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 片石村 김기림(金起林) -
모오든 빛나는 것, 아롱진 것을 빨아 버리고-
못은 아닌 밤 중 지친 瞳子처럼 눈을 감았다.
못은 수풀 한 복판에 뱀처럼 서렸다.
못, 호화로운 것, 찬란한 것을 녹여 삼키고-
스스로 제 沈默에 놀라 소름친다.
밑모를 맑음에 저도 몰래 오슬거린다.
힘쓰는 어둠에서 날(刃)처럼 흘김은
빛과 빛깔이 녹아 엉키다 못해 식은 때문이다.
바람에 금이 가고 빗발에 뚫렸다가도
상한 곳 하나 없이 먼동을 바라본다.
희망(希望)
- 片石村 김기림(金起林) -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잊어버린
또 하나
별의 이름.
숨이 가쁜 봄밤
젊은이의 꿈 속에 즐겨뜨는
기이(奇異)한 버릇을 한 별아.
오늘 밤도 네 인력(引力)의 한계(限界)를 스치어
자주 삐뚤어지는
커브들.
온갖 회오리 바람과 협박에 지쳐
시달리는 운명(殞命)들 위에
희미하게 걸리는 단광(丹光)아.
나는 오늘 차디찬 운성(隕星)의
무덤을 디디고
나의 항성(恒星), 가장 멀면서도 가장
가까운데 있구나.
유리窓
- 片石村 김기림(金起林) -
여보
내마음은 유린가봐 겨울 한울처럼
이처럼 작은 한숨에도 흐려버리니........
만지면 무쇠같이 굳은 체하더니
하로밤 찬 서리에도 금이 갔구료
눈포래 부는 날은 소리치고 우오
밤이 물러난 뒤면 온 뺨에 눈물이 어리오
타지 못하는 情熱 박쥐들의 燈臺
밤마다 날어가는 별들이 부러워 처다보며 밝히오
여보
내마음은 유린가봐
달빛에도 이렇게 부서지니
바다와 나비
- 片石村 김기림(金起林) / <바다와 나비>(1939) -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靑 무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거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길
- 片石村 김기림(金起林) -
나의 소년시절은 은(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喪輿)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빛에 호져,
때없이 그 길을 넘어 강(江)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주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댕겨갔다.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덕과 그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애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태양의 풍속
- 片石村 김기림(金起林) -
태양아,
다만 한 번이라도 좋다.
너를 부르기 위하여 나는 두루미의 목통을 빌려 오마.
나의 마음의 무너진 터를 닦고 나는 그 위에 너를 위한 작은 궁전(宮殿)을 세우련다.
그러면 너는 그 속에 와서 살아라.
나는 너를 나의 어머니 나의 고향 나의 사랑 나의 희망이라고 부르마.
그리고 너의 사나운 풍속을 좇아서 이 어둠을 깨물어 죽이련다.
태양아,
너는 나의 가슴 속 작은 우주의 호수와
산과 푸른 잔디밭과 흰 방천(防川)에서 불결한 간밤의 서리를 핥아버려라.
나의 시냇물을 쓰다듬어 주며 나의 바다의 요람을 흔들어 주어라.
너는 나의 병실을 어족들의 아침을 다리고 유쾌한 손님처럼 찾아오너라.
태양보다도 이쁘지 못한 시.
태양일 수가 없는 서러운 나의 시를 어두운 병실에 켜 놓고
태양아 네가 오기를 나는 이 밤을 세워 가며 기다린다.
연가(戀歌)
- 片石村 김기림(金起林) -
두 뺨을 스치는 바람결이
한결 거세어 별이 꺼진 하늘 아래
짐승처럼 우짖는 도시의 소리 피해오듯 돌아오면서
내 마음 어느 새 그대 곁에 있고나
그대 마음 내게로 온 것이냐.
육로(陸路)로 천리(千里) 수로(水路) 천리
오늘 밤도 소스라쳐 깨우치는 꿈이 둘
가로수 설레는 바람소리 물새들 잠꼬대……
그대 앓음소리 아닌 것 없고나.
그대 있는 곳 새나라 오노라. 얼마나, 소연하랴*
병 지닌 가슴에도 장미 같은 희망이 피어
그대 숨이 가뻐 처녀같이 수다스러우리라.
회오리 바람 미친 밤엔
우리 어깨와 어깨 지탱하여
찬비와 서릿발 즐거이 맞으리라
자빠져 김나는 뭉둥아리
하도 달면 이리도 피해 달아나리라.
새나라 언약이 이처럼 화려커늘
그대와 나 하루살이 목숨쯤이야
빛나는 하루 아침 이슬인들 어떠랴.
* 片石村 김기림(金起林) : 1921년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곧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릿
쿄[立敎] 중학에 편입했다. 1926년 일본대학 문학예술과에 입학, 1930년 졸업 후 바로 귀국했다. 같
은 해 4월 〈조선일보〉 기자로 근무했으며, 이듬해 고향 함북 성진에 내려가 무곡원(武谷園)이라는
과수원을 경영했다. 1933년 이태준·정지용·이무영·이효석 등과 함께 구인회를 조직했다. 1936년
일본 센다이[仙臺]에 있는 도호쿠대학[東北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1939년 졸업과 함께 귀국
해 〈조선일보〉 기자생활을 계속했다. 1942년에는 경성중학교 영어 교사를 지냈는데, 이때 배운 제
자가 시인 김규동이다. 1945년 가족과 함께 월남하여 중앙대학교·연세대학교 강사를 거쳐 서울대학
교 조교수, 신문화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1946년 2월 8일에 열린 제1회 조선문학자대회에서 '조선
시에 관한 보고와 금후의 방향'이라는 연설을 했다. 같은 해 임화·김남천·이태준 등이 중심이 된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하여 시부위원회(詩部委員會) 위원장을 맡았다. 6·25전쟁 때 납북되어 1988년
에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金起林 인손(寅孫), 편석촌(片石村)
1908∼미상. 시인·문학평론가.
1908년 5월 11일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났습니다.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어머니와 손윗누이의 잇따른 죽음으로
계모 밑에서 자라며 우울한 소년기를 보냈다.
1914년 임명보통학교(臨溟普通學校)에 입학,
1921년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 중퇴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릿쿄중학(立敎中學, 또는 名敎中學이라는 설도 있음)에 편입했다.
1930년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문학예술과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조선일보사 사회부 기자로 입사, 뒤에 신설된 학예부 기자로 옮겼다.
1933년 김유정(金裕貞)·이태준(李泰俊) 등과 구인회(九人會) 결성에 참가하고,
1936년에 재차 도일, 센다이(仙台)의 도호쿠대학(東北大學) 영문과에 입학, 1939년에 졸업했다.
졸업논문은 영국의 문예비평가인 리처즈(Richards, I. A.)론이었다.
귀국 후(1939) 조선일보사 기자로 복직, 학예부장을 역임했다.
1940년 『조선일보』의 강제 폐간으로 한때 실직했으며,
1942년 낙향하여 고향 근처의 경성중학교(鏡成中學校)의 영어 교사로 부임했으며,
영어 과목이 폐지되자 수학을 가르쳤으며, 이 때의 제자에 시인 김규동(金奎東)이 있다.
김기림은 1946년 1월 공산화된 북한에서 월남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서적과 가산을 탈취당해 궁핍한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1946년 2월 제1회 조선문학자대회 때 ‘우리 시의 방향’에 대하여 연설하였으나,
정부수립 전후에 전향하였다.
1947년 6월에 그는 가족들을 데려오기 위해 다시 38선을 넘습니다.
평양을 거쳐 무사히 고향에 도착한 그는 먼저 가족 중 3남매와 함께 월남에 성공했지만,
부인과 막내아들은 잠시 고향 집에 머물러 있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북한에서의 생활을 견디지 못한 아내는 1948년 봄 막내아들을 데리고 월남합니다.
당시 김기림은 서울대, 중앙대, 연세대 등에서 전임 교수를 지냈으며,
이후 서울대학교에서 조교수로 활동했습니다. 또한 자신이 설립한 신문화연구소의 소장도 역임했습니다.
한국전쟁 때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북의 정치보위부에 의해 납북되어
북한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시기는 알 수 없다. 부인과 5남매가 서울에 살고 있다.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재직하면서
시 「가거라 새로운 생활(生活)로」(『조선일보』, 1930.9.6.)·
「슈르레알리스트」(조선일보, 1930.9.30.)·
「꿈꾸는 진주(眞珠)여 바다로 가자」(『조선일보』, 1931.1.23.)·
「전율(戰慄)하는 세기(世紀)」(『학등』 창간호, 1931.10.)·
「고대 고대(苦待)」(『신동아』 창간호, 1931.11.) 등을 발표하여 시단에 등단했다.
그리고 주지주의(主知主義)에 관한 단상(斷想)인 「피에로의 독백」(『조선일보』, 1931.1.27.)·
「시의 기술·인식·현실 등의 제문제」(『조선일보』, 1931.2.11∼14.) 등을 발표하여 평론계에 등단,
그 뒤 주로 시창작과 비평의 두 분야에서 활동했다.
첫 시집이며 장시인 『기상도(氣象圖)』(창문사, 1936 ; 재판 산호장, 1948)는
엘리어트(Eliot, T. S.)의 장시 「황무지(荒蕪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통일적인 주제의식의 유무에 대한 시비, 민족 현실에 대한 역사의식의 결여 등이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러나 사상과 감각의 통합을 시도한 주지주의 시라고 할 수 있으며, 현대 자본주의 문명을 비판한 것이다.
제2시집 『태양의 풍속』(학예사, 1939)은
몇 편의 이미지즘(imagism) 시를 제외하고는 주지성과 지적 유희성이 두드러진 것이고,
광복 후의 『바다와 나비』(신문화연구소, 1946), 좌경적인 『새노래』(아문각, 1947) 등이 있다.
『바다와 나비』는 삶의 한계의식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투명한 이미지로 처리한 점이 돋보인다.
『새노래』는 모더니즘(modernism)을 극복하여
민족공동체의 발견이라는 새로운 방향을 암시하나 예술로서의 성숙성이 모자란다.
중편소설 「철도연변」(『조광』, 1935.12∼1936.2.) 등
3편의 소설과 희곡 등이 있으나 주목을 받을 만한 대상은 아닌 듯하다.
평론 및 저서로서 『시론(詩論)』(백양당, 1947)·『시의 이해』(을유문화사, 1950) 등이 있다.
전자는 1930년대에 영미 이미지즘과 주지주의를 도입하여 우리나라의 시사(詩史)를 전환시킨 중요 시론집이며,
후자는 리처즈의 심리학적 이론에 의거한 계몽적인 저서이다.
이밖에 『문학개론(文學槪論)』(신문화연구소, 1946)·『문장론신강(文章論新講)』(민중서관, 1949),
수필집 『바다와 육체』(평범사, 194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