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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4장 예수의 부활과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와의 동행 및 성령 강림 약속과 승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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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영광을 받으시는것 좋아하세요.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십자가 수난을 당하신 주의 부활과 승천으로 구속사역을 위한 주의 공생애가 최종 종료됨을 보여주는 동시에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이르러 주의 복음의 증거자가 되라는 명령과 아울러 성령 강림의 약속이 주어져서 성령 강림 사건으로 개시되는 사도행전의 개시와 새로이 연결됨을 보여 주며 복음서를 일단 종료하는 장이다.
본장은 1-12절이 예수의 무덤을 방문한 여인들이 예수 부활의 소식을 천사로부터 듣고 이를 다시 사도(Apstale)들에게 전한 기사를, 13-35절이 엠마오 도상에서 예수의 죽음으로 크게 실망하고 낙향하는 두 제자에게 부활한 주께서 나타나셔서 자신의 부활을 알리며 용기를 주신 기사를 36-43절이 부활한 주께서 열 사도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의 부활(resurreon)에 대한 객관적 확신을 결정적으로 주셨음을, 44-49절이 주께서 당신의 복음을 온 세상에 증거하라는 명령과 아울러 성경 강림의 약속을 주신 사실을, 끝으로 50-53절이 주의 승천을 보도하는 순으로 그 내용이 전개 된다.
이런 문맥의 본장을 부활하신 주님의 행적을 보여주면서 주의 부활의 역사성을 보여 주는 전반부 1-43절과 주께서 복음 전파의 명령과 성령 강림의 약속을 남기시고 승천하였음을 기록함으로써 태초부터 예수에게까지 이어졌고 다시 예수로부터 종말까지 이어지는 구속사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후반부 44-53절로 크게 나누어 그 전반적인 구속사적 의의를 개관하기로 하고 세부 내용의 이해는 해당 문단 강해를 참조하기로 한다.
먼저 전반부 1-43절을 개관하고자 할 때 우리는 주의 부활의 역사성 곧 주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임을 확인하여야 할 것이다. 그래야지만 그에 대한 의미 부여가 진정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예수의 행적에 대한 개략적 이해를 위해서는 요 제 20장의 연구 자료를 보라.
이제 주님이 부활하신 사실이 갖는 위대한 구속사적 의의를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만약 주께서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주님의 죽음도 역사상 있었던 수많은 여러 이방 종교의 창시자들 그리고 도덕 사상가의 순교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흠 없는 유일한 인자(人子)이시기 전에 제 2위 하나님이신 성자(聖子) 예수는 영원히 죽으실 수도 없었고 또 이처럼 영원한 죽음을 당하시지 않고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하셨다.
주님의 부활(the Resurrection) 기사를 대하면서 우리는 우리도 주 안에서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하여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실로 벅차오르는 구속사적 희망을 억누를 수 없으며 이를 근거로 원대한 구속사적 비전(vision)을 확보하게 된다. 성육신한 주님의 수난과 부활은 그 사건 자체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죽음 및 부활과 구속사적으로 직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모두는 그 옛날 모든 인간의 육적 조상이자 처음 대표였던 아담(Adam)의 타락 이래 그의 죄성을 이어 받아 구원에 관한한 절대적 타락과 절대적 무능력 상태에 빠져있다. 우리 주 예수는 바로 이러한 인간 중 택한 백성 곧 성도(Saint)들을 위하여 그들의 죄 값을 대신 치르사 그들의 구원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시어 성도들이 당신을 믿고 회개하면 당신 안에서 구속의 은혜를 입어 구원 받게 하시고자 우리의 새 대표로서 성육신하시고 또 죽으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단 성도의 죄 값이 대신 치러지는 구속사역을 완수하였다. 그리고 이제 부활하시고 마침내 하늘나라에 승천하심으로써 먼저는 자신이 부활의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시고 나아가 당신이 사랑하는 성도도 훗날 당신처럼 부활하여 천국에 임할 수 있다는 사실, 즉 구속의 결과 주어질 구원에 대해서까지 확증시켜 주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가 우리의 육적 대표인 첫 번째 아담(the first Adam) 안에 혈육으로 연합하여 죄인이 되었듯이 우리의 영적 대표요 실패한 첫 아담과는 다른 둘째 아담(the second Adam)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와 성령의 세례로써 영으로 연합하게 되면 주님의 의와 구속의 공로를 힘입어 구속받고 부활하여 마침내 천국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롬5:12; 6:5). 실로 십자가 수난을 이기시고 다시 사신 주님의 부활은 지금까지 주님이 주셨던 구속과 구원의 복음이 모두 다 진실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국 이미 앞에서 밝혔듯이 이제 너나없이 죽음을 당해야 하는 우리 인간이 주안에서 부활하는 것은 물론 그 죄를 구속받고 영원한 천국 구원을 누릴 것을 확증 받고 또 이를 담대히 바랄 수 있는 원대한 구속사적 비전과 역동적인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한편 본장 후반부 44-53절의 요지는 크게 셋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주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당신의 구속사역이 이미 구약에 있었던 약속과 예언의 성취임을 지적하시면서 이제 그런 구약(舊約)의 성취요 나아가 천국에 대한 새 약속 곧 신약(新約)이기도 한 당신의 복음을 널리 전파하라는 명령을 주신 사실이다.
둘째는 이런 명령과 아울러 제자들에게 당신이 떠난 후에 세상 끝 날까지 제자들과 함께 있을 성령(Holy Spirit)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신 사실이다.
셋째는 인자(人子)로 오선서 우리의 구속주요 메시야로서 요구되었던 모든 지상 사역을 필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선서 성자(聖子)로서의 영광을 회복하셨다는 사실이다. 주님이 주신 성령강림 약속의 구속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이것이 실제 이루어진 사건을 보도하는 행 제 2장 개관등에서 설명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복음 전파의 지상 명령과 이를 남기시고 승천한 사실이 갖는 의의만 개략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태초 아담의 타락 직후 세워진 구속의 원리에 따라 주님의 십자가 수난을 통하여 일단 구속사역을 성취하셨다. 그러나 구속사역의 결과인 천국 구원이 곧 이루어질 것은 아니었다.
이제 오고 오는 세대에 걸쳐서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성도가 회개 중생하여 구속의 공로를 실제로 힘 입어 천국 백성이 최종 확정될 그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보다 장구한 구속사가 다시 더 계속 전개되도록 섭리하셨기 때문이었다. 즉 하나님은 과거에 구속사역의 성취를 위한 주님의 초림을 약속한 구약을 주사 그것을 중심으로 우리 주림이 오실 때까지 구약 구속사가 전개되게 하셨듯이 이제 주님께서 성육신하여 초림하사 구속사역을 일단 성취하심으로 결국
구약을 성취하신 후 다시금 주님이 재림하여 구속사역의 최종 실현인 천국 구원을 세상 종말에 새 하늘과 새 땅을 통해 개시할 것을 약속한 신약을 새로 주시고 이것을 중심으로 예수의 때로부터 세상 말일까지 신약 구속사가 새로이 전개되게 섭리하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단 구속사역을 성취하신 주님께서는 승천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장구한 구속사의 중간에 주께서 오시고 이를 일단 성취하심으로 구속사의 성취에 대하여 보다 뚜렷한 증거를 주심으로 죄에 오염되어 의심에 찬 인간이 구속사의 최종 목적지인 천국 구원을 더욱 확고히 믿을 수 있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경륜이었다. 따라서 현재는 주님의 구속 사역은 성취되었으나 그 실제적 효력은 유보된 상태, 즉 천국이 이미 영적으로는 임했으나 아직 그 영육 간에 온전히 실현된 것은 아닌 긴장의 상태요, 일종의 구속사적 중간기라 하겠다.
그러므로 이제 승천하시는 주님은 이상의 하나님의 구속사 전개의 섭리에 따라 당신의 사후 이 세상에서 당신의 구속의 복음을 전파하여 믿는 자들의 중심지가 될 교회(敎會)의 설립자가 되게 하기 위하여 당신이 공생애 중에 직접 훈련시킨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소위 지상 대명(The Great Commission)인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남기셨다. 그리하여 이제 주님의 부활승천 이후 세상 종말까지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 옛날 주님이 남기신 지상 명령을 따라 피와 눈물로 주의 구속의 복음을 증거했던 사도들의(행 20:24) 믿음의 유산으로 성도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주님의 지상 명령을 따라 우리의 믿음의 후진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것은 먼저는 나를 위해 구속사역을 감당해 주신 주님의 명령에 당연히 순종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이를 통하여 주님의 복음(福音)이 확산되어 결국 하늘나라가 확장되도록 하신 하나님의 섭리요 동시에 주께서 명시적으로 주신 명령을 우리가 이행함으로 신앙의 공로를 쌓을 기회인 동시에 우리가 추구하는 천국의 도래를 앞당기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외울 말씀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방와 같이 나는 있으니라(눅 24:39)
예수 부활에 대한 천사의 증언
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 하더라
4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 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니
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저희와 함께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고하니라)
11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푸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와 예수의 만남
13 ○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16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와 예수의 대화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19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 지가 사흘째요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5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를 알아본 두 제자의 귀환
28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같이 하시니
29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31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36 ○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37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제자들에게 사명을 남기신 예수
44 ○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예수의 승천
50 ○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51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52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53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본문 & 자료노트
주요 주제-24:1-49 예수 부활의 역사성과 부활 후의 행적 요약
요 20장 연구자료 참조
난제해설-24:1-12, 4복음서의 부활 기사와 관련된 난제들
4복음서에 기록된 예수 부활 기사들은 얼핏 보기에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들이 있다. 이 때문에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예수시대 이후 초기 기독교 신앙 공동체가 만들어낸 신화적 허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불일치하게 보이는 4복음서의 기록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매우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에 표면상 불일치하게 보이는 문계들을 살펴봄으로써 4복음서 부활 기사 전체의 조화를 시도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표면상 불일치하게 보이는 기사들
사실상 다음에서 다루게 될 문제들은 예수 부활을 부인할 근거가 전혀 되지 못한다. 사복음서가 예수 부활 기사를 기록함에 있어 그 세부 내용이 조금 다른 것은 각 복음서 기자들이 여러 자료들을 가지고 자신들의 관심과 목적에 맞게 취사선택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면 표면상 불일치하게 보이는 기사들을 살펴 보도록 하겠다.
① 무덤을 방문한 여인들은 누구인가?
이에 대해 누가는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및 다른 여자들이라고 기록했다(10절). 반면에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 만을(요 20:1) 마가는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와 살로메 세 사람을(막 16:1), 마태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를(마 25:1) 기록했다. 이런 차이는 누가는 예수 부활의 역사성을 증거하기 위해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을 기록한 반면, 다른 기자들은 그 중 핵심 인물들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② 언제 무덤의 돌이 굴려졌는가?
이에 대해 마가와 누가는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하기 전에, 마태는 무덤에 도착한 후에 무덤의 돌이 옮겨진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마 28:2-4의 기록대로 여인들이 무덤에 가는 중에 무덤 근처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소리를 들었으며, 무덤에 도착한 후에는 이미 돌이 굴려져 있었다고 본다면 마가와 누가의 기록과도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③ 무덤에 있던 천사는 몇 명이었는가?
누가와 요한은 천사가 둘이었다고 기록한 반면(4절; 요 20:12) 마태와 마가는 한 천사에 대해서만 언급한다. 이는 마태와 마가는 두 천사 중 특히 여인들에게 메시지를 준 한 천사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졌음을 뜻한다.
④ 부활하신 예수를 누가 맨 처음 보았는가?
마가와 요한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막달라 마리아에게 맨 처음 나타나신 것으로 기록했다(막 16:9; 요 20:14-18). 반면에 마태는 '저희들'(28:9), 곧 일단의 여인들이 만난 것으로 기록했다. 혹자는 여기서 '저희들'이란 막달라 마리아를 제외한 일단의 여인들, 곧 눅 24:10에 기록된 여인들이라 하기도 하고, 마 28장 전체 문맥의 흐름에 따라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두 사람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 그런데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대로 무덤을 방문한 여인들이 눅 24:10에 기록된 대로 여럿임을, 비록 기록은 하고 있지 않지만 마태도 분명 알고 있었다고 본다면 '저희들'이란 막달라 마리아를 제외한 일단의 여인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요 20:11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베드로와 다른 사람들이 무덤을 떠난 후에 혼자 남아 울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부활하신 예수를 맨 처음 만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이고 여인들은 그 후에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곁에서 예수를 만났고(요 20:11-18). 여인들은 무덤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만났기 때문이다(마 28:9).
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을 몇 번 찾아갔는가?
먼저 결론부터 말하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빈 무덤을 두 번 방문했다. 1차로 다른 여인들과 함께 방문하여 무덤에 예수의 시신이 사라진 사실을 목격하고 천사로 부터 메시지를 들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9절). 그때 제자들은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 곧 예수 부활 소식을 믿지 않았다(11절). 그러나 베드로와 다른 한 사도는 무덤을 확인하러 갔다(12절; 요 20:2-10). 이때에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다른 여인들이 베드로와 함께 다시 한 번 무덤을 찾게 된다. 그리고 베드로와 다른 여인들이 무덤을 떠난 후에도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곁에 남아 울고 있다가 두 천사와 함께 예수를 만난 것이다(요 20:11-18). 결론적으로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을 두 번 방문했으며 천사도 두 번 만났다. 한편 예수의 무덤을 찾은 사람들에 대한 4복음서의 기록 차이는 요 20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2. 의의
이상에서 설명한 난제들 이외에도 천사가 전한 메시지를 사복음서가 조금씩 다르게 기록한 이유, 그리고 예수께서 12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곳이 갈릴리나 예루살렘이냐 하는 문제들이 있다. 그러나 이 문제들도 각 복음서 저자의 기록 의도만 정확히 파악한다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문제들이다.
이상의 사실들에서 우리는 예수 부활에 관한 사복음서의 기사는 서로 매우 놀라울 정도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표면적으로 조금 다르게 보이는 사실들 때문에 성경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또 예수 부활의 역사성을 의심하는 자들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발견하게 된다. 성경의 말씀에 대해 우리는 항상 겸손한 마음 자세를 갖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하겠다.
지리 배경-24:13, 엠마오
1. 명칭
'엡마오'(Emmaus)는 히브리어 '함마'에서 파생된 지명인데 '따뜻한 우물'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탈무드에는 헬라어 지명인 '엠따우스'를 히브리식으로 표기한 두 개의 다른 명칭이 나타난다.
2. 위치
'엠마오'는 본문에 단 한 번 언급되며 그것도 예루살렘에서 25리 떨어진 거리(약 12km)라는 것밖에는 밝혀져 있지 않기 때문에 위치를 확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성경의 외 적 증거에 의해 엠마오는 예루살렘 서쪽에 있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인데. 이를 토대로 할 때 6-30km 범위 내에 있는 다음 네 개의 주요 도시가 물망에 오른다.
① 예루살렘에서 6km 떨어진 '욥바' 향하는 대로변에 있는 '칼로니에'(Qalunlyeh). 그러나 이곳은 성경에 기록된 엠마오까지의 절반 거리밖에 되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수 18:26의 모사' (Mozah)로 추측된다.
② 예루살렘 서쪽 11km에 있는 '엘쿠베이베'(El-Qubeibeh), 이곳에서 1099년 십자가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에 의해 '카스텔룸 엠마오'(Castellum Eumaus)라는 로마의 요새가 발견되어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③ 예루샅렘 서쪽 11km에 있는 '아부고쉬'(Abu Ghosh). 그러나 이곳을 구약의 '기럇여아림 ' (Kiriath-jearim)으로 보는 견해가 더 지배적이다.
④ 예루살렘 서쪽 32Km 지점 아얄론 골짜기에 있는 '암와스'(Amwas), 이곳은 오랫 동안 엠 마오로 불렸을 뿐 아니라 2개의 온천이 있다. 또한 유다 마카베오(마카베오상 3:40,47), 유세비우스, 제롬 등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는 곳이다. 성경의 기록보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난점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견해이다.
3. 관련 기사 및 역사
성경에서 이곳은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장소로 언급된다(눅 24:13). 그외 엠마오와 관련된 기사는 찾아볼 수 없으나, '요세푸스'(Josephus)의 고대사에 의하면, 엠마오는 요세푸스 이전에 '바루스'(Varus)에 의해 불탔다가 A.D. 3세기경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Julius Africanus)에 의해 재건되어 '니코폴리스' (Nicopolis)로 명명되었다고 한다.
4. 영적 교훈
주님은 부활하신 모습으로 엠마오 도상에서 무명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낮고 천한 자를 귀히 여기신 주님의 공생애 사역을 볼 때 무명의 제자들을 찾아오신 주님의 모습은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어떤 이권이나 직위 등 인간적 조건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한편 엠마오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하던 자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 일로는 슬퍼하면서도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슬퍼할 줄 모르는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엠마오로 향하는 두 제자와 같은 마음을 지녀야 할 것이다.
참으로 엠마오 도상은 슬픈 마음 있는 자들에게 성경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위로와 가르침이 풍성히 베풀어진 은총의 장소였다.
원어 연구 - 24:27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디에르메뉴오'이다. 이 단어는 '~을 통하여'(through)라는 뜻을 지닌 전치사 '디아'와 '설명하다'(눅 24:27) '번역하다'(요 1:38; 히 7:2), '통역하다'(고전 12:30; 14:13)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헤르메뉴오'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문자적으로는 '~을 통하여 설명하다'가 되는데, 이것은 곧 어떤 사실이나 내용을 자세 하게, 혹은 철저히 해석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의 문맥과 관련해서 볼 때, '디에르메뉴오'는 예수께서 구약의 모든 성경을 '총괄하여' (throughty) 자신에 대한 기록들을 마치 외국말을 통역관이 통역하거나 번역하듯이 '자세히 해석하였다'는 뜻이다. 이 같은 총괄적인 해석 행위는 방법상에 있어서 세밀함을 뜻할 뿐 아니라, 내용면에서 예수님 자신과 연관된 구약의 각 권을 하나하나 전체적으로 살펴서 강해하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예수께서 직접 자신에 관해 설명하실 때 구약 성경을 통하여 설명한 사실에서 우리 는 구약을 볼 때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석해야 하며, 또 역으로 구약의 예언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전히 성취되었는가를 살펴야 함을 교훈 받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구속 역사를 완전하게 진행시키신 하나님의 신실성과 구속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발견한다.
24:1-1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앞장(눅 23장)에서는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살펴보았다. 이제 본서의 마지막 장인 본장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자 모든 성경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부활은 그의 수난과 함께 여러 차례 예언된 바 있는 것으로 그 예언의 성취이자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이심을 확증하는 사건이다(막 16장 자료노트,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 참조).
본문은 안식 후 첫날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과 향유를 바르기 위해 찾아갔다가 빈 무덤을 목격하고 천사들의 예수님 부활에 대한 중거를 듣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을 보면 먼저 빈무덤을 본 여인들이 근심했던 사실을 볼 수 있다(1-4절). 이는 여인들이 예수께서 생전에 부활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믿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아무리 뚜렷한 역사적 사실이라도 말씀의 조명에 의하지 않고는 신앙으로 승화될 수 없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사실 빈 무덤 그것 자체로는 여러 가지로 설명이 가능하다. 결국 여인들은 천사의 메시지를 듣고서야 빈 무덤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5-8절). 그와 같이 신앙의 진정한 회복과 성숙은 주의 말씀을 의지하는 데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마태와 마가가 단순히 빈 무덤만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치밀한 말씀의 설득을 통해 부활 사건의 역사성과 계시의 성취를 확실히 보여 준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에 예수의 대적자들이 퍼뜨린 부활 날조설(마 28:13)에 대하여 치밀하고 세심한 반론을 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한편 여인들의 증언을 들은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는데(9-12절), 이것은 예수께서 살아 생전에 그들에게 누차 말씀하신 부활의 예언을 믿지 못한 태도로 그들의 불신앙적인 무지를 잘 보여 준다. 더욱이 베드로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확인하고서도 예수님의 부촬을 온전히 믿지 못하였는데,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부활은 결코 이성적인 사고나 합리적인 사고로 이해할 수 없으며 오직 성령께서 주시는 온전한 믿음을 통해서 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전 1:18, 21).
24:1 안식 후 첫날 새벽. - 이 시간에 있어서는 사 복음서가 모두 일치하고 있다(마 28:1; 막 16:1; 요 20:1). 이날은 유대인의 안식일이 끝난 그 다음 날로(마 28:1) 주님이 부활하신 날, 즉 오늘로 말하면 일요일 아침이었다. 그러므로 이 날은 역사상 최초의 주일 이었다.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본 구절의 '이 여자들'은 눅 23:55에 나오는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다. 이들은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면서 주님의 수발을 들었던 여자들이다. 한편 '그 예비한 향품'이란 이 여자들이 예수님의 장례식을 보고 돌아간 뒤 준비해 두었던 것으로(눅 23:56) 이 여인들은 예수의 장례 때 안식일이 촉박하여 미처 향품과 향유를 바르지 못한 것을 안식일이 지난 후 지금 바르기 위해 그것을 가지고 예수의 무덤을 찾은 것이다.
24:2 돌이‥‥옮기운 것을 보고. -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무덤을 큰 돌로 막고 인봉까지 하였다(마 27:65, 66). 따라서 여인들은 그 돌을 어떻게 옮길까 걱정하였다(막 16:3). 그러나 막상 도착했을 때 돌은 이미 옮기워져 있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요한의 의견과 일치한다(요 20:1). 이 일에 관해서 마태는 그 돌이 천사에 의해 옮기워졌다고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마 28:2). 그러나 누가는 그 기록을 생략하고 단지 무덤의 돌이 옮겨져 있었다는 것만을 기술함으로써 사건의 극적 효과를 노리고 있다. 즉 상황 설명 없이 곧바로 돌이 옮겨졌다는 사실을 기술함으로 독자로 하여금 놀라게 하여 극적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24:3 주 예수의 시체. - 사본에 따라서는 '주'(퀴리우)라는 단어가 빠져 있고 그냥 '예수의'에 해당하는 '투 예수'( )만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본에는 '주 예수'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아마도 눅 23:52의 '예수의 시체'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구별하기 위해 '주'라는 단어를 첨가시킨 것으로 보여진다. 즉 부활 이전과 이후의 예수 그리스도를 구별하기 위해 쓰여진 표현이다.
24:4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 - 여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시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즉 그들은 예수께서 직접 당신께서 죽으신 후에 부활하리라고 예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마 27: 63; 눅 9:22)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시체가 무덤 안에 없음을 보고 흑시 시체를 도난당한 것은 아닐까 하여 근심에 빠진 것이다.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 - 본 구절의 '두 사람'은 요한의 기록(요 20:12)에 비추어 볼 때 '두 천사'임이 분명하다. 5절에서 여인들이 이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을 보고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었다'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보통 인간이 아닌 어떤 초자연적 존재라는 것은 분명히 입증된다. 한편 이 때에 나타난 등장인물과 수에 대해서는 복음서 기자들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는데 이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 노트, '4복음서의 부활기사와 관련된 난제들'을 참조하라.
24:5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 '두려워'에 해당하는 헬라어 '엠포본 데 게노메논'은 '두려움을 이루어' 라는 뜻으로 초자연적 계시에 접했을 때 느끼는 신비감과 두려움을 표현하기 위해 누가가 종종 사용하는 용어이다(눅 1:12,29; 24:37; 행 10:4; 24:25). 즉 여인들은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의 초자연적인 위엄 앞에 놀라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찌하여 ... 찾는냐. - 여기서 '어찌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티'는 의문 대명사와 의문 부사 두 가지로 쓰이며, 의문 부사일 경우, '왜', '무엇', '어느 것'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여기서는 '왜'로 사용되고 있다. 즉 본절은 '예수께서 여기(무덤 안)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왜 없는 것을 근심하느냐, 왜 여기서 찾느냐'하는 뜻으로, 질책하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죽은 자 가운데서. - 본 구절에서 '죽은 자 가운데'라는 말은 무덤 안에 여러 시체가 있다는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장사된 무덤은 아직 사용되지 않은 새 무덤이었기 때문이다(마 27:60). 따라서 이것은 모든 인간의 죽음을 상징하는 말이다.
24: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 누가는 이렇게 기록함으로써 앞절(5절)의 사실을 강조, 확인하고 있다. 즉 예수님은 살아나셔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고 하여, 부활의 증거인 '빈 무덤'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누가의 전개 방법은 마태의 기술과 대조된다. 마태는 먼저 천사의 부활의 증언을 기록하고 난 뒤 무덤이 비어 있음을 확인시키고 있는 반면(마 28:6), 누가는 먼저 무덤이 비어 있음을 기록한 뒤(3절) 부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부활 사건 그 자체보다는 부활 사건의 의미를 부각시키려는 누가의 의도로 보여진다.
갈릴리에 계실 때‥‥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 이 여인들은 갈릴리에서 온 여인들이었다(눅23:55). 따라서 이 여인들은 갈릴리에서 주님이 가르치신 내용을 들었던 것 같다. 본절은 바로 그때 들은 말씀을 기억하라는 것으로 그 말씀의 내용은 눅 9:22과 18:32,33을 지칭한다.
24:7 인자가‥‥하셨느니라. - 6절에서 '기억하라'고 말한 천사들은 이제 여인들이 기억해야 할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해 주고 있다. 그 내용은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신 당신의 부활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었다(눅 9:22; 18:32,33 주석 참조).
24:8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 구체적인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을 천사들의 입을 통해 듣고 여인들은 갈릴리에서 들었던 그 말씀을 기억해 냈다. 사실 예수님이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예언의 말씀은 제자들 뿐 아니라 주님을 따르던 무리들에게도 분명히 알려졌고, 더 나아가서는 예수를 죽이려고 하던 자들에게도 들려졌었다(마 27:6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듣고 깨달아 믿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눅 18:34; 24:6). 다만 예수를 죽인 자들만이 그 말을 기억하고 염려할 뿐이었다(마 27:62-66).
24:9 무덤에서 돌아가. - 부활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여인들은 주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기쁜 마음으로(마 28:8) 그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려고 갔다.
열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니. - '열한 사도'는 유다가 자살함으로써(마 27:3-5) 제자들의 수가 열 하나로 됨을 의미한다. 또한 '모든 다른 이'란 성내에 있던 다른 예수님의 추종자들, 즉 주님의 승천 때에 모였던 사람들(고전 15:6)과 같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누가는 마태와 달리 여자들이 열한 제자 이외의 사람들에게도 부활의 소식을 전했다고 기술하고 있어 갈릴리 모임(마 28:16) 이전에 제자들 이외의 사람들도 주님의 부활 소식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한편 마가는 이 여인들이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막 16: 8)고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여인들이 두려워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즉 여자들이 끝까지 말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그 두려움이 가시기까지 말을 못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24:10 막달라 마리아. - 이 여자에 대해서는 사복음서의 기자 모두가 언급하고 있다(마 28:1; 막 16:1; 요 20:1). 그녀는 일곱 귀신이 들었다가 예수님께 치료받은 사람으로(눅 8:2) 예수님 의 부활을 목격한 최초의 목격자이자 가장 중요한 증언자 중의 한 사람이다. 한편 성경에는 여러 마리아가 등장하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눅 1장 자료 노트를 참조하라.
요안나. - 본서에만 언급되는 여자이다. 그녀는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로서 자신의 소유로 주님을 섬겼다(눅 8:3 주석 참조).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리아 헤 야코부'는 직역하면 '야고보의 마리아'로 이는 '야고보의 아내' 또는 '야고보의 그 딸'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막 15:40,47에서 같은 용어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로 번역된 것으로 보아 '야고보의 어머니'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이 여자는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이며(마 27:56), 아마도 글로바(요 19:25) 또는 알패오(마 10:3)의 아내일 것이다.
저희와 함께 한 다른 여자들. - 위의 세 사람 이외에 갈릴리에서 같이 온 여인들(눅 23:55)을 말한다. 이 중에 는 마가가 기술한 '살로메'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막 16:1).
24:11 사도들은‥‥믿지 아니하나. - 아직도 공포에 떨고 있었던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당시와 동일하게(눅 9:45; 18:34) 여인들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아직도 제자들은 인간의 나약함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탄한 듯이 뵈어. - 직역하면 '저희의 눈앞에 허탄한 듯이 나타나'이다. 이것은 마치 무엇이 환상처럼 보여 실제임을 믿지 못하듯이 뜻밖의 놀라운 소식에 진짜가 아닌 것처럼 여겼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24:12 베드로는‥‥달려가서‥‥들여다 보니. - 일부 사본들 가운데에는 본절이 생략된 것들도 있으나 대부분의 사본에는 이 기록이 삽입되어 있다. 혹자는 이 구절이 요 20:3-10을 요약해 삽입한 것으로 보기도 하나(Metzger) 대개의 학자들은 누가복음 본래의 순수한 기록으로 보고 있다(Jeremias, Morris. Lagrange). 아무튼 요한과 함께 누가는, 의심하며 떨고 있는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베드로가 즉시 달려가 무덤을 확인했다고 기술함으로 베드로를 좋게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수제자로서 그의 위치와 성령 강림 이후(행 2:1-4) 지도적 위치에서 사도들을 이끌어 간 그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로 보여진다.
기이히 여기며. - 무덤으로 달려간 베드로는 그곳에 시체는 없고 세마포만 보이는 것을 이상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갔다. 요한에 의하면 머리를 쌌던 수건이 개여져 있었다고 한다(요 20:7).
이것으로 보아 무덤 안은 흐트러져 있지 않고 잘 정돈되어 있었던 듯하다. 이러한 증거들을 보고 베드로는 이상히 여기기만 했지 아직은 부활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지는 못한 듯하다. 왜냐하면 요한의 기록에 의하면 베드로와 다른 한 제자가 무덤에 달려가 보고 여인들이 말은 믿었으나 아직 부활의 말씀을 이해하지는 못했다고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요 20:8,9).
24:13-35 엠마오 도상에 나타나신 예수
앞단락(1-12절)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여인들의 중언을 듣고도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였음을 살펴보았다. 이 본문은 예수께서 그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 자신의 부활을 확신시켜 주고 있는 장면이다(막 16:12,13).
본문의 구성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데, 첫째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의 대화이다(13-24절). 여기를 보면 두 제자는 예수님의 죽음을 애통해 했지만 단지 메시야이기를 바랬던 한 선지자가 죽은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여인들의 증언을 통해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듣고도 다른 제자들과 같이 전혀 믿지 못하였다. 이는 지금까지 보여준 제자들의 신앙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아직도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깨우치심이다(25-32절), 예수님은 불신과 무지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에게 선지자의 예언과 자신이 이전에 했던 교훈을 통하여 당신의 부활하심을 확신시키신다. 즉, 예수께서는 구약에 기록된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상세히 풀어 설명하심으로 그의 죽음과 부활은 필연적인 것임을 교훈하신 것이다. 이 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비로소 예수님을 바로 보는 영적 안목을 가지게 되었으며 부활의 주를 깨닫게 되었다.
셋째는 부활의 주를 확신한 두 제자는 즉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와 열한 제자와 그와 함께한 자들에게 부활의 주님을 고백한다(33-35절).
여기서 두 제자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 확신 가운데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모습은 조금 전 예수의 죽음에 실망하여 예루살렘을 등지고 걷던 모습과 매우 대조적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절망 가운데 있는 영혼들에게 전파되어 그들에게 참된 소망과 위로를 주는 복된 소식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참된 신앙과 지식을 가져야 비로소 주님을 담대하게 전파할 수 있음을 보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은혜를 통하여 참된 진리를 깨닫고 예수님의 사랑을 뜨거운 가슴으로 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고전 2:13: 딤후 4:2).
24:13 그 날에. - 부활의 사건으로 여자들이 빈 무덤에서 천사를 보고, 베드로가 가서 확인했던 날과 동일한 날, 즉 1절의 안식 후 첫 날을 지칭한다.
저희 중 둘이. - 여기서 '저희'는 9절의 '모든 다른 이'를 가리키며, '둘' 가운데 한 사람은 '글로바'(18절)라는 사람이었으나 다른 한 사람은 분명치 않다. 18절 주석 참조.
엠마오라 하는 촌. -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이십오 리'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타디우스 헥세콘타'는 약 12km이다. 이 거리로 추정할 때 이곳은 예루살렘 서북쪽, 욥바로 가는 길에 있는 '쿨로니에(Kulonieh)'로 추정된다. 이곳은 요세푸스(Josephus) 전쟁사에도 '엠마오'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가장 유력한 장소로 지적되나 확실하지는 않다. 엠마오의 위치는 본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24:14 이 모든 된 일. - 예수께서 잡히시고 죽으시고 그리고 여인들로부터 다시 살아나셨다고 들은 일(9절), 즉 예루살렘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났던 모든 사건을 말한다.
24:15 예수께서‥‥동행하시나. - 두 사람이 예수의 수난과 부활 사건에 대해 걸어가면서 이야기하고 토의하는 도중에 주께서 부활하신 육체의 몸으로 (39-43절)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동행하셨으나 그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이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이전의 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음을 암시한다.
24:16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 '가리워져'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라테오'는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는 두 사람의 의식이 설마 예수께서 나타나시리라고는 예상치도 못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이 두 사람처럼 알아보지 못한 현상은 막달라 마리아에게도 있었다(요 20:14). 그것은 주님의 부활하신 몸이 너무나도 신비롭게 변화하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은 시공을 초월하고(요 20:19). 영으로 충만한 영광의 몸의 형체(빌 3:21)였다. 또한 그 몸은 변화 산에서 변화하실 때의 거룩한 모습 었다(마 17:2). 따라서 그 두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 면식(面識)이 있었음에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24:17 서로 주고받고 하는.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티발레테'는 '상대하다'라는 의미의 '안티'와 '던지다'라는 의미의 '발로'( )의 합성으로 운동 경기의 배구라는 단어의 영어 표기. Barley Ball(발리 볼)이 여기서 파생되었다. 따라서 '서로 주고 받고'라는 뜻은 배구할 때 서로 공을 주고받듯이 논의를 주고받았다는 의미이다. 즉 토론 또는 논쟁을 했다는 말이다.
슬픈 빛을 띄고 머물러 서더라. - 예수께서 '너희들이 논쟁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물으시자 두 사람은 아마도 갑작스럽게 받은 질문에 당황했을 뿐만 아니라 계면쩍은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죽음에 슬퍼하였고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그 부활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깨달음이 결여된 상태였기 때문에 두 사람은 그러한 슬픈 표정을 띠었을 것이다.
24:18 글로바라 하는 자. -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이름이 밝혀지고 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① 예수의 삼촌, 즉 예수의 아버지 요셉의 형제라는 견해(Origen, Zahn)와 ② 글로바는 요 19:25에 나타나는 '글로바'와 동일 인물로 마리아의 남편이라는 견해(Alford, Gilmour)가 제시되고 있으나 확인할 수는 없다.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알지 못하느뇨. - 이 말은 힐난조의 질문으로서 그만큼 예수의 사건에 대해서는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 중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나타내어 준다.
24:19 무슨 일이뇨. - 예수님이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님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질문 방법은 전혀 모르겠다는 식으로 질문함으로써 문제에 대해 의식을 집중시키고, 그 문제를 해명해 주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즉 이렇게 물음으로써 강대방의 의견을 도출해 내고, 도출된 의견 중 잘못된 점을 바로 잡아 주기 위해 사용하는 고도의 변증법적 화술인 것이다.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 - 예수 그리스도의 질문에 대한 두 사람의 답변 내용이 24절까지 이어진다. 그 내용 중 첫 번째 내용은 그리스도의 신분에 관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라 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이러한 대답에는 예수께서 언행이 일치하며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선지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24:20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 예수님에 관한 두 번째 내용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관해서 두 사람은 예수를 죽인 자들은 유대의 지도자들이며, 방법은 피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로마의 형벌 하에 두게 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였다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잠시 주목할 만한 것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유대 지도자들에게 있는 것으로 일반 백성들은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예수는 빌라도의 사형 언도에 따라 죽었지만 그 죽음의 1차적 책임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있었다.
24:21 우리는‥‥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 예수님에 관한 두 사람의 세 번째 말은 예수에 대한 자신들의 기대를 나타내고 있다. 그 기대는 예수가 자신들의 구세주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즉 그들은 예수라는 능력 있는 선지자가 그 능력을 발휘하여 악의 세력에서 이스라엘을 구원시키기를 원했던 것이다. 여기서 이 두 사람이 의미하는 이스라엘의 구속이 당시 유대 국가를 억압했던 로마에서의 해방을 지칭하는지, 아니면 온 인류의 죄악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을 의미하
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대체로 로마로부터 억압받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대하고 있었다(행 1:6). 따라서 이들도 예수를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해방시킬 정치적 메시야이기를 바랐다고 보는 것이 옳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오래 동안 들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양자의 의미를 복합적으로 함축시켜 거기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의 건립을 생각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여튼 이 두 사람은 예수의 죽으심으로 이와 같은 기대가 무산된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일. - 유대 지도자들에 의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일을 지칭한다.
사흘째. -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지 사흘째라고 밝힘으로써, 이날이 예수께서 부활하신 당일이라는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다. 따라서 13절의 '그 날'은 1절에 언급된 '안식 후 첫 날'과 동일한 날이 분명하다. 한편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이 예수가 죽은 지 '사흘째'라고 밝히는 것은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을 구속하리라 기대했던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 슬픈 일이 벌써 사흘이나 지났다고 함으로써 그 슬픔의 강도를 높여보려는 의도가 엿보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어렴풋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사흘쯤이면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엿보이게 하려는 의도로 보여진다.
24: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 - 본절에서 24절까지는 1-12절까지의 내용을 설명하는 장면으로, 여기서 '어떤 여자들'이란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눅 23:55)을 가리킨다. 10절 주석 참조.
우리로 놀라게. - 이들이 놀랐다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이들은 본절 후반부로부터 24절까지의 내용을 듣고 믿지 못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만일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면 놀랄 일도 없었을 것이며 슬픈 기색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17절). 또한 예수께서 이들의 말을 듣고 이들을 책망하시지도 않았을 것이다(25절).
24:23 그가 살으셨다‥‥함이라. -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은 실로 믿음이 없었다. 이는 본 구절에 사용된 어법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여기서 '‥‥살으셨다 하는‥‥보았다 함이라'는 표현은 말이 두 번 건너 전해진 것을 의미한다. 즉 그들은 예수께서 살으셨다는 소식을 여자들에게 들었다고 하고 또 여자들은 천사들에게 들었다고 함으로써 이중 전언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결국 예수의 부활의 신빙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식의 표현이다.
24:24 또‥‥두어 사람이‥‥보았으나. - 여자들의 말만으로는 믿지 못하여 다른 사람들 몇이 가서 확인하여 보았다는 말이다. 아마도 여기서 두어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을 의미할 것이다(요 20:2-10).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 예수의 시체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나 부활의 증거인 예수의 부활체는 보지 못했다는 말로, 예수의 부활을 믿고는 싶지만 믿을 증거가 없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부활하신 주님을 앞에 두고 이러한 말을 하는 두 사람의 불신앙이 잘 드러나고 있다.
24:25 미련하고‥‥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 한글 개역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헬라어 원문에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Ω)라는 감탄사로 시작하는 영탄조의 말이다. 따라서 비탄이 섞인 책망의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 여기서 '미련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노에토이'로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이란 뜻이다. 또한 '더디'(브라데이스)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늦게'라는 뜻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깊게 생각하지 못하여 선지자들이 언급하고 예언한 모든 것을 더디게 믿는 자들이여!'라는 의미이다. 결국 본절은, 자신에 관해 구약에 언급된 내용들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또한 그대로 성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못하는 두 사람을 예수께서 꾸짖으신 말씀이다. 참으로 유대인들은 복음을 손에 쥐고도 그것의 의미조차 몰랐던 것이다.
24: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 '이런 고난'이란 '선지자들이 예언한 고난'을 의미한다. 특히 사 53장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만일 유대인들이, 제자들이, 이 두 사람이 그 이사야 선지자의 고난의 예언만이라도 이해했었더라면 올바른 메시야관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25절과 같은 꾸중은 듣지 않았을 것이며, 주님을 그렇게 비통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고난은 영광에 들어가기 위한 필연적 과정이라는 사실을 유대인들은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던 자들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막 10장 자료노트. '예수의 성육신과 수난의 필연성'을 참조하라.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 이는 그리스도께서 선지자들이 예언한 고난을 겪고 난 뒤 얻게 될 영광이며, 그 영광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이다(빌 2:9-11; 딤전 3:16; 벧전 1:11, 21). 또한 '아니냐'라는 종결어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나타내 주는 것으로,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느냐’라는 반문이다.
24:27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 - 이 표현은 구약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율법과 선지자'와 같은 의미이다(마 5:17). 그러나 본문에서는 글자 그대로 모세 오경과 선지서들 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곧이어 '모든 성경'이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모든 성경. - 위의 모세 오경과 선지서를 제외한 나머지 구약 성경을 지칭한다.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 여기서 '자세히 설명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에르메뉴센'은 '디아'란 접두사와 함께 쓰여져 '철두철미하게 해석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당신에 대한 예증과 당신에 대해 예언한 모든 것을 상세하게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에게 설명해 주신 것이다.
24:28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 13절에 비추어 보면 이 '저희의 가는 촌'이란 '엠마오'를 지칭한다. 따라서 본절은 '엠마오에 다 도착할 즈음'으로 보면 될 것이다. 그러나 '가까이 가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엥기조'에는 '거의 가까이 갔다'는 뜻과 함께 '도착했다'는 뜻도 있어, 이 말이 이미 도착했음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거의 도착할 무렵을 의미하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단지 문맥상 후자의 해석을 따르는 것이 보다 합당하다.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 이 말은 엠마오라 하는 곳에 다다랐을 때 예수께서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계속 행보를 멈추지 않으시려 했다는 의미이다. 아마도 예수님은 엠마오에서 유숙할 계획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엠마오에 머물 계획이 없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두 사람의 강권에 의해 예수께서 엠마오에 머무시게 되었다는 것이다. 누가는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께서 계속 가시려했다는 사실을 대위법적(對位法的)으로 기술하고 있다.
24:29 강권하어‥‥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 성경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그것을 자세하게 설명해 준(27절) 낯선 사람에게 엠마오에 도착한 두 사람은 그를 선생으로 모시고자, 간청하여 같이 묵기를 원하였다. 실로 주님의 설명을 들을 때 마음이 뜨거워졌던 두 사람은(32절) 그가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대단한 사람으로 여겼을 것임이 틀림없고, 따라서 같이 묵으면서 더 가르침 받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비록 하늘의 진리는 깨닫지 못했지만(11,25절) 진리와 진리를 설명해 주는 귀한 입에게 자신들의 마음과 귀를 여는 순수한 자세는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점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다른 유대인들과 달리 그들을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 중 일원이 되게 하였을 것이며, 부활하신 주님은 비록 책망은 하셨지만(25절) 그들을 어여삐 보시고 그들에게 나타나 진리를 깨우쳐 주셨을 것이다. 따라서 성도된 우리들도 비록 큰 믿음과 능력을 갖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말씀에 자신의 마음과 귀를 항상 열어 놓는 겸허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24:30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 전절(29절)의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저녁 식사로 여겨진다. 또 두 사람이 갈릴리 사람인 것으로 추정되므로 타향인 엠마오에서는 여관에 묵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세 사람은 엠마오의 어느 여인숙에서 일상적인 저녁식사를 했을 것이다.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주시매. - 마치 제자들과 유월절에 가졌던 마지막 성만찬을 연상케 한다(눅 22:7-20).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열 한 제자가 아니므로(13절 주석 참조) 성만찬에는 참석지 못하였다. 따라서 두 사람은 아마도 오병이어의 기적(눅 9:10-17)을 연상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두 사람은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고 그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24:31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 여기서 '밝아져'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에노이크데산'은 '열다'라는 뜻의 동사 '다아노이고'의 부정 과거 수동형이다. 따라서 두 사람의 눈은 예수께서 떡을 떼어 저희에게 주실 때 열려졌음을 시사하는 데, 이는 그들이 그들 앞에 계신 분이 예수이신 것을 능동적으로 알아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알게 된 것을 의미한다(Marshall).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 예수님을 알아보는 순간 시공(時空)을 초월하시는 주님(요 20:19)은 홀연히 사라지셨다. 이러한 체험은 두 사함에게는 실로 놀라운 경험이요, 예수의 부활을 확신할 수 있는 증거가 되었을 것이다.
24:32 성경을 풀어 주실 때‥‥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 여기서 '풀어주다'( 디에노이겐)는 31절의 '밝아져'(디에노이크데산)와 같은 의미의 동사이다. 고로 본절은 '성경을 열어 주실 때'로 번역할 수 있다. 말씀, 곧 진리는 주께서 그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도록 열어주실 때 그 뜻을 알 수 있게 되며, 또한 마음에 감화 감동을 입을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마음이 뜨거웠다'(카이오메네)는 말은 현재 분사형 수동태로 '계속해서 타오름을 당했다'는 뜻인데 이는 그들의 감동이 지속적이었음을 나타내 준다.
24:33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 마음이 뜨겁게 되고 주님을 알게 되어 부활이 실제적 사건이라는 것을 믿게 된 '바로 그 때'를 의미한다. 이미 밤이 어두웠을 텐데도(29절 참조) 두 사람은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한시라도 빨리 동료들에게 부활의 확실성을 알리기 위해 즉각적으로 움직이는 신실한 성도의 자세를 여기서 보게 된다.
열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한 자들. - 엠마오로 갔던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 9절에 언급되었던 사람들로 보이는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모여 있었다. 모인 이유는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24:34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 엠마오로 갔던 두 사람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전하러 예루살렘으로 왔을 때(33절) 이미 예루살렘에 있던 시몬 베드로도 주님을 만났다고 하면서 모여 흥분된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여기서 베드로가 초기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기록은 본문과 고전 15:5 외에는 없다. 아마도 베드로는 무덤으로 달려가 빈 무덤을 확인한(12절) 직후 어느 때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 같다. 그리고 주님을 만난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주님의 부활은 확실한 것이라고 전달해 주었을 것이다.
24:35 두 사람도‥‥말하더라. - 베드로가 주님을 만났다고 하여 부활의 소식이 점점 신빙성을 얻고 있을 무렵, 글로바 일행이 돌아와 엠마오로 가는 도중 주님을 뵈었다고 증언함으로써 주님의 부활은 더 확실한 사실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본절의 내용으로 보건데 아마도 이들은 길에서 성경을 풀어 가르쳐 주시고, 특히 떡을 떼어 주실 때 눈이 밝아져 그가 주이심을 알아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중점으로 하여 증언했던 것 같다. 이렇게 해서 두 개의 사건이 한 곳에 모아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확실한 사실로 규명되어 가고 있었다. 이는 사건 전개에 있어 치밀한 구성력을 구가하는 누가의 기록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24:36-49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본문은 앞 단락(13-35절)에서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던 예수님께서 이제 그 두 제자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에게 자신들이 목격한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고 있을 때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의 부활을 확신시키고 복음의 증거자가 될 것을 명하시는 장면이다. 이러한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로 예수님은 부활하신 육체를 제자들에게 보이신다(36-43절; 요 20:19-23). 누가는 예수의 부활하신 육체를 매우 물질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표현하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완전한 육체의 몸으로 부활하신 것을 증명하려는 의사 누가의 노력에서 나온 것이다. 하여튼 당시 제자들은 엠마오 도상에서 돌아온 두 제자에게서 부활하신 주님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으나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유령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직접 육신의 모습을 보여 주시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심으로써 자신의 부활을 확인시키신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예수께서는 분명 육체를 가진 완전한 인간으로 부활하였지만 그 육체는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변화된 육체로, 이 육체는 모든 성도들이 장차 있을 부활의 때에 얻을 변화된 우리의 몸을 예시해 준다(고전 15:35-39,51,52).
둘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의 전파를 위한 증인이 되라는 지상 명령을 내리신다(44-49절; 마 28:16-20; 막 16:15-18).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 말씀의 성취를 강조하고 계신데 이러한 말씀의 성취는 누가의 주요 주제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도 모두 성경대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증인이 되기 전에 성령의 능력을 입기까지(행 1:4) 기다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만이 사람들의 완악한 마음을 깨뜨리고 죄 사함 얻는 회개와 구원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말씀은 그대로 성취되어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을 받고 권능을 입어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다(행 2,3장).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① 우리는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을 이해와 관심으로 돌보며 그들이 믿음의 확신을 갖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②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 이전에 성령의 능력을 힘입는 것이 전제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행 1:8).
한편 다른 공관복음서의 기자들은 모두 복음서의 끝을 예수님의 대 지상명령으로 장식하고 있는 반면 누가만이 이처럼 제자들에게 성령을 떠나지 말라는 말로 대미를 장식하고 있는 것을 누가가 본서의 후편이라 할 수 있는 사도행전을 염두에 둔 까닭이다(49절 주석 참조).
24:36 이 말을 할 때에. - 글로바와 또 한 사람이 엠마오로 가던 중 주님을 만나 거기서 만찬 중에 주님임을 알아보았다고 말할 때를 지칭한다(35절).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 이때 제자들은 방문을 닫고 있었을 것이다(요 20:19 참조). 왜냐하면 당시는 주님의 부활 소식을 함부로 말할 수 있을 만큼 자유로운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당시는 부활의 소식을 들은 유대 지도자들과 관원들이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선전할 때였으므로(마 28:11-15) 부활의 말을 함부로 입에 담기에는 위험한 때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방문을 닫고 부활의 소식을 나누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글로바 일행이 증언을 하고 있을 때에 홀연히 나타나 아직 뵙지 못한 모든 이들에게도 자신을 보여 주셨다. 여기서 우리는 무덤에서 여인들이 천사들로 부터 예수가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가 확인하고, 글로바 일행이 주님을 직접 만나고, 그 사이 베드로가 또 직접 주님을 만나고, 이제 모든 추종자들 앞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셨다는 이 점진적인 예수님의 출현 기록을 통해 또 한 번 예수의 부활의 확실성을 보여 주고자 하는 누가의 치밀성을 엿볼 수 있게 된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이 말은 유대인들의 평상 '인사말이었다(마 10:12). 그러나 여기서는 보다 특수하게 이해된다. 즉 '이제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니 하늘의 평화가 너희에게 있으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한편 어떤 학자들은 이 때의 상황을 시 22:22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Justin, Tryph).
24:37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 이미 예수를 본 사람들, 즉 베드로와 글로바 일행은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 주님을 뵙지 못한 사람들이 몹시 놀라했을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예수께서 문이 닫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리 없이 들어오신 것을 보고 더 놀랐을 것이다.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 예수께서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나타나셨기 때문에(요 20:19 참조) 제자들은 예수가 '영'(프뉴마)이라고 생각했다. 사본에 따라서는 '유령'(판타스마)으로 표기된 것도 있어 더욱 의미를 생생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의 몸은 '유령'도 '영'도 아닌 실재 인각의 모습이었다(39절).
24:38 어찌하여‥‥어찌하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티‥‥디아 티'에서 앞의 '티'는 '왜' 또는 '어찌하여'라는 의미이며, 뒤의 '티'는 '무슨 이유로'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왜 두려워하며 무슨 이유로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라는 뜻의 책망으로 볼 수 있다. 주께서 이렇게 책망하시는 이유는 그토록 살아생전에 부활에 대해 말씀해 주셨고(눅 9:22; 18:32,33). 또 부활한 뒤에는 여러 사람들을 통해 부활의 소식과 증언을 들었는데에도 불구하고 (9,34,35절) 그들이 믿지 아니하고 오히려 두려워하며 의심하였기 때문이다(11,25,37절).
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 예수님을 보고 영으로 생각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영이나 유령이 아니라 몸을 가진 완전한 인간임을 알리시기 위해 손과 발에 있는 못 자국을 보여 주셨다(요 20:25-27). 그 손과 발에 있는 못 자국이야말로 항거할 수 없는 뚜렷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또 나를 만져 보라.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눈으로 확인할 뿐 아니라 손으로 만져서 확인하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신다. 보는 것과 만지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보는 것은 단지 대상을 인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만지는 것은 감각을 동반하기 때문에 대상을 인지할 뿐만 아니라 감지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은 시각적으로 또 감각적으로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을 검증시키고 계시는 것이다.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나는 있느니라. -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단순한 영이 아니라 완전한 육신을 입고 계심을 재차 확인해 주시는 것이다. 이 육신은 장차 모든 성도들이 부활할 때 성도가 입게 될 바로 그 변형된 육체였다(고전 15:35-39,51,52).
24:40 손과 발을 보이시나.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시고 실제로 보이심으로 그의 부활은 확실하게 검증이 되었다. 이제 더 이상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반론의 여지를 가지고 있지 못하게 되었다.
24:41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 기쁨을 극대화시키는 강조 용법이다. 때로 인간은 너무 좋으면 그 반대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지는 독특한 심리 현상이다. 제자들은 이제까지는 근심하고 반신반의하였으나 이제 너무나도 뚜렷하게 확인을 받은 후에는 너무나도 좋아 반대로 믿지 못하는 심리적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고 누가는 적절하게 당시 상황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다.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 십자가에 못 박힌 상흔을 보고 만진 것보다도 더 확실한 증거가 본절에서 묘사되고 있다. 제자들이 기쁨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먹을 것을 달라고 하심으로 다시 한 번 그가 완전한 인간이심을 확증하는 증거를 보여 주고 계신다.
24:42 구운 생선 한 토막. - 주께서 먹을 음식물을 달라 하실 때에 제자들은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렸다. 사본에 따라서는 꿀을 묻힌 떡도 함께 드렸다는 기록이 삽입되어 있다(Metzgfr). 이곳이 예루살렘이었는지 갈릴리 지방이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곳이 어느 곳이었든지 생선은 갈릴리 바다에서 전국으로 공급되었고, 떡과 생선은 당시의 보통 식사였으므로(Alford) 떡이 첨가된다 하더라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24:43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 본장의 30절에서도 요 21:13에서도 예수께서 음식물을 가지셨으나 직접 드셨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누가의 기록 중에서도 본절에서만 직접 드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단 고넬료의 집에서 베드로가 한 말 중에서 예수님이 음식을 드셨다고 간접 증언한 기록이 있다(행 10:41). 어쨌든 예수님은 이렇게 음식을 드심으로 당신이 육신으로 부활 하셨음을 확실하게 증거하셨다.
24:44 너희에게‥‥한 말이 이것이라. - 본절에서부터 49절까지는 본서를 맺는 대단원의 마지막 장면으로 주님의 최후의 분부가 기록되어 있다. 본절에서 원문에는 '~한 말이 이것이라'(후토이 호이 로고이)가 맨 앞에 나와 있어 강조적 용법임을 알 수 있다. 즉 '이것이 나의 말이다.'로 되어 있다. 여기서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하신 말씀이란 눅 18:31-33절과 같은 경우를 지칭할 것이다. 아마도 이 가르침은 26,27절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에게 하셨던 가르침과 비슷한 내용이었으리라 짐작된다.
24:45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 31,32절과 병행되는 구절이다. 31절의 '밝아져'와 32절의 '풀어주다'는 본절의 '열어'와 동일한 낱말 '디아노이고'(열리다)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의 마음을 여시고 깨닫게 하셨다는 것이지 결코 제자들이 자신들의 마음을 열고 자신들이 깨달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증거로 헬라어 원문은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31절 주석 참조). 본절에서도 행위의 주체는 예수님이시고 객체는 제자들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데에는 결코 성령의 역사하심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요 16:13; 롬 13:11).
24:46,47 또 이르시되‥‥기록되었으니. - 우리말 성경에는 '기록되었으니'가 문미에 나오나 헬라어 원문에는 강조적 용법으로 문두에 나타난다. 즉 원어 성경에는 '이와 같이 기록되었으되'로 시작되고 있다. 이렇게 시작하는 것은 예수께서 평소에 하시던 말씀(눅 9:22; 18:31-33)을 요약하여 제자들에게 다시 들려주시고 깨닫게 하시려는 의도이다.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 - 이 말씀은 눅 9:22; 18:31-33의 반복이며, 본장에서만도 7,26절에서 반복되었다. 그리고 본절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다. 누가가 같은 내용을 이토록 반복하는 것은 그만큼 누가는 주의 고난과 부활의 의미와 의의를 강조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라 이해된다.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 - 마태는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했고(마 28:19), 누가는 예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있도록 하라고 전하고 있다. 본래 회개와 세례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으로 양자는 상호 간의 내외적 증거가 된다(마 28:19 주석 참조). 따라서 마태는 회개의 외적 상징으로 주어지는 세례를 말하였고 누가는 내적 변화인 회개를 언급하였다고 이해된다. 실로 회개는 세례인 요한으로부터(막 1:4),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막 1:15), 그리고 이제 마지막 까지를 관통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이다(롬 2:4).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 행 1:8에 다시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말씀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오직 자기들만의 신으로 생각하고 또한 자신들만 구원 얻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구원의 복음이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고 만방이 하나님께 돌아오리라는 것은 이미 구약에 예언된 것이었다(시 110:2; 사 2:1-9; 미 4:1,2),
24: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 처음부터 주님을 따랐고, 그 속에서 가르침을 받고, 이제 부활의 그리스도마저 보고 믿게 된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 그리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죄로부터의 해방과 영생을 전파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주님은 지금 그것을 제자들에게 일깨워 주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는 사복음서가 공통적으로 일치한다(마 28:19,20; 막 16:15,16; 요 21:15-19). 실로 복음 전파 사역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최대의 지상 명령이다(행 1:8).
24:49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보내리니. - 여기서 '약속하신 것'이란 행 1:4,5; 3:1-6을 비추어 볼 때 '성령'임에 틀림없다. 성령을 주시리라는 약속은 이미 구약 때부터 약속된 것이며(욜 2:28), 세례인 요한이 언급했고(눅 3:16), 예수님 자신도 직접 말씀하셨다(요 14:16,26; 15:26 ; 16:7,8). 그리고 이제 승천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이 언약을 다짐하시고 계신 것이다.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 이 말씀은 행 1:4의 내용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아직 성령의 권능을 받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하늘의 '능력' (뒤나미스), 곧 성령이 임할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한편 여기서 '입히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뒤세스데'( )는 '옷 입힘을 당하다'는 뜻이다. 즉 예수님은 성령의 권능을 받는 것을 옷 입는 것에 비유하셨다. 이것은 아마도 사도 바울의 표현과 같이(롬 13:12; 엡 6:17) 성령의 권능을 상징하는 '빛의 갑옷'을 입는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실로 성령 충만치 않은 성도는 옷을 입지 않고 벌거벗고 있는 자와 같다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공관복음서의 다른 기자들은 모두 복음서의 끝을 예수님의 대 지상 명령, 곧 복음 전파의 분부로 장식하고 있는 반면(마 28:19,20; 막 16:15-18), 누가는 오히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는 명령으로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누가가 본서의 후편이라 할 수 있는 사도행전을 염두에 둔 까닭으로, 사도행전은 예수의 지상 명령과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 기사로 서두를 장식하고 있다(행 1,2장).
24:50-53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누가는 본문에서 예수님의 승천 기사를 다루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막 16:19; 요 20:17). 이러한 예수의 승천에 대한 더 자세한 기록은 본서의 속편인 사도행전에서 소개되고 있다(행 1:6-11). 이 땅에서의 모든 사역을 마치신 예수님은 이제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축복하시면서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승천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에 거하며 주의 보내실 성령을 기다린다.
결국 누가복음은 이스라엘 회중에게 축복을 하는 의로운 제사장 사가랴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영적 이스라엘을 축복하시는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끝나는 것이다. 따라서 승천은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사역이지만 제자들에게는 복음의 증인이 되는 새로운 출발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이상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사도들에 의하여 교회에 계승되었고 성령의 역사는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결국 예수님은 부활하신 몸을 가지고 올라가사 영광의 모습으로 승천하셔서 믿는 성도와 모든 만물을 충만케 하시기 위한 전능자가 되신 것이다(히 9:21-24; 10:12,13). 이와 관련해서는 막 16장 자료노트, '그리스도 승천의 10대 목적'을 보다 참조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다시 오실 때까지 소망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 충성해야 할 것이다(고전 15:58).
24:50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 이 누가의 기록이 유일하게 승천의 장소를 구체적으로 밝혀 주고 있다. 즉 주님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감람산(행 1:12)의 동쪽 기슭에 위치한 베다니 앞까지 제자들을 이끌고 가신 뒤 그곳에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승천하신 것이다.
손을 들어‥‥축복 하시더니. - 승천하시기 전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위해 축도를해 주시었다. 이제 복음 전파의 사역을 감당하게 될 제자들을 위하여 주님은 하늘로부터 내릴 은혜를 받을 때까지 힘을 얻게 하고, 또 그들로 인하여 구원에 참여하게 될 모든 이들을 위해서 축도해 주신 것이다.
24:51 저희를 떠나(하늘로 올리우)시니. - 본절에 괄호가 삽입되어 있는 이유는 괄호 안에 있는 문구가 없는 사본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괄호 안의 문구가 없어진다고 해서 주님의 승천에 대한 기록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단지 괄호 안의 것이 생략 된다면 단순하게 '저희를 떠나시니'로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 16:19과 행 1:9을 병행해 볼 때 삭제하는 것보다는 삽입하는 것이 훨씬 타당성 있게 보여진다. 한편 본절을 앞의 내용과 그냥 연결시켜 볼 때에는 예수님의 승천일이 부활하신 뒤 하루 이틀도 안된 시점인 것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행 1:3에 의하면 예수께서 승천하신 때는 부활 후 40일이 지난 때였다. 따라서 49절과 50절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 간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24:52 (그에게 경배하고). - 역시 본 구절도 삭제되어 있는 사본이 많아 괄호 속에 두고 있다. 제자들은 이제 더 이상 부활에 대한 의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인간적인 스승이 아니었다. 이제 제자들은 승천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고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주의 왕이시며(마 2:2),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경배한다'(프로스퀴네오)는 말은 '예배한다'는 의미로, 이는 예수를 하나님으로 알고 예배했음을 의미한다.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실의에 빠져 슬픈 기색을 띠며(17절) 두려워하던 제자들은(요 20:19) 이제 큰 기쁨으로 가득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움에 떨며 숨어 있지 아니하고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에게 심어준 놀라운 변화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24:53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 본서를 끝맺는 구절이다. 그러나 본절은 글을 끝맺는 느낌보다는 시작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는 사도행전을 염두에 둔 누가의 저작 의도가 반영된 까닭이다. 한편 누가는 그의 책을 기록하면서 성전을 배경으로 시작하고 성전을 배경으로 끝을 맺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누가의 섬세한 필치를 다시 한 번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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