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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 태사공 윤신달(尹辛達)의 묘소 - 소재지 : 경북 포항시 기계면 봉계리(매년 음력 10월 1일 향사) 파평 윤씨(坡平尹氏)의 시조(始祖) 윤신달(尹辛達)은 신라(新羅)의 천년사직(千年社稷)이 기울고 후삼국(後三國)의 격동기에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창업에 훈고를 세운 명신(名臣)이다.「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용연보감(龍淵寶鑑) 」 등의 문헌에 의하면 시조 신달은 경기도 파주 파평산(坡平山) 기슭에 있는〈용연지(龍淵池)〉라고 못 가운데 있던 옥함(玉函)속에서 출생했다고 하며, 그가 옥함(玉函)에서 나올때 겨드랑이에 81개의 비늘고 발(足)에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었고, 손바닥에는 윤(尹)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성(姓)을 윤(尹)으로 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특히 시조 신달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현신(賢臣)으로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하기까지 항상 곁에서 인의(仁義)와 도덕(道德)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충간(忠諫)했으며, 통일의 대업을 달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벽상삼한익찬 2등공신(璧上三韓翊贊二等功臣)으로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의 관작을 받아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파평(坡平)으로 삼아 명문세도(名門勢道)의 가문으로 기틀을 다져왔다. 그후 신달의 현손(玄孫) 관(瓘)이 고려 문종(文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선종(宣宗) 때 합문지후(閤門祗候)와 좌사낭중(左司郎中)을 지내고, 1107년(예종 2) 여진정벌(女眞征伐)에 원수(元帥)가 되어 17만 대군을 이끌고 동북계에 출전, 함주(咸州)와 영주(英州)등 9지구에 성(城)을 쌓아 참범하는 여진을 평정(平定)하고 개선했으며, 뒤에 벼슬이 수태보 문하시중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守太保門下侍中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에 이르러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판도판서(版圖判書) 승례(承禮)의 아들 번( ) 세조(世祖)의 국구(國舅)가 되어 대사헌(大司憲)·우참찬(右參贊) 등을 거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으며 뒤에 영의정에 추증,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에 추봉되었다. 번(번)의 아들 삼형제(三兄第)중 맏아들 사분(士昐)이 우의정(右議政)을 지내고 영동령부사(領敦寧府事)에, 둘째 아들 사윤(士 )은 예조 판서(禮曹判書)와 대제학(大提學)을 지내고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영평군에. 셋째 사흔(士昕)을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우의정(右議政)에 오름으로써 형제 정승(政丞)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사분(社昐)과 사흔(士昕)의 두 집안에서 같은 시기에 왕비(王妃)가 배출되니, 왕실을 배경으로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으로 갈라져 정치적(政治的) 대결을 벌이게 되는 불운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승순(承順)의 아들 곤(坤)은 정종조(定宗朝)의 동지총제(同知摠制)로서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을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고 파령군(坡平君)에 봉해졌으며 1408년(태종 8) 사은사(謝恩使)로 명(明) 나라에 다녀온 후 세종(世宗) 때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올랐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삼산(三山)의 아들 호(壕 : 곤의 손자)는 성종비(成宗妃) 정현왕후(貞顯王后)의 아버지로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에 봉해진 뒤 영돈령부사(寧敦寧府事)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을 역임한 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궤장( 杖)을 하사(下賜)받았다. 성종(成宗) 때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던 필상(弼商)은 세조(世祖) 때의 총신(寵臣)으로 도승지(都承旨)를 지낼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우참찬(右參贊)에 특진(特進)되고 적개일등공신(敵愾一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파평군(坡平君)에 봉해졌다. 이어 좌의정(左議政)으로 서정도원수(西征都元帥)를 겸하여 건주위(建州衛) 토벌에 공을 세워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으나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앞서 성종조(成宗朝)에 연산군(燕山君)의 생모 윤씨(尹氏)으 폐위를 막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진도(珍島)에 유배된 후 사약(賜藥)을 받았다. 필상(弼商) 증손(曾孫) 현(鉉)은 1537녀(중종 32)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히고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종중실록(中宗實錄)」편찬에 참여한 뒤 호조 판서(戶曹判書)·돈령부사(敦寧府事)에 이르러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어 크게 명성을 떨쳤으며 시문(詩文)에도 뛰어난 국간집(菊磵集)」을 저술했다. 목사(牧使) 은(垠)의 아들로 세종(世宗) 때 좌찬성(左贊成)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지낸 사로(師路)는 정현옹주(貞顯翁主)와 결혼하여 영천군(鈴川君)에 봉해졌으며 세조(世祖)때 좌익공익(左翼功臣)에 책록되었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택(澤)의 아들 헌주(憲注)는 숙종(肅宗) 때 문과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한 후, 호조 판서(戶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파령 윤씨(坡平尹氏)는 이조 판서(吏曹判書) 지내고 기로소(妓老所)에 들어간 강(絳)과 그의 다섯 아들 지미(趾美)·지선(趾善)·지완(趾完)·지경(趾慶)·지인(趾仁) 형제가 크게 현달(賢達 )하여 명성을 날렸으며, 그 중에서 현종(顯宗) 때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병·이·공조 판서(兵·吏·工曹判書) 등을 지내고 좌의정(左議政)에 오른 지선(趾善)과 숙종(肅宗)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내고 파평군(坡平君)에 봉해진 비경(飛卿)과 그의 손자로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이른 봉구(鳳九)는 학행(學行) 뛰어난〈강문8학사(江門八學士)〉의 한사람으로 추앙받았고, 봉오(鳳五)는 영조(英祖) 때 대사헌(大司憲)과 우참찬(右參贊)을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이른 봉조와 함꼐 명성을 떨쳤다. 당대의 덕망높은 학자였던 심형(心衡)은 비경(飛卿)의 증손으로 영조(英祖) 때 부제학(副提學)·예조 판서(禮曹判書) 등을 역임하였고, 속종(肅宗) 때 예론(禮論)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난 증(拯)은 수차에 걸쳐 대사헌(大司憲)과 이조 판서(吏曹判書)·우의정(右議政) 등에 임명되었으나 불취(不就)하고, 당시 격렬한 사색 당쟁(四色黨爭)에 깊숙이 가담하여 소론(少論)의 영수(領袖)로서 송시열(宋時烈) 중심의 노론(老論)에 대항하며 이산(尼山)으로 내려가 학문 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그밖의 인물로는 인종(仁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역임하고 위사일등공신(衛社一等功臣)에 오른 인경(仁鏡)과 영조(英祖) 때 대사간(大司諫).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을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이른 동도(東度)가 뛰어났으며, 학자(學者)로 명망(名望) 높은 정(鼎)과 경남(景男). 낙(洛)등은 학문으로 가통(家統)을 이었다. 한말에 와서는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로 이름난 준희(俊熙)와 창석(昌錫)·기섭(기燮)·해(海)·애경(愛卿)·석구(錫求)·현진(顯振) 등이 구국(救國)의 신념(信念)으로 항일 투쟁에 앞장섰으며,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소속으로 일본군(日本軍)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 대장 등을 폭사(暴死)시킨 의사(義士) 봉길(奉吉)은 학문(學問)고 충절의 전통 가문인 파평 윤씨의 전통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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