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뜰
분꽃 향기 가득한 마당에 둥근 상을 놓고 칠 남매가 모여 앉았다.
돌판에 삼겹살을 굽고 밭에서 뜯은 상추와 쑥갓을 수북이 쌓아놓고 막걸리 잔을 기울였다. 구순 노모는 의자에 앉아 자식들이 먹는 것을 뿌듯하게 구경하고 계신다.
어릴 적에도 이런 모습이 자주 있었다.
할머니와 아버지만 따로 상을 차려 드리고 우리는 커다란 양푼에 보리밥을 담아 상추와 고추장을 넣고 밥을 비벼서 빙 둘러앉아 먹었다.
그런데 지금과 다른 것은 밥이 늘 부족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먹고 나면 수저를 내려놓곤 했다.
먹는 게 즐거운 건 예전이 더 했다. 엄마가 콩가루를 넣고 칼국수를 해주면 열무김치와 양념간장을 해서 한 대접씩 먹어도 밤이 되면 속이 또 출출했다. 그래서 저녁에 먹다 남은 노란 양은그릇의 풀처럼 되어버린 국수를 갖다 놓고 한 숟가락씩 떠먹곤 했는데 또 그 맛이 기가 막히게 좋았다.
우리 집엔 붉은 암탉이 두 마리 있었다. 하루는 마당을 돌아다니던 암탉이 안 보이더니 갑자기 꼬꼬댁거리며 우는 소리가 났다. 재빨리 달려 가보니 북데기 속에서 암탉이 나오는데 거기를 둘러보니 닭이 앉았던 동그란 흔적이 있고 그 위로 볼그스레한 달걀이 보였다. 기적이었다. 난 따듯한 달걀을 집어드는 순간 나도 모르게 그걸 아랫니로 톡톡 깨어서 구멍을 내고 달걀을 쪼옥 빨아먹었다. 얼마나 고소하고 맛이 있던지, 혀를 낼롬거리며 나머지를 쪽쪽 빨아먹는데 맙소사, 엄마와 눈이 딱 마주쳤다.
‘이 지지배가 즈 오빠 차비할 걸 처먹으면 우떡해여?’
그렇게 지청구를 들을 걸 각오하고 고개를 처박고 도망을 쳤다. 그런데 엄마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또 한 번의 기적이었다.
그 다음부터 난 닭이 알을 낳으면 감히 먹을 생각을 못하고 꺼내다가 도톰하게 쌀이 깔린 바가지에 넣어놓곤 했다.
난 고소한 생달걀을 한번 맛본 것만으로도 흡족했다. 그것은 나는 귀한 큰딸도 아니고 이쁜 막내딸도 아니고 그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중간에 낀 넷째 딸이니, 금지옥엽 오빠와는 비교 대상이 안 되었다. 오빠는 우리 집 삼대독자다. 일곱 번째로 막내 남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쌀독 바가지에 달걀이 대여섯 개 모아지면 엄마는 그걸 지서 앞 가게에 팔아서 돈으로 바꾸었고 오빠의 중학교 차비가 되었다.
나를 돌봐주던 언니들이 돈을 벌러 객지로 나간 후 내가 막냇동생을 데리고 다녀야 했다. 딸이 많은 집에서 살아서인지 그애는 우릴 누나라고 하지 않고 언니라고 불렀다.
어느 날 동네 애들하고 산 밭으로 오디를 따러 가기로 약속했는데 어린 동생이 문제였다. 그래서 동생이 노는 틈을 타서 몰래 빠져나가려고 앞집 울타리 밑에 몸을 웅크리고 엎드려서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나를 찾던 동생이, “언니야, 언니야” 하면서 서럽게 엉엉 울어댔다. 새까맣게 탄 알몸에 코를 훌쩍거리며 우는 그 모습이 어찌나 안쓰럽던지 나는 차마 동생을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얼른 나가서 입술까지 흘러내린 코를 손으로 닦아주고는 동생을 업고 오디를 따라갔다. 그렇게 데리고 놀아서인지 지금도 막냇동생은 다른 애들보다 더 마음이 쓰인다.
엄마는 읍내에 장이 서는 날이면 텃밭에서 키운 배추나 호박, 미나리 등 돈이 될 만한 것들을 묶어 머리에 이고 시오릿길을 걸어서 장터로 향했다.
엄마가 식당마다 돌아다니며 채소를 파는 동안 난 장구경을 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엄마가 채소를 다 팔고 그 돈으로 조개젓도 사고 번데기도 사서 먹으며 돌아오는 길은 흙먼지 날리는 신작로였지만 엄마와 함께여서 여유롭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우리 방은 항상 냉골이었다.
장롱에서 이불을 꺼내서 바로 덮으면 너무 차갑기 때문에 엄마는 저녁만 먹고 나면 이불을 미리 깔아놓곤 했다. 그러나 워낙 방이 추워서 처음 이불 속으로 들어갈 때는 옷도 벗지 못하고 몸으로 이불의 냉기를 녹이며 옹그리고 있으면 서서히 훈김이 돌았다.
우리는 밖에서 놀다가도 집으로 올 때는 학교 운동장에 떨어진 플라타너스 나뭇잎을 새끼에 꼬여 한 묶음씩 끌어다 부엌에 갖다 놓곤 했다. 그 나뭇잎은 이파리만 커서 호르륵 타면 그만이지만 텅 빈 부엌 한쪽에 땔 나무가 있다는 게 부자처럼 느껴졌다.
학교를 안 가는 날에는 엄마를 따라 산에 나무를 하러 다녔다. 엄마는 낫으로 나뭇가지를 자르고 나는 갈퀴로 솔잎을 긁어서 자루에 담았는데 동네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나무를 해서 솔잎이 많이 쌓인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엄마의 나뭇짐은 항상 무거웠다. 나는 엄마가 나무를 질 수 있도록 옆에서 거들어주었지만 열 한 살 내 힘으로는 역부족이어서 엄마는 몇 측을 일어나다 넘어지고 또 일어나다 주저앉으면서 겨우 땅을 짚고 일어서곤 했다.
내 짐은 엄마보다 훨씬 작아서 한 묶음밖에 안 되는 데도 한참을 이고 오다 보면 점점 무거워지고 집까지 가는 길은 멀기만 했다. 그렇게 해 온 나무로 불을 때서 밥을 하면 밥 익는 냄새도 좋지만 솔잎이 빨갛게 타들어 가는 모습이 정말 이뻤다.
나중에 리어카를 사고부터는 일하는 게 훨씬 수월했다.
나뭇짐을 리어카에 수북이 쌓아도 바퀴가 달렸으니 잘 굴러가 신기하고도 재미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리막길이었다. 앞에서 끄는 사람이 아무리 앞부분을 머리까지 치켜올리고 뒤에서는 동생들이 잡아끌어도 리어카가 무섭도록 내리달려서 자칫하면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질 뻔한 적이 많았다. 그런데 자꾸 하다 보니 요령이 생겨서 내리막길에서는 굵은 나뭇가지를 바퀴 뒤에 묶어 놓았더니 위험하지도 않았고 우리는 어느새 리어카 끄는 선수가 되었다.
하금곡 논에서는 더 재미있었다. 논두렁에서 끌고 나올 때는 힘이 들지만 새로 포장된 아스팔트 길까지만 나오면 식은 죽 먹기였다. 우리는 작은 애가 잔뜩 볏단을 쌓아 끌고 가니 사람은 보이질 않고 리어카가 저절로 움직이는 것 같다며 장난을 쳤다.
우리 집에는 송아지가 있었는데 학교가 끝나면 개울로 풀을 뜯기러 다녔다. 노을 지는 저녁, 맑은 물에선 피라미가 튀어 오르고 여울물에 발을 담그고 있노라면 풀을 뜯는 소의 풍경 소리만이 아득히 들려왔다.
한번은 송아지를 끌고 오다가 고삐를 놓쳐서 송아지가 남의 밭으로 뛰어들어갔다. 엄마는 풀을 실컷 뜯기지 않고 데려와서 배가 고파 그랬을 거라고 했다. 그다음부터 학교만 갔다 오면 소가 먹을 수 있게 쑥 뿌리를 캐러 다녔다.
우리 동네에 공장이 생기고 타지에서 온 아가씨들이 많아지면서 우리는 덩달아 신이 났다. 밭에 심은 옥수수가 영글기 시작하면 그걸 따서 찌고 한쪽에선 잘 익은 것을 골라서 커다란 바구니에 담으면 엄마는 옥수수를 팔러 공장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엄마가 지폐를 들고 돌아오면 우리는 그 돈이 신기하고 좋아서 돌아가면서 세고 또 세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기도 전, 겨울방학 때 공장엘 들어갔다.
처음 하는 공장일은 너무 힘이 들었다. 아침에 일을 시작하면 점심 먹는 시간만 빼고는 꼬박 앉아서 일을 하는데 중간에 화장실을 가거나 옆 사람과 이야기를 하면 반장한테 눈총을 받았다. 하루종일 고개를 숙이고 부품을 조립하고 나면 목과 어깨가 너무 아파서 밥을 먹을 때도 숟가락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입사한 지 며칠도 안 되었는데 엄마는 설날 음식 장만을 위해 내 월급날만 기다렸다. 그렇게 가난한 우리 집에서 교사가 되고 싶은 내 꿈은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우리 칠 남매는 서로를 의지하며 성장했고 언니들의 도움으로 학교에 다녔다. 특히 큰언니와 큰형부는 맏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서울에 산다는 이유로 동생들이 모두 언니네 집을 거쳐 갔건만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정성을 다해 부모의 역할을 대신해 주었다.
생각할수록 우리 어머니는 대단한 분이다. 자식들 배곯지 않게 하려고 산 밭을 일궈 고구마를 심고, 개울에 돌을 쌓는 부역을 나가서 밀가루를 타오고, 잠시도 쉬지 않고 일하셨다.
어머니는 지금도 빈 땅은 아까워서 그냥 못 둔다. 간신히 사람 하나 걸어 다닐 정도만 남기고 콩이라도 심고 고추 한 줄이라도 더 심는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지금도 그냥 앉아있질 못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마늘을 까고 채소라도 다듬어야 직성이 풀린다.
우리 형제들은 모두가 성실하고 그 덕분에 밥술이라도 먹고사니 어머니의 극성스러움을 이어받은 모양이다.
인제 어머니를 모시고 우리 칠 남매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내 유년은 그들이 있어 행복했다.
청솔가지 나뭇짐 지고 휘청거리던 우리 어머니 용케도 구십 인생 살아내시고 우리와 함께 맛난 고기를 잡숫고 계신다.
* 읽으실 때 눈의 피로를 덜어드리기 위해 문단을 띄웠습니다.
출처 : 김효진 수필집 <바람부는 날 강가에 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