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소리 오디션 =
이 정숙
성우의 직업을 갖고 싶었던 적이 있다.
얼굴을 보여주지 않아도 되고 상상 할 수 있는 신비스러움과 목소리만으로 다채로운 삶을 소리로 대변할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릴 때는 얼굴에 자신감이 없었지만 목소리는 듣기 좋다는 소리를 들어서 자신이 있었다.
인터넷 검색 중, 목소리 오디션을 한다는 아주 작은 광고가 눈에 들어오면서 잊고 있던 꿈이 스멀스멀 거린다.
인터넷의 작은 광고가 나에게는 엄청난 크기의 활자로 잡아 끌어당긴다.
스탠다드차타드 은행에서 주관하는 사회공헌 캠페인으로 4회째인 이번 행사는 문화유산 읽어주는 자원봉사자를 모집하는 것이었다. 광고를 보는 순간 심장이 콩닥 콩닥 거리기 시작한다. 앞뒤 가릴 것 없이 클릭을 하니 1차는 전화로 테스트를 한다고 한다. 전화 목소리는 무사통과 되었다. ‘그렇지! 내 목소리는 아직 맑고 들어줄 만 하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1차 전화 목소리 테스트만 통과했는데 상상 속의 나는 이미 성우가 되어 있었다.
나이가 더 들면 어린아이들에게 혹은 더 나이 많으신 분들을 위해 책 읽어 주는 재능기부를 하고 싶었는데 그 기회가 온 것이다.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날짜를 받고 서울까지 가는 일에 기꺼이 기쁜 마음과 설레임으로 그날이 기다려졌다.
나는 가끔 대책 없이 하고픈 일이 있으면 도전하는 호기심이 많은 편이다.
드디어 스탠다드차타드 은행 본점의 오디션 장소에 도착하고 보니 가슴이 탁 막힐 정도로 엄청난 사람들이 와 있는 것이다. 선발 인원은 100명인데 3일 동안 치러지는 오디션에 오늘 지원자가 이리도 많으니 이틀을 더 북새통을 치룰 것을 생각하니 당당했던 나는 어느새 새가슴이 되었다.
오디션에 합격한 사람은 서울시 문화유산 100곳을 선정하여 한사람이 한 곳씩 녹음 작업을 하여 시각장애인들에게 도움을 준다고 한다.
현장에 와보니 순수하게 자원봉사하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 놀랐고 초등학생부터 멋진 초로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도전에 거듭 놀랐다.
가슴을 진정시키고 접수를 하니 테스트할 원고를 준다.
<오디션 문화유산 해설 스크립트>는 덕수궁 석조전에 대한 외형 설명을 듣고 시각 장애인들이 상상하며 마치 그곳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의 자세히 설명한 글이었다.
(‘석조전은 17개의 돌계단 위에 화강암으로 지어진 3층 규모의 사각형 건물입니다. 석조전의 정면 길이는 54.2m 폭은 31m 높이는 17.5m에 달합니다.
석조전 정면 길이는 성인의 발걸음으로 예순여덟 걸음에 해당합니다.
화강암으로 건축한 석조전은 좌우가 똑같은 대칭 구조이며 전체적으로 밝은 회색을 띄고 있습니다. ....생략. 석조전 페디먼트에는 중앙 부분에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좌우에는 화분을 형상화시켜놓은 조형물이 각 6개씩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돼 있습니다. 오얏은 자두의 순 우리말입니다.’) 문화유산 자체를 눈으로 감상하는 것과 같은 프로세스가 시각장애인들에게는 묘사 부분이라고 한다. 눈을 감고 묘사를 들었을 때 최대한 덕수궁의 석조전 설명을 듣고 머릿속에 그려질 수 있도록 낭독하라고 한다. 스텝들은 충분히 연습을 하고 오디션을 보라고 권하는데 그 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빨리 보고 싶은 생각에 대기석에 앉아서 몇 번 연습을 하고 심사위원 앞으로 가서 앉는다.
쉼표와 마침표 음성의 높낮이 엑센트까지 나름 표시를 하면서 연습을 했다.
막상 내 순서가 되니 심장 박동 수가 빨라지면서 심계항진이 일어난다.
심호흡을 하고 심사위원 앞에서 내 이름과 사는 곳을 말하니 멀리서 오셨다며 용기를 주신다. 앉아서 원고를 읽기 시작하자 심사위원은 해드폰을 끼고 심사에 들어가니 웬일로 떨리던 가슴이 차분해지는 것이다.
자신감 있게 원고를 2/3 읽을 즈음 잠시 멈추라고 한다.
“발음도 정확하고 안정감도 있으시네요. 조금 더 천천히 읽으시면 좋겠어요.”
“아~~ 네. 계속 읽을까요?”
“아니요. 다음 기회에 다시 도전해 주십시오.”
뭐지? 이런 걸 불합격이라고 하는 건가? 심사위원은 떨어진 것을 에둘러 말한다. 일어나서 인사하고 나와야하는데 아쉬워서 발이 안 떨어진다.
거뜬히 통과 할 줄 알았던 내 자신이 머쓱해진다.
요즘 젊은 친구들이 K팝스타 등의 오디션을 보기 위해 온 열정을 쏟아 붓는데 불합격 당하면 이런 기분일까? 젊은 친구들과 비교의 대상은 될 수 없지만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오디션 보느라 주변을 둘러보지 못했는데 이제야 여유가 생긴다. 문화유산 100선이 선정된 곳이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고 왜 이런 행사를 하는 요지도 설명 되어있었다. 다과와 음료를 준비한 곳은 불합격한 사람들의 모임 장소가 된 듯하다. 처음 본 사람들끼리 이런 좋은 일에 동참한 이유들도 교환하고 내 또래의 여자 분은 딸이 신청해 주었는데 떨어져서 딸보기 미안하다고 한다. 나는 보령에서 오디션을 보러 왔다고 하니 먼 길 온 것에 깜짝 놀란다.
아마 나를 순수한 자원봉사자로 생각하는 것 같다. 처음 만난 우리는 자주 만났던 친구처럼 불합격을 씁쓰름한 커피로 위로하며 담소를 나누고 헤어졌다.
비록 ‘불합격’의 고배를 마셨지만 해보고 싶었던 일에 도전 해 봤기 때문인지 가벼운 마음이다. 망설임 없이 도전한 것이 스스로에게 대견하고 이번 기회에 덕수궁 석조전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있는 기회여서 그것으로 만족한다.
꼭 이런 오디션이 아니더라도 어딘가에서 내 목소리로 책 읽어주는 재능기부를 할 기회가 온다면 서슴없이 진솔한 마음으로 재도전해 보고 싶다. 도전에 실패했지만 환한 웃음 지으며 가벼운 마음으로 나오면서 심사 받기 위해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화이팅!”하며 그 자리를 천천히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