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윤씨 제주 입도시조
선전관공(宣傳官)공의 휘(이름)는 빈(贇)이십니다.
선전관공 휘 빈(贇)님께서는 시조 24세 손이시다.
1500년(연산군 6)에 태어나시고
1569년(선조 2) 69세로 서거하셨습니다.
자(字)는 서봉(瑞奉)이며, 호(號)는 호서(湖西)이시다.
배위(아내)는 남양홍씨이시며
1531년(중종 26)에 태어 나시고
1611년(광해 3) 80세에 서거하셨는데,
슬하에 1남을 두셨고
휘(이름)는 가우(嘉佑)이다.
선전관공께서는
1543년(중종 38) 43세에 제주도로 유배 오셨습니다.
제주 유배에 관한 기록은 정사에는 없으나,
현재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소재
<명재고택> 노성윤씨 사록(私錄)에,
선전관(宣傳官) 휘 빈(贇)께서 제주도에 적거(謫居; 유배)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1920년에 발간된 <경신보>에도 이렇게 게재되어 있습니다.
또한 도내 여러 종친들이 집안마다 전해오는 가승(家乘)기록에도
분명하게 제주도에 유배 오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입도 시조의 묘역은
처음에 제주시 이동2동 910번지에 모셔졌던 것으로 미루어,
선전관공께서는 제주 유배 생활이
제주성내에서 이뤄졌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후 묘역은
이동2동 개발로 인하여
현재 아흔아홉골로 알려진 제주시 연동 2488-32번지의 묘역으로 이장하게 되었고,
처음 묘역에 대한 보상금으로
2013년 현재 연삼로 384에 피평윤씨제주도종친회관(4층)을 건립하였습니다.
이후 선전관공께서는
유배에서 풀리 못해 제주 유배 생활 중에 남양홍씨 부인을 만나 혼인을 하게 되었고,
아들 가우를 두셨습니다.
당시 조정에서는 대윤 소윤간의 싸움으로 판도공파가 몰락하고,
소정공파 장령공(일명 노성윤씨라고도 함)파가 번성하였는데,
이러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선전관공께서는 제주도로 귀향 살이 오시게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선전관(宣傳官)은 행정 공무원의 직함입니다.
선전관청(宣傳官廳)은 병조(兵曹)에 소속된 관청으로,
주 업무는 형명(刑名), 계라(啓螺) 및 부신(符信)의 출납을 맡았던 무관직(武官職)으로
품계는 정삼품부터 종구품까지 있었는데,
선전관공의 품계가 정확하게 어느 품계였는지는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