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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1장 예수와 일곱 제자의 디베랴 재회와 베드로에게 주신 명령
많은 은헤 받으시고 하나님 좀 자랑해주세요.
하나님 영광을 받으시는것 좋아하세요.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제 18-21장까지 이어지는 요한복음 종결부의 일련기사의 종결 부분이다. 이 종결부는 본래 성자 곧 제 2위 하나님이셨으나 태초 하나님이 세우신 구속의 법에 따라 우리 죄인을 구원하시고자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우리의 절대 유일의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십자가 수난을 통하여 구속 사역을 최종 성취하신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주의 부활 및 부활 이후 잠시 더 세상에 머무시면서 이제 구약을 성취 확장한 신약 복음의 실체인 구속 사역이 성취된 시점에서 다시 향후 세상 끝 날까지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택한 자가 회개 구원 얻을 때까지 계속 진행될 구속사의 전개에 임하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위로와 약속을 주신 사역을 보도하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제 18,19장이 예수의 체포와 심문, 십자가 수난과 장례로 이어지는 예수의 구속 사역의 성취 과정을 보도하고 있다. 그리고 제 20,21 두 장은 십자가 수난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당신의 부활의 확실성을 제자들에게 증거하시며 또한 당신이 이제 성취하신 구속 사역을 최종 실현시키시려 다시 재림하실 세상 끝 날까지 이 땅에 남은 성도들의 신앙의 요람이 될 교회를 세울 사명을 맡은 제자들에게 소명의 수여와 위로를 주시는 등 승천 직전에 주께서 행하신 여러 사역을 약술하고 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구주라는 사실을 변증하기 위해 기록된 본서는 사실상 20:30,31에서 결론을 맺었다. 그러나 요한은 다음의 목적 하에 이 부분을 첨가한 것으로 추측된다. 첫째,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실성을 한 번 더 강조함으로써 본서 독자들인 초대 교회의 성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의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더욱 확신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둘째, 예수를 세 번 부인(否認)했던 베드로를 비롯하여 11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후 신앙을 완전히 회복한 사실을 보여 줌과 동시에 예수 부인 사건으로 실추되었던 베드로의 권위 회복 경위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셋째, 사도 요한이 죽기 전에 예수께서 재림하실 것이라는 초대 교회 내의 그릇된 신앙을 시정하기 위해서이다(21-23절).
먼저 전반부 1-14절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디베랴 바닷가에서 고기 잡던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나사 제자들이 153마리의 고기를 잡게 하신 이적과 예수께서 자신이 직접 준비하신 생선과 떡으로 제자들을 먹이신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속사적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최초 예수께서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실 때 예수께서는 그로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고 하셨다(마 4:19). 이에 이제 예수께서는 3년간의 공생애 기간 동안 당신의 사역과 그것이 가져올 천국의 참 실체를, 곧 신약 복음의 주요 내용들을 제자들에게 충분히 교육하셨다. 그리고 여기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다시 재림하실 때까지 지상에 교회를 세워 당신의 복음을 세세토록 전하도록 하기 위한 신약 교회의 기둥들로 세우신 제자들로 하여금 처음 소명(召命)을 다시금 회상케 하시고 이제 본격적으로 사람 낚는 어부로서의 복음 전파의 사명을 주고 계시는 것이다. 또한 이 사명을 주시면서 예수께서는 153마리의 고기잡는 이적(miracle)을 통해 복음 전파는 사람의 지혜나 힘으로가 아니라 예수께서 공급하시는 능력, 곧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능력을 받을 때에만 그 사명을 능히 감당할 수 있음을 교훈하셨다.
후반부 15-25절은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목양(牧羊)의 사명을 주신 사실(15-17절)과 베드로의 순교(18,19절)와 요한에 대한 예수의 예언(20-23절) 및 본서의 결어(24,25절)를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목양의 사명을 베드로에게 주시면서 주님은 세 번에 걸쳐 거듭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셨는데. 이는 일차적으로 참 목자 되신 주님께서 어떠한 사랑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셨으며 그들을 위하여 자기 몸을 구속(redemption)의 희생 제물로 십자가 위에 내어 놓으시기까지 하셨는가 하는 사실을 일깨워줌과 동시에 나아가 이러한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또 그러한 사랑을 본받아 마음에 품으며 사랑의 행위를 나타낼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는 자만이 참으로 주님을 대신하여 그분이 사랑하셨던 양들을 돌볼 목자가 될 수 있음을 교훈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십자가 구속 희생으로 일단 성취하신 구속 사역이 당신께서 세우신 당신의 종들을 통하여 세계 만민에게 전파되게 하시고 이제 당신의 재림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 성취될 때까지 당신의 종들에게 구속사적 사명 의식을 굳게 무장할 것을 교훈하는 것이다.
외울 말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요 21:15)
7제자에게 나타나신 그리스도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리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 육지에 올라 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2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베드로에게 주신 사명
15 〇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의 순교 예언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사도 요한에 대한 예언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24 〇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25 〇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본문 & 자료 노트
도표-21:1-14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신 예수
내 용
1. 대상: 일곱 제자(2절)
2. 때: 제자들이 밤새 실패를 경험한 후(3절)
날이 새어갈 무렵(4절)
3. 사역: 제자들로 실패를 고백케 함(5절)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함(6절)
사역 제자들에게 권능을 보이심(6절)
실패를 성공으로 변화시키심(6절)
제자들의 육신의 필요를 공급하심
4. 교훈: 모든 사람이 주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할 수 없음(요 15:5)
겸손히 오직 주님 한 분만을 바라보아야 함(5절)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만이 좋은 결과를 얻음(6절)
주님은 당신께 속한 자를 항상 크신 사랑으로 돌보심(6-9절)
주님을 위해 일하는 일군에게는 은혜의 보답이 예비됨(12절)
주요주제-21:1-23 예수 부활의 역사성과 부활 후의 행적 요약
요 20장 연구 자료 참조
삽화 - 21:3-11 성 베드로 고기
디베랴 바다, 곧 갈릴리 호수는 약 25종의 풍부한 어종(漁種)을 보유하고 있다. 그 중 '성 베드로 고기'라고 불리는 아래의 '틸라피아'(Tilapia)가 오늘날까지도 가장 유명한 고기로 손꼽힌다.
원어 연구-21:19 영광을 돌릴 것을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은 '독사세이'이다. 이는 '영광'(마 4:8; 고전 10:31) 및 '광채'(행 22:11) 또는 '영화'(요 17:5)를 뜻하는 명사형 '독사'에서 유래한 동사 '독사조'의 미래 3인칭 단수 형태이다.
한편 동사 '독사조'( )는 개역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본절을 포함해서 '영광을 돌리다'(마 15:31; 눅 23:47), '영광을 얻다'(요 11:4; 14:13). '영화롭게 하다'(요 17:4; 계 18:7)라는 뜻을 가진다.
한편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이미 충만한 영광 중에 계시기 때문에 피조물인 인간이 그분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없는 영광을 인간이 보태어드린다는 의미가 아니다. 더욱이 하나님께 영광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생들로부터 영광을 취하여 가진다는 뜻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 충만한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의 광채와 위엄을 인간이 '인정하고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하여 공동번역에서는 '영광을 드러내다'로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본절에서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는 그의 죽음이 본래 충만한 상태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어 만방에 알리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리라는 의미이다.
지리배경 -21:1. 디베랴
본문에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일곱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음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디베랴 바다'란 신약시대 갈릴리 바다를 지칭하는 로마식 명칭이었는데, 오늘날에도 아라비아인들은 갈릴리 바다를 '바하르 타바리예'(디베랴 바다)로 부르고 있다.
한편 이러한 '디베랴 바다'의 명칭은 본래 '디베랴' 도시로 말미암아 붙여진 것이다. 곧 갈릴리 바다의 서쪽 해안 도시로 건설된 '디베랴'의 중요성으로 말미암아 헤롯 안디바 통치기인 A.D. 25년 이후부터 갈릴리 바다가 디베랴 바다로 불려지게 된 것이다. 이에 디베랴 도시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는 것도 성경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1. 위치
디베랴(Tibenas)는 A.D. 25년경 분봉왕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가 그가 다스리던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의 수도로 갈릴리 바다의 서쪽 해안에 건설한 것이다. 그리고 '디베랴'라는 명칭은 로마 황제 디베료(Tiberius)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곳은 거라사(Gerasa)와 경계를 이루고 있고, 막달라(Mandala)에서 남쪽으로 약 6k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경관이 매우 뛰어나다.
2. 특징
디베랴는 해발 210m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데. 가파른 언덕이 있고, 또 온천이 근처에 있어 경관이 매우 아름답기 때문에 헤롯 안디바가 신도시를 건설하는데 있어 적지로 선택되었다. 그러나 이 곳에는 고대로부터 줄곧 공동묘지가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유대인들이 도시 건설에 크게 반대하였으나 안디바의 강경한 추진으로 도시는 건설되었다. 헤롯 안디바는 이곳에 로마가 규모로 건물을 건축했고. 언덕 높은 곳에서부터 해안의 저지대에 이르기까지 성곽과 성벽을 높이 쌓았다. 아울러 화려한 모습의 궁전을 높다랗게 세웠고, 지붕의 일부는 금으로 장식했다. 그래서 사람들 에게는 이곳이 황금궁으로도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해안에는 항구와 부두, 수문 등을 지었으며, 파수탑을 세우고 그 성문도 위용 있게 세움으로써 화려하고도 위용 있는 새 도시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도시의 이름을 '디베랴'라고 지어 디베료(Tiberius) 황제에게 헌납하여 그의 환심을 사는 데 열성을 다했고. 이 도시를 자기 영토의 수도로 삼았다. 그래서 이 후로 이 도시는 갈수록 커지고 유명해졌으며, 이로 말미암아 이 도시의 주위의 바다에까지 그 이름을 붙여 '디베랴 바다'라고 일컫게 되었다.
3. 의의
부활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실을 증거함에 있어서 사도 요한은 '디베랴 바다'에 예수께서 나타나셨음을 언급했다. 그런데 사도 마태가 마태복음을 기록할 당시에는 아직 '디베랴' 도시가 세워진지 그리 오래 되지 않은고로 그 이름이 널리 퍼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갈릴리 출신의 유대인들은 이곳을 '갈릴리'(마 28:10), '게네사렛'(마 14:10)으로만 불렀다. 하지만 본문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사도 요한의 본서 기록 당시에는 디베랴 도시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그 해안 근처를 로마식 명칭인 '디베랴 바다'로 일컫는 것이 일반화되어졌음을 알 수 있다.
보감-21:24,25 성경 기록의 10대 목적
1. 배운 바를 확실히 알게 함(눅 1:4)
2. 성도를 자유케 하기 위함(요 8:32)
3. 성도를 거룩케 하기 위함(요 17:17)
4.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함(요 20:31)
5. 교훈을 주기 위함(롬 15:4)
6. 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고전 10:11)
7.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케 하기 위함(딤후 3:15-17)
8. 태초로부터 계신 이를 알게 함(요일 2:14)
9. 미혹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요일 2:26)
10. 영생을 알게 하기 위함(요일 5:13)
도표-21:18-23 예수께서 주신 예언들
본권 14권 4복음서 개론 특별 자료 '예수 시리즈' 참조
21:1-14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신 예수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사실상 본서는 요 20:31에서 일단락 지워졌다. 그러므로 본장은 본서의 끝부분에 첨부된 발문(跋文)과 같은 성격을 지닌다. 그러면 요한이 굳이 본 장을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서는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유력시되는 이유는 사도 요한이 죽기 전에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것으로 믿었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오해를 분명하게 풀고자하는 의도에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초대교회의 성도들 사이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한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는데(마 24:34; 눅 21:32), 특히 그 기한을 사도 요한의 생전으로 믿는 자들이 많았다(20-23절). 따라서 본서의 기록자인 사도 요한은 자신과 연관된 성도들의 억측을 바로잡기 위해 본장을 부기(附記)하였을 것이다. 또한 이와 더불어 예수를 3번이나 부인함으로써 실추된 베드로의 제자로서의 권위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3번의 질문과 '내 양을 치라'는 3번의 목양(牧羊) 명령으로 다시 회복시켜 주셨음을 명백히 밝히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러한 본장의 첫머리인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마리아(요 20:11-18), 열 제자(요 20:19-23), 도마를 비롯한 열한 제자(요 20:26-29)에게 나타나셨음을 기록한데 이어 또다시 디베랴 바다 곧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음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예수께서 디베랴 바닷가의 제자들을 찾아가신 것은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기 전과 부활 직후에 주신 두 차례의 약속(마 28:7; 막 14:28; 16:7)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후에(20장) 갈릴리 호수로 되돌아간 것은 그들이 복음 전도의 사명(요 20:21)을 포기하고 옛날의 직업으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다만 이곳에서 다시 만나고자 하신 주님의 약속을 기다린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사실은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마치 제자들을 처음 부르셨을 때와 비 슷한 이적을 행하여 보이셨음(3-6절)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눅 5:1-11) 즉, 이것은 부활 신앙으로 무장된 제자들이 복음 증거의 사명을 본격적으로 감당해야 될 시기가 이르렀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마 4 :19) 그들의 소명 목적을 새롭게 깨우쳐 준다. 또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수 있는 참된 비결은 인간의 기술이나 경험으로가 아닌 오직 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데에 있다는 사실을 교훈해 준다(눅 5:5). 물론 이러한 교훈은 당시의 예수의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복음 증거의 사명을 부여받은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엡 6:10-20).
21:1 그 후에. - 부활 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던 첫 번째(요 20:19-23)와 두 번째(요 20:26-29) 사건 이후를 의미하는데, 이번 경우가 앞의 두 번과 다른 점은 특정한 날짜를 지적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지상에 머무신 기간이 40일밖에 안되니(행 1:3) 이때는 그때로부터 그리 오래되지 않은 때일 것이다.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 팔레스틴 북부 갈릴리 지방에 있던 민물 호수로 남북 약 20.8km. 동서 약 12.8km 정도의 크기이다. 구약에서는 '긴네렛'이라고 불리었고(수 13:27) 신약에서는 게네사렛 호수(눅 5:1), 갈릴리 바다(요 6:1)라고도 불렸다. 본절과 같이 디베랴 바다라고 불린 것은 A.D. 25년경 헤롯 안디바가 갈릴리 호수 서안에 도시를 세우고 당시 황제 티베료(Tiberius)에게 경의를 표시하기 위하여 도시 명을 '디베랴'(티베리우스의 여성 명사형)라고 붙인데 기인한다. 이 도시는 이후 갈릴리 지방의 중심 도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요 6:1 주석 및 막 4장 자료 노트, '갈릴리 바다' 참조. 한편 부활하신 예수와의 두 번째 만남까지는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던 제자들이 지금은 왜 갈릴리로 내려와 있는지에 대하여선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 첫째는 예수께서 갈릴리로 가실 것이라는 천사들의 말을(마 28:7,10; 막 16:7) 따라 여기서 다시금 예수를 뵙기 위해서이다(마 26:32). 두 번째는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위협이 심했을 예루살렘 보다는 지방인 갈릴리가 피신하기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또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 부활 후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나타나신 두 번의 출현은 자신의 부활을 확인시키고 제자들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요 20:21,26). 그러나 이제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할 제자들의 선교적 사명을 일깨우고 저들로 하여금 준비케 하기 위한 보다 진일보한 목적을 지닌다.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 이번의 나타나심은 다른 때보다 더욱 의미 있는 일이라는 암시가 깔려 있는 표현이다.
21: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 제자들에 대한 언급 중 이처럼 시몬 베드로의 이름이 가장 먼저 기록된 것은 그의 예수 부인 사건에도 불구하고(요 18:15-18, 25-27; 마 18:15-27) 그의 통회와(눅 22:62)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고 하셨던 베드로에 대한 주님의 말씀으로 인해 베드로의 권위가 이전의 상태로 회복되었음을 암시해 준다. 이는 요한복음에서 부록과 같은 의미를 가지는 본장의 기록 목적 중 하나가 예수께서 베드로의 권위를 회복시켜 주셨음(15-19절)을 보여 주기 위함이라는 점에서 볼 때도 더욱 그러하다. 한편 도마는 얼마 전 예수의 부활 사실을 확인하고서 보다 높은 신앙의 경지에 이르게 된 제자이다(요 20:26-29). 다음으로 나다나엘은 본서 1장에서 그 부르심의 과정이 기록된 사람으로(요 1:43-51) 공관복음서에서는 '바돌로매'(Bartholome)라고 불리운 자와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마 10:3). 그의 출신지인 갈릴리 가나는 예수의 처음 기적이 있었던 곳으로(요 2:1-12) 비록 작은 마을이었지만 예수를 따르던 자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아 있었던 곳이다. 끝으로 세베데의 아들들은 야고보와 본서 저자인 요한 자신을 가리킨다(요 1:41; 마 20:20; 26:37; 27:56). 이상의 다섯 사람은 본서가 자세히 그 이름을 언급하면서 다루었던 제자들로 본서의 독자들에게 익숙한 이름이다(참고로 각 제자들의 이름이 본서에 나타난 빈도수를 살펴보면 베드로 33회, 도마 10회, 나다나엘 6회, 야고보 1회, 감추어진 본서 저자 요한에 관한 언급은 21회이다). 한편 여기서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는 '또 다른 제자 둘'이 누구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이들은 본서에 등장하지 않는 제자들(빌립과 안드레는 각각 10회와 4회로 자주 등장하므로 그들을 제외한 마태, 작은 야고보, 열심당원 시몬, 다대오)이거나 12명이 아닌 보다 넓은 의미의 제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요 20장 중반부터 예수의 12제자와 관계된 기사가 계속 언급되고 있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이들은 12제자 중 그 누구일 가능성이 보다 크다. 한편 본절에서 예수의 제자 일곱이 언급된 것에 관해 어떤 학자는 본서의 저자 요한이 '일곱'이라는 숫자를 좋아했기 때문에 특별히 일곱 명만을 언급한 것이라고 하면서 본절에서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제자는 안드레와 빌립이라고 한다. 따라서 본절에서 언급되지 않은 제자는 마태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시몬, 다대오라는 주장이지만(M.Reynolds) 개연성은 그리 많지 않다. 참고로 위경 베드로복음(Pseudo-Peter's Gospel)에서는 익명의 두 제자가 안드레와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고 밝히고 있으나 이 주장 역시 확인되지 않는다.
21: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내려온 제자들은 아마도 베드로의 집이나 아니면 그 어떤 곳에다가 공동의 회집 장소를 마련했을 것이다. 이는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었다(2절)는 말에 의해 뒷받침된다. 그런데 이처럼 함께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말하자 다른 제자들도 따라 나선 사실을 아무런 이유나 정황도 덧붙이지 않고 기록한 요한의 의도에 대해 논란이 많다. 그것은 바로 베드로 일행이 왜 물고기 잡으러 갔을까 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하여 몇몇 주석가들은 제자들이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사명을 버리고 그 전의 일터로 되돌아간 일종의 '환속'(還俗)이라고 본다(McDowell, F.Grosheide. J.Moulton).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다소 신빙성이 없다(R.Brown). 왜냐하면 이 주장에 따르면 본래 어부 출신이 아닌 자들도(아마도 도마, 나다나엘 등) 모두 어부가 되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두 번째 견해는 제자들이 갈릴리에 나타나실 주님을(마 26:32; 막 16:7) 기다리는 동안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소일삼아 고기잡이 하러 나갔다고 보는 것이다(Lenski, Robertson),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견해는 비록 제자들이 사도로서의 사명을 포기한 것은 아니나 이전에 주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는 계속되었던 여인들의 공궤가(눅 8:2,3) 중단되었으므로 생활비를 벌어야 할 필요가 초래되어 고기잡이에 나섰다는 견해이다(Reynolds). 즉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이전에는 자신들의 쓸 것들을 충당하고도 남아 가난한 이웃을 돕는 구제 사업을 할 정도로(요 13:29) 재정상의 여유가 있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그렇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이상의 두 번째, 세 번째 견해는 모두 개연성이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 중 어느 것이 보다 더 타당한 것인지를 논하기보다는 본문의 기사가 왜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지를 이해함이 보다 중요하다. 왜냐하면 본문의 기사는 '사람 낚는 어부'로서의 제자들의 사명을 한층 더 일깨워 주는 것일 뿐 아니라 그 같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의 근원이 무엇에 있는지를 교훈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 현재의 갈릴리 호수에서도 그러하지만 당시에도 밤은 물고기 잡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었다(눅 5:1,2). 왜냐하면 호수가 맑아서 낮에는 배 그림자가 보이므로 고기들이 모두 도망쳐 버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이날 밤 제자들의 실패는 보다 많은 것을 시사하고 가르치려는 주님의 섭리 때문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이 일을 통해 예수께서는 비록 오랫동안 익숙해 있던 기술과 경험을 총동원하였어도 고기잡이에 실패하였으나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에 의거, 그물을 던졌을 때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던 것처럼(5,6절) 사람 낚는 '전도 사역 '에 있어서도 사람의 생각으로만 하려고 한다면 실패할 뿐임을 교훈하고자 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구령(救靈) 사업에 있어서 온전히 주님의 장중(掌中)에 사로잡혀 주께서 주시는 능력으로써 그 모든 일을 감당해야 함을 명심토록 하신 것이다(요 15:5; 16:7,13).
21:4 날이 새어갈 때에. - 이것은 제자들이 밤을 새워 새벽이 이르기까지 고기잡이를 하였으나 전혀 고기를 잡지 못한 데 따른 허탈함을 시사함과 아울러 제자들이 해변에 서 계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한 가지 이유도 시사해 준다. 그것은 곧 아직 어두움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이었다는 점이다.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 배와 해변 간의 거리나 새벽의 짙은 안개 때문이었기도 하겠지만 제자들이 주님을 바로 알아보지 못한 이유로는 또 한 가지를 들 수 있다. 즉 제자들은 바닷가에 서 계신 예수를 해변의 방랑자인 줄로만 알고 갈릴리에 나타나시겠다고 말씀하신 바로 그 예수라고는(막 16:7)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Bernard, Reynolds), 즉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예상치 못했던 시점에 나타나신 것이다.
21:5 얘들아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 '얘들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디아'는 지소사(指小辭)로서 마치 부모가 그 자식을 부르는 것과 같은 뉘앙스를 지닌다(my boys, Robertson). 그런데 이 칭호는 현대 헬라어에서 성인(成人)들에 대한 호칭로 쓰이는 것을 볼 때 (C.K. Barrett) 당시에도 '여보게들!' 정도의 의미로 사용되었을 수 있다. 이점을 반영하여 현대어 성경은 이것을 '이 사람들아'라고 번역한다(Oxford-Cambridge University press New Testament). 그러나 기존의 대다수 한글 역 성경들은 이러한 의미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으며 특히 천주교 200주년 기념 신약 성서는 극단적으로 '어린(친구들)'이라고 직역하고 있다. 다음으로 '고기'에 해당하는 일반적인 단어는 '옵손'이거나 '옵사리온'인데(9,10절), 여기서는 '프로스파기온'이 사용되고 있다. '옵사리온'은('옵손'의 지소형) 빵과 함께 먹는 '조리된 음식'(Cooked food)을 의미하기도 하나(요 6:9), '프로스파기온'은 성경에는 용례(用例)가 잘 나타나지 않지만 '물고기'를 의미하는 일반적인 용어이다(W. Bauer). 따라서 개역성경 및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과 같이 이를 '(물)고기'라고 번역하여야지(NIV, RSV, NASB, LB)' 몇몇 성경이 번역하는 대로 '먹을 것'(천주교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이나 '음식'(현대인의 성경 난하주, 새성경)으로 불확실하게 번역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한편 '~이 있느냐'에 해당하는 '메티'라는 헬라어 부정사 어귀는 부정적인 답을 기대하는 것이 특징적이다. 즉 이는 '고기가 없지 않느냐? 그렇지?'라는 뉘앙스를 지닌다. 이는 고기잡이에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베테랑(Veteran)들이었을 제자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한 질문이다. 그러나 실상 이러한 질문은 제자들이 예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요 15:5) 깨닫게 해주려는 것이라는 데 참된 의미가 있다.
21:6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 여기서 '오른쪽'이란 '행운'(luck)의 자리를 의미한다고 보는 상징적 해석은(Trench, Barrett) 바람직하지 못하다. 또한 예수께서 제자들이 미처 보지 못한 물고기 떼가 배 오른편에 몰려 있는 것을 발견하시고서 그곳에다 그물을 던지게 했다는 견해도(Bernard) 무리가 있다. 아울러 예수가 만약 제자들 중 자기를 알아보는 제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자신의 명령을 따를 것이라고 기대했기에 그러한 명령을 했다는 해석도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전지성(全知性)을 약화시키는 견해이다(Brown), 대신 이 명령은 그저 단순히 밤새 수고하였어도 고기를 잡지 못했지만 다시 한 번 그물을 던져보라는 의미 외에 어떤 다른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 아마도 이때 제자들은 해변에 서 있는 낯선 존재가 누구인지를 인식했을 것이다. 즉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는 상식적으로 이해 안 되는 명령에 순종하였을 때 밤새도록 수고하였어도 잡지 못한 고기를 그물 가득히 잡는 이적을 경험하게 되자 제자들은 해변에 서 계신 자가 예수이심을 알아챘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7절에 의해 뒷받침된다. 한편 여기서 '들어올리다'에 해당하는 '엘퀴사이'는 본서 저자 요한에 의해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이끌려 오는 것을 가리킬 때에도 사용되었다(요 6:44; 12:32). 그러므로 이는 사람 낚는 어부인 예수의 제자들이어야 할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영적 교훈을 주기도 한다. 즉 그리스도께 의지함 없이 스스로 노력할 때에는 한 사람의 개종자도 얻을 수 없지만,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의지할 때에는 놀라운 역사가 있게 된다는 교훈이다(M.Reynolds).
21:7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 우연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명백한 이적을 경험한 제자들은 해변가에 선 낯선 자가 예수님임을 알아차렸다. 그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이 사실을 알아챈 자는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 즉 본서 저자인 요한이었다. 요 20:2 주석 참조. 이로써 요한이 주의 깊고 세심한 성격을 지닌 자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요 20:5 주석 참조.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 막일꾼들은 보통 노동을 할 때에 겉옷을 벗고 간편한 차림으로 일한다.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완전히 벗지 않은 차림도 '벗었다'(귐노스)라고 표현한다(사 27:2; 삼상 19:24; 욥 24:10; 막 14:51),
주라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 '겉옷을 두른다'는 것은 수영하기 용이하도록 허리 주위를 단지 띠로 떤 것이라고 보는 견해는(Lenski, Hengstenberg) 바로 앞의 '벗고 있었다'는 구절을 설명할 수 없다(W. Hendriksen). 바레트(Barrett)처럼 이 겉옷을 두르는 행위가 종교적인 행동을 위한 것(절하기 위한)이라고 볼 필요는 없지만 이는 경외의 자세임은 분명하다. 즉 물에 뛰어 들기 위해서는 입었던 옷도 벗어야 하는데, 베드로가 도리어 겉옷을 입은 것은 주님을 대할 때 예의로 대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즉 베드로는 속옷 차림에서 서둘러 겉옷을 입고 허리를 동여 맨 후 물속으로 뛰어든 것이다(Langrange, Marrow, Brown). 이처럼 베드로는 많은 고기가 들어 있는 그물을 처리하기 보다는 먼저 주님을 만나려는 열망에 불타올랐다. 그리하여 그는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을 해서 예수에게로 갔다. 8절에서 보듯 배에서 해변까지의 거리는 불과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해안선에서 얼마 가지 않아 급격히 깊어지는 갈릴리 호수의 특성상 배를 타지 않는 한 헤엄쳐서 해변에 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성격이 급한 베드로는 노를 저어 만선(滿般)한 배로써 천천히 해변에 이르기 보다는 헤엄쳐 보다 빨리 해변에 닿아 예수를 뵈오려고 한 것이다.
21: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 헬라어 원문에는 '오십 간'이 '페콘 디아코시온'( ) 즉 '200 규빗'으로 나와 있다. '규빗'이란 성인 남자의 손가락 끝에서 팔꿈치의 길이를 말하는데 통상 45.6cm였고 간혹 52.5cm를 뜻하기도 했다. 따라서 200 규빗은 90여m쯤 된다(공동 번역은 후자의 길이를 취해 '100m'라고 함). 1권 성경총론, '성경 도량형 환산표' 참조.
작은 배를 타고 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 3절에는 그저 '배'(플로이온)라고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작은 배'(플로이아리온)로 되어 있다. 때문에 혹자는 본절의 배를 3절의 큰 배를 예인하기 위한 작은 배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해안선이 그리 얕지 않은 갈릴리 호수의 특성이나 비슷한 두 단어를 의미 차이 없이 교차적으로 사용하는 요한의 단어 사용 습관(요 6:17,19,21)을 고려 할 때, 제자들은 본래 부터 작은 배를 타고 있었던 듯하다(Robertson).
21: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 '있는데'에 해당하는 '케이메넨'( )은 어떤 일정한 목적을 위하여 놓여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요 2:6). 그러므로 이와 연관하여 특별한 정황을 묘사하는 요한의 의도를 살펴볼 수 있다(M.Reynolds). 즉 요 18:18에 보면 베드로는 숯불 앞에서 예수를 부인했다. 그런데 그 베드로를 다시금 회복시켜서 영적 구령 사업에로 부르실(15-18절)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베드로를 찾으신 주님께서는 밤새 고기 잡느라 지쳐 있을 제자들을 위하여 숯불을 피워 따끈한 아침 식사를 마련해 놓고 계셨다. 때문에 이 숯불을 보고서 다른 제자는 몰라도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를 부인하던 후회스러운 때의 기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요한이 특별히 이러한 상황을 묘사하는 의도도 바로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 이는 밤새도록 고기잡이 하면서도 허탕친 제자들의 허기를 면하게 하려고 예수께서 준비하신 귀한 음식이다. 하지만 이는 부자들의 진수성찬과는 다르게 서민들이 먹는 간단한 식사거리였다(요 6:9). 그런데 이 식사가 어떻게 마련되었을까에 대해 초대교회 교부들과 크리소스톰(Chrysostom) 등은 그리스도의 권능에 의해 초자연적으로 마련된 것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천사나(Luthardt) 심지어 베드로(Weiss)가 준비했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본문은 예수께서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구했는지에 대해 정작 침묵하고 있으니 정확한 바를 알 수 없다. 다만 요한의 강조점은 예수께서 친히 준비하신 이 귀한 식사를 통해 예수와 제자들 간의 친밀한 교제와 기쁨이 넘치는 모습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21: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 오라 하신대. -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데 대해 다음과 같은 여러 의견들이 있다. ① 방금 잡은 물고기들을 처리하고 나서 식사 교제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한 말씀이다(Hendriksen, Lenski). ② 예수께서 준비한 생선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L.Morris). ③ 예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 많은 고기를 잡게 된 사실을 상기시킴으로 이후의 구령(救靈) 사업에서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좇아 행하여야 함을 교훈하기 위함이다(M.Reynolds). 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즉 주님이 준비하신 식사는 그 자체로도 충분한 것이었지만, 예수께서는 이 같은 말씀을 통해서도 간접적이나마 제자들에게 귀중한 교훈을 주신 것이다.
21: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 예수의 말씀에 가장 빠르게 반응하는 제자는 역시 베드로였다. 하지만 그 무거운 그물을 끌어올리는 일이 베드로 혼자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본절 역시 제자들의 행동이나 말에 있어 베드로를 대표로 하여 기록하던 복음서 기자들의 경향을 보여주는 것으로 향후 제자 공동체의 사역에 있어 베드로가 중심이 되는 특징적인 양상을 암시하는 구절이라 하겠다. 1절 주석 참조. 사실 사도행전에도 거의 매번 베드로가 먼저 입을 열어 증거하고 다른 제자들은 합세하여 함께 사역했던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행 3:12; 4:8; 8:20; 10:34~11:18; 15:7-11).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쉰세 마리라. - 여기서 '물고기'를 가리키는 단어는 '옵사리온'이 나 '프로스파기온'이 아닌(5절 주석 참조) '익뒤스'이다. 그런데 비록 우연의 일치이긴 하나, 이 단어를 풀어서 한 글자씩을 각각 첫 자로 하면 '이에수스 크리스토스 데오스 휘오스 소테르'.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구세주'라는 말이 된다. 이 때문에 초대 교회 교인들은 물고기 모양을 기독교인을 상징하는 부호로 삼았다. 한편 제자들이 잡은 물고기의 수가 153마리였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실에 충실한 기록이다. 그런데도 초대 교회 이래 지금까지 이 153이라는 숫자에 대해 여러 가지 다양한 해석들이 가해지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풍유적(allegorical) 해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해안에 가져오기까지 고기를 헤아리지 않은 것은 택함 받은 자들이 천국에 도달하기까지 알려지지 않는 것을 의미함. ② 153은 153종류의 고기이므로(Jerome)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구원 받는 것을 의미함(마 13:47,48). ③ 이와 유사하게 어거스틴(Augustine)도 153이 1에서부터 17까지를 차례로 더하면 나오는 숫자라는 데 착안해 10은 율법의 상징, 7은 성령의 상징이므로 모든 은혜의 시대에 하나님 밑에 돌아올 충만한 사람의 수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천주교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의 난하주도 이 해석을 취한다). ④ 또한 알렉산드리아의 시릴(Cyril of Alexandria)은 153을 100+50+3으로 구분해서 100과 50은 각각 이방인과 유대인을 뜻하며 3은 이들 사이에서 행한 사도들의 전도가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을 힘입어 성공한다는 상징으로 보았다. ⑤ 심지어 더욱 가관(可觀)인 것은 현대의 튀빙겐학파(Tubingen School)의 몇몇 학자들조차 이러한 우화적 해석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알파벳의 각 글자마다 고유의 숫자를 가지고 있는 특성에 착안해 베드로의 이름들인 시몬, 바요나, 게바를 각각 71, 53, 29로 보아 153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지나친 신비적 사색으로 논의를 복잡하게 할 필요가 없이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는 대로 물고기의 숫자가 구체적으로 기록된 것은 어디까지나 이 사건의 사실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Lenski, Godet, Baumgarten-Crusius). 153이라는 숫자를 요한이 기록한 것은 그의 세심한 성격을 반영한 것으로서 이 사건이 요한 자신이나 제자들에게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153마리나 되는 큰 고기가 잡혔을 경우 그물이 찢어졌을 것인데 그렇지 아니하였으니 이 또한 이적적인 현상임을 시사해 준다. 한편 이렇게 그물이 찢어지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① 교회의 통일성 ② 영혼들을 최종적으로 불러 모으는 일에 실패하지 않는다는 암시(Reynolds) ③ 삼천 명이나 영입되어도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복음의 그물(행 2:41, M.Menry)을 상징한다는 등의 풍유적 해석을 가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 역시 그다지 신빙성이 있는 해석들은 아니다.
21:12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당시 팔레스틴에서는 대개 하루 두 끼의 식사를 했다고 한다(Jeremias, Morris). 즉 해가 뜨는 오전 여섯 시경에 일을 시작했다가 그들 시각으로 삼,사시(9,10시)경에 아침 겸 점심의 식사를 하고 일과가 마친 후 오후 여섯 시 이후에 저녁 식사를 했다고 한다. 이 중 저녁의 식사가 보다 중요한 식사였는데, '데이프논'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그런데 예수께서 제자들을 초청한 식사는 아침의 가벼운 식사에 해당하는 '아리스톤'이다.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 제자들은 흥분된 가슴으로 주님과 함께 조반을 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153마리의 큰 고기들이 환상이 아닌 실제적인 것이듯이 주님의 존재 또한 틀림없이 이전에 그들과 함께 생활하시던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예수의 출현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벌써 부활 이후 세 번째 나타나신 것이니(14절) 더욱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21: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 본절에 나타나는 모든 동사들은 지금 그 같은 동작들이 일어나고 있는 듯한 역사적인 현재 시제(historical present tense)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병이어의 기적 때도 지금과 비슷한 상황을 묘사하지만 부정과거 시제가 사용된 차이점이 있다(요 6:11). 그러나 그것과 관련 본절이 성만찬의 상징성(eucharistic symlism)을 지닌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심지어 베자 사본(Codex Bezae, 사본 기호 D), 시리아어로 된 시내 사본(Syriac Sinaiticus mss.)과 두개의 라틴어 역본들은 요 6:11과의 유사성을 위해 '유카리스테인' 동사('축사하다'란 뜻)를 추가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력한 사본들에는 그 같은 단어가 생략되어 있다. 그렇다고 볼트만(R.Bultmann)의 주장처럼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전과 같이 더 이상 감사의 기도를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눅 24:30에서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과 식사하실 때 예수께서 축사하신 사실과 상반되어 고려할 가치가 없다. 굳이 본절을 요 6:11과 연관한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종말론적인 시각에서 메시야에 의해 베풀어질 하늘나라의 만찬을 상징하고 예기하는(anticipate)것이라고 보아서, 본절 또한 부활하신 예수께서 최후 심판 후 그의 제자들과 함께 나누실 식탁의 교제(마 26:29)를 예기한 것으로 볼 수는 있다(J.Potin). 한편 '예수께서 가셔서'라는 표현은 머뭇거리는 제자들을 위해 예수께서 몸소 움직인 것을 강조한 표현으로 생각할 수 있다.
21: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 요한의 이 진술을 근거로 해서 어떤 학자는 예수께서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이 세 번뿐이고 공관복음서나 서신서의 기록들 중 요한의 기록자 상충되는 것들은 모두 이 세 번의 사건 이후에 생긴 것들이라고 주장한다(M.Reyilolds). 하지만 요한 자신도 명백히 기록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사건을(요 20:14-18) 본절에서는 제외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본절의 세 번은 제자들의 무리가 모여 있을 때 나타나셨던 예수의 출현만을 계산한 것임을 알 수 있다(요 20:19-23,26-29). 한편 이 세 번의 출현 이외에도 예수께선 부활하신 당일에 ① 베드로(눅 24:34; 고전 15:5), ② 다른 여자들(마 28:9). ③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눅 24:15-31)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언제인지 불확실한 때에 ④ 갈릴리의 산에서 열한 제자 모두(마 28:16,17), ⑤ 주의 형제 야고보(고전 15:7), ⑥ 500여 형제들(고전 15:7)에게 보이셨으며, 승천하실 때 ⑦ 열한 사도에게 감람산에서(행 1:6-9) 나타나 보이셨다. 눅 24장 자료노트,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사람들' 참조. 따라서 요한이 예수의 출현 기사를 다루는 방법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그의 복음서 마지막의 진술(25절)이 확인해 주는 대로 복음서 자료의 취사 선택적 특성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자료를 채택하는 방법이 다르다고 하여 요한의 기록을 비역사적인(non-historical) 글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만약 모든 자료를 다 기록해야 역사적인 글이 된다고 하면 이 세상에 진정한 역사서는 단 하나도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역사 기술(記述)이 나름의 사관(吏觀, historical view)을 가지고 자료를 선별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치기 때문이다(H. Marshall). 따라서 우리는 요한의 복음서에서 예수에 관한 모든 자료가 아닌 그가 의도하는 예수의 상(像)과 관련된 일부 역사적인 사건 자료들을 대할 수 있는 것이다. 요 20:30,31 주석 참조.
21:15-23 베드로에게 사명을 맡기신 예수
앞 단락에서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디베랴 바닷가의 제자들에게 나타나 고기잡는 이적을 행해 보이심으로 '사람 낚는 어부'로서의 제자들의 사명을 다시 한 번 암시하여 주신 것에 대하여 살펴보았다(1-14절). 이제 그에 이은 본문은 예수께서 그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목양(牧羊)사명을 부여하시고(15-17절), 베드로와 사도 요한의 최후에 관하여 예고하시는 장면이다(18-23절).
먼저 본문의 전반부는 예수와 베드로의 사랑의 문답(間答)으로, 예수께서 3번이나 자신을 부인한 적이 있는(요 18:15-18, 25-27) 베드로에게 3번에 걸쳐서 당신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시면서 목양 사명을 부여하시는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15-17절).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전에 친히 붙여준 '베드로'(반석)라는 이름 대신에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는 원래의 이름을 사용하여 그를 부르고 계신다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아마 이와 같은 호칭을 통하여 베드로는 자신이 얼마나 '반석'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 처신을 하였는지 돌이켜보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예수님 앞에서 철저히 겸손한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호칭을 사용하신 궁극적인 예수님의 의도는 베드로의 사도직을 박탈하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소명 의식을 새롭게 고취시켜 목양(牧羊)의 사명을 부여하시려는 데에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목양 사명을 부여받은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한 데 대한 죄책감과 실의를 극복하고 초대 교회의 형성 과정에 중차대한 역할을 감당한 데서 알 수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적이 있는 베드로의 사도직에 대해 의혹과 불신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던 당시 성도들의 오해를 해소시키기 위해 기록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본문의 후반부에는 사도 요한이 죽기 전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이라는 항간(巷間)의 억측을 불식시키기 위한 내용이 서술된다(18-23절). 즉 그와 같은 소문의 발단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대화를 당사자 자신이 정확히 소개함으로써 그것은 단지 오해에 불과할 뿐, 결코 진실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23절).
그러므로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① 주님께서는 너무나 자주 실패하는 우리 성도들의 연약함을 먼저 책망하시기보다, 끝까지 사랑과 용서의 손길로 어루만져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그런즉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주님 앞에 나아오기만 하면 아무리 곤고한 우리의 심령도 위로를 받고 새로운 힘을 얻게 될 것이다(사 42:3). ② 주님의 크신 사랑과 용서의 은총을 누린 자들은 이제 더 이상 범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될 뿐만 아니라(요 8:11), 생명을 바쳐 주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애써야 한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렇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구습(舊習)을 좇아 행한다면 주의 은혜를 도리어 욕되게 하는 것으로 그 결국이 어떠한 것일런지는 명백하다(엡 4:22). ③ 베드로를 향한 예수의 가르침은 예수 재림을 기다리는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도 많은 깨달음을 준다는 사실이다. 즉, 참으로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늘 생각하면서 하루 빨리 주님께서 재림하시기를 고대 하는 심정을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세상 속으로 파송을 받은 성도의 전도 사명을 도외시한 채 그저 하늘만 쳐다보고 앉아 있는 것은 진정한 재림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한부 종말론에 빠져 자신에게 맡겨진 직장, 학업과 가정을 모두 내팽개치고 기도원에만 모여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려는 것 또한 결코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마 24:3,23-26,32-36) 어디까지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자신의 삶터에서 충분한 자기 역할을 수행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드러낼 때 전혀 부끄러움 없이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마 24:40-51).
21:15 본절에서부터 23절까지는 예수께서 일전의 예수 부인(否認.) 사건(요 18:15-18,25-27)으로 위신이 실추된 베드로에게 사도로서의 권위를 회복시켜 주며(눅 22:32). 아울러 베드로를 포함한 모든 사도들에게 선교적 사명을 일깨워 주시는(마 4:19; 눅 5:10) 격려의 장면에 관한 기록이다.
저희가 조반을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 요한은 베드로를 '시몬 베드로'라고 호칭하는데, 이것은 초대 교회 당시 공식적인 베드로의 이름이 이것이었음을 암시해 준다. 반면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호칭은 본서가 기록하는 예수와 베드로의 첫 대면 장면을(요 1:42) 연상시켜 준다. 그때에 예수께서는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게바'(Cephas)란 '반석'(rock)이란 뜻의 아람어로서 그것의 헬라어 표기가 바로 '베드로'(페트로스)이다. 따라서 본서에서도 일관되게 '시몬 베드로'로 불리고 있다(요 6:8,68; 13:6,8,9,24,36,37; 18:10,11,15,16,17,18,25,26,27; 20:2,3,6; 21:2,3,7,11,15,17,19,20,21). 그런데 베드로는 그 동안 예수에 의해 불린 그 이름대로 제자들의 대표격으로 활동해 왔지만,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예수를 세 번 부인한 일생 일대의 실수는(요 18:15-24) 그 이름의 의미를 무색케 만들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시점에서 그를 '베드로' 대신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신 것은 이름값을 못한 베드로에 대한 책망이기보다 그가 처음 사도로 부름 받던 때의 추억을 되살리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즉 본장에서 설정된 모든 환경과 정황이 그러하듯이 예수의 이러한 배려는 그의 제자들의 나약하고 실패한 모습까지도 모두 감싸시는 예수의 폭 넓은 수용성과 깊은 사랑에 기인한 것이다(마 11:28). 한편 '이 사람들보다'에 해당하는 '플레온 투톤'은 '이것들 보다'로 번역될 수도 있다(개역성경 난하주). 따라서 본절은 '네가 이것들'(배나 잡힌 물고기 등)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NIV, RSV, TEV, NASB, LB, KJV, Oxford-Cambridge press New English Bible, 중국어 聖經). 또한 '투톤'( )을 '사람들'이라고 번역하더라도 다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① 사람들과 주님을 비교하는 것으로 '네가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개역성경, 현대어성경, 천주교 200 주년 기념 신약성서, 표준신약전서, 현대인의 성경, 새성경). ②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공동번역). 이상의 견해 중 '투톤'을 사물로 보는 견해는 많은 번역 성경들이 따르고 있는 것으로서 문맥상 그다지 어색하지 않다. 다음으로 '투톤'을 사람으로 보는 견해 중 사람들과 주님을 비교하는 첫 번째 견해는 가족이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평소의 주님의 말씀에 부합된다(마 10:37; 19:29; 막 10:29). 반면에 두 번째 견해도 비록 제자들이 예수를 사랑하는 정도를 구분하는 듯하지만 베드로가 늘 다른 제자들보다 더 주를 사랑한다던 말을 해왔고, 십자가 사건 이전에 주와의 마지막 밤에도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막 14:29)라고 다짐한 사실을 감안하면 일리가 있다. 즉 이상의 견해가 모두 타당성이 있는 해석들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중 어느 것이 보다 타당한 것인지를 논하는 대신 이 세 가지를 모두 염두에 두고 본절을 대하여야 할 것이다. 한편 여기서 '사랑하느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가파스'이다. 이것은 신약에서 '사랑하다'는 단어로서는 가장 흔히 나타나는 단어로 변함없는 신적인(divine) 사랑 또는 헌신적, 이타적 사랑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16절의 두 번째 질문에서도 역시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반면 세 번째에는 우애(friendship)를 뜻하는 '필레오'가 사용되었다(17절 주석 참조). 따라서 본문에서는 이 같은 의미 차이를 염두에 두고서 이 두 단어를 사용한 것이기보다는 요한이 흔히 사용하는 유사한 단어의 교호적(交互的)사용임을 알 수 있다.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 예수의 질문이 '아가파오'임에 반해 베드로의 대답은 '필레오'이다. 이 때문에 혹자는 헌신적 또는 변함없는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 예수의 질문에 베드로가 그저 우애나 가족에 대한 사랑 정도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답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베드로는 이 순간 다른 제자들보다 자기가 더 주님을 사랑하겠다고 했던 과거의 맹세가 예수 부인 사건에서 명백히 입증되었듯 얼마나 보잘 것 없는 헛맹세였는가 깨달았다는 것이다(마 26:35; 막 14:31; 눅 22:33). 그리하여 그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다음과 같은 의미로 대답했다는 것이다. '주께서 아십니다. 제가 주를 고작 우정의 차원 정도에서 사랑하는 줄',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본문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비약적 해석이다. 왜냐하면 이 주장을 따를 경우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은 것에 대해 베드로가 '주여 그러하외다'라고 긍정한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난관에 봉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미 언급하였듯 본문에서는 '아가파오'와 '필레오'가 서로 구분 없이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는 평소의 요한의 어휘 사용 습관과도 일치한다. 8절 주석 참조.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 '먹이라'는 단어(보스케)는 16절에서는 '포이마이네'로 바뀌었다가 17절에서 다시 '보스케'가 된다. 이와 관련 혹자들은 '포이마이네'가 '보스케'보다 더 폭넓은 개념이라고 주장한다(Brown, Tenner). 즉 '보스케'는 양들에게 꼴을 먹이는 것에 대한 문자적이고 회화적인(figurative) 표현이지만(겔 34:2), '포이마이네'는 양떼를 인도하고 먹이고 돌보는 보다 폭넓은 의미에서의 목양(牧羊) 사역을 의미한다는 것이다(눅 17:7; 행 20:28; 벧전 5:2; 계 2:27; 7:17). 그러나 '아가파오'와 '필레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두 단어 역시 동일한 단어의 반복을 피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좋다. 한편 '어린양'이란 단어(아르니아)는 본서에서는 여기에만 나오는 단어로(요한계시록에 29회) 새로 개종한 초신자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으로 보인다. 즉 이는 베드로가 맡아서 목회해야 할 신자들의 특성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는 나약하고 자기를 보호할 능력이 없는 주님의 백성들을 목자의 심정으로 따뜻하게 돌보아 주어야만 했다. 이것은 선교의 사명이 공관복음서가 강조하는 불신 세계를 향한 전도(마 28:19, 20; 행 1:8) 뿐만 아니라 초신자들을 위한 양육과 교육에도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아마도 요한이 본서를 쓰던 당시(A.D. 85-90년경)에는 공관복음서가 쓰여진 시대(A.D. 50-70년경)에 비해서는 더욱 양육의 필요성이 중시된 듯하다. 공관복음을 보충하는 요한복음의 저작 목적과 연관하여 당시 교회의 그러한 필요를 엿볼 수 있다. 요한복음 서론, '신학적 집필 동기와 배경' 참조.
21:16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라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 첫 번째 경우와 똑같은 질문과 대답이다(15절). 다만 첫 번째 질문과 다른 것은 '이 사람들(혹 이것들)보다'라는 비교의 문구가 빠져 있는 점이다. 그런즉 이는 다른 무엇과의 비교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예수와 베드로 간의 일대일의 절대적 관계에서도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이다. 이에 대하여 이번에도 베드로는 '주께서 아시나이다'라는 말로써 예수께 대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 이와 관련 우리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는 구절을 상기할 수 있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 본절과 17절에서 '양들'을 가리키는 단어는 15절의 '아르니아'와 달리 '프로바타'이다. 때문에 혹자는 '프로바타'를 '아르니아'와 구별하여 '큰 양', 즉 치리(治理), 권징(勸懲) 등도 감당할 수 있는 신앙적으로 연륜이 깊은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러나 아무런 전환점이나 연결고리도 없이 예수께서 성도들을 구분하여 말씀하셨을만한 근거가 없다. 따라서 '아르니아'와 '프로바타' 역시 초신자에서 비교적 믿음이 깊은 자들을 모두 포괄하는 '성도'의 개념으로 구분없이 사용되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21: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 혹자는 첫 번째, 두 번째 질문에서와 달리 이번에는 예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필레오'를 사용하신 것과 관련, 이를 '그래 너의 사랑은 진정 우정으로서의 사랑이기는 하단 말이냐?'라는 의미의 질문으로 본다. 그러나 그 같은 주장은 지나치게 양 단어의 의미를 구분하려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여기서 '아시나이다'는 이전과 달리(15,16절) '오이다'가 아닌 '기노스코'이다. 물론 전자가 다소 관념적인 지식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체험적인 앎을 의미하는 것이긴 하나, 본문에서는 별반 차이 없이 쓰이고 있다. 아무튼 이상과 같은 예수의 세 차례에 걸친 질문을 받은 베드로는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는 가운데 예수께 대한 사랑을 확고히 다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주께로부터 받은 목양 사명에 대하여 죽기까지 충성함으로 주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드릴 것이라고 결심하게 되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 비단 '어린 양' 뿐 아니라 '장성한 양'(즉 성숙한 신자)이라도 끊임없이 말씀의 꼴로 양육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는 구절이다. 사실 교회의 구성원들은 믿음이 연약하거나 강하거나를 막론하고 누구나 참 목자되신 그리스도의 말씀의 꼴로 양육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린 아이가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하면 성장할 수 없듯이 성도들은 영의 양식인 말씀을 공급받지 못하면 그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엡 4:13).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 공관복음과 달리 '진실로'(아멘)가 두 번 반복되는 것은 본서의 특징적 어구로 모두 25회나 나타난다(요 1:51; 3:3,5,11; 5:19,24,25; 6:26,32,47,53; 8:34,51,58; 10:1,7; 12:24; 13:16,20,21,38; 14:12; 16:20,23) 또한 요한복음에 있어 이 '진실로 진실로'는 대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레고 휘민)와 연결된다. 이것은 구약 시대 선지자들에 의해서도 자주 사용된 표현인데, 이는 그들의 말이 자신들의 사상이나 지혜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온 메시지'(oracle)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말씀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시는 것은 자신의 말씀이 신적인 권위 즉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선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J.Jeremias).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를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 이는 곧 베드로가 장차 순교 당하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구절이다(19절). 그런데 볼트만(R. Bultmann)은 베드로의 순교에 관한 예수님의 이 예언 기사(18,19절)가 목양 사명을 부여한 기사(15-17절)와 상충되므로 후대의 삽입이라고 주장한다. 브라운(R.Brown)도 본절이 후대의 삽입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하지만, 그는 베드로의 순교에 관한 이 기사가 이 문맥(Context)에는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즉 베드로의 죽음은 세 번 주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데 대한 신실한 실천의 증거가 될 것이며,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요 15:13) 주님의 교훈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본 기사가 후대의 삽입이라는 그 어떠한 증거도 찾아볼 수 없으므로 그 같은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다만 요한이 베드로의 죽음에 관한 예언을 베드로가 사명 받은 바로 뒤에 기록한 의도에 관해서는 브라운의 견해를 따를 수 있다(G.Beasley-hurray). 한편 '젊어서는‥‥다녔거니와'란 과거형 표현으로 보아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이 말씀을 하실 때는 그가 청년의 때가 지나 이미 중년의 나이였음을 알 수 있다(Hendrikion). 다음으로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띠를 띠기를 잘(자주)했다'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마음껏 활동하였다'라는 비유적 표현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지만 베드로가 말년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원하든 원치 않든 결박당할 것이니 순교로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될 것이 예언되어 있다. 한편 여기서 '팔을 벌리리니'에 대해서는 초기의 교부들 이래로 그의 십자가 형벌을 의미한다는 견해가 많이 주장되었다. 외경 베드로 행전(Acts of Peter)에서 보면, 로마의 폭군 네로 황제의 박해 시 베드로가 순교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처음에 박해를 피해 로마를 빠져 나가던 베드로는 피신 도중에 예수를 만났는데 예수께서 "네가 십자가를 회피하니 내가 다시 로마에 가서 십자가에 달리고자 한다"는 말씀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즉시 회개하고 다시 로마로 돌아가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는 것이다(주님이 똑바로 달리신 십자가에 자신은 똑바로 달리기도 외람되어 거꾸로 달리기를 자청한다는 말과 함께). 이러한 전통적 견해는 오리겐(Origen), 터툴리안(Tertullian), 이레니우스(Irenaeus), 키프리안(Cyprian), 순교자 저스틴(Justin the Martyr), 유세비우스(Eusebius) 등의 교부들도 확인하고 있다(Bernard, Hendriksen). 그런데 이에 대해 혹자는 '팔을 벌리다'가 십자가 처형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며, 또한 '띠를 띠우다'라는 동사(콘뉘나이) 역시 형틀에 묶이는 것을 의미하기는 힘들므로 본절을 베드로의 십자가 형벌을 예언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고 한다(R. Bultmann). 그러면서 그는 본절을 후대 교회의 삽입이라고 보고 본절이 '어려서는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지만 어른이 되면 불가능해진다'는 격언에 근거하여,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일할 수 있을 때 열심히 목양 사역에 전념하라는 의미로 본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본절 이하에서 계속 '죽음'과 관련된 기사가 언급되는 것과 상치되는 것으로 보아(19-23절) 신빙성이 없다.
21: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가리키심 이러라'는 구절은 본서에서 예수의 죽음을 묘사하는 데에도 자주 사용된 요한의 관용구이다(요 12:33; 18:32) 여기서는 베드로의 죽음이 꼭 십자가 형벌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가 목양 사명을 수행하다가 타의에 의해 강제적인 죽음을 당하는 순교를 말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초대 교회 교인들은 이처럼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 당하는 것을 지상 최대의 영광으로 생각했다. 더욱이 요한이 본서를 쓸 때에는 이미 베드로의 죽음이 전 교회에 알려졌을 것이므로 본절을 읽던 초대 교회 교인들은 다시 한 번 베드로의 죽음을 상기하며 자신도 순교할 상황에 처했을 때 담대히 순교할 각오를 다짐하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마 10:28).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 20절에 베드로가 주님을 따르는 모습으로 보아 예수의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그 자리에서 따라 오라는 것임을 알 수 있으나(Bemard) 또한 상징적이고 예언적인 암시를 담고 있는 말씀이기도 하다(Meyer), 즉 본절은 궁극적으로 늙어서 순교하기까지 주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그의 뜻을 따르고(Reynolds) 나아가서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라는 말씀인 것이다(Luther). 이 말씀으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부여하셨던 소명(召命)을(15-17절)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강조하셨다. 그런데 이 '나를 따르라'는 명령은 그 순간 베드로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고 당시의 모든 제자들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모든 신자들에게도 주어진 말씀이다(고전 11:1; 엡 5:1). 한편 이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주간에 베드로에게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요 13:36)고 하신 것을 이해하게 한다. 그때 베드로는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 13:37)라고 했었는데. 그 목숨은 장차 맞이할 순교의 순간에 주를 위해 내던져야 했다.
21:20,21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 여기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는 본서의 저자인 요한을 가리킨다. 요 20:2 주석 참조. 그리고 그가 '만찬석에서‥‥묻던 자'라는 것은 요 13:23의 정경을 염두에 둔 묘사이다. 그런데 자신의 죽음에 된한 예언을 듣고 있던 베드로가 갑자기 요한의 장래에 대해서 예수께 질문하는 것은 지금까지 본서나 공관복음에서 묘사되어 온 고의 충동적인 성격과 일치한다. 그러나 요한이 자기의 운명에 관한 베드로의 질문에 대해 기록한 것은 초대 교회 당시 자신의 장수(長壽)에 관한 분분한 소문의 진정한 출처를 밝히려는 특별한 목적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본절과 같은 질문은 '나를 따르라'(19절)고 말씀하신 후 예수께서 그 자리에서 떠나려 하시자 베드로가 즉시 따랐고, 나머지 여섯 제자들도 예수와 베드로를 좇아 일어서서 따랐을 때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앞서 가던 베드로가 돌이켜서 볼 때 따르는 제자들 중 요한이 가장 앞섰거나 눈에 가장 먼저 들어 왔으므로 그를 지목해서 그의 장래에 대해 예수께 물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요한은 베드로와 본래부터 절친한 친구로서 거의 늘 함께 있었던 제자였으므로(요 20:1-9) 자신의 순교를 예고 받은 베드로(18절)가 그의 미래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Hendriksen).
21: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 아마도 베드로는 자신이 순교를 당한다면 요한도 같은 최후를 맞이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궁금증을 속 시원히 풀어주는 대신 그 같은 호기심을 버리고 오직 부여된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며 자신을 따를 것을 요구하신다. 책망에 가까운 예수의 이 대답은 결코 요한이 세상 끝까지 살아서 예수의 오심을 목격하리라는 뜻이 아니었다. 다만 설령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요한을 생존하게 하시더라도(이미 그렇지 않은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었지만) 베드로가 명심해야 할 것은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여기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처음에 말씀하셨던 '나를 따르라'(19절)와 같은 의미인데, 본절은 강조적인 명령문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즉 여기서는 '쉬'(너)를 문두에 첨가해 베드로가 행해야 할 사명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해서 인식시키고 있는 것이다.
21: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 베드로의 시기적절치 못한 질문으로 인해 생겨난 오해는 초대 교회에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더구나 요한이 에베소에서 100세 가까이나 장수하고 있었으므로 초대 교회 당시에 이 와전된 소문은 더욱 널리 퍼져 나갔을 것이다. 사실이 아니었지만 그 같은 오해된 전승은 심지어 300년 후인 어거스틴의 시대에도 요한이 에베소에 있는 무덤 속에 잠들어 있지만, 그의 가슴 위에 뿌려진 흙이 가볍게 움직이고 있다는(즉 그때까지 살아 있다는) 헛된 전설을 남길 만큼 심각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M.Reynolds, Lenski). 이는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사실을 웅변해 준다(마 28:11-15). 한편 '형제들'이란 말은 초대 교회 교인들이 서로를 어떻게 인식하였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사실 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을(말 2:10) 모신 자녀들이라는 공감대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요(마 22:50), 친구(요 15:14)로서 그 분을 힘입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롬 8:15) 은혜를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부를 때 '형제', 즉 '아델포스'( ) 보다 더 좋은 칭호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독교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면서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며 주를 섬겼다(행 1:16; 2:29; 6:3; 7:2; 9:17,37 등).
21:24-25 맺음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이심과 누구든 저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본서는 이제 본문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본문은 내용상 요 20:30,31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는 부분으로, 저자 요한이 자신의 본서 기록 목적과 그 내용의 신빙성에 대하여 부가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이다. 즉. 요한은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에 관해 기록한 자신의 복음서를 마감함에 있어서, 자신이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한 몸에 받았으며 그리고 누구보다도 주님을 가까이에서 섬겼다는 사실을 강조한다(24a절).
결국 이러한 사실은 본서가 상상이나 구전(口傳)에 근거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라 생생한 체험과 목격에 따라 기록되었음을 강조해 준다. 그렇기 때문에 본서의 기록자인 사도 요한은 자신의 증거가 '참되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24b절). 실상, 만약 본서에 기록된 내용들 가운데 억지로 꾸며낸 부분이 있다거나 터무니없이 과장된 부분이 있다면. 당시에 여전히 생존해 있던 다른 많은 예수의 증인들에 의해 반박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본서의 진실성과 신빙성에 관한 증인들의 보증(保證)을 제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본서가 결코 조작 ․ 과장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예수님의 수많은 행적 중에서 지극히 일부분만 선별적(選別約)으로 기록한 것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25절).
아무튼 이상과 같이 본문도 증거하듯 모든 성경은 우리 성도들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신앙으로 이끌고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구원의 축복을 누리도록 만드는 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완전무결하고 정확 무오한 영적 안내서요 또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다(딤후 3:15, 16).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날마다 밥을 먹듯 우리의 영혼을 강건케 하기 위하여 날마다 영의 양식인 성경 말씀을 부지런히 섭취하여야 할 것이다(시 119:103,105).
21:24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에 대하여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 여기서 '이 일'이란 본장의 기록으로 볼 수도 있지만, 본서 전체로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Bernard). 즉 본절은 본서의 요한 저작권을 최종적으로 확인시키는 것이다. 비록 본서에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으나 '예수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던 자'로 묘사된(요 13:23; 19:26; 20:2,21; 21:7,20,24) 자는 사도 요한 자신이라는 사실은 이미 여러 차례 살펴본 바이다.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 '우리'가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다. ① '우리가 안다'에 해당하는 '오이다멘'은 본래 '오이다멘'으로서 본 구절을 정확히 번역하면 '정말로 나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안다'가 된다는 견해이다(Chrysostom, Theophylact). 이는 글자 사이나 단어 사이를 떼지 않고 모두 붙여 썼던 대문자 사본의 시대를 생각하면 가능한 견해이다. 그러나 요한이 지금까지 자신을 제 삼자로 묘사하던 것에서 갑자기 '나'로 밝혀야만 했을 이유가 분명치 않으므로 신빙성이 없다(Reynolds). ② 요한과 함께 본서를 기록했거나 아니면 본서를 대필했던 자들을 염두에 둔 말이라는 견해이다(Meyer). ③ 요한의 후계자들인 에베소 감독들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Paulus, Godet). ④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실을 말할 때 흔히 사용하는 관용적인 복수 1인칭이라는 견해이다(Dodd). 이러한 제 견해에 대해 어떤 것이 옳다고 한 마디로 단정 짓기는 어렵다. 다만 이 부분이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부분임에도 사본 전승 과정에서 필사자들의 첨삭이나 고쳐 쓰는 일이 없었다는 것을 볼 때, 이는 요한의 동역자들이나 아니면 당시의 모든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던 것 같다.
21:25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고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한 줄 아노라. - 혹자는 본절을 '유쾌한 과장법'(delightful hyperbole. Morris) 혹은 '수사적 과장'(Hendriksen)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아무튼 요한은 이러한 본절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 몇 가지를 분명하게 밝히며 본서의 말미를 장식하고 있다. ① 비록 이 복음서로써 예수의 행적을 기록하나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완전히 기록할 수는 없었다. ② 수많은 기사들 중에서 본서가 취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선택한 자료들이다(요 20:30,31). ③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에 관한 진리를 다 기록할 수 없었으나 기록되어 있는 말씀에 만족하고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 '그의 계신 그대로' 뵐 수 있을 주님을(요일 3:2) 간절히 기대해야 한다(A.T. Robertson).
연구자료
도마-진솔한 신앙적 회의론자
1. 인적 사항
① 도마는 '쌍둥이'라는 뜻.
②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
③ 갈릴리 출신으로 '디두모'라고도 불림(요 11:16).
2. 시대적 배경
A.D. 27년경 예수의 제자로 부름 받은 뒤 예수의 공생애 기간 동안 늘 그분의 곁에 있다가 예수 부활 승천과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초대교회 확장기인 A.D. 1세기 중반 이후까지 활동한 인물, 교회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에 의하면 도마는 초대교회 확장기에 파르디아(Parthia)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외경서의 하나인 도마 행전에는 그가 인도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3. 주요 생애
예수 부활 이전 | ||
출 생 | ||
갈릴리에서 성장 | ||
사도로 세움 받음 | A.D. 28년 | 마 10:3 |
주와 함께 죽기를 각오함 | A.D. 29년 | 요 11:16 |
최후의 만찬 시 주의 가르침을 바로 깨닫지 못함 | A.D. 30년 | 요 14:1-5 |
예수 체포 시 도망함 | 마 26:56 | |
예수 부활 이후 | ||
예수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증언을 의심함 | A.D. 30년 | 요 20:25 |
예수 부활체를 직접 확인함 | 요 20:26-28 | |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신 예수를 또 만남 | 요 21:1-14 | |
예수의 승천 목격 | 행 1:9-11 | |
선교하다 순교함 |
4. 성품
① 유대로 돌아가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할 정도로 의리 있고 열정적인 자(요 11:16).
② 자신의 의문이나 의심을 솔직히 드러낸 것으로 보아 정직하고 진솔한 자(요 14:1-5; 20:25).
③ 부활의 주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만져 보아야만 믿을 수 있겠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지나치게 존중하는 자(요 20:25).
④ 예수님 말씀의 진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엉뚱한 질문을 한 것으로 보아 영적 진리
이해에 다소 어두운 자(요 14:1-5).
⑤ 의문이 나는 것은 언제든지 드러내 놓고 질문한 것으로 보아 진리에 대한 탐구욕이 강한
자(요 14:1-5).
5. 구속사적 지위
① 예수님의 부활체를 직접 확인함으로써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자(요 20:25-28).
② 신약에서 유일하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와 하나님으로서 고백한 자(요 20:28).
③ 초대 교회의 설립자들인 12사도들 중의 하나.
6. 주요 업적
① 죽음도 불사하고 주님을 따르고자 함(요 11:16).
② 많은 의심과 회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도직을 잘 수행함(요 14:1-5; 20:25),
7. 주요 실수
① 예수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중거를 믿지 못하고 의심함(요 20:25),
8. 평가 및 교훈
①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선언한 도마의 결단은 오늘날 극도의 이기심과 개인주의에 빠져 자신을 희생할 줄 모르는 많은 성도들에게 큰 도전을 준다(요 11:16).
② 도마는 한 마디로 믿음과 의심으로 복합된 자였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도마를 책망하기 보다는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고 말씀하셨다. 이같이 오늘날 우리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히 3:12)이 아니라 믿음이 연약한고로 진정 믿기 위해 의심하게 되는 여러 가지 솔직한 의심을 우리 주님께서는 책망치 않으시고 강한 확신의 길로 인도하신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있어 지금 믿지 못하고 주저하는 것이 무엇인가? 주님께 아뢰어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도마처럼 확고히 믿는 자가 되라!
③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보고서야 예수님의 부활을 믿은 도마를 향해 예수님은 보고 믿는 믿음도 좋으나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더 복되다고 말씀하셨다(요 20:29). 오늘날 성도들 중에도 도마와 같이 '내가 예수님을 한 번 보고, 혹 이적을 한 번 체험해 보면 더 잘 믿을 수 있을텐데'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다. 그러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임을 기억하여(히 11:1), 우리 성도들은 보지 못하는 중에도 믿음으로 복된 믿음을 소유하는 자들이 되자.
9. 핵심 성구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요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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