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마1:18)
사단은 하나님을 상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정확하고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단이 선택한 것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열매를 먹게 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하였으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단절시켰습니다. 이것은 사실은 사단이 할 수 있는 전부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상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신할 사람을 공격대상을 삼아서 사람을 넘어뜨린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단의 선전포고였고, 이로부터 하나님과 사람은 본격적인 전쟁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사단의 선전포고에 대해 단호하게 그리고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비록 그 뱀이 여자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여자의 후손, 메시아로 말미암아 사단의 머리,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하나님이 선언하십니다.
그래서 사단은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실 여자의 후손, 메시아를 통해 자신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때와 방법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사단이 분명히 안 것은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을 통해 자신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다는 것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사단이 이것을 알았을 때문에 가장 강력한 무기를 만들고 요새를 만들어 여자의 후손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사단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어둠을 동원하여 요새를, 갑옷을 만들고, 그 안에 자신을 철저하게 숨겨 놓고 기다립니다.
거짓과 속임과 위선으로 갑옷을 만들어 입고, 그 배신과 분노와 진노의 불로 달궈진 그 사망의 화살과 그 진노의 칼을 날카롭게 갈아 손에 쥔 채 여자의 후손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납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여자의 후손이 진짜 사람일 것이라고는 상상을 못했습니다. 메시아가 사람의 모습으로 올 것이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사단은 당연히 메시아가 왕의 모습으로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셀 수 없는 수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화려한 왕관을 머리에 쓰고, 어깨에는 긴 망토를 걸치고, 손에 긴 칼을 들고, 흰말을 타고, 그 카리스마 넘치는 불꽃같은 눈빛으로 그 위엄 가득한 왕의 모습으로 올 것이라고 사단은 당연히 생각했습니다. 그 여자의 후손 메시아가 사람의 모습으로 올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사단이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그리고 동시에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잘하면 하나님 잡는다. 일평생의 숙원! 일평생의 소원!을 이룰 기회를 잡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모습을 가졌을 때는 사단은 상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의 예언처럼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다면, 메시아가 사람이 된다면 이것은 해볼 만한 싸움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가 어쩌면 하나님 잡는다! 이제 하나님 이길 수 있다.”
이 사실을 안 다음에 사단이 얼마나 철저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준비했겠습니까?
그런데 때가 되었을 때에, 진짜 여자의 후손이, 메시아가 사람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사단은 그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거짓과 속임과 절망과 어둠과 배신과 증오와 분노를 준비하여 드디어 예수를 잡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나무에 매다는 데 성공합니다.
여러분 그 때 사단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얼마나 쾌재를 불렀겠습니까?
그리고 힘없이 포로처럼 비참하게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향해 활을 들고 사망의 화살을 걸어 활시위를 당깁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온 힘을 다해 끝까지 화살을 당기는 것입니다.
사단은 분명히 하나님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단이 여자의 후손의 심장을 찌를 것이다. 사단은 하나님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활시위를 놨을 때 그 날카롭게 갈린 사망의 화살이 예수의 심장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갑니다. 그 때 사단은 “됐다! 이제 됐다! 내가 드디어 하나님 잡았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망의 화살이 예수의 심장을 관통해서 지나가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머리가 떨어졌을 때 그 때 비로서 사단은 깨닫습니다.
“아 이거 뭔가 잘 못되었다. 내가 졌다.”
메시야가 처음부터 죽기 위해 왔다는 것을 그때서야 깨닫습니다. 죽기 위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습니다.
사단은 예수를, 메시아를 죽임으로 말미암아 그 메시아가 자기 왕국에 들어오도록 허락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자기가 문을 열었고 길을 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완벽하게 죽은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통과해야만 들어올 수 있는 그 사단의 왕국에 들어가시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빛으로 어둠을 가르셨습니다.
소망으로 절망을 한 번에 깨뜨리셨습니다.
생명으로 사망 한 복판에 딱 서십니다.
그 어둠으로 가득한, 거짓과 속임과 배신과 그 사망으로 가득한 사단의 왕국 정 중앙에 서서,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하심과 의로움과 생명과 소망으로 한 번에 부활하십니다.
밖에서 깨뜨리시는 것이 아니라 사단의 왕국 정 중앙에서 단번에 깨뜨리십니다.
부활하심으로 사단이 가지고 있는 권력과 힘 가운데 가장 최고인 사망과 권세를 단번에 깨뜨시고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빛이 어둠을 물리폈고, 소망이 절망을 위로하였으며, 생명이 사망을 한 번에 깨트렸습니다.
이것은 진리가 거짓에 승리한 사건입니다.
누가 알았겠습니까?
메시아가 처음부터 죽기위해 왔다는 것을... 죽기위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마태복음 1장 18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오심”이라는 애매하고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단어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나심” 즉 태어나심이라는 굉장히 구체적이고 분명한 의미의 단어로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오실 수 있는 방법은 많습니다. 다양합니다.(왕의 모습으로, 구름타고, 카리스마 품기면..)
그러나 정작 메시아가 선택하신 방법은 세상에서 가장 나약하고 위태로운 위험천만한 어린아이로 태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것을 흉내 내신 것이 아닙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완전한 삶이 되신 것입니다.
시간을 창조하신, 초월하신 하나님이, 모든 시간에 동시에 계신 그 하나님이 시간 안으로 걸어 들어오신 것입니다.
공간을 창조하신, 공간을 초월하신 하나님이, 모든 공간에 동시에 거하시는 그 하나님이 공간의 한 점이 되시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요 3:31절에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만물 위에 계신, 초월해 계신 그 하나님이 만물 아래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스스로 갇히셨고, 스스로 제한 되셨고, 스스로 모든 것을 버리고 내려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완전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9절은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선언합니다. 메시아는 죽기 위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영광 받기 위해, 찬양 받기 위해, 높임 받고, 인정 받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박수와 갈채를 받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죽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예수를 따른다는 사람들이 높임 받기를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집중 받는 것, 박수 받는 것, 유명해 지는 것을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죽기위해 오셨는데, 죽기 위해 사람이 되셨는데...
그럼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죽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불가능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분은 죽을 수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6절,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요한복음 14장 6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생명이십니다. 오직 그에게 죽지 아니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사도행전에서 말합니다. 생명의 주가 죽었다 말합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떻게 생명의 주가 죽을 수가 있습니까?
생명이 죽는 방법은 오직 하나이입니다.
생명을 죽이기 위해 반을 조개는 순간, 생명은 죽는 것이 아니라 두 개로 나누어질 뿐입니다.
생명에서 생명을 빼앗기 위해 생명을 짓밟고 깨부수고 가루로 만들어 생명을 빼앗을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더 많은 생명이 내뿜어 질 것입니다.
생명은 절대 죽지 않습니다.
생명에서 생명은 절대 빼앗을 수 없는 것입니다. 더 많은 생명이 퍼질 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말합니다. 생명의 주가 죽었다고....
생명이 죽는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이사야서 53장 12절에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생명이 죽는 방법은 스스로가 버리는 것입니다.
스스로 버리지 않는 한 누구도 생명에서 생명을 뺏을 수 없습니다.
사단은 생각했겠지요? “내가 생명을 뺐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예수님이 버렸기 때문에 사단이 가진것입니다.
예수님이 내줬기 때문에 사단이 이긴 것입니다.
스스로 버리지 않는 한 절대로 생명을 잡을 수 없습니다. 생명을 이길 수 없습니다.
생명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신 이유는 오직 하나, 생명을 스스로 버렸기 때문입니다.
유언을 아시나요? 유언은 언제 하나요? 바로 죽기 전에 합니다.
그 유언은 언제 효력이 발생하나요? 당연히 죽은 후 효력이 발생합니다.
히브리서 9장 16절-1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유언하셨습니다.
왜 유언을 하십니까?
그 이유는 히브리서 9장 15절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원한 기업을 소유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유언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유언이 성취되기 위해 유언한 자가 죽어야만 된다는 것을 아십니다.
성경책 각주에 보면 유언은 곧 언약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영원한 생명의 기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세요. 이 언약이 성취되기 위해 그 언약을 말씀하신 하나님이 죽어야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죽어야지만 그 언약이, 유언이 성취된다는 것을 아십니다.
세상의 어떤 바보가 유언하겠습니까? 언약을 맺겠습니까?
죽어야 성취되는데...
그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의 바보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그 영원한 기업을 소유하길 원하시기 때문에 기꺼이 유언하시며 기꺼이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두 가지의 목적을 동시에 성취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는 사단을 멸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요일 3장 8절, 사단을 멸하려 하심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과정입니다. 목적이 아닙니다.
사단을 멸하므로 정말로 원하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로마서 3장은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의 권세에 놓였습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 되고, 그 죄로 말미암아 그 죄인 위에 임하는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진노와 그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무시무시한,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죄에 대한 거룩한 진노가 임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가 임박했다. 쏟아지기 일보직전이다. 누구도 감당할 수 없다. 누구도 피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앞에서 벌벌벌 떨고 있을 때에...
그 때 갑자기 예수님이 내 어깨를 잡으십니다.
그리고 나를 옮기십니다.
그리고 나서 내가 서있었던 그 자리에 나를 대신해서 서십니다.
나를 대신한 것은 맞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나의 죄 자체로 서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21절,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한 분을 나의 죄로 삼으셨습니다.
나의 죄를 대신하여, 나의 죄 자체로 내 자리에 서신 것입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님이 내 자리에 서시자마자,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 붓기 시작합니다.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그 무시무시한 진노와 엄중한 하나님의 심판이 예수 그리스도께 쏟아집니다. 내 죄에 임해야 마땅한 그 하나님의 진노가 예수에게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이 때 하나님 온 힘을 다해 심판하십니다.
진노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아끼지 않고 모든 진노와 분노를 다 쏟아 부으면서 온 힘을 대해 심판하십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누구도 시비 걸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구도 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시비 걸지 못하도록 온 힘을 다해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는 내 죄가 되어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받아내십니다.
하나님이신 예수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무릎이 휘어집니다. 진액이 빠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내기가 벅차고 감당할 수가 없어서 진액이 빠지며 외치기 시작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은 육체 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정서적인 조롱과 모욕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진짜 고난은 태초부터 단 한 번도 분리되거나 떨어진 적인 없었던 그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분리인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 때 처음으로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이라 부릅니다.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태초부터 단 한 번도 있지 않았던 그 삼위일체 하나님의 완벽한 하나됨에 분리, 깨어짐이 그 때 십자가에서 임한 것입니다.
내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는 완전했습니다.
내 죄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완벽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만났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그 하나님의 공의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 만났습니다.
더 이상 필요 없을 정도로 완벽한 내 죄에 대한 심판이 선포되었고 끝났습니다.
누가 메시아가 우리를 이렇게 구원해 주실 것이라 상상했겠습니까?
누군가가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었나? 굳이 메시아가 죽을 필요가 있었나? 라고 물을 것입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예~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그 추악한 죄와 거짓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가 죽는 방법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
그러므로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빌어 종의 형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모든 이름 위에 지극히 높여 가장 뛰어난 이름을 주십니다.
죽임 당하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셔야 되는 합당한 영광을 우리가 돌려 드리기 원합니다.
인정해 드리길 원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이십니다.
스스로 버리심으로 말미암나 나를 구원하신 그 사랑.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죽기 위해.
이 모든 구원의 시작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이 사건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에 담겨있는 의미입니다.
사순절 기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에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귀한 절기를 보내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