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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불의한 부자에 대한 경고와 인내 맹세 금지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본서의 종결부로서 서신서의 전형적인 종결부 양식에서 볼 수 있는 끝인사는 생략한 채 지금까지 성도의 신앙 성숙과 교회 공동체의 공고한 결속을 도모하도록 하기 위해 본서 본론 1:2-4:17까지에서 제시한 일련의 실천적 교훈들에 이어 결론적 권면 5가지를 제시함으로써 돌연히 본서를 종결짓고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본장의 세부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1-6절은 현 세상에서 일신의 안락과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불의까지도 서슴지 않고 행하는 불의한 부자에 대한 심판의 경고를, 7-11절은 선 ․ 악간에 심판하실 주의 재림이 임박하였으므로 고난 중에 믿는 형제들 간에 서로 원망하지 말고 인내함으로 모든 고난을 극복하라는 권면을, 12절은 함부로 맹세하는 행위를 금하는 내용을, 그리고 13-18절은 육체의 질병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외적 고난을 당할 때 당사자 자신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 전체가 함께 중보 기도하라는 권면을, 끝으로 19,20절은 진리에서 떠나 미혹에 빠진 형제를 돌아서게 하라는 권면을 기록하고 있다.
이제 본장 각 문단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개관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실로 의미 심장한 구속사적 의의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첫째, 1-6절에서 우주와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인생은 유한하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일신의 안일만 추구하는 자들은 필연코 임할 역사의 끝 날에 있을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삶의 모습은 인간의 역사의 종말을 믿지 않으며 심지어 역사의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존재까지도 부인하는 불신자들의 전형적인 삶의 모습이거니와 이 모든 사실을 믿으며 그리스도의 복음(the Gospel of Christ)을 신앙의 본질로 하고 있는 우리 성도들에게서조차 이러한 삶의 모습은 없는지 실로 깊이 돌이켜 볼 일이다.
둘째, 7-11절에서 성도가 현 세상에서 사는 동안 어떤 종류의 고난이든 고난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지금 현 세상은 그 옛날 먼저 그 자신이 하나님께 도전하여 타락하였고 첫 사람 아담까지 유혹하여 범죄에 동참시킨 사단(Satan)이 공중 권세를 잡고 있다(엡 2:2). 이런 상황은 선과 악, 하나님의 자녀와 사단의 자녀가 확연히 구분되는 세상 끝 날이 오기까지 지속될 것이다(벧후 3:8,9). 왜냐하면 하나님께선 타락한 이 세상의 오고 오는 세대 중에서 택한 모든 하나님의 백성(God's People)이 당신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진행하신 구속 사역을 믿고 회개하여 구원 얻을 충분한 기회를 얻게 하시고자 사단과 세상에 대한 심판도 함께 유보하는 장구한 구속사(救贖史)가 현 세상에서 진행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침내 택한 백성이 모두 회개하여 구원을 얻고 하나님이 마침내 사단과 세상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세상 종말이 오기까지는 하나님의 구원 진리를 믿는 성도들을 향한 사단의 핍박과 그로 인한 성도의 고난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구속사의 전개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간적 핍박이 올 때 주에게서 성도들에게 베푸실 영원한 구원과 축복들을 기억하여 두려워하거나 넘어지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여야 할 것이다. 더더욱 이러한 고난은 성도 개인의 믿음의 연단을 위해 주어진 것인 줄 알고 기쁘게 인내로 극복할 것이며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으로 인하여 다른 형제들을 원망하는 어리석음은 결단코 버려야 할 것이다. 이는 고난 중에 교회 공동체가 깨어지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사단의 궤계에 따른 것이다. 실로 주의 재림(Parousia)이 임박한 말세지말을 당하며 더욱 큰 고난이 예상되는 현대를 사는 성도들에게 있어 고난 중에 가져야 할 이 같은 구속사적 삶의 자세는 자신의 성숙과 교회 공동체의 일치를 위해 더욱 절실히 요청된다 하겠다.
셋째, 12절의 맹세에 대한 경계의 내용으로 볼 때 과도한 맹세 행위는 결국 하나님의 주권을 넘어 자신의 교만과 욕심을 드러내는 것인바, 이는 성숙한 성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인정하며 주께 순종하는 신본주의적(神本主義的) 삶의 자세의 필요성을 분명히 인식케 하는 것이다.
넷째, 13-18절에서 고난 중에 있는 성도를 위한 교회 공동체 전체의 중보기도(仲保祈福)는 곧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대한 절대 신앙을 중심으로 서로 돕고 위로하는 일치된 모습을 위하여 반드시 요청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일치된 모습으로 나아오는 당신의 백성들의 기도에 하나님께서도 기적으로 역사하실 것이다. 이처럼 수평적으로 성도들 간에 그리고 수직적으로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교제는 실로 태초부터 종말까지 이어지는 구속사의 본질이며 구속 사역의 궁극적 목적이라 할 수 있다.
끝으로 19,20절에서 성도(Saint)는 비록 법적으로는 의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죄성을 지닌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 중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때로 일시적으로 진리를 떠나 미혹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주변의 믿는 형제들이 일시적으로 범죄에 빠졌다 할지라도 그를 도외시해서는 안 될 것이며 미혹된 상태에서 돌아서게 하여 함께 천국 구원에로 나아가도록 사랑과 권면으로 도와야 할 것이다. 이것이 실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된 성도들 간에 반드시 있어야 할 바른 구속사적 삶의 자세인 것이다. 현재 내 주변에는 나 자신이 방관하거나 도외시하고 있는 형제들은 없는가? 그들이 진리에서 떠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마음조차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은 아닌가? 이 시간 깊이 반성해 마지않는다.
외울 말씀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약 5:13)
불의한 부자 경고
1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2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4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5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6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고난 중의 인내에 대한 권면
7 ○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맹세에 대한 경계
12 ○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
중보 기도에 대한 권면
13 ○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18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미혹된 자를 구할 것에 대한 권면
19 ○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20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본문 & 자료노트
원어 연구 -5:16, 고하며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엑소물로게이스데'( )이다. 이는 '엑소몰로게오'( )의 현재 명령 중간태형이다. 여기서 '엑소몰로게오'는 어떤 사실에 대해 '인정하다'(요 1:20; 행 23:8), 고백하다'(요 9:22; 행 24:14)라는 뜻의 '호물로게오'( )와 '밖으로'라는 뜻을 갖는 전치사'에 에크'( )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엑소몰로게오'는 자신만의 비밀로 감추고 있던 어떤 사실을 사람들 앞에서 솔직하게 밖으로 내놓고 이야기한다는 의미의 '고백하다'가 된다. 그리고 한글 개역 성경에서도 이 단어를 주로 '자복하다'(마 3:6; 막 1:5; 행 19:18). '시인하다'(빌 2:11; 계 3:5)라는 말로 번역하였다.
한편 헬라어 문법에서 중간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하다'로 해석된다. 그리고 명령형에서 현재 시제는 어떤 동작을 계속해서 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엑소몰로게오'의 명령형 현재 중간태인 '엑소몰로게이스데'는 문자적으로 '자신을 위하여 계속해서 자백하라'는 뜻이 된다. 즉 본문에서 이 단어는 믿는 형제들 간에 서로 잘못하는 일이 생길 때마다 공개적으로 자신을 위해 자신의 잘못을 자백하고 용서함을 받으라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믿는 형제에게 자신이 잘못한 일을 고백하는 것은 그 형제와의 화목을 위해, 나아가서는 자신과 하나님과의 화평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도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전에 먼저 믿는 형제들과 화해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마 5:23,24).
주요 주제 - 5:7-11 신앙과 인내
본문은 야고보가 당시 불의한 부자들로부터 당하는 고난(苦難), 또는 신앙생활 중 직면하게 되는 여러 종류의 고난을 받는 유대인 성도들에게 인내함으로 그 고난을 극복하도록 권면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성도가 신앙생활 중에 반드시 가져야 할 인내(認耐)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것인바 여기서 신앙과 인내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성도에게 요구되는 두 종류의 인내
하나님께 대해 신앙을 가진 성도에게는 두 가지 종류의 인내가 반드시 요청된다 하겠다. 그것은 첫째, 소극적인 측면에서의 인내이다. 이는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외부적으로 받게 되는 여러 종류의 고난을 인내하는 것을 가리킨다. 신앙을 가진 성도는 작게는 불신자들과 가치관의 면에서나 생활양식의 면에서 서로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인하여 사소한 불편과 소외 등의 고통을 겪게 된다. 그리고 보다 크게는 세상 끝날 대 박해를 위시하여 악한 세상으로부터 여러 가지 핍박과 고난을 받게 되는바 이를 신앙으로 인내하는 자세가 절대 요청 된다.
둘째 적극적인 측면에서의 인내이다. 하나님께 구속함을 받은 성도라면 누구에게나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사명이 있다. 이를 위해 성도들은 믿는 형제는 물론 세상 사람들에 대하여 선한 행실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여야 하며(마 5:13-16)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의 지상 대명(the Great Commision)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행 1:8).
그런데 이러한 사명을 수행코자 할 때 공중 권세 잡은 자 사단(엡 2:2)의 지배 하에 있는 세상의 냉담함 때문에 이웃 전도에 대한 당장의 가시적 효과가 없음으로 인하여 실망하게 되는 심적 고통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고통에 대해서도 성도는 반드시 인내해야 하는 것이다.
2. 의의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성도에게 인내는 필수적이다. 소극적인 면에서나 적극적인 면에서의 성도의 인내는 모두 성도 자신의 신앙의 연단을 이루는 것으로(롬 5:4) 신앙 성숙의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환난을 당할 때 성도는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믿음 안에서 양육하심에 있어서도 나의 실수를 얼마나 참으시고
크신 사랑으로 계속하셨는지를 생각하면서 큰 인내로 믿음의 열매를 맺도록 힘써 야 하겠다.
5:1-6 불의한 부자에 대한 경고
본장은 본서의 결론적 권면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모두 다섯 개의 독립적인 교훈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본서의 교훈집적 성격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낸다 할 것이다. 이러한 본장의 첫 단락에 해당하는 본문은 불의한 부자에 대한 경고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은 구약의 선지자들의 논조(암 4:1-3; 미 2:1-5)를 반영하는 듯 매우 강력하고 공격적인 어조로 기록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제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야고보는 부자들을 향하여. 그들에게 임할 고생으로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한다(1절). 이어 야고보는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로 네 가지를 들고 있다(2-6절). 그것은 첫째, 자신들의 세속적인 욕망을 채우기에 급급해서 자신들의 눈 앞에서 추위에 떨며 굶주리는 자를 돌보지 않았다(2절). 둘째. 품꾼들에게 정당한 품삯을 지불하지 않고 착취하는 등 불의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았다(4절). 셋째, 불의하게 축적한 재물로 영혼을 강팍하게 하고 파멸시키는 도덕적 방탕한 생활에 몰두했다(5절). 넷째, 부를 이용하여 의로운 자를 죽이는 죄악을 범했다(6절).
사실 재물 그 자체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선하다. 문제는 바르지 못한 재물관(財物觀)과 그 재물의 취득 방법 및 사용 방법이 잘못된 데 있다. 즉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고 불의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거나 또는 모은 재물로 단순히 일신의 쾌락을 위해 쓸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 재물을 이용하여 악을 도모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에 본문에서 야고보는 불의한 부자들에 대한 책망을 통하여 재물에 대한 성도의 바른 자세에 관한 일련의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물을 허락하신 이유는 재물의 바른 사용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있으며 개인의 안락을 도모하는데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된 자들로서 그분의 소유를 그분의 선한 뜻에 따라 사용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눅 15:9-13).
➁ 재물의 바른 사용은 곧 그에게 참 믿음이 있다는 증거가 되며 그에게는 하늘의 영원한 축복이 보장된다(마 6:19,20; 요일 3:17).
➂ 재물의 바른 사용도 중요하지만 바른 획득 방법은 더욱 중요하다. 재물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할 것이라는 분명한 인식이 있다면 또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재물을 얻고자 힘쓸 것이다.
④ 말세를 대비하는 성도의 바른 신앙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3절) . 그렇지 아니하고 일신의 쾌락을 추구하며 오직 재물 축적에만 힘쓸 때 그는 도살할 날을 위하여 살찌우는 짐승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잠 11:4).
5:1 들으라 부한 자들아. - 본절은 부자들을 훈계하는 말씀보다는 그들의 사악함으로 인해서 현재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말씀이다. '부한 자들'(호이 플루시오이)은 단순히 물질적으로 부유한 자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치관이 세속적이며, 경건하고 연약한 자들을 핍박하는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 여기서 '임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페르코메나이스'( )는 '임하다'(에페르코마이)의 현재 중간태 분사로 미래적 사실을 현재적 사실인 것처럼 묘사함로써 부자들에게 임할 고생의 임박성을 한충 강조하고 있다. 즉 부자들은 그들의 부귀영화가 영원히 계속되리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이 부지불식간에 그들에게 임할 것이다. 한편 '고생'(탈라이포리아)이라는 말은 본래 현재적 고난을 가리키는 말이나,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있을 대 환난에서 악인들이 받게 될 환난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Afford, Mayor).
울고 통곡하라. - 이는 회개를 촉구하는 말이라기보다는 부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의 선고이다. 여기서 '울다'(클라이오)라는 말은 우는 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로 우는 것을 가리키며, '통곡하다'(을롤귀조)는 울음소리에서 나온 의성어로 슬프게 울부짖는 것을 가리킨다.
5:2,3 너희 재물은 썩었고‥‥녹이 슬었으니. - 야고보는 부한 자들이 재앙을 당하는 이유를 그들의 죄악상을 열거함으로써 설명한다. 본문에 열거된 것 가운데 '재물'(플루토스)은 당시 부의 척도가 되었던 곡식을 가리키며, '옷'과 '금과 은' 이 세 가지는 모두 당시의 세속 물건을 대표한다. 그런데 이런 물건이 모두 상해서 쓸모없게 되었다는 것
은 그들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데 급급해서 자신들의 눈앞에서 추위에 떨며 굶주린 자들을 돌보지 않았음을 말해준다(약 2:16). 그런데 여기서 '금'과 '은'은 녹이 슬지 않는다. 따라서 학자들 간에는 '녹이 슬었으니'(카티오타이)라는 말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을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① '카티오타이'라는 말은 '녹이 슬다'라는 의미 외에 '어두워지다'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Mayor). 즉 여기서 '카티오타이'는 금과 은이 빛나지 않고 더러워진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② '카티오타이'는 재산이 무가치하게 된 상태에 대한 상징적 묘사라는 것이다(Ropes, Clarke). 이 중 후자의 견해가 합당하다. 사실 금이나 은으로 대표되는 재물은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이웃을 위해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소유하려고만 한다면 그것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본래의 의도에 어긋나는 것이다. 또한 사용하기 위해서 있는 금과 은을 소유하고만 있다면 그것은 금과 은을 아무런 가치가 없는 돌덩이로 만드는 지극히 어리석은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마 6:19)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명심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을 청지기적 자세로 선용함으로써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야 할 것이다(마 6:20).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 부자들의 창고에서 쓸모없게 된 물건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는 증거물이 된다. 이 증거로 인해서 그들의 죄악은 변명의 여지가 없으며 결코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여기서 '녹이‥‥너희 살을 먹으리라'는 표현은 탐욕스런 부자들의 죄악이 그 자신들을 멸망시키는 원인이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세벨이 나봇의 포도원을 불의하게 탈취한 장소에서 그의 살을 개에게 뜯긴 사실에서 본 교훈의 구체적 예시를 보게 된다(왕하 9:36). 한편 '불'은 하나님의 진노의 상징으로(신 21:9)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는 표현은 자기만족만을 위해서 재물을 쌓아 두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급박하게 임할 것임을 나타낸다.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 이는 주님을 찾아야 할 종말의 때에 주님을 찾지 않고 오히려 쌓아둬 봤자 아무런 쓸모없는 재물을 쌓았다는 말이다. 이는 세상 재물에 마음을 빼앗긴 부자의 어리석음과 그들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를 제공해 준다. 그래서 흑자는 말세에 재물을 쌓는 것은 자신에게 임할 형벌을 쌓는 것과 같다고 했다(Calvin, Ropes).
5:4 보라. - 야고보는 부자들의 죄를 입증하며 그들이 부유하게 된 원인을 말한다. 여기서 '보라'(이두)는 이 서신을 읽는 자들의 주의를 끌어 경고하려는 표현이다. 즉 본절에서부터 야고보는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아니하는 부자들에게 경고의 말을 시작한다.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싻이 소리 지르며. - 본절에서는 지주들이 품꾼들에게 정당한 삯을 지불하지 않은 사실을 지적한다. 여기서 '주지 아니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 스테 레 메노스' ( )는 '기만하다'를 의미하는 '아포스테레오'( )의 완료 수동태 분사로 여러 가지 속임수로 품꾼들을 속여 삯을 지불하지 아니한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삯이 소리 지르며'라는 말은 삯을 받지 못한 품꾼들이 원통해하며 원수 갚기 위해 절규하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추수한 자의‥‥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 삯을 받지 못한 품꾼들의 절규하는 소리가 전능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상달되었다는 말이다. 특별히 여기서 '들렸느니라'( 에이셀렐뤼단)는 말은 완료형으로서 ① 품꾼들의 호소가 이미 하나님께 상달되었으며 ② 부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결국 탐욕함이 가득한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명백하게 나타낸다.
5:5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 계속해서 부정한 방법으로 축적한 부를 오용하는 죄를 말한다. 그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축척한 부를 이용해서 먼저 사치와 쾌락이 가득한 삶을 살았다. 여기서 '사치'는 세상 정욕을 위한 방탕한 생활을 말하며, '연락'은 영혼을 강팍하게 하고 파멸시키는 도덕적으로 방탕한 생활에 몰두함을 말한다. 이러한 죄악은 물질이 부유한 자들이 저지르기 쉬운 것들이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러한 부자들의 즐거움을 '땅에서'(에피 테스 게스)라는 말로 한정시킨다. 이 말은 부자들의 즐거움에 가득찬 삶은 이 육신을 입은 세계에만 한정되며 주의 날에 이들에게는 고통과 재앙만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본문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연상케 한다(눅 16. 19-31).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 여기서 '도살의 날'(엔 혜메라 스파게스)은 일반적로 종말에 임할 '심판의 날'을 가리킨다고 본다(Ropes, Oesterley). 그리고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라는 말은 이 땅의 쾌락과 연락에 빠져들어 마음이 무감각해지고 우둔해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본절은 부자들이 마치 소나 양들이 자신들의 도살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자신을 살찌우듯,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기억지 아니하고 현재의 삶 가운데서 자신들의 육신적 쾌락과 즐거움에만 몰두해 있음을 풍자적으로 묘사한 것이다(Robertson).
5:6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 부자들이 행한 최고의 죄악상을 마지막으로 말한다. 여기서 '정죄하다'(카타디카조)와 '죽이다'(포뉴오)는 모두 법정 용어이다. 즉 법정의 판결에 의해서 정죄함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음을 말한다. 이는 부자들이 법정까지 완전히 장악하여 그들의 뜻대로 하였음을 시사한다. 한편 죽임을 당한 '옳은 자'(톤 디카이오스)에 대해서는 ①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킨다는 해석 (행 3:14, Fenillet)과 ➁ 예수 그리스도와 신앙을 위해서 고난과 죽임을 당한 수많은 신앙인을 가리킨다는 해석(Calvin, Ropes)이 있다. 전자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 단어가 단수로 표기되어 있어 어느 특정인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며 그가 곧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의 많은 곳에서 단수가 대표 단수로 쓰였음을 감안할 때(시 37:12; 사 3:10) 이 단어 역시 대표 단수로 보고 현재와 과거에 핍박받은 모든 신앙인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좋다. 초대 교회의 경건하고 가난한 신앙인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에 대해서 거의 법정에 호소하지 못했다. 혹시 법정에 호소했다 할지라도 변호자를 얻지 못했으며 통치자의 자비도 얻지 못하는 처지에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곤 하였다(Davis).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 저자는 '옳은 자'의 온유함과 연약성을, 힘과 부와 권력을 동원해 옳은 자를 죽이는 부자들의 죄악성과 대조시켜 부자들의 불의함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5:7-11 고난 중의 인내에 대한 권면
앞 단락 1-6절에서 불의한 부자들에 대한 심판의 경고를 준 데 반해 본문에서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 핍박을 받는 성도들에게 주의 재림이 임박하였으므로 그때까지 핍박을 인내하라는 격려성의 권면을 주고 있다.
흑자는 본문을 앞 단락과 연결하여 여기서 핍박을 불의한 부자들에게서 받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핍박은 특정한 어떤 것을 가리킨다기보다 1:1-12에서 밝힌 바와 같이 디아스포라 지역의 유대인 출신 성도들이 받는 여러 가지 고난을 총칭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주께서 재림하시기까지 불의한 이 세상에 잠시 머물러 사는 나그네와 같은 존재들이다(빌 3:20; 벧전 1:17). 때문에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과 이 세상의 가치관 가운데서 심한 혼란을 느낄 뿐만 아니라 때로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사는 불의한 사람들에 의해 박해를 받기도 한다. 본서의 수신자들도 그러한 박해로 인하여 심한 고난을 겪으며 심히 낙담하는 가운데 처해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1:2-12절 강해를 참조하라.
이에 야고보는 본문을 통해 성도들로 하여금 신앙을 버리지 말고 주의 재림 때까지 인내할 것을 권면하는데 인내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첫째, 현재의 고난의 삶을 역전시킬 수 있는 주의 재림(Pamusia)이 가깝기 때문이다(7-9절). 농부가 파종을 하고 수확을 하기까지는 오랫동안 기다려야만 한다. 그리고 농부는 그 기다리는 동안 여러 자연적 재해 등과 싸워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부가 인내할 수 있는 것은 귀한 열매를 거두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고난을 인내해야 할 이유도 인내 끝에 영광이 있기 때문이다(시 126:6; 롬 8:17,18). 그런데 이러한 영광은 주의 재림을 통해 얻게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재림이 가깝다는 사실은 성도들이 고난을 인내하며 믿음을 더욱 굳게 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둘째, 신앙의 선배들이 본을 보였기 때문이다(10절),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며 악한 자들을 책망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함으로써 수없이 많은 박해를 받았다(왕상 22:24-2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신앙의 정조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인내했다. 그것은 그들이 하늘에 소망을 두고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어찌하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성도들 또한 영혼을 멸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이 세상의 모든 고난을 이겨야 한다(마 10:28). 셋째, 끝까지 인내하는 자에게 하늘의 축복이 예비되어 있기 때문이다(11절). 야고보는 이 사실을 욥의 경우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욥은 당대의 의인으로 원인모를 시험을 받아 고난에 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고난받기 이전보다 배나 되는 축복을 받았다(욥 42:10-17). 이 는 바로 끝까지 인내하는 성도가 받을 천국의 영원한 축복을 예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현재의 고난이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복되게 하기 위해 허락하신 방편임을 깨닫고 신앙의 선배들의 본을 따라 끝까지 인내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성도들은 심판자되시는 주께서 지금 문 밖에 와 계시다는 종말론적 자세를 가지고 우리를 위해 예비된 영광을 차지하기까지 어떠한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을 굳게 하고 흔들림 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9절; 계 22:20).
5: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 지금까지(1-6절) 부자들의 죄악성을 고발한 야고보는 이제 본절에서부터는 그들에 의해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 대해 격려의 말을 하고 있다. 본절은 경건한 신앙으로 인해서 부자들이나 압제자들에 의해서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참으라고 권고한다. 여기서 '길이 참으라'(마크로뒤메사테)는 말은 단순한 인내를 말하지 않는다. 이 '인내'(忍耐)는 확고한 신앙을 바탕으로 자신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불평하지 아니하며 복수의 마음 없이 오래 참음을 말한다. 한편 야고보는 이러한 인내의 기간을 '주의 강림'(파루시아 투 퀴리우) 하시기까지로 정하고 있는데. 이 강림은 주의 오심을 의미하며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행하실 심판이 내포되어 있다. 이 심판의 날에 핍박받은 신앙인들은 온전한 자유함을 얻고 반대로 성 도들을 핍박한 자들은 하나님에 의해 영원히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된다(살후 1:6-10).
우리 신앙인들이 시험과 환난을 참고 인내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할 수 있다.
보라 농부가 땅에서‥‥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 저자는 성도들이 인내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파종하고 수확을 기다리는 농부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농부는 밭에서 그 소출을 얻기 위해서 씨앗을 파종한 후 비를 기다리고 좋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면서 자기 할 일을 한다. 그는 씨앗을 파종한 후에 즉시 그 소출을 얻을 수 없다. 소출이 있기까지 농부는 일기의 불순함도 겪어야 하며 그 기간 동안 가족들도 풍부한 양식을 소유하지 못함으로 인해 곤궁함을 겪는다. 이처럼 농부가 고난을 겪으면서 좋은 소출을 기다리듯이 성도들도 장차 누리게 될 큰 기쁨을 기대하며 현재의 고난을 인내해야 하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이른 비와 늦은 비'는 팔레스틴의 기후와 관련된 말로 본서가 팔레스틴에서 기록되었다는 유력한 중거가 되기도 한다. 아무튼 여기서 '이른 비'는 보리 파종 직후인 10,11월 경에 오는 비를 말하며 '늦은 비'는 추수 직전인 3,4월경에 오는 비를 말하는데, 이 두 비는 팔레스틴의 농경에서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신 11장 자료노트.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이러한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오순절 때 강림하신 성령과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있을 성령의 크신 역사의 좋은 예표라 할 수 있다.
5: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 야고보는 다시 한 번 신앙에 굳게 서서 인내를 온전히 이를 것을 강조한다. '굳게 하라'(스테릭사테)는 핍박에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 위에서 소망을 쓴지 말라는 말이다(시 112:8), 그런데 이처럼 인내를 강조한 이유는 당시 수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로 애매히 당하는 고난이 심했기 때문이다(6절).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 성도들이 고난을 인내하며 신앙을 굳게 지켜야 할 이유이다. 여기서 '가까우니라'(엥기켄)는 현재 완료형으로 현재 오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야고보가 이처럼 주의 재림이 매우 가까운 것으로 표현한 이유는 실질적으로 그리스도의 오심이 시간적으로 얼마 남지 않았음을 나타낸다기보다는 이 서신의 수신자들에게 긴박감을 주기 위해서이다. 즉 본절은 성도들로 하여금 현재의 삶을 각성케하여 바르게 살도록 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는 표현이다. 하여튼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까지 고난을 참고 견디는 자는 인내의 열매인 축복을 거두게 될 것이다(11절).
5: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 인내와 원망은 대조적인 현상이다. 인내를 하지 못할 때 원망은 터져 나오기 마련이다. 따라서 인내의 결실을 맺기 원하는 자는 절대로 원망을 해서는 안된다.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 '비판을 받지 아니 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는 주의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구절이다. 형제를 원망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 - 심판의 장소를 말한다기보다는 심판이 임박했음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여기서 심판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의 권세를 받으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마 24:33; 요 5:22).
5: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 7절의 농부의 비유에 이어 본절에서는 선지자들을 예로 들어 인내를 강조한다. 여기서 '선지자들'(프로페타이)은 구약의 선지자들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며 악한 자들을 책망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함으로써 수없이 박해를 받았다(왕상 22:24-2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신앙의 정조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소망을 가졌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성도들의 훌륭한 본이 된다 할 것이다.
그런데 야고보가 이처럼 예를 들어가면서까지 인내를 강조한 이유는 현재의 고난 때문에 신앙의 기초가 흔들리고 있는 수신자들에게,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고난은 필연적으로 닥치는 것이며 그에 대한 인내의 삶도 필요함을 말하기 위해서이다(롬 8:17).
5:11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 마 5:11의 반영이자 약 1:12의 반복이다. 여기서 야고보는 인내의 열매인 축복을 언급함으로써 성도들이 인내해야 할 또 다른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인내하는'(휘포메이난타스)은 과거분사형으로 과거에 하나님을 위해서 신앙을 잃지 않고 고난을 견디었을 뿐 아니라 그 고난 가운데서 온전한 신앙을 끝까지 나타내는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인내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은 그의 생애 동안은 유보되며 오직 그들이 죽어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갔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참된 복을 받는다. 또한 이 신앙의 선배들은 현재의 사람들로부터 '복되다'(마카리조멘)는 칭찬을 듣는다. 여기서 저자가 '복되다'는 동사를 현재형으로 쓴 이유는 고난을 참고 견딘 신앙의 선배들이 그 후대 사람에게 칭찬을 받듯이 본서신의 수신자들도 현재의 고난을 끝까지 참고 견디면 하나님의 참된 복과 함께 후대 사람에게 칭찬을 받을 것임을 말하기 위해서이다(마 10:22).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주는‥‥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 고난을 참고 견디어 신앙을 지킨 자의 대표적인 예로 욥을 들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왜 욥이 대표적인 인물인가를 이해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욥은 극심한 고난을 받는 중에 하나님에 대해 심한 불평을 토로한 사람이기 때문이다(욥 7:11-16). 그러나 야고보는 비록 욥이 불평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그의 중심에서 신앙의 빛이 꺼지지 않았음을 중시한다(Barclay). 그래서 욥은 고난을 끝까지 인내한 신앙의 본이 되는 인물인 것이다. 이 인내의 결과로 욥은 하나님께서 주신 '결말'(텔로스)을 보았다. 이 '결말'을 욥이 고난을 받은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물질적 축복(욥 42:10-17)을 가리킨다고 해석하기도 하나(Moo) 이는 앞의 해석과 서로 모순된다. 따라서 이 축복은 신앙인의 사후에 혹은 그리스도의 강림한 후에 받게 될 최종적인 복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 그리고 욥이 생전에 받은 축복은 인내하는 삶을 사는 자에게 주어질 하늘 복의 예시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그런데 야고보가 욥에게 극심한 고난을 가져다주신 하나님을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로 표현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욥이 극심한 고통을 이겨 내도록 사랑과 은혜를 주셔서 욥으로 하여금 최종적인 축복을 받도록 인도하셨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현재의 신앙인들도 고난을 받지만 하나님은 성도들을 지키고 보호하사 능히 이기고 승리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함으로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5:12-18 맹세 금지 및 기도에 대한 권면
불의한 부자에 대한 경고(1-6절) 및 고난 중의 인내에 대한 권면(7-11절)에 이은 본문은 본장에 언급된 세 번째와 네 번째 교훈으로 맹세 및 기도에 대해 교훈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먼저 맹세에 대해 교훈하는 부분이다(12절). 여기서 야고보는 성도들에게 맹세를 엄히 금하고 있는데 이는 산상 수훈(山上垂訓)의 마 5:33-37과 그 내용을 같이한다. 따라서 본문에 언급된 맹세와 관련된 교훈의 의미와 영적 교훈에 대해서는 마 5:33-37 주석을 참조하라.
다음으로 기도(祈禮)에 대해 교훈하는 부분이다(13-18절). 야고보는 여기서 먼저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기도할 것을 권면한 후에(13절), 특별한 문제의 하나인 질병에 걸린 자에 대해 성도들이 취해야 할 자세를 설명함으로써 고난에 직면한 성도들은 이를 합심 기도로 극복해야 함을 강조한다(14-16절). 또한 엘리야의 기도를 예로 들어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주지시킴으로써(17,18절) 성도들이 직면한 문제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이 기도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 앞서 7-11절에서 야고보는 소극적인 측면에서 인내로 고난을 이기도록 권면했거니와 여기서는 적극적인 측면에서 기도를 통해 고난을 극복하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성도들이 홀로 고난을 극복하며 주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은 지극히 힘든 일이다. 따라서 성도들에게는 서로가 서로를 도움으로 고난을 함께 극복해 나가는 신앙 자세가 필히 요청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은 각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각각 상이하며 다양하다. 그리고 성도들은 직접 고난당하는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이런 경우에 성도들은 중보 기도를 통해 고난에 처한 자들을 도울 수 있다. 즉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로 연합된 존재이기 때문에 각자의 다양한 경험 속에서도 기도를 통해 서로를 도울 수 있는 것이다. 특별히 합심하는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큰 바 이는 고난을 이겨내는 큰 힘이 된다(마 18:19; 행 12:12), 그러므로 성도들은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고 위하여 기도하되 특별히 고난당하는 자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이다.
5:12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죄 정함을 면하라. - 본절은 맹세에 대한 교훈으로 산상수훈의 마 5:33-37과 그 내용이 같다. 따라서 본절의 의미에 대해서는 그곳 해석을 참조하라.
5:13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저는 찬송할지니라. - 야고보는 자문자답을 통해 성도들이 고난과 즐거움에 각각 처했을 때의 자세를 교훈하고 있다. 그런데 야고보가 이처럼 '고난'과 '즐거움'을 본문에서 언급한 이유는 사람들이 이 두 상황에서 쉽게 실족하기 때문이다. 즉 세상 사람들은 고난을 당할 때 쉽게 낙담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일이 잘되어 즐거울 때는 모든 공을 자기에게 돌리며 하나님 앞에 교만히 행한다. 그러나 성도들의 삶은 그와 반대가 되어야 한다. 즉 성도들은 고난을 당할 때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를 애쓰며 그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고, 일이 잘되어 즐거울 때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을 드려야 하는 것이다.
특별히 '기도와 찬양'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행위를 포괄하는 말로, 본절은 결국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경배하기를 그치지 말라는 권고임을 알 수 있다.
5: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 전절에서 고난을 기도로 극복할 것을 권면한 야고보는 본절에서부터는 특별한 문제의 하나인 '질병'을 예로 들어 고난에 직면한 성도들이 기도로 극복해야 함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병든 자'(아스데네이)는 '약해지다'(아스데네오)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말로 육신적으로 연약한 상태에 있는 자를 가리킨다.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 야고보는 병든 자에게 교회 장로들을 청하라고 권면한다. '장로'(프레스뷔테로스)는 '감독' 또는 '목사'(엡 4:11; 딤전 3:1)와 같은 직분으로 여기서는 교회의 대표를 가리킨다. '장로'에 대해서는 딤전 3장 연구자료, '교회 직분의 이해'를 보다 참조하라.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기는 것은 야고보가 왜 의사를 청하라고 하지 않고 장로를 청하라고 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의 권면은 결코 의사를 청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야고보는 다만 우선순위를 말하는 것이다. 즉 의사들을 청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찾을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신앙인이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 안에서 해결책을 찾으려하기보다 세상에서 찾으려 하는 것은 지극히 잘못된 것이다(대하 16 :12).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만나면 세상에서 그 방법을 찾다가 모든 희망이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에 구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혹자는 본절에 '교회'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근거로 내세우며 본서가 교회의 조직이 완성된 후인 후대의 저작일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본서에는 '교회'라는 말과 함께 성도들의 집회 장소로 '회당'이라는 말도 사용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약 2:2) 본서는 성도들의 집회 장소에 대한 명칭이 회당에서 교회로 전환되는 시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본서의 기록 시기에 '대해서는 본서 서론을 참조하라.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 청함 받은 장로들이 병자를 위해 해야 할 첫 번째 일이다.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는 것은 고대 사회의 관습으로(사 1:6; 눅 10:34) 보통 치료적인 효과를 얻기 위한 것이지만, 여기서의 기름은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는 것으로 병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상징적 행위로 요청되었다. 즉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는 것은 치료의 결과에 관계없이 약한 자가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의 사역이 실행됨을 알게 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한편 이 구절을 근거로 하여 카톨릭에서는 8세기 이후 죽어가는 자에게 죄에 대한 사죄의 표시로서 7성례 중의 하나인 '종부성사'(終傳堅事)을 행하게 되었는데, 이는 야고보가 말한 본래의 의도와는 무관하다고 할 것이다.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 청함 받은 장로들이 해야할 두 번째 일이다. 본 구절을 직역하면 '위에서 기도하라'이다. 이는 구약 시대 선지자들이 병자의 몸 위에 엎드려 기도하던 의식을 반영한 것이다(왕상 17:21; 왕하 4:34).
5:I5 믿음의 기도는‥‥사하심을 얻으리라. - 병든 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기름이 아니라 기도임을 말해준다. 장로들의 믿음의 기도로 말미암아 병자는 '구원'(소세이)을 받는다. 이는 종말론적인 구원이 아니라 병자가 회복됨을 의미한다(막 5:23). 또한 주님께서 '일으키시리라'(에게레이)도 이와 동일하게 육체적인 질병의 치유를 말한다(마 9:5-7). 한편 저자는 본절의 후반절에서 명확하게 죄와 질병의 관계성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 연관의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Martin). 즉 죄를 '범하다'(페포이에코스)는 완료분사로서 과거의 행동이 현재의 상태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야고보는 이 병이 죄와 관계가 있을 경우 장로의 회개의 기도가 병을 치료하는 결과를 낳을 것임을 말한다. 그런데 본문에서 '구원하다', '일으키다', 그리고 '사하다'의 모든 동사가 미래형으로 표기되었는데 이는 종말에 일어날 현상을 말한다기보다는 믿음의 기도로 인해 하나님께서 치유의 은혜를 베푸실 것임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하여튼 본절은 모든 질병의 원인이 죄에 있지는 않다 할지라도 일부는 죄가 그 원인이 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동시에 그러한 죄에 의한 질병은 믿음의 기도로 치유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 본절은 14절에 언급된 병자의 병의 원인이 죄에 있으며 죄 때문에 병이 낫지 않음을 암시해 준다. 이러한 생각은 고대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구약에서 욥과 논쟁한 세 친구들도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즉 병의 원인이 죄에 있기 때문에 병의 치료를 위해서는 반드시 죄의 고백과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기도하라'(유케스데)는 말은 현재 명령형으로 기도가 계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말한다. 한편 카톨릭에서는 본절의 '서로 고하며'라는 말을 신자들이 사제에게 죄를 고하는 고해 성사의 근거로 삼고 있으나, 이는 고해 성사의 근거가 된다기보다는 개신교의 만인 제사장설의 근거가 된다. 이와 관련하여 만인 제사장설에 대해서는 벧전 2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 '의인'(디카이오스)은 초대 교회 내의 특정한 집단을 가리키지 않고 엘리야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한 신실한 신자를 가리킨다. 이러한 자들은 죄로 인하여 육신적인 질병을 앓고 있는 자를 위해 매우 능력이 있는 기도, 즉 하나님에서 '역사하는'(에네르구메네) 기도를 해줄 수 있다. 여기서 '역사하는'은 수동태로서 하나님께서 의인에게 치료의 능력을 부어주심을 명확하게 나타내며, 의인들을 중간 매체로 사용하셨음을 보여 준다. 특별히 여기서 우리가 유의할 점은 병자를 위한 모든 기도가 자동적으로 병을 치료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복음서나 사도행전에 많은 치유의 기사가 있었던 반면에 초대 교회의 도처에는 병자가 참 많았다(고전 11:30), 이를 볼 때 치유의 권한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음을 알 수 있다.
5:17,18 엘리야는 우리와 설정이 같은‥‥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 앞절에 대한 실제적인 예로 엘리야 선지자를 들어 그 말씀이 옳음을 수신자들에게 확신시킨다. 저자는 엘리야 선지자가 이 서신의 수신자와 같은 인간임을 분명히 말한다. 즉 '성정'(호모이오파데스)은 신적 본성과는 구별되는 모든 인간적인 본성을 말하는데 엘리야 선지자도 우리와 동일한 본성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엘리야 선지자의 행적(왕상 17,7 18장)에는 본절의 기도 내용이 명확하게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가뭄과 비에 대한 그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음을 볼 때 이 말씀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Calvin). 성경에서는 이처럼 역사의 실상을 기록하고 다른 곳에서는 그 상황을 묘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시 105:18; 딤후 3:8, Manton). 하여튼 왕상 18:1에서는 가뭄의 기간이 '제 삼년'으로 나와 있으나 본절에서는 '삼년 육 개월'로 나타나 차이가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왕상 18:1 주석을 참조하라, 그런데 야고보가 여기서 가뭄의 기간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땅의 열매 맺음을 기록한 것은 교회 내에서 소홀하게 취급당했던 병자들이 의인의 간구로 말미암아 회복된 후 신앙 공동체에서 아름다운 위치를 점할 것을 말해준다. 한편 엘리야 선지자의 예는 교회 내의 문제나 수신자들에게 고난을 가져다주는 외부 환경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은 기도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에 있음을 보여 준다.
5:19,20 미혹된 자를 구할 것을 촉구하는 권면
맹세를 금할 것과 고난을 극복하는 적극적인 방법으로 성도들이 합심하여 기도할 것을 권면한 지난 단락 12-18절에 이어 이제 야고보는 본문을 통해 미혹하여 진리에서 떠난 자를 구할 것을 권면함으로써 본서를 마무리 짓는다.
이러한 본문은 성도들의 합심 기도를 강조하는 13-18절과 연결하여 성도 간에 협력하고 도와주는 공동체적 신앙생활의 중요성을 깨우치기 위해 주어진 교훈이라 할 수 있다. 하여튼 초대 교회 당시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가 다시 유대교로 회귀하거나 여러 이단 사상에 현혹되어 진리에서 떠나 그릇된 길로 들어서는 자들이 많았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 교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공통적인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들을 미혹의 길에서 다시 돌아서게 하는 것은 주님의 구속 사업에 동참하는 것이요 그에게 가장 큰 사랑을 베푸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성도들 중에 누가 실족하여 진리에서 떠나면 그를 비난하고 정죄할 것이 아니며 그들을 돌아보고 다시 진리의 길에 돌아오도록 힘써야 한다. 특별히 성도들은 자신들 모두가 본래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감으로 죄에 미혹된 존재였으나(사 53:6)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어 우리를 죄악된 길에서 돌이켜 생명의 길에 이르게 하셨음을 기억하고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심정으로 미혹된 형제를 사랑과 열심으로 돌이킴으로써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부응해야만 할 것이다(롬 1:14; 8:12; 유 1:20-23).
한편 야고보는 당시 서신의 일반적인 형식인 마지막 문안 인사를 생략한 채 돌연히 미혹된 자를 구할 것을 권면하는 것으로 자신의 글을 끝내고 있는데. 이는 본서와 요한일서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형식이다. 아마도 야고보는 그의 권면의 긴박성을 나타내기 위해 마지막 문안 인사를 생략한 듯하다.
5:19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누가 돌아서게 하면. - 야고보는 그의 서신의 결말을 미혹하여 진리를 떠났던 자를 구하라는 권고로 맺는다. 여기서 '너희 중에'는 이 권고가 교회 내의 성도들에게 전하는 권고임을 말해준다. 이는 당시 수신자의 교회 내에 지금까지 살펴본 바대로 시기, 편견, 싸움 등의 많은 문제가 있었으며 많은 사람이 그러한 문제에 미혹되어 진리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혹하다'(플라나오)는 '헤매다'(마 18:12), '방황하다', '길을 벗어나다'(마 24:4; 계 20:3)는 뜻으로 진리와 도덕의 길에서 떠나 헤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본문에서 이 동사는 수동태형으로 표시되었는데 이는 사단의 영향에 의해서 당시의 많은 성도들이 우상 숭배나 도덕적 범죄 행위를 했음을 말해준다(막 12:24). 이러한 배교자를 다시 그리스도께로 돌이키는 행위는 하나님의 고유한 사역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회개시킬 때에 사람을 사용하신다. 야고보가 이 역할을 맡은 특정 부류를 한정하지 않은 이유는 이것이 모든 성도들이 해야 할 일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5:20 너희가 알 것은‥‥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 배교자를 다시 진리 안으로 인도하는 행위가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를 설명한다. 여기서 '미혹한 길'(플라네스 호두)은 인간의 영혼을 멸망시키는 배교의 삶을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삶에서 사람을 들이키는 행위는 영원한 형벌에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며(신 30:19), 그 사람의 많은 죄를 용서해 주어 영혼을 구원하는 행위이다(잠 10:12), 야고보가 이처럼 동일한 의미를 반복한 이유는 배교자를 진리로 인도하는 행위의 소중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본절에서 '허다한 죄'는 당시 신앙인들이 행한 많은 죄를 말함과 동시에 용서의 행위가 매우 포괄적임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러한 영혼 구원과 죄 용서는 배교자를 진리로 인도한 자의 권한은 아니다. 이 두 사역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다. 본절은 다만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결코 배교자를 방관해서는 안되며 이러한 배교자를 다시 주님에게로 인도해야 하는 책임이 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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