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국학진흥원 김미영
1. 문중의 역사적 유래와 한국적 특징
문중門中은 성씨와 본관이 같은 사람(남성)들이 결성한 부계친족조 직으로, 이때 성씨의 시조(중시조 포함)로부터 장자 혈통으로 내려온 종자(종손)가 중심이 되는데 이러한 원칙을 ‘종법宗法’이라고 한다. 종법은 중국 서주西周의 봉건제도에 유래하며, 그 중심에 주왕- 제후경대부 등으로 이루어진 주종관계가 자리하고 있다. 예기에 종법제도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별자別子는 조祖가 되고, 별자를 계승하는 자는 대종大宗이 되며, 부父를 계승하는 자는 소종小宗이 된다. 백세百世가 지나도록 옮기지 않는 종宗이 있고, 5세가 되면 옮기는 종宗이 있다. 백세가 지나도록 옮기지 않는 종宗은 별자의 후손(적장자)이다. 별자를 잇는 종宗은 백세가 지나도 옮기지 않는 종宗이며, 고조高祖를 계승하는 종宗은 5세가 되면 옮기는 종宗이다.
별자는 제후의 차남 이하의 아들을 일컫는다. 제후의 장남은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하기 때문에 별도의 종宗을 형성하지 않고, 그 외의 아들은 자신이 중시조[別子]가 되어 새로운 종을 구성한다. 이때 중시조가 된 별자에게는 천년만년 제사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는데, 이를 백세불천百世不遷이라고 한다. 그리고 별자의 장남이 그 혈통을 이어받아 후대로 내려가면서 대종大宗 (대문중)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별자의 차남 이하 아들 에게는 5세(5대조)를 넘기지 못하는 오세즉천五世卽遷의 소종을 구성할 자격이 주어진다. 이는 한국의 당내堂內에 해당하는 것으로, 고조부를 중심으로 형성된 친족조직과 동일하다.
서주의 종법제도는 조선에 도입·정착하는 과정에서 성씨의 시조로부터 장남 혈통으로 내려온 경우는 대종이라 하고, 또 중국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파종派宗(파문중)이라는 것이 새로이 창출되었다. 시조의 아랫대에서 출중한 인물이 배출되거나 혹 은 기타 계기 등에 의해 독립된 종宗을 결성하는데[分派], 이를 파종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성씨 시조로부터 내려 온 대종은 족보상으로는 존재할 수 있어도 실존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현재 우리나라 성씨는 시조로부터 30~35세世 정도의 역사를 갖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다. 1세를 대략 30년으로 보면, 대부분의 성씨 역사는 약 1천 년 내외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유교적 부계혈통 중심의 가계家系 이념은 17~18세기에 이르러 정착했기 때문에, 그 이전에는 후손을 두지 못했을 때 양자를 들이지 않고 절가絶家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성씨의 시조로부터 장남 혈통으로 내려온 대종 (대문중)은 현실적으로 존재하기 힘든 실정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대문중은 실제 상황에서는 혈통이 단절되었지만, 후대에 이르러 계보를 소급하면서 인위적으로 연결고리를 이어가는 방식을 취한다. 즉 족보상으로만 양자를 기재해두거나 혹은 생졸년 등의 행적이 모호한 인물을 등장시켜 계보를 연결시키는 것 이다. 이런 점에서 대문중은 순수혈통집단으로 간주하기 힘든 점도 없지 않다. 아무튼 이런 방식으로 대문중을 형성해도 그 규모가 너무 방대하고 후손들 역시 조상들의 사회적 진출과 경제여건에 따라 거주지를 옮겨 다닌 탓에 결집된 조직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다. 특히 교통과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전통사회에서 광범위하게 분산된 후손들을 결속시키기는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대문중은 조직으로서의 실제적 기능은 거의 수행하고 못한 채 시조의 제사를 공동으로 수행하거나 대동보 편찬을 주관하는 등의 역할만을 담당하는 정도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실질적인 문중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파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조 이래 뛰어난 인물이 배출되었다 해도 자의적으로 파종을 형성할 수는 없고 일정 자격을 획득해야 하는데, 그건 바로 불천위不遷位이다. 예기를 보면 “별자가 아니어도 처음 봉작封爵된 자는 시조가 된다”라는 내용이 나타나고, 백호통 에서도 “제후의 별자가 아니더라도 공功이나 덕德으로 대부가 된 사람은 백세불천의 제사를 받는 대종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는 혈통과 상관없이 공훈功勳 을 인정받으면 불천위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배경에서 오세즉천의 소종에서도 새로이 봉작된 현조顯祖가 나타나면 그를 시조로 삼아 대종을 형성하는 것이 가능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불천위와 파종의 시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불천위가 최초로 등장한 것은 고려 중엽 이후로 알려 져 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이 세조실록 에 나타난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종묘의 제도를 상고해보니, 천자는 7묘이고, 제후는 5묘이고, 대부는 3묘이니 제도를 어길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공훈은 조祖라 하고, 덕망은 종宗이라 하여 7묘·5묘 이외에 또 백 세불천위百世不遷位가 있으니, 주나라 문왕의 세실世室과 노나라 세실옥世室屋이 이것입니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대부의 집에도 처음 봉 해진 군君이 있으니, 공자우公子友에 있어서의 노나라 계씨季氏와 숙아叔牙에 있어서의 숙손씨叔孫氏가 이것이다”고 했는데, 이로 보아 세 경世卿의 집을 상고한다면 3묘 이외에 처음 봉해진 사람을 제사지낸 것이 명백합니다. 본조의 개국공신開國功臣·정사공신定社功臣·좌명공신佐命功臣·정난공신靖難功臣·좌익공신佐翼功臣 등은 용호龍虎가 풍운을 만난 것처럼 명군明君을 만나 용의 비늘을 끌어 잡고 봉황의 날개에 붙듯이 영주英主를 섬겨 그 공로를 펴게 되었는데, 성조聖朝에서는 이미 옛날의 땅을 봉해주는 제도에 의거하여 군君을 봉하고 작爵을 내려주었고, 자손이 승습承襲하여 토전土田을 주고 장확臧獲(노비)도 주며, 자음資蔭[蔭職] 은 자손에게 미치고, 은유恩宥는 영세永世에까지 미치니, 이것은 곧 가문을 일으킨 시조이므로, 선유先儒의 이른바 처음 봉해진 이[始封]가 이것입니다. 지금 개국공신·정사공신·좌명공신 등은 이미 자손이 소원疏遠해져서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된 사람도 있는데, 그 자손이 대대로 조상의 음덕을 계승하여 그 토전土田에 생활하고 노비를 사역하고 있는데도 조상의 소자출所自出(근본)에 제사지내지 않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이것은 다름아니고 일정 한 제도에 국한되어 변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5공신의 자손이 3묘 이외에 별도로 일실一室을 만들어 그 제사를 받들게 하여 성조聖朝의 덕 있는 이를 높이고 공적에 있는 이에게 보답하는 은전恩典을 넓히게 하소서.
내용을 보듯이 주나라와 달리 봉건제도가 시행되지 않았던 조선에서는 공신을 중심으로 불천위가 추대되었다. 조정으로부터 불천위로 지정되면 토지와 노비 등이 내려졌고, 이를 기반으로 후손들은 가묘(불천위 사당)를 세우고 불천위 제례를 거행했다. 아무튼 위의 상소를 올린 결과 임금의 윤허가 내려져 1457년(세조 3) 5공신을 불 천위로 추대하게 되는데, 당시 조정으로부터 지정된 불천위는 개국開國공신 39位, 정사定社공신 18位, 좌명佐命공신 38位, 정난靖難공신 37位, 좌익佐翼공신 41位 등으로 총 173位이다. 이후 불천위는 경국대전에 “처음으로 공신功臣이 된 자는 제향대수祭享代數가 지나도 불천위로 삼아 별도의 일실一室을 세워 계속 봉사한다”라는 내용으로 제도화되기에 이른다.
이처럼 조선 초기에는 공신을 중심으로 불천위 추대가 이루어졌으나, 후대로 갈수록 가문의 현조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에 대해 정긍식은 “조선시대 종법의 가장 큰 특징은 대종과 소종의 구분이 지켜지지 않고 현조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가문을 과시하려고 했기 때문에 국가로부터 불천위의 특전을 받지 않아도 스스로 백세불천의 종宗을 이룬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이는 대종의 양산을 초래했으며, 이들 불천위를 중심으로 동족촌락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지적하는가 하면, 이순구 역시 “국가로 부터 대종으로 인정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임의로 중시조를 세 워 백세불천의 종宗으로 삼는 경우도 나타나게 되었다. 이는 국가에서 의도하는 종법과 현실에서 행해진 종법 사이의 괴리를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이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가 불천위 추대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정착한 조선 중기를 거쳐 부계혈통의 친족체 계가 정착·확대되면서 가문의식이 팽배해짐에 따라 경쟁적으로 현조를 내세워 불천위로 지정받고자 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는데, 아마도 이런 과정에서 향불천위鄕不遷位가 급속도로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불천위로 추대된 인물은 주나라의 별자와 마찬가지로 오세즉천의 원칙에 구애받지 않고 후손대대로 제사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고, 후손들은 불천위 조상을 파조派祖로 섬기면서 파종(파문중)을 형성하게 된다. 이처럼 파종은 종법제도의 대종과 동일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부계친족조직에서 가장 상위에 자리하며 그 아래 하 위집단으로 4개의 소종이 각각 놓인다. 즉 고조를 잇는 8촌에 해당 하는 고조종高祖宗, 증조를 잇는 6촌 범위의 증조종曾祖宗, 조부를 잇 는 4촌 범위의 조종祖宗 그리고 같은 부모를 둔 녜종禰宗 등이다. 이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그림 1>을 보듯이 불천위로 추대된 파조를 중심으로 파종이 형성되는데, 그 범위는 파조 이래의 모든 후손을 포함한다. 이러한 원칙은 파조의 불천위 제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경주에 위치한 경주최씨 잠와 종가의 경우 불천위 조상인 잠와潛窩 최진립崔震立(1568~1636)은 현종손 최채량崔埰亮 씨로부터 4대를 훌쩍 넘어 14대에 해당하는 조상이지만, 지금까지도 종손을 비롯한 후손들은 잠와 선생의 기일이 돌아오면 어김없이 제례를 거행한다. 왜냐하면 잠와 선생은 4대봉사 원칙에 상관없이 제사를 모실 수 있는 불천위로 추대되었기 때문이다. 또 제례에 참사하는 제관들 역시 잠와 선생의 직계와 방계를 포함하여 촌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확대되는데, 이는 대代를 거듭하여 내려갈수록 더욱 확장된다.
그런가 하면 파조의 불천위 제례는 후손들이 혈통적 동질감을 확인하고 결속력을 강화하는 주요 계기로 작용한다. 즉 문중 구성원들이 친목과 결속력을 다지는 경우는 문중회의와 파조를 위한 불천위 제례인데, 동질감을 가장 고조시키는 것은 제례가 거행되는 행례行禮 현장인 것이다. 왜냐하면 특정 안건을 중심으로 각자의 의견을 수렴하는 문중회의에서는 대립과 갈등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지만, 파조의 제례에서는 동일시조로부터 파생된 후 손이라는 혈통적 동질감을 강하게 실감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주에 위치한 이천서씨 양경공 종가의 22대 종손 서기호徐奇鎬 씨는 “양경공 할배 큰제사를 함께 준비하고 모시면서 후손들간에 결속력이 강해지는 측면이 있다. 아무래도 같은 조상을 모시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한다. 아울러 행례 현장에서는 혈통적으로 우위에 놓이는 종손을 중심으로 직계와 방계, 항렬 등에 근거한 종법적 위계질서가 수립되기도 하는데, 이로써 종손을 정점에 배치한 피라미드형 서열체계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고조종은 종법제도에서 규정한 오세즉천의 소종에 해당한다. 이에 따라 4대봉사 원칙에 의해 4대代를 넘기면 소종 범주에서 제외 되는데, 이는 5대조에 대한 조상제례를 수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림 1>을 보듯이 소종(고조종)은 8촌 이내의 부계친족으로 구성된다. 즉 동일한 고조로부터 파생된 후손들의 최대 범주가 8촌이 되는 셈인데, ‘동고조同高祖 팔촌’이라는 담론 역시 여기에 유래하고 있다. 이처럼 동일한 고조를 둔 후손들이 형성한 소종은 한국의 ‘당내堂內’ 혹은 ‘집안’에 해당한다. 중국에서 ‘당堂’은 조상 제례를 지내는 장소를 일컫는데, 이로써 당내는 ‘조상제례를 지내기 위해 당에 모인 사람들’이라는 뜻을 지니는 셈이다. 증조종은 동일한 증조부를 둔 6촌 이내의 범주에 속하는 부계친족, 조종은 4촌 이내, 녜종은 형제들로 구성된 부계친족이다. 그리하여 이들 집단 성원들은 각자의 조상을 위한 제례에 참사할 수 있는 자격과 의무를 부여받는다.
2. 문중의 전통적 역할과 의미
예기에 “인도친친야人道親親也, 친친고존조親親故尊祖, 존조고경종 尊祖故敬宗, 경종고수족敬宗故收族, 수족고종묘엄收族故宗廟嚴, 종묘엄고 중사직宗廟嚴故重社稷…”, 즉 “사람의 도는 친한 이를 친하게 여기는 것이다. 친한 이를 친하게 하기 때문에 조상을 존중하고, 조상을 존중하기 때문에 종통을 공경하고, 종통을 공경하기 때문에 족친을 거두고, 족친을 거두기 때문에 종묘가 엄해진다. 종묘가 엄하기 때문에 사직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종 宗’은 종묘 곧 사당이라는 뜻이며, 글자 구성에서 ‘宀’는 건물의 형태를 상징하고 ‘示’는 제물을 차려놓은 제단을 본뜬 것으로, 제물을 차려 신에게 보여준다는 뜻이다. 이로 볼 때 ‘종宗’이란 ‘건물 안에서 제사를 지낸다’는 뜻인데, 이는 조상제례를 거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조상제례는 문중[宗]에게 부여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문중이 수행하 는 조상제례는 파조의 불천위 제례를 비롯해 선대 조상들의 시제 등이다. 특히 파조에 대한 제례는 문중 구성원들의 결속력을 강화시키는 큰 행사로 여겨진다. 제례를 준비하고 수행하는 과정에서 같은 조상을 둔 자손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문중에서는 불천위 조상의 제례를 거행하기 위한 경 제적 기반을 구축해두는데, 대부분 토지 형태로 조성되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다. 이를 위토位土(혹은 소所)라고 한다. 위토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토지가 있을 때는 일정 부분을 지정해두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 자손들이 별도의 자금을 마련하여 조성하기도 한다. 그런 다음 토지를 임대(소작)하여 얻어지는 이익금으로 제례에 소요되는 경비를 충당한다.
문중의 또 다른 역할은 보종補宗 곧 종가를 보위하는 일이다. 종가는 혈통적으로도 문중의 구심적 존재이기도 하지만, 불천위 조상의 신주를 모신 사당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런 이유로 문중은 종가의 안위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보종에는 물질적 보종과 정신적 보종이 있다. 물질적 보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종가의 ‘봉제사奉祭祀’와 ‘접빈객接 賓客’을 위한 경제적 지원이다. 이를 위해 문중에서는 위토를 조성하고, 만약 위토 마련이 여의치 않을 때는 제위소祭位所라는 조직을 만들어 제례 비용을 충당한다. 또한 접빈소接賓所를 조직하여 종가가 손님 접대에 소홀해지지 않도록 일정 경비를 지원하기도 한다. 정신적 보종의 대표적인 것은 종가가 후사後嗣를 무사히 이어나가도록 지원하는 일이다. 특히 “종가는 문중의 얼굴이고, 종손은 지손들의 얼굴”이라는 인식으로 인해 문중에서는 종손의 혈통을 이어나가는 혼인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종손의 혈통은 곧 종가의 정통성을 의미하며 나아가 문중 전체의 정통성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혼반婚班의 이모저모를 따지고 종부의 사람됨을 문중에서 미리 판단하여 혼인을 결 정하는 경우도 있다. 종부가 들어오면 그때부터는 후손을 기다린다. 그러다가 후손을 얻지 못했을 때는 문중이 다시 앞장선다. 문회門會를 열어 종가에 들일 양자를 물색하는 것이다. 이때 종가의 양자로 일단 지목되면 순순히 보내는 것이 지손들의 암묵적 원칙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것 역시 ‘보종’의 행위로 여겼기 때문이다. 조상 선양도 문중의 주된 역할이다. 그중 묘소와 재실[齋舍], 서당(혹은 서원)과 정자 등의 유교문화유산은 해당 가문의 위세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건물을 증축하고 경관을 조성하는 일에 적극적이다. 특히 묘소 앞에 세우는 비석과 각종 석물石物은 조상의 사회적 위상과 직결되는 관계로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편이다. 학문이 뛰어난 조상들의 문집 간행도 중요한 일이다. 문집 간행의 기본 취지는 조상이 남긴 글(학문적 업적)을 후세에 전하는 것이지만, 근본적인 목적은 문중의 학문적 위상을 드높이기 위함이다. 그런가 하면 조상의 학문적 업적을 현창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서원 건립이다. 이런 이유로 성리학이 심화되는 18세기 이후에는 각 문중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조상을 배향하는 문중서원 건립이 활발해지기도 했다. 아울러 족보 간행도 문중의 주요 사업인데, 훌륭한 조상을 둔 문중의 경우 족보를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중은 종가에 대한 지원뿐만 아니라 소속 구성원, 곧 후손들간의 상호협력도 중시한다. 이를 위해 안동 하회마을 풍산류씨 문중에서는 영건소營建所, 섬학소贍學所, 의장소義庄所, 동별소洞別所 등을 조직했다. 영건소는 재실과 정자 등과 같이 문중 소유의 건 물을 관리하는 조직으로, 쇠락한 건물을 보수하거나 중건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섬학소는 문중 자녀들의 학업을 장려하기 위한 것으로, 경제적 어려움으로 공부에 전념할 수 없을 때 재정적 후원 을 한다. 의장소는 흉년 등으로 인해 빈곤에 처한 후손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해주는 일종의 구휼조직이다. 동별소는 혼례와 상례를 비롯해 마을 행사 등에 물질적·인적 지원을 하는 조직이다. 이 들각각의 소所는 경제적 기반(토지)을 토대로 운영되며, 결성 취지 는 제각각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공동체 결속과 친목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
문중 운영에서 종족 간의 질서를 수립하는 일도 중요한데, 이를 위해 족규族規를 마련해두는 경우도 있다. 안동에 위치한 진성 이씨 주촌종가의 이정회李庭檜(1542~1612)가 작성한 송간일기松澗日記에 족계族契 자료가 실려 있다. 이정회는 1583년에 안동 와룡 주촌마을에 세거하고 있는 진성이씨 족친들을 중심으로 족계 [族會]를 결성했고, 서문에 “계원들은 대개 족당族黨으로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인데 평소에 서로 친목을 다지거나 길흉사에 상호 부조하지 않으니 어찌 돈독해지겠는가?”라고 적혀있다. 그리고는 규약을 만들었으니 잘 운영하자는 내용을 덧붙이고 있다. 총 12 가지 조항으로 구성된 규약은 상호부조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혼례와 상례에 서로 부조를 하고 상례에 필요한 물품을 지원하는 등이다. 그런가 하면 규정을 어겼을 때를 대비하여 처벌 항목을 별도로 마련해두기도 했다. 즉 정기적으로 열리는 회의에 불참하거나 유사有司 등의 소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거나 웃어른에게 무례한 언행을 하면 벌을 내리는 것이다.
안동지역 의성김씨 문중 역시 문란한 행동을 저지른 후손을 처벌하는 규정이 전한다. 문중에서 내리는 벌을 ‘문벌門罰’이라 하는데, 행실이 올바르지 않은 자, 조상에게 누를 끼치는 행동을 한 자, 문중의 명예를 훼손시킨 자 등이 대상이 되었다. 이런 경우 문회門會를 열어 “◯◯를 문벌에 부치자”는 합의를 보면 바로 실행에 들어간다. ‘문벌’에는 대개 4종류가 있다. 첫째, 가장 가벼운 벌칙으로 ‘책망’이 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종가로 불러 문중성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문장門長을 비롯한 문중어른들 이 “처신을 그 정도밖에 하지 못하느냐! 두번 다시 그런 행동을 했을 때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그런 짓을 하려면 아예 이곳을 떠나라” 등과 같이 엄중한 경고를 함으로써 공개적으로 창피를 주는 벌이다. 둘째,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머슴을 종가로 데려와서 볼기를 치는 벌이다. 이때 머슴에게 주인의 옷을 입히고 갓을 씌워 볼기를 때린다. 그러면 이튿날 “◯◯양반, 어제 문벌을 받아 그 집 머슴이 대신 가서 볼기 맞았다더라”는 소 문이 마을에 퍼져 체면을 잃게 된다. 특히 머슴들은 삼삼오오 모여 “◯◯어른 때문에 아무개가 볼기 맞았다더라”는 소문을 퍼뜨려 머슴들 사이에서도 조롱거리가 된다. 아마도 문중에서는 이러한 효과를 미리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와 관련해 안동 내앞마을의 의성김씨 청계靑溪 김진金璡(1500~1580)이 남긴 유언문에도 주인 대신에 종을 벌하라는 대목이 나온다. 청계는 “재산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가묘 제사를 게을리하거나 절에 다니거 나 굿을 하는 자가 있으면, 여럿이 가서 이를 책망하고 그 집 종에게 매를 100대 치거라(然財富而不謹家廟祭祀 以媚佛滛祀爲事者多 此則衆 攻之可杖奴一百)”는 유언을 남겼다. 셋째, ‘회곡會哭’이라는 벌이다. 벌에 부쳐진 집 대문 앞에 가서 ‘곡哭’을 하는 것이다. 잘못을 저 지른 후손이 있으면 문중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그 집 앞에 가 서 “어이! 어이!”하면서 곡을 한다. 이는 “그런 못된 짓을 저지른 너는 도저히 살아 있는 인간이라고는 볼 수 없고,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라는 뜻을 전하기 위함이다. 문중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대문 앞에 가서 하루 수차례씩 곡을 하면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결국에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왜냐하면 회곡을 시작하면 당사자가 마을을 떠날 때까지 계속했기 때문이다. 당사자로서는 어차피 떠날 바에야 회곡을 오래 끌어 창피를 더 당하기 전에 일찌감치 끝내는 편이 유리했던 것이다. 넷째, ‘할보割譜’라는 벌이다. 말 그대로 족보에서 이름을 삭제하는 것으로, ‘문벌’ 중에서 가장 엄중한 벌이다. 잘못을 저지른 후손의 성姓과 본本은 남겨두고 파보派譜에서 이름만 삭제한다. 이는 “너 의 성과 본은 우리가 알 바 아니고, 우리 조상과의 인연은 끊어 버린다”라는 의미를 가진 벌이다. ‘할보’를 당하면 창피는 물론 이고 유림 출입도 제대로 못하게 되며 조상제례에도 참사할 수 없다. 대개 이런 사람들은 아예 다른 지방으로 이주해간다고 한다.
이처럼 문중은 후손들의 어긋난 행위에 대해 엄중한 벌을 내 리면서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해갔다. 문중이 이러한 역할을 원활 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조직화된 체계를 갖출 필요가 있는데, 우선 문중의 대표격인 문장門長을 선출하는 일이다. 문장은 학덕이 높고 덕망이 있는 연장자를 대상으로 선출하며 임기는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다. 또 재정업무를 전담하는 유사有司를 별도로 두는데 규모가 큰 문중에는 다수의 유사가 존재하기도 한다. 그 외 별도의 직책은 없고 종손과 문장이 문중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다. 종손은 혈통적 정통성을 지닌 우월적 존재라고 한다면, 문장은 사회적으로 우월성을 지닌 존재이 다. 혈통을 중시하는 한국사회에서는 당연히 종손의 존재가 더 부각되지만, 문중회의 등과 같은 사회적 역할이 두드러지는 장소에서는 종손과 문장이 서로 견제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그야말로 혈통적 우월성과 사회적 우월성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 나 한편 종손과 문장의 이러한 견제 관계는 문중의 균형된 발전 을 위한 긍정적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3. 현대사회 문중의 변화양상
근대화 이후 전통적 문중조직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이유는 문중을 지탱하고 있던 후손들이 도시로 이주함에 따라 문중의 운영기반이 약화되었고, 공동체 의식 등의 쇠퇴로 인해 문중에 대한 관심도가 낮아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문중의 전통적 역할을 중심으로 변화와 지속의 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오늘날의 문중 역할은 규약에 명시되어 있는데, 다음은 경주최씨 가암파 문중의 운영규약이다.
제2조(목적) 본 문중은 다음 사업을 목적으로 한다.
가) 조상에 대한 숭모, 종가 및 용산서원 등의 건물 및 묘소 관리
나) 문중 규율 정립과 재산관리
다) 후손에 대한 선도와 육영 장학 사업
라) 상호 친목과 화합 도모
마) 기타 문중 발전을 위한 사업
첫째, 경주최씨 가암파의 운영규약에도 나타나듯이 조상 숭모 사업은 지금까지도 중요한 역할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오늘날에는 제관의 숫자와 연령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산업 화로 인한 농촌인구의 도시 이주 현상에 의해 문중 구성원들이 원래의 터전을 떠나 타지 생활을 하는 경우가 대폭 증가했고, 또 급격한 근대화는 공동체 의식을 비롯해 전통적 가치관의 쇠퇴를 초래하여 조상제례의 참여율이 낮아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종가의 불천위 제례에서도 제관 부족으로 분정分定(역할분담)을 제대로 할 수 없어 1인다역을 담당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중장년층들의 참여율이 저조하여 제관들의 평균 연령이 70세를 넘길 정도로 고령화되어가는 점도 주목된다. 아울러 전통적 가치관의 변화는 여성들의 제례 참여도를 저하시켜 제물 장만에 적지 않은 차질을 빚고 있다. 예전에는 문중 여성들이 종부를 중심으로 제물을 마련했지만, 최근에는 일손이 모자라 외부의 전문인력을 요청하는 실정이다. 이처럼 제관의 고령화와 집안 여성들의 낮은 참여도로 인해 제례문화의 지식 전승이 단절될 우려가 적지 않다. 즉 전통을 계승할 차세대들이 제례현장에 참여하지 않은 탓에 떡, 도적, 과실을 괴는 방식 등과 같이 제례문화에 필요한 기술 전승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둘째, 문중의 구심적 존재인 종가를 지원하는 보종補宗의 역할인데, 경주최씨 가암파의 운영규약에도 ‘종가의 건물 관리’라는 명목이 포함되어 있을 만큼 종가에 대한 지원은 여전히 주요 역할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전국적 경향으로 볼 때 오늘날에는 전통적 보종에 포함된 대부분의 내용이 유명무실해진 점이 적지 않다. 즉 우리사회의 전통적 가치관과 공동체 의식의 약화로 인해 종가에 대한 관심이 저하됨에 따라 보종의 범위가 대폭 축소된 것이다. 특히 종손의 혼인이나 후계자(아들) 출산 등은 사적인 영역으로 간주되어 거의 관여를 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가 하면 종가의 주된 책무인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 중에서도 제례의 경우에만 문중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는데, 이것 역시 위토를 기반으로 한 경제적 지원이 대부분이고 노동력 지원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실정이다. 이는 현대사회에서 종가가 처한 위상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조상 선양에 관련된 역할이다. 흥미로운 점은 조상 선양 의 역할은 현대사회에서 오히려 활발해졌다는 사실이다. 특히 산업화로 인해 경제 상황이 전반적으로 향상됨에 따라 묘소의 봉분을 확장하고 그 주변에 상석과 비석 등을 화려하게 조성하고, 문집 간행은 물론이고 기존에 발간된 문집을 국역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학덕이 높은 조상들을 조명하는 연구사업과 학술대회 등을 통해 대외 인지도를 높이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조상을 선양한다. 이처럼 오늘날에는 산업화·서구화로 인해 전통적 가치관은 비록 쇠퇴했지만, 문중의 조상 선양 역할은 예전에 비해 훨씬 활발해지고 다각화된 경향을 보이고 있다.
넷째, 문중성원간의 상호부조 역할이다. 경주최씨 가암파의 운 영규약에도 ‘상호친목과 화합 도모’라는 조항이 마련되어 있듯이 후손간의 친목과 화합은 오늘날에도 강조되고 있는데, 다만 내용적 측면에서는 크게 달라진 경향이 나타난다. 예전에는 후손들의 혼례와 상례 등에 문중 차원에서 물품(현금 부조 포함)과 노동력 지원을 의무적으로 했으나, 지금은 개인적 차원에서 자율적으로 부조(현금)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사실 노동력 수급이 원활하지 못했던 전통사회에서는 혼례와 상례 등에 일손 지원(품앗이)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런데 당시에는 후손들이 같은 마을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력 교환이 비교적 수월했지만, 산업화 등에 의해 농촌 인구의 도시 이주 현상에 의해 현실적으로 힘들게 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살림이 궁색한 후손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해주는 섬학소贍學所나 의장소義庄所 등과 같은 구휼적 역할은 사라졌으나, 오늘 날에는 문중 차원의 장학회를 조직하여 형편이 어렵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에게 학업장려금을 지급하고 있다. 경주최씨 가암파 역시 운영규약에 ‘육영 장학 사업’을 명시해둘 정도로 문중의 주요 역할로 간주되고 있다.
다섯째, 문중조직의 질서를 세우는 역할이다. 경주최씨 가암파의 운영규약에도 ‘문중 규율 정립’이라는 항목이 포함되어 있듯이, 오 늘날에도 문중의 질서 수립은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다. 이와 관련 해 가암파 문중의 상벌賞罰에 관한 규약을 살펴보기로 하자.
제6장 상벌심의위원회
제1조(표창) 문중의 발전에 지대한 공이 있다고 인정되는 종원에 대하여 상벌심의위원회의 결의에 의하여 표창할 수 있다
제2조(징계) 문중을 음해획책하거나 종원 간 친목과 화합을 해칠 목적으로 파벌 등을 조장, 선동하는 자는 민·형사상 책임과 아울러 상벌심의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징계할 수 있다.
제3조(상벌심의위원회 구성) 운영위원회서 주관하며 운영위원장이 상벌심의위원장이 되고, 운영위원이 심의위원이 된다
제4조(징계의 종류 및 의결)
가) 경고 : 운영위원 2/3 이상 참석에 과반수이상 찬성으로 의결하며 징계일로 부터 1년간 문사에 관여할 수 없다. 나) 견책 : 운영위원 2/3 이상 참석에 과반수이상 찬성으로 의결하며 징계일로 부터 3년 간 문사에 관여할 수 없다.
다) 파문 : 운영위원 2/3 이상 참석에 2/3이상 찬성으로 의결하며 문중에서 파문한다. 파문된 자는 파문일로부터 10년 이 경과한 후 운영위원회에 복권신청을 할 수 있다.
라) 의결은 무기명투표로 한다.
내용을 보듯이 문중 발전에 기여한 사람에게는 표창을 주고, 문중을 음해하거나 파벌을 부추기는 사람에게는 징계를 내린다고 되어 있다. 문중 발전에 기여했다는 것은 거액의 기금을 기탁하거나 평소 문중 행사에 적극적으로 활동해온 경우를 말한다. 이에 반해 문중 운영에 불만을 품고 음해를 펼치거나 구성원 간에 파벌을 조장하여 화합을 방해하는 경우 민·형사상 책임과 더불어 상벌심의위원회를 거친 후 징계하도록 되어 있다. 징계에는 ‘경고’와 ‘견책’이 있는데, 전자는 1년간 문중일[門事]에 관여할 수 없고 후자는 3년간 문중일[門事]에 관여할 수 없다. 그리고 가장 무거운 징벌인 ‘파문’은 10년이 경과하고 나서 운영위원회에 복권신청을 한 후 승인을 받도록 되어 있다. 이처럼 문중의 전통적 역할을 중심으로 오늘날의 문중 역할을 비교해본 결과, 세부 내용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 거의 변화가 없는 편이다. 이를테면 조상 숭모의 경우 지금도 종가의 불천위 제 례에 물질적·인적 지원 등을 하고 있지만, 다만 공동체 의식과 전통적 가치관의 약화로 후손들의 참여율이 저조해지는 실정이다. 종가를 지원하는 보종 역할은 대폭 축소된 경향을 보이는데, 특히 종손의 혼인 등과 같은 사적 영역에서의 문중 관여는 거의 사라졌다. 조상 선양의 역할은 오히려 예전보다 더 활발해졌는데, 이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고 문중성원간의 상호부조는 문중 차원에서 의무적으로 이루어지던 것이 후손들이 자율적으로 행하는 이른바 개별 부조 방식으로 전환되었으며, 또한 예전과 달리 노동력 부조는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렸다. 마지막으로 문중 조직의 질서를 수립하는 역할은 오히려 엄격해진 측면이 있다. 경주최씨 가암파의 운영규약을 보듯이 대부분의 문중에서도 상벌賞罰에 관한 규정을 마련해두고 있다. 특히 사안의 중대성에 따라 민·형사상 책임을 물리는 등 법적 차원에서 징계를 내린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런가 하면 오늘날 새롭게 나타난 문중의 역할도 있다. 그건 바로 청소년 또는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한 ‘뿌리교육’이다. 경주 양동의 여주이씨와 월성손씨 문중에서는 1985년부터 문중의 청소년을 비롯해 후손을 중심으로 뿌리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여주이씨 문중에서는 청소년 100여 명을 대상으로 4박 5일간의 교육을 옥산서원에서 했으며, 월성손씨 중앙종친회에서는 학생들의 하계 방학 기간인 8월 초순에 각각 2기로 나눠 경주 양동에 위치한 관가정觀稼亭에서 2박 3일 과정으로 ‘청년층모선습례교육靑年層慕先習禮敎育’을 실시했다. 교육에서는 성씨의 세계世系와 선조들의 묘소 위치와 내력을 기본적으로 학습하고, 그 외 촌수계산법과 전통예절에 대한 체험교육이 이루어진다.
4. 문중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부계친족이념은 고려말 주자학이 도입되고 나서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의 중심적 원리로 작용하고 있다. 문중은 부계친족이념의 대표적 산물로, 공식적·비공식적 조직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즉 문중은 특정 혈통을 중심으로 결성된 친족 집단이라는 점에서는 비공식적 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대외적으로 는 공식적 조직으로 군림하는 것이다. 특히 내적 결속력이 강한 문중은 지역의 여론 형성 등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여타 사회조직에 비해 영향력이 비교적 큰 편이다. 이런 이유로 문중은 조선시대에도 지역사회의 견제세력으로 존재해왔는데, 예를 들어 향촌 지배권을 장악하기 위한 ‘향전鄕戰’ 역시 그 중심에 문중이 있었다. 재지사족들이 향권鄕權을 둘러싸고 대립할 때 성씨별로 조직된 문중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이처럼 문중의 영향력이 막대했던 까닭에 후손들 역시 개별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문중구 성원으로서의 소속감을 자긍심의 원천으로 삼았다. 이런 경향은 유명 인물을 배출한 성씨의 문중일수록 더욱 강했는데, 이는 삶의 버팀목과도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면서 신분제가 폐지됨에 따라 양반층의 전유물이었던 문중의 위력이 약화되고, 1949년의 농지개혁으로 인해 상당량의 위토(농지)가 정리되면서 문중의 경제적 기반 등이 붕괴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해방을 거쳐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근대화·산업화에 의해 개인주의 관념이 팽배해지면서 전통적 공동체 의식 또한 힘을 상실하면서 문중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났다. 아울러 전통사회의 문중은 혈연과 지연을 기반으로 조직되었지만, 오늘날에는 문중구성원들의 도시 이주 현상에 의해 대부분의 집성촌이 해체되면서 문중의 지역적 응집력 또한 사라져버렸다. 즉 전통사회에서는 혈연과 지연이라는 두 요소에 의해 문중이 형성되었으나 지금은 오직 혈연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집성촌 중심의 문중이 아니라 전국 단위의 종친회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활발해졌다. 전통사회의 경우 문중구성원들 대부분 집성촌이나 해당 지역에 거주했지만, 지금은 거주지역이 전국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볼 때 향후 지역 중심의 문중 역할은 더욱 위축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