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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의 꽃
김 임 순
존이 나에게 물었다.
“How many incredible Generals have influencad your nation?”(당신네 역사 중에 훌륭한 장군이 몇 명쯤 되니?)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건 생판 모르는 사돈의 팔촌쯤 되는 처남댁에게 인사를 건네받는 기분이랄까. 그 장문에 답하기란 내 나의 영어 실력은 형편없이 짧았다. 가슴이 절구질하느라 콩닥콩닥 뛰었다. 솔직히 콩글리시와 보디랭귀지로 대답하려니 부끄럽기도 했다. 나는 존의 질문을 못 들은 척 외면했다. 속으론 은근히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 주길 바랐다. 그러나 존은 기어이 나를 물고 늘어졌다.
“We have 5000 years of history?”(우리나라 역사가 오천 년인데?)
나는 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심하게 몸을 흔들었다. 그걸 말하려면 온종일 걸릴걸.’ 속으로 고시랑 거리며 거절의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Why? What is wrong with that?”(왜? 그게 무슨 문제가 돼?)
존은 내 말을 대수롭잖게 받아치며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존! 그걸 전부 아뢰오, 라니? 말이 안 된다는 거지. 그건 말이야, 몹시 어렵고 복잡한 문제야. 그러니까 너에게 단순하게 설명할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거지.”
나는 땅꾼에게 잡혀 막대로 대가리를 톡톡 맞아 독이 바짝 오른 살모사처럼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 존이 혀를 날름 내밀었다.
“Do you understand what I mean?”( 내 말 알아들었어?)
나는 존이 더는 귀찮게 굴지 못하게 말(言)말뚝을 박았다. 내가 무슨 1타 수능 강사도 아니고. 더구나 외국인에게 우리의 역사를 일러준다는 것은 상당한 에너지가 소모되기 때문이었다. 고로, 추호도 그 질문에 응할 생각이 없었다. 그 문제가 아니어도 내 책상에는 오늘 중에 처리해야 할 서류뭉치가 잔뜩 쌓여있었다. 그 서류 더미 위에는 아내의 얼굴까지 올라앉아 있었다. 오늘 아침에 보았던 아내의 얼굴은 눈을 부라린 채 일주문을 지키고 선 사대천왕의 모습이었다.
존은 평소에도 유머러스해 엉뚱한 질문을 자주 해왔다. 일곱 살짜리 딸아이만큼 우리나라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다. 가령, 현관에 서서 “아빠! 방아깨비는 왜 엉덩이로 방아를 찧어?”라고 한다든가, 거북이 목이 되어가는 아비에게 목말을 태워 달라고 떼를 썼다. 존의 질문이 그것만큼 성가시고 귀찮았다.
나는 매일 같이 똑같은 업무에 시달렸으며 일한 만큼 월급을 받아 가는 회사원이다. 경영에 따른 매출은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그건 내 책임이 아니니 신경 쓰지 않아도 무관하다. 하지만 인과 관계에서는 수평과 수직은 엄연히 다르다. 나는 절대 존과 동일 선상에 놓일 수 없다. 그게 뒷머리를 아프게 만든다.
존은 그리스 세계 최대의 해운회사인 알미 탱커 선주 측에서 파견 나온 직원이다. 그의 업무는 주문한 선박의 공정을 자세히 검토했으며, 설계단계를 거쳐 선박이 건조되어 인도될 때까지 관리했다. 한마디로 말해 관리감독관이었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선주 측 담당자였기에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의 신경을 거슬러보았자 좋을 게 없다. 사소한 것에 태클을 걸면 다른 부서까지 피해를 줄 수도 있었다. 나는 업무 외에 로비스트 역할까지 부과된 게 화가 났다.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은 쌍둥이 건물 5층에 있다. 원형의 통유리 전면에는 다도해의 풍경이 한눈에 확 들어온다. 작은 섬들이 어깨동무한 듯 정겹게 놓여있다. 그 사이로 흐르는 물길을 따라 선박들이 들고난다. 그 섬에는 역사만큼 뿌린 내린 꽃이 핀다. 해안절벽마다 정열적으로 피어나 섬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 숲에는 희귀종인 팔색조가 휘파람을 불며 산다. 양반집 규수를 꼬드기는 난봉꾼처럼 ‘호오잇오오잇’하며 목청을 길게 뽑고 울었다.
그 꽃은 떨어져도 사쿠라*처럼 흐물흐물 지지 않았다. 꽃이라고 다 같은 꽃이 아니란 걸 보여준다. 어지간한 남정네의 추파에도 눈 돌리지 않는, 청상과부의 절개처럼 빳빳하게 떨어졌다. 아내는 매번 자존심 강한 꽃을 자기와 비교했다. 내가 보기엔 겉멋만 든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아내는 꽃을 깨끗이 씻은 후 건조기에 넣고 말렸다. 붉은빛이 우러나는 그 꽃을 나는 혈의 꽃이라 부른다. 짬짬이 설계 도면을 제작하다 동백 꽃차를 들고 창가에 붙어 선다. 꽃차를 마시면 전신에 붉은 기운이 뜨끈하게 돌았다.
30만 톤급 유조선은 초안을 잡고 설계만 6개월이 걸렸다. 이제 마지막 검토가 끝나면 현장으로 전달된다. 완성된 도면은 작업자들에 의해 공정별로 나누어져 선박이 건조될 것이다.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책상을 정리했다. 안도감에 두 팔을 활짝 벌리고 기지개를 켰다.
“No, I mean, really.”(아니, 나는 정말 진심이야.)
언제 왔는지 존이 등 뒤에 붙어 섰다. 내 책상 모서리를 짚고 문지기처럼 앙버티고 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싫은 내색을 할 수 없다. 마치 미늘에 아가미가 걸려 요지부동 못 하는 졸복 신세 같았다.
나는 근래 몇 달 동안 업무에 매달려 집안일을 소홀히 했다. 아이들 얼굴은 잠자는 모습만 보고 드나들었다. 매일같이 늦어지는 퇴근 탓에 아내의 잔소리가 콩 볶듯 탁탁 튀었다. 머리꼭지에 성냥불을 그어대면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오늘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일찍 귀가하고 싶었다. 아내의 마음을 달래려고 양고기꼬치를 주문하고 마트에 들러 캔 맥주를 사 갈 요량으로 퇴근을 서두르던 참이었다.
아이코. 나는 뒷머리를 움켜잡았다. 예고치 않은 복병을 만났다. 존의 표정이 워낙에 진지해 보였다. ‘나, 오늘 아내와 약속했어, 그러니 존! 다음에 가자.’라는 말을 끝내 하지 못했다. 존은 정말 우리나라 문화와 역사에 대해 궁금증을 가진 게 확실했다. 내 나라 역사는 누구에게나 애국심과 연결되었다.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 나갈까. 나는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지 않고 잔머리를 굴렸다. 1세기를 100년으로 가정해도 방대한 자료를 설명하기란 오 마이 갓! 이었다.
나는 급히 문화해설사인 형일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리가 어인 일이신가?”
라며 깐죽대듯 시비를 걸었다.
“군말은 필요 없고요.”
고조선부터 인쇄된 우리나라 전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더러 죽은 사람 무덤이나 파헤치고, 그것도 모자라 고물이나 뒤지고 다닌다고 흉을 보더니, 웬일?”
형일이가 으하하 웃었다. 아마도 침을 튀기면서까지 웃었을 것이다. 나는 제발 꼬치꼬치 캐묻지 말고 냉큼 대령하라고 통 사정을 했다.
공수해 온 전도는 빛이 바래 곰팡내가 풀풀 났다. 인터넷에 조회하면 상큼하게 알 수 있지만, 묵은 흔적으로 증명하는 게 훨씬 현실감이 살아날 것 같았다.
나는 책상 위에다 지도를 펼쳐놓고 존을 불렀다. 고조선부터 시작하여 마한·진한·변한으로 이어지는 역사는 일단 건너뛰었다. 삼국시대까지만 간략하게 설명했다. 광개토대왕에서 김유신까지 인물론은 처삼촌 벌초하듯 대충대충 일러주었다. 세도정치를 영광으로 내세웠던 양반 가문도 일단 제외했다. 구구절절 설명해보았자 외국인이 우리나라 장수들을 이해하기까지는 쉽지 않을 것이다. 뛰어넘은들 알게 뭐람. 시대별로 나뉘어 업적이 제각각 달랐으니 줄거리만 설명하고 깡그리 생략했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而 不如一見)이라! 나는 육두문자까지 써가며 주말을 이용하여 존을 데리고 현장학습을 나갔다. 우선 거북선 모형을 보여주며 이순신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다. 이순신 같은 위대한 장수가 있었다는 걸 꼭 알려주고 싶었다. 존에게 실물을 보여줌으로써 더 실감 나게 설명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강구항에 정박해둔 거북선에 올랐다. 그걸 볼 때마다 신통방통하다. 이순신은 어떻게 저런 걸 착안해냈을까. 물자가 부족했던 그 시대에 목재를 이용하여 전투선을 만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용두(龍頭)를 설치해 아가리로 대포를 쏘게 했다. 등에는 쇠꼬챙이를 촘촘하게 꽂았다. 안에서는 밖의 동태를 살필 수 있었지만, 밖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다. 용(龍)의 입에선 금방이라도 불을 내뿜을 듯 기세가 당당하다. 선체에다 구멍을 뚫어 총구로 겨누고 왜선을 향해 총통을 쏘았을 것이다. 무기가 월등했던 왜선을 목선 몇 척으로 격퇴했다는 건 세계해전사상 전후무후(前後無後)한 전쟁임이 틀림없다.
거북선 견학을 마치고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한산대첩 비(碑)가 있는 제승당을 찾았다. 망루를 오르는 길은 가풀막졌다. 뒤따라오던 존이 숨소리를 거칠게 내뱉었다. 정상에 도착하니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세계 굴지의 S 조선소가 눈앞에 펼쳐졌다. 도크에는 각국에서 주문한 선박이 빽빽하게 들어찼다. 거북선을 만들었던 조선 수군의 후예들답게 선박 건조작업이 한창이었다.
묵념하며 기념비를 한 바퀴 돌았다. 존이 뷰디풀! 를 외쳤다. 한국의 나폴리라는 일컫는 쪽빛 바다에 취한 건지, 이순신이란 한 남자에게 반한 건지. 그건 알 수 없다. 나는 거북선에 오른 장수처럼 팔짱을 끼고 헛기침을 했다. 비(碑)를 등지고 앉아 본격적으로 왜란에 관해 설명했다. 이곳이야말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존! 저 섬 너머에 말이야.”
나는 총을 겨누듯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존이 거수경례하듯 눈썹 위에 손바닥을 올려 붙었다. 알 수 없다는 듯 실눈을 올려 떴다. 나더러 뭐가 보이느냐고 물었다. 자기 눈에는 도무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럴 거야, 그럼 지금부터 자세히 말해줄게. 잘 들어봐. 저 너머에는 말이야. 제패니스란 나라가 있어. 한 번쯤은 존도 보았을 거야. 세계지도에서.”
존이 얍! 하고 턱을 까불었다. 확실히 이해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 나라가 두 번씩이나 우리나라를 쳐들어왔어. 1592년부터 치러진 전쟁이 자그마치 칠 년의 세월이었어. 임진년에 일어난 전란이어서 임진왜란이라고 하거든. 우리는 그들을 왜적이라고 불렀지. 지금도 그렇게 부르는 어른들이 꽤 있어. 그들은 우리나라를 36년 동안 지배했어. 우리말과 우리글을 빼앗고 개명까지 시켰어. 취직을 시켜준다는 말로 나이가 어린 여자들을 꾀어 위안부 일을 시켰지.”
존이 위안부 소녀상에 대해서만큼은 알고 있었다. 누군가 맨발의 소녀에게 손수 짠 털목도리를 둘러주었고, 조화를 바치는 걸 본 적이 있단다. 언젠가 일간지 한 면에 실린 흑백 사진 한 장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고 했다. 임산부인 소녀는 누군가의 누이였고, 누군가의 딸이었을 것이다. 그 모든 게 믿기지 않은 듯 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렇지, 그렇지. 그것뿐만 아니라, 청년들을 데려가 조선소에서 강제노역을 시켰지. 그분들은 더러 돌아가시거나 몹시 늙어버렸는데 지금까지도 사과는커녕 보상마저 전혀 하고 있지 않아.”
나는 여기까지 설명을 하다 잠시 쉬었다. 고구마를 먹고 체한 듯 명치끝이 먹먹했다. 준비해간 텀블러 뚜껑을 열어 존에게 물을 건넸다. 나머지는 내가 벌컥벌컥 들이켰다.
“존!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 저기, 저기. 너희 회사에서 주문한 셀파오더호 선박이 보이지? 그래, 그래.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저곳 말이야. 전투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를 치렀던 한산도 대첩이야. 그때 이순신 장군이란 아주 훌륭한 장수가 있었거든.”
존이 귀를 쫑긋 세웠다. 우리는 역적모의를 하듯 지도를 펼쳐두고 서로 이마를 맞대었다.
*
그때가 오월이었다. 한산대첩이 벌어졌던 그때 날씨는 그야말로 춘풍화기(春風和氣)에 천지가 만화방창(萬化方暢) 했을 것이다.
동백꽃이 떨어지고 라일락이 피었다. 매혹적인 향기가 바람에 날려 남해안에 젖어 들었다. 논배미에서 맹꽁이가 자지러지게 울었다. 왜란이 일어나고 20여 일 만에 수도가 점령당했다. 왕은 한성을 포기하고 평양으로 은신한 상태였다. 장수에게 주어진 임무는 나라와 백성을 지키는 일이었다. 왜선은 부산포를 점령한 뒤 남해안을 향해 빠르게 진격해 오고 있었다.
이순신은 곧 펼쳐질 출전에 대해 부하들과 작전을 짜고 있었다. 지리지형상 남해안이 리아스식 해안으로 형성된 걸 알았다. 물길은 웅천‧저도‧가덕도를 휘돌아 한산도로 향했다. 항해 중 날이 저물어 소비포에서 정박했다. 조선 수군은 판옥선과 협선, 포각선 46척에 각각 나누어 탔다. 영등만호에 우치적, 지세포 만호에 한백록, 옥포만호 이 운용 등이 합류했다.
그날 조선 수군은 절영도를 출발하여 가덕도와 안골포, 견내량을 거쳐 한산도(통제령)에 도착했다. 한산도에서의 결투는 한 치도 물러설 수 없었다. 항해 중 물길이 거칠어 선박의 롤링이 매우 심했다. 부하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모두 멀미에 시달리는 얼굴이 하얬다. 이물과 고물로 우르르 몰려 가 토악질을 했다. 먹은 게 없어 노란 물만 게워냈다.
낭알만에 운해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미 여러 척의 왜선이 선창에 정박해 있었다. 이순신은 기회를 노렸다. 어둠이 내릴 즈음 기습적으로 쳐들어갔다. 내항에 갇힌 왜선은 요지부동이었다. 꼼짝없이 갇혀 탈출구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했다. 기회를 잡은 조선 수군이 콩 볶듯이 총통을 갈겼다. 우선 30척을 보기 좋게 명중시켰다. 왜선이 불타면서 내뿜는 화염이 바다를 검게 뒤덮었다. 격침한 일본 군선은 무려 백여 척에 달했다.
천연요새인 남해안으로 물자 보급을 해야 했던 일본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이순신이란 장수와의 일전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해상은 물론 지상 전투에서도 서로 물러설 수 한 판의 명승부가 펼쳐졌다. 이렇게 하여 한산도 대첩에서 시작하여 서서히 명량해전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순신은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경상 우수사 원균이 이끄는 군선과 합세했다. 세 번째 전투에서도 승리를 확신하며 묘안 책을 짜내 판판히 승기를 잡아갔다.
치열하게 펼쳤던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에 들었다.
“장군!”
부하가 허술한 복장을 바람에 날리며 급히 뛰어왔다.
“무엇이 그리도 급하더냐?”
“웬 마부가 장군을 급히 뵈옵기를 간청하옵니다!”
“그래,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무엇이더냐?”
부하의 등 뒤로 사내가 몸을 숨기고 있었다. 사내는 봄 햇살에도 추운 듯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오랜 가난에 시달려 눈 주위가 움푹 들어갔다. 큰 눈을 굴리며 잔뜩 주눅이 들어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행색이 초라했다. 삼베 적삼은 소매 끝이 헤져 나달나달했다. 구멍이 숭숭 뚫린 핫바지에 바람이 든 듯 포장지처럼 펄럭댔다. 등짐을 메었던 어깨에 말똥이 덕지덕지 말라붙었다. 먼발치에 떨어져 있어도 고린내가 풍겼다. 이순신은 크게 헛기침을 하며 자초지종을 물었다.
사내는 그 연유를 소상히 아뢰었다. 자기는 인근 작은 섬에서 말을 기르는 마부라고 했다. 말을 치다 산등성이에서 내려다보니 어제 미시(未時)쯤 칠십여 척의 왜선이 영등포 앞바다에 나타났다가 견내도에서 닻을 내리고 머물고 있다고 전했다.
이순신은 마부에게 그곳의 지형에 대해 소상히 알리도록 했다. 그자의 말에 의하면 견내량으로 통하는 물길은 길목이 매우 좁고 암초가 많다고 했다. 자칫, 판옥선끼리 서로 부딪치면 파손될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다.
뜻밖의 정보를 얻은 이순신은 유인책을 썼다. 마부가 일러준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근 백여 척에 가까운 왜선이 바다에 떠 있었다. 한순간에 물리치기란 쉽지 않았다. 이순신은 마부가 일러준 지형을 이용해 우선 판옥선 몇 척을 선봉에 세웠다. 나머지는 넓은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했다. 전술에 말려든 왜선은 일제히 돛을 올리며 추격해왔다. 조선 수군은 겁에 질려 거짓으로 퇴각하는 척했다. 얕잡아 본 왜선이 그걸 놓칠세라, 기세등등하게 따라왔다. 바다 한가운데까지 뒤쫓아 왔다.
“바로 이때다!”
이순신은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자·현자·승자총통을 쏘아 올렸다. 한꺼번에 섬멸할 계획을 세웠다. 화염이 콩을 볶듯 피어올랐다. 적선 두 세척이 한순간 부서졌다. 승기를 잡은 군사들이 돌진하며 총알을 퍼부었다. 그 형세가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는 태풍 같았고, 천풍이 치는 우레와 같았다.
계획은 적중했다. 자정을 기준으로 왜적의 시선을 따돌렸다. 가깝게는 율포와 당항포, 사천 쪽에도 조선 수군을 배치해두었다. 남해안은 길목이나 마찬가지였다. 기필코 이곳만큼은 사전에 차단해야만 했다. 이순신은 이언량이 이끄는 군졸을 풀어놨다. 이언량의 전투지휘는 대담하고도 과감했다. 성격이 불 칼 같아 돌격대장이란 칭호까지 붙어있다. 물불 가리지 않은 성격이라 어느 정도 마음이 놓였다. 그로 인해 임진왜란의 판세를 완전히 바꾼 계기가 되었다.
이순신은 그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시피 했다. 저 멀리 부산포에서 왜선이 하늘을 향해 계속해서 총포를 쏘아 올렸다. 벼락 치듯 하는 소리에 귀가 시끄러웠다. 상념에 젖은 이순신은 턱을 괴고 앉아 전투에 대해 골똘히 생각한다. 왜적은 생각보다 열 배나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다. 다시 쳐들어올 것을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이번 전투야말로 일생일대의 운명이 걸린 물러설 수 없는 전쟁이 펼쳐질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날이 밝아 왜선을 보는 순간 이순신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왜선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비단 휘장을 켜켜이 둘러치고 요란하게 치장했다. 준비해온 화약 무기를 사용할 좋은 기회였다. 멸치 몰이하는 후릿배의 벼리처럼 야금야금 조여들 듯 들어갔다. 조선함대가 도망간 줄로 알았던 왜적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부하들이 화살촉에 붙을 붙었다. 조선함대는 진법과 지리(地理)에서도 유리한 입장이었다. 이순신의 명령에 따라 선봉‧ 중군‧ 후군은 위용을 갖추었다. 힘차게 군악을 울리며 조선함대는 왜선을 압박해 들어갔다.
한산도로 오기 전에 우선 가덕도에서 옥포로 진입했다. 늦은 밤이라 지형을 알 수 없었다. 날이 밝고서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옥포만의 모래가 한눈에 들어왔다. 햇살에 반짝이는 모래는 그야말로 금빛이었다. 휘어진 백사장은 길게 아주현으로 이어졌다. 해안을 따라 해당화가 만발하게 피어났다. 왜적의 침입이 없었을 적에 참으로 한가한 어촌이었을 듯했다. 여름이면 남자아이들은 발가벗은 채 멱을 감았고, 여자아이들은 봄나물을 캐러 들로 산으로 헤매고 다녔다. 마을은 몹시 평화로웠고 사람들은 참으로 어질었다. 배곯지 않으려고 어른들은 산비탈을 개간해 고구마를 심었다.
풍경화 그림처럼 한가롭던 옥포만에 왜선이 빽빽하게 진을 치고 있었다. 함대는 전투선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선박의 사면을 돌아가며 금빛 도금을 입혀 휘황찬란했다. 층마다 병선들은 이물과 고물을 화려하게 장식했었다. 이물에 꽂은 오죽(烏竹) 장대 끝에는 오방색 깃발을 매달았다. 휘장은 하나 같이 비단이었으며 바라만 보아도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지붕은 나고야성 병풍 그림을 본을 떠 그려 넣은 층루선(層樓船) 군선이었다. 기와만 올리지 않았지, 누각의 지붕으로 보아 뱃전에 올린 사찰 같았다. 왜적은 선체에다 울긋불긋한 오색 휘장을 휘감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휘날렸다.
그들은 이미 수일 전에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고 있었다. 방화로 인하여 마을 전체가 시커먼 연기가 뒤덮고 있었다. 왜군은 온갖 노략질과 분탕질로 주민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일본도로 지아비들이 틀어 올린 상투를 싹둑 잘라냈다. 지어미들이 기함했다. 아녀자들을 희롱하고 온갖 곡물들을 약탈해갔다. 평생을 지아비만 섬겼던 아낙들이 옷고름을 잡아 뜯긴 채 아이들을 껴안고 솔가리 속으로 숨었다. 더러는 아궁이로 들어가 구들장 아래 납작 엎드렸다. 골목마다 비명이 들렸다. 남정네들은 식솔을 데리고 죽을 둘 살 등 옥녀봉으로 올랐다.
왜군은 조선 수군의 들이닥치자 예상치 못한 상황에 꼼짝을 못했다. 난데없이 나타난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선박 단을 보고 도망가기에 바빴다. 괴선박은 처음 듣는 요란한 군악을 울리며 자신들을 향해 다가온다는 걸 알았다. 혼비백산한 왜군들이 갈팡질팡했다. 벌어진 입은 턱관절이 빠져 다물어지지 않았다. 더러는 물에 뛰어들었고, 옥녀봉으로 도망을 치기도 했다. 조선함대는 모두 도망가고 없다는 생각에 천하태평으로 분탕질에 정신을 놓고 있었다.
절간 같은 3층 누각, 푸른 일산, 검은 장막, 쌍돛들이 불타는 모습을 본 이순신은 불화살을 쏘아 비단 장막과 돛을 맞추자 맹렬한 불길이 치솟았다. 대표소리가 귀를 찢을 듯이 터졌다. 부하들은 두 쪽으로 갈라져 포구를 에워쌌다. 불꽃이 도깨비불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훨훨 탄다. 이 전쟁도 하루빨리 끝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그날 밤 이순신은 승리의 자축포를 옥녀봉으로 쏘아 올렸다. 이러한 공격방식을 거북선과 판옥선의 ‘협격전’이라고 불렀다.
전날 전투에서 20대로 보인 젊은 왜장이 호기를 부렸다. 누구를 위한 죽음인지,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포구 밖으로 나와 있던 층루선이 왜장을 호위하며 방어전을 펼쳤다. 그러나 왜장은 조선 수군이 발사한 탄환을 맞고 비장한 최후를 마쳤다. 그가 흘린 핏물이 바다를 물들이고 있었다. 젊은 적장의 주검을 본 이순신은 마음이 몹시 아팠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남의 나라를 침략한 침범자이다. 그들의 피로 남해안을 염하고 싶은 오직 그 마음뿐이었다.
우두머리가 죽자 왜군은 모두 제각기 살길을 찾아 달아날 구멍을 찾아 뭍을 향해 도망을 갔다. 그때를 놓칠세라 조선함대는 틈을 주지 않았다. 선단을 나누어 왜군들의 앞과 뒤를 가로막으며 집중타를 퍼부었다. 겁에 질린 왜군들과 나머지 병선들도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쉬지 않고 몰아친 함포사격에 깨지고 불타기 시작했다.
왜군들은 속속 바다로 몸을 던졌다. 육지까지 헤엄쳐 달아날 심산이었다. 조선 수군은 그 순간마저도 가만두지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 수십 척의 협선과 포작선들이 사방에서 달려 나와 화살을 쏘고 창을 던지며 왜군들의 탈출을 저지하고 나섰다.
바다는 필사의 탈출을 감행한 왜군들로 넘쳐났다. 수천의 왜군들이 물거품을 일으키며 죽을힘을 다해 헤엄치고 있었다. 워낙 많은 수가 한꺼번에 탈출을 시도했기 때문에 적지 않은 수의 왜군들이 조선함대 수병들의 공격을 피해 육지까지 헤엄쳐 도망칠 수 있었다. 이에 일부 조선 수병들은 육지까지 추격했는데, 그 과정에서 희생자가 발생했다.
*
한산도로 가는 길목인 견내도(見乃梁)는 물살이 거칠었다. 굽이치는 물살에 선박의 롤링이 심했다. 노를 저어도 더는 전진하지 못했다. 선박은 얼음판에서 팽이가 돌 듯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이안류까지 굽이쳐 자꾸만 먼 곳으로 떠내려갔다.
그곳을 지날 때 노를 젓던 장수가 투덜댔다. 노에 저어 나갈 때마다 검은 해초가 걸려 아주 성가시고 귀찮다고 했다. 걷어 내느라 힘이 부친다며 울상을 지었다.
“그것이 무엇이냐?”
이순신은 배의 후미로 가 물었다. 부하가 미끈미끈하고 검푸른 빛이 감돈다고 했다. 정말 선박의 이물에 산처럼 쌓여있었다. 한쪽에선 걷어 올리고 다른 쪽에선 바다로 쳐내기 바빴다.
“그래, 식용이 가능해 보이더냐?”
이순신이 부하에게 되물었다. 먹을 수 있다면 모자란 식량에 보탬이 될 듯했다. 부하가 긴 막대로 건져 올린 걸 들고 왔다. 물을 머금은 해초는 매초롬했다. 손으로 만져보니 그 느낌이 여인의 피부처럼 부드러웠다. 머릿결은 감탕 같았고, 끝부분에 비녀를 꽂은 듯 오글오글한 게 붙어있었다. 이순신이 손수 그걸 뭉뚝 잘라 입 안에 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약간 떨떠름했지만, 은근히 뒷맛이 구수한 듯했다.
이순신은 무릎을 딱 쳤다. 식용도 가능했지만 먼저 적을 유인하기에 좋게 보였다. 들잇대로 건져 올려 뱃전에 수북하게 쌓았다. 검게 쌓은 물체는 멀리서 보면 죽은 사람의 시신처럼 보였다. 축 늘어진 채 바다에서 건져 올리는 걸 본 왜선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이순신은 오랜만에 호탕하게 웃을 수 있었다. 허기에 지친 부하들이 미역귀를 잘라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모두 들쩍지근한 맛이 난다고 했다. 군졸 몇 명은 신바람이 난 듯 곰비임비 미역을 건져 올렸다. 미역이 뱃전에 산더미처럼 쌓였다. 얼마나 많이 캐내 널어놨던지 해안 전체가 시꺼멨다. 한동안 수군들이 먹을 식량을 넉넉하게 비축해두었다. 그걸 물에 불려 죽을 끓여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해 연말 이순신은 부하들을 시켜 견내도 미역을 임금님께 진상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낭알만이 어둠에 묻혔다. 멀리 옥녀봉에서 봉홧불이 피어오른다. 또 한 차례 격전이 벌어질 것이다. 몇 차례 교전 끝에 밀리고 밀리는 전투가 있었다. 적군 10척을 파괴하고 일주일째 대치 상황은 잠잠해졌다.
그사이 초승달은 보름달로 바뀌었다. 달무리 속에서 죽은 큰아들 면의 얼굴이 희미하게 오락가락한다. 못난 아비를 두어 자식들은 전장에 내보낸 아비의 심정이 갈가리 찢어진다. 여수 해전에 출전한 작은 아들 소식이 궁금하여 부하에게 그쪽 상황은 어떠하냐고 물었다. 아직은 잠잠하여 매우 평화롭다고 전해왔다.
이순신은 낭알만을 내려다보았다. 달빛에 비친 물비늘이 한 꺼풀씩 벗으며 밀려들었다. 포구는 칠백 리 물길을 돌고 돌아 바위에 와 부딪혔다. 어머니의 병환은 또 어떠한지, 불효자인 자신을 자책하며 상심에 빠졌다. 이 지루한 전란이 언제나 끝이 날지. 간간이 잠을 깨우듯 부산포에서 적들이 쏘아 올리던 소총 소리도 잠잠했다.
이순신은 손가락을 꼽아본다. 음력 사월 초이레 같기도 하다. 여인의 눈썹 같은 달이 옥녀봉 너머로 기울고 있다. 어림잡아 두 달 남짓이나 집에 가지 못했다. 노모와 아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집을 떠나오던 날 대문 칸에서 흘끗 아내를 보았다. 아내는 헛간에 몰래 숨어서 울었다. 지아비로서 그 모습을 보고도 어깨를 다독여 주지 못했다. 지어미는 길 떠나는 지아비에게 눈물을 보이는 건 죄악이라 여기던 순한 어진 아내였다. 병색이 완연해 보이던 어머니는 뒤도 돌아보지 말라며 손을 흔들었다.
이순신의 기분을 눈치를 챈 부하가 술을 가지고 왔다. 안주로 마른 포를 들고 왔다. 고기는 장작개비처럼 바짝 말라 있었다. 생물이었을 적엔 제법 살이 통통했을 듯했다.
“이 술이 무슨 술인고?”
“예 죽로주(竹露酒)라고 하옵니다.”
노인은 죄를 짓고 포도청에 잡혀 온 듯 잔뜩 주눅이 들었다. 이순신이 애틋한 눈빛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이 입은 핫바지는 무릎이 떨어져 너덜너덜했다. 어깨에 걸친 삼베 적삼은 홑겹이었다. 바닷바람이 불 때마다 노인은 추위를 느낀 듯 몸을 떨었다. 옷이라고 걸쳤지만, 조각보처럼 덕지덕지 덧댄 누더기였다. 등은 여름 내내 흘린 땀이 배어 누렜다. 견내량에서 보았던 노인과 다를 게 없다. 이순신은 노인의 차림새에 가슴이 메었다. 노인은 허리를 몹시 굽인 채 죄인처럼 서 있었다.
“어서 이리 가까이 오시게나.”
연배로 치면 부모 맞잡이로 보였다.
노인이 품 안에서 술병을 꺼냈다. 푸른 색깔이 감도는 술은 죽로주라고 했다. 술안주로 문어숙회와 청어(靑魚), 전복도 있었다. 이순신은 좁쌀과 고구마로 빚은 술은 먹어 보았지만, 대나무로 빚은 죽로주는 처음이었다. 술을 따르니 술에서 대나무 향기가 났다. 연거푸 몇 잔을 들이켰더니 취기가 돌았다. 안주를 입 안에 넣고 오래도록 씹었다. 씹을수록 맛이 좋았다.
“이 고기는 무슨 고기이더냐?”
“예, 장군님! 남해에서 주로 잡히는 대구(大口)라고 합니다.”
입은 크고 눈은 왕방울만 했다. 마른 게 그 정도였으니 생물 때는 꽤 컸을 듯했다. 부하가 돌멩이를 주워 와 소리 나게 두들겼다. 씹으면 씹을수록 쫄깃했다.
이순신은 노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노인은 안절부절못했다.
“그래, 이 고기도 자네가 잡았느냐?”
“예, 장군님”
이순신은 덥수룩한 수염을 쓰다듬었다. 노인의 얼굴에선 그제야 웃음기가 돌았다. 이순신이 술을 한 잔 권했다. 노인은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술잔을 받았다.
“소인이 조그마한 거룻배가 하나 있습죠. 그걸로 식구들이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고 삽니다. 소인이 알기로는 삼포왜란 전에도 왜구들이 어장에 불법으로 들어와 마구잡이 잡아가는 바람에 어민들은 죽을 맛이었습죠. 지금은 전란 통이라 고기잡이를 못 하고 있습죠. 또한, 한 달에 두 번씩 조금 사리 물때가 있는지라 이래저래 작업을 못 하니…”
노인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다.
“뭣이? 물때라 했더냐?”
“예, 예”
“그래, 그게 무엇이더냐?”
“초하루 보름을 기준으로 하여 밀물과 썰물이 들고납죠.”
노인이 바다 물때를 빠삭하게 알고 있다고 했다. 이순신은 노인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노인의 말대로 하면 조수간만을 활용하면 적을 쉽게 가둘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순신은 비밀을 유지한 채 일주일 남짓 기다렸다. 모처럼 수군들은 편안하게 휴식을 취했다. 뒷산에 올라가 대나무로 꺾어와 낚싯대를 만들었다. 바위에 앉아 한가롭게 낚시를 했다. 제법 팔뚝만 한 고기들이 잡히기도 했다. 솥을 걸어놓고 생선을 푹 고아 뼈를 발라내고 어죽을 끓였다. 한편에선 말린 미역을 물에 불러 좁쌀을 풀어 넣고 죽을 끓이기도 했다. 모두 배불리 먹고 코를 골고 낮잠을 즐겼다.
이순신은 전날 밤 과음 탓으로 속이 쓰렸다. 복부를 움켜잡고 트림을 했다. 얼굴빛이 좋지 않은 걸 보더니, 부하가 달려와 여쭙기를 어디가 불편하냐고 물었다. 과음 탓이라고 했다. 얼마 뒤 부하가 국물을 들고 왔다. 생대구로 끓인 해장국이었다. 풋고추를 썰어 넣어 시원하고 칼칼했다. 그 맛에 홀로 계신 어머니 생각이 났다.
초가을에 접어들었다. 샛바람이 불었다. 오래도록 시달린 군졸들이 하나둘 건강이 나빠졌다. 바닷바람을 맞아 감기·몸살에 시달렸다. 여기저기 콜록대는 기침 소리가 들렸다. 밤마다 끙끙대며 앓는 소리가 막사마다 새어 나왔다. 뱃속에서도 논바닥에 엎드린 맹꽁이처럼 꼬르륵댔다. 그런 몸을 이끌고서도 조선 수군은 날이 밝으면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순신은 그런 부하들의 사기를 북돋워 주었다. 장수들에게 큰 공이 골고루 돌아가게끔 배려했다. 저마다 경쟁적으로 왜군을 무찔러 나라에 충성토록 여건을 조성했다. 이 때문에 이순신 함대에는 공을 놓고 서로 양보하는 기풍이 생겨나기도 했다. 활쏘기 대회를 열어 죽로주와 안주를 듬뿍 제공했다. 이것 또한 이순신의 통솔력이었다.
낭알만에서 바라본 앞산 대숲에서 푸른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대나무가 물결처럼 일렁였다. 심신을 단련하겠다며 병졸들이 산을 올랐다. 여기저기 무소의 뿔처럼 솟아오른 죽순을 한 아름씩 캐왔다. 겉껍질을 벗겨 칼로 써니 속은 비어 있었다. 속은 비었건만, 빳빳한 절개는 충신 같았다. 모두 절구에 둘러서서 비지땀을 흘리며 찧었다. 밀가루와 버무려 죽면(竹麵)을 만들어 먹었다.
또한, 조릿대는 꺾어와 낚싯대로 사용했다. 팔뚝만 한 고기가 수도 없이 올라왔다. 배불리 먹고 수군들은 푹 쉬었다. 또 노랗게 익은 열매를 한 바구니 따왔다. 이순신이 무슨 열매냐고 물었더니 유자라고 했다. 쪼개보니 여섯 토막이 났다. 그 향은 코끝을 자극했다. 우적우적 씹었더니 신맛이 나서 뱉어버렸다. 물을 붓고 끓이니 그 향이 사방으로 퍼졌다. 가마솥에다 넣어 팔팔 끓여 부하들을 마시게 했다. 한 사발씩 마시고 온몸에 열이 돌고 기운을 차리는 듯했다.
작은 섬 증도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이끈 함대는 왜적의 봉쇄로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학익진을 펼쳤지만, 군비와 군사 면에서도 큰 손실이 있었다. 낭알 만에서만큼은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절체절명 위기였다. 이순신은 밤이 이슥하도록 바다만 바라보고 있다.
이순신은 정결(丁榤)을 시켜 판옥선을 만들게 했다. 정결은 군사 발명가로 판옥선, 불화살, 대총통 등 전쟁에 필요한 핵심적인 무기를 고안해낸 장수였기에 충분히 해낼 것 같았다. 부산포 싸움 역시 정걸의 기획에 따른 지휘로 이루어졌다. 정걸은 적의 보급로는 물론, 수송기지였던 부산포를 파괴해야 한다는 걸 건의했던 충신이었다. 이순신은 정결을 상당히 신임했다.
정결은 부하들을 시켜 인근 산에 올라 나무를 캐왔다. 굵은 나무는 캐서 선박의 밑창으로 사용했다. 이물과 고물을 잇고 중간에 망루를 세웠다. 전술은 학이 비상하듯 날개를 편 모양의 학익진 전술을 짰다. 일순간에 일시집중타( 一時 集中 打)를 해버릴 기회를 늘려갔다.
오월 스무여드레 그믐밤이 기울고 있었다. 낼 모래면 초승달이 뜰 것이다. 노인의 말대로라면 초하룻날과 초이튿날이 물때가 가장 좋다고 했다. 충무공은 부하들에게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싸우자고 격려를 했다.
격전의 날이 밝았다. 파도가 마름질하며 서서히 물러났다. 갯벌이 훤히 드러났다. 왜선은 모래 턱에 덩그러니 올려졌다. 전진도 후진도 할 수 없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모래 턱에 걸린 왜선은 옴나위 못하는 적을 향해 콩 볶듯 총통을 휘갈겼다. 놀란 왜적이 개펄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개펄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다. 몸부림치면 칠수록 늪에 빠진 듯 점차 더 깊이깊이 빠져들었다.
그 기세를 몰아 일대 난타전이 펼쳐졌다. 가슴에 화살을 맞은 적병이 뒤로 나뒹굴었다. 화살을 등에 꽂은 채 추풍낙엽처럼 바다로 곤두박질쳤다. 다리에 맞고 비틀거리거나 피를 토했다. 울부짖는 소리가 실로 참담했다. 이순신은 마음이 아팠지만, 사소한 인정에 끌릴 수 없었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부하와 자신이 죽을 처지였다.
이순신은 휘장에다 일필휘지로“母狃一捷 慰撫戰士 更勵舟湒 聞變即赴 終始如一”라고 썼다. 그걸 푯대에다 꽂고 부하들을 호령했다. 두 팔을 치켜들며 선두에 섰다. 부하들을 통솔하며 적진을 향해 돌격 명령을 내렸다. 그때 화살 하나가 날렵하게 날아와 어깨에 내리꽂혔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이순신은 한 손으로 지휘하며 다른 손으론 화살을 뽑아냈다. 그 순간 혈의 꽃이 활짝 피었다. 꽃물은 앞가슴을 적시고 고의를 타고 흘러 버선목까지 질퍽하게 고여 들었다. 미처 수습할 겨를도 없이 이번에는 철환이 날아와 비수처럼 다른 어깨에 꽂혔다. 이미 흘린 피는 선지 핏덩이처럼 굳어갔다.
“철환이 나의 뼈는 뚫었을지언정 뜨거운 내 심장은 결코 뚫지 못했을 것이다!”
*
“이순신 장군은 화살을 맞고 죽어 가면서도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지. 훌륭한 장수로서 최후마저 멋지게 끝낸 남자 중의 남자였지.”
설명을 들은 존이 그제야 모든 걸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밀물이 서서히 낭알만을 채워간다. 임진년의 역사를 한 페이지씩 넘기며 밀려온다. 나라를 위해 희생된 원혼들이 육백여 년의 세월을 두고 저 바닷속에 잠들었다. 그날의 역사를 간직한 암벽은 백골이 되어 하얗다. 빗장뼈같이 도드라진 돌 위로 동백꽃이 툭, 떨어진다. 백의(白衣)에 혈의 꽃이 핏물처럼 서서히 스며든다. 붉은 절명은 고귀하고 아름답다. ‘나는 조선의 수군이었노라! 외치던 나이 어린 군졸의 충정의 혈서도 그렇게 뿌려졌을 것이다.
나는 조선 수군의 충심을 위로하듯 바다를 향해 술잔을 뿌렸다. 떨어진 꽃잎이 물결 따라 흘러간다. 내 손을 꽉 움켜잡는 존의 손바닥이 뜨거웠다. (*)
*이순신에 관한 참고문헌을 자료 삼아 창작했음을 밝힙니다.
김 임 순
월간 문학공간 소설 등단, (2004. 3월)
거제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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