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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7 유북한기 遊北漢記 송상기
玉吾齋集卷之十三 記
송상기(宋相琦) 생년 1657년(효종 8) 몰년 1723년(경종 3)
(정유년, 1717년, 숙종 43)
9월 1일 창의문을 나섰다. 탕춘대를 지나면서 지난 정묘년(1687년, 숙종 13년) 봄에 김 사긍(金土肯)과 벗 이 중강(李仲剛) 이 함께 이곳에 유람왔던 일이 생각났다. 손꼽아 세어보니 30년 전 일로서 김공은 세상을 떠났다. 옛일을 생각하니 감회를 누를 길이 없다.
무계동의 많은 소나무가 모두 사라졌다. 임술년(1682년, 숙종 8년) 초여름에도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님과 퇴우(退憂) , 문곡(文谷) 두 외숙을 모시고 농암(農嚴) 김창협(金昌協)과 함께 이곳을 유람하였다. 지금 나 혼자만 살아 있을 뿐이다. 그런데 소나무도 모두 벌레 때문에 죽었다. 산천도 옛 모습이 아니다. 사람들이 죽은 것만 슬픈 것이 아니다.
구불구불 위로 올라가니 임양군(臨陽君)의 시냇가 정자가 나왔다. 바위틈새의 물을 끌어서 아래위로 두 연못을 만들어서 서늘하였다. 북교를 지나니 산길이 점차 높고 험준했다. 5리쯤 가니 새로 축조한 북한산성 남문이 있었다. 문루에서 잠시 쉬는 중에 승려 몇 명이 영접하였다.
이어서 어영청 별관과 보국사를 두루 관람하였다. 보국사는 새로 창건한 절이기 때문에 하나도 볼 만한 곳이 없다. 보광사가 그 남쪽에 있다고 하는데 역시 누추하다고 한다. 금위영 별관은 동문 안에 있는데 그 규모가 어영청 별관보다 작다.
동문에서 성벽을 따라 걸어가면 장대(동장대)에 도착한다. 매우 높은 곳에 있으므로 산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백운대, 노적봉 등 여러 봉우리들의 늘어선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서남쪽으로는 한강과 서해 바다가 멀리 구름 건너에 보였다. 작년에 숙종 임금께서 북한산성에 행차할 때 이곳에 들렀다. 용암사는 새로 만든 절로 백운대 가까이 있는데 깨끗하여 앉아 있을 만하다.
골짜기를 따라서 성 안으로 들어갔다. 중흥사에 도착하니 벌써 저녁이 되었다. 경리청 별관과 창고는 백여 칸이 되는데 중흥사 전후좌우로 연이어 늘어서 있다. 중들이 산영루를 중수하였고 단청칠이 이제 막 끝났다. 자리를 펴고 앉아 난간 아래를 보니 물빛 속에 산 그림자가 드리웠다. 산과 그림자가 아래위로 이어진 모습을 보니 눈과 귀가 맑아지고 정신이 확 깨는 것이 참으로 즐길만한 경치였다. 중흥사는 옛부터 이름난 절이다. 성을 쌓고 창고를 만들 때 군졸들 발길에 지저분해진 곳이 여러 곳이 생겨서 그 청결한 맛이 줄어들었다. 저녁에는 경리청 별관에서 유숙했다.
이튿날 아침 일어나 노적사를 둘러보았다. 이 절도 새로 건축했는데 노적봉 아래에 있다. 노적봉은 다른 곳에서 보아도 뛰어나다. 그러나 이곳에서 보니 더욱 그러하였다. 암벽이 천만 길이나 되었고 우뚝 솟아난 모습 때문에 부지 중에 두려운 마음이 생겨 의지할 곳이 없었다. 자첨(子瞻)은, ‘중국 여산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면’이라고 했지만 누구든 직접 이 산중에 와서 본 사람은 그의 말을 꼭 믿지는 않을 것이다. 중장대가 절 뒤에 있어 상장대와 마주보고 있다. 올라가 둘러보니 백운대가 노적봉 위로 솟아있지만 여기서 보면 어느 것이 더 높은지 구분할 수가 없다. 능선 하나를 넘어 산 밑으로 내려가는데 훈련도감 별관과 창고를 지나 능선을 넘어가니 북문이 그 뒤에 있었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민지사에 도착하였다. 이것도 새로 건축한 절이다. 민지암의 수석은 중흥사 부근과 같이 치지만 바위가 모래에 덮혀 예전만 못하다. 민지사는 서문 안에 있는데 비록 그윽한 맛은 없으나 폭포수와 개울의 바위는 역시 볼 만하였다. 방과 마루가 넓으며 밝고 깨끗하기로는 여러 절 가운데 으뜸이다.
북한산성의 서문으로 올라갔다. 이곳은 산성의 남쪽 능선과 북쪽 능선이 합쳐지는 곳이다. 산 속의 모든 물은 이 옆 골짜기로 빠져나간다. 성벽 역시 물이 빠져나가는 골짜기에서는 끊어지고 양쪽으로는 급한 절벽을 이룬다. 그동안 물 위에 돌로 수문을 만들어 막았으며 그 높이가 여러 길이 된다. 산성 밖으로는 산세가 차차 낮아져서 구불구불 내려가 평지인데도 수십 리 먼 곳까지 볼 수가 있다. 문루에 올라가 잠시 쉬고 다시 중흥사 가는 길을 따라 발길을 돌렸다.
국령사와 원각사 두 절은 원효봉 아래에 있다. 그러나 갈길이 바빠서 들리지는 못하였다. 중성문을 둘러보았는데 산의 중앙에 자리잡고 옆에 수문이 세워져 있다. 이곳의 수석은 제일 아름답다. 증봉 아래에는 부왕사를 새로 건축했다. 그 단청이 소나무, 회나무 숲을 은근히 비추고 있는 모습이 눈에 크게 뜨였다. 다시 산영루를 거쳐 행궁으로 가서 둘러본 후에는 처음 왔던 길을 따라 남문을 통해 성을 나서서 돌아왔다.
(아들) 환(煥)과 민랑(閔郞)이 탕춘대 신관으로 마중나와 기다리고 있기에 그곳에서 같이 노닐었다.
이번 산행은 혼자 길을 나섰기 때문에 동반자가 없었다. 그러나 매우 즐거운 유람이었다. 마침 가을색이 짙은 때라 경치가 맑고 아름다웠으며 단풍과 국화가 밝은 것을 보고 주변을 배회하며 시를 읊조리다 보니 돌아갈 것을 잊을 정도였다.
속세에 묻은 때를 씻어버리기에 족했다. 참으로 떠도는 인생살이에 반나절 한가로움을 우연히 얻은 것이라고 할 만하다. 다만 산성의 규모와 제도 그리고 그 이해득실에 관한 것은 이 글에서 모두 말할 수가 없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았다.
이 중강(李仲剛) -- 이건명
아버님 -- 송규렴
퇴우(退憂) -- 김수흥
문곡(文谷) -- 김수항
자첨(子瞻) -- 소식(蘇軾)의 자(字)
민지사 -- 지금의 서암사
숙종 13 1687 정묘 康熙 26 31
九月初一日。出彰義門。過蕩春臺。憶在丁卯春。與金相士肯,李友仲剛。同遊于此。屈指三十年。金相已作古人。俛仰今昔。不堪山陽之感。武溪萬株松。今無一存。壬戌初夏。陪先君及退憂,文谷兩舅氏。農巖諸從。連袂遊從。今獨余一人在耳。而松亦爲虫蝕盡。山水林壑。無復舊觀。不但人事之變。爲可愴悢而已。稍迤而上。有臨陽君溪亭。引澗水。鑿上下兩池。頗覺蕭洒。過北郊。山路漸高漸險。行幾五里。卽北漢新城南門也。小憇門樓。僧輩數人來迎。仍歷見御營廳別館及輔國寺。寺新創無可觀。寶光寺在南麓而亦陋湫云。禁衛營別館。在東門內。地勢規制。不及御廳。自此沿城堞行。登將臺。高絶無比。一山形勢。幾盡包攬。白雲,露積諸峰巒。指顧羅列。西南江海。亦繚繞於雲煙杳茫中。昨年行幸時駐蹕之所也。龍巖寺新創。在白雲臺下。鮮淨可坐。循洞而下。到中興寺。日已夕矣。經理廳別館及倉庾百餘間。聯絡周布於寺左右前後。僧輩重修山映樓。丹雘才訖。展席倚欄。水光山影。映帶上下。耳目俱淸。神骨欲醒。甚可樂也。此寺舊有名。而築城設倉時。軍夫雜處汚傷。淸致頓减。夜宿別館。朝起歷見露積寺。寺亦新創。在露積峰下。尋常見此峰。固已奇壯。而到此面目尤別。石骨千萬仞。拔地冲霄。無所倚附。使人不覺神。子瞻所謂不見廬山眞面目。只緣身在此山中者。未必信然也。中將臺在寺後。與上將臺相望。而登臺見之。則白雲又高出露積上。不知其孰爲上下也。踰一岡而下。歷訓局別館。倉厫北門在其後。由澗谷中。行到閔漬寺。此亦新創。閔漬巖水石。與中興幷稱。而巖爲沙水所埋。不如前。寺在西門內。雖欠幽邃。澗瀑巖壑。亦自可觀。房室軒敞明爽。最於諸寺。登西城門。則此乃南北兩山盡處。一山衆水。總由此出。城亦臨水而止。兩厓斗絶。中缺爲石門。懸流石上。幾數丈餘。城外則山勢漸低。迤連平野。曠望數十里。少憇樓上。復由中興路還歸。國寧,元覺兩寺。在元曉峰下。忙未入。歷上中城門樓。據一山之中。中設水門。此處水石洞壑。爲最勝。甑峰下扶王寺新刱。金碧隱映於松檜中。亦覺開眼。還過山映樓。仍詣行宮周覽。遂由來時路。出南門歸。煥兒與閔郞。來待於蕩春臺新館。是遊也。雖獨往無伴。情悰鮮歡。而然正當秋色方酣之時。山水淸媚。楓菊照映。徘徊嘯詠。悠然忘返。亦足以洗滌塵襟。眞所謂偶得浮生半日閒者也。若夫城池規制。利害得失。非玆記之所可盡。故不之及焉。
9월 1일, 창의문(彰義門)을 나와 탕춘대(蕩春臺)를 지나는데, 정묘년(1687, 숙종13) 봄에 상공(相公) 김사긍(金士肯), 그리고 벗 이중강(李仲剛)과 함께 이곳에서 노닐었던 일이 떠올랐다. 손을 꼽아보니 벌써 30년의 세월이 흘러 김 상공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흘러간 시간을 회상하자니 돌아가신 선배에 대한 그리움을 견딜 수 없었다. 그 당시 무계(武溪)에 있던 수많은 소나무는 지금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임술년(1682) 초여름에 돌아가신 부친과 퇴우당(退憂堂), 그리고 문곡(文谷) 두 외삼촌을 모시고 농암에 사는 여러 사촌 형제들이 나란히 이곳에서 놀았는데 지금은 오직 나 한 사람만 남았고, 소나무 또한 벌레가 먹어 시들었다. 산과 물 그리고 골짜기와 숲에 예전의 친근한 것들이 없으니 세상의 인간사만 서글픈 것은 아니다.
탕춘대에서 굽은 길을 돌아 조금 올라가니 임양군(臨陽君)이 지은 시냇가 정자가 나왔다. 계곡물을 끌어와 위아래 두 곳에 연못을 만들었으니 제법 맑고 깨끗하였다. 북쪽 교외를 지나니 산길이 점점 높아지고 점점 가팔라졌다. 5리 정도 가니 새로 쌓은 북한산성의 남문이 나왔다. 문루에서 잠시 쉬고 있으니 몇 명의 승려가 나와서 맞이하였다. 이어서 어영청 별관과 보국사(輔國寺)를 차례로 둘러보았는데 보국사는 새로 지어서 별로 볼 만한 것이 없었다. 보광사(寶光寺)는 남쪽 산기슭에 있는데 또한 누추하고 보잘것없다고 하였다. 금위영 별관은 동문 안쪽에 있는데 지세와 별관의 규모가 어영청 별관에 미치지 못하였다. 이곳에서부터 성가퀴를 따라 가다가 장대(將臺)에 올랐다. 비할 데 없을 만큼 높고 가팔라 온 산의 형세가 거의 다 보였고, 백운봉과 노적봉 등 여러 봉우리들이 손에 닿을 듯 펼쳐져 있었다. 서남쪽으로는 강과 바다가 아득히 구름과 안개 사이로 둘러져 있었다. 이곳은 작년에 임금께서 행차하셨을 때 머물렀던 곳이다.
새로 지은 용암사(龍巖寺)는 백운대(白雲臺) 아래에 있었다. 주위가 맑고 산뜻하여 앉아 쉴 만하였다.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다 중흥사(中興寺)에 도착하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경리청(經理廳) 별관과 백여 칸의 창고가 절의 전후좌우로 이어져 있었다. 승려들이 산영루(山影樓)를 다시 수리하여 단청 공사를 이제 막 끝낸 상태였다. 자리를 펴고 난간에 기대니 물에 산 그림자가 위아래로 비쳤다. 눈과 귀가 모두 맑아지고 정신과 뼛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라 매우 즐거웠다. 이 절은 옛날부터 유명하였는데, 성을 쌓고 창고를 건설하면서 군사들이 이곳저곳에 거처하여 절을 더럽혔기 때문에 맑은 운치가 현저하게 줄었다.
밤에 별관에서 묵고, 아침에 일어나 노적사(露積寺)를 구경하였다. 이 절도 새로 지었는데 노적봉 아래에 있다. 평소에 이 봉우리를 볼 때도 참으로 아름답고 장엄하다 여겼는데, 이 자리에 와서 직접 보니 더욱 대단하다고 생각되었다. 대단히 높은 바위 봉우리가 땅에서 우뚝 솟아 하늘을 찌를 듯하여 발붙일 곳이 없으니 보는 사람마다 자기도 모르게 두려운 마음이 들게 하였다. 소동파가 “여산(廬山)의 진면목을 보지 못한 것은 다만 이 몸이 이 산속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는데,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중장대(中將臺)는 절의 뒤편에 있어서 상장대(上將臺)와 서로 마주보고 있다. 중장대에 올라 바라보니 백운봉이 노적봉 위로 높이 솟아 어느 봉우리가 더 높은지 알 수 없었다. 등성이 하나를 넘어 내려가면서 훈련원 별관을 구경하였다. 곡식 창고와 북문(北門)은 그 뒤편에 있었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 민지사(閔漬寺)에 도착하였다. 이 절도 새로 지은 것이다. 민지암(閔漬巖) 앞의 물과 바위는 중흥사와 나란히 일컬어지는데, 바위가 모래와 물에 파묻혀 이전 같지 않았다. 절은 서문의 안쪽에 있었다. 비록 그윽하고 깊은 운치는 부족했지만 계곡의 폭포와 바위 골짜기는 그런대로 볼 만했다. 절의 방은 높은 곳에 자리 잡아 사방이 탁 트여 환하게 보이니 여러 절 가운데 가장 좋았다. 서성문(西城門)에 올라 보니 이곳은 남산과 북산의 끝자락이라 온 산의 많은 계곡물이 모두 이곳을 통하여 흘러나오고, 성(城)도 이 시내에 이르러 끝났다. 양쪽 절벽은 가파르고, 중간은 텅 비어 석문(石門)을 이루었다. 바위 위에서 떨어지는 폭포는 두세 길 정도 되었다. 성 밖으로는 산세(山勢)가 점점 낮아지다가 평야로 이어져 수십 리가 환히 바라보였다.
잠시 누대 위에서 쉬다가 다시 중흥사 길을 통해 돌아왔다. 국녕사(國寧寺)와 원각사(元覺寺)가 원효봉(元曉峰) 아래에 있었지만 바빠서 미처 들르지 못했다. 오는 길에 중성(中城) 문루(門樓)에 올랐는데, 산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가운데에 수문(水門)을 설치하였는데, 이곳의 물과 바위 그리고 골짜기의 경치는 이 산에서 가장 아름답다. 증봉(甑峰) 아래에 새로 지은 부왕사(扶王寺)가 있는데, 소나무와 회나무 사이로 사찰의 금색과 푸른색이 보였다 말다 하여 눈길을 끌었다. 돌아오는 길에 산영루를 지나 행궁(行宮)에 도착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드디어 왔던 길을 되돌려 남문을 나와 돌아왔다. 아들 필환(必煥)과 사위 민통수(閔通洙)가 탕춘대의 새로 지은 숙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유람은 비록 동행 없이 나 혼자 갔지만 매우 즐거웠다. 그러나 가을빛이 바야흐로 무르익는 시절인지라 산수는 맑고 아름다웠으며 단풍과 국화가 밝게 비춰 이리저리 노닐고 읊조리며 아득하게 돌아올 생각이 나지 않았으니 또한 세속에 물든 더러운 가슴을 깨끗이 씻어 버릴 만하였다. 참으로 이른바 “뜬구름 같은 인생에 우연히 반나절 한가로움을 얻었다.”라는 경우라 하겠다. 성과 해자의 규모나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 좋고 나쁜 점은 이 기문에 다 적을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언급하지 않는다.
[주D-001]창의문(彰義門) : 서울의 4대문 사이에 있는 4개의 소문 중 하나로 그중 서북쪽 문이다. 처음에는 이곳이 양주와 북한으로 가는 길과 이어져 있었다. 이곳은 근처 계곡의 이름을 따서 자하문(紫霞門)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주D-002]탕춘대(蕩春臺) : 세검정에서 동쪽으로 백여 걸음 떨어진 산봉우리에 있다. 한양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성(西城)이라고 하였다.
[주D-003]김사긍(金士肯) : 김구(金構, 1649~1704)로,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사긍, 호는 관복재(觀復齋)이다.
[주D-004]이중강(李仲剛) : 이건명(李健命, 1663~1722)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강, 호는 한포재(寒圃齋)이다.
[주D-005]선배에 …… 없었다 : ‘산양지감(山陽之感)’은 이미 죽은 친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간절하다는 뜻이다. 혜강(嵇康)은 하내(河內)의 산양에 살았는데, 왕융(王戎)ㆍ상수(向秀) 등과 친하게 지냈다. 혜강과 왕융이 죽자, 상수가 그곳을 지나다가 누군가가 부는 젓대 소리를 듣고는 죽은 친구를 그리워하며 〈사구부(思舊賦)〉를 지었다. 《魏氏春秋》 여기서는 고인이 된 김구를 그리는 마음을 의미하므로 ‘선배’로 번역하였다.
[주D-006]퇴우당(退憂堂) : 김수흥(金壽興, 1626~1690)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기지(起之), 호는 퇴우당,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주D-007]문곡(文谷) : 김수항(金壽恒, 1629~1689)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文谷)이다.
[주D-008]임양군(臨陽君) : 이환(李桓, 1654~1729)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무숙(武叔)이다. 인조의 아들인 낙선군(樂善君) 이숙(李潚)에게 입양되었다.
[주D-009]여산(廬山)의 …… 때문이다 : 소식의 〈제서림벽(題西林壁)〉이란 작품에 “가로로 보면 고개를 이루고 측면은 봉우리를 이루는데, 멀고 가깝고 높고 낮아서 하나도 같은 것이 없네. 여산의 진면목을 보지 못한 것은, 다만 이 몸이 이 산속에 있기 때문이다.〔橫看成嶺側看峰, 遠近高低無一同. 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라는 구절이 보인다.
[주D-010]뜬 …… 얻었다 : 당나라 이섭(李涉)의 〈제학림사승실(題鶴林寺僧室)〉에 “죽원을 지나다 스님을 만나 이야기하니, 우연히 덧없는 인생의 반나절이 한가롭네.〔因過竹院逢僧話, 偶得浮生半日閒.〕”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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