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의 근대 문학과 ‘실천 시인’ 김상훈
시인 김상훈은 거창 근대 지역문학 속에서 가장 앞 머리에 놓이는 시인이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1920~30년대 근대문학의 전통이 시작된 데 비해 거창은 다 소 늦었던 것이 사실이다. 거창의 근대 문학에서 김상 훈 시인은 그런 점들을 충분히 만회할 수 있을 만큼 의 성과를 보여주었다.
김상훈은 1919년 거창군 가조면 일부리에서 태어났다. 1933년 가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6년 서울 중동학교에 입학하였다. 시인 유진오와는 같은 학급 친구였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들어가 ‘만월’이라는 문학서클을 만들어 활동하였고, 이때 임화와 친교를 맺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1943년 연희전문을 조기에 졸업한 뒤 징용에 끌려가 원산에서 선반공으로 일했다. 김상훈은 이곳에서 기차바퀴의 브레이크용 주물이나 선반작업을 거드는 견습 선반공으로 노역하게 된다. 그는 열악한 근로환경 속에서 노예처럼 일하고 있던 약 3천명에 달하는 철도공장의 조선인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을 체험하면서 민족 현실에 관심을 돌리게 된다. 징용의 경험은 짓밟힌 민족의 운명과 굴종을 경험하게 되는 삶의 분수령이 된다. 첫 시집 『대열』의 3부에 실린 「징용터에서」는 이 시기의 고통스런 체험이 녹아 있는 작품이다.
고된 노동에 시달리던 김상훈은 1944년에 맹장염 수술을 구실로 징용터에서 벗어난다. 고향에 돌아와 있던 상훈에게 김상민이 찾아와, 그들은 함께 발군산에서 일제에 저항하고 있던 협동당 별동대에 참가한다. 이곳에서 김상훈은 김상민이 일제에 저항하는 내용의 시를 대원들에게 낭독해 주는 것을 보고 감동하게 되는데, 이러한 경험은 해방 후 그가 항쟁시를 쓰게 되는 데 영향을 미친다. 1945년 겨울 이들의 본거지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김상훈과 김상민은 체포된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김상훈은「연」과 같은 옥중시를 쓰면서 현실의 고통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토로한다.
1945년 8월 해방과 더불어 출옥한 김상훈은 조선학병동맹, 공산청년동맹,조선문학가동맹 등의 조직에 가입하여 활발한 활동을 벌인다. 1945년『민중조선』창간호에 「맹세」와 「시위행렬」 등 두 편의 시를 발표하는데, 이것이 공식적으로 활자화된 첫 작품이다. 그는 1946년 김광현, 박산운, 유진오, 이병철 등과 공동시집 『전위시인집』을 발간한다. 『전위시인집』에 김상훈은 「말」, 「전원애화」, 「장열」, 「기폭」, 「바람」 등 다섯 편의 시를 수록하는데, 이 시들에는 해방 직후의 현실에 대한 기대와 분노투쟁의 열망이 폭발적인 어조로 표출되어 있다.
좌익 계열의 전위시인으로 나선 김상훈은 지주 출신인 부친과 극심한 갈등을 겪게 된다. 거창의 지주로 한민당의 후원세력인 아버지와의 문학가동맹, 학병동맹, 공청에 참가한 김상훈의 갈등은 가족 내의 세대 간의 갈등을 넘어서 이념적 대립의 양상을 띠게 된다. 아버지와의 대립과 그로 인한 김상훈의 심리적 갈등은 시 「아버지의 문 앞에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해방 공간의 시인들 중에서 시에서의 리얼리즘 창조에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여, 서사시 가족에서는, 시인 주위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가식없이 시적 제재로 취급한다.「아버지의 창 앞에서」는 이러한 김상훈의 면모가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초기적 경향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주요 작품으로 「편복」(학병, 1946)·「장렬」(학병, 1946)·「시위행렬」(민심, 1946)·「맹서」(민심, 1946)·「전원애화」(신천지, 1946)·「아버지의 창 앞에서」(문학, 1946)·「어머니」(문학, 1946)·「삼동」(서울신문, 1947)·「경부선」(신천지, 1948)·「밤」(새한민보, 1948)·「길닦기노래」(개벽, 1948)·「취월선생」(개벽, 1949)·「소」(새한민보, 1949)·「국화」(문학, 1950)·「국토」(연합신문, 1950) 등이 있다.
그의 시의 내용을 살펴보면 일제와 그에 의해 야기된 사회악에 대한 비판과 강렬한 저항의식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그의 시 곳곳엔 역사와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빚어진 갈등이 표출된다.
「편복」은 1944년 원산으로 징용갔던 자신을 박쥐로 비유하고 있으며 「전사자 S야」는 일제와 ‘일제의 잔뿌리’를 청산하지 못한 현실에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같은 해 발표된 「경부선」은 부산 항구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양 상품들을 보며 침략자에 의해 건설된 철도가 계속해서 서양 침략자들의 이용물이 되고 있음을 개탄하고 있다. 또 그는 농촌의 형상화를 통해 광복 이후 나아진 것이 없는 농부들의 생활을 그리고 있다.
일제의 핍박 대신 칼든 화적의 갈취로 고통받는 농부들을 그린 「전원애화」, 소나무껍질까지 앗아간 일제와 농부들을 착취하는 모리배들을 저주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송피」(문학, 1947) 등이 이와 같은 내용의 시이다.
이와 같은 사상적 지향은 그의 시를「가족」이라는 장편서사시로 나아가게 만든다. 하지만 이 시에는 서사시의 일반적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영웅이나 신화적 인물이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민초의 삶이 그려져 있다.
황 참봉에 짓밟힌 소작인의 딸 복례, 혁명에 동참하는 황 참봉의 아들 위우, 그리고 꿋꿋한 의지를 갖고 혁명의 길로 뛰어드는 돌쐬 등의 형상화를 통해 희망찬 새날을 위해 다시 일어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1949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여 김상훈은 공개적으로 좌파 활동을 그친다. 그리하여 우파 민족주의 잡지인『문학』에 작품을 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에 잡혀 다시 한 번 ‘변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용군에 입대한 뒤 종군기자 형태로 전선에 끌려가게 된 것이다. 1950년 10월 홀몸으로 북한으로 입북하였다.
월북 이후 김상훈의 시세계에 드러나는 특징은 김일성 찬양과 인민선동이라는 북한 문학의 도식성을 영롱한 서정성으로 어느 정도 극복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1961년 발표된 「당신이 주신 햇빛 아래」·「단조공의 노래」나 유고 시선집인 『흙』(1991) 등을 살펴보면, 그의 시도 이전에 담겨 있던 개성적인 목소리가 사라져 버린 체제순응적인 시로 전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평론으로는 「테러문학론」(문학, 1947)·「우리 나라 민요의 몇가지 특성에 대하여」(1962)가 있다.
북한에서 머물렀던 김상훈의 초기 생활은 아주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1953년 남로당 계열 문인들의 숙청때 임화와 친분이 문제가 되어 협동농장으로 쫓겨나 창작활동을 그만 두게 된다. 1958년에 다시 문단에 되돌아온 뒤, 김상훈은 ‘고전문학 편찬위원회’에 들어가 북한의 고전문학 번역에 참여하여 고전문학 번역에 앞장을 섰다. 그가 낸 책으로는『풍요선집(1963)』, 『력대시선집(1963』」,『중국고전시선(1991)』등이 있다.
주로 고전번역과 주해 작업에 큰 공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1987년 병을 얻어 영면한 뒤, 그의 아내 류희정이 유고시집『흙(1991)』을 묶어서 발간하였다. 북한에서 썼던 그의 시 전모가 비로소 밝혀진 셈이다.
자료인용 : 거창문학 (2020년), 조재원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