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갓집 가는 길
이두희
어릴 적 외갓집 가는 길은 멀었다. 이십 리쯤 되는 거리였지만 어머니의 따스하고 편안한 등은 어린 동생에게 내어주고 아장아장 걷는 길은 가고가도 끝이 없는 것 같았다. 검정고무신을 신은 발은 신작로의 자갈들이 부딪히고 찔러대어 불이 붙은 듯이 아팠고, 더욱 힘든 것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지겹다는 것이었다. 자꾸만 쉬어가자고 보채는 아이에게 어머니는 다시는 데려가지 않겠다는 으름장을 놓곤 하셨다.
어머니는 앞산 고개 넘어 동네의 부잣집 맏딸이셨다. 완고한 외할아버지였지만 가난한 집에 시집보낸 딸이 늘 눈에 밟혔을 것 같다. 더구나 아버지는 줄줄이 드센 여동생들과 무능한 남동생들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7남매의 장남이셨다. 거기에다 다시 6남매 자식을 낳아 기르는 모습을 보며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마음은 늘 고개를 넘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외갓집에 자주 가는 이유도, 내가 외갓집 나들이에 한사코 따라 나섰던 이유도 모두 운명처럼 마주해야 했던 가난 때문이었다.
고개 마루에 올라서면 지금껏 걸어온 가파른 오르막길과 앞으로 가야할 꼬불꼬불한 내리막길이 내려다 보였다. 그리고 고갯마루에는 늘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조금만 더 가자며 다그치시던 어머니도 고갯마루에서는 머리에 이고 있던 보따리와 업고 있던 동생을 내려놓고 한동안 물끄러미 먼 산을 바라보고 계셨다. 지금껏 살아온 날들과 앞으로 닥칠 힘겨운 날들을 생각하면 외갓집과 우리 집의 중간쯤인 고갯마루가 어머니에겐 한숨짓던 장소였으리라. 외갓집으로 갈 때엔 친정 부모님이 가슴 아파할까봐 마음이 저리고, 집으로 돌아올 때엔 식구들을 배불리 먹이지 못해서 안타까우니 고개를 넘으며 어찌 한숨짓지 않을 수 있었을까.
고갯길을 내려가면 위양지 저수지가 바다인양 넓게 펼쳐졌다. 혹시 외할아버지께서 낚시를 하고 계실지 모른다는 말에 아프다는 생각은 온 데 간 데 없이 내리막길을 앞서서 달리곤 했다. 저수지 둑길을 지나 야트막한 산모퉁이를 돌아가면 건너편 산기슭에 올망졸망 외갓집 동네가 아련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다 왔구나하고 마지막 힘을 내어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에 빤히 보이는 길은 더 멀었다. 한참을 달렸다 싶어도 올려다보면 꿈에 그리던 외갓집은 쉽게 다가와주지 않았다. 어머니도 힘에 부치시는지 등에 업힌 동생이 허리춤까지 내려와 있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형 둘과 누나를 업어서, 또는 걸리어서 외갓집을 다녔고 이번엔 내 차례가 된 것이었다. 머지않아 어머니와 함께 외갓집으로 가는 기회는 동생들에게 넘겨주어야 할 것이었다.
외갓집은 커다란 기와집이었고 마당가에 깊은 샘이 있었다. 두레박으로 물을 긷는 샘터에는 마을의 소식과 사람들의 정이 오가는 곳이었다. 샘터 바로 옆에는 커다란 배나무가 한그루 있었는데 하얀 배꽃이 필 때는 집 전체가 환하게 밝아지고 집안에 활기가 솟아났다. 집 뒤 텃밭에도 감나무와 자두나무, 사과나무 등 과일나무가 즐비하여 먹을 것이 지천이었다. 가끔 외할머니가 슬그머니 입에 넣어주는 알사탕은 세상에서 제일 달고 맛있었다. 우리 집에서는 육남매의 치열한 생존경쟁으로 늘 배가 고팠으나 제사가 많은 외갓집은 달랐다. 안방 다락에는 맛난 것들이 꽉 차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 외할머니는 동구 앞까지 쫓아 나오셔서 노란 종이돈을 내손에 꼭 쥐어주셨다.
군에서 전역을 하고 나서야 고향에서 얼마간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하루는 옛날의 기억을 더듬으며 외갓집을 걸어가 보기로 했다. 구불구불했지만 정다웠던 오솔길들이 냉정하리만치 정리된 아스팔트와 시멘트 포장길로 바뀌었고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었다. 바다처럼 넓었던 저수지는 여느 저수지보다 조금 큰 정도였다. 오십여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옛 기억은 얼마 전의 일처럼 생생한데 눈에 띄는 것은 모두 낯설게만 보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것은 꿈에 그리던 외갓집의 모습이었다. 낡은 모습이야 세월의 탓이겠지만 동네에서 제일 크고 웅장했던 집이었는데 왜 그리 작아져 버렸는지, 또 무슨 사연으로 폐가가 되어버렸는지…. 가슴이 메어오고 허탈한 심정으로 대문 앞에서 한참동안 바라보다 돌아왔다. 그날 밤 어머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니는 외갓집에 대한 깊은 회한을 품고 계셨다. 우리 집의 형편이 조금씩 나아지면 그만큼씩 기울어가는 친정집은 또 다른 고갯길이었다고 털어놓으셨다. 그래서 종종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꿈에 보인다고도 하셨다.
‘가난이 죄’라고 했다. 가난하기 때문에 죄도 짓고, 눈물짓는 일들도 많이 겪으며 살아간다. 그래서 누구나 가난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가난했던 옛 시절이 눈물겹게 그리워지는 것은 왜일까? 단순하게 나이 탓으로만 돌리기엔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너무 많다. 혹시 의식주와 같은 기본적인 욕구에 목말라 했던 그 시절이 가장 순수하고 절실한 삶의 모습이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