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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장 성도의 부모와 자녀, 주인과 종에 대한 바른 관계와 성도의 영적 싸움 및 끝맺는 말
구속사적 개관:
본서의 마지막 장인 본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전반부 1-9절은 교회의 일치와 연합 및 구원받은 성도 개개인의 신앙생활과 관련된 실천적 교훈들을 주고 있는 본론 후반부 4:1-6:20 중 성도의 가정생활에 관한 교훈들을 제시하고 있는 5:22-6:9까지의 일련 기사의 종결 부분으로서 성도의 부모와 자녀의 바른 관계(14절) 및 주인과 종의 바른 관계(4-9절)에 대해 교훈하고 있다.
중반부 10-20절은 교회의 일치와 연합 및 구원받은 성도 개개인의 신앙생활과 관련된 실천적 교훈들을 주고 있는 본론 후반부 4:1-6:20까지의 일련 기사의 종결 부분이다. 여기서 바울은 모든 성도들이 현 세상에서 필히 겪게 되는 영적 싸움에 대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고 성령 충만을 얻도록 교훈하고 있다.
후반부 21-24절은 본서 전체의 종결 부분으로서 바울이 본서의 전달자인 두기고를 소개하는 내용(21,22절)과 본서 수신자에 대한 축도로써 본서를 끝맺고 있다.
먼저 전반부 1-9절을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대할 때 성도의 가정에 관한 전반적인 구속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제 5장 개관을 참조토록 하고 여기서는 다음의 두 가지 사실에 대해서만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성도의 가정에 있어서 부모는 자녀의 육적인 양육뿐만 아니라 영적인 양육의 책임까지도 맡은 자들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모된 자는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여 먼저 자녀들이 주님의 교훈을 좇아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며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도록 신앙적으로 양육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로 자녀는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가져야 할 인간과 인간간의 바른 수평적 관계에 있어서 최우선이 되어야 할 윤리적 의무로서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모에 대한 자녀의 공경은 성도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친 신앙과 윤리의 자세에 대한 계명들인 십계명 중 제 5계명에서도 제시하고 있는 바이다.
한편 본문에서 종과 상전은 사회적인 신분의 상하 관계이나 여기서 성도의 가정생활에 관한 일련의 교훈들과 함께 제시하고 있는 것은 종과 상전이 결국 한 가정에서 생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과 상전의 관계에 대한 구속사적인 의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본문에서 바울이 준 교훈은 당시 사회의 노예 제도를 옹호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바울은 다만 천국 시민권을 소유한 성도(聖徒)는 자신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갖는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에 얽매이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초월하여 자신이 어떠한 신분과 지위를 가지든지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실현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교훈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 구속 구원(救讀救援)을 얻은 성도의 일차적인 삶의 목적은 자신을 구속하신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함으로써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면 변할 수밖에 없고 또 죄성을 지닌 인간이 만든 것이기에 폐단을 지닐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의 어떤 체제(體制)나 그 체제 속에서 주어지는 신분(身分)에 얽매여 사는 것은 결코 성도로서 마땅한 삶의 자세가 아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마땅히 이 세상에서 더 좋은 사회적 지위와 신분의 차별 때문에 불평하며 또는 그것들 자체만을 개혁하기 위해 투쟁하며 살 것이 아니라 현재 주어진 자신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기쁘시고 선하신 뜻을 실현하기 위해(롬 12:1,2)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중반부 10-20절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 여기서 우리는 구속사의 최종 마감을 앞둔 현 세상에 대한 구속사적 인식을 새롭게 함과 동시에 이러한 시기에 살고 있는 우리 성도들에게 요청되는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지금 현 세상에는 먼저 그 자신이 하나님께 도전하여 타락하였고 인류의 시조(始祖)인 아담까지 유혹하여 범죄케한 사탄(Satan)이 권세를 부리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하나님께서 마침내 이 세상을 심판하사 하나님의 자녀와 사탄의 자녀를 구분하는 이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에선 타락한 이 세상의 오고 오는 세대에 걸쳐 모든 택한 하나님의 백성(God's People)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믿고 회개하여 다 구원 얻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사탄과 세상에 대한 심판을 유보(留保)하시고 장구한 구속사(救續史)가 현 세상에서 진행되게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침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모두 회개하여 구원을 얻고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사탄과 세상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세상 끝 날이 오기까지는 하나님의 구원 진리를 믿는 성도들을 향한 사탄의 공격이 끓이지 아니할 것인데 그 양상은 곧 핍박과 환난 뿐 아니라 각양 이단 사상으로 미혹하는 것 등이다. 그리고 이러한 양상은 말세가 가까워 오면 올수록 더욱 분명하고 자주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구속사(救贖史)의 전개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항상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고 성령에 충만해 있음으로 사탄의 술수에 넘어지지 말고 자신의 믿음을 지켜 온전히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여야 할 것이다(빌 2:12).
끝으로 후반부 21-24절에서 우리는 자신이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 있는 중에서도 자기 자신보다 다른 성도들을 먼저 생각하며 에베소 교인들에게 본서와 같은 서신을 기록한 바울을 통하여 진정 우리 개개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할 구속사적인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된다. 바울의 이러한 모습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진정 이 세상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천국의 푯대를 향하여 쉬임 없이 매진하는(빌 3:12-14) 참 성도상이 아닐 수 없다.
외울 말씀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엡 6:13)
그리스도인 부모와 자녀에 대한 교훈
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그리스도인 종과 상전에 대한 교훈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7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9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그리스도인의 영적 전쟁
10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끝맺는 말
21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게 하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2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저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23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본문 & 자료 노트
도표-6:10-17 하나님의 전신갑주
이 땅에서 성도는 하나님을 위해 사단과 영적일 싸움을 하고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이 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그의 말년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딤후 4:7)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다음에 성도가 이 영적 싸움을 위해서 무장해야할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대해 살펴보자.
1. 허리 -진리의 허리띠(14절) 주의 진리를 중심 삼아 요동치 않음
2. 가슴- 의의 흉배(14절) 사탄의 불의한 미혹으로부터 보호함
3. 발-복음의 신(15절) 복음을 전파하여 사탄의 세력을 쳐부숨
4. 손-믿음의 방패(16절) 주의 능력을 신뢰하고 대적들을 막아냄
5 손- 성령의 검 (17절) 말씀으로 악한 세력들을 공격함
6 머리 - 구원의 투구(17절) 구원의 확신으로 승리를 확신하며 싸움
보감-6:1-4 부모와 자녀 상호간의 의무
○ 자녀에 대한 부모의 의무
잘못된 것을 교정시킴 (신 21:18-21)
신앙의 본을 보임(왕하 15:3,34)
필요를 공급함(마 7:9-11; 고후 12'14)
축복함(눅 1:76-79)
노엽게 하지 않음(엡 6:4)
주의 도로 지도하고 가르침(엡 6:4)
권면하고 위로함(살전 2:11)
다스림(딤전 3:4,5,12)
사랑함(딛 2:4) 보호함(히 11:23)
○ 부모에 대한 자녀의 의무
사랑함(룻 1:17-18)
훈계를 들어 지킴 (잠 7:1-5)
기쁘게 해드림(잠 15:20)
순종함(엡 6:1)
공경함(엡 6:2)
봉양하며 보은함(딤전 5:4)
원어연구-6:24, 변함없이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은 '엔 아프다르시아'( )이다. 여기서 '아프다르시아'는 '불멸성'. '불변성'이라는 뜻의 명사 '아프다르시아'( )의 여격이다.
'아프다르시아'에 대해 좀 더 살펴보면 이는 부정(否定) 접두어 '아'( )와 '부패시키다' '멸망시키다', '타락케하다'라는 뜻의 동사 '프데이로'( )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명사이다.
한편 '프다르시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메트'( )는 전쟁이나 다른 어떤 힘에 의해 건물이 파괴되는 것, 또는 도덕적으로 종교 의식적으로 타락하여 부정케 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아프다르시아'란 외적인 손상이나 내적인 흠이 없는 순수함을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전치사 '엔'과 함께 쓰일 때 부사적으로 '순수하게', '진지하게'. '계속적으로'라고 해석된다.
따라서 본문의 '변함 없이'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에 있어서나 혹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로서 반드시 요청되는 외적인 생활 태도에 있어서는 변함없이 순수하게 지속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은 단지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지속적으로 입증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6장 강해 주석
6:1-4 그리스도인 부모와 자녀에 대한 교훈
6:5-9 그리스도인 종과 상전에 대한 교훈
6:10-20 그리스도인의 영적 전쟁
6:21-24 끝맺는 말
6:1-4 그리스도인 부모와 자녀에 대한 교훈
바울은 앞 단락(엡 5:22-33)에서 그리스도인의 부부 관계에 대해 언급한데 이어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에 관한 윤리 중 부모와 자녀 간에 지녀야 할 생활 윤리를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은 자녀는 부모에 대해 주 안에서 순종해야 하며(1-3절), 부모는 자녀를 신앙 안에서 바르게 양육해야 한다는 것으로(4절) 요약된다.
사실 가정의 온전한 일치를 위해서는 부부의 화합 못지않게 부모와 자녀 사이의 화합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부모의 권위에 마땅히 순종함으로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 이는 십계명의 제 5계명에서도 명령하고 있는 것으로 제 5계명은 그것을 지키는 자에게 장수의 축복을 약속하고 있다(신 5:16). 하지만 성경은 부모를 조롱하며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는 저주의 말을 하고 있으며(잠 30:17; 겔 22:7), 또 부모를 치거나 저주하는 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하고 있다(출 21:15; 레 20:9). 하여튼 부모의 사랑은 하나님의 부성애적 사랑을 상징한다는 것을 감안할 때 부모에 대한 자녀들의 공경은 하나님 공경의 첫걸음이자 외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성도들에게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하겠다.
한편 부모는 자녀에게 그가 마땅히 행할 바를 가르쳐야 한다(잠 22:6; 사 38:19). 이때 부모도 자녀를 자기의 소유물인 양 생각하고 무조건적인 권위를 내세우며 강압적으로 다루는 일이 없어야 한다. 특별히 부모는 자녀에 대해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사랑하신 것과 같이 헌신적으로 사랑해야 하며, 그들이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소유임을 깨닫고 두려운 마음으로 책임성 있게 양육해야 한다.
이상과 같이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는 자녀를 사랑으로 양육할 때 진정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가정이 될 것이다. 아울러 오늘날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청소년 문제는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6: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 '순종하다'(휘파쿠오)는 '~에 의해', '~아래에'를 의미하는 '휘포'( )와 '듣다', '청취하다'를 의미하는 '아쿠오'( )의 합성어로 '귀를 기울이다'. '따르다'의 뜻을 지닌다. 본절에서는 '언제나 부모의 말씀을 들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주 안에서'라는 말은 부모의 명령과 하나님의 뜻이 상반될 때를 염두에 두고 바울이 기록했다기보다는(Bruce) 자녀의 부모에 대한 순종이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과 같아야 함을 강조한 표현이라 하겠다(Hendriksen).
이것이 옳으니라. -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부모를 공경할 것을 교훈하셨고(신 27:16; 잠 1:8; 30:17) 인간 심성에 보편적으로 새겨주신 자연법으로도 부모에 대한 자녀의 순종이 옳은 일임을 알게 하셨다. 실로 부모에 대한 자녀의 순종과 효는 지극히 당연한 도리인 것이다(요 19:26,27). 이와 관련해서는 신 21장 자료노트, '성경의 효 사상'을 보다 참조하라.
6: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 십계명의 제 5계명의 인용이다(출 20:12; 신 5:16). 십계명을 두 부분으로 나눌 때 보통 제 1-4계명을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의무로, 나머지 여섯 계명을 이웃에 대한 인간의 의무로 구분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두 돌비 에는 각각 다섯 계명씩 기록되어 있어 다섯째 계명은 전자에 속한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부모를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대리자로 보아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부모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상징한다. 따라서 부모에 대한 공경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첫 걸음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 십계명의 제 2계명에도 약속이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어떻게 해서 제 5계명이 '첫 계명'이냐 라는 문제가 대두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견해가 있다. 즉 ① '첫째'를 '으뜸'으로 해석하며 '으뜸되는 축복의 약속이 있는 계명'이란 뜻으로 보는 견해(Westein, Hodge), ② 십계명을 제 1-4계명과 제 5-10계명으로 구분하여 인간관계에 관한 계명 중에 첫째 계명이라는 견해(Holzhausen), ③ '첫째'를 유대인 아이들이 첫째로 배우는 계명이라고 보는 견해(Braune, Stier), ④ 제 2계명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 아니라 제 5계명이 진정한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는 견해(Meyer, Robinson) 등이 있다. 이상의 견해들 가운데 ②의 견해는 제 5계명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첫째 돌비에 새겨졌다고 믿어졌기 때문에 합당하지 않고, ③의 견해는 제 5계명이 '어린이를 위한 첫 계명이 아니라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는 점에서 합당하지 않으며, ④의 견해는 비록 일반적 성격의 것이라고는 하나 제 2계명에도 약속이 있다는 점에서 부합되지 않는다. 그러나 제 5계명은 순수하게 축복만을 약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①의 견해가 본절의 해석에 가장 부합된다 할 것이다. 한편 본절에 언급된 '약속'이란 다음절에 언급된 장수하는 복을 말한다.
6:3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 출 20:12과 신 5:16로부터 인용한 구절이다. 바울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라는 구약의 본래의 약속을 '땅에서'로 바꾸어 인용했는데, 이는 구약 이스라엘의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신약 시대 성도들에게 보편화시켜 적용시킨 것이다. 즉 영적 이스라엘의 약속의 땅인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는 축복과 아울러 이 땅에서의 물질적인 축복과 건강과 장수의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6:4 또 아비들아. - 1-3절에서 부모에 대한 자녀의 도리를 언급한 바울은 이제 본절에서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도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본절에서 '부모' 대신 '아비'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당시 자녀의 양육이 아버지의 책임 하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Hendriksen, Wood),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 부모의 도리에 대한 바울의 권면은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에서 나뉘는데 먼저 소극적인 면으로 바울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는 그 당시 가장의 권한으로 자녀를 죽일 수도 있었던 로마인들의 관습과는 매우 대조적인 교훈으로 개개인의 인격에 대한 존귀함이 강조되고 있다. 한편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는 이유로는 지나친 엄격, 가혹, 편애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청소년 문제의 주요 요인이 기도 하다.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 적극적인 면에서의 자녀에 대한 부모의 도리를 권면하고 있다. '교양'(파이데이아)은 '아이'(파이스)에서 파생된 말로 '어린이를 양육함'. '교육', '훈련', '징계'의 뜻을 지닌다. 이는 자녀를 교육하는 데 있어서 '책벌을 통한 훈련', 즉 징계로 잘못된 점을 교정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징계와 책벌에 대해서는 구약 성경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잠 13:24; 23:13-14; 24:15; 29:15). 자녀를 노엽게 하는 잘못된 징계의 반대는 올바른 징계를 통해 자녀가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훈계'(누데시아)는 '정신', '마음', '이성'을 의미하는 '누스'( )와 '위치하다', '배치하다', '놓다'를 의미하는 '티데미'( )의 파생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충고'의 뜻을 지닌다. 즉 '교양'이 행위적 책벌을 통한 훈련인 반면에, '훈계'는 말을 통하여 자녀를 훈련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녀 교육과 관련하여서는 신 4장 자료노트, '성도의 자녀 교육에 대한 원칙들'을 보다 참조하라. 한편 바울은 '주의 훈계와 교양'이라고 하여 그 기준이 주님의 뜻과 말씀에 있음을 강조했는데, 이는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씀과 함께 그리스도 중심의 기독교 윤리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6:5-9 그리스도인 종과 상전에 대한 교훈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과 관련된 교훈으로 부부 및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에 대해 언급한 바울(5:22-6:4)은 이제 본문에서는 가정생활과 관련된 교훈의 마지막으로 종과 상전과의 관계에 대해 교훈하고 있다. 그런데 본문의 교훈은 좁게는 가정생활과 관련된 교훈이라 할 수 있지만 넓게는 고용인과 피고용인이라는 사회생활과 관련된 교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실 인간의 범죄 이후 인간이 이룬 사회는 불평등과 계급적 구조라는 뼈아픈 현실을 양산하고 말았다. 물론 인간들은 이러한 모순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여러 이론을 제시하고 또한 제도를 채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의 어떠한 이론과 제도로도 타락으로 파괴된 질서는 회복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이 세상이 존속하는 날까지 그대로 계속될 것이며. 완성된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비로소 창조 때의 본래 모습으로 회복될 것이다. 이에 바울은 현실적 상황을 타파하려고 시도하기 보다는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바로 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종간의 정당한 의무와 책임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권면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종된 자들은 상전에 대해 성도가 그리스도께 하듯 성실한 마음으로 순종하라는 것이며(5-8절), 상전된 자들은 하늘에 그들의 참 상전이 있음을 깨닫고 종들에 대해 가혹하게 하지 말고 후대하라는 것이다(9절). 사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볼 때는 상전이나 종이나 다 같이 하나님의 종들에 불과하다. 따라서 종된 자들은 그들의 처지에게 성실하게 직분을 감당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하며. 상전된 자들 역시 종들에 대해 진실함과 선의로 대함으로 그들이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나타내야 하는 것이다. 특별히 바울은 종이나 상전들에게 그들이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행하든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께서 그대로 베푸실 것을 기억하고 맡은 바 의무와 책임을 성실히 감당하도록 명령하고 있다(8절; 엡 5:10).
한편 이러한 종과 상전의 관계를 현재 사회에서는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성도들은 기회주의적인 자세를 버리고 성실하게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여 직장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며 회사를 경영하는 경영주는 사원들을 이 해하며 사랑을 베풀며 화목한 노사 관계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골 3:22-4:1).
6: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채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 부부 간(엡 5:22-33), 친자 간(1-4절)의 윤리를 언급한 바울은 이제 본절에서부터 9절까지에서는 주종지간의 윤리를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주종지간의 윤리는 넓게는 오늘날의 고용주와 피고용주의 관계에까지 그대로 적용된다 할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 '두려워하고 떨며'는 의무를 수행 하려는 진실한 태도를 의미한다(고전 2:3; 고후 7:15; 빌 2:12). '성실한 마음'은 위선이나 다른 저의가 없이 성심껏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는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하든 간에 주께 하듯 해야 한다(롬 14:7-9)는 삶의 원리를 종의 상전에 대한 봉사에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6: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 '눈가림'(오프달모둘레이아)은 '눈'(오프달모스)와 '노예의 의무를 수행하다', '섬기다'(둘류오)에서 유래된 '노예상태'(둘레이아)의 합성어로서 '눈가림만 하는 봉사'라는 뜻을 가진다. 사람의 눈 앞에서만 열심히 봉사하면 그 사람은 기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노예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야 하는데 하나님의 뜻은 성도들이 언제나 정직하고 성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지 결코 거짓되고 눈가림만 하는 삶이 아닌 것이다. 여기에서 사람의 노예와 그리스도의 노예와의 근본적인 인생관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성도들은 사람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6:7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 '단 마음'(유노이아)는 '선의', '열정', '호의'의 뜻을 지닌다. 따라서 본절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듯 하지 말고 기쁘고 즐겁게 하나님을 섬기듯이 하라는 말이다. 기쁜 마음으로 열정을 가지고 주인에게 봉사할 때 그 종은 이미 사람의 종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이다.
6: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 종들에 대한 바울의 권면의 근거이다.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때 이 땅에서의 신분에 상관없이 그가 자기의 위치에서 얼마나 주를 섬기고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느냐 하는 것으로 평가를 받고 또한 상급을 받을 것이므로 성도들은 비록 이 세상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모든 일을 주께 하듯이 성실하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은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의 주된 관심이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어야 함을 일깨워준다.
6:9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 '이와 같이'는 '주께 하듯 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단 마음으로'하라는 종에 대한 권면이 그 상대인 주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공갈을 그치라'의 '그치라'(아니엔테스)는 '늦추다', '풀어주다'를 의미하는 '아니에미'( )의 현재 능동태 분사로, '위협하는 일을 그만두라'는 뜻이다.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 상전들이 종들에게 공갈하지 아니하고 잘 대해주어야 할 이유이다. 즉 상전이나 종은 모두 그리스도를 상전으로 모시는 자들일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의 신분의 차이에 따라 차별하지 아니하시고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하실 것이므로 상전들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하듯 종들을 대해야 하는 것이다.
6:10-20 그리스도인의 영적 전쟁
죄악된 옛 생활을 청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음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실천적 윤리들을 여러 방면에서 제시한 바울(4:1-6:9)은 이제 본문에서는 그 실천적 윤리들의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새 생활을 온전히 영위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수행해야 할 사악한 마귀와의 영적전쟁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영적 전쟁의 성격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부분으로, 여기서 바울은 성도들이 수행해야 할 영적 전쟁이 연약한 인간을 상대로한 싸움이 아니라 마귀의 세력과의 영적 전쟁임을 밝히고 있다(10-12절). 이러한 영적 전쟁은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그 순간부터 장차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될 성질의 것이다. 하여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주 만물을 통일시키려는 원대한 계획을 갖고 계시나 마귀는 기회만 있으면 하나님의 일을 방해 하고자 한다. 특히 마귀는 성도들을 유혹하여 실족케 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지게 함으로써 결국 성도들을 자기의 수하에 두고자 한다(고후 11:4; 벧전 5:8; 유 1 :3).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마귀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마귀에게 대적해야만 하는 것이다. 둘째, 영적 전쟁을 위한 성도들의 준비를 언급하고 있는 부분으로, 여기서 바울은 성도들이 마귀의 궤계를 대적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신 감주로 무장해야 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13-17절). 실로 마귀는 인간의 힘을 훨씬 능가하는 능력을 소유한 영적 존재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모든 능력 위에 뛰어난 능력을 지니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할 때 비로소 마귀를 대적하여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언급된 성도의 무장은 고대 로마 병사가 전투에 임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장비에 비유한 것으로 그 의미에 대해서는 해당 주석을 참조하라. 셋째, 영적 전쟁의 수행 방법으로. 여기서 바울은 성령 안에서 항상 깨어 기도하여야 할 것을 밝히고 있다(18-20절). 사실 병사가 아무리 무장을 철저히 하고 있다 할지라도 깨어 적의 공격을 대비하지 않는다면 필연코 패할 수밖에 없다. 그와 같이 성도들은 모든 무장을 갖춘 후에는 깨어 기도함으로 마귀의 공격을 대비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깨어 기도함으로 마귀와의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반면(마 26:38-42),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깨어 있지 못함으로써 영적 전투에서 패하고 결국 예수를 부인하는 지경에 이르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마 26:40,41,56,69-75).
6:10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 '종말로'(투 로이푸)는 소유격으로 '나머지 사항에 대하여서는'의 뜻이다. 그리고 '강건하여지고'(엔뒤나무스데)는 '~에', '~위에'를 의미하는 '엔'( )과 '힘', '능력', '권능'을 의미하는 '뒤나미스'( )의 합성어, '권능을 부여하다', '능력을 주다'(엔뒤나모오)의 현재 수동태 명령법이다. 즉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지속적으로 강건함을 받아야 할 것을 의 미 하는 것이 다. 한편 바울은 성도들에게 악한 영들과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주 안에' 거하며 '그 힘의 능력'으로 채움을 받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에서 스스로 강건케 하려 하면 패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 승리했던 '여호와의 전쟁'의 특성이 신약 성도들의 영적 전투에 그대로 적용되어 짐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6: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 '마귀'(디아볼로스)는 모든 악마들의 머리로서 '사탄'을 가리킨다. 그리고 '궤계'(메도데이아)는 '기술을 사용하다'(메도듀오)에서 유래한 말로, '기술', '속임', '모략', '교활'의 뜻을 지닌다. 즉 사탄은 교활하여서 성도들의 약점을 잘 파악하여 여러 가지 속임수와 능숙한 기술로 공격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한 것이다. 바울은 그 당시 군인들의 전신 갑주를 비유로 영적인 무장을 묘사하고 있는데 전신 갑주는 '방패, 칼, 창, 투구, 정강이받이, 흉배' 등이었다(Polybius). 한편 '대적하기'(스테나이)는 군사 용어로서 쳐들어오는 적을 물러서지 않고 대항하여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성도들은 마귀의 궤계에 대해 소극적으로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항하여 승리를 거두어야 하는 것이다.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 '씨름'(팔레)은 '던지다', '흔들다'를 의미하는 '팔로'( )에서 나온 옛 단어로서 두 사람이 맞붙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던져 내리 누르는 경기를 말한다. 즉 바울은 당시의 운동 경기를 성도들의 영적 전투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혈과 육'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연약성을 의미한다(마 16:17; 고전 15:50; 갈 1:16; 히 2:14). 성도들의 싸움은 바로 이러한 연약한 인간들과 싸움이 아니라 세상의 권세 자인 마귀와의 싸움이다. 따라서 성도가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만 하는 것이다.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 '정사와 권세'는 천사들의 이름으로서 선한 천사뿐 아니라 타락한 천사. 즉 악의 영들에 대하여도 불려지는 칭호이다. 여기서는 악의 영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엡 3 :10; 골 2:15).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역시 마귀들로서 요 12:31; 14:30; 고후 4:4에서는 '세상 전체의 주관자', '세상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이라는 의미로 표현되어 있다. 그들은 또한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라고 불리워진다. 여기서 '하늘'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서의 하늘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삼층천의 개념에서의 2충, 곧 마귀들의 주거지인 공중을 가리킨다. 엡 2:2 주석 참조. 하여튼 그리스도인들은 마귀의 통치 영역에 살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영적인 전투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6: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 바울은 성도들이 대적해야 할 상대가 어떤 존재들인가를 설명한 후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영적인 무장을 해야 함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악한 날'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① 성도들의 죽음을 통한 개인적인 종말의 때(Schmid), ➁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우주적 종말의 심판의 때(Chrysostom, Jerome) ③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있을 특별한 환난의 때(Meyer, Koppe, Carid) ④성도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겪는 마귀의 시험의 때(Eadie, Bruce. De Wette). 성도들과 악한 영들과의 싸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므로 ④의 견해가 타당하다.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 '행한'을 '전쟁에 승리한'으로 보아 '싸움이 끝난 후 승리자로 서기 위하여' 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하나(Meyer, Milton), '행한 후'를 '완성한 후'로 보아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무장을 완성한 후에'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편적 해석이다(Bengel, Abbott, Westcott, Meyer). 즉 본절은 성도들이 사탄의 공격에 넘어지지 아니하고 끝까지 싸워 이길 수 있는 전쟁을 위한 진지를 확고히 구축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6: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 본절에서 17절까지는 성도들이 영적 전투를 위해 무장해야 할 전신 갑주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다. 한편 본절에서 '진리'는 그리스도와 성경 안에서의 '진리'인 하나님의 계시로 이해할 수 있으나 헬라어 원문에 정관사가 없으므로 '성실' 또는 '정직'(NEB)의 의미로 해석함이 좋다. 즉 거짓과 기만을 일삼는 사탄의 궤계를 깨뜨리기 위해서 성도들은 성실하고 정직해야 하는 것이다(시 51:6; 엡 4:15,25). 그리고 '허리띠를 띠고'는 그 당시 병사들이 옷을 단단히 동이고 검을 붙들어 매는데 사용했던 가죽 허리띠에 성도들의 신앙을 비유한 것으로 '어떤 행동을 준비한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구약 성경에서도 메시야 예언과 관련하여 그가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 11:5)고 말씀하고 있다.
의의 흉배를 붙이고. - 여기서의 '의'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신 '칭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 원칙과 행동으로 충성하는 것' 곧 도덕적 완전함을 의미한다(Moule, Bruce, Kent). 그리고 '흉배'는 굳은 가죽, 쇠, 구리 등으로 만들어 병사의 가슴 부분을 보호하기 위해 착용했던 것이다. 실로 성도들의 의로운 삶은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심장을 보호하여 주는 것이다.
6: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 '평안의 복음'은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서 화평케 하시는 중보자의 역할을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화평의 복음이다(엡 2:14). 그리고 '예비한 것'(헤토이마시아)은 '준비', '채비'(시 9:4; 10:17) 또는 '견고성'을 가리킨다. 한편 여기서의 '신'은 로마 병사들이 전쟁을 위해 신던 것으로 긴 행군을 하기에 용이 하고 발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하여 전쟁을 효과적으로 치루기 위한 필수품이었다(Barth). 따라서 본 구절은 성도들이 악한 영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은 화평으로 견고히 서야함을 의미하고 있다(Meyer, Abbott),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사탄의 공격을 막아낼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평안의 복음 안에서 하나님과 형제들과의 관계 속에서 화평하도록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6: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 여기서의 '방패'는 조그마한 것이 아니고 길이가 1.2m x 0.77m나 되어 전신을 다 가릴 수 있는 긴 장방형의 것을 가리킨다(Stott). 그리고 '믿음'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을 의미한다(Bruce, Moule).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 '화전'은 그 당시의 공격용 무기로 송진을 발라서 불을 붙여 쏘던 화살이다. 성도들의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는 사탄이 가공할 모든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막아주는 방패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잠 30:5).
6:17 구원의 투구와.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에게 주어진 구원의 은혜는 영적 전투에서의 가장 확실한 승리의 보장이다.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소유한 구원의 소망(살전 5:8)과 확신은 사탄의 어떠한 공격이라도 능히 막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 당시 로마병사들의 '투구'는 도끼나 망치로 내려치지 않는 한 뚫어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여 머리를 보호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또한 이 투구는 장식용으로도 이용되어 깃털과 '같은 화려한 장식을 달기도 했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을 해석하면서 '그리스도인을 꾸며 주며 보호해 주고, 그로 하여금 확신과 기쁨으로 머리를 들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그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이다' (Hodge)라고 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 '성령의 검'은 성도의 무장에서 유일의 공격용 무기로,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되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유일한 공격용 무기로 제시된 것은 성도들의 영적전투에 있어서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통하여 성도들은 믿음을 갖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순종함으로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수께서도 사탄의 시험에 대하여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으로 대항하시고 승리하셨다(마 4:4,7,10).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 '무시로'(엔 판티 카이로)는 '모든 경우에'라는 뜻이다. '성령 안에서'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을 받아서 하라는 뜻이다. 즉 성도들은 항상 기도하기를 힘쓰되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데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아시는 분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밖에 없기 때문이다(고전 2:11). 혹자는 이처럼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기도를 중언부언하는 기도(마 6:7)과 대조시키기도 했다(Chrysostom). 하여튼 성도들의 기도가 이교도들의 그것과 다른 것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고 그들은 자기의 뜻대로 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밖에서 자기 맘대로 구할 때 그것은 이미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도가 아닌 것이다. 바울은 성령께서는 성도 안에 거하시며 그들을 위해 친히 간구하시며 성도들을 통하여 기도하심을 증거하고 있다(롬 8:26).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 바울은 성도들에게 자신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여러 성도들을 위하여 깨어 기도하기를 항상 힘쓰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는 영적 전투에서 성도들의 공동의 책임 의식과 기도를 통한 영적 군사들 간의 연합을 강조한 것이다(딤전 2:1),
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 바울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의 복음 사역을 위해 기도를 부탁한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만 복음 사역이 가능한 것임을 고백한 것이다. 복음 전파의 사역은 영적 전투의 최전선에서 악한 영들과의 대대적인 전투를 벌이는 것이므로 기도를 통한 영적 지원이 없이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말씀을 주사'는 복음 전파의 근원이고 '입을 벌려'가 복음 전파의 과정이며 '알리게 하옵소서 '를 복음 전파의 결과라고 한다면, 바울은 지금 자신의 사역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6: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 '사신이 되다'(프레스뷰오)는 '전권 대사가 되다'의 뜻이다. 이는 왕의 메시지를 가지고 파송된 자를 의미한다. 즉 바울은 자신을 온 우주 만물을 통치하시는 만왕의 왕 그리스도의 전권대사로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쇠사슬에 매인'은 바울이 감옥에 있음을 반영한 것이다.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 바울은 비록 옥에 갇힌 신세였지만 로마에 모여든 어느 나라의 사신과도 비교가 안되는 자신의 영광스런 직책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는 왕이신 주님의 말씀을 당연히 사람들에게 증하여야만 했고 두려움 없이 담대히 복음을 전파할 사명이 있었던 것이다(Kent).
6:21-24 끝맺는 말
본문은 본서의 최종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본 서신의 전달자인 두기고에 대한 소개(21,22절)와 수신자인 에베소 교회를 중심한 소아시아 교회들에 대한 축복의 말이 언급되어 있다(23,24절).
여기서 본 서신의 전달자로 묘사된 두기고는 아시아 사람으로(행 20:4)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시에 동행했으며, 본서 등을 비롯하여 바울의 최후 서신으로 보는 목회서신을 기록할 때도 관여한 것으로 나타난다(딤후 4:12; 딛 3:12). 또한 본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본서와 빌레몬서. 골로새서를 각각의 수신자에게 전달하는 임무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는 임무를 맡았었다(골 4:7,9). 이상에서 보듯 두기고는 바울에게 크게 인정받던 사역자였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바울 서신이 그러하듯이 본서 또한 수신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빌고 있는데, 본서는 특별히 축복의 대상이 '형제들', 즉 3인칭이라는 것과 축복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본서가 에베소 교회뿐 아니라 그 주변의 소아시아 교회들에게 보내어진 '회람 서신'임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가 된다.
한편 본서는 A.D. 62년경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감금되었을 때 쓴 옥중 서신이다. 이와 같이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조차 에베소 교회의 분열을 염려하며 그리스도를 중심한 유기체적 교회 안에서의 성도의 일치와 연합을 강조하며 그들의 생활을 독려하는 글을 썼다는 사실은 복음이 그에게 준 확신이 얼마나 컸으며, 복음의 권능을 힘입는 사람은 어떠한 어려운 상황 중에서도 능히 이길 힘이 있음을 알게 해준다.
6:21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게 하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자신의 개인적인 사정을 알리기 위해 두기고를 보냈는데, 이는 바울의 성도들에 대한 목회자로서의 공적인 입장뿐만 아니라 사적인 관심과 사랑, 친분을 보여 준다.
두기고. - 아시아 사람으로서(행 20:4) 바울의 제 3차 전도 여행에 동행하였고, 이 때에는 본서와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가지고 오네시모와 함에 로마를 떠나 소아시아 지방을 순행할 임무를 맡고 있었다(골 4:7,9).
6:22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저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 바울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은 바울을 사랑하고 염려하는 성도들에게 근심거리가 되었을 것이다(엡 3:13). 그래서 바울은 두기고를 보내어 자신의 소식을 자세히 알림으로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바울 자신은 로마에서 복음을 전파하려는 소망을 갖고 있었고(행 28:17-31) 자신이 매임으로 복음이 전파됨을 인하여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하고 있었다(빌 1:12-18).
6:23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 본절과 다음절은 본 서신을 끝맺는 사도 바울의 인사말로 기도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는 유대인의 일상적인 인사말인 '평안'(마 10:12)과 함께 '믿음을 겸한 사랑'이 성도들에게 있기를 구하고 있는데 믿음은 사랑의 원인이 되며 사랑은 믿음의 열매인 것이다. 즉 바울은 성도들에게 온전한 신앙이 있기를 구하고 있다. 이러한 영적인 축복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다.
6: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 '변함없이'(엔 아프다르시아)는 '불멸', '썩지 아니함'의 뜻을 지닌다. 이를 '은혜'에 연결시켜 해석하기도 하나(Bengel, Beza), '사랑'에 관련시킴이 바람직하다(Calvin, Meyer). 즉 바울은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인내하여 끝까지 신앙을 지킬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렇게 변함 이 주를 사랑하는 자에게 영원히 썩지 아니하는 생명의 면류관이 상급으로 주어질 것이다. 한편 여기서 '은혜가 있을지어다'는 헬라인들의 통상적인 인사말로, 그 의미에 대해서는 엡 1:2주석에 다루었으니 그곳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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