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 설화 연구
Ⅰ. 서론
인천은 삼국시대에 ‘미추홀(彌鄒忽)․매소홀(買召忽)’ 등으로 불리던 곳으로, 이후 왕조의 교체와 정치적 상황에 따라 ‘경원(慶源), 인주(仁州), 인천(仁川)’ 등으로 지명이 바뀌고 읍호에 변화가 생겼던 지역이다. 역사적으로 인천을 가리키는 지명 중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이 미추홀이다.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에 의하면, 미추홀은 고구려에서 남하한 비류가 도읍을 정한 곳으로 한강유역에 정착한 백제의 건국과정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현재 인천지역에서는 미추홀에 정착한 비류가 도읍을 정한 곳을 문학산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문학산이라는 명칭이 언제 생겼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18세기 중엽(1757~1765)에 펴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문학산이 처음 등장하는데, 산천조에 ‘문학산은 부의 남쪽 2리에 있는데, 즉 남산이다.’라고 하였다. 이후의 읍지나 지지(地誌)에서는 ‘문학산’과 ‘남산’이 동시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아마도 18세기 중엽부터 문학산이라는 명칭이 일반적으로 사용된 듯하다.(『문학산의 역사와 문화유적』(인천광역시 남구청․인하대학교 박물관, 2002), 35-36쪽.)
문학산은 인천의 주산(主山)으로, 남구의 문학동․학익동과 연수구의 연수동․청학동에 걸쳐 위치해 있는 산으로서 조선시대에는 인천도호부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고 하여 남산, 학의 모습과 같다고 하여 학산, 산꼭대기에 봉수대가 있어 봉화둑산, 산 정상부에 산성이 있다고 하여 성산, 봉화의 모양이 멀리서 바라보면 배꼽과 같다고 하여 배꼽산 등으로 불렸다. 인천을 동서로 가르는 문학산은 행정적으로 남구와 연수구를 가르는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다. 문학산의 북쪽으로는 기성 시가지로 분류될 수 있는 주안지역, 남쪽으로는 최근에 일종의 신도시로 조성된 연수동 아파트지구, 동쪽으로는 인천의 새로운 중심업무지구로 부상하고 있는 구월지구, 서쪽으로는 해안에 인접한 구도심지역에 둘러싸여 있다. 문학산은 인천의 급속한 도시 성장에 따른 도시기능의 확대과정에서 각 지구들의 경계선 역할의 수행과 함께 녹지공간으로써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이영민, 「인천의 지형환경 특성과 문학산의 도시지리적 기능」, 『문학산 속으로 걸어가기』(인천광역시 남구학산문화원, 2005), 63-64쪽.)
오랜 세월동안 인천 시민들의 삶의 터전으로 자리 잡고 있는 문학산은 인천의 뿌리이자 문화의 본산으로 비류의 건국설화를 비롯한 많은 설화와 산성 및 고인돌 등의 고적들이 있다.
현재 인천지역에서 채록된 설화는 크게 4가지 경우로 요약․정리할 수 있다. 첫째 시사나 구지 또는 군지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채록된 경우, 둘째 학술조사차원에서 부분적으로 설화가 채록된 경우, 셋째 구비문학의 자료 수집 및 연구를 위해서 채록한 경우, 넷째 기존의 설화집에 수록된 설화를 간추리거나 보완하여 재수록 한 경우 등이다. 이러한 인천지역의 설화를 토대로 한 연구는 인천의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한 연구, 인천지역에 전승되는 개별 설화를 중심으로 한 연구, 그리고 인천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구전설화의 특성을 살핀 연구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인천지역 설화에 대한 기존 연구 현황은 이영수의 「인천 지역의 구전설화 연구」, 『인천역사-인천민속의 재발견』 4호(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 2007), 147-149쪽 참조할 것.)
본고는 기존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문학산 관련 설화를 통해 설화전승집단이 문학산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으며, 인천에서 문학산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Ⅱ. 문학산 전승 설화
1. 비류의 건국설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온조와 비류를 중심으로 하는 두 편의 건국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두 건국설화 모두 비류와 온조를 형제로 기술하고 비류가 형, 온조가 동생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형제가 고구려에서 남하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다만 온조전승에서는 온조가 위례성에, 비류가 미추홀에 도읍을 정한데 비해 비류전승에서는 형제 모두 미추홀에 도읍을 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건국설화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미추홀이 한 나라의 도읍지로 기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인천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는 비류의 건국설화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필자는 이미 「인천 지역의 구전설화 연구」에서 문헌설화에 등장한 비류의 건국 과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분석한 바 있다.(위의 논문, 151-156쪽.) 우선 건국설화에 관한 문헌설화의 내용을 소개하고, 설화의 기술 방식에 관하여 개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비류(沸流)의 건국(建國)
고구려의 시조 주몽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은 비류이고 작은 아들은 온조였다. 그런데 비류와 온조는 본국에서 살 수 없게 되어 많은 백성을 거느리고 남하하여 건국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한산에 이르러 삼각산에 올라가 거주할 곳을 찾아보았다. 비류는 바닷가에 거주할 것을 원하였든 바 십신(十臣)이 간하여 가로되 “이 한남의 땅이 모은 한수를 띄고 동은 남악에 접하고 남은 옥택을 바라보며 서는 대해를 마주보고 있어 그의 천험지리는 찾아보기 드무니 이곳을 도읍으로 정하시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나 비류는 이를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에 거주하였다. 한편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여 십신을 거느리고 있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짠 고로 안거할 수 없어 위례로 가서 본 즉 도읍이 정안(鼎安)하고 백성들이 편안하였다. 여기에 이르러 비류는 참회하여 죽고 그 신민들은 모두 위례로 돌려보냈다. 이상의 인천을 중심으로 한 백제 건국의 전설은 민간에 유포된 이외에 『삼국사기』 권 23 「백제본기」 1 시조 온조왕과 『동국여지승람』 권9 고적 조에 기록되어 있다.
생각건대 비류가 거주한 곳이 문학산 부근이고 또 뼈를 묻은 곳도 문학산 부근이 아닌가 한다. 고로 비류의 무덤은 반드시 이곳에 있으리라고 믿는다. 현재 미추홀릉이라는 것이 문학산 남면에 전하여 내려오나 아직 확실치는 않다.(이경성 지음․배성수 엮음, 『인천고적조사보고서』(인천문화재단, 2012), 51쪽.)
위의 인용문은 이경성의 「학익동․문학산 방면 고적조사보고」에 수록된 <비류(沸流)의 건국(建國)>의 전문이다. 인천시립박물관장으로 재직했던 이경성은 1949년, 당시 인천 전역을 대상으로 모두 7차례에 걸쳐 고적조사를 실시하였다.(「학익동․문학산 방면 고적조사보고」는 1949년 5월 24일 이경성이 관원인 김윤환, 이현숙, 김정희와 함께 실시한 1차 고적조사에 대한 결과물이다.)
<비류(沸流)의 건국(建國)>은 순수하게 민간에서 전승되던 이야기를 그대로 채록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비류가 인천에 도읍을 정하는 과정이 『신증동국여지승람』 인천도호부 고적조(미추홀(彌鄒忽) : 주몽의 두 아들 중에 맏아들은 비류(沸流)요 다음은 온조(溫祚)인데, 졸본부여(卒本夫餘)로부터 10명의 신하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행하니 백성들이 많이 따랐다. 드디어 한산(漢山) 부아악(負兒岳)에 올라 살 만한 땅을 찾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저 하니 10명의 신하가 간하기를, “오직 이 한남(漢南)의 땅이 북쪽으로 한수(漢水)를 띠고, 동쪽으로 높은 산악에 의지하고, 남쪽으로 비옥한 소택(沼澤)지대를 바라보고, 서쪽으로 큰 바다가 막혔으니, 천연(天然)의 험함과 땅의 이로움이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습니까.”하였다. 비류가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돌아가고 온조는 10명의 신하를 거느리고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하였다. 오랜뒤에 비류가 미추홀은 땅이 비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으므로 돌아와 위례성을 보니 도읍이 정리되고 백성이 안돈되었다. 드디어 부끄럽고 분하여 죽으니 그 신하와 백성이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갔다(『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Ⅱ(경기․충청도), 민족문화추진회, 1988, 179-180쪽)의 기록과 대체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인천을 중심으로 한 백제 건국의 전설은 민간에 유포”되어 있다는 설이 추가되어 있다. 이 설화는 기존의 문헌 기록을 토대로 문학산이 한 나라의 도읍지였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설화의 내용을 윤색한 것이다. 이렇게 문헌을 토대로 비류의 건국설화가 윤색된 것은 『인천시사』 하권의 <비류의 건국 설화>(인천시사편찬위원회, 『인천시사(하)』(인천시, 1973), 739쪽.)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高句麗의 始祖 東明王(朱蒙)이 北夫餘에서 도망하여 華本夫餘(高句麗의 異稱)에 와서 再娶한 후 두 아들을 얻었다.
兄은 沸流이고 아우는 溫祚였다. 沸流兄弟의 異腹兄인 琉璃가 北夫餘에서 찾아오자 東明王이 그를 世子로 삼았다.
이에 沸流와 溫祚는 高句麗에서 살 수 없음을 깨닫고 큰 뜻을 품고 많은 百姓과 더불어 南下하여 漢山에 이르러 負兒岩에 올라 定着할 곳을 찾아 보았던 바, 溫祚는 河南 慰禮城(지금의 京畿道 廣州)으로 가고 沸流는 彌鄒忽(지금의 仁川舊邑)로 가기로 作定 하였다.
위의 인용문은 <비류의 건국 설화>의 서두부분이다. 앞에서 살펴본 <비류(沸流)의 건국(建國)>설화와 비교했을 때, 비류와 온조가 고구려에서 남하하게 된 이유를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기존의 문헌 중에서 비류와 온조가 고구려를 등지고 남하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자세하게 기록한 것은 『삼국사기』 뿐이다. 『삼국사기』에 “주몽이 북부여에 있었을 때 낳은 아들이 찾아와 태자가 되매,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해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떠나가자, 따르는 백성들이 많았다.”(김부식, 이강래 옮김, 『삼국사기』 Ⅱ(한길사, 1998), 487쪽.)고 한다. 비류와 온조 형제는 태자인 유리에게 자신들의 존재가 용납되지 못할 것임을 염려하여 고구려를 떠나고자 했던 것이다. <비류의 건국 설화>에서 “沸流와 溫祚는 高句麗에서 살 수 없음을 깨닫”게 된 이유가 『삼국사기』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비류의 건국 설화>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간으로 하여 인천구읍에 위치한 문학산을 비류가 도읍한 곳으로 설정한 것이다. 1924년에 한 특파원이 부천군의 근황을 소개하면서 “高句麗王 沸流의 定都地이엇다는 文鶴山”(一特派員, 「일홈조흔富川郡」, 『개벽』(48호, 1924. 6), 122쪽.)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문학산이 비류의 도읍지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미추홀과의 관련 유적으로 문학산성이 지목된 것은 『세종실록』 지리지에 인천군의 남쪽 2리에 남산석성(南山石城)이 있다는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이후에 『동사강목』에서는 비류성으로, 『증보문헌비고』에서는 에분성으로, 그리고 『경기읍지』 등의 읍지류에서는 문학산성으로 칭하고 이를 비류와 연결시키므로서 ‘비류의 성’이라는 인식이 정착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미추홀의 중심유적으로 문학산성이 제기된다. 이것은 인천의 읍치(邑治)로서 인천도호부 관아가 지금의 관교동에 세워진 후 비류가 정도(定都)한 곳을 가까운 문학산성으로 비정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김상열, 「미추홀에 대하여」, 『인천역사』 1호(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 2004), 33-34쪽.)
沸流王陵(恚墳)의 所在
文獻備考 : 百濟國條 및 沸流國條에 高句麗王 東明聖王의 아들 沸流와 溫祚 형제는 烏干馬黎 등 10명의 臣下들과 함께 南쪽으로 도주하여 漢山에 이르렀다. 그들 일행이 負兒嶽山(三角山)에 올라 살곳을 살피니 兄 沸流는 바닷가에 살고자 하였다. 이에 여러 臣下들은 漢南땅이 북쪽에는 漢江이 끼고 동쪽에는 높은 山이 있고 남쪽에는 넓은 沃土가 있고 서쪽에는 바다가 있으니 그곳에 都邑을 권하였다. 그러나 沸流는 臣下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彌鄒忽(仁川)에 이르러 沸流國을 세우고 아우 溫祚는 河南慰禮城에 百濟國을 세우고 都邑하였다.
沸流는 仁川 文鶴山에 城을 쌓고 都邑하였는데 땅이 토박하고 또한 물이 짜서 사람살기가 어려웠으므로 나라의 기틀을 잡지 못했다. 沸流가 어느 날 아우가 세운 百濟國에 가 보니 기름진 넓은 땅에 百姓이 잘 살고 나라의 기틀이 잡혀있음을 보고 샘이 나고 분통이 터져 인천에 돌아와서 그만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沸流王陵을 恚墳(분해서 죽은 사람의 무덤)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이 무덤의 소재가 不可思議하다.
輿地誌에는 仁川府 남쪽 10里되는 곳에 큰 산소가 있는데 주변에 낮은 담이 둘러 싸여 있고 망부석(石人)이 흩어져 있는 古冢이 있는데 이를 옛부터 彌邪忽王墓라 일커러 왔다. 또 金正浩가 만든 大東地誌에는 이 산소가 高麗後妃崇親墓라고 기록되어 있다.
沸流의 都邑地가 文鶴山 정상이라면 반드시 沸流의 陵이 부근에 있어야 하나 그 위치가 구구하니 不可思議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李薰益, 『仁川地誌』(대한노인회 인천직할시연합회, 1987), 346-347쪽.)
위의 인용문은 『인천지지』에 수록된 <비류왕릉(에분)의 소재>의 전문이다. “비류는 인천 문학산에 성을 쌓고 도읍하였”다고 하면서 미추홀을 ‘인천 문학산’으로 단정짓고 있다. 이는 『문헌비고』의 “미추홀(彌鄒忽)은 바로 비류가 도읍하였던 곳으로 지금 인천부(仁川府)의 남쪽에 산이 있는데, 이름하여 남산(南山)이라 하고, 또 일명 문학산(文鶴山)이라고도 한다.”(『증보문헌비고』3(세종대왕사업기념회, 1978), 96-97쪽.)는 기록을 근거로 한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비류의 건국 설화가 비류가 미추홀, 즉 인천지역에서 도읍을 정하는 과정에 이야기의 초점을 맞추었다면, <비류왕릉(에분)의 소재>는 비류왕이 “백성이 잘 살고 나라의 기틀이 잡혀있음을 보고 샘이 나고 분통이 터져 인천에 돌아와서 그만 죽고 말았다.”고 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즉 문학산성의 이칭인 ‘에분성’이란 명칭이 생기게 된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설화의 내용은 앞에서 살펴본 비류의 건국설화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비류의 건국설화는 어떤 문헌을 참고하였느냐에 따라 설화의 전개 양상이 달라지는 것이다.
비류가 도읍을 정한 곳이 문학산이라고 하는 것은 구전설화에서도 볼 수 있다.
안관당이라는 것이 뭐냐 하믄 말이야. 에 거기 인저 옛날에 미치광이래는 양반이, 거기가 교육지기야, 도포야. 도읍을 했었대. 이 외무부가 [조사자 : 이름이 미치광이예요?] 이름이 미치광인지 성이 미치…. 뭔지 모르지. 그거는 미치광이라구. 인저 그런 얘기를 어른 분들한테 들었으니까 미치광이라는 양반이 그 산꼭대기, 그 거시기 다 돌루다 성을 쌓어. 근데 성이 다 무너지구 지금은 녀러바구리 있거든. 올라가 보니깐 그래 가지구 거기에다 도읍을 하구서 거기 우물가를 팠어. 그 꼭대기에다가 [조사자 : 우물요?] 응. 그런데 그 우물이 에 몇 길이나 되는지 모르지. 깊지, 아주 그런데 물맛이 가을에 가 먹어 봐두 그것이 물맛이 좋구 내년 봄에 가서 먹어봐두 그 물맛이 좋다 이런 얘기야. 그믄서 거기가 도읍을 했는데, 이러구서 하여가지구서 우물을 파구해서 성을 쌓구서 인구가 얼마냐믄은 서른 명이였었대그던. [조사자 : 삽십명이요?] 예. 삼십명. 그런데 인저 에 그 전에 그 물이 짰다 이 말이여. 그 전에는 물이 짜구, 또 인제 이 우물을 해서 여기서 해서 먹구 살 게 없다 이말이야. 그렇켄두루 해놓구 보니깐 그래서 몇 해를 살았는지 모르지만 그냥 인저 다른데루 이젠, 에 같 미추어리(미치광이)라는 양반이 다 인구는 서른, 인구는 서른명이라구 삼십명이라는 양반을 다 데리구 갔는지 들어갔는지 갔다구.
이런 얘기를 어른들한테 들었다 이런 얘기야.(성기열, 『한국구비문학대계』1-8(경기도 인천시․옹진군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143-144쪽. 이하 『대계』라고 약함.)
위의 인용문은 <문학산 안관당[배꼽산․봉화뚝]>의 서두부분이다. 이 설화의 화자는 12대째 문학동에 거주하고 있는 인천 토박이다. 화자가 “안관당이라는 것이 뭐냐 하믄 말이야.” 하면서 문학산에 있는 안관당에 대해 구술하는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비류의 도읍지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다만, 그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거의 망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화자는 문학산 꼭대기에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한 사람을 ‘미치광이라는 양반’ 내지 ‘미추어리’라고 하여 건국의 주체인 비류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여기서 화자가 말한 ‘미추어리’는 사람 이름이라기보다는 인천의 옛 지명인 ‘미추홀’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화자는 문학산 정상에 “돌루다 성을 쌓”고 그곳에 도읍을 정한 다음에 “거기 우물가를 팠어.”라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 문학산성을 남산석성(南山石城)이라고 지칭하고, 성 안에 작은 샘이 있다고 한 기록과 일치한다. 화자가 말하고 있듯이 문학산성에는 비류가 팠다고 하는 우물이 있었다. 문학산성에 있었다고 하는 우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승되고 있다.
문학산정(文鶴山頂) 우물
문학산성 동문으로부터 서북으로 약 150미터 되는 한층 얕은 곳에 석축의 우물이 있다. 현재는 석축이 도괴되어 태반이 매몰되었으니 십 몇 년 전까지도 맑은 물이 항시 넘쳐 흐르고 있었다 한다. 표고 280미터 가까운 높은 산 위에 이 같은 우물이 있는 것은 지질학상으로 보아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다. 이 우물을 판 것은 산성의 구축과 때를 같이 하였으리라고 본다. 아니 이곳에 물이 나오는 샘이 있었기에 산성을 구축한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이 우물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우스운 이야기가 동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즉 이 우물은 어떻게 깊은지 이곳에서 홍두깨를 찌르면 그 끝이 팔미도 바다에서 나온다고. 아마 몹시나 깊은 우물이었었고 또 물이 약간 짰던 것 같다.(이경성 지음、배성수 엮음, 앞의 책, 47-48쪽.)
문학산정의 우물은 ‘비류정’ 또는 ‘백제우물’이라고도 불린다. “현재는 석축이 도괴되어 태반이 매몰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경성이 문학산을 조사하기 훨씬 이전부터 백제우물은 우물로써의 기능을 상실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설화에서 동네 사람들의 우스개 소리로 입에 오르내리는 “이 우물은 어떻게 깊은지 이곳에서 홍두깨를 찌르면 그 끝이 팔미도 바다에서 나온다고.” 한 것은 단순히 우물의 깊이를 말한다기보다는 비류의 세력이 적어도 팔미도까지는 그 영향권에 두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문학산은 작은 산괴로 동쪽으로는 남동염전의 갯벌, 도장리에서 승학천을 따라 승기로 이어지는 저지대로 고대에는 바닷물이 들어오거나 습지로 되어 있기 때문에 관교동분지는 섬과 같은 지리적 환경을 이루고 있어 초기국가단계의 도읍지로는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김상열, 「인천의 중심, 문학산의 역사와 문화」,『문학산 속으로 걸어가기』(인천광역시 남구학산문화원, 2005), 121쪽.) 간척사업이 진행되기 이전에 문학산 주변은 삼면이 해수로 둘러싸여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 요새지역의 역할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이영민, 앞의 논문, 65쪽.) 문학산은 비류가 근거지로 삼은 곳이지 영토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그 영역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 『동사강목』에 “온조(溫祚)가 난리를 피하여 남쪽의 마한(馬韓)으로 달아나니, 마한에서 동북 1백 리의 땅을 봉(封)하여 주었다.”(『증보문헌비고』3, 95쪽.)는 것으로 보아 온조와 동등한 세력을 구축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비류도 이에 준하는 영토를 확보했을 것이다. 김상열은 온조의 ‘1백 리’에 준한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비류의 영향권에 있었던 지역을 오늘날의 인천 중구, 동구, 남구, 남동구, 연수구 등 원인천지역일 것으로 추정하였다.(김상열, 앞의 논문, 122쪽.)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문학산정(文鶴山頂) 우물>이다. 설화 중에서 전설의 경우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구성되기도 하고, 전설의 사실성과 진실성을 확보하기 위해 역사와 결합하기도 한다. 물론 전설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실과 실제 역사적 사실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이 온전치 못할 경우, 설화전승집단에 의해 향유되는 전설을 통해 역사의 일부를 복원할 수 있다. 설화는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할 수 있는 보조 자료로 활용이 가능하다. 백제우물에서 홍두깨를 찌르면 팔미도 앞바다에서 나온다고 하는 표현은 설화전승집단이 비류의 영토를 문학산에 국한하지 않고 그 범위를 폭넓게 인식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문학산 안관당[배꼽산․봉화뚝]>의 화자는 “우물을 파구해서 성을 쌓구서 인구가 얼마냐믄은 서른 명이였”다고 하여 비류의 도읍지에 거주한 인구를 집성촌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 것으로 구술한다. 이것은 문학산이 위치한 인천구읍이 쇠락하게 된 시대적 배경에서 그 요인을 찾을 수 있다. 인천구읍은 1883년 개항과 함께 인천의 중심이 현재의 중구로 옮겨가면서 인천의 행정과 교육, 생활을 담당하던 중심기능을 상실한 채 한적한 농촌의 경관을 지닌 변두리 중의 변두리로 전락하게 된다. 이것은 일제강점기와 산업화시기를 거치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경인선 철도와 경인 국도, 그리고 고속도로를 중심으로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문학산과 그 주변지역은 그저 인천의 남쪽 외곽으로 전락하여 한적한 시골 동네로 남아있었다.(이영민, 앞의 논문, 69쪽.) 개항과 더불어 인천구읍은 인천의 역사 속에서 사라졌던 것이다.
화자가 사람들을 “다 데리구 갔는지 들어갔는지 갔다구.” 한 것은 비류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지 못하고 소멸한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문학산이 비류의 발상지였다는 증거로 활용되는 ‘비류의 릉’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화자가 건국의 주체인 비류를 망각한 것과 관련이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문헌설화와 구전설화에 나타난 비류의 건국설화의 경우, 『삼국사기』에서 비류가 도읍을 정했다고 하는 미추홀을 문학산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건국의 주체인 비류의 경우, 구전설화에서는 그 이름을 망각하고 있다. 서규환․박동진이 인천지역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조사한 ‘역사 속의 인물 중 인천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항목에서 맥아더가 20.3%로 가장 많았고, 비류 4.3%, 김활란 여사 3.3%, 강재구 소령 2.7%, 장면 전총리 2.6% 순이었다.(서규환․박동진, 「인천 청소년의 비전(Ⅰ)-인천 청소년 사회의식 조사연구-」, 황해문화 ’98년 겨울(새얼문화재단, 1998), 176-177쪽.) 인천지역을 한 나라의 도읍지로 자리매김하게 한 비류가 현대사의 인물인 맥아더에 무려 16% 뒤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비류가 인천을 상징하는 인물로 자리잡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비류의 건국설화가 구전상으로는 온전한 형태로 전승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2002년 실시한 『문학산의 역사와 문화유적』 조사에서 채록된 구전설화 중에는 비류의 건국설화를 찾아볼 수 없다. 구전상으로는 비류의 건국설화가 거의 단절된 것으로 여겨진다. 비류의 건국설화가 단절된 요인으로는 현대인의 설화의식과 함께 문학산 정상에 자리하고 있는 군부대와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1950년대 후반 군부대가 상주한 이후, 반세기가 넘게 인천시민들은 문학산 정상을 제대로 밟아본 적이 없다. 문학산 정상에 대한 기억은 인천시민의 뇌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인 것이다. 따라서 건국설화에 등장하는 산성과 백제우물의 실체를 확인할 수 없음으로 해서 구전으로서의 전승은 단절되고 만 것이다.
사람들이 문학산 정상을 자유롭게 출입하고 산성과 백제우물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면 지금과 달리 비류의 건국설화는 좀더 다양한 형태로 전승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궁예설화’이다. ‘궁예설화’는 『삼국사기』 <견훤․궁예>조에 기록된 궁예의 출생과정에 보이는 신이성, 기아(棄兒) 그리고 극적 구출담과 궁예의 몰락과 비참한 죽음을 토대로 하여 한 편의 허구적인 이야기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런 ‘궁예설화’는 전승과정에서 궁예와 관련된 신이성이 제거되어 행적담 위주의 흥미 본위로 재구된 이야기와 궁예의 몰락과 비참한 죽음이 지역에 산재되어 있는 증거물과 함께 활용되어 재구된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이영수, 「‘궁예 설화’의 전승 양상에 관한 연구」, 『한국민속학』 43(한국민속학회, 2006), 321쪽.) ‘궁예설화’는 철원과 그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집중적으로 전승한다. 이것은 철원이 비록 몇 십 년이지만 한 나라의 도읍지였을 정도로 길지라는 자긍심이 설화전승집단으로 하여금 ‘궁예설화’를 전승하게 된 원동력이라 하겠다. 현재 철원과 포천지역을 중심으로 전승하는 ‘궁예설화’는 이 지역에 산재해 있는 증거물의 존재로 인해 구체적인 증거물이 제시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으며, 그밖의 지역에서는 증거물과 무관하기에 궁예의 행적을 흥미나 재미 위주로 구성한 이야기가 전승하고 있다.(위의 논문, 350쪽.)
2. 안관당(安官堂) 설화
안관당은 문학산성 내에 있었던 건물로, 1949년 인천시립박물관의 조사에서 처음으로 그 실체가 확인되었다. 그런데 안관당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은 물론 역대 지지와 읍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문학산의 역사와 문화유적』, 124쪽.) 조사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지름 13미터의 부지에 동면만 남겨놓고 높이 5척의 석벽이 거의 원형으로 쌓여있고 그 가운데 남북 약 7미터, 동서 약 3미터의 건물 유적이 있어 사방에 초석이 있고 동면 초석 가운데는 석단이 있다. 조선시대의 것이라고 추정되는 약간의 기와와 자기의 파편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조사단원과 동행했던 문학초등학교 후원회 상무이사였던 이승범씨의 말에 의하면, 안관당에는 사당이 있었고 사당 옆에는 수백년 묵은 큰 참기목이 울창하게 서 있었으며, 사당에는 목조로 남녀의 상을 만들어 그것에다 의복을 입혔다. 그리고 곁에는 크고 작은 목마․창․검이 놓여 있었으며, 봉수 남면에는 당지기의 집이 있어 항상 이곳을 관리하였다고 한다.(이경성 지음、배성수 엮음, 앞의 책, 48쪽.) 현재 안관당과 관련하여 전승되는 설화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채록된 형태는 다음과 같다.
옛적에 인천부사에 김모라는 이가 있었다. 이 사람이 죽은 후 가끔 김모의 영적(靈蹟)이 내리는 고로 동네 사람들이 이 분을 이곳 안관당에 모시었다 한다. 이것은 마치 연평도의 임경업장군 사당과도 같은 범주에 속한다. 그런데 김장군에 관하여 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즉 이곳에 병란과 같은 변고가 있을 적에는 김장군이 목마를 타고 창과 칼을 들고 산을 돌아다닌다고 한다. 또 이 사당이 보이는 산 아래를 승마한 채 지나가면 말굽이 붙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한다.(위의 책, 48-49쪽.)
위의 인용문은 「학익동․문학산 방면 고적조사보고」에 수록된 <안관당(安官堂)> 설화이다. “옛적에 인천부사 김모”는 임진왜란 당시 인천부사였던 김민선을 말하는 것이다. 『여지도서』에 임진왜란 당시 인천부사였던 김민선은 사민을 이끌고 산성을 보수하여 여러 차례 왜적을 물리쳤는데, 선조 26년(1593) 7월에 병사하였다고 한다.(『문학산의 역사와 문화유적』, 125쪽.) 김민선이 죽은 후 “가끔 김모의 영적(靈蹟)이 내리는 고로 동네 사람들이 이 분을 이곳 안관당에 모시었다”는 것이다. 지역주민들은 김민선을 모신 안관당을 “연평도의 임경업장군 사당과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김민선을 임경업에 비견될 만한 인물로 여겼던 것이다.
임경업은 충주 달천 출생으로, 국가를 위해 여러 가지 공을 세웠으나 역모에 관련된 혐의로 심문을 받다 옥사를 당한 인물이다. 오늘날 임경업은 연평도를 중심으로 한 해안지역과 충주의 충민사와 낙안읍성의 마을제의에서 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 임경업이 신으로 모셔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다는 점과 해당 지역의 지역민들을 위해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내륙인 승주군의 경우에는 그가 이 지역의 군수로 있던 시기에 지역민들을 위해 낙안성을 쌓아 주었으며, 서해안 일대에서는 어민들에게 조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준 것이 계기가 되었다.(서종원, 『그들은 왜 신이 되었을까-한국의 실존 인물신』(채륜, 2013), 82-85쪽.)
김민선이 “이곳에 병란과 같은 변고가 있을 적에는 김장군이 목마를 타고 창과 칼을 들고 산을 돌아다닌다고” 하는 것은 그가 인천지역을 수호하는 신으로 좌정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전란이 생길 때마다 주민을 돕기 위해 그의 혼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김민선이 인천지역의 수호신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임진왜란 당시 왜적의 손에서 인천지역민을 보호해준 공적을 높이 샀고, 여기에 왜군과 대치한 상황에서 병사한 것을 억울한 죽음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김민선이나 임경업과 같이 실존했던 인물들이 신으로 모셔지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한국 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했던 맥아더의 경우도 신으로 모셔져 있다.
안관당에 모셔진 김민선의 영험함을 나타나기 위해 “이 사당이 보이는 산 아래를 승마한 채 지나가면 말굽이 붙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한다.”고 하는 부연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이것은 안관당이 보이면 말에서 내려 김민선의 위국충절에 경의를 표하라는 의미이다. 태종 12년에 “고제(古制)에 의하여 대소 신민(大小臣民)으로 종묘와 궐문(闕門)을 지나는 자는 모두 하마(下馬)하는 것으로써 항식(恒式)을 삼되, 어기는 자는 헌사(憲司)가 규찰하여 다스리게 하소서.”(태종 12년 11월 5일.)라는 기사가 있다. 말을 타고 지나가는 것은 예법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1890년대에 쓰여진 『조선인정풍속』(『조선인정풍속』은 동양문고 소장의 작자미상의 필사본이다. 본문의 내용을 확인한 바에 의하면, 1890년대 이후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상부상조(相扶相助), 범로(犯路), 하마(下馬)’ 등 모두 147개의 소항목으로 구분되어 기술한 것으로, 48쪽 분량이다.)에서 “태묘(大廟) 앞을 지날 때에는 말에서 내리고 궁궐 앞을 지날 때에 빨리 걷는 것은 고례(古禮)이니, 전궁(殿宮) 앞을 지날 때에도 대소(大小) 관원들은 모두 말에서 내린다.”고 하였다. 말에서 내리는 것은 예를 표하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조선인정풍속』 ‘하마(下馬)’에 “서로 알고 있는 사이인 재상(宰相) 이하 조관(朝官)이 말을 타고 가다가 길 위에서 서로 만나면 모두 말에서 내려 인사하고, 보행하는 가난한 선비라도 서로 친지간이면 말을 타고 있던 사람이 말에서 내려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승마한 채로 안관당을 지나가면 말굽이 붙어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안관당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안관 할아버지’, ‘안관 할머니’이라는 양반이 그 신을 모셨다 이말이야. 모시구서 인저 연연이(해마다) 거기다 제사를 시월에 시월 달, 시월 달, 에 초하룻날, 초이튿날, 초사흘, 그 인저 고 임시에 제살 지내. 에 제살 지냈어.
그랬는데 예수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가지구 들어와 가지구서 박 호장 박호장이라는 양반이 거기에 살았거든. …(중략)… 그래가지구 살았는데 그 호장이 박 호장이라는 영강님이 예수를 안 믿구, 마누라님이 예수를 믿었다 이 말이야. 그 아들덜 허구 그래서 그 아들이 그저 안관당 그 집을 헐어서 에 불을 놓구 뒤에 또 느티나무, 느티나무래는 나무가 그 서른된 댐에두 썼었는데 그것두 한데 그냥 놓구 불을 질렀다 이 말이야. 불을 질르구서 내려와서 뭐 곧 죽었어. 그 형제가 즉사해 버렸어. 에 그래서 그 집이 자손이 아주 무해(없어) 버렸거든.(『대계』1-8, 144-145쪽.)
위의 인용문은 <문학산 안관당[배꼽산․봉화뚝]>의 일부분이다. 앞에서 살펴본 <안관당> 설화와는 여러모로 차이를 보이며 전승하고 있다. 먼저 안관당에 모셔진 신의 이름을 ‘안관 할아버지, 안관 할머니’라고 부른다. <안관당>에서 김민선이 병란과 같은 변고가 있을 때 문학산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으로 볼 때, 초기 안관당에 모셔진 신격은 호국신적 성격을 지녔을 것이다. 안관당(安官堂)이란 명칭을 “관의 힘으로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李薰益, 앞의 책, 301쪽.)이라거나 “안관은 관이 백성의 안정을 위해 순절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문학산의 역사와 문화유적』, 153쪽.)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안관당의 건물초석으로 미루어 안관당의 규모는 정면 3칸 정도이며, 규모면에서 볼 때 관이 주도한 사당으로 추정하고 있다.(인천광역시, 「문학산성 지표조사 보고서」, 1997. 99쪽(『문학산의 역사와 문화유적』, 126쪽에서 재인용).)
숙부께서 재계하시고 문학산신(文鶴山神)께 치제하셨다. 취침 후에 군교 한 명이 와서 고하기를 “꿈에 노인이 와서 이르기를 ‘당연히 양적(洋賊)을 대파할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라고 하여 군중에 널리 알렸다.(『譯註 邵城陣中日誌』(인천광역시역사자료관역사문화연구실, 2007), 47쪽.)
위의 인용문은 신미양요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소성진중일지(邵城陣中日誌)』 1897년 4월 20일자 기록의 일부이다. 『소성진중일지(邵城陣中日誌)』는 1871년 4월 6일부터 같은 해 5월 23일까지 총 48일간 인천 진중(陣中)에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이다. 진은 문학산에 설치되어 있었다.(위의 책, 6쪽.) 인천부사 구완식(具完植)이 임전을 앞두고 문학산신께 제사를 드리자, 산신이 한 군교에게 현몽하여 서양 오랑캐를 크게 물리칠 것임을 예언한다. 이를 이용하여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구완식이 문학산 산신께 제사드린 장소가 명기되어 있지 않지만, 당시 진이 문학산에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제사를 지낸 장소는 안관당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리고 병란과 같은 변고가 있을 때 김민선의 혼령이 나타났다는 점에 비추어 보아 당시 군교에게 현몽한 노인은 김민선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마을의 안녕과 번영, 그리고 풍요를 담당하고 마을 주민의 지역적 단합과 화목을 도모하는 마을신격으로 변모하게 된다. 안관당은 김민선의 전공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 아니라 해마다 주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동제적 성격의 신당으로 변모한다. 『문학산의 역사와 문화유적』에서 “안관 할아버지를 문학산의 山神으로 믿어 매년 그 앞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이를 안관제라 부른다. 정월 보름 안에 제를 지내는데,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마을의 풍년과 평안을 빌며 제사를 지내는 것은 물론, 아이가 없는 사람들은 아이를 낳고자 사당 앞에서 비손을 하였다.”(『문학산의 역사와 문화유적』, 156쪽.)고 하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왜 안관당에 모셔진 신격에 변화가 생긴 것일까? 『인천지지』에 안관당의 제전은 인천부사가 초헌관이 되고, 읍의 원로들이 아헌, 삼헌관이 되어 제사를 지냈는데 약 200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한다.(李薰益, 앞의 책, 301-302쪽.) 안관당 제의는 인천부사가 제관으로 참여하는 관 주도의 유교식 제사였다. 그런데 1883년 개항이 되면서 관교동에 있던 인천도호부가 폐쇄되고 중구에 감리서가 설치된다. 제물포에 개항장이 마련되고 읍치가 옮겨지게 되면서 문학산 일대는 점차 퇴락하게 되었다. 따라서 안관당 제의에 지방 수령이 참석할 필요가 없어졌던 것이다. 여기에 일제에 의해 국권피탈이 이루어지면서 호국이란 관념이 불필요하게 된 것도 안관당의 신격이 변하게 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청학동에 살던 아이를 밴 여자가 안관당 할아버지․할머니 흉내를 내었다. 아기가 태어났는데 벌을 받아 그 아이는 얼굴을 찡그리며 다리를 절며 씨익씨익 하고 다니게 되었다. 이런 아이를 보고 마을사람들이 씨익 소리를 내며 다닌다고 식칼래라 불렀다 한다.(『문학산의 역사와 문화유적』, 153쪽.)
위의 <식칼래 이야기>에서 임신부가 ‘안관당 할아버지․할머니’를 무시하는 행동을 하자, 그녀에게 신벌을 내려 ‘식칼래’라고 하는 천치 같은 아이를 낳게 했다는 것이다. 신의 이름이 ‘김민선’에서 ‘안관당 할아버지․안관당 할머니’로 바뀌었지만 그 영험함은 예전 그대로였던 것이다. 이처럼 당에 모셔진 신격에 변화가 생긴 것은 안관당의 경우만은 아니다. 중앙에서 영달한 자신들의 조상을 성황신이나 산신으로 모시는 사례는 많은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보인다. 자신의 조상을 신으로 봉사함으로서 지역민들의 자발적인 복종심을 유발하고 단결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또 중앙 관리들이 자신의 고향에 있는 산신 내지 성황신에게 작호를 더하게 하여 관향에서 자기 가문의 영향력을 과시하기도 하였다.(김갑동, 「고려시대 순창의 지방세력과 성황신앙」, 『한국사연구』 97(한국사연구회, 1997), 84쪽.) 지방의 토착세력 중에는 가문의 위세를 높이기 위한 일환으로 사당이나 성황당에 모셔진 자연신을 실존인물로 교체하여 숭배하였다. 그리고 인물신의 경우, 토착세력간의 흥망성쇠에 따라 그 이름이 바뀌기도 한다.
<문학산 안관당[배꼽산․봉화뚝]>에서 안관당은 예수를 믿는 박 호장의 아들들에 의해 헐리고, 주변의 신목들은 불태워진다. 민간신앙과 외래 종교인 기독교 간의 종교적 갈등이 표출되어 있다. 이 설화의 화자는 안관당을 파괴한 박 호장의 아들들이 “불을 질르구서 내려와서 뭐 곧 죽었어. 그 형제가 즉사해 버렸어. 에 그래서 그 집이 자손이 아주 무해(없어) 버렸”다고 한다. 신벌이 내려 박 호장 아들들이 죽었을 뿐만 아니라 그 집안은 절손이 되어 대가 끊겼다는 것이다. 개인주의보다 가족주의를 표방하던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자손을 번성케 하여 조상의 제사를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런데 박 호장 집안의 경우, 안관당을 훼손한 대가로 조상의 제사를 모실 사람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조상숭배를 중요한 미풍양속으로 여겼던 우리나라에서 죽어서 조상을 뵐 면목이 없어진 것이다. 결과론적으로 민간신앙과 외래 종교와의 싸움에서 민간신앙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문학산 정상부에 봉수대가 설치되었고, 임진왜란 중에는 의병이라 할 인천의 사민이 문학산에서 왜병을 격퇴하기도 하였다. 안관당이 위치한 문학산성이 인천의 대표적인 관방시설이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안관당과 박 호장 아들들의 대립은 단순히 종교적인 갈등으로만 볼 수 없다. 여기서 예수로 대표되는 기독교는 외세를 지칭한다. 안관당 제의를 미신적 행위로 간주한 외세에 의해 사당이 허물어지고 관목이 불탄 것은 조선왕조의 몰락 내지 패망을 의미한다. 그런데 안관당의 신격은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박 호장 아들들에게 신벌을 내려 즉사시킨다. 신벌은 당사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절손을 시켜 그 집안의 대를 끊어버린다.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세력에게 철저히 응징을 가한다. 외세의 침략으로 인해 당집이 산산조각이 난 상태이지만, 박 호장 집안의 절손을 통해 결코 민족혼은 사라지지 않았음을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안관당과 박 호장 아들의 대립은 민족 내적 갈등이 아닌 외세에 대한 민족적 저항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3. 사모주바위 설화
사모지 고개는 문학산 주봉과 연경산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백제시대에 중국으로 가던 사신이 넘던 고개로 알려져 있다. 해로를 통해 중국으로 가는 백제 사신들은 부평의 별고개를 넘고 사모지 고개를 넘어 지금의 송도 옥련동에 있던 능허대 한나루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 사신들은 사모지 고개에 이르러 별고개에 두고 온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큰 소리로 세 번 부르며 이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이렇게 세 번 부르고 작별했다고 하여 삼호현이라고도 한다. 『여지도서』에는 사모지 고개를 삼해주현(三亥酒峴)이라고 적혀 있다. 삼모지 고개에는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 꼭지에는 마치 동이와 같이 생긴 구멍이 뚫려 있다. 이 구멍에 삼해주가 가득차 있어 고개를 넘어가는 사람들이 고개를 오르다 숨이 차고 목이 마르면 그 술을 떠서 마셨다. 이 술은 한 잔 이상 마시면 안 되는데, 어떤 사람이 욕심을 부리고 술을 한 잔 이상 마셔서 그만 술이 말라 버렸다고 한다. 사모지 고개는 ‘삼호현’, ‘삼해주현’ 등으로도 불리는데, 그에 따른 다양한 이야기들이 전승되고 있다.
사모지 고개와 관련된 설화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위에서 언급한 ‘술바위’ 이야기이다. 이 유형에 속하는 설화는 ‘술이 나오던 바위(또는 샘)이 어떤 연유로 술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는 내용을 기본 줄거리로 하여 전승된다. 최상수는 이런 유형의 설화를 ‘주천 설화’로 명명한 바 있다.(최상수, 『韓國 民族 傳說의 硏究』(成文閣, 1988), 57쪽.) 주천 설화는 전국적으로 전승되고 있으나 대략 스무곳 미만 정도로 파악되고 있다.(황인덕, 「영월 ‘술샘(酒泉)’ 전설의 장소성과 역사성」, 『구비문학연구』(한국구비문학회, 2004. 12), 240쪽.) 본고에서 다루는 문학산의 술바위 설화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인천의 지명유래』에서는 술바위 이름을 ‘중바위’라고 지칭하고 있으며, 이밖에 ‘삼해주바위, 사모주바위, 모주바위’ 등으로 부른다고 한다. 술바위는 ‘전설 따라 삼천리’에 소개된 일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바위로, 오랜 세월 구전되어 내려오는 동안에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仁川의 地名由來』(인천광역시, 1998), 137쪽.) 본고에서는 술에 이야기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문학산과 관련해서 전승되는 술바위 관련 설화를 ‘사모주바위’ 설화로 통칭한다.
(2) 삼호현(三呼峴)
① 옛적에 산 넘어 어느 절에 한 중이 있었다. 이 중은 매일 같이 볼일이 있어 이 고개를 넘게 되는데 어느 날 몹시 목이 말라서 혼잣말로 “아- 술 한 잔만 마셨으면 좋겠다”라고 하였더니 난데없는 예쁜 색시가 길가 큰 바위에서 나오며 고운 손 맵시로 맛좋은 술 석 잔을 따라주어 중이 마시고 나니까 또 바위 속으로 사라졌다. 이렇게 하기를 달포나 계속한 어느 날 이날도 역시 중이 “아- 술 한 잔만 마셨으면” 하니 여전히 색시가 나와 전과 같이 술 석 잔을 따라주고 바위 속으로 들어갔다. 술을 마시고 난 중은 전에 없이 “또 한 잔만 주시오”하니 색시는 바위에서 나와 또 한잔을 부어 주고 바위로 사라졌다. 이 술을 마신 중은 또 “한 잔만 주시오”하고 청하였으나 색시는 안 나온다. 두 번 세 번 암만 고함을 질러도 색시는 종시 나오지를 않았다. 참다못하여 중은 바위를 붙들고 무릎팍을 대고 이마로 받았으나 색시는 나오지 않고 말았다. 그리하여 지금 이 바위에는 손자국과 무릎자국과 이마로 받은 자리가 아직도 있다.(이경성 지음、배성수 엮음, 앞의 책, 52쪽.)
위에서 인용한 <삼호현(三呼峴)>에는 삼모주바위와 관련된 3편의 설화가 채록되어 있다. 위의 인용문은 그 중의 하나이다. 이 설화는 다른 두 편의 설화보다 술이 나오지 않게 되는 과정이 흥미롭게 구성되어 있다. <삼호현>에 수록된 사모주바위 설화는 크게 두 가지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위에서 인용한 설화처럼 ‘사모주는 석 잔(또는 한 잔) 이상 마시면 안 된다.’는 금기가 내재되어 있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효성과 관련된 경우이다. 금기와 관련된 사모주바위 설화는 술이 나오지 않게 된 이유를 스님이 욕심을 부렸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당시의 정황을 설명하고 “지금 이 바위에는 손자국과 무릎자국과 이마로 받은 자리가 아직도 있다”고 하면서 증거물을 제시하는 일종의 지명유래담이다.
이 설화에서 행위의 주체는 ‘스님’이다. 일반적으로 스님은 구도자나 금욕자로서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런데 이 설화에 등장하는 스님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사모지 고개를 넘던 스님은 목이 말라서 “아- 술 한 잔만 마셨으면 좋겠다”고 한다.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불가에서 금하고 있는 술을 찾는다. 그리고 불가에서는 여인을 멀리하라하여 음욕을 금기시한다. 그런데 스님에게 술을 따라주기 위해 바위에서 나온 사람은 다름아닌 예쁜 색시이다. “이렇게 하기를 달포나 계속한”다. 스님은 스님으로서 지켜야할 본분을 망각하고 있다. 설화전승집단은 정상적인 스님이라면 이러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여긴다. 그래서 <중바위>에서는 금기를 파기하는 인물이 ‘중’에서 ‘파계 중’으로 바뀌게 된다. ‘중’에서 ‘파계 중’으로 인물의 면면이 바뀐 것은 사모주바위 설화에 등장하는 스님이 승려로서 갖추어야 할 도덕률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사모주바위에서 술이 나오지 않게 되는 것을 합리화시키고자 등장인물에 변화를 준 것이다.
색시가 스님에게 석 잔의 술을 대접하였다는 것은 누구도 그 이상의 술을 마실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일종의 금기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스님이 욕심을 부려 넉 잔의 술을 마시자, 술을 부어 주던 색시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스님이 욕심을 부린 까닭에 금기가 파기된 것이다. 설화에는 ‘보이지 마라’, ‘먹지 마라’, ‘열지 마라’ 등 여러 가지의 금기들이 등장한다. 이런 금기들은 모두 깨어지기 마련이다. 파기되지 않는 금기는 금기가 아닌 것이다.
② 일설에는 전기와 같은 색시가 아니고 중이 이 고개에서 앉아 쉬느라니까 어디서 물소리가 나기에 목도 말라 가본즉 바위에서 술이 나오더라. 그래서 석 잔만 마시었다. 그 후 어느 날은 몹시 조갈이 나서 넉 잔을 마시었더니 술이 뚝 끊이고 다시는 안 나오기에 손과 무릎을 대고 이마로 받았다고.(위의 책, 52-53쪽.)
위의 인용문은 <삼호현(三呼峴)>에 수록된 또 다른 사모주바위 설화이다. 이 설화에서는 앞에서 살펴본 사모주바위 설화와 달리 여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은 <삼호현> 이후에 채록된 <중바위>, <사모주 고개>( 『대계』1-8, 139쪽.), <장사이야기>(『문학산의 역사와 문화유적』, 155쪽)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①과 ② 중에서 어느 것이 사모주바위 설화의 원형인지 단언할 수 없다. 특정 신화나 전설, 민담의 각 편이 초기의 형태보다 복잡한 형태로 발전된 경우도 있지만, 역으로 복잡한 형태가 전승력이 약화되면서 단순한 형태로 축소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인천지역에서 전승되는 사모주바위 설화는 ②의 형태가 주를 이룬다는 것이다. 지명전설의 경우, 전승과정에서 증거물의 진실성만을 확보하면 되기 때문에 단순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사모주바위 설화가 여기에 해당한다.
<사모주고개>와 <장사이야기>에서는 금기를 파기하는 인물이 ‘장사’로 설정되어 있다. 장사가 등장하는 것은 사모주바위를 “손과 무릎을 대고 이마로 받았다고” 하는 증거물의 존재를 합리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일반인의 힘으로는 지금도 사모주바위에 남아 있는 증거인 손자국과 무릎자국, 이마로 받은 자리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설화에 등장하는 증거물의 진실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장사가 동원된 것이다.
한편, <장사이야기>는 기존의 사모주바위 설화와 동떨어진 형태로 전승한다. 장사는 술맛이 좋아 계속 마시기를 원했으나 술이 나오지 않자, “화가 나 술이 괴는 곳을 부셔버리니 별안간 하늘에서 시커멓게 구름이 몰려오고 땅이 진동하더니 연못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그러면서 “용이 올라가면서 바람에 흔들흘들하였다 하여 흔들 못이”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 설화의 화자는 청학동의 흔들못이 생기게 된 유래를 사모주바위 설화와 관련지어 설명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핵가족화되고 대중매체가 발달하면서 설화전승집단에게 있어 청자의 존재는 유명무실해졌다. 화자에게 있어 청자의 상실은 이야기의 구연 기회를 박탈하게 되고, 이것이 이야기에 대한 부분적인 망각으로 이어진다. 제반 여건상 구전설화는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전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이영수, 「전승 시기에 따른 설화의 변이 양상에 관한 연구」, 『인하어문연구』 7(인하어문연구회, 2006), 334쪽.) <장사이야기>에서 화자가 이야기의 내용을 혼동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설화적 환경을 반영한 것이다.
③ 또 일설에는 옛적에 이 동네에 한 효자가 있었다. 이 효자의 아버지는 술을 즐기었으나 집이 가난한고로 술 한 잔 살래야 살 수도 없었다. 어느 날 이 효자가 이곳을 지날 때 어디서인지 똑똑 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게 생각하여 사방을 돌아다보니 길가 커다란 바위에서 물이 흘러 떨어진다. 목마른 판에 이 물을 받아 마셨더니 의외에도 그것이 술이었다. 그는 기뻐하며 이 술을 받아 아버지에게 드려 효도를 다 하였다 한다.(이경성 지음、배성수 엮음, 앞의 책, 52-23쪽.)
위의 인용문은 <삼호현(三呼峴)>에 수록된 사모주바위 설화 중에서 효성과 관련된 것이다. 술 한 잔 대접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효자가 사모주바위에서 나오는 술을 가지고 아버지를 봉양했다는 것이다. 이 설화와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주천교> 설화이다.
이조(李朝) 말엽에 개성(開城) 서소문(西小門) 안에 한 효자가 있었는데, 병든 아버지께서 술을 좋아하셨으나, 돈이 없었으므로 그는 하는 수 없이 샘물이라도 떠다 드리려고 아침 저녁으로 길으는 샘으로 갔더니 그 샘물이 갑자기 술이 되어 있으므로 이 효자는 기뻐하며 곧 그 술을 떠다가 병상에 누워 계신 아버지께 갖다 드렸더니, 그 뒤부터는 차차 원기를 회복하여 병환이 나아졌다고 한다.(최상수, 『한국민간설화집』(통문관, 1984), 25쪽.)
위의 <주천교> 설화는 ③사모주바위 설화와 여러모로 닮은 점이 많다. 먼저 두 설화에 등장하는 인물이 가난한 효자라는 점, 술을 좋아하는 아버지를 두고 있다는 점, 그리고 바위 또는 샘에서 나온 술을 통해 아버지에 대한 효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점이 그렇다. 이러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두 설화 사이에는 차이점도 존재한다. <주천교> 설화의 경우, 샘물이 술로 변하여 이 샘을 “주천(酒泉)”이라 부르고, 또 그 샘가에 놓은 다리를 “주천교(酒泉橋)”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주천’이라는 샘을 통해 개성 사회관 동편에 위치한 다리를 ‘주천교’라고 명명하게 된 내력을 설명한다. 이에 비해 ③사모주바위 설화의 경우, 사모주에서 술이 나오지 않게 된 배경과 함께 사모주바위에 생긴 손자국과 발자국 등의 증거물에 대한 언급이 없다. 두 설화는 증거물의 활용도에서 차이가 난다. 전자가 전설의 형태라며, 후자는 민담의 형태에 가깝다. 사모주바위라는 증거물을 활용할 수 없다는 점에서 효성을 강조한 ③사모주바위 설화는 전승력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사모잿 고개 너머 마을에 효자가 살고 있었다. 그 효자의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집안형편이 좋지 않아 아버지에게 술을 사드릴 수 없었다는 게 효자는 안타까웠다. 어느 날 효자가 사모잿 고개를 넘다가 마루턱에서 쉬고 있다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바로 옆 길가 바위에서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효자가 그 물을 받아보니 물이 아니라 술이었다. 효자는 하느님이 도운 것이라 생각하고 아버지에게 술을 갖다 드렸다. 매일 술 석 잔을 아버지께 드렸더니 아주 기뻐했다. 아버지는 효자에게 어디서 술을 가져오느냐고 묻자 효자는 전부 가르쳐드렸다. 아버지는 효자에게 술 석 잔이 아니라 더 많이 받아오라고 하였다. 효자는 술을 더 받았더니 바위의 술이 끊기게 되었다. 효자는 바위에 엎드려 술이 다시 나오기를 기도하였으나 술은 나오지 않고 무릎을 꾼 자국과 손을 짚은 자국만 바위에 남게 되었다.(『문학산의 역사와 문화유적』, 166쪽.)
위의 인용문은 『문학산의 역사와 문화유적』에 수록된 사모주바위 설화의 전문이다. 이 설화는 앞에서 살펴본 ③사모주바위 설화와 달리 효행과 함께 금기가 동시에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아버지는 효자에게 술 석 잔이 아니라 더 많이 받아오라고” 한다. 아버지의 명에 따라 효자가 “술을 더 받았더니 바위의 술이 끊기게” 된다. 다른 사모주바위 설화와 마찬가지로 술에 대한 욕심 때문에 사모주바위에서 술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보다 조금 더 갖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이 스스로 자기 복을 차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런데 술이 나오지 않게 되었을 때, 이에 대응하는 방식이 다른 사모주바위 설화들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여타의 사모주바위 설화에서는 술이 끊기자 바위를 이마로 받거나 손과 무릎을 사용하여 강제로 술을 얻으려고 하는 시도가 뒤따른다. 이에 비해 이 설화에서는 술이 나오지 않게 되자 “효자는 바위에 엎드려 술이 다시 나오기를 기도”한다. 이런 효자의 행동은 자신이 술을 얻게 된 것을 “하느님이 도운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술은 다시 나오지 않았으며, 이때 효자가 “무릎을 꾼 자국과 손을 짚은 자국만 바위에 남게 되었다.”고 한다. 사모주바위의 증거물을 설명하는 방식이 다른 설화들과 구별되는 것은 효행이 밑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효행을 강조하다보니 사모주바위에 남아 있는 증거물이 ‘손과 무릎, 그리고 이마자국’에서 ‘손과 무릎’자국으로 축소되고, 전체적으로 증거물이 생기게 된 과정이 다른 사모주바위 설화에 비해 다소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 설화의 경우, 아버지의 욕심과 효자의 행동이 극명하게 대비된다는 점에서 온존한 형태로 전승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사모주바위와 관련해서는 다양한 설화가 전승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사모지 고개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에 비추어 사모주바위 설화는 앞으로도 계속 전승할 것이다. 다만 사모주바위 설화 중에서 중과 여인이 등장하여 술이 나오지 않게 되는 과정이 흥미롭게 전개되는 ①이나 효행을 강조한 ③, 그리고 효행과 금기가 함께 언급된 설화의 경우는 더 이상 전승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와 같이 전승과정에서 증거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단순화된 형태인 ②의 설화만이 생명력을 지닌 채 구전될 것이다.
4. 산신(産神)우물 설화
산신우물은 문학동의 학산마을 뒤 배바위 아래에 있었던 우물로, 물이 잘 나고 물맛이 좋았다고 한다. 산신우물이란 아이가 없는 부부가 이 우물에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한 것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산신은 ‘삼신(三神)’ 혹은 ‘태신(胎神)’이라고도 부른다.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인간에게 아이를 점지하고 출산을 돕고, 인간세상에서 아기의 많고 적음과 있고 없음을 주관하는 신으로 여긴다. 문학동의 산신우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산신(産神)우물
어느 부부가 있었는데 소생이 없어 고민하던 차, 이 산신우물에 백일기도를 올리면 효험을 얻으리라는 말을 듣고 부부가 매일 밤 열두 시 이 우물가에서 산신할머니께 정성을 드리었다. 그리하여 백일째 되는 날 아침 밤새 기도를 마치고 부지런히 부정이 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려고 막 산길을 나서려 할 때 길가 조그만 오막살이집에서 사는 어느 부인이 아침밥을 지을 물을 길으려고 이곳을 올라오다가 이 부인을 만나 “아침 일찍 어딜 갔다 오십니까”하고 인사를 하였다. 그러나 그 부인은 부정이 탈까보아 아무 대답도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정성을 들인 부인에게는 태기가 없고 길가에서 만난 부인에게 태기가 그날부터 있어 옥 같은 아들을 낳았다 한다. 그리하여 이것을 안 사람들은 태기가 옮겨졌다고 생각한다.(이경성 지음、배성수 엮음, 앞의 책, 54쪽.)
위의 <산신(産神)우물>은 우리나라의 기자습속을 반영한 것이다. 부계 중심의 우리나라 가족제도에서 대를 이어줄 남아의 출산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래서 자녀를 갖기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하였다. 그중의 하나가 <산신우물>에서처럼 “이 우물가에서 산신할머니께 정성을 드리”는 것이다. 이렇게 특정한 대상에게 정성을 드려서 아들을 얻고자 하는 방법을 치성기자라고 한다. 부부가 백일기도를 올렸다는 것은 그만큼 자식에 대한 소망이 간절했음을 의미한다.
부부가 치성을 드린 장소는 우물이다. 우물은 신성한 공간이자 마을 생활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정월대보름 새벽에 닭이 울 때를 기다렸다가 서로 앞을 다투어 우물물을 긷던 풍속이 있었다. 대보름 전날, 하늘에 있는 용이 지상에 내려와 우물 속에 알을 낳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부들은 새벽부터 우물 속의 용알을 퍼가기 위해 부지런을 떨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물로 밥을 지으면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기에 그 자체로 신앙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매일 밤 12시에 산신우물에서 치성을 드리던 부부는 백일째 되는 날, 정성을 드리고 내려오는 길에 오막살이에 거주하는 부인을 만난다. 그녀는 부부에게 “아침 일찍 어딜 갔다 오십니까”하고 안부를 묻지만, 부부는 혹시라도 부정이 탈까봐 대답을 하지 않고 자리를 피한다. 그런데 백일 치성을 드린 부부에게는 아이가 없고, 길거리에서 만난 부인이 옥동자를 낳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안 사람들은 태기가 옮겨졌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노심초사한다고 해서 자신이 원하는 바가 꼭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산신(産神)우물>을 통해서 인간이 간절히 원한다고 해서 삼신할머니가 무조건 자식을 점지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설화전승집단의 사고를 엿볼 수 있다.
우리 속담에 “원님 덕에 나팔 분다.”는 말이 있다. <산신(産神)우물>에서 부부는 자식을 얻기 위해 정성을 다했지만, 그 복은 오두막집 아낙이 받아 옥동자를 생산한다. 정성을 드리는 것과 복을 받는 것은 이렇게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 이러한 예를 극락설화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십 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에서는 십 년 동안 나무아미타불을 외웠던 사람이 극락에 가기 위해 물에 빠져야 하는 마지막 단계에서 두려움에 머뭇거린다. 이때 그곳을 지나가던 젊은이가 물에 빠져 수행자 대신에 승천을 하게 된다. <십 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에서는 십 년간 수행한 스님에게 하늘에서 내려준 줄을 부잣집 노인이 가로채 하늘로 올라간다.(이영수, 「극락설화 연구」, 『한국민속학』45(한국민속학회, 2007. 6), 230쪽.)
이 우물에 가서 치성을 하면 태기가 없던 사람도 아이를 얻게 되므로 산신(産神)우물이라 부른다. 산신우물에 관하여 인천시사에는 山神우물이라 적혀있으나 삼신우물 또는 산신(産神)우물이 정확하다. 애를 낳으면 삼신우물에서 물을 떠다 미역과 쌀을 씻어 밥을 해서 산모를 먹이면 아이가 똑똑해진다고 한다. 이 우물과 관련하여 두 가지 얘기가 전해온다.
마을의 한 산모가 아이를 낳고는 젖이 안 돌아서 젖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다. 어느날 바가지를 가지고 우물에 가서 물을 흘리며, 젖을 좀 흘려달라고 빌면서 집까지 왔다. 그러니 젖이 나왔다고 한다. 제보자 중에는 아이를 낳고 초상집에서 해온 밥을 먹어 부정을 타서 젖이 안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삼신우물에서 젖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집까지 물을 흘리며 왔다고 한다.(『문학산의 역사와 문화유적』, 156-157쪽.)
위의 인용문은 <문학동 삼신우물(三神井)>의 일부분이다. 문학동의 산신우물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온다. 하나는 위의 인용문처럼 젖이 안 나올 때 산신우물에 가서 기도를 드린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앞에서 살펴본 <산신(産神)우물> 이야기가 그것이다. “애를 낳으면 삼신우물에서 물을 떠다 미역과 쌀을 씻어 밥을 해서 산모를 먹이면 아이가 똑똑해진다고 한다.”고 하는 것은 삼신상차림과 관련이 있다. 삼신은 아이를 관장하는 신이기 때문에 아이를 낳으면 삼신상을 차리는데, 일반적으로 쌀밥과 미역국을 올린다. 삼신상이 차려지면 간단히 비손한 후에 그 음식물은 산모가 먹는다. 이것은 아이가 성장과정에서 훌륭하게 자라주길 바라는 뜻과 산모의 건강이 빨리 회복되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삼신우물에서 물을 떠다가 삼신상을 차리면 아이가 똑똑해진다고 하는 것은 삼신상차림에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문학동에서는 산모가 젖이 나오지 않을 때, 산신우물에 가서 젖이 나오게 해달라고 축원하였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민간에서는 젖이 나오지 않을 경우 식이요법을 통해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동의보감』에 산후에 모유가 잘 안 나올 때는 ‘저제(猪蹄)죽’을 먹으면 좋다고 한다. 돼지족 4개와 통초라는 약재와 파를 넣고 달인 다음 체에 걸러낸 물로 쑨 죽이다. 저제축이 모든 여성에게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어서 1주일을 마셔도 별효과가 없으면 체질에 따라 다른 식품이나 한약을 복용해야 한다. 젖이 잘 나오게 하는 식품으로는 찹쌀죽, 메기, 잉어, 계란흰자위, 꿀, 붉은 팥 등이 있다.(「생활속의 한방」, 《동아일보》 1998년 3월 28일자.)
<문학동 삼신우물>에서는 식이요법 대신에 주술적인 행위를 통해 젖을 나오게 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젖이 나오지 않는 산모는 산신우물에 가서 산신께 축원하고, 젖이 잘 나오기를 빌면서 바가지에 담은 물을 졸졸 흘리면서 집까지 온다. 또 다른 산모는 “아이를 낳고 초상집에서 해온 밥을 먹어 부정을 타서 젖이” 나오지 않게 되자 “삼신우물에서 젖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집까지 물을 흘리며” 왔다고 한다. 젖이 나왔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이야기의 정황상 젖이 나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산모의 산후조리 기간인 삼칠일까지는 닭고기․개고기․돼지고기 등의 고기 먹는 것을 삼가고, 특히 상갓집 음식은 부정 탄 음식이라고 하여 먹지 않는다. 음식금기를 어김으로 해서 젖이 나오지 않게 되었음을 인지한 산모가 부정을 씻기 위해 산신우물을 찾았던 것이다. 물을 흘리는 행위를 통해서 젖이 잘 나오게 한다는 것은 유감주술적 사고에 기인한 것이다.
물을 이용한 주술적 행위는 기우제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한발이 계속되면 집집마다 병(甁)에 물을 넣고 버드나무 가지로 마개를 해서 거꾸로 매달아 놓는다. 이렇게 하면 가지와 잎을 따라 물방울이 떨어지게 되는데, 이를 하늘의 빗방울로 여겼다. 인위적인 현상을 통해 비가 내리기를 기원했던 것이다. <문학동 삼신우물>에서 우물물을 이용해 젖이 잘 나오게 하는 방법은 기우제의 형식을 원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 주술적 행위가 행해질 수 있었던 것은 삼신우물에 산신이 좌정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영흥면에도 <삼신우물>이 있었다. 이 우물의 경우도 <문학동 삼신우물>처럼 아이를 못 가진 부인들이 자식을 점지해 달라고 기원하던 우물이었다. 그런데 영흥면의 <삼신우물>은 기자의례만 존재할 뿐, 물을 이용해 젖이 잘 나오게 하는 주술적 행위는 나타나지 않는다. <문학동 삼신우물>에서 주술적인 방법을 이용하여 젖을 잘 돌게 하는 행동은 이 지역만의 특징으로 보인다.
Ⅲ. 결론
지금까지 인천지역에 전승하는 문학산 관련 설화를 통해 설화전승집단이 문학산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으며, 인천에서 문학산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에 대해 살펴보았다.
고려 이후 관교동에 읍치가 형성되면서 개항 때까지 문학산 일대는 인천의 행정․교육․생활의 중심지였다. 인천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문학산은 1883년 제물포의 개항과 함께 관교동에 있던 읍치가 현재의 중구일대로 옮겨지면서 퇴락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약화된 문학산의 역사적 위상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그 전통적 원형을 상실하게 되었다. 광복과 더불어 향토사가와 지역민들에 의해 문학산의 위상을 되찾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다. 하지만 1959년 미군기지 건설이 발의되고, 1960년에 이를 위한 공사가 진행되어 1962년부터 미군부대가 상주하기 시작하였다. 1979년 미군이 철수한 후에는 한국군이 그 자리를 차지하여 현재에까지 이르렀다. 인천시민들은 반세기가 넘게 문학산 정상을 밟아보지 못했다. 설화전승집단에게 있어 문학산 정상에 대한 기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역사적․시대적 변화는 문학산과 관련된 설화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문학산과 관련된 설화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비류의 건국설화이다. 고구려에서 남하한 비류가 미추홀에 도읍을 정했는데, 그곳이 바로 문학산성이라는 것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비류와 문학산성을 연결시킨 이래, 오늘날까지 미추홀의 중심유적으로 문학산성을 지목하고 있다. 현존하는 비류의 건국설화는 크게 문헌설화와 구전설화로 이대별할 수 있다. 문헌설화와 구전설화에 나타난 비류의 건국설화는 『삼국사기』에서 비류가 도읍을 정했다고 하는 미추홀을 문학산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문헌설화의 경우, 『삼국사기』, 『동국여지승람』, 『문헌비고』 등을 토대로 문학산이 한 나라의 도읍지였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설화의 내용이 윤색되었다. 이에 비해 구전설화의 경우, 화자가 건국의 주체인 비류의 이름을 망각하고, 안관당에 관해 구술하는 과정에서 비류의 건국설화가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비류의 건국설화가 구전으로는 온전한 형태로 전승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구전설화로써의 비류의 건국설화는 사실상 그 전승이 단절된 것으로 여겨진다.
문학산성에 비류가 도읍을 정했다는 증거의 하나로 활용되는 것이 백제우물이다. 백제우물에서 홍두깨를 찌르면 그 끝이 팔미도 앞바다에서 나온다고 하는 표현은 설화전승집단이 비류의 영토를 문학산에 국한된 것이 아닌 원인천지역으로 그 범위를 확대하여 생각하고 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문학산 관련 설화 중에서 전승이 가장 활발한 것이 안관당 설화이다. 안관당은 임진왜란 때 인천부사로 재직하다가 병사한 김민선을 위한 사당이다. 이 지역주민들은 김민선을 임경업에 비견될 만한 인물로 여기고 있다. 병란과 같은 변고가 있으면 창과 칼을 든 김민선의 혼령이 목마를 타고 나타났다는 것으로 보아 초기 안관당은 호국신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마을의 안녕과 번영, 그리고 풍요를 담당하는 마을신격으로 바뀌게 된다. 안관당의 신격에 변화가 생긴 것은 개항에 따른 읍치의 변화와 일제에 의한 국권피탈로 호국관념이 불필요하게 된 것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설화전승집단은 안관당의 영험함이 대단했다고 믿고 있다. 안관당을 미신시하고 사당과 신목에 불을 지른 기독교 신자였던 박 호장 아들들은 산에서 내려와서 즉사한다. 그리고 그 집안은 절손이 되어 대를 이를 자손이 끊긴다. 그리고 안관당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흉을 보았던 예수를 믿던 부인은 천치 같은 자식을 낳았다고 한다. 안관당에 적대적인 사람들은 모두 신벌을 받았던 것이다. 문학산성이 인천의 대표적인 관방시설이었다는 점에서 안관당과 박 호장 아들의 대립은 단순히 종교적인 갈등으로만 볼 수 없다. 예수가 외세를 지칭하는 것으로 본다면, 안관당과 박 호장 아들의 대립은 민족 내적 갈등이 아닌 외세에 대한 민족적 저항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설화전승집단은 안관당 설화를 활용하여 민족혼을 일깨우고자 했던 것이다.
문학산 주봉과 연경산 사이에 위치해 있는 사모지 고개에는 여러 형태의 구전설화가 전승하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사모주바위 설화이다. 사모주바위 설화는 크게 금기설화와 효행설화로 구분할 수 있다. 금기설화의 경우, 다시 여인을 등장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여인이 등장하는 경우는 술이 나오지 않게 된 이유를 흥미롭게 구술하고 있다. 현재 전승하고 있는 사모주바위 설화는 여인이 등장하지 않는 단순구조의 형태이다. 설화에 등장하여 금기를 파기하는 인물은 스님이 일반적이며, 이때 스님은 과욕의 소유자로 그려져 있다. 스님 대신에 장사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증거물에 남아 있는 손자국과 무릎자국, 그리고 이마로 받은 자리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효행설화의 경우도 다시 효행만을 강조한 경우와 효행과 금기가 동시에 등장하는 경우로 나눌 수 있다. 효행설화의 경우, 각각 1편씩만이 채록되었다는 점에서 이런 형태의 사모주바위 설화는 전승력을 상실한 것이 아닌가 한다. 지금도 사모지 고개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사모주바위 설화는 앞으로도 계속 전승할 것이다.
산신우물 설화는 우리나라의 기자습속을 반영한 것이다. 부부는 자식갖기를 염원하며 산신우물가에서 백일동안 치성을 드린다. 하지만 태기는 길거리에서 만난 부인에게로 옮겨가서 그녀가 옥동자를 생산하게 된다. 정성을 드리는 것과 복을 받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 설화를 통해 인간이 간절히 원한다고 해서 삼신이 무조건 아이를 꼭 점지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설화전승집단의 사고를 엿볼 수 있다. <문학동 삼신우물>에서는 젖이 나오지 않을 때, 산신께 축원하고 물을 흘리면서 집까지 오면 젖이 잘 나온다고 믿는다. 이것은 유감주술적 사고에 기인한 것으로, 우물물을 이용해서 젖을 잘 돌게 하는 것은 이 지역만의 특징이 아닌가 한다.
본고는 문학산에 전승하는 주요 설화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였기에 문학산 설화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이것은 추후의 과제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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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영수, 『인천설화연구』, 채륜, 2015.
첫댓글 문학산이 개방이 된 지 얼마 안 됩니다. 귀중하고 유익한 자료 올려 주신 이영수 선생께 감사드립니다. 인천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꼭 알아야 할 자료인 거 같습니다.
인천과 관련된 건국이야기는 비류 이야기고,
나머지 설화들은 주로 민간신앙과 관련된 설화들, 금기, 효행 등등..
인천은 바다와 접하며 살아온 작은 마을이었고, 가끔은 수도의 방어를 위해 관원이 있었던 마을이네요.감사합니다. 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