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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장 최종 경고와 권면 및 끝맺는 인사
구속사적 개관
고린도후서를 마감하는 본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 1-10절은 고린도후서 본론의 후반부의 결론부이자 동시에 고린도후서 본론 전체의 결론부이기도 한 12:14-13:10의 일련 기사의 종결 부분이다. 이처럼 이제 교우 중 일부가 이단 사설의 침투, 성범죄 등 각종 오류에 휩싸인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설립자요 사도로서 책망과 훈계를 하는 바울의 사도권 자체를 심지어 의심하는 상황에 직면하여, 주로 바울 자신의 사도권의 변호와 확립을 시도한 본 고린도후서를 최종 마감하는 위치에 있는 본단락은 다음 두 내용을 담고 있다. 먼저 끝내 자신들의 과오를 뉘우치지 않거나 바울 자신을 향하여 무모한 도전을 일삼는 일부의 무리들을 권징할 것에 대한 바울의 강력한 경고를 보여 준다(1-4절). 나아가 이제는 고린도 교우 전체를 향하여 각자가 스스로를 살펴서 먼저는 바울 자신에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바울 자신을 파송한 그리스도 예수에게 대한 범죄 행위를 종결할 것에 대한 바울의 권면을 보도한다(5-10).
이처럼 준엄한 경고와 애끓는 권면을 동시에 보도하고 있는 본단락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개관할 때에 우리는 상호 한치의 기울어짐도 없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으면서 서로 함께 구속사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두 원리 곧 공의(Justice)와 사랑(Love)의 원리를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
이 구속사의 두 원리는 원초적으로 구속사의 유일한 주체이신 하나님의 품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미 선악과 언약을 어기고 죄인이 된 인간을 즉각 처단하시거나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시고, 인간 대신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가 그 죄값을 대신 치르고 죽음으로써 인간의 죄값은 분명히 치뤄지는 한편 죄인인 인간 자체는 오직 믿음과 회개를 조건으로 구원받을 새 기회를 갖거나 아니면 끝까지 죄를 고집할 경우 이로 세상 끝날 심판받게 하실 구속의 법 자체를 세우심으로써, 죄에 대한 공의의 형벌 원칙도 충족시키시고 나아가 죄인이 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실현되게 하여 공의와 사랑의 원리를 심오하게 진화시키신 것이다. 그리고 그후 세상 끝날까지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 곧 선지자나 사도나 교회의 일꾼들을 통하여 이러한 당신의 구원의 뜻과 사랑을 실로 자식을 위하는 아비의 사랑보다 지극한 창조주의 사랑으로 전하시지만 끝내 회개하지 않는 자는 세상 끝날 분명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게 될 것이다. 실로 하나님과 그분이 주도하시는 구속사는 공의 없는 일방적인 사랑에 근거한 무질서한 것이거나 반대로 사랑없는 공의에만 근거한 냉혹한 것이 아니다. 본문에 나타난 바울의 경고와 권면도 바로 서로 합하여 함께 구속사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이 두 원리를 동시에 반영한 것이다.
한편 이제 예수의 초림 이후 세상 끝날의 재림으로 이어지는 구속사의 최종 단계에 있는 현재에 이르러 하나님은 때로는 당신의 사랑을 반영하는 구원에의 초청 곧 회개에의 권면의 말씀을, 때로는 당신의 공의를 반영하는 최후 심판에 대한 경고를 당신의 종들을 통하여 세상에 발하신다. 그러나 미래의 심판과 구원을 동시에 보여 주는 하나님의 계시의 내용은 공의의 경고와 사랑의 권면을 동시에 담고 있지만 분명 현 시대 자체는 하나님의 공의가 잠시 유보되고 사랑이 더욱 크게 발휘되어 계속 더 회개의 기회가 주어진 때이다. 그러자 현재 너무도 많은 인간들이 과거 본문에 나타난 일부의 고린도 교우들처럼 오직 세상 끝날까지만 일단 하나님의 사랑에 따라 최종 심판이 연기됨을 깨닫지 않고 자고하고 완악하며 심지어 하나님 자신과 그분이 세우신 구원의 복음과 이를 전하는 종들의 인격과 권위까지 무시하고 있다. 심지어는 복음의 내용을 안다하는 자들까지도 이를 왜곡하여 당장 자신의 이익에 맞게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들에게 실로 무궁히 인내하시며 오직 당신의 사랑으로 회개의 기회를 더욱더 허락하시고자 하는 일념으로 현재 공의에 의한 최종 심판을 유보하고 다만 권면과 경고를 함께 주시며 기다리시는 하나님은 때가 이르면 끝내 세상 끝날 당신의 공의를 필히 실현하실 것이다.
따라서 실로 하나님의 공의가 궁극적으로 실현되기 전에 그 공의의 심판이 무서워서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에 순복하여 역사와 우주의 창조자요 주권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바른 자세와 세상과 이웃과 교회에 대한 바른 자세를 가다듬어야 하겠다.
다음 후반부 11-13절은 이제 삼위 일체 하나님(Trinity God) 안에서 서로 기쁨과 사랑과 평강의 교제를 강조하는 인사와 사도권에 기인한 축도로 편지를 마감하는 단락이다. 이러한 본문은 실로성도란 비록 현재는 이 세상에 잠시 더 살고 있으나 이미 영원한 천국 구원을 얻은 자로서 절대적 축복을 획득한 자인 바 이 세상의 그 어떤 상대적 상황에도 구애됨 없이 먼저는 삼위 하나님과 그리고 나아가서는 이웃 성도와 기쁨과 사랑과 평강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구속사적 특권(救贖史的 特權)을 가진 자라는 벅찬 사실을 새삼 확인케 된다. 또한 그러한 기틀과 사랑과 평강의 교제를 신의와 성실로 유지해야만 할 의무가 있다는 구속사적 책임(救贖史的 責任)도 새로이 각성케 된다.
외울 말씀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바울의 최종 경고와 권면
1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갈 터이니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2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3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저가 너희를 향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스스로에 대한 확장 촉구
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6 우리가 버리운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7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리운 자 같을지라도 너희로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8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9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의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의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10 이를 인하여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파하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세를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마지막 문안 인사
11 ○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12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3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본문 & 자료노트
도표-13:1-13 본문에 나타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1. 믿음을 지키고 있는지 스스로 살피라(5절)
2. 그리스도가 자신 안에 계신 줄을 깨달으라(5절)
3. 악을 행하지 말라(7절)
4. 진리를 거스리지 말라(8절)
5. 서로 연합함으로써 온전하게 되라(9절)
6. 기뻐하며 평안하라(11절)
7. 거룩한 입 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11절)
원어연구-13:1, 확정하리라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스타데메타이'( )로 이것은 '히스테미'( )의 미래형이다. '히스테미'의 일차적인 의미는 '서게 만들다'(행 1:23), '두다'(마 25:33)이다.
여기서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들 앞에 세워 놓고 말하게 한다는 의미의 '진술하다'(state)와 사람들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나 견해를 확고하게 세워 놓는다는 의미의 '확신하다'(confun)라는 뜻이 파생되었다.
따라서 본문에서 '히스테미'의 미래형 '스타테세타이'는 다음 두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바울이 여러 증인들을 고린도 교인들 앞에 세워서 그들 중에 잘못된 점을 확인하게 할 것이라는 뜻을 가지며 둘째,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잘못된 점을 확인케 하고 그들이 그것을 스스로 시정함으로써 마음 속에 복음의 진리에 대해 확신케 하겠다는 뜻을 갖는다. 이는 바울이 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 범죄한 자들에 대한 권징의 의지를 표명한 말로서 실로 권징의 목적은 단순히 잘못을 지적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바로 깨닫게 하고 진리에 대해 확신을 갖게 하는 것임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신학용어-13:8 성경의 진리 개념
요 16장 자료노트 참조
주요주제-13:10 바울의 사도권 변호 이해
고후 11장 자료노트 참조
도표-13:13, 축도의 3요소
1.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1)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죄인이 값 없이 의롭게 된 은혜(롬 3:24)
2) 성도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심
2. 성부 하나님의 사랑
1) 택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까지 보내신 완전한 사랑(요 3:16)
2) 성도에게 천국 구원을 베푸심
3. 성령의 교통하심
1) 하나님과 성도, 성도와 성도간의 교제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성령의 활동(요일 1:3)
2) 성도를 성화(聖化)로 인도하심
주요주제-13:5-7 성도의 구원에 있어서의 행함과 믿음
약 2장 자료노트 참조
13:1-10 바울의 마지막 경고와 권면
앞장의 마지막 부분(12:19-21)에서 바울은 지금까지의 자신의 변증의 목적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회개케 하고 모든 불의와 죄악에서 떠나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교회의 덕을 세우고자 하는 데 있음을 밝혔다. 그러면서 바울은 만약 두번째 방문 때와 같은 죄악의 상태를 목격하게 되면, 부득불 그들을 권징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사실을 암시했었다. 그런데 이제 본문에서 바울은 훨씬 단호하게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최종적으로 경고함과 아울러 권면하고 있다.
먼저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자신의 지금까지의 경고와 권면에도 불구하고 죄악과 불의를 회개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면 그의 제 3차 방문 때는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강력하게 경고한다(1-4절). 물론 이러한 바울의 경고는 그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징계하기 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들을 회개시켜 바른 신앙의 길로 인도하기 원했기 때문에 주어졌다(고후 12:19). 참으로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터무니 없는 비난과 모함으로 그를 대적했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지만, 바울은 끝까지 믿음의 아버지로서 그들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고전 4:14,15; 고후 12:14,15).
한편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징계의 대상이 되기를 원치 않았던 바울은 그들을 향해 '너회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회 자신을 확중하라'(5절)고 촉구한다. 바로 이와 같은 바울의 촉구는 거짓 사도들의 가르침에 미혹되어 복음의 진리로부터 떠난 삶을 살고 있던 일부 고린도 성도들로 하여금 과연 자신들이 바른 신앙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지 성찰하게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삶을 영위하도록 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바울은 본문을 마치며 교인들에게 온전히 진리 위에 굳게 서서 선(善)을 행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6-10절).
진정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비난하는 일에 열심을 내기 보다, 먼저 자기 자신들의 믿음이 온전한 상태에 있는지 살펴보아야만 했다. 만약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고 온전한 신앙 가운데 있었다면, 결코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한다거나 공연한 비난과 모함을 일삼지는 않았을 것이다.
참으로 우리 성도들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에 앞서서, 과연 자신의 믿음과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상태에 있는지를 우선적으로 성찰해 보아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과 동일한 기준에 의해 바로 자신이 비판받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다(마 7:1-5).
13:1 두 세중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 율법에 의하면 범죄자의 죄는 두 세 중인을 세워서 확증하도록 규정하고 있다(신 19:15).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사람을 징벌할 때는 두 세 중인을 세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8:16). 바울도 이러한 규례를 존중하여 그냥 막연히 일을 처리하지 않고 두 세 증인의 입을 통해서 범죄자의 죄를 확정하겠다는 것이 본절의 요지이다(Alford, Plummer). 그러나 바울이 이미 처벌의 대상자들을 선정해 놓고 그들을 처벌하겠다고 협박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그런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오히려 고린도의 성도들이 스스로 자각하고 각성함으로써 회개함과 아울러 바울과 그들간의 상호 신뢰성의 회복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계속 악행을 중지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바울로서는 '징계'라는 수단을 사용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13:2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아니하리라. - 바울은 제 3차 전도 여행 당시 에베소에 체류하면서 소위 '가슴 아픈 방문'이라 불리는 2차 고린도 방문을 했었다. 이때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죄악을 경고했을 뿐 어떤 강압적인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범죄자들은 바울의 경고를 공연한 위협이라고 생각하고 반성하기는 커녕 더욱 죄의 심연에 빠져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 세 번째 고린도에 갈 때에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범죄자들을 처벌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전장의 20절에서 암시적으로 언급됐던 처벌 문제가 확고부동한 사실로써 이제 공식적으로 표명되기에 이른 것이다. 한편 바울이 공표한 '처벌'이 어떠한 형태로 실시될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신약 성경에 기록된 교회 권징의 사례들을 참고한다면(고전 5:5; 딤전 1:20) 범죄자들을 출교시키는 중징계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13:3 그리스도께서‥‥구함이니. - 교회의 질서를 회복하고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잘못을 뉘우치는 자에 대한 용서와 위로가 필요한 동시에 회개치 않는 자들을 처벌하고 출교시키는 엄격한 결단 또한 요구된다. 이런 사상이 바울의 지론이었는 바, 본절에서는 바울이 왜 그렇게 단호한 결단을 내리게 되었는가에 대한 까닭을 설명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에게 사도됨의 확실한 증거를 보여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사도 바울은 거짓 사도들처럼 가장된 행세를 하지 않았다. 거짓 사도들은 권위를 내세워 순진한 성도들 위에 군림하여 성도들의 영혼과 재물을 침식하였는데 고린도 성도들은 어리석게도 그러한 작태를 오히려 사도됨의 증거로 수용하면서 진정한 사도인 바울을 일컬어 표리부동하고 비열하다고까지 비난하기도 하였다(고후 10:10). 이러한 정황 속에서 이제 바울은 진정으로 사도됨의 증거가 무엇인지 그들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범죄자들을 과감하게 처벌하는 그 처벌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사도됨이 명확하게 인식되리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저가‥‥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 시종일관 유약한 어조로 권면하던 바울의 음색이 고조되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기가 결코 약하지 않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바 사도로서 바울의 강인한 면을 나타내 주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이 약하다고 경멸하였다(고후 10:1; 11:30; 12:5,9). 이러한 비난이 얼마나 사실에 가까운지 의심스럽지만 인간적인 바울의 모습이 약할지는 몰라도 그의 사도적 능력이 약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여튼 바울의 사도권에 도전하는 것은 곧 바울을 택하여 사도로 삼은 그리스도께 도전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의 인간적인 약함을 통해서 능력을 나타내시고(롬 15:19; 고전 2:4) 구원 사역을 드러내게 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도된 바울에게 도전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징벌을 면키 어렵다. 이와 같은 사례는 구약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모세에게 반역하다가 몰살당한 고라와 그 자손들이 좋은 예가 된다(민 16:31-35).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에게 도전하는 것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과 동일하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했던 요지인 것이다.
13:4 그리스도께서‥‥능력으로 살으셨으니. - 약한 것이 오히려 강하다는 역설의 논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확연히 밝혀진다. 하나님이시지만 스스로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으심으로 약한 인성을 지니시고(히 5:2). 다른 인간들의 악한 흥계로 인해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러나 그 분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부활하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좌정해 계시는 것이다(빌 2:8,9). 그리스도께서는 분명이 우리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는데 바울은 이를 그리스도의 '약함'이라고 표현하였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약함이란 그리스도의 정신적, 육체적 무기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권능이 자신을 통해서 나타나도륵 하는 그런 태도를 의미한다 할 수 있겠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약함은 곧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사망에서 살아나 다시 사망을 주관하는 권세를 가지게 된 것이다(롬 6:9). 이러한 바울의 진술은 결국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인간이 살 수 있다는 진리를 밝히는 것인 바, 다음 구절에서는 이러한 진리에 입각해서 살겠다는 바울 자신의 의지가 기술된다.
우리도 저의 안에서‥‥살리라. - 그리스도 안에 살고 있는 바울은 그리스도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를 원한다. 바울은 한 인간으로서는 약할런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더 풍성하게 행사될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본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행사되는 대상을 '너희', 즉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제한시키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물론 바울의 능력이 고린도 성도들에게만 발휘되리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특별히 이 대목에서는 바울의 사도권에 도전하는 일부의 무리들을 향한 엄중한 경고의 뜻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13장에 접어들면서 강경해지기 시작한 바울의 논조가 본절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13:5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 헬라어 원문을 보면 본절에는 '너희 자신을'(헤 아우투스)이라는 재귀 대명사가 세 번이나 나타나 그 뜻을 강조하고 있다.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의 외형적 모습들, 즉 언변술, 외적 권위 등에 불만을 품은 나머지 그의 사도권을 줄곧 시험해 왔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시험해야 할 상대를 잘못 선택했으며 오직 그들 자신을 판단하고 그들 자신을 시험하는 것만이 그들에게 요구된다고 지적한다. 고린도 성도들의 모든 현안 문제들은 믿음의 결여에서 초래된 것이었기에 바울은 그들을 향해서 그들이 정말 믿음에 있는가, 즉 그리스도 안에 속해 있는가를 확인해 보라고 권고하는 것이다. 한편 이렇게 권고하는 바울의 내면에는 적어도 고린도의 성도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그들에게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우시리라는 신뢰감과 확신이 담겨져 있다.
확증하라. - 이 어구에 해당한 헬라어 '도키마제테'( )는 '증명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지만(고후 8:8) 본래는 제련소에서 순금을 정제하는 과정에 통용되어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수한 것을 얻는다는 의미였다. 거기서 이 단어는 순수한 것을 확정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본절에서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자기 자신을 시험하여 믿음에
위배되는 행위들을 모두 제거 ․ 정제하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버리운 자녀라. - 바울은 자기가 전한 복음을 받아 들이고 교회를 구성하게 된 고린도 성도들을 버림받은 자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고린도의 교인들도 그들 스스로를 '유기된 자'라고 여기지는 않았음을 바울은 알고 있었다. '버리운'(아도키모스)이란 말은 '테스트에 합격하지 못한', '부적격한' 등의 의미를 가지는데(롬 1:28; 딤후 3:8) 앞에서 검토한 '확증하다'라는 용어와 비교하면 이해가 용이하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은 곧 믿음을 가리키는 것인 바(Wendland) 바울은 본절에서 고린도의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13:6 우리가 버리운 자‥‥내가 바라고. -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의 권고대로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확증한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이 당연히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리라는 신뢰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바울의 확신 이면에는 만일 고린도 성도들이 자기들의 존재의 정체, 즉 자기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바울의 사도직을 계속 의심한다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초래되리라는 깊은 우려가 내재되어 있다.
13:7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치 않게. -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도덕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다시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는데 지대한 관심을 경주하였는데 이것은 그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목회적 관심의 발로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사실 본장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악행을 단호히 처벌하려고 결심하고 있었다는 인상을 주는데(2절) 그것은 그의 본심이 아니었을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목회자로서 그들이 회개하고 악행을 멀리하기를 간절히 바 했으며 또 이를 위해서 지금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옳은 자‥‥선을 행하게. - 사도로서 성도들을 염려하는 바울의 헌신적인 태도가 극명하게 표출되어 있는 어구이다. 바울이 편지를 쓰는 목적은 자기의 명예를 회복하고 사도됨을 능력으로 입증하는 데 있지 않고 오직 고린도 성도들이 믿음을 회복하고 그리스도 가운데 온전히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그의 진솔한 고백이 드러나고 있다. 바울의 간구는 바리새인의 경우에서처럼 자기의 의로움만을 과시하는 자만(눅 18:9-12)과는 거리가 멀다. 그와 정반대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악행을 중지하고 의로운 행위에 그들의 초점을 맞출 수만 있다면 자기는 사도직을 박탈당하고 배척당해도 참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정말 고린도 교인들이 건전한 신앙 생활을 영위하기를 바랬던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본심이요 진의(眞意)였다.
13:9 우리는 진리를‥‥위할 뿐이니. - 바울은 자기의 행동과 처신이 사리 사욕에 있지 않고 진리에 근거하고 있음을 밝힌다. '진리'(알레데이아)는 헬라어 어원학적으로 '사실'의 뜻을 가지는데 신약에 그 용어가 인용되면서 하나님과 결부되어 하나님의 뜻을 추종하는 것을 지칭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상이 점차 인격화되어 '그리스도'를 가리키게 됨(요 14:6)과 아울러 일반적인 '복음의 진리'(갈 2:14)를 의미하게 되었다. 따라서 진리를 거스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의 진리를 거역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바울은 교회의 건덕을 위해서는 자기가 배척당하는 것도 감수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는데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었다(고후 12:19).
13:9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의 강한 것을 기뻐하고. - '우리'와 '너희', '약한 것'과 '강한 것'이 서로 대조를 이룬 문장으로써 고린도 교회를 대하는 바울의 지극한 사랑이 함축된 구절이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여 사도권을 발동해 그들을 처벌한다면 바울은 강한 자가 되고 그들은 약한 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의 원하는 바가 아니다.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이 온전히 회개하고 악에서 떠남으로 진리 안에서 강하게 되기를 바랬다. 그런데 그것은 오로지 바울 자신의 약함, 즉 헌신적인 희생과 봉사, 그리고 섬김을 통해서만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여전히 약한 자로 남기를 기뻐한 것이다. 비록 자신은 한없이 약해진다 하더라도 고린도의 성도들이 신앙적으로 강해지기만을 바라는 사도의 헌신적 태도를 엿볼 수 있는 구절이다.
너희의 온전하게 되는 것. - 여기서 '온전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카타르티조'( )는 '수선하다'(막 1:19), '잘못된 형제를 선도하다'(갈 6:1), 막연하게 '특정한 것을 준비하다'(롬 9:22) 등의 뜻으로 사용된 동사인데, 여기서는 '수선하다'의 의미로 기계의 각 부분이 차질없이 정상적으로 가동되는 상태를 지칭하고 있다. 고린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로서(고전 12:26) 각 부분이 일치되고 통일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 각처에서 불혈화음이 그치지를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의 평화와 일치를 촉구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13:10 떠나 있을 때‥‥파하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 바울이 본서를 기록하는 목적의 일부분이 밝혀지고 있다.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이 떠나 있을 때는 강하게 말하고 얼굴을 대면하면 유약해진다고 불만을 토로한 바가 있었는데(고후 10:1) 그럼에도 바울은 강렬한 어조의 서한을 그들에게 다시 보낸다. 이는 고린도 성도들의 시급한 회개를 촉구하는 바울의 염려와 사랑의 표식이었다. 바울이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사도권은 파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우려는 데 그 제일되는 목적이 있었으므로(고전 14:3; 고후 12:9) 그가 사도권을 행사하든 용서하든 이같은 '건덕'을 제일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용서하는 일이 값진 것이지 아무래도 처벌하는 것은 쌍방에게 모두 상처를 입히는 아픈 일이 된다. 바울은 불가피한 경우에는 어쩔 수 없지만(고후 12:20,21) 사도권 행사를 원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 서로 대면했을 때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미리 강렬한 어조의 편지를 보내어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다.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2절 후반부의 '용서하지 아니하리라'와 비교가 되는 구절이다. 2절의 경고는 지금까지의 권면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경우에 취해지는 조치이다. 즉 만일 바울의 강렬한 편지를 읽고서도 행동에 아무런 개선점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엄하게 상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2절과 본절은 대립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의미에서 파악된다. 한편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바울의 세 번째 고린도 방문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을 것이냐에 대한 흥미로운 보고가 흑자에 의해서 제시되었다(Harris). ① 바울이 3차 고린도 방문시에 기록했던 것으로 알려진 로마서(A.D. 57년경)에는 미래에 대한 기록만이 보일 뿐 자신이 현재 당하고 있는(만일 고린도 교회가 계속 무질서했다면) 어려움들이 전혀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② 만일 3차 방문시 고린도 교회의 무질서가 시정되지 않았다면 바울이 서유럽의 전도 여행을 계획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롬 15:24-28). ③ 만일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3차 방문을 못마땅하게 여겨 분란이 계속되었다면 오늘날 전해지는 고린도후서가 그대로 보존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리스는 바울의 3차 고린도 방문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실제로 바울이 3차 고린도 방문때 그곳에서 석달간 머물며 겨울을 지냈던 것을 고려한다면 바울의 3차 고린도 방문은 매우 성공적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행 20:3 주석 참조.
13:11-13 마지막 문안 인사
본문은 본서 전체의 최종 결어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공식적인 두 번째 서신을 마감하면서 바울은 준엄한 경고와 권면을 하고 있는 앞단락(1-10절)과는 전혀 다른 어조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격려하며 마게도냐 지방에 있는 성도들의 문안 인사를 전하고 그의 전형적인 축도로 본서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 몇 가지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형제들아'라고 부르고 있다(11절). 결국 이러한 호칭은 지금까지 언급된 바울의 책망과 경고와 호소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향해 지닌 바울의 애정에 근거한 것임을 의미한다. 둘째로, 바울은 교회의 일치와 성도의 교제를 소망하고 있다(11,12절). 즉 아직도 분열의 상처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마음을 같이 하며 거룩하게 입 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함으로써 교회의 일치와 조화를 촉구한 것이다. 셋째로, 바울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축도하고 있다(13절). 바로 이것은 바울의 복음 사역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의한 것임을 보여줌과 아울러,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직면해 있는 분쟁과 혼란도 오로지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해 극복될 수 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본문을 통하여 오늘 세상 속에서 화해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성도들은 바울과 같은 변함없는 사랑을 반드시 지녀야 함을 깨닫게 된다.
13:11 형제들아. - 10장 이 후로 준엄한 어조로 일관해 온 바울이 부드러운 애칭을 사용하며 편지를 맺으려 하는 부분이다. '형제'라는 말은 본서에서 3회 사용되었는데 첫 번째는 디모데에게(고후 1:1), 두 번째와 세 번째는 고린도의 독자들에게(고후 1:8) 사용되었다.
기뻐하라. - 본래 헬라어에서는 이 말이 만날 때와 해어질 때 나누는 인사말이었다고 하는데 본문에서는 이것이 인사말로 쓰였는지(Plummer), 문자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는지(Bernard) 분간하기가 어렵다. 이 단어를 인사말로 보는 견해는 문맥상 비장하게 경고하던 바운이 갑자기 기뻐하라고 말할 까닭이 없다는 사실을 그 이유로 들고 있다. 반면 이를 문자적으로 보는 견해는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기뻐하라'는 어구를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한(빌 3:1; 살전 5:16) 사실에 근거를 두고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을 향한 당부의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자녀로서 모두 기쁨의 삶을 영위하라는 의미로(갈 5:22) 사용했다고 본다. 어느 견해를 취해도 큰 문제는 없으나 문자적으로 취하는 것이 더 많은 지지를 받는다.
온전케 되며. - 이에 대해서는 9절 주석을 참조하라.
위로를 받으며. - 많은 문제와 유혹에 시달리던 고린도 성도들에게 바울이 이제 방문해서 심적으로 위로해 줄 것이다라는 뜻도 있겠고, 고린도의 성도들이 서로 돕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협동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마음을 같이 하며. -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 구성원들 간의 일치를 근간으로 한다 하겠는데(롬 12:16; 빌 2:2) 고린도 교회는 심각한 분열상을 노정시켰다. 이에 바울은 교회의 일치와 조화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평안할지어다. - 이 구절은 앞의 '마음을 같이 하며'와 깊게 관련된 구절이다. 왜냐하면 마음을 같이 하는 상태에서 평안이라는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Calvin). 그리스도의 자녀들은 서로 용서하고 위로함으로 다툼, 시기, 분쟁, 중상 모략 등의 죄악에서 떠나야 하는 것이다.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 - '평강의 하나님'은 바울이 자주 사용하는 어구인데(롬 15:33; 고전 14:33; 살후 3:16) 거기에 '사랑'이 첨가되어 나타난 것은 신약 성경에서는 본절밖에 없다. 이는 곧 고린도 교회의 현실이 평강뿐 아니라 사랑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정황임을 나타낸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서로 화목하는 곳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은 함께 하시는 것이다.
거룩하게 입 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 문안을 부탁하는 것은 서신의 일반적인 관례인데 바울은 자신의 편지가 여러 대중들 앞에서 낭독되리라는 것을 생각하고 자신이 그들과 나누어야 할 인사를 서로 그들끼리 나누라고 부탁한다. 입 맞춤으로 문안하는 인사법은 신약에 흔히 발견되는데(롬 16:16; 살전 5:26; 벧전 5:14) 원래 동방 세계에서 행해지던 인사관습이었고 유대교 의식이기도 했던 것이 교회에 그대로 수용된 것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성만찬을 거행하기 전에 이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는데, 이 거룩한 입맞춤은 이성 간에는 금지되었고 동성에 한해서 허락되었다가 부작용과 폐단이 많아 13세기 말에는 폐지되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그러한 전통을 찾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고전 16:20 주석 참조.
13:12 모든 성도가. - '모든 형제'(고전 16:20)로도 대치가 가능한 문구이다. 여기서는 바울이 본서를 집필하던 지역에 같이 있던 성도들, 즉 마게도냐 지역에 같이 있던 성도들을 지칭한다.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 바울의 축도 중 가장 완벽한 형태의 것으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목회자들의 축도에 인용되는 구절이다. 혹자는 이러한 축도 형식이 이미 초대 교회의 축도 형식으로 통용됐었다고 주장하나(Lietzmann) 바울에 의해 이러한 축도가 사용되면서 점차 교회의 축도로 전형 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한편 이 축도에는 삼위일체(Trnity) 하나님이 분명하게 나타나는데(Bengel, Farrar) 바울이 삼위일체 교리를 의식하고 븐절을 썼다고 평가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삼위일체라는 용어 자체가 바울 사후 수백 년 후에 터툴리안(Tertullian)에 의해 정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임의적으로 무의미한 단어들을 나열했다고 볼 수는 없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교회가 하나가 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를 간절히 소망하였기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갈구했으며, 모든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사랑(요 3:16)과 구원을 지속시 켜 주고 보호하시는 성령의 교통하심을 축원했던 것이다. 따라서 본절이 삼위일체 교리를 증명하기에는 충분한 증거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왜 제 2위인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나오는가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 본서보다 약 35년 후에 기록되었다고 여겨지는 클레멘트의 '고린도에 보내는 편지'에 보면 축도 부분이 '하나님이 사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가 사시고, 성령이 사신 것처럼'이라는 순서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Clement of Rome). 삼위의 순서에서 그리스도가 앞에 위치한 이유를 충분히 밝히기는 어려우나 사도 바울이 절실하게 그리스도의 은혜를 사모하였기 때문에, 그리고 정말 인간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일(요 14:6) 것으로 추정된다. 하여튼 바울은 교회로 하여금 하나되게 하고 인간을 하나님께 인도해 주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 광대하신 사랑(롬 5:8)과, 이러한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풍성하게 하고 보전시켜 주는 성령의 교통(交通)하심을 빌어 고린도 교회를 축복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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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빠르게 올려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귀한 말씀 옳게 분별하는데 유익하였습니다.^^
13:5 개정성경은 [.... 예수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치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이 말씀을 주석하기 어려워 다른 주석을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 다수는 교리로 믿지 아니하면 버림을 받는다라고 여기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치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라는
이 본문과는 다르게 그랜드도 억지 해석이 된듯하네요
예수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부터 요14:20 그날에는 ... 내가 너희안에 있는 것을 알리라.
요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 5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 사도바울은 로마서 6:1-11 8:1-13 갈2:20 빌1:21 등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해석 불가하거나 억지 해석이 나온것같습니다.저는 이진리를 사도들이 이해를 못했기에 바울을 불러 이진리를 전하게 한것으로 보고있습니다. 어느분이든지 이 부분 좋은 분별이 있으시다면 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위 그랜드 주석
예수 그리스도께서‥‥버리운 자니라. - 바울은 자기가 전한 복음을 받아 들이고 교회를 구성하게 된 고린도 성도들을 버림받은 자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고린도의 교인들도 그들 스스로를 '유기된 자'라고 여기지는 않았음을 바울은 알고 있었다. '버리운'(아도키모스)이란 말은 '테스트에 합격하지 못한', '부적격한' 등의 의미를 가지는데(롬 1:28; 딤후 3:8) 앞에서 검토한 '확증하다'라는 용어와 비교하면 이해가 용이하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은 곧 믿음을 가리키는 것인 바(Wendland) 바울은 본절에서 고린도의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헬라어 번역하여 구조분석과 문법도 분석을 해보았습니다.
고후13장 5절의 경우는 명령형과 현재 시제가 대부분이라서 일부 믿음에 대하여 확신을 현재 가지고 있는냐?
긍정문과 의문문장 이네요.
지금 시험해보라, 그리고 자신을 정검하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왜냐하면 그리고 그렇지 않으면 누구든지 버림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늦낌의 주해가 됩니다. 참고 하세요
직역입니다.
너희 자신을 시험하라
믿음의 확신 안에 있는지 아닌지 그리고 너희 자신을 입증 하라
너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있는지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누구든지 버림을 받게 될 것이다.
아멘
직역이 좋습니다.
버림받음을 이분법적 교리로만 보기에 버림은 지옥으로 봐야하는 불편함으로 바른 주석들을 쓰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여기의 바울의 버림의 표현이 지옥에 가는 두려움이기 보다는 보상과 징계의 의미로 불신자의 버림은 지옥이겠으나 믿는자가 버림을 받음은 예수님 재림과 함께 믿는 이들이 심판대에서 천년왕국에 들어감과 그리고 믿는 이들 중 못들어감이 [마태복음 8:10-12 22:10-13 24:29-51 25:1-30 버림[징계 벌 징치 매 등]으로 해석 되어야 할 부분으로 저는 이렇게 분별하게 됩니다. 이 부분이 옳게 분별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