 든 나무를 바라보는 아홉 가지 시각은 상상력을 키우는 훈련의 한 모델이 될 수 있다.
<시와 언어>
== 시인은 언어의 직공이다.
- 시를 포함해서 모든 예술은 반드시 무엇인가를 표현한다. 표현을 위해 사용되는 재료, 즉 표현매체의 차이에 따라 예술의 장르가 구분된다. 시는 언어를 통해서 표현의 기능을 수행한다. 시는 언어를 다루는 기술이 만들어 낸 표현물이다.
- 언어는 ‘의미의 그릇’, ‘의미’라는 내용이 ‘소리’라는 형식을 빌어 구체화된 기호. 일상적 담화에서는 대부분의 언어가 그러한 기호처럼 사용된다.
== 사전의 해석과 시인의 언어
- 언어의 의미가 사전에 풀이되어 있는 바와 같은 내용 한 가지로만 고정되어 있지 않다.
- 48쪽, 김광섭의 <산>에서의 ‘산’이라는 말은 앞뒤에 놓여 있는 다른 말과의 관계가 형성하는 문맥에 의존한다. 즉 언어의 의미는 붙박이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문맥에 따라 이렇게도 바뀌고 저렇게도 바뀌는 유동성을 지니고 있다. 48쪽, 한하운의 <개구리>
- 이처럼 모든 사물, 모든 존재를 언어는 이와 같이 창조적으로 인식, 조명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하이데거) 시는 기성품인 의미에 만족하지 않고 의미를 새롭게 창조한다.
== 음악성과 의미는 뗄 수 없는 관계
- 언어의 내용에 속하는 ‘의미’ 못지않게 시인이 깊은 관심을 쏟지 않으면 안 될 언어의 또 다른 일면은 형식에 해당하는 ‘소리’라는 요건이다. 우리가 언어를 구태여 입으로 말하지 않고 그냥 생각만 해도 우리의 의식 속에는 절로 그 언어의 소리가 떠오르는데, 이를 소리의 이미지, 언어학의 전문용어로는 ‘청각영상’이라고 한다. 이처럼 모든 언어에는 의미와 함께 반드시 이 청각영상인 소리가 짝을 이루고 있다.
- 일상의 담화나 산문의 경우는 언어의 그 소리 부분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때는 언어 사용의 목적이 의미 전달을 위주로 하기 때문이다.
- 시의 경우 언어의 소리 부분이 빚어내는 효과를 음악성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음절수를 일정하게 맞춰나가는 시의 음수율. 민요 <아리랑>, 시조 <매아미 맵다>, <쓰르라미 쓰다>, 김영랑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 T. S. 엘리어트, “시의 음악성은 의미를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에서 의미와 소리는 혼융일체.
== 보행의 언어, 무용의 언어
- 시의 언어는 비록 그 사전적 의미가 같은 것이라도 이 말을 저 말로 바꿀 수가 없다.
- 시의 언어의 본질적 속성은 독창적 인식기능이다. 독창적인 만큼 하나밖에 없을 것이 분명한 그 새로운 인식은 역시 하나밖에 없는 언어를 통해서만 표현도리 수 있다. 아니 그런 언어를 통해 인식이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실은 그런 언어 자체가 그 인식의 구체적이고도 정확한 내용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언어는 결코 다른 말로 바꾸어 놓을 수가 없다. 그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 할 수 있는 절대적 언어인 것이다.
- 발레리는 ‘보행의 언어’인 산문과 대비시켜, ‘무용의 언어’라고 말하고 있다. 무용에 있어서의 여러 가지 몸놀림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다.
<시를 쓰는 세 단계> - 종자 얻기와 키우고 싹틔우기
== 시의 종자 얻기
- 영국의 시인이자 시론가인 C. D. 루이스, <<젊은이를 위한 시>>, 시를 쓰는 과정 3단계.
- 첫 번째 단계, ‘시의 종자’를 얻는 단계. 시를 쓰는 계기. 결코 가볍게 흘려버릴 수 없는 심리적 충격. 인상적인 느낌. 일종의 영감. “어떤 감정, 어떤 체험, 어떤 관념, 때로는 하나의 이미지이거나 한 줄의 시구일 수도 있다.”
- 이 종자를 반드시 기록, 노트 -> 노트한 뒤에는 대부분의 시인들이 그 사실을 잊어버리게 된다. 이는 누구나 꼭 그렇게 잊어야만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종자를 당장 한 편의 시로 만들려고 서두를 것은 없다는 정도의 뜻이다. 왜냐하면, 종자 하나를 붙들었다 해서 그것을 바탕으로 당장 한 편의 시를 쓰려고 서두르면, 상상력이 종자 자체에만 얽매어 표현이 단조롭고 내용이 빈약한 시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지긋하게 기다릴 줄 아는 힘을 기를 필요가 있다.
- 이렇듯 잊어버림은 멸실 상태가 아니라 시인의 무자각적 의식 속에 그 종자가 간직됨을 뜻한다. 거기서 그 종자는 조금씩 부풀어 언젠가는 싹을 틔우게 되는 것이다. 노트는 이러한 시의 종자의 생명력을 보증하는 비망록이라 할 수 있다.
== 종자의 성장과 시적 사고
- 두 번째 단계, 그 종자가 시인의 정신 내부에서 성장하는 단계. 시의 종자의 내적 성장과정. 눈에 안 보이게 내면적으로 진행되는 그 성장은 이제 막 한편의 시가 태어나기 직전의 순간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기의 탄생은 그 종자의 충분한 성장이 가져오는 필연적 결과라 할 수 있다.
- 시의 종자도 식물의 종자가 그러하듯 제대로 싹트고 자라자면, 사람(시인)의 정성어린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노력의 바탕이 되는 것은 평소에 시적 사고를 지속적으로 거듭하는 일이다. 즉, 틈나는 대로 시를 생각하는 그 일이 바로 그러한 노력의 바탕을 이룬다. 상상력이 만들어낸 새로운 그 무엇이 그 종자에 추가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평소의 시적사고. 평소의 준비, 노력.
- 58쪽,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 구체적인 언어 표현 찾기
- 세 번째 단계, 하나하나 언어를 골라 거기에 구체적 표현을 부여하는 단계이다.
- 이 단계에 이르면 시를 쓰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끼게 된다고 루이스는 말한다. 그 욕구가 배가 고플 때의 시장기와 어떤 일이 닥치려고 할 때의 흥분 내지는 두려움이 뒤섞인 느낌을 실제로 경험한다고 한다.
- 하지만 뭐 특별히 강렬하다할 정도의 욕구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히려 냉정하게 깨어 있는 정신상태에서도 진행될 수는 있다. 고전주의적 작시번은 영감보다 지적인 제작의식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그렇게 깨어 있는 작업태도를 지향한다. 낭만주의적 작시법은 이와는 달리 영감으로 통하는 혹종의 흥분상태를 존중하는 태도이다.
- 그러나 이 두 가지 방법의 어느 쪽을 취해도 막상 시를 쓰려고 할 때는 가장 적합한 표현의 언어를 찾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정신을 집중한다 해서 필요한 언어가 척척 발견되고 그리하여 시가 술술 써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시인들은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기벽’을 부린다. 예컨대, 뜰을 거닐거나 목욕을 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사과냄새를 맡거나, 다른 시의 종자 노트를 읽거나, 술을 마시는 것이다. 그래도 안 되면, 별수 없이 작업을 중단하게 되지만, 그것은 포기를 뜻하지는 않는다. 이튿날, 며칠 뒤, 작업이 재개된다. 막혔던 생각의 벽에 구멍을 뚫듯이.
- 마지막 단계. 퇴고. 퇴고는 초고를 1주일쯤 서랍 속에 넣어 두었다가 꺼내서 시작하는 게 좋다. 초고가 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퇴고를 서둘면 생각이 아직 그 초고에만 쏠려 있어 결점이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여유를 두었다가 초고를 다시 검토해 보면, 그 때는 그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생겨 퇴고가 제대로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미지라는 표현장치>
== 표현과 설명의 차이
- ‘예술’이라는 영어의 ‘art’는 ‘기술’이라는 뜻을 갖기도 한다. 예술은 일종의 기술이라고 본 서양 사람들의 인식을 발견할 수 있다.
- 예술에 있어서는 표현을 만들어 내는 것이 기술이다.
- 표현의 성공을 위해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일반적인 유의사항 두 가지.
- 첫째, ‘표현’과 ‘설명’을 구분하는 일이다. ‘표현과 설명의 차이’는 무엇인가? 한 폭의 소나무 한 그루를 그린 그림. ‘독야청청, 절개, 초월의 정신’ 등은 그림 감상자의 해석에 의해 드러나는 의미지, 소나무가 직접 그것을 그렇게 설명해 주는 의미는 아니다. 이러한 설명을 최대한으로 억제하고 그냥 무엇인가를 보여만 주겠다는 태도를 취할 때, 우리 앞엔 표현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 그것은 보여준 그 무엇이 무의미함을 뜻하는 태도가 아니라 보는 이에게 그 의미의 해석을 맡긴다는 태도인 것이다.
- 이와는 달리 보여준 그 무성의 의미의 해석을 보여준 사람이 보는 이에게 강요하는 태도를 취할 때 설명이 생겨난다. 즉 표현자가 표현물의 의미를 직접 밝히는 것이 설명인 것이다. 그렇게 설명을 하지 않으면, 독자가 내 시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예컨대, 자연. 꽃이나 돌이나 구름 같은 자연 구성물은 그 모두가 우리에게 다만 그 자체를 보여만 줄 뿐, 내가 어떤 의미를 갖는 무엇이라고 자기자신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한 자연의 의미를 조물주인 신보다도 더 기막히게 해석해내고 있다.
- 잘 된 표현은 그러한 능력이 자기도 모르게 표현자의 의도를 좇아 발휘될 구 있도록 유도해 나간다. 예컨대, ‘쓸쓸한 가을’이 아니라 ‘떨어지는 낙엽’을 보여줌으로써 가을의 쓸쓸함을 전달하는 방법이 표현이다.
- T. S. 엘리어트는 시를 쓰는 방법의 핵심이 ‘객관적 상관물’을 만드는 데 있다고 말한다. 예컨대, 시인이 기쁨에 관한 시를 쓰려고 할 때, 직접 기쁘다고 말하는 대신, 그것을 대하면 독자도 절로 시인이 의도하는 그 기쁨을 경험할 수 있는 어떤 사물을 제시해야 한다는 뜻이다. 객관적 상관물은 그 자신을 보여만 줄 뿐 설명하지는 않는 것이다.
- 67쪽, 미숙의 시인 아취볼드 매크리쉬의 <작시법>
== 정확한 표현은 이미지로
- 둘째, 정확한 표현이다. 정확한 표현과 잘된 표현은 동의어이다. 시의 경우, 정확한 표현은 우리가 그 지시대상을 구체적으로, 감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언어를 통해 성취될 수 있다. 추상어가 아니라 대상을 감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말, 즉 구상어(具象語)인 것이다.
- 이미지(image), 심상(어떤 사물을 감각적으로 정신 속에 재생시키도록 자극하는 말(이상섭의 <<문학비평용어사전>>)). ‘상상하다’라는 동사로도 쓰임. 명사형인 imagination은 상상력. . 구상어. 객관적 상관물과도 깊은 관계.
- 구체적인 표현, 구체적인 그만큼 정확한 표현, 따라서 잘 될 밖에 없는 표현을 만들어내는 가장 핵심적인 장치가 바로 이미지인 것이다.
- 모호하고 막연한 이미지의 예. 69~70쪽.
- 상투적 관념은 시인이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될 인습의 거울에 해당한다. 시가 사물을 낯설게 만든다는 것은 그러한 인습의 거울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눈으로 사물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새로운 눈이란 나만이 갖는 개성적인 눈이다.
- 71쪽, 박남수의 <국화>
== 상상력이 그린 언어의 그림
- C. D. 루이스는 이미지를 “독자의 상상력에 호소하는 방법으로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그려진 언어의 그림”이라고 말한다. 또한 독자의 마음의 스크린에 시인이 비춰주는 슬라이드.
- 자연은 ‘사실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 자연에 상상력이 작용하면 사실의 세계는 새롭게, 즉 낯설게 변용되고, 그러한 변용의 구체적 성과로서 시의 표현에 기여하는 장치가 이미지인 것이다.
- 없어도 좋을 만한 군더더기는 커트하고 애매한 부분, 불투명한 대목은 새로 바꾸는 작업을 하는 곳, 즉 시사실을 시인도 만들어 제작된 슬라이드를 사전에 여러 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 이미지는 감각적 지각과 관계가 있는 말인 만큼 그 종류는 우선 감각기관의 수와 맞먹는다고 할 수 있다. 즉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에 호소하는 5가지 기본 이미지인 것이다.
<시각적 이미지의 이모저모>
== 언어로 그린 그림
- C. D. 루이스가 이미지를 “독자의 상상력에 호소하는 방법으로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그려진 언어의 그림”이라고 말한 것처럼 시각적 이미지를 이미지의 주종으로 본다.
- 시의 표현장치로서 이미지를 말할 때는 시각적 이미지가 가장 큰 비중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표현 대상을 다룬 어떤 이미지보다도 선명하고 명확하게, 즉 구체적으로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또 다른 감각, 이를 테면 청각이나 촉각에 의한 사물의 지각도 거기에는 대체로 시각적 작용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 현대시에 있어서는 회화성이 중시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그런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 예컨대, 76쪽, 정지용의 <바다 1>
- 시인의 상상력의 작용에 의한 사물의 허구적 변용.
- 77~78쪽, 전봉건의 <피아노>
== 의미해석은 독자의 몫
- 앞의 두 편의 시가 보여주고 있는 그 이미지들은 내용면에서 풀이할 때 어떤 의미를 갖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시인들의 실수가 아니라 일부러 그렇게 노린 결과이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보여만 줄 뿐 그 의미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즉 표현한다. 그러면 독자는 표현된 그 대상, 그 세계를 자기 나름대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대상에 대한 의미의 해석은 그러한 경험의 주체인 독자의 몫으로 맡겨져 있다.
- 김춘수는 “사물을 감각적으로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은 원시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러니까 관념(의미) 이전의 관념이 장차 거기서 태어날 관념의 제로지대이기도 하다. 이 지대에서 야기되는 사건들은 질서가 없는 듯하지만, 그것은 관념의 쪽에서 바라볼 때 그렇다는 것이지, 그렇지가 않다.”로 말하고 있다. 시가 표현하고 있는 것, 즉 그 이미지를 의미론적으로 해석하려 하지 말고, 자기나름으로 그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원시적 태도’라 할 수 있는 ‘사물의 감각적 수용’을 뜻한다. 감각적 수용인 만큼 의미를 뒷받침하는 관념은 아직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관념의 제로지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 그러므로 ‘관념의 제로지대’인 경험은 ‘관념이 장차 거기서 태어날’ 모태이기도 한 것이다. 의미는 그러한 관념의 내용을 이룬다. 그리고 그 의미는 또 경험을 그렇게 해석한(관념화시킨) 경험 주체의 몫인 것이다.
- 80쪽, 프랑스의 시인 자크 프레베르의 <메시지>
==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 시각적 이미지 중에는 현실의 공간에는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 관념에 모양과 색깔을 부여하여 그것을 구체화시킨 것도 있다. 그리고 같은 감각이라도 모양이나 색깔을 가질 리 없는 감각적 지각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바꾸어 놓은 것도 있다.
-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사람. 모양이나 색깔을 갖지 않은 대상에 모양과 색깔을 부여한 어떤 종류의 시각적 이미지는 그 말로 피부로 실감할 수 있게 해 준다.
- 82~83쪽, 신석정의 <아직은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이용악의 <집>, 이반 골의 <피의 사냥개>
- 보이지 않는 것, 막연한 것, 모호란 것을 볼 수 있게, 그것도 명확하고 선명하게 그려내면 낼수록 그 표현은 잘 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 비유적 이미지도 있다.
- <피의 사냥개>의 사냥개의 이미지처럼 다만 제 자신을 보여만 주고 그리하여 해석은 독자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독자도 그렇게 해석하기를 요구하는 어떤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이미지를 ‘비유적 이미지’라고 한다. 즉 처음부터 어떤 의미를 등에 지고 나온 이미지이다.
- 비유적 이미지와 짝을 이루는 이미지가 ‘묘사적 이미지’인데, 이는 해석은 독자에게 맡기고, 그 자체를 보여만 주는 이미지이다.
- 85~86쪽, 김현승의 <절대신앙>, 유치환의 <깃발>
- 비유적 이미지라고 하더라도 설명적 태도는 역시 금물이다. 왜냐하면, 이미지는 시 해석의 중요한 길잡이가 된다고 하는데, 구체성이 희박한 막연하고 모호한 이미지는 표현을 그르칠 뿐만 아니라 그 일도 제대호 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시인은 소리도 만들어 낸다.>
== 소리로 가득 찬 이 세계
- 소리는 세계를 세계로 있게 하는 필수적이고도 매우 중요한 구성요소의 하나이다.
어떤 소리든 소리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 소리가 자기에게 어떻게 들리고 있는가를 먼저 확실히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인은 어떤 소리를 두고 그 소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들리고 있는가란 질문을 받았을 때, 망설이지 않고 즉각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어야할뿐더러 그 소리를 언어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 이를 청각적 이미지.
- 이미지인 만큼 그것은 실재하는 소리가 아니라 시인의 상상의 공간에 떠오른 소리요. 개성적으로 창작된 소리이다.
- 90쪽 김광균의 <설야>
- 미궁의 시인 에즈라 파운드는 “평생 동안 여러 권의 책을 쓰느니보다 하나의 훌륭한 이미지를 만드는 게 낫다.”
- 이미지스트, 영국의 비평가이자 시인인 T. E. 흉, 1908년 런던, ‘시인클럽’, 이미지운동.
- 1930년대 모더니스트, 이미지운동의 영향, 김광균.
== 마음으로 듣는 밝은 귀
- 의성어 역시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청각적 이미지.
- 박두진의 <묘지송>, 박목월의 <산그늘>, 박재삼의 <매미울음에>
== 없는 소리를 듣는 엄숙성
- 마음의 귀가 듣는 소리는 실재하지 않는다.
- 96쪽, 유치환의 <깃발>, 박제천의 <아홉개의 환각 그 둘>, 릴케의 <엄숙한 시간>
- 시인이 만들어낸 상상의 소리가 철학적 사고와도 연결된다.
<시와 문학의 특권적 표현영역>
== 기본 이미지의 남은 세 가지
- 후각적, 촉각적, 미각적 이미지
- 감각적 자극은 정신에 전달되고, 그리하여 거기에 정신적 반응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즉 우리가 표현하는 것은 단순한 냄새와 감촉과 맛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정신이 그것을 그렇게 받아들인 냄새와 감촉과 맛인 것이다.
== 냄새가 그려낸 시몽이란 여자
- 103~104쪽, 레미 드 구르몽의 <시몽>
- 실상 시에 있어서의 후각적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상상력을 통해 만드는 것이다.
== 촉각과 미각의 표현 능력
- 106~108쪽, 정지용의 <춘설>, 송욱의 <해인연가 1>, 허영자의 <무제 1>
- 이미지를 통해 관념을 구체화시키는 것이다.
== 기관감각과 공감각
- 기관감각적 이미지, 내부감각적 이미지. 여기서 ‘기관’은 ‘내부기관’을 뜻함. 육체적으로가 아니라 심리적으로 느끼는 감각적 지적을 그 뿌리로 하고 있다.
- 110쪽, 서정주의 <화사>
- 공감각적 이미지는 A종류의 감각적 지각을 B종류의 감각적 지각으로 바꾸어 놓는 경우를 말한다. 성질이 전혀 다른 감각적 지각의 동일화이다. 그리고 공감각은 시적 감수성의 특질이다.
- 111쪽, 조지훈의 <여운>
<비유의 원리와 직유의 표현효과>
== 이질성 속에서 찾는 동질성
- 이미지는 특히 표현의 정확성, 즉 구체성을 살리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 비유라는 또 다른 표현장치는 이미지 못지않다. 실상 비유는 시의 본질과도 직결되는 요소이다. 비유는 비교에 의한 사물의 이해의 방식이라고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A라는 사물(대상)을 B라는 사물(대상)과 비교해서 이해한 결과의 언어적 표현이 비유인 것이다.
- A가 그냥 A로만 인식되지 않고, 거기에 자기나름의 독특한 알파가 보태져 인식될 경우, 즉 특별한 표현의욕을 느끼게 될 때 쓰인다.
- 플러스 알파가 된 A는 지금가지와는 다른 미지의 그 무엇, X인 것이다. 이 X를 표현하기 위해서 문제의 X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다른 무엇과 비교해서 두 개의 사물이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를 밝혀낼 필요가 있다. 처음 대하는 사물, 즉 아직 보편화되지 않은 새로운 미지의 X경험은 언제나 이런 방식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이 비교에 의한 이해의 언어화가 곧 비유인 것이다.
- 그러므로 모든 비유에는 우리가 그 정체를 정확하게 드러내야 할 미지의 사물과 그러기 위해 그것과 비교해 보는 旣知의 사물이 있기 마련인데, 전자를 원관념(tenor), 후자를 보조관념(vehide)이라 한다. T+V가 비유의 기본구조인 것이다. 그리고 이 때의 T와 V는 서로 비교될 수 있는 유사성을 지녔다고 전제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유를 만드는 일은 이질성 속에서 동질성을 찾아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 비유의 종류에는 직유, 은유, 제유, 환유, 의인법 등.
- 제유와 환유는 은유의 일종.
== V가 T를 보완하는 묘미
- 직유(simile)는 비교되는 두 개의 사물, 즉 T와 V가 ‘처럼, 같이, 인양, 보다’ 등의 관계사에 의해 결합되는 비유이다.
- 어떤 유사성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므로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T와 V가 공유하는 유사성을 유추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상상적 유추이다.
- 116쪽, 윤동주의 <봄>, 장만영의 <달, 포도, 잎사귀>, 김종삼의 <북치는 소년>
== 이질적인 사물의 폭력적 결합
- 비유 중에서 은유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시에서도 직유보다는 은유가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 하지만 비유를 시의 표현장치라고 볼 때는 직유와 은유 사이에 성질의 차이는 있지만, 본질적 우열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직유를 써야할 땐 직유를 쓰고, 은유를 써야할 땐 은유를 써야만 성공할 수 있다.
- 현저하게 차이를 보이는 직유의 한 특징은 T와 V를 분명하게 양립시켜 직접 비교한다는 사실이다.
- 120쪽, 이장희의 <봄은 고양이로다>
- 이러한 직유는 T와 V비교하기도 쉽고, 따라서 비교의 결과를 이해하기도 그만큼 쉽다고 말할 수 있다. 설명적 요소가 있음에 기인하는 이 이해하기 쉬움은 직유의 커다란 장점이다.
- 반면, 121쪽, 김수영의 <적>에서는 T와 V의 유사성이 잘 드러나지 않아서 그 의미의 해독도 어렵다고 할 수 있는 직유이다.
- T와 V의 유사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두 가지 사물 사이의 이질성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뜻한다. 이 이질성을 사물 사이의 거리라고 한다. 이질성이 큰 사물, 즉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물은 그 거리가 멀수록 결합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그러한 사물들이 결합하여 직유를 이루고 있는데, 그것은 물론 시인의 강제가 초래한 결과이다. 강제는 일종의 폭력이기 때문에 이러한 T와 V의 관계는 ‘이질적인 사물의 폭력적인 결합’이라 한다.
- 122쪽, T. S. 엘리어트의 에서도 그야말로 폭력적인 억지를 부려서 T와 V를 결합시켰다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실수나 억지가 아니다. 의도적인 방법론이다. 이질적인 사물의 폭력적 결합이 사물 상호간에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냄으로써 그 사물 자체는 물론 사물의 총화인 세계를 또한 새롭게 인식토록 하기 때문이다.
- 어떤 사물도 그 자체로 고립되어 있는 것은 없다. 모든 사물의 의미는 그것과 결합되는 다른 사물과의 관계의 그물 속에서 결정된다. 그 관계가 만들어내는 가장 큰 그물이 세계요 또 우주인 것이다.
- 하지만 사물의 그러한 관계의 그물이 영구불변일 수는 없다. 말하자면, 새로운 관계의 형성인데, 그 새로운 관계는 곧 세계의 창조적 변혁을 의미하는 것이다. 일반적 상식에 의하면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는 이질적인 사물을 폭력적으로 결합시키는 직유도 바로 그와 같은 사물 상호간의 새로운 관계형성을 지향한다. 새로운 관계의 그물 속에 놓일 때, 사물은 비로소 새롭고 창조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시가 사물을 낯설게 만든다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그 새롭고 창조적인 의미의 획득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작업이다.
- 따라서 이질적인 사물의 폭력적 결합은 그 결과가 현실의 질서를 배반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합당한 이유를 갖는다 하더라도 독자의 이해와 공감을 얻어야 하기에 T와 V의 거리를 적당히 조절할 필요가 있다.
- 현대기가 어렵다는 말을 듣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도 사용하는 비유의 T와 V의 거리가 자꾸만 멀어져 간다는 데 있다.
<언어를 창조하는 은유(metaphor, 옮김, 자리바꿈)>
== 제3의 의미가 여기 있다.
- 은유도 물론 비유이기 때문에 T+V 구조를 갖는다.
- 은유는 T와 V가 직접 결합한다.
- 은유과 직유의 형태상의 차이점만을 통해 보면, 직유에서 단순히 비교조사만을 빼내어 그것을 약간 압축시킨 비유를 은유라 할 수 있다. 하지만, T와 V의 원형보존 여부에 의해 차이가 발생한다.
- 직유는 상대적인 말이긴 하지만, 합리적, 설명적 요소를 갖는 비유이다. 그러나 은유는 그렇지 않다. T와 V가 원형을 유지할 수 없다. 상호 침투에 의해 모습이 바뀐다. 그래서 두 사물은 의미론적으로도 변화를 일으킨다. 세3의 새로운 의미를 창출한다.
- 은유에 있어서는 T와 V의 결합이 합리성을 초월한 직관적 사고에 의해 이뤄져 있다.
- 직관적 사고의 소산. 직관은 상상력의 한 양식. 그래서 은유는 보다 시적인 비유, 나아가서는 그 뿌리가 시의 본질로 직결되는 비유.
- 이러한 새로운 언어의 창조는 세계를 언제나 새롭게, 낯설게 바라보고, 그리하여 새로운 인식을 언어로 표현하려는 시인의 필수적 과제이다. 시인의 언어 창조 작업은 은유로서 수행될 수 있다. 그 은유가 언어의 자리 바꿈을 통해 만들어낸 새로운 의미의 기호, 그것이 곧 새로운 언어인 것이다.
== ‘소주는 국어’와 ‘빗발의 투석전’
- T. E. 흄(Hulme), “은유는 계속적으로 수명이 다해서 죽어간다. 쓸모없는 시인은 자기도 모르게 죽어가거나 죽은 은유를 사용하지만, 훌륭한 시인은 끊임없이 새로운 은유를 창조한다.”
- 시인의 은유는 영원한 일회용.
- 시는 작은 은유들이 모여서 이룩한 큰 은유 덩어리.
- 128쪽, 김요섭의 <소주론>, 액자 구조의 은유.
- 130쪽, 홍윤숙의 <변방에서>
- 해석은 논리적 분석이 아니라 상상적 유추의 소산이다. 상상력은 개인적 편차를 갖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은 ‘유일한 정답’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해석이든 특정한 정서적 시각에 대해 새로운 개안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 다시 제기된 거리의 문제
-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은유는 남에게서 배울 수 없는 것이며, 천재의 표적”, 여기서 천재라는 말은 어마어마한 초인적 능력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만이 그럴 수 있는 개성적 능력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다.
- 개성적 능력은 남에게서 배울 수 없다. 그리고 남에게서 배울 수 없는 개성적 능력의 정수가 직관이다. 그러므로 은유는 직관의 소산이다.
- 은유는 독자의 상상력은 자극하는 충격 장치.
- 상상력은 현실을 초월한다. 현실을 초월한 그 저쪽에 있는 것은 허구의 세계이다. 현실적인 경험을 재료로 하면서도 현실이 아닌 허구의 세계, 그것은 현실적 경험을 현실의 질서와는 다르게 재구성한 세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은유를 만들 때의 직관과 또 그것을 해석하는 우리의 상상적 유추도 현실적 경험의 초현실적 재구성이라는 원칙을 벗어날 수 없다.
- 현실적 경험의 초현실적 재구성이라도 그것을 막상 실천에 옮길 때는 실로 무수한 정도의 차이가 나타난다. T와 V간의 거리의 문제이다.
- 시인이 서야할 자리는 쉬운 이해보다 충격 쪽에 좀 더 무게가 실릴 수 있는 지점이다. 이런 지점에서 만들어진 은유는 이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얼핏 보면 이해하기 어려울지 몰라도 진폭이 큰 상상력에 의하면 얼마든지 이해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안고 있다. 그러나 현실과의 거리를 의도적으로 아주 멀리함으로써 이해보다는 충격 쪽에 훨씬 큰 무게를 실어주고 있는 은유도 있다.
- 133쪽, 김춘수의 <나의 하나님>
- 따라서 우리는 상상적 유추를 통해 그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유추는 기본적으로 T와 V가 서로 결합될 수 있는 가능성, 즉 그 유사성을 발견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만물에 마음주는 의인법>
- 시는 마음의 거울에 비친 세계를 표현하는 것.
- ‘마음의 거울에 비친 세계’란 우리가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본 결과이다. ‘마음을 투사한 사물의 이해’=‘마음을 투사하여 대상을 이해한다는 것’
== 인간화되는 사물들
- 인간화된 사물은 사실을 객관적으로 재현한 것일 수 없다. 원래의 사물을 T로 하고 인간을 V로 하는 의인법이라는 비유이다.
- 의인법은 사물을 시적으로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
- 시의 대부분이 많건 적건 의인법 내지 의인법에 준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 139쪽, 박목월의 <비유의 물>
== 마음을 주고받는 관계
- 의인법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우리가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구체적 사물뿐만 아니라 추상적 관념도 의인화도리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의인화된 그 대상은 우리와 더불어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럼으로써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친밀성을 갖지 않을 수 없고, 대상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생겨난다.
- 사물은 고립되어 있지 않다.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세계를 이룬다. 그러므로 사물을 의인화하여 그 속에 마음을 불어넣어 준다는 것은 세계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 140쪽, 조지훈의 <병에게>
- 142쪽, 김남조의 <봄에게 1>
== 시의 본질과 의인법
- 의인법은 대상을 꼭 인간화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성립될 수 있다. 생명이 없는 추상적 관념이나 무생물을 생명 있는 존재로 바꾸어 놓는 표현도 의인법이다. 모든 생명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생명과 같은 것이라는 사고가 무생물을 생물화시키는 이 의인법을 뒷받침하고 있다.
- 144쪽, 김광림의 <산 4>
- 돈호법도 대상을 인간화하고 있는 의인법의 일종이다.
- 145쪽, 박두진의 <청산도>, 김여정의 <찔레꽃 사랑>
- 의물법도 인간이나 생물을 무생물화는 것인데, 형태가 정반대로 되어 있지만, 의인법의 일종으로 간주한다.
- 물활론, 만물유생론, 범신론
- 비과학적인 물활론적 사고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곳에서는 인간이 사물과 세계를 과학이 아닌 마음의 눈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도 막혀 버린다. 시는 이런 세계를 거부한다. 시는 과학이 무슨 소리를 해도 사물과 세계를 또한 마음 있는 존재로 바꾸어서 그것들이 그 마음으로 인간에게 응답해 오도록 하는 때도인 것이다. 그 응답의 내용을 표현하는 기본 방법이 의인법이다. 이는 시의 본질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물 이해의 방법이다.
- 그러나 의인법도 비유인 만큼 시에 있어서는 독창성이 없으면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상징과 알레고리>
== 의미의 다양성과 단순성
- 어떤 사물이 그 자체 이외의 다른 것을 대신할 때, 그 사물은 넓은 의미의 상징이 된다.
- 상징과 상징 대상과의 관계가 인위적 약속으로 일대일이 되는 것은 기호라고 해서 제외한다.
- 오직 인간만이 상징을 만든다. 그리고 그 상징의 숲속에서 인간은 살고 있다.
- 독일의 철학자 카시러는 “인간은 상징적 동물”
- 상징은 대신하는 것과 대신 되는 것의 연결을 추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어 있다.
- 설명할 수 있는 추리적 사고를 배후에 거느리고 있는 상징은 원관념 T를 감추고 보조관념 V만을 내세운 은유라 할 수 있다.
- 상징이 표현하는 내용은 한 가지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기호는 지시대상과의 관계가 일대일이지만, 상징은 본질적으로 일대다인 것이다.
- 시인이 힘써 만들어야 할 것은 독창성이 있는 개인적 상징이다.
- 알레고리(allegory)는 성격이나 형태가 상징과 비슷하기 때문에 흔히 상징과 함께 거론되는 표현 장치이다. 우리말로 우유(寓喩) 또는 풍유(諷喩)라고 번역되는 알레고리는 ‘다른 것을 말한다’는 뜻을 갖는 희랍어 알레고레인(allegorein)을 어원으로 하고 있다. 상징 역시 어떤 사물을 가지고 다른 것을 말하는 방법을 말하는데, 그 어원부터가 상징과 비슷하다. 실제로 알레고리는 T를 감추고 보조관념 V만을 내세운 상징과 꼭 같은 형태의 은유의 일종이다.
- 하지만 상징이 일대다의 세계를 지시하는데 반해 알레고리는 일대일의 세계를 지시한다. 그런 뜻에서 알레고리는 기호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알레고리는 그것과 지시대상과의 결합을 추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양자의 결합이 인위적 약속에 의존하고 있는 기호와는 그 점에서 구별된다.
- 알레고리는 주로 도덕적 교훈적 내용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이용된다. 비판적 풍자적 의도를 갖는 시와 관념적 내용의 알기 쉬운 표현을 노리는 시에서는 매우 효과적인 기능을 알레고리는 발휘하는 것이다.
== 상징의 암시적 표현 효과
- 상징은 크게 두 가지 : 하나는 대중적 상징(관습적 상징(생활경험의 축적을 통해 관습적으로 형성된 것), 제도적 상징(제도에 속해 있는 사람에게만 의미), 다른 하나는 개인적 상징(개인이 독창적으로 만든 상징). 시와 문학에 있어서는 개인적 상징이 상징의 주종을 이루게 된다.
- 153쪽, 유치환의 <해바라기 밭으로 가려오>
- 미지의 부분, 즉 어떤 신비의 세계는 암시적 방법에 의해서만 그 표현이 가능한데, 상징은 시의 암시적 효과를 가장 크게 높일 수 있는 표현 장치이다.
- 상징의 다양한 가능성 속에서 어떤 해석을 얻어내게 되느냐는 시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독자의 능력에 맡겨진 몫이다. 독자는 이해에 어려움을 느낄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것이 시 속에 독자를 보다 깊이 끌어 들일 수 있는 상징의 묘미이다.
- 155쪽, 조병화의 <의자>
- 156쪽, 구상의 <까마귀>
== 알레고리의 교훈성과 비판성
- 다의성과 단순성이 상징과 알레고리의 가장 큰 차이점.
- 알레고리는 그 지시대상의 의미가 상징의 경우처럼 신비의 베일에 가려져 있지 않고 분명하게 확정되어 있는 것이다. 확정된 그 의미는 물론 알레고리를 만든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관념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관념의 내용은 원칙적으로 개인이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순전히 개인적 관념은 가치의 보편성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알레고리의 내용으로 확정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알레고리는 스스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보편적 가치가 있는 의미의 지시를 선호하게 된다. 알레고리가 도덕적 관념을 주로 지시하게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도덕적 관념은 가치의 보편성이 가장 큰 의미이기 때문이다.
- 도덕적 관념은 모든 사람이 마땅히 그에 따라야 한다는 당위성을 대전제로 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교훈성을 갖게 된다. 교훈적 성격이 강했던 고대의 시와 문학에 있어서는 그래서 알레고리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 158쪽,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
- 이솝우화
- 속뜻을 감추고, 다른 사물을 내세워 그것으로 하여금 감춰진 속뜻을 말하게 하는 표현 장치가 알레고리. 현대시에 있어서는 알레고리가 주로 교훈이 아니라 비판의식의 풍자적인 표현 방법으로 이용되고 있다.
- 160쪽, 신동문의 <비닐우산>
<아이러니와 역설>
== 모순을 통한 진실의 발견
- 아이러니는 반대의 뜻을 나타낸다고 해서 ‘반어(反語)’라고 함.
- 아이러니는 변장 또는 위장을 뜻하는 희랍어 에이로네이아(eironeia)를 어원.(에이론(eiron, 양하지만 영리)과 대조적 인물 아라존(alazon, 힘이 세고 거만한 강자이지만 우둔)을 짝지워 희극에 등장시킴.)
- 일종의 비판적 의도, 비꼼이나 풍자의 뜻이 내포됨.
- 비판의식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주로 이용되는 방법이 아이러니. 비판은 감정이나 정서보다도 지적인 의식에서 우러난다. 따라서 아이러니를 이용하는 시는 주정시 쪽이 아니라 주지적 성격을 띠는 시에서이다. 주지적 성격의 강화는 현대시의 중요한 특징이기 때문에 아이러니는 곧 현대적인 시의 방법이라 할 수 있다.
- 아이러니는 표면적으로는 시침을 떼고 있다가 반전의 효과를 노린다. 이러한 반전이 흥미 있게 수행되기 위해서는 재치, 즉 기지가 필요하다. 위트라 불리는 그 기지가 작용하지 않는 아이러니는 따끔한 맛이 없다. 아이러니는 이 따끔한 맛 때문에 대상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논리적 비판보다 재미가 있고, 그만큼 강한 호소력을 발휘하게 된다.
- 아이러니와 매우 유사한 표현법으로 역설(paradox)이 있다.
- 패러독스는 희랍어 para(초월)와 doxa(의견)의 두 낱말이 모여서 이뤄진 합성어이다. 고대 희랍의 수사학은 이 역설을 아이러니와 함께 중요한 표현법의 하나로 다루고 있다. 현실적으로도 역설은 자주 아이러니와 혼동되고 있다. 왜냐하면, 아이러니와 역설은 다 같이 ‘이것’을 말하면서 실은 ‘이것’과 상반 모순되는 ‘저것’을 드러내는 표현법이기 때문이다.
- 아이러니와 역설의 차이 : 아이러니가 진술 자체는 모순이 없는데 반해 역설은 진술 자체가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 아이러니는 숨겨진 속뜻과 표면적인 표현이 상충되고 있지만, 역설은 표면적인 언어구조부터가 모순이다.
- 모순을 통한 진실의 발견이 아이러니와 역설의 본질.
- 모든 진실이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많은 진실이 모순 속에 있고, 또 모순성을 띠고 있다.
== 상치되는 겉 뜻과 속뜻
- 166쪽, 김광규의 <묘비명>, 표현에 드러난 겉뜻과 감추어진 속뜻이 그야말로 정반대로 되어 있는 아이러니.
- 168쪽, 오규원의 <마음이 가난한 자>, 해학성을 곁들인 신선감.
- 아이러니의 몇 가지 유형 : 언어적 아이러니, 낭만적 아이러니, 내적 아이러니, 구조적 아이러니 등.
- 속뜻과 겉뜻이 상반되기 때문에 아이러니는 모순된 세계를 만들어 낸다고 말할 수 있다. 모순된 세계란 자연의 법칙을 초월한 초자연의 세계인 것이다. 보들레르는 아이러니를 통해 초자연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시의 목적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 ‘복종’이 ‘자유’보다 값진 역설
- 역설은 표면적인 언어구조 자체가 모순된 진술.
- 170쪽, 한용운의 <복종>
- 역설에서 우리는 통념이 전복됨에 따르는 놀라움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어떤 충격을 받았다는 뜻이 되는 그 놀라움은 우리를 그만큼 강하게 시 속으로 끌어들이는 요인이다.
- 표현효과보다도 훨씬 중요한 역설의 기능은 그것이 독자로 하여금 시의 의미를 스스로 생각게 하고 그리하여 그것을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연설의 그 모순된 표현이 우리의 의식 속에 어째서 그런 모순이 가능한가라는 의문을 강하게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 깨달음. 진리의 새로운 발견. 상식을 초월한 신비롭고 차원 높고 따라서 복합적 내포를 갖는 진리.
- 172쪽, 김소월의 <먼 후일>
- 강력한 효과.
- 아이러니와 역설의 모순어법은 기본적으로 통찰력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숙한 정신의 몫.
<시의 리듬, 언어의 음악>
== 언어의 완전한 사용
- 시인은 언어를 다룰 때 의미뿐 아니라 소리까지도 최대한의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의미도 살리고, 소리도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언어의 완전한 사용을 기양하는 사람이 시인이다.
- 음악성. 시는 곧 운문. 리듬. 운율.
- 한시의 대구, 규칙적 배열이 만들어낸 리듬의 일종. 강조의 효과.
- 강조의 효과는 바로 의미의 변화를 말해주는 현상.
- 시에서는 소리가 의미를 변화시킨다.
- 운율, 운(rhyme, 같은 소리의 반복)과 율(meter, metre, 언어가 갖는 소리의 고저, 장단, 강약 등의 주기성)
- 정형시와 자유시. 외형율과 내재율.
== 자유시의 율격 이모저모
- 자유시의 출현은 정형시의 미리 정해져 있는 리듬의 틀, 즉 언어배열의 규칙이 인간의 개성적 편차와 또 그에 따른 사상과 감정의 다양성을 다양한 그대로 자유롭게 표현하기 어렵게 만드는 제약 조건의 타파를 뜻한다.
- 자유를 추구하는 근대정신의 소산.
- 자유시의 리듬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그 시인, 아니 그 시에만 어울리는 독자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 음수율(소리의 음절수를 맞추는 율격), 음보율(박자개념에 의한 율격)
- 음보율은 월래 서구시의 율격 단위였다. 강약률의 기본단위가 음보인 것이다.
- 음보율을 적용하면, 한국시의 율격은 3음보와 4음보의 두 가지로 크게 나뉜다.
- 음보율을 적용하면, 산문시나 자유시에 있어서도 일정한 율격을 찾아낼 수 있는 사례가 허다하다.
== 리듬을 깨는 리듬도 있다.
- 182쪽, 김소월의 <꿈길>, 김동명의 <내마음>, 김종철의 <해뜨는 곳에서 해지는 곳까지>, 정한모의 <삼동기행>, 김수영의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 현대의 전위음악은 협화음의 쾌적한 조화보다도 불협화음에 의한 무조주의(無調主義)를 지향하고 있다.
<행과 연의 구분>
== 왜 그것을 구분하는가
- 시도 일종의 문장이기 때문이다.
- 시를 포함한 모든 문장에는 어떤 내용이든 내용이 담겨 있다. 그 내용은 물론 단순한 것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결코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다. 단순한 내용은 그것을 구태여 문장화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복잡한 문장의 내용은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를 이룬다. 커다란 덩어리인만큼 그 속에도 또 몇 개의 작은 덩어리가 들어있게 마련이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문장을 열차로 비유하고 있다.
- 이 때의 이 작은 덩어리는 전체 내용의 부분적 단락이다. 그 단락을 반드시 밖으로 표시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이왕이면 표시하는 것이 좋다. 표시를 하면 그것은 우선 독자에게 친절을 베푸는 일이 되고 또 한걸음 나아가서는 문장을 쓰는 글쓴이도 그로해서 호흡을 조절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 이에 있어서의 행이나 연의 구분도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원칙에 입각해 있다. 즉 그것은 전체 내용의 부분적 단락을 밝히기 위한 작업인 것이다.
- 산문의 의미의 단락은 행바꿈의 형태로 표시되고 있다.
- 하지만, 시라는 문장 속에 담겨 있는 내용은 의미 그것만이 아니다. 의미 이외의 내용도 의미 못지않은 비중을 가지고, 아니 때로는 의미보다 훨씬 큰 비중을 가지고 그 속에 담겨 있다. 예컨대. 운율에 의한 음악적 효과, 문자화된 언어의 배열 형태가 빚어내는 회화적 효과 등.
- 그러므로 시에 있어서는 자연 낱말 하나, 토씨 하나도 세심한 배려의 대상이 된다. 시의 경우는 의미 외에 음악적, 회화적 효과와 또 기타의 복합적 요소가 거기에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시는 그러한 단락을 표시할 때에도 산문과는 아주 판이한 형태를 취하게 된다.
- 시의 연(stanza, 방을 뜻하는 이탈리아 말에서 유래). 방은 집의 한 부분이면서도 그 나름의 독립성을 지니고 있음.
- 따라서 연은 집에 있어서의 방처럼 시 속에 담겨 있는 내용의 부분적 단락이 아닐 수 없다. 단락인 만큼 거기에는 물론 어떤 매듭이 지어져 있다. 여러 가지 복합적 요소가 얽혀 있는 시의 내용의 한 매듭, 그것이 연이다.
- 방의 특생이 집 전체의 특생으로 연결되듯이 시의 행 구분의 자유는 그 행들이 속해 있는 연과 그 연이 또 다른 연과 어울려 완성케 되는 시 전체의 표현 효과를 극대화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언제나 깊이 생각하면서 행사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 별난 행 구분 사례 몇 가지
- 190쪽, 송시열의 <청산도 절로절로>, 박남수의 <종달새>, 김기림의 <일요일 행진곡>, 김광림의 <소용돌이>
== 감탄사 하나도 연이 된다
- 194쪽, 정지용의 <향수>, 박목월의 <폐원>, 이동주의 <혼야>
<소재와 주제>
== 소재 선택에는 제한이 없다.
- 201, 정지용의 <카페 프랑스>
== 주제의 바탕 소재의 해석
- 무엇인가를 말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소재에 대한 해석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 시의 주제가 궁극적으로는 세계와 인생에 대한 해석으로 귀착된다. 그러므로 시인은 평소에 세계와 인생을 폭넓게 바라보고 또 깊이 있게 생각하는 태도를 갖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 독창적 해석, 개성적 시각.
== 주제가 있는 시, 없는 시
- 소재에 대한 해석이 그 바탕을 이루는 시의 주제는 그러나 반드시 관념이나 사상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 207쪽, 조정관의 <백지 1>, 백석의 <멧새소리>, 김종한의 <고원의 시>
- 시는 주제의 전달 수단이 아니라 주제를 포함한 여러 가지 요소가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만들어내는 하나의 완결된 표현물인 것이다.
<창작과정의 실제>
== 고통의 인내와 <낙화>
== 고심했던 흉악범 찾기
== 한 마리의 새우가 된 고래
- 부록 - 시의 이해와 분석
<시의 해석>
<재가 다시 기름되는 등불> -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
<있음과 없음의 소용돌이> - 박두진의 <유전도> 분석
<순수 심상의 시> - <봄은 고양이로다>의 분석
<달관자의 비극적 황홀감> - 박목월 <나그네> 분석
<존재의 조명> - 김춘수의 <꽃> 분석
<두 편의 시>
<한국 현대시의 고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