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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기쁨의 열매
1-3절, 세 가지 권면
[1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장의 끝에 언급한 대로,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 곧 천국에 있기 때문에, 주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를 죄와 파멸로부터 완전히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에, 또 그가 우리의 낮은 몸을 그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실 것이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른다. 우리 구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성도들은 함께 하나님의 한 가족이 되었고 함께 천국에 들어갈 자들이 되었다. 천국은 거룩하게 서로 사랑하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도 사랑을 실천하도록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특히, 빌립보 교인들은 사도 바울에게 전도의 열매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일했고 그 결과, 사랑스런 빌립보교회가 설립되었다. 그러므로 그 교회야말로 사도 바울에게는 “나의 사랑, 나의 사모하는 자들, 나의 기쁨, 나의 면류관”이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그렇게 부르면서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고 권면하였다. ‘서라’는 원어(스테케테)는 ‘굳게 서라’는 뜻을 가진다(KJV, NASB, NIV). ‘이와 같이 주 안에 굳게 서라’는 말은 주의 진리 곧 이신칭의(以信稱義)[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음]의 복음 진리 안에 굳게 서고 하나님의 나라에만 소망을 두고 완전 성화를 향해 충실히 노력해야 함을 가리킨다. 우리는 거짓 교사들과 달리 천국 소망을 가진 자이다. 성도들은 ‘주 안에’ 곧 주님의 진리의 지식 안에, 주님과 그 진리를 믿는 믿음 안에, 주님을 사랑함에, 주님의 교훈을 순종함에, 주님을 소망함에, 주님께 대한 충성에, 주님의 진리를 위한 선한 싸움을 싸움에 굳게 서야 한다. 모든 성도는 주 안에 굳게 서야 한다. 이것이 본문에 나타난 첫 번째 권면이다.
사도 바울은 그의 다른 서신들에서도 성도들이 믿음에 굳게 서야 할 것을 말했다. 고린도전서 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골로새서 2:7, “그 안에[예수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데살로니가후서 2:15,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
[2절]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권면을 보면, 그 두 사람은 서로 생각과 마음이 맞지 않았던 것 같다. 빌립보교회는 좋은 교회이었지만, 그 교회 안에도 서로 생각이 맞지 않은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바울은 이미 빌립보 2:2-3에서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말했다. 교회 안에서 다투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교훈이다. 우리는 주 안에서, 주님의 진리 안에서, 성경의 일치된 교훈 안에서, 같은 생각과 같은 마음을 가지도록 힘써야 한다. 이것이 본문이 보이는 두 번째 권면이다.
[3절]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멍에를 같이한 자’라는 원어(쉬쥐고스)는 ‘멍에를 같이한 자’라는 뜻을 가진 사람 이름(‘쉬쥐고’라는 사람 이름)일지도 모른다(NIV 난외주). 그는 빌립보교회를 대표할 만한 감독 중 하나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복음 사역에 함께 수고한 자이었던 것 같다. 또 빌립보교회에는 사도 바울과 함께 복음의 일에 힘썼던 여자들이 있었다. 사도 바울은 또 글레멘드와 그 외의 그의 동역자들을 말한다. 그는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이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음을 확신한 것은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행위를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람의 구원은 그의 행위를 통해 확증된다. 사도 바울은 이제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런 복음의 일꾼들을 도우라고 말한다. 이것이 본문이 보이는 세 번째 권면이다.
우리는 어떻게 복음의 일꾼들을 도울 수 있는가? 첫째로, 우리는 위로와 격려의 말로 도울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는 위로자이시며 격려자이시다. 위로와 격려의 말은 사역자들에게 힘이 된다. 데살로니가전서 5:11-13, “그러므로 피차 권면[위로, 격려]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둘째로, 우리는 기도로 도울 수 있다. 기도는 복음의 일꾼들에게 줄 수 있는 매우 큰 도움이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였다. 데살로니가전서 5: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셋째로, 우리는 물질로 도울 수 있다. 복음의 일꾼들은 세상의 일을포기하고 교회 일에만 전념하는 자들이다. 교회의 전임(專任) 사역자들은 교회 일에 매어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들을 물질로 도와야 한다. 주께서는 제자들을 전도자로 보내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 10:40-42).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주 안에 굳게 서야 한다. 우리는 주의 진리 곧 이신칭의(以信稱義)[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음]의 복음 진리 안에 굳게 서고 하나님의 나라에만 소망을 두고 완전 성화를 향해 충실히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주 안에’ 곧 주님의 진리의 지식 안에, 주님과 그 진리를 믿는 믿음 안에, 주님을 사랑함에, 주님의 교훈을 순종함에, 주님을 소망함에, 주님께 대한 충성에, 주님의 바른 진리를 변호하기 위한 선한 싸움에 굳게 서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주 안에서 같은 생각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각 사람의 개인적 견해를 버리고 신구약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온전한 뜻에 대한 일치된 교리 사상과 믿음을 가져야 하고 또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주 안에서 같은 생각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일을 위하고 협력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부정하고 버리고 오직 주의 뜻과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셋째로, 성도들은 복음의 일꾼들을 도와야 한다. 그들은 복음의 일꾼들을 위로와 격려의 말로 도와야 한다. 또 그들은 복음의 일꾼들을 위해 기도함으로 도와야 한다. 또 그들은 복음의 일꾼들을 물질로 도와야 한다. 교회는 복음 사역자들이 그 가족들과 함께 의식주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지 않고 성경을 연구하고 바른 말씀을 전하고 참 교회를 세우는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그들의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해야 한다.
4-7절, 주 안에서의 특권들
[4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는 것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참으로 복된 특권이다. 슬픔이 많은 세상에서 누가,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주 안에서’라는 말에 있다. ‘주 안에서’라는 말씀은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과 그 안에 포함된 모든 은택들을 가리킨다. 주께서는 우리의 근본적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그러므로 죄의 결과들인 그 외의 모든 문제들은 주 안에서 이미 다 해결된 것과 같다. 우리는 장차 천국에서 기쁨의 충만함을 누리게 될 것이지만(롬 14:17), 지금 이 슬픔 많은 세상에서도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복을 누리는 것이다. 기쁨은 성령께서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서 일하셔서 맺게 하시는 복된 열매이다(갈 5:22).
[5절]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관용’이라는 원어(토 에피에이케스)는 ‘온유함, 친절함, 너그러움 등’의 뜻이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모든 사람들에게 온유하고 친절하고 너그럽게 대할 수 있겠는가?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도 그렇게 대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자기와 친하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부족한 자들에게도, 심지어 자기를 미워하고 비난하는 자들에게도 어떻게 그렇게 대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온유함과 친절함과 너그러움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해야 한다.
성도가 모든 사람에게 온유하고 친절하고 너그럽게 대할 수 있는 까닭은 주께서 오시면 모든 일을 다 공의롭게 판단하시고 선악간에 보응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말씀이 그런 뜻을 담고 있다. 장차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주 예수께서는 가까이 와 계신다. 주의 재림은 심히 가깝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판단을 그에게 맡기고 오직 모든 사람에게 온유하고 친절하고 너그럽게 대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만 알고 이 세상의 것들만 구하는 자들이라면 모르지만, 우리가 장차 오는 천국을 알고 천국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을 구하는 참 성도라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들을 관용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큰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큰 은혜 받은 것을 잊지 말고 다른 이들에게 온유하고 친절하고 너그럽게 대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6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염려하고 걱정할 일들이 많다. 학생들은 학교 성적 문제나 진학의 염려, 친구들에게 따돌림 받거나 구타당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 청년들은 취직의 염려와 결혼과 출산의 염려, 장년들은 직장과 사업 등의 경제 문제와 건강 문제와 자녀에 대한 염려, 노년들은 자녀들의 평안, 자신의 건강, 노후의 경제적 대책, 외로움, 임종 준비 등 많은 염려거리들이 있다. 인생은 염려가 많은 삶이며 이 세상은 염려가 많은 세상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실상, 우리의 염려거리들 중에 우리가 염려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염려는 우리의 기쁨과 평안과 생활의 활기를 빼앗아 갈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좋다. 그것이 믿음이며 순종이다. 염려하지 않는 생활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특권이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으니 또한 하나님께서 보장하실 것이다.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주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6장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마 6:25). 그는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로 예를 드시면서 하나님께서 세상의 만물을 다 먹이시고 입히시는데 하물며 자기 백성의 의식주의 문제를 돌아보지 않으시겠느냐고 교훈하셨고, 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天父)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다(마 6:31-33).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무슨 일을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무엇을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우리가 살아계시고 전지전능하신 주권자 하나님을 믿는다면, 또 그가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고 우리를 위하시고 지키시고 도우시기를 원하심을 안다면, 우리는 어떤 환경 처지에서도, 어떤 어려운 문제를 직면했을 때라도 염려하거나 당황하고 낙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표현이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일을 염려하는 대신에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기도하지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큰 일도, 작은 일도, 정신적인 일도, 육체적, 물질적인 일도, 개인적인 일도, 가정적인 일도, 교회적인 일도, 국가적인 일도 무슨 일이든지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참 믿음이다. 믿음이 있는 자마다 하나님께 기도한다.
우리는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되 ‘감사함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감사함이야말로 믿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마음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을 믿는 자가 아니고서는 결코 범사에 감사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자는 감사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28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하였고, 또 로마서 8:32에서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을 가진 자들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또 감사함으로 우리의 모든 소원들을 하나님께 낱낱이 아뢸 수 있고 또 그의 응답하심을 얻는다.
[7절] 그리하면 모든 지각[이해력, 지식]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평안]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금방 오지 않는 경우도 많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뜻과 다를 경우가 많고 또 하나님의 시간표는 우리의 시간표와 다를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기도가 금방 응답될 때도 있으나 오랫동안 응답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라도 우리는 낙심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가장 선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심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무지하고 조급한 우리는 시간이 지난 후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치 말고 기도하며 오래 참고 기다려야 하고 그러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고난의 현실을 피하고 싶어하고 건강이나 물질적 풍요를 복이라고 생각하지만, 건강이나 물질적 풍요는 복이기도 하지만 때때로 화이기도 하다. 실상, 참된 복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섬기고 죄 짓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로 경건하고 거룩하고 바르고 선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시는 고난이나 질병이나 가난의 경험은 하나님의 미움이 아니고 그의 사랑의 증거이며,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고 오히려 그의 복이다.
그러므로 기도의 응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의 현실을 믿음과 평안으로 대처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의 일차적인 응답은 마음과 생각의 평안이다. 마음과 생각의 평안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즉각적이고 매우 귀한 응답이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안’이라는 표현은 ‘모든 이해력과 지식을 초월한 하나님의 평안’이라는 뜻이다. 마음의 평안을 가질 수 없으리라고 생각되는 현실 속에서도, 우리의 이해력과 지식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평안이 우리를 지키신다는 말씀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도 응답의 시작이다.
하나님의 평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즉 그를 믿고 순종하는 자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다. 기도 응답과 그 응답으로서의 마음과 생각의 평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는 성도의 특권이다. 그리스도 예수 밖에서는 이것이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현세와 내세의 모든 삶을 보장한다. 그것은 내세의 천국과 부활과 영생뿐 아니라, 현세의 마음의 평안과 건강과 의식주의 공급을 보장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범사에 우리와 함께하신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본문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세 가지 특권을 교훈한다. 첫째로, 우리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해야 한다. 항상 기뻐하는 삶은 오직 주 안에서만 가능하고 세상적인 조건으로는 불가능하다. 주 안에서 죄사함 받고 주 안에 거하고 성령께서 그 안에 거하시는 성도들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다.
둘째로,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온유함과 친절함과 관용을 나타내어야 한다. 이것은 주의 재림이 가깝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가 다시 오시면 모든 것을 공의로 심판하시고 상과 벌을 내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우리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감사하는 중에 기도함으로 평안을 누려야 한다. 이것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특권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삶이다. 성도들에게 주시는 마음의 평안은 기도 응답의 시작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약성도들에게 주신 기쁨과 관용과 평안의 삶을 누려야 한다.
8-9절, 완전을 목표로 삼자
[8절] 종말로[마지막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셈노스)[존경할 만한 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칭찬]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목표를 증거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도덕적 완전이다. 우리에게 어떤 덕이나 칭찬이 있다면 그것이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추구해야 할 바가 무엇인가는 분명하다. 로마서 8:5-6은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성령]을 좇는 자는 영[성령]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라고 말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에 속한 자들이 아니고 성령에 속한 자들이므로 마땅히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을 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동을 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것들을 몇 마디로 표현한다.
첫째로, 우리는 무엇에든지 참되어야 한다. 우리는 범사에 참되고 진실한 삶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위선과 거짓과 속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매우 미워하시는 죄악이다. 거짓은 마귀의 속성이다. 우리가 비록 타고난 재능이 부족하고 자라난 가정적, 사회적 환경이 나빠서 유능한 인물이 못 된다 할지라도 참되고 진실한 인물은 되어야 한다. 성도의 성도다운 덕성은 그의 진실함에 있다.
둘째로, 우리는 무엇에든지 존경할 만하여야 한다. ‘경건하다’라고 번역된 원어(셈노스)는 디모데전서 3:8, 11에서 ‘단정하다’라고 번역된 말로서 ‘존경할 만하다, 품위 있다’는 뜻을 가진다. 성도들은 범사에 존경받을 만한 태도로 무엇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것은 인격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모범이 됨을 가리킨다.
셋째로, 우리는 무엇에든지 옳아야 한다. 옳은 삶, 의로운 삶,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목표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불의하거나 불법하거나 위법하거나 부당한 것을 행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항상 정직하고 올바르고 정정당당하게 살기를 힘써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무엇에든지 정결해야 한다. 죄는 더러움이다. 우리는 불의한 일을 멀리하고 부정당한 욕심과 사사로운 욕심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물질 문제나 이성 문제나 직위와 권한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순결하고 흠 없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라는 말은 인격의 아름다움을 묘사한다. 이와 같이, 진실함, 존경받을 만함, 의로움, 순결함, 사랑할 만함, 칭찬할 만함 등은 인격의 완전함을 잘 드러낸다. 성도들은 도덕적인 완전을 생활 목표로 삼고 이런 덕목들에 생각과 마음을 두고 실천하기를 힘써야 한다.
[9절]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평안]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빌립보 교인들이 배우고 받고 들은 것들이란 앞에서 언급한 도덕적 완전함이다. 그들은 무엇에든지 참되고 무엇에든지 존경받을 만하고 무엇에든지 옳고 무엇에든지 순결하고 또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고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해야 한다는 것을 지금까지 배웠고 그 교훈을 받았고 그 말씀을 들었다.
또한 그들은 그 도덕적 완전함의 한 본을 바울의 신앙생활 속에서 보았다. 사도 바울은 범사에 모범적 삶을 살았다. 비록 그가 엄격한 의미에서 완전한 모범이 되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는 비교적 흠이 없는 인격자로서 성도들 앞에서 행했다. 그래서 그는 3:17에서도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기도 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4:3-4에서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 간증했고, 또 고린도전서 4:16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말하였다. 사도 바울의 교훈은 자신이 직접 실천한 바이었다. 가장 효과적 교육은 선생이 직접 실천하며 본을 보이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완전함을 생활 목표로 삼고 실천하라고 가르친 것이다. 우리는 완전한 삶을 항상 생각하고 완전한 삶을 실천해야 한다. 구원은 생활의 변화이다. 생활이 변하지 않는 구원은 구원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죄인이 변하여 의인이 되고, 더러운 자가 변하여 깨끗한 자가 되는 것, 그것이 참된 구원이다. 우리가 참으로 구원받은 자라면 바로 그러해야 한다. 그러므로 도덕적 완전은 바로 우리의 삶의 목표요 실천 강령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약 2:17, 26).
사도 바울은 또 “그리하면 평안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고 말했다. 그것은 온전한 삶의 결과를 증거한다. 우리의 온전한 삶의 첫 번째 결과는 하나님과의 동행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은 특권 중의 특권이요 가장 든든한 보장이며 보증이다.
그것은 각양의 기도 응답을 포함한다. 과연 요한일서 3:21-22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고 말씀하였다. 온전한 삶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늘 들으시는 복된 삶인 것이다.
온전한 삶의 두 번째 결과는 하나님의 평안이다. “평안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평안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뜻과 같다. 성경에서 ‘평안’이라는 말(에이레네, 히브리어 솰롬)은 포괄적 개념이라고 본다. 그것은 마음의 평안 뿐만 아니라, 몸의 건강, 물질적 여유, 환경적 평안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것은 불안, 병, 가난, 전쟁과 반대되는 말이다. 그것은 우리말의 ‘안녕’이라는 말과 같다. 이 평안은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할 때 그에게 오고 사람이 죄를 지을 때 그에게서 거두어지는 것이 율법의 기본적 내용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48:18은, “슬프다, 네가 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만일 들었더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라고 말했고 또 이사야 48:22과 57:21은 악인들에게는 평안이 없다고 말했다(사 48:22).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평안이 넘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도덕적 완전함을 우리의 생활 목표로 삼아야 한다. 도덕적 완전함은 진실함, 존경받을 만함, 올바름, 순결함, 사랑할 만함, 칭찬할 만함 등으로 표현된다. 그것은 성경에 교훈된 성도의 생활의 규칙이며 우리의 성화의 목표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도덕적 완전함이다. 우리는 흠 없는 인격이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본이 되셨다.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본이 되었다. 기독교는 단순히 이론의 종교가 아니고 이론을 가진 실천의 종교이다. 먼저 믿은 자들은 나중에 믿는 자들에게 믿음과 행위에 있어서 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믿음과 인격과 삶에 있어서 자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평안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고 체험해야 한다. 이것은 성경말씀대로 도덕적 완전을 위해 힘쓰는 성도들에게 약속된 놀라운 복이다. 비록 우리의 행위가 완전하지 못할지라도, 우리가 순종하기를 힘쓸 때 우리는 하나님의 평안을 체험할 것이다. 우리가 범죄하면 하나님의 평안을 잃어버리며 오히려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고 순종하면 평안을 회복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면 강 같은 평안을 얻을 것이다(사 48:18).
10-14절, 자족하기를 배움
[10절]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사도 바울의 전도 사역 초기에, 빌립보 교인들은 그를 물질적으로 후원했으나(15-16절) 얼마 동안 중단했다가 다시 도움을 보내왔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하였다. 왜냐하면 그런 물질적 도움은 그들이 그의 복음 사역과 그 고난에 동참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14절,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또 그들의 선교 헌금은 그들의 믿음과 사랑의 진실함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였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헌금이 그들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는 것이며(고후 8:8) 그들이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증거라고 말했었다(고후 9:13).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득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려 성전 봉사의 일에 전념하는 레위인들의 생활비로 쓰게 하셨다. 민수기 18:21,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또 레위인들의 십일조는 제사장들에게 드려 생활비로 쓰게 하셨다(민 18:28).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고(마 10:42), 또 심지어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주의 종들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선행이 영생의 표가 된다고 말씀하셨다(마 25:31-46).
[11-12절]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사도 바울은 자신의 자족하는 생활 신조를 간증한다. 그것은 아마 그들의 물질적 후원에 대한 그의 기쁨이 그가 단지 물질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님을 말하기 위해서이었을 것이다. 그는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한다. 성도들이 전도자들을 생각하고 물질로 돕는 것이 선한 일이지만, 전도자들은 물질에 속박을 받지 않고 물질을 초월하여 자족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주께서는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실 때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0:9-10).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복음 전파자들이 복음으로 사는 것이 합당하지만 복음에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해 자신은 그 권리를 쓰지 않았다고 증거하였다(9:12).
자족하는 생활은 전도자들 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성도들이 배워야 할 생활이다. 염려는 탐심에서 나온다. 참된 믿음은 세상의 모든 염려를 버리고 자족하며 살게 한다. 예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교훈하셨다(마 6:31).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교훈했다(딤전 6:7-8).
자족하는 생활은 중세의 수도사들처럼 가난하게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족하는 삶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아는 삶을 말한다. 우리는 배부를 줄도 알고 배고플 줄도 알며,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궁핍에 처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의 삶은 잠시 지나가는 나그넷길이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미래의 세계가 있다. 그 세계의 영광을 확신하고 소망하는 성도들은 이 세상의 빈부 귀천의 삶에 대해 만족하거나 불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전도자들과 성도들의 의식주의 필요를 아시고 공급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자 되는 것을 약속하지는 않으셨으나, 우리의 일용할 양식은 보장하셨다(마 6:31-33).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나온 수백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40년 동안 날마다 하늘에서 만나를 비같이 내려주셨다(출 16:4, 35). 잠언 30:7-9는,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라고 말하였다. 행복의 필수적 조건은 물질적 풍요가 아니고 사랑과 평안이다. 잠언 15:17,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언 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고기]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러므로 주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마 6:11).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탐욕도 염려도 버리고 날마다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구하며 언제나 어떤 형편에서나 먹을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자족하며 살 수 있고 또 그렇게 살아야 한다.
[13-14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그리스도]3)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어려운 환경여건에서도 낙심치 않고 자족하며 이겨나갈 수 있도록 도우신다. 그는 우리의 위로와 힘과 도움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늙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한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실 때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셨다(창 18:14).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고기 먹기를 원하며 불평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1개월간 고기를 먹게 하겠다고 말씀하시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니이까라고 반문하는 그에게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고 말씀하셨다(민 11:23).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신다. 역대하 16:9는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고 말하였다.
이사야 2:22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말했고, 에스겔 7:19는 “그들이 그 은을 거리에 던지며 그 금을 오예물[더러운 것]같이 여기리니 이는 여호와 내가 진노를 베푸는 날에 그 은과 금이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하며 능히 그 심령을 족하게 하거나 그 창자를 채우지 못하고 오직 죄악에 빠치는 것이 됨이로다”고 말했다. 우리는 사람이나 돈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피곤치 않고 날마다 새 힘을 얻으며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다(사 40:30-31). 주께서는 우리의 능력이 되신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성도들이 전도자들을 생각하고 물질로 돕는 일은 기뻐할 만한 선한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복음 사역에 동참하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하시는 일이다.
둘째로, 우리는 자족하는 삶을 배워야 한다.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욕심과 염려를 다 버리고 섭리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들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만 의지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현실의 크고 작은 모든 어려움을 잘 이겨나갈 수 있다.
15-23절, 헌금의 의미와 약속
[15-16절]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카이 하팍스 카이 디스)[‘몇 번,’ 혹은 ‘여러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복음의 시초에’라는 말은 바울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던 때를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주후 47년경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되었고(행 13:1-3) 주후 50년경 2차 전도여행시 마게도냐 지방으로 건너가 그 지방의 첫 성인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파했다(행 16:12).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하였다’는 말은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 지방을 떠나 다른 곳들에 복음을 전파했을 때 빌립보 교인들이 전도 후원금으로 그를 몇 번 도왔음을 가리킨다. 그가 데살로니가로 가서 전도했을 때(행 17장), 그들은 벌써 그를 돕기 시작했었다. 그때 바울을 도왔던 교회는 그 교회뿐이었다. 헌금은 전도와 구제를 위해 하나님께 바치는 돈이다. 물론 전도는 국내외의 전도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지교회의 목회활동들도 포함한다. 그러나 교회는 자체의 행사와 교제를 위해서는 헌금을 절약적으로 써야 할 것이다.
[17절]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본문은 헌금이 성도의 선한 열매임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좋은 행실을 원하신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구원받은 성도는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 헌금은 좋은 열매이다. ‘너희에게 유익하도록’이라는 말은 헌금이 헌금하는 자 자신에게 유익이 됨을 보인다. 헌금은 헌금하는 자의 믿음의 진실함을 증거한다. 우리는 헌금하는 자신을 보고 우리의 믿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헌금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야 한다. 구약시대 헌금의 표준은 소득의 온전한 십일조이었지만(레 27:30-33; 말 3:8), 신약시대 헌금의 표준은 ‘풍성하게 드리는 것’이다. 그것은 십일조 이상을 의미할 것이다. 고린도후서 8:7,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헌금]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구약의 십일조 규례는 의식법으로 신약 아래서는 성취되었고 폐지되었으나 축소된 방식으로가 아니고 풍성한 방식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소득의 십일조 이상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18절]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본문은 헌금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라고 증거한다. ‘향기로운 냄새’라는 표현은 구약성경에도 약 17번 나온다(창 8:21; 출 29:18; 레 1:9, 13, 17; 2:2, 9; 3:5, 16 등). 하나님께서는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에서 제단에 태워지는 제물의 냄새를 ‘향기로운 냄새’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유화(宥和)의 향기, 즉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는 향기라는 뜻이다. 헌금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향기로운 냄새요 받으실 만한 제물이다. 헌금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순종과 감사의 표시이다.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린 자들만 즐거이 헌금할 수 있다(고후 8:5). 또 헌금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므로, 그것은 예배의 한 중요한 요소이다. 예배의 중요한 요소들은 찬송과 기도와 설교와 헌금이다. 물론 이것들 중에서 설교가 가장 중요한 요소이지만, 헌금도 예배의 한 중요한 요소이다(고전 16:2).
[19-20절]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헌금하는 자들에게 모든 필요한 것을 채워주실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부요하시고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다.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의 주인이시다. 시편 24:1,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학개 2:8,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헌금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대상 29:11, 14).
온 세상의 주인이시며 부요하신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살며 성경말씀대로 순종하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풍성하게 주실 것이다. 시편 37:25-26,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잠언 11:24-25,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의식주의 필요]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6:33).
엘리야 시대에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대한 좋은 예이다. 기근이 왔고 요단 앞 그릿 시내가 마르자 선지자 엘리야는 시돈 땅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서 한 과부를 만나 떡 한 조각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그 과부에게는 떡이 없었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엘리야의 요청대로 그에게 떡을 만들어 주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과부와 그의 아들과 엘리야가 여러 날 먹게 하셨고 그 기근의 기간 동안에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않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게” 하셨다(왕상 17:8-16).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진실히 믿고 그의 뜻대로 살고자 애쓰는 그의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의 필요를 공급해주실 것이다.
[21-23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 집 사람 중 몇[가이사의 집에 속한 자들]이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4)
‘성도’와 ‘형제’라는 명칭들은 귀하고 아름다운 명칭들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으로 말미암아 단번에 거룩함을 얻었고(히 10:10)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고 형제 자매가 되었다(엡 2:19; 마 12:50). 이것은 세상 사람들 모두가 누리는 복이 아니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복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의 성도들이 서로 문안하기를 원하며 또 자기와 함께 있는 성도들의 문안도 그들에게 알린다.
‘특별히 가이사의 집에 속한 자들’이라는 말은 놀라운 사실을 보인다. 비록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으나, 그가 전한 복음은 가이사 즉 로마 황제의 집안에까지 들어갔다. 로마 황제의 가족들 중에 믿는 이가 생겼다! 이것은 전도의 놀라운 진전이며 결실이었다! 사도 바울은 옥에 갇혔으나 복음은 갇히지 않고 확장되고 있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헌금은 우리의 신앙의 좋은 열매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성도가 선한 행실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헌금, 특히 전도와 구제를 위한 헌금은 성도의 좋은 열매이다.
둘째로, 헌금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헌신과 봉사의 삶 전체가 그렇지만(롬 12:1), 헌금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제물이다.
셋째로, 천지만물의 주인이신 영광의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헌금하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이다. 헌금은 확실히 하나님께로부터 물질적 복을 받을 선한 행위이다.
미주
1) ‘상’이라는 원어(브라베이온)는 경주장에서 이긴 자에게 주는 면류관 같은 상을 가리킨다(고전 9:24). 그것은 신앙의 기본적 달음질의 결과로 약속된 상이다. 이것은 성경 다른 곳에서 빈번히 나오는 ‘보상, 삯, 대가’의 개념인 ‘상’이라는 원어(미스도스 misqov")와 구별되는 것 같다.
2) Byz (D* itd vg) syr(p) (arm) 등에 있음.
3) Byz syrp Origen(gr) lat 등이 그러함.
4) Byz p46 א A itd vg syrp arm 등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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