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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그리스도 재림의 시기와 삶에 대한 실제적 교훈과 바울의 마지막 기도 및 끝맺는 말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4:1-5:24까지 계속되는 본서 본론 후반부의 일부와 서신서의 마지막 부분에 통상적으로 나타나는 양식과 같이 끝맺는 말(5:25-28)로 구성되어 있다. 그 가운데 전자는(5:1-24) 4장 말미에(4:13-18) 나오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에 관한 교훈과 더불어 본서 전체 내용의 핵심을 이루는 종말론(終末論)의 교훈 중 그리스도 재림의 시기에 대한 교훈을 다루고 있다(1-11절). 그리고 이어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가 일상생활에 있어 영적 지도자들에 대해 사랑과 존경으로 대해야 함과 이웃과 더불어 나누어야 할 사랑과 겸손에 대한 교훈(12-15절) 및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 지향해야 할 신앙적 미덕에 대해 다룬다(16-22절). 그리고 본서 본론부(1: 2-5:24)의 교훈을 마감하며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영육을 거룩하게 지켜주시기를 비는 마지막 기도가(23,24절) 이어진다.
이러한 문맥으로 구성된 본장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구속사적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구속 계획으로부터 구속사는 시작되어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십자가 수난과 부활 승천으로 이어지는 구속사의 마지막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종결된다. 그러나 본문은 구속사의 종점에 재림이 있을 것은 확실하나 그 정확한 시기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구속사적 진리를 밝히고 있다. 심지어는 이러한 사실이 재림의 당사자인 예수조차 그 시점을 모르고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표현으로 나오기도 한다(마 24:36; 막 13:32), 이처럼 재림은 본문에 나오는 바와 같이 사람들이 생각지 않을 때 홀연히 임하게 될 것이다(마 24:44). 따라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며 구속사의 경륜을 아는 지혜로운 성도는 항상 깨어 '근신하며 이날을 예비하여야 한다(계 16:15). 한편 이 부분은 바울의 종말관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이므로 종말에 관계된 내용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바울의 종말관의 큰 기둥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 그리고 이에 이어지는 심판이다. 그리스도께서 초림하신 것은 하나님이신 자신을 스스로 낮추어서(卑下)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成肉身) 인류의 대표자가 되어 대신 죽으심으로, 죄로 인하여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길을 마련하시기 위해서였다(빌 2:5-8).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은 초림과는 달리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가지고(마 16:27) 이 세상의 심판자가 되시며(마 25:32-46) 새롭게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인 새 하늘과 새 땅의 통치자로 이 땅에 임하시는 것이다(계 21:1-8). 따라서 그리스도 재림을 기점으로 구속사의 완성으로 주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의 주민으로서 이미 죽은 성도는 부활하며(4:16) 살아있는 성도는 변화하게 된다(고전 15:51,52). 그리고 생존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수고한 성도들에 대한 상급으로 '의의 면류관'이 주어진다(딤후 4:8). 그러므로 성도들은 영원한 멸망에서 벗어나며 영원한 천국의 시민으로서 영광을 누리기 위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주의 구속의 섭리에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본장 12-22절에는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가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삶의 모델이 나오는데 먼저 눈에 보이는바 영적 지도자와 형제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며, 더불어 대신(對神) 관계에 있어서도 확고하게 보장된 장래의 영광을 바라보며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들을 잘 보존하며 악에서 떠나는 성숙한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
또한 바울이 모든 교훈을 마무리하면서 마지막 기도를 한 것을(23,24절) 통하여 성도의 승리하는 삶은 단순히 지적(知的)으로 아는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적 도우심이 필요한바 최종적인 모든 것을 항상 하나님께 맡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또한 이런 기도는 스스로를
위한 기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형제를 위한 기도에까지 발전하여야 한다(골 1:9-12). 한편 바울은 본서 전체를 마무리함에 있어서 전도 사역을 수행하고 있는 바울 일행을 위한 기도를 부탁한다(25절). 이는 그리스도와 지체(肢體)된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 건설의 역군으로서 기도로 서로 도와야 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모두 목회자나 선교사는 될 수 없다 하더라도 기도로써 이들의 사역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을 교훈하는 것이다. 이는 이어지는 거룩한 입맞춤으로 형제 문안을 권면하는 데에서도(26절) 나타나는바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로서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 또한 바울이 자신의 편지를 회람하라고 부탁한 것은(27절) 자신의 편지가 단순한 인간적인 글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임을 분명히 하는 동시에 보다 많은 성도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에서이다. 따라서 이는 당시 성도들이 회람하면서 읽음으로 영적 지침을 삼아야 할 뿐 아니라 오늘날 성도 역시 항상 이를 가까이 하며 고 가운데서 영적인 교훈을 찾는데 힘써야 함을 보여 준다. 우리가 성경을 날마다 상고하며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외울 말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6-18
재림의 시기
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 주의 날이 밤에 도적(盜賊)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3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醉)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일상생활에 대한 교훈
12 ○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13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勸戒)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15 삼가 누가 누구에 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19 성령을 소멸치 말며
20 예언을 멸시치 말고
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22 악은 모든 모양(模樣)이라도 버리라
바울의 마지막 기도
23 ○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끝맺는 말
25 ○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26 ○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27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
2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본문 & 자료노트
도표 -5:1-3 주의 재림이 돌연히 임함에 대한 성경의 묘사
1 | 번개의 번쩍임같이 임함(마 24:27) |
2 | 노아의 홍수 때와 같이 임함(마 24:37-39) |
3 | 도적같이 예고 없이 임함(마 24:43,44) |
4 | 잠자고 쉴 때에 돌연히 임함(마 25:1-12) |
5 | 생각지 않은 때에 임함(눅 12:40) |
6 | 임산부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임함(살전 5:3) |
7 | 깨어있는 성도에게는 도적같이 임하지 못함(살전 5:4) |
원어연구-5:14. 안위하다(위로하다:개정)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파라뮈데오마이'( )로 전치사인 '파라'( )와 '뮈데오마이'( )의 합성 어이다.
여기서 '파라'는 '~곁에', ~근처에'라는 의미를 가진 전치사이고 '뮈데오마이'는 '말', '이야기', '언어'라는 뜻을 가진 '뒤모스'( )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말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파라뮈데오마이'는 문자적으로 '어떤 사람에게 가까이 가서 말하다'라는 뜻을 가진다. 이는 어떤 일에 실패하여 좌절하고 있는 상대방에게 다정하게 곁에 다가가서 권고나 교훈으로 다시 힘을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위로하다'(요 11:31), '격려하다'(살전 2:11), '달래다' 등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안위하라'는 마음이 약한 자, 즉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어려움으로 절망 가운데 빠지지 않고 용기를 갖도록 위로하는 것을 말한다.
한편 이와 유사한 의미의 헬라어로서 '파라칼레오'( )가 있는데, 이는 단지 말로써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어떤 도움을 줌으로써 위로하는 것을 가리킨다. 또 이 단어는 상대보다 지위나 권위가 높은 자가 아랫사람을 위로할 때 사용되는 반면 본문의 '파라뮈데오마이'는 동등한 지위에 있는 형제나 친구간의 위로를 나타낼 때 사용된다. 한편 성경에서 '보혜사'라는 뜻으로 쓰인 '파라클레토스'( )는 '파라칼레오'에서 파생된 것이다.
난제 해설-5:4 재림의 시기에 대한 성도의 인식
1. 문제의 제기
본문을 보면 믿는 성도들에게는 주의 재림(再臨)의 날이 도적같이 임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즉 이는 성도들은 재림의 시기를 인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본문의 언급은 5:7은 물론 '그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라는 말씀과 명백하게 배치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2. 문제 해결
본문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재림의 시기에 대해 말씀하신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마 24:32,33). 즉 본문은 우리가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는 것처럼 성도들도 주께서 말씀하신 여러 가지 재림의 징조들을 보고(마 24:3-31) 그 시기가 가까운 줄을 안다는 것이지 주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과 때를 정확히 알 수 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항상 깨어 근신(勤愼)하는 성도들만이 무엇이 주의 재림의 징조인지를 인식하고 주의 재림의 때가 가까운 줄을 알고 대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깨어있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의 안일만을 추구하는 자들은 도무지 주의 재림을 생각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재림의 강조와 시기를 인식할 리가 만무한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에서 볼 때 주의 재림이 밤에 도적같이 갑작스럽게 임하는 것같이 임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2절). 그러나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마 25:1-13) 깨어있는 성도들은 여러 가지 정황을 보고 재림(再臨)의 시기를 알고 또 주를 영접할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주께서 어느 날 어느 때에 오시든지 간에 갑작스럽게 도적을 맞는 것처럼 당황하지 않고 기쁘고 반갑게 주를 영접할 수 있는 것이다.
3. 의의
이상의 사실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주의 재림이 임박한 말세지말을 당하여 항상 깨어있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신앙 무장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처럼 우리 성도들로 하여금 갑작스럽게 주의 재림을 맞음으로 당황치 않도록 여러 징조들을 주심으로써 깨어있는 성도들은 누구라도 그 시기를 알고 준비케 하시는 하나님의 섬세한 배려와 사랑에 진한 감동을 받게 된다.
5:1-11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에 대한 교훈
앞선 부분에서 그리스도 재림 시에 죽은 성도의 부활이 있게 됨에(4:13-18) 대해 말한 바울은 여기서는 재림을 맞는 성도의 자세에 관한 교훈을 준다. 즉 바울은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한 자에게 있어서 재림은 돌연히 임하지만(1-3절). 항상 깨어 근신하는 성도들은 하나님이 이날을 미리 준비하게 하실 것이므로 결코 돌연히 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4,5절). 따라서 성도들은 재림의 시기를 모른다고 하여 방관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깨어 이날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다(6-11절).
한편 우리는 이러한 본문의 말씀을 통해 반드시 임할 재림의 때를 준비하는 영적 지혜로움이 성도들에게 절실히 요구됨을 알 수 있다. 즉 빛의 아들답게 어두움에 속하지 않고(5절) 각성하여 재림을 대비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비는 궁극적으로 믿음과 사랑과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악한 세력을 이미 이기신 그리스도를 의존함에서 이루어진다(히 5:9).
5: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 이는 바울이 자주 사용하던 애용구이다(4:9,13). 즉 바울은 영적 진리에 대해 다소 무지한 바가 있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기는 했지만 그들에 대해 형제로서의 사랑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관하여'란 표현은 본절 이하에서 언급되고 있는바 재림의 시기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주는 바울의 주된 교훈의 하나임을 보여 준다.
때와 시기. - '때'(크로노스)는 일반적인 의미로서의 시간(time)을, '시기'(카이로스)는 특정한 사건이 발생하는 결정적인 시점(season)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각각의 의미를 살려 전자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일어나기까지의 통상적인 시간을, 그리고 후자는 결정적으로 재림이 발생하는 한 시점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Morris). 그러나 여기서는 복합어의 형식을 띠어 '종말의 때',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의 정확한 시기'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한편 이러한 표현은 4장 후반부에서(13-18절) 거론되었던 종말의 문제들이 일단락되는 인상을 주면서 좀 더 특별하고 새로운 테마가 등장하리라는 암시를 주는 표현이라 하겠다. 즉 본절 이하로부터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혼동하던 다른 문제 즉, 재림의 때가 언제이냐 하는 과제가 중점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적어도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하여 전혀 무지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즉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받았고 당시 교회 공동체의 신앙고백 속에도 재림이 언급되었던 것으로 보아 재림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들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살전 4:13 주석 참조. 그러나 그들은 인지한 내용들을 확신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중 일부 교인들이 실제적인 죽음을 맞이하자 불안감이 엄습하여 생활의 규모를 상실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즉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재림에 대해서 조금은 알고 있었지만 그 지식에 대한 확신이 결여되었으며, 또한 일상적인 삶 가운데서 재림을 준비하는 생활이 나타나지 못했던 것이다(Bengel). 그래서 바울은 재림을 맞는 성도들의 바람직한 삶의 자세에 대해서 강론하는 이하 내용의 도입부로 그들 역시 기본적인 사실은 알고 있음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5:2 주의 날이. - 구약에서 '여호와의 날'이라고 표현되는 것과 관련을 갖는다. '여호와의 날'은 다양한 특성들을 내포하고 있는데 주로 이 날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의 날로 요약될 수 있다. 즉 이 날은 이스라엘이라는 선택된 민족을 박해한 자들에 대한 복수의 날로(욜 1:15; 암 5:18),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그 원수들을 궤멸하시는 날로(사 3:16-24; 렘 30:8), 그리고 성도들에 대한 구원의 날로 여겨지고 있다. 바울은 신약에서 여호와의 날을 '그 날'(고전 3:13), '그리스도의 날'(빌 1:10; 2:16), '주 예수의 날'(고전 5:5), '우리 주 예수의 날'(고전 1:8; 고후 1:14) 등으로 표현하였는데 그 모든 용례의 공통분모를 찾는다면 결국 '그 날'은 하나님의 권능과 공의로우신 역사가 확실하게 나타나는 날임을 알 수 있게 된다. 한편 본절에서는 이 날이 '주의 재림의 날'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재림의 날에는 불신자들에 대한 심판과 성도들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승리가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여호와의 날'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설명은 암 5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 - 재림의 돌발성을 비유적으로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밤'은 사물을 분명히 식별키 어려운 어두움의 시간으로 예기치 않은 사건이 급작스럽게 돌발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갖는다. 그리스도의 재림 역시 그러한 밤에 도적이 드는 것처럼 예기치 못하는 때에 돌발적으로 일어날 것이다(마 24:43; 막 13:35; 눅 12:35). 한편 초대 교회에서는 주의 재림이 밤에 급습할 것이라는 사상이 형성되기도 하였으며, 유월절 밤에 하나님의 사자가 애굽의 모든 초태생들을 급습하여 멸망시킨(출 12:29,30) 것처럼 메시야께서도 한밤중에 이 땅에 찾아오실 것이라는 유대인의 전승도 내려온다고 한다. 이러한 사고(思考)는 사도시대에도 있었는데 애굽에서의 초태생 멸절을 기념하는 유월절 축제의 전야제에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실제로 자정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풍습이 있었다고 전해진다(Jerome).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 그리스도 재림의 돌발성에 대해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미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 생활에 이를 반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이 준 재림의 교훈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5:3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 여기서 평안은 내적 안정을, 그리고 안전은 외적 안전을 의미한다. 이는 구약시대 선지자들이 사회의 부정부패와 백성들의 타락을 경고할 때에도 타락한 백성들의 입에서 나왔던 말이다. 사람들이 평안하고 안전하다고 자위하는 그 자리에(렘 6:14; 겔 13:10) 바로 멸망이 엄습해 옴을 보여 준다. 한편 여기서 '저희'라고 지적된 익명의 무리들은 다음 구절의 표현으로 볼 때 분명 그리스도를 모르며 재림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을 가리킨다. 주의 재림은 이처럼 불신자들이 경제적으로 풍요를 누리며 심리적으로 교만해져 있는 상황에서(Ellicott, Frame) 홀연히 임할 것이다.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 앞선 도적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어린애가 어머니의 태내에서 돌연히 나옴과 같이 재림의 돌발적 도래가 강조된 대목이다(사 13:8,9; 미 4:9), 그런데 해산의 비유는 돌발성을 내포하기도 하지만 그것에 부가해서 극심한 고통과 불가피성이라는 이중의 부담을 추가한다. 이는 곧 그리스도의 재림이 돌발적으로 일어날 것임과 동시에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사건이며 불신자들에게는 극심한 고통과 환난을 가져오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본장 자료노트 '주의 재림이 돌연히 임함에 대한 성경의 묘사' 참조.
5: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 3절의 '저희'와 대조되는 명사 '형제들'을 사용하여 친근감을 나타내는 한편 데살로니가 교회의 구성원을 가리키는 형제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저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위상에 놓여 있음을 암시한다. 한편 여기서 말하는 '어두움'이 영적 무지와 도덕적 사악함과 악덕, 그리고 거기에 머무르려는 암묵간의 충동적 욕구를 뜻한다(Ellicott). 성도들은 과거에는 하나님을 떠나서 어두움 가운데 있었으나(요 3:19,20; 엡 5:8) 마음속에 성령의 빛을 받으면(요일 4:12,13) 더 이상 어두움에 속하지 않게 된다. 이처럼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본질적으로 '어두움'(고후 6:14; 골 1:12)과 구별되며 분리된다. 한편 본절에서 성도들에게는 주의 날이 도적같이 임하지 못한다는 표현은 2절의 말씀과 모순되는 듯하다. 이에 대한 세부 설명은 본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5: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 '빛'과 '낮'은 이어 나오는 '어두움'과 '밤'에 각각 상반되는 개념인데 여기서는 자연 현상으로서의 일상적인 '주야'(晝夜)가 아니라 각기 상징적 차원의 의미를 내포한다. 즉 성경은 하나님이 빛이시고(요일 1:5) 그리스도께서 빛이신 것으로 표현하므로(요 1:9) 본절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빛의 아들들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신약에서 성도들을 '빛'으로 나타낸 경우는 허다히 발견되는데(마 5:14; 행 26:18; 벧전 2:9) 이로 볼 때도 성도들이 빛과 반대되는 어두움에 속할 수 없다는 논리가 자연스럽게 성립된다(마 4:16; 요 3:19-21; 엡 5:8). 여기서 빛의 아들이란 빛에 속했을 뿐 아니라 그 어버이인 빛을 닮는다는 의미 또한 포함하고 있다(Afford, Ellicott). 이런 점에서 '낮의 아들'도 동일한 개념으로 파악되는데 히브리인들의 고유한 문장 관습으로 보면 동일한 단어나 동일한 의미를 지닌 문장을 반복하는 것은 이를 강조하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성도들의 영적 상태나 도덕적 측면을 강조하기 위한 문장기법 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5: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 '빛'과 '낮'의 자녀들이 마땅히 행해야할 윤리 규범이 제시되어 있는 문장이다. '빛'과 '낮'에 합일되는 행위는 곧 깨어 있는 일이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순결하여 타락하지 않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영적으로 각성된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의미까지 포괄하는 것이다(마 24:42; 막 13:35; 엡 5:14). 여기서 바울이 언급하는바 자는 자들은, 죽은 자를 가리키는 4:13의 용례와는 다른 것으로 영적인 무감각에 빠져 이완된 생활을 하는 자들을 지칭한다. 한편 본절에서 바울은 영에 속한 자녀들은 단순히 '깨어'있을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근신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근신하다'라는 동사 '네포'( )는 본래 알콜 중독의 상태에서 벗어난다는 어원을 갖는데, 여기에 근거해서 바울이 마치 데살로니가 교회에 금주령을 내리는 것 인양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여기서 '근신'은 광의적 차원에서 모든 일상생활에 있어서 '절제' 혹은 '규모'있음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풀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즉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릇된 종말관에 사로잡혀 생활의 질서를 잃고 방탕하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영적인 각성을 촉구하는 한편, 성경적이고 바람직한 종말적 삶의 모습을 촉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5: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 '자는 것'과 '취하는 것'이 밤에 일어나는 현상임을 지적하면서 '빛'과 '낮'의 아들들이 그래서는 아니될 것이라는 역설적 교훈으로 논리가 전개된다. 여기서 '자는 것'과 '취하는 것'은 영적 나태와 육적 방종을 뜻하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즉 밤은 문자 그대로 자는 시간이요 온 세상이 환락에 빠지는 시간이란 점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밤에 속한 일들 즉 영적 무관심과 도덕적인 타락인 호색, 음란, 싸움, 질시 등에서 떠나라는 경고를 통해(롬 13:13), 깨어 일해야 하는 성도의 상태를 역설적으로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5: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 불신자의 상태, 즉 '자는 자', '취하는 자'와 대조하여 4,5절에서 표명된 성도들의 본질적인 위상을 재정립하는 어구이다. 즉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들의 외면상의 행태나 행동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낮에 속한 빛의 자녀라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이다.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 '낮'에 속한 자녀들이 실제 삶의 과정에서 견지해야할 요소들에 대해 바울은 기독교인의 기본 미덕인 믿음과 사랑, 소망이라고 명시하였다(고전 13:13; 살전 1:3). 혹자는 이 세 가지 요소를 가리켜 성도가 갖추어야 할 적극적인 무기라고 하면서 그리스도교 성도들은 소극적으로 근신할 뿐 아니라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마땅히 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Chrysostom). 이처럼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주의 재림을 대망하며 견고한 믿음을 견지하고 살아가는 성도의 삶을 군인이 무장하는 것에 종종 비유하였는데(롬 13:12; 고후 6:7; 엡 6:11-17) 이는 그가 성도들의 삶의 여정 자체를 사탄과의 영적인 전투로 파악했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느 정도 믿음과 사랑이 자라고 있었지만 더욱 성숙하고 장성해야할 부분들을 가지고 있었고(3:1; 4:1,10), 또한 장래에 대한 소망에 있어서는 그릇된 재림으로 인해 방종한 태도를 보이는 무리들도 있었으므로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흉배, 투구라는 군사적 용어와 함께 등장한 것으로 풀이된다.
5: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 8절 후반부에서 바울은 '구원'에의 소망을 가지라고 독려하였는데 본절에서는 이에 이어 기독교의 '구원론'의 요지라 할 수 있는 보다 본격적인 교훈을 주고 있다. 즉 바울이 말하는바 그리스도교의 구원은 곧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구원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곧 죄의 지배하에 속박된 모든 인간에게 내려질 것이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인간들을 그 무서운 운명에서 건져내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기에, 하나님의 진노가 불신자들에게 쏟아질 때 그의 자녀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계 6:1-7:17). 이에 대해서는 그랜드 종합 교리 '구원론'을 보다 참조하라. 한편 여기서 '구원을 얻게'의 '얻게'에 해당하는 원어 '페리포이에신'( )을 해석하는 방법 여하에 따라 서로 상이한 두 가지 관점이 형성된다. 이를 능동적 의미로 보아 '획득'(winning)이나 '손에 넣음'(acquiring)으로 보기도 하며(Hendriksen, Morris), 수동으로 보아 '입양되기 위해'(for the adoption)로 해석하기도 한다(Lightfoot). 전자의 경우는 구원받는데 있어서 특정한 부분이나마 당사자의 노력이 경주되어야 한다는 논의를 지지하는 것으로 인식이 되었고 후자의 주장은 구원은 그 근원적인 면에 있어서 철두철미하게 인간은 수동적이라는 입장을 지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문맥적으로 보아 바울은 구원이 곧 인간의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에서 나온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후자가 보다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바울은 무엇보다도 구원 사역의 확실성, 불변성을 빙거(憑據)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로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 했던 것이다.
5: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고만 기술된 선행절의 내용을 받아 구원이 성취되는 계기가 된 결정적 사건을 보다 구체적으로 밝히는 대목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구원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발원한다. 이 같은 명제가 현재에는 보편화된 진리 체계로서 인정을 받고 있지만 적어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서를 기록하던 A.D. 51년경에는 대중들에게 낯설게 여겨졌을 것이기에 바울이 본절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구원과 긴밀하게 관련시킨 것은 의의가 크다 하겠다. 한편 그리스도교 구원론을 본격적으로 담고 있는 로마서와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는 본서보다 최소한 5년은 늦게 기록되었다.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목적이 나타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마 27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갖는 가장 큰 의미는 그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성도들에게 생명을 부여하게 되었다는 진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깨든지 자든지가 ① 6절과 같은 윤리적 차원의 이야기인지, ② 그냥 문자적 의미인지, ③ 삶과 죽음이라는 의미인지(Chrysostom, Ellicott)가 논의되었다. ①로 간주하면 윤리적으로 깨어 있든 타락을 하든 구원이 보장된다는 뜻이 되며, ②로 본다면 논리적으로 너무 설득력이 약하다는 점에서, ③으로 생각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특히 마지막 대목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는 표현은 구원의 주체자이신 그리스도의 강력한 의지를 나타내는 '사역'(事役)의 뉘앙스를 강하게 풍김으로 인하여 행위의 주체자에 대한 확실성을 보증하는 뜻으로 풀이된다. 즉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그가 죽은 자이건 생존해 있는 자이건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의해서 영원한 삶을 얻게 되고, 죽음에서 부활의 첫 열매되신 신실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사실을 보증하시므로 그들은 소망 없는 다른 불신자들 같이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5: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칼레이테'( )는 '서로 위로하라'로도 번역된다(살전 4:18). 즉 이 표현은 성도의 죽음은 결코 슬퍼만 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한 성숙한 성도들은 서로 위로하며 그리스도 재림의 날에 부활에 참여할 것이라는 사실로써 서로 권면하여 굳건한 신앙을 갖도록 하라는 의미이다.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 4:13 이하부터 심각한 어조로 진행되어 오던 종말에 대한 교훈이 일단락 맺어지는 부분으로서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서로 권면할 것과 더불어 교회의 건덕(建德)을 위해 매진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문장이다. 한편 '덕을 세운다'(오이코도메이테)라는 표현은 원래 건축물을 건축하는데 사용되던 용어인데(마 7:24) 바울은 이러한 어법을 애용하여 교회를 세우고(마 16:18), 교회가 차츰 성장하여(행 9:31) 마침내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본받아 성숙해 나가는 과정을 표현하는데 이 낱말을 사용하였다(고전 3:9; 엡 2:21,22). 그리스도인들이 상호간에 역할과 지위, 직능과 직위, 권리와 책임 등을 신중하게 활용하여 조화를 이루고 원만한 교제를 유지하여 피차간에 덕을 세우는 것은 곧 보이지 않는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다. 한편 성숙하지 못한 성도가 더불어 존재하는 지상교회(地上敎會)에서 성도가 지향하여야 할 최고의 윤리의 표준은 스스로의 양심 뿐 아니라 타인의 신앙 상태까지도 염두에 두는 '교회의 건덕'이라 사료된다.
5:12-22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일상생활에 대한 교훈
본서의 중심 주제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 재림과 관계된 교훈을 다룬(4:13-5:11) 바울은 이제 편지의 끝이 가까와짐에 따라 다가오는 재림을 전제할 때 성도들이 일상생활 가운데서 가져야 할 바른 자세를 요약하여 교훈한다. 즉 바울은 먼저 성도들에게 그들의 영적 지도자인 감독들을 존경하고 사랑해야 하며, 대인(對人) 관계에 있어서 사랑과 겸손으로써 이웃과의 화평을 유지해야 함을 교훈하고(12-15절). 이어서 대신(對神) 관계에 있어 성도는 항상 기쁨 가운데서 기도에 힘쓰며 감사함으로써 성령 충만한 삶을 힘써야함을 교훈한다(16-22절). 그리할 때 정녕 우리는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는 우는 사자 같은 사탄의 손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벧전 5:8, 9)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갈 6:9).
특히 본문 가운데 등장하는 소위 성도의 3대 실천 강목은 결국 성도란 역사와 우주의 창조자요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무궁한 사랑으로 천국 구원이란 절대 영원의 구원을 이미 획득한 자인 바, 상대적이고 일시적인 이 세상에 속한 그 어느 것에 의해서도 영향 받지 말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 안에서 그 구원의 희망과 기쁨을 만끽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 가능성과 의무를 동시에 가진 자라는 사실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할 때 진실로 수준 높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향기를 풍기는 삶을 향유할 수 있다.
5:1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관심이 집중되었었고 그들에게 지대한 반향을 일으켰던 재림의 문제에 대하여 대답을 준 이후에 바울은 곧바로 성도들의 실제 생활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다. 이하에서 진술되는 실제 생활에 관한 충고는 다양한 방면에 관계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심적인 요지는 선행 절에서 언급되었던 '교회의 건덕'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바울은 먼저 수고하고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하는 세 가지 내용이 같은 직책의 다른 세 가지 측면을 말하는 것인지(Ellicott), 아니면 상이한 세 가지 직책을 각각 지칭하는 것인지(Bengel) 논의가 되었는데 개역 성경의 번역과 같이 전자의 견해가 보다 유력하다고 인정되고 있다. 즉 바울이 이야기하는 바의 수고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사랑의 수고(1:3), 곧 바울이 행했던 것과 같은 선교 활동의 수고요(갈 4:11; 골 1:29), 다스리는 것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지도하는 교회의 치리 장로의 직분을 말함이요(딤전 5:17). 권하는 것은 교회 구성원들의 오류를 시정해 주고 바른 도리를 가르치는 교회의 교사의 직분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물론 이렇게 보면 세 가지 직능이 모두 다른 세 가지 직책을 말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교회의 직능이 구체적으로 분화되지 않았던 당시 교회의 상황을 고려해 보면 감독이나 장로 같은 교회의 지도자를 가리킨 것이라고 여겨진다. 당시 바울은 지리적으로 데살로니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고린도에 있었지만 이미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감독들이 세워져 있어서 회중들을 돌보고 있었다(Gloag). 그래서 바울은 실제적인 교훈을 줌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먼저 성도들이 그들의 영적인 지도자인 감독들과 올바른 관계와 교제를 유지하도록 권고한 것이라 판단된다. 한편 당시 교회의 직분과 직책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에 대해서는 딤전 3장 연구자료 '교회의 직분 이해'를 참조하라.
너희가 알고. - '알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데나이'( )는 문자적인 직역으로는 '평가한다', '참된 가치를 인정한다'로 풀이되기도 하는데 본절에서는 후자의 뜻으로 보는 것이 옳다. 혹자는 이를 '존경하다'로 보기도 하였으며(Moftatt) 공동 번역과 NIV는(respect) 이런 의미를 채택하였다. 한편 이는 '참된 가치를 인정한다'는 의미로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들을 그냥 지도자로만 인식하는 단계를 넘어서 그들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고 동시에 존경하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5:13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 교회의 지도자들에 대한 마땅한 자세가 전절에 이어 반복된 형태로 묘사되었다. 한편 여기서 '귀히 여긴다'(헤 게오마이)라는 용어는 일차적인 의미로는 '생각하다'란 뜻이 있다. 그러나 이 말이 단순히 인식하다 라는 뜻을 넘어 개역 성경의 번역과 같이 '존중하다'라는 의미로 해석된다고 했을 때(Thomas) 전절 마지막의 '알고'가 '참된 가치를 인정하다'란 뜻을 갖는 것과 상호 의미가 통한다고 할 수 있겠다. 한편 이 대목에서는 '사랑 안에서'라는 구절이 첨가되어 맹목적인 복종이 아닌 자발적이고 자의적인 순종을 나타낸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형제들이 친교를 맺고 일치되어 단일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진실이거니와 한걸음 더 나아가 '자발적인 사랑'이 원동력으로 작용해야 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너희끼리 화목하라. - 앞선 부분이 교회 지도자에 대한 성도의 자세에 대한 교훈이라면 본문은 성도 상호간의 자세에 대한 교훈이다. 바울이 이같이 반복된 형태로 지도자의 권위와 더불어 성도들 상호간의 합당한 태도를 교훈하고 있는 것에 대해, 곧 지도자들의 권위를 둘러싸고 데살로니가 교회에 일련의 불협화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빌립보나 고린도 교회 같은 타 지역의 교회들과 비교해서 교인 간에 긴장관계가 없었고' 외부로부터의 박해를 슬기롭게 극복하여 바울 사도의 칭찬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살전 1:6,8; 2:14). 그러므로 이것은 일반적인 차원에서 모든 교회들은 불화(不和)의 위험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가 없었으므로 바울이 그 대응책으로 성직자에 대한 존경과 화목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가시적인 교회, 즉 지상의 외형적 교회는 비록 성도로 부르심 받았으나 불완전한 인간이 모인 곳이므로 불가피하게 그 불완전성을 노정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에 데살로니가 교회에 가능성으로 잠재되어 있는 불화의 개연성을 미리 잠재우기 위해서 바울이 그러한 교훈을 준 것이다.
5:14 또 형제들아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 '교회의 건덕(建德)'을 위한 바울의 실제적 충고들이 12절 이후부터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본절의 내용이 '타인에게 교훈하라는' 뉘앙스를 가진다는데 착안하여 여기 나타난 강력한 충고들이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내려진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Chrysostom, Oecumenius). 그러나 이 견해는 앞부분의 충고가 교회 전체에 대한 충고라는 사실과 더불어 '형제들'이라는 용어를 너무 협소하게 축소시키고 있다는 측면에서도(롬 12:14-17)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으며, 그보다는 교회 전체를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견해가(Frunle, Morris, Alford)보다 지배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한편 여기서 바울은 12절에서 사용했던 '구하노니'라는 용어 대신에 '권면하노니'란 단어를 사용하여 그 권고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이는 12,13절에서 일차 언급된 충고를 다시 한 번 강조함과 아울러 이하에서 전개되는 교훈이 선행절의 단순한 재현과 반복이 아님을 인지시키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된다. 한편 본절에서 바울은 먼저 ‘규모 없는 자를 권계’, 즉 다스리라고 한다. 여기서 '규모 없는 자들'(아타크투스)이란 군사용어로서 대열에서 이탈한 병사를 지칭하며 일반적으로는 사회의 일반적 규율에 불복하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하나, 본절에서는 교회의 정해진 질서와 규율을 깨뜨려 혼란스럽게 하는 자를 일컫는다. 데살로니가 교회에도 이러한 무리가 소수 존재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살후 3:6,7) 이런 자들에 대해서 교회는 묵인해서는 안 되며 마땅히 치리권을 행사하여 경고하고 징계함으로 이러한 악행이 확산되는 것을 막아야 할 것이다. 고전 5장 연구자료, '교회의 권징' 참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 '마음이 약한 자들'(올리고프쉬쿠스)은 '작은'(올리고스)과 '마음' 혹은 '혼'(프쉬케)의 합성어로서 '소심한 자', 혹은 '낙담한 자'(사 54:6; 잠 14:29)를 뜻한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소심해하고 낙심했는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문맥을 고려해보면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이미 죽은 동료들이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까하고 불안해했지 않았나(4:13) 추정된다. 상기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바울은 재림에 대한 충분한 교훈으로 그들을 위로했으면서도 지극한 사랑으로 성도들 상호간에 재차 위로할 것을 부탁하는 치밀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살전 4:14주석 참조.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 육체적 질병으로 약해진 자들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영적으로 스스로를 잘 지탱할 수 없는 의지가 박약해진 자들을(Chrysostom, Ellicott) 견고하게 육성하라는 명령의 말씀이다. 이들의 허약함이 가중된 외부의 핍박으로 인한 것인지(3:3-5), 아니면 4:3-7에서 지적된 바의 도덕적인 유혹 때문에 약해진 것인지는 단언할 수 없어도(Frame) 개종한 이방인들로 구성된 데살로니가 교회를 비롯한 여러 교회에는 그 내부에 이처럼 영적으로 유약한 자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었을 것이다(롬 14:1-15).
모든 사람에 대해 오래 참으라. - 여기서 모든 사람은 불신자를 가리키는 듯하다. 지금까지 바울은 주로 성도들 상호간의 문제에 대해 언급했으나 여기서는 성도들이 필연적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고 또 전도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불신자까지 관용으로 대해야 함을 교훈한다. 이러한 관용은 바울에 의해 누차 강조된 바 있는 성도의 미덕이다(고전 13:4; 엡 4:2).
5:15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는 것은 구약에서 허용된 법규로써(출 21:22-25; 레 24:20)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이라 일컫는다. 그러나 이 규정은 보복의 정당성을 규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피해 당사자 혹은 그 친척들이 가해자를 응징할 때 그 받은 악행 이상으로 보복함으로써 야기되는 보복의 악순환을 방지하려는 의도에서 제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동해보복법이 입법 취지에서 벗어나 목적이 왜곡되고 굴절되어 이웃을 응징하는 도구로 전락하자 예수께서는 개인적인 복수를 금지시키기 위해서 산상수훈을 통해서(마 5:38-42) '보복법 근절 원칙'을 확립하셨던 것이다. 히브리 정신에서 미덕으로까지 간주되었던 보복법은 예수에 의해서 그 가치와 기능이 완전히 무효화되었으며 예수께서는 새로운 계명 즉, 원수를 사랑하며 선으로 악을 갚으라는 말씀을 대신 선포하셨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히 혁명적인 이 사랑의 교훈은 본절에서 감지할 수 있는바 같이 바울은 물론(롬 12:17-19)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에게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는데(벧전 2:19; 3:8)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선으로 그 빚을 갚는 행위야말로 기독교 윤리의 근간이요 극치라 아니할 수 없다. 한편 동해보복법에 대해서는 레 24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 악인에 대한 소극적인 보복 금지 명령에 뒤이어 악인에게도 선을 행하라는 적극적인 권고의 명령이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권장하는 적극적인 대안으로서의 선이란 단순한 자선행위(Lightfoot)를 넘어선 도덕적 이상으로서의 사랑의 철저한 시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편 '좇으라'(디오코)는 사냥감을 추적하는 사냥꾼의 집요함을 나타내는 용어로 적극적인 추구를 가리킨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궁극적 도덕률이란 당연히 사랑이다(고전 14:1).
5:16 항상 기뻐하라. - 본절에서 22절까지는 성도들이 각자 일상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가져야할 가장 기본적인 신앙생활 자세들이 기록되어 있다. 특별히 본절에서 18절까지는 성도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소위 성도의 '3대 실천 강목'을 기록하고 있다. '경구'(警句)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세 가지 내용을 각각 독립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세 가지가 함께 모여 성도의 바른 삶의 자세 전체를 암시하는 의미가 더욱 크다 하겠다. 이 세 가지 요소는 불신자들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것으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삼위 일체적 미덕이라 칭함을 받기도 한다. 바울은 먼저 항상 기뻐할 것을 강조한다. 기실 기뻐한다는 것은 영혼의 자발적인 감정이지 억지로 강요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본문이 이 같은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은 기뻐해야 할 의무가 있다기보다는 기뻐해야만 할 당위성을 가진 자로서 참 성도라면 매순간 기뻐할 수밖에 없는 자임을 강력히 보여 주는 것이다. 즉 실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삶과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져 이미 영원한 천국 구원을 최종 확정 받은 절대적 축복을 가진 자이므로, 언제나 기뻐하면서 잠시뿐인 이 세상에서의 상대적인 모든 생활 형편이나 심지어 위기를 넘어서 약동하는 기쁨의 근원을 소유한 자로서, 늘 기뻐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하는 존재임을 새삼 각성시켜 주고 있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은 성도에게 기뻐하라고 명령하실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기뻐하되 항상 기뻐하라는 면에 이 명령의 위대성이 또 한 번 드러난다. 즉 이 세상에서의 그 어떤 상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천국 구원을 획득한 자로서 언제나 기뻐해야 한다는 명령에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기쁨과 그로 인해서 성도가 갖는 기뻐해야 할 의무의 절대성이 더욱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다.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 성도는 이미 천국 구원을 영원히 확정 받은 자이나 세상 끝날까지는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또한 회개하는 순간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 죄 사함을 받아 즉각적이고 최종적으로 의인의 영적 신분을 얻었으나 그 인격 자체가 의인이 된 것은 결코 아니어서, 그 성화의 정도에 발전과 쇠퇴가 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성도는 매순간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되며 또한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성화의 발전을 추구해야 하는바 그 최대의 통로가 바로 기도인 것이다. 또한 좁게 생각하더라도 앞 구절에서 언급한 기쁨의 삶을 지속시키는 것을 위해서도 인간의 힘만으로는 될 수 없으며 반드시 기도가 요구된다.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기도하는 것이다(Chrysostom). 한편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명령은 물론 중단이 없는 기도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고 ① 항상 기도하는 정신으로 생활하라는 것(Jowett) ② 현실적으로 중단 없는 기도를 하지는 못하지만 기도를 최대한 일상화할 것(Alford, Moffutt)을 뜻하는 말이라 생각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호흡이요 생명이라는 명제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어 다소 진부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정한 형식을 갖춘 기도 외에도 성도들은 생활 중에 수시로 마음을 열고 입을 열어 기도를 생활화하여야 할 것이다.
5:18 범사에 감사하라. -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확신을 가진 성도는 상대적으로 이 세상에서의 그 어떤 상황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감사하게 될 것이다. 즉 성도는 궁극적으로 영원불멸의 천국을 확신하는 자들인바 상대적으로 잠간 동안인 이 세상에서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 어떤 환경 중에서도 자족하며 평화와 번영뿐만 아니라 질고와 역경 중에도 오직 감사할 따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건들이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따라서 발생한 것으로서 결국은 인간에게 진정 필요한 영원한 구원을 위한 것임을 확신하는 신앙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이다(롬 8:28).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핍박과 환난에 직면해 있었다(3:4).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감사하라고 한 것은 결국 그 어떤 상황에서도 늘 변하는 세상사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 이면에 담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라는 말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경이로운 방법과 계획으로 그의 성도들을 궁극적인 선으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베푸는 교훈일 뿐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주시는 귀한 진리의 말씀이다(1:2; 2:13; 살후 1:3; 2:13).
이는(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 여기서 '이는' ① 본절에만 해당된다(Chrysostom, Ellicott) ② 본절과 바로 선행절 즉 감사와 기도를 지칭한다(Grotius) ③ 앞의 내용 세 가지를 받는다(Lightfoot, Moffult)는 견해 등이 있다. 혹자는 '이는'이 단수로 쓰여졌다는 점을 들어 ①의 견해를 주장하기도 하나 문맥으로 보아서는 '이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입장을 지지하는 것이 옳다. 기쁨과 감사와 기도야말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성도들이 늘 견지해야 할 하나님의 뜻이다.
5:19 성령을 소멸치 말며. - 성도들의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방면에 교훈을 주는 대목에서(16-22절) 본절과 20,21,22절은 특별히 영적인 은사에 관한 충고를 언급한다. 여기서 성령(토 프뉴마)이란 표현을 ① 문자 그대로의 '영 '으로 볼 것인지(Ellicott), ② 성령의 선물이나(Bengel, Frame), ③ 성령의 열매로 볼 것인지(Chrysostom)에 대하여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데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하나님이신 성령을 소멸할 수는 없다는 측면에서 ②와 ③의 뜻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편 '소멸하다'(스벤뉘미)는 문자적으로 '불을 끄다'(막 9:44)란 의미이다. 바울이 성령의 역사하심을 불타는 것에 비유하여 그것이 곧 성도들에게 부여된 '은사'임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는 예 가 그의 서신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데 (롬 12:6-8; 엡 4:11; 딤후 1:6), 그 이유는 추측컨대 성도들 사이에서 성령의 능력과 은사들이 급속도로 확산되었으며 이는 불과 같이 열기를 수반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행 2:3). 한편 바울이 본절의 자구적 의미가 가지는 바와 같이 '성령의 불을 끄지 말아라'라고 경고한 사실에 착안해서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에 '성령운동'이라 명명할만한 유사한 움직임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도(Thomas) 일면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또한 역설적으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고린도 교회에 비교해서(고전 12-14장) 상대적으로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냉담하게 반응했으므로 바울이 더 열심을 내도록 독촉하였으리라는 견해도 성립이 된다. '은사'에 대해서는 고전 12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이러한 견해들에 한 가지를 더 부가한다면 데살로니가 성도 중 매우 보수적인 사람들이 성령의 신비한 은사들을 배격하고 그런 은사를 받은 자들을 나무랐기 때문에 바울이 성령의 은사를 받은 쪽을 옹호하기 위해서 그런 발언을 했으리라는 생각도 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표현만으로는 구체적으로 당시 바울의 의중이 어떠했으리라고 확언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가능한 범위에서 이야기한다면 이 구절을 일반적 차원에서 해석하는 것이 해결방안으로 제시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바울은 지나친 광신적 자세를 경고하면서 편향된 이성적 태도를 함께 나무라는 동시에 종말론의 몰이해에서 초래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규모 없는 생활- 절망, 나태, 부도덕 등- 에 대해서 성령의 역사하는 힘으로 극복할 것을 경고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바울이 시사하는바 성령은 특별한 은사나 능력을 지칭함보다는 성도들의 삶을 거룩하게 지탱해주는 경건한 모습을 의미한다 하겠다(갈 5:22-26). 즉 바울은 본절의 교훈을 통하여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신앙에 균형을 이루어 건전하고 건강한 삶을 유지하도록 가르친 것이다.
5:20 예언을 멸시치 말고. -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장래에 대한 예고를 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매개체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신약의 예언자는 구약의 선지자의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 개념과는 다소 구분되어 사용되어진 듯하다. 초대 교회에는 '선지자'라 일컫는 사람들이 있었고(행 11:27; 21:10) 예언의 능력 또한 중요하게 취급되었는데(고전 14:1) 그들은 대부분 사도들의 통제 하에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고전 12:28; 엡 2:20). 그들이 교회 내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했는지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 수는 없으나 사도들의 권위 아래 순응했다는 것과 그들의 활동을 사도들이 인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참고할 때 그들의 역할은 미래에 대해서 예고를 하며 그런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선포하는데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는 딤전 3장 연구자료, '교회의 직분 이해'를 참조하라. 그런데 바울이 본절에서 어떤 이유로 '예언'에 대해서 언급했는지와 예언에 대해서 충고할 만한 특정 사건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었는지는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혹자는 주의 재림과 관련하여 데살로니가 교회 내에서 예언이 난무하여 교회 내부에서 갈등이 존재했고 바울이 이를 정돈시키기 위해서 예언에 대해서 교훈한 것이라고(Morris, Thomas) 주석했는데 이런 주장은 하나의 가능성으로 인정되고 있다.
5: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 '범사'로 풀이된 원어 '판타'( )는 '모든'의 뜻인데, 바울이 말하는바 모든 일이 ① 앞에서 말한 예언을 말하는지(Gloag), ② 예언을 포함하여 19절에서 거론된 모든 성령의 은사를(Ellicott, Frame) 말하는지에 대하여 이견이 있으나 후자로 보는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 또한 '헤아린다'는 헬라어 '도키마제테'( )는 참과 거짓을 식별한다는 뜻으로서(2:4) 모든 성령의 은사라고 불리우는 일들에 휩쓸려 들어가지 말고 냉정한 분별력을 가지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즉 바울은 성령의 신비한 역사를 귀중히 여기라고 하는(19절) 동시에 그것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서는 안된다 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초대 교회에는 영분별의 은사가 있었는데(고전 12:10) 바울이 여기서 반드시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 의미를 확대시켜서 성령의 은사를 추구하되 보편적인 수준에서 잘못된 일에 휩쓸리는 일은 없도록 하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5:22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 '좋은 것을 취하라'는 선행절의 내용과 긴밀하게 관련된 구절로서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식별하여 좋은 것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악은 철저하게 배격하라는 명령의 어조이다. 한편 본문은 '모양'(에이두스)을 '종류'로도 해석하여 모든 종류의 악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경고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또는 모양을 개역 성경과 같이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이란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 이는 대부분의 성경 문맥에서 사용되는 의미이기도 하다(눅 3:22; 요 5:37). 그러나 여기서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수용하여 겉으로 나타난 악한 모양이라도 거부하라는 의미인 동시에 모든 악은 그 자체를 철저하게 버리라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5:23,24 바울의 마지막 기도
본서 본론의 전반부(1:2-3:13)를 끝냄에 있어서 하나님께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한 중보 기도를 한바 있는(3:11-13) 바울은 이제 본론 전체를 끝내면서 다시 한 번 평강의 하나님께서 예수의 강림이 이루어져 역사적 종말이 되는 그 순간까지 성도들의 영육을 거룩하게 지켜주실 것에 대해 간구한다. 이것은 지금까지 바울이 교훈하였던 것을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이행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때만이 가능하다는 바울의 성숙한 신앙적 판단에 입각하여 기도를 드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의 성도에게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며 성결한 삶을 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되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이를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5:23 평강의 하나님. - 바울은 마지막 기도에 있어서 하나님의 여러 속성 중 특별히 '평강'을 거론한다. 이는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의 혼란과 핍박을 염두에 두고 그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에 대한 희망을 주기 위한 바울의 기교적 표현으로 보인다.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 여기서 '온전히'(홀로테레이스)는 '전체적'(Wholly)으로 번역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바울의 기도는 데살로니가 전체 교인의 성결함을 비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는 또한 '모든 것'이란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바울은 성도의 생활이 모든 면에 있어서 성결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 된다. 어떠한 해석을 취하든지 본문은 하나님이 성도의 성결의 주체가 됨을 보여 준다.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 바울은 인간의 영과 몸과 혼이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성화(sanctification)되어야 한다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교훈한다. 그런데 '영과 혼과 몸'이라는 표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매우 난해한 과제여서 이를 둘러싸고 상이한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인간의 구성 요소를 '몸과 혼과 영혼'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몸과 영혼'으로 볼 것인가 하는 논제였다. 전자를 '삼분설'(三分說, Trichotomy)이라 일컫고 후자를 '이분설'(二分說, Dichotomy)이라 칭하는데 이 구절과 더불어 이러한 논제와 연관된 몇 가지 학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 구절은 인간의 통일성을 나타내는 바울의 문학적인 표현법이기 때문에 이분설, 삼분설을 논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주장이다(Robinson). 둘째, 이분설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이분설의 견해에 따르면 '혼'과 '영'은 서로 동의어이며 '몸'이라는 물질적 요소에 대립되는 정신적 요소를 지칭한다고 한다(Strong, 고전 5:3; 고후 7:1). 이러한 이분설은 어거스틴으로부터 라틴 교회를 거쳐 중세 교회를 지배했던 사상일 뿐 아니라 종교개혁자들과 현대의 유력한 신학자들도 채택하고 있는 주장이다. 셋째, 삼분설의 학설로서 초대 교회의 교부들에 의해서 전통적으로 지지받던 견해이다. 이 세 가지 견해 중 삼분설은 헬라철학에서 발원하여(Plato) 초대 교회 교부들을 거쳐서(Irenius) 알렉산드리아와 헬라 문명권의 교부들에게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였는데(Chrysostom, Clement of Alexandria, Gregory of Nyssa) 후대에 이르러 독일과 영국의 신학자들 상당수가 이 견해를 지지하였다(Olshausen. Delitsch). 삼분설은 본절과 히 4:12의 증거에 기초하고 있으나 '혼'과 '영'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구별해내지 못한다는 결점을 노정시키고 있다. 삼분설의 입장에서 관찰한 '혼'(프쉬케)과 '영'(프뉴마)의 상이점에 대한 주장들은 이렇다. ① 혼(soul)은 동물적 생명작용이나 영은 불멸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교제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따라서 인간이 죽으면 몸은 부패하고 혼은 상실되지만 영은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이다. '혼'은 인간 외에 다른 동물들에게서 발견되는 감정, 감각 등을 주관하고 '영'은 인간에게만 특유한 이성과 의지, 양심을 관장한다. ② 인간의 구성요소는 본질적으로는 이분적이지만 내용상으로는 삼분적 이라는 주장이다. 혼을 영으로부터 유출된 것(Delitsch) 또는 영과 몸의 경계선인 그 무엇으로 본다(Beck. Oehler). ③ 영 가운데 고등한 능력(vis superior)은 '영'이고 저등한 능력(vita inferior)은 '혼'이다(Olshausen). 그러나 둘째 견해인 이분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상과 같이 '혼'과 '영'을 구별하려는 삼분설의 시도를 반박하면서 반론을 제기하였다. ① 욥 32:8과 전 12:7 등에서도 사람의 구성을 몸과 영으로 밝힌다. ② 혼과 영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개념이다. '영'도 동물적 생명을 지칭하는 경우가 있으며 하나님께 대해서도 '혼'이라는 용어가 적용되기도 하였다(전 3:21; 렘 9:9; 히 10:38; 계 16:13) ③ 앞의 주장과 유사한데 '혼'과 '영'이 서로 구별 없이 인용되었다는 것을 밝히는 견해이다(마 6:25; 고전 5:5). 즉 사람의 죽음은 '혼'이 떠나는 것이기도 하며(창 35:18; 왕상 17:21) 때로는 '영'이 떠나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시 31:5; 행 7:59). 이 같은 논리로 이분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삼분설을 배격한다. 또한 삼분설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준 본절과 히 4:12의 표현을 인간의 구성요소를 말하기 위한 구절이 아니라고 일축하였다. 즉 바울이 본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성도들 삶의 전영역이, 더 본질적으로는 성도의 존재 자체가 전체성을 이루어 통일성을 보전하는 가운데 성화되기를 원했던 것이지, 인간을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들을 밝히려 했던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혼과 영이 중복되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보다 중요한 영혼적 요소를 바울이 반복적으로 표현하여 강조하려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다.
5: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 선행절의 마지막 어구(예수 그리스도‥‥원하노라)와 관련되어 성도가 흠 없이 그리스도의 강림을 받게 되는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을 보증하는 구절이다(고전 1:9; 딤후 2:13). 성도들의 성화(聖化)는 불완전한 인간의 노력과 더불어 자력으로는 성취될 수 없는 것이며 신실하신 하나님만이 이를 전적으로 성취시키신다는 사실이 본문에 분명히 드러난다. 즉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더불어 신실하심을 힘 입을 때 선택과 더불어 성화, 그리고 그 이후에 있을 영화(榮化)까지 가능한 것이다(롬 8:29,30). 이에 대해서는 그랜드 종합 교리 '구원론'을 참조하라. 한편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힘 입는 성도는 이를 본받아 하나님께 대하여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도 신실함을 가져야 한다(엡 1:1).
5:25-28 끝맺는 말
본서 전체를 마무리함에 있어서 본서는 다른 서신서에서 일반적으로 길게 나오는 추천의 말이나 개별적인 마지막 문안 인사는(롬 16:1-20) 없다. 그러나 마지막 인사와 축도로서 끝맺음을 함으로써 일반적인 서신서의 구성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형식미를 갖추고 있다.
한편 본문은 복음 전도자인 자신들을 위한 기도의 부탁과(25절), 형제들에 대한 성도로서의 문안 권면(26절), 회람 서신인 본서를 돌려가며 읽을 것에 대한 부탁(27절). 그리고 마지막 축도(28절)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바울은 비록 사도였으나 일반 성도들에 대하여 지체(肢體)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부름 받은 성도들과 더불어 교제를 나누고 주의 말씀이 더 널리 전파되기를 고대했다는 사실을 통하여 성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시사 받을 수 있다.
5: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 바울이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구절이다. 바울 자신은 사도요 남들을 가르치며 성결한 생활을 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소유한 자였으나 성도들에게 기도를 요청하였는데, 여기서 우리는 그의 겸손한 자세를 엿볼 수 있는 동시에 온전히 주님만 의지하는 신앙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본문에서 바울은 특별한 조건 없이 기도를 요청했으나 때로는 구체적인 제목, 즉 불신자들의 핍박을 이길 수 있도록(롬 5:3; 살후 3:2), 복음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도록(엡 6:19,20), 전도의 문이 열어지도록(골 4:3)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기도 하였다.
5:26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 서로 입을 맞추는 행위는 유대인들과 페르시아인 등 동방세계에 유행하던 관습으로(Herodotus) 사랑과 우정을 나타내는 표시였다. 성경 가운데에도 이러한 관습이 롬 16:16; 고전 16:20; 고후 13:11; 벧전 5:14 등 4회에 걸쳐 기록되었다. 한편 당시 관습으로는 높은 직위의 사람에게는 손이나 가슴에 입을 맞추고 동격의 사람에게는 입을 서로 맞추었는데 바울은 여기서 입 맞춤을 언급함으로써 사도인 자신과 수신인들을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표현했다. 한편 이러한 풍습은 교회에 유입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관습으로 정착되었다. 따라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서로 입을 맞추었다는 사실은 초대 교회 문헌에 빈번히 나타났으나(Martyr, Tertullian) 2-3세기에 접어들면서 이성간의 접촉에 따른 부작용 등 폐단이 노출되면서 서서히 소멸되었다. 13세기를 전후하여 서방교회에서는 이 풍습이 완전히 폐지되었고 동방 교회의 일부에서는 현재까지도 그 관습이 남아 있다. 삼상 25장 자료노트, '히브리인의 인사법' 참조.
5:27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 - 바울이 어떤 이유로 이렇게 말했는지에 대해서 다양한 추측들이 제기되고 있다. ①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 편지를 자기들만 읽고 성도들에게는 알리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으므로(Calvin, Theodoret), ② 교인들 가운데 불화가 생겨 바울의 권면을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Frame, Lightfoot), ③ 교인들 가운데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Findlay) 바울이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란 극히 엄숙한 형식을 갖추어 모든 사람이 편지를 읽기를 당부했으리라는 것이다. 이 외에도 공공예배에서 이 편지 낭독을 독려했다는 견해와(계 1:3) 바울의 사도로서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서 전체 성도들의 공개적인 낭독을 권장했다는 해석도 제시되었지만 모두 하나의 가능성으로 인정될 뿐이다. 아무튼 바울은 그의 서한이 데살로니가 성도들 모두에게 읽혀지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문맹률이 매우 높았고 문서를 여러 장으로 복사하기 위해서는 일일이 손으로 쓸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다수의 사람이 바울의 서한을 읽기는 곤란했을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의 편지가 이런 식으로 제한된 소수에게만 읽혀지는 것을 염려하여 간절한 어조로 모든 형제들에게 낭독해줄 것을 부탁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5:2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 서신을 결말 짓는 바울의 축복 기도이다. 바울은 서신을 끝내는 시점에 이러한 내용의 축도를 자주 베풀었는데 (롬 16:20; 갈 6:18; 빌 4:23; 살후 3:18) 간혹은 이보다 더 축약된 내용으로 기도가 드려지기도 했다(골 4:18; 딤후 4:22). 한편 본문에 나오는 '은혜'라는 용어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성격이 하나님의 은혜만을 힘입어야 함을 대변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바울은 서신의 초두와(1:1) 말미에 동일하게 '은혜'를 언급함으로써 이 사실을 특징적으로 나타낸다. 한편 축도문 가운데 가장 완비된 형식은 고후 13:13에 나타난다. 여기에는 성삼위의 이름으로 기원함이 나타나 있는데 이러한 형식은 오늘날 목회자들이 축도함에 있어서도 보편적으로 인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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