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원정(龍源亭) : 원농산 마을 앞 동쪽 냇가에 있다. 밀양인 문경공 낙촌 박충원(朴忠元)의 현손 박윤보(朴潤輔)·재보(再輔) 형제가 임진왜란을 피해 이곳으로 들어와 8년을지냈다. 그 동안 집안 식구들을 보살피면서 가난이 더욱 심해져 끝내 고향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 살게 되었다. 그 후 약 340년이 지나서 조상의 은덕을 사모하는 후손 성화(聖和) 등 일족의 노력으로 1935년 무렵 정자를 세웠다.‘용원정’은 용봉(龍鳳)이란 지명의 ‘용’(龍)자와, 같은 근원이란 뜻의‘원’(源)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편액은 당시 북상의 임필희(林苾熙)가 썼다. 정자의 규모는 정면 두 칸, 측면 두 칸으로 팔작지붕 형태이며 네 모퉁이를 활주로 받쳐서 안정감을 준다. 건물의 좌향은 ‘묘(卯)-유(酉)’ 방위로, 정동향을 바라보고 앉아있다.
정자 안에는 많은 시문이 있는데, 1935년 월성 김동준이 지은 <용원정기(龍源亭記)>가 있고, 후손 우화·태화(泰和)의 <용원정 원운(龍源亭原韻)>, 이우형(李愚亨)의 <삼가 용원정 원운을 빌어 짓다(敬次龍源亭原韻)>, 월성 김갑환(金甲煥)의 <삼가 용원정 원운을 빌어 짓다(謹次龍源亭原韻)>, 후손 참봉 성화(聖和)와 정래(井來)의 <정자가 완성되자 느낌이 있어(亭成有感)>, 후손 문화(文和)·재화(在和)·종화(宗和)·병국(炳國)의 <용원정운>, 후손 장화(章和)·창화(昌和)·경화(景和)·응화(應和), 중화(重和)·기화(琪和)·성래(成來)·춘화(春和), 영수(永秀)·영주(永珠), 병룡(炳龍), 관화(琯和)·성화(性和)·정화(貞和), 영화(永華)·영위(永渭), 병준(炳埈), 준화(俊和), 동화(同和), 병석(炳錫), 성래(性來)·종래(鍾來), 병문(炳文)·병곤(炳琨), 병록(炳祿)·병순(炳淳), 병언(炳彦)·병열(炳烈)·병극(炳克)의 <추모의 느낌(追感)> 판상시가 빼꼭하고, 정자 바깥 처마 아래는 완산 이태수(李太秀)의 <삼가 원운을 빌어(敬次原韻)>, 후손 병구(炳九)의 <추모의 느낌(追感)>, 후손 복래(福來)의 차운시가 있다. 정자의 판상시가 쪼개지고 상한 것이 많았는데, 후손의 이야기가 예전에 거지들이 이곳에 들어와서 자길래 못 자게 하니까 그랬다고 했다. 건물의 관리는 마을에 사는 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김동준의 <용원정기>
군의 북쪽 덕산의 양지쪽에 경치가 그윽하고 산수가 아름다워 용과 봉이 있다고 일컫는데, 이 사이에 덕을 숨긴 선비가 살기에 적합한 곳이 있다. 이로부터 남쪽으로 6·7리 쯤에는 푸르고 맑은 강물이 흘러 들어갈수록 아름다운 경치이고, 두 개의 다리가 마을에 걸쳐 있는데 수레와 말이 서로 잇달으며, 두 물이 합쳐지는 곳에 고기와 새우가 많고 살이 쪘다. 찾아가 연기와 산 기운 피어나는 경치를 바라보노라면 새로 지은 정자가 하나 있는데, 소나무와 물 사이에 은근히 비치니, 곧 박씨가 공동으로 선조를 위해 지은 것이다. 마루는 넓고 시원하며 경개는 푸르러 연기와 구름이 대(臺)에 넘치고 시인 묵객들이 경치를 택하여 풍월을 노래하는 도구가 되었다.
박씨의 세계는 신라 때부터 비롯되는데, 대대로 조상의 덕을 이어 동방의 명문이 되었고, 낙촌 문경공의 지위와 덕망은 중종 때 드러나 대대로 경기도 고양 두응 마을에 살았다. 그 현손 남강공과 아우 남곡공은 임진왜란 때 적군에게 위급을 당하여 경황없이 안음현 북상 남곡동에 이르러 비록 목숨은 건졌으나, 8년 전쟁 끝에 집은 실로 형편이 없고 가난이 또한 심하여 끝내 고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래서 고개 너머에 서로 집을 짓고, 거기서 살게 되었다. 형제의 자손이 번성한 것을 보면 음덕을 쌓은 결과임을 알 수 있고, 이미 중엽에 병란을 만나 ( )( )과 농산 두 마을로 나뉘어 살게 되었으니, 비록 두 형제의 고향 땅은 아니나 그 자손된 사람이 조상을 추모하는 느낌이 봄의 비올 때나 가을의 서리올 때마다 나타나서 이 작은 정자로 인하여 사모하는 마음을 붙였으니, 곧 옛 사람이 정자를 생각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힘쓸지어다. 후예 된 사람은 오르고 내리면서 그것을 생각하고 사모하며, 모여서 고치고 유지한다면 아마도 이 정자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정자 이름을‘용원’이라 한 것은 어떤 연유인가?
‘용’은 지명을 따온 것이요,‘원’은 모든 물의 갈래가 같은 근원에서 나왔다는 뜻을 취한 것일 뿐이다.
1935년 4월 상한에
전 호남교수 월성 김동준 삼가 지음
(원문)
龍源亭記
郡之北德山之陽, 洞天窈窕, 山水名勝, 有龍鳳之稱焉, 此間宜有隱德之士, 棲息之所也. 自玆以南, 六七里, 碧崇淸沘, 漸入佳境, 雙橋架洞, 車馬相連, 二水合流, 魚蝦多肥. 聘望烟嵐之勝, 有一新亭, 隱暎於松水之間, 乃朴氏所共爲先而作者也. 軒敞爽, 槪蒼翠, 烟雲剩丌, 爲騷人墨客, 擇勝風詠之具也. 氏之系出, 自新羅璿譜, 蟬聯世德, 爲東方巨閥, 而駱村文景公, 位德, 著於中廟朝,而世居高陽豆應村矣. 其玄孫南崗公及弟藍谷公, 逢龍蛇之亂, 鋒鏑所急, 顚倒, 至于安陰北上藍橋洞, 雖得全性命, 八年兵燹之餘, 家實蒼茫, 貧寠亦甚, 終未之還. 故, 相宅于越峙, 因居之. 兄弟之子姓, 蕃閱, 積蔭所致, 可知也, 已曁乎中葉, 以亳灾, 分居於( )( )農山兩村, 雖非二公薖軸之地, 爲其雲仍, 追遠之感, 每發於春雨秋霜之時, 因此小亭, 以寓慕之, 乃古之人思亭, 是也. 勉之哉, 爲後裔者, 陟降而思慕之, 蒐葺而維持焉, 則庶斯亭之不朽也. 名亭以龍源, 奚取之也? 曰龍, 因地之名, 源, 取百派一源之意云爾.
歲乙亥葽月上澣
前湖南敎授 月城 金東準 謹撰
(시)
용원정 원운 (龍源亭 原韻)
후손 우화(禹和)
계보 근원, 용의 상서로움이 절로 내려온지 오래라
난리 피하여 남으로 와 자손이 향기롭다
하객은 추모의 느낌 절실함을 모르겠고
정자 한 채 늦은 말씀에 선조가 빛나도다
후손 참봉 태화(泰和)
덕을 숭모하는 아름다움은 만세에 긴데
한 뿌리 화수는 각자 향기 풍기네
이 정자 조상 뜻 이어 용원이라 편액하니
멀리 천추를 바라보고 영원히 빛나리라
삼가 용원정 원운을 따라 짓다
이우형
농산리에 살아온 지 세월도 오래더니
같은 뿌리 화수가 사방에 아름다워
정성으로 조상을 사모하여 이 정자 세우니
자연의 풍취도 저절로 빛이 나네
정자가 완성되자 느낌이 있어 (亭成有感)
후손 참봉 성화(聖和)
북쪽 물 남으로 흘러 만 리나 긴데
용화의 상서로운 기운 정자 가득 향기롭다
이제야 비로소 우리 선조 덕을 깨달았으니
남은 음덕 유유히 후손이 빛나도다
후손 정래(井來)
두 분 선조 남으로 와서 덕을 심은 지 오래니
남쪽 향한 화수가 동산 가득 향기로워
동풍에 제비 손님 쉬며 많이 축하하니
한 사람 정정하여 햇빛을 가리도다
추모하며 느끼다 (追感)
후손 병언(炳彦)
산의 위용 진중하고 물의 기운 긴데
언덕 위엔 사람 없이 풀만 절로 향기로워
한 집안 우리 왕손 천고의 한이더니
번화한 봄 멀어도 시림은 빛나도다
병렬(炳烈)
제비가 새 정자를 축하하니 낮도 길어
선조의 고운 빛깔에 향기가 배나 생겨
때로 주인과 손님 서로 즐겁게 시를 짓고
시냇가 버들과 언덕의 꽃이 빛을 다투네
병극(炳克)
같은 선조 자손들이 느낀 뜻이 길어
용원정이란 편액이 만년에 향기롭다
정자 마루엔 날마다 잔 돌리는 손님 의젓하니
이로부터 시내와 산이 배나 빛이 나겠네
후손 병문(炳文)
선조 정자 지으니 물이 길게 있고
용원정이란 큰 편액 마땅히 향기가 나네
남녘의 풍월로 여기 오르던 날에
우리 가문 화수회가 갑절 빛이 나도다
후손 병곤(炳琨)
농산리 동쪽 둔덕엔 물길도 긴데
남옹이 처음 지으니 조상 음덕 향기롭고
이미 준공을 고하여 잔치를 열었더니
솔바람 불어오고 대에 달이 뜰에 빛나네
추모하며 느끼다 (追感)
후손 장화(章和)
한 줄기 냇물이 용원처럼 길다랗고
우리 종친 백세에 향기롭게 흐르리라
화수정을 이룬 뜻을 말한다면
봄 오는 해마다 빛이 통하지 않기를
창화(昌和)
집을 지은 규모를 보니 원대하고도 장구해
천만 년을 가도 향기가 절로 흐르리라
후손이 느낀 뜻은 시 속에 기록되었고
판상의 아름다운 구절 그림보다 낫다네
경화(景和)
우리 선조 관로가 원대하고 길었더니
근원마다 커다란 낙은 자손이 번성한 것
음택은 아직 지금도 끊어지지 않고 흐르니
뜰에 가득한 화수가 봄빛을 띠었도다
응화(應和)
계속 힘써 경영한 세월이 오래더니
이제 작은 풀 지닌 향기를 지키기도 어려워
언덕 종친들은 여기 올라 즐겁다 하지 말게
만약 유지하지 못하면 어찌 공경심을 빛내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