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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사랑과 선행에 힘쓸 것
1-13절, 형제 사랑, 음행, 돈 사랑, 인도자 본받음
[1절] 형제 사랑하기(필라델피아)를 계속하고.
형제 사랑은 주께서 주신 새 계명의 내용이다(요 13:34). 주 안에서 형제된 우리들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의 성격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한다”(4-5절)고 잘 증거되어 있다. 이것은 거룩하고 고상한 사랑이다. 우리는 이런 사랑으로 주의 재림 때까지 또 우리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계속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물론, 형제 사랑은 단지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선한 행실로 해야 한다(요일 3:17-18).
[2절]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형제 사랑은 손님 대접의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 창세기 18장과 19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롯은 손님을 잘 대접했고 그러다가 천사들을 대접하였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손님을 대접할 때 겸손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또 정성껏 하였다. 돈은 선한 일을 위해 쓰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디모데전서 6:17-18은, 부자들에게 마음을 높이거나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교훈하였다.
[3절]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형제 사랑은 옥에 갇힌 자나 학대받는 자를 돌아보는 일로도 나타나야 한다. 예수께서는 앙과 염소의 비유에서, 형제들 중에 작은 한 사람이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벗었을 때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 방문하는 것이 곧 주님께 한 행위라고 말씀하셨다(마 25:35-40).
[4절]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결혼은 모두에게 귀하며 잠자리는 더럽지 않으나](KJV). [그러나](전통본문)18)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결혼과 부부관계는 하나님께서 창조 때부터 주셨던 아름다운 일이며 결코 더러운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부가 서로를 사랑하며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어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남편이든 아내이든 간음하거나 음행하는 것은 죄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성 관계에 대해 매우 조심하며 처신해야 한다.
[5-6절]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우리는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아야 한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근원이 된다(딤전 6:10). 하나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도우시고 공급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보배로 삼는 자는 이 세상의 썩어질 것들을 양보할 수 있다.
[7절]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교인들을 인도하는 자들은 목사들과 장로들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성경을 통해 또 성경적 설교 즉 성경의 바른 해석을 통해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목사들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전달해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2:13에 보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사도 바울에게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고 사도 바울은 그들의 태도가 합당하였다고 증거하였다.
물론, 목사와 장로들이 말과 행실에 있어서 먼저 성도들에게 본이 되어야 하지만(벧전 5:2-4), 성도들은 그들의 바른 교훈과 지도를 잘 따라야 한다. 교인들은 그들의 인도자들의 삶의 마지막을 주의해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아야 한다. 좋은 모범을 보인 목사들은 바른 설교와 삶을 보여주었을 것이고 그들의 마지막도 좋을 것이다. 물론 사이비한 이단 사상들을 전하고 돈과 명예와 육신의 쾌락를 사랑하는 자들은 그 끝이 좋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통해서도 경고를 받아야 하지만, 특히 진실한 목사들과 장로들, 모범적인 인도자들의 생애를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참 인도자이시다. 마태복음 23:8-10,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하나이니 곧 그리스도시요](전통본문)19) 너희는 다 형제니라. . . .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참 인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2천년이 지난 지금도, 또 세상 종말까지, 영원한 천국에서도 동일하시다. 우리는 그를 본받아야 한다.
[9절] 여러 가지(포이킬로스)[다양한] 다른(크세노스)[이상한]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이란 세상 사람들의 기호에 맞추어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부패시키고 변질시키는 사이비한 목사들의 교훈들을 가리킨다. 그것들의 근원은 사탄과 악령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불변하심은 그에 관한 교리의 불변성을 보인다. 기독교 진리는 가감할 수 없이 명확한 내용을 가지고 있고 시대마다 변할 수 없다. 오늘날 기독교계는 매우 혼란스럽다.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이 교회들 안팎에 많이 있다. 이단적인 자유주의 신학, 비성경적 교회연합운동, 성경 계시를 넘어서는 이단적인 은사주의, 종교다원주의, 열린예배, CCM 등의 풍조가 교회 안에 가득하다. 그러나 참된 성도들은 오늘날 유행하는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에 이끌리지 말고 바른 교훈, 즉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에 굳게 서야 한다. 우리는 그 옛길, 그 건전한 길을 붙들어야 한다. 그것이 보수신앙이 추구하는 바이다.
성경 진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소식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이며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진리이다.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음식을 먹는 것은 우리의 육신에 관계되는 것뿐이지 우리의 영혼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는 단지 음식을 먹는 교제가 아니고 성경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 안에서 서로 교제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라고 강건케 되는 것이 필요하다.
[10-13절]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대제사장이 죄를 위해 그 피를 성소에 가지고 들어간 짐승의 고기는](KJV, NASB) 영문(진영 陣營)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오네이디스모스)[비난, 불명예, 모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율법에 규정된 대로, 속죄제물 중에 그 피를 제사장이 성소에 가지고 들어가지 않은 경우는 그 고기를 제사장이 회막 뜰에서 먹을 것이지만, 성소에 들어간 경우는 그 고기를 먹지 못하고 그것 전체를 진 바깥 재 버리는 곳에서 불살라야 했다(레 4:5-11; 6:26, 30).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하나님의 모든 택한 백성들을 위한 속죄제사이었다. 대제사장이신 그는 그의 피를 가지고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으므로 그의 육체는 진 밖에서 불살라지셔야 했고 그래서 예루살렘의 성밖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것이다. ‘그 능욕’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당하는 비난과 불명예와 모욕을 가리킨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비난과 불명예와 모욕을 받으셨으니, 우리도 그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야 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제국의 핍박을 피해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에서 생활해야 했었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 오실 때까지 또 우리의 목숨이 끝날 때까지 거룩하고 진실한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또 우리는 타지에서 온 형제를 영접하고 감옥에 갇힌 형제나 학대받는 형제를 돌아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결혼과 부부관계를 귀하게 여기며 결혼의 순결성을 지켜야 한다. 성도는 부부의 의무를 다해야 하고 정조를 지켜야 한다. 우리는 결코 간음하거나 음행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심판받을 죄이다.
셋째로, 우리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가진 것을 족한 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부하려 하는 자들이 시험과 멸망에 빠지며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고 믿음에서 떠나게 된다고 말했다(딤전 6:9-10).
넷째로, 우리는 경건하고 진실한 인도자들을 본받아야 한다.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은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전하며 신앙생활의 본을 보여야 하며 교인들은 그들을 주목하고 그 믿음과 행위를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오늘날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에 끌리지 말고 옛길, 바른 길을 붙들고 주를 위해 고난과 죽음까지 각오하며 그를 따르는 자들이 되자.
14-25절, 찬송과 선행, 복종과 기도, 축원
[14-15절] [이는]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찾음이니]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우리의 현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는 고난의 생활일지라도, 장차 영광의 천국에 들어갈 것이므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죄사함은 우리의 찬송과 기쁨의 이유이다.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이다. 찬송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창조하신 목적이며(사 43:21) 또 우리를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신 목적이다. 또 찬송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이다.
[16절]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또 우리는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고 힘써야 한다. 이런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성경의 요지는 첫째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는 것과, 둘째로 서로 사랑하고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 선행은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열매이다. ‘서로 나눠주기’라는 원어(코이노니아)는 ‘교제, 구제, 구제 헌금’이라는 뜻이다. 선행과 구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힘써야 할 내용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들이다.
[17절]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이는]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함이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회중의 인도자들, 즉 목사들과 장로들은 교인들의 영혼들을 위하여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결산할 자들처럼 깨어 있다. 이렇게 사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다. 그러므로 교인들은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 그럴 때 인도자들은 교인들을 위해 즐거움으로 일하게 되며 근심으로 하게 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이 교인들에게 유익이 될 것이다. 교인들은 목사들과 장로들이 무거운 마음으로 봉사의 일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18-19절]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확신함이니]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
사도 바울이라고 생각되는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자주 기도의 요청을 하였다. 에베소서 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데살로니가전서 5: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데살로니가후서 3:1,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히브리서 저자가 성도들에게 기도를 요청한 이유는 두 가지이었다. 첫째로, 그는 그와 그의 일행이 선한 양심을 가지고 선한 일을 위해 힘쓰고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행하는 선한 일은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둘째로, 그는 더 속히 그들에게 돌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히브리서 수신자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가 지금 이곳에 있다. 설교자는 교인들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며, 교인들은 설교자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20절]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평강[평안]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히브리서 저자의 기원은 예수님에 관해 세 가지를 증거한다. 첫째로, 예수님은 양의 큰 목자이시다.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부르셨었다. 요한복음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목자장’이라고 불렀다(벧전 5:4). 우리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교회의 크시고 참되신 목자이시며, 인간 목사들은 교회의 작은 목자들에 불과하다.
둘째로, 예수님은 영원한 언약의 피를 흘리셨다. 이것은 히브리서의 대주제이기도 하다.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구약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의 그림자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신 새 언약은 수정될 수 없는 영원한 언약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로 구원을 얻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이끌어내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역사적 사실이다. 그가 죽고마셨다면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크게 손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17:31은,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고 말했다.
본문은 또 하나님을 ‘평안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세상에서 평안은 죄로 인하여 상실되었었다(사 57:21; 롬 3:17). 그러나 주 예수의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죄사함 받은 심령들 속에 평안이 임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신 평안의 하나님이시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선행과 순종을 온전케 하시기를 소원하는 기도 내용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도들의 선행과 순종의 생활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선행과 순종은 단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주시는 힘으로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여기에 우리의 기도의 이유가 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일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일에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다 행하게 하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21절에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 말씀이라고 본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영광을 증거한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5:12의 말씀과 같다: “[천사들이]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22-25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너희를 인도하는 [모든]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서신을 받는 자들에게 그의 권면을 용납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겸손한 태도이다. 그는 본 서신을 ‘간단히 쓴’ 서신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보기에 이 서신은 길지만, 이것을 ‘간단히 쓴’ 서신이라고 표현한 것은 저자가 그 교인들에게 가르치고 권면하고자 한 내용은 이것보다 훨씬 더 많았음을 보인다. 우리는 성경책을 읽을 때 ‘너무 긴 내용,’ ‘너무 많은 내용’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많은 내용들을 ‘간추린 내용’이라고 생각하고 읽어야 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디모데를 ‘우리 형제 디모데’라고 표현한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3:2에서 디모데를 ‘우리 형제’라고 표현했다. 그 저자는 디모데와 매우 친근한 사이임에 틀림없다. 또 본절은 디모데가 옥에 갇혔다가 놓인 것을 증거한다. 그 저자는 디모데가 속히 오면 그와 함께 그들에게 가서 만나보겠다고 말한다.
서신 수신자들은 두 부류로 표현된다. 첫째는 ‘인도하는 모든 자들’ 즉 목사들과 장로들이며 둘째는 ‘모든 성도’이다. 하나님께서는 초대교회 때로부터 교회에 목사들과 장로들을 세우셨다(행 14:23; 20:28).
‘이탈리아에서 온 자들’이라는 말은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도 복음이 증거되었음을 보인다. 본 서신은 사도 바울이 기록했을 것이다. 여러 면에서 볼 때 사도 시대에 이런 유의 서신을 쓰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은 사도 바울이었다. 또 초대교회의 증거는 매우 강력하다. 특히 신약성경의 정경을 선언한 칼타고 회의는 본 서신을 바울 서신으로 보았다. 그가 다른 서신들과 달리 이 서신 초두에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본문은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그가 자기 백성을 창조하신 목적이며 또 그들을 구원하신 목적이다. 찬송은 우리의 입술이 맺을 수 있는 가장 선한 열매이다.
둘째로, 우리는 선행과 구제를 힘써야 한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이 세상에서 선한 일들을 많이 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선행과 구제는 구원받은 자들이 맺어야 할 아름다운 열매들이다.
셋째로, 교인들은 그들의 인도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 물론 회중의 인도자들, 즉 목사들과 장로들은 교인들을 위해 마치 자신이 결산할 자인 것처럼 깨어 있어야 하며 성실히 그 직무를 다해야 하지만, 교인들은 그 인도자들이 즐거움으로 그 일을 하고 근심으로 하지 않도록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이 모든 선한 일을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간구해야 한다. 선행과 순종이 단지 우리의 노력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되므로 우리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미주
1) Byz syr 등에 있음.
2) 골로새서 1:15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고 번역하였다. 골로새서에서는 그 말이 모든 피조물과 구별된 특별한 관계, 즉 아버지와의 영원적인 관계를 가리켰다.
3) ‘다시’라는 말이 ‘들어오다’라는 말에 관계되는지(NASB), 아니면 ‘또 다시’라는 뜻으로 5절 중반의 ‘또 다시’처럼 단지 성경구절의 반복된 인용을 가리키는지(KJV, NIV) 확실치 않다. 후자라면, 이 구절은 단순히 예수님의 탄생을 의미하겠지만, 전자라면, 주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키는 것 같다.
4) 히브리어 원문에는 없으나 헬라어 70인역에는 있음.
5) ‘천사보다’라는 말의 원문(메엘로힘)은 ‘하나님보다’이다. ‘천사들보다’라는 본문은 고대 70인 헬라어역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귀하게 창조되었으나 하나님보다 결코 조금 못한 존재는 아니다. 무한자와 유한자의 질적 차이는 무한하다. 또 문맥적으로 만일 시편 저자가 ‘하나님보다’라는 뜻으로 말하려고 했다면, 그는 ‘하나님보다’라는 3인칭보다는 ‘당신보다’라는 2인칭을 사용했을 것이다.
6) ‘붙들어 준다’는 원어(에피람바노)는 ‘붙잡다’는 뜻 외에 ‘본질을 취한다’(it, vg, syr, Calvin, KJV 등), ‘돕는다’(Thayer, BDAG; NASB, NIV 등)는 뜻도 가지고 있다.
7) Byz C vgmss syr copbo 등이 그러함.
8) 여기에 말한 ‘금향로’(크뤼순 뒤미아테리온)는 성소에 있었던 금으로 싼 분향단(출 30:1; 헬라어로 뒤시아스테리온 뒤미아마토스)을 가리키지 않고 금향로(대하 26:19, 뒤미아테리온)를 가리켰다고 본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대제사장이 1년 1차씩 사용했던 금향로는 지성소에 보관되었다고 말했다(Josephus, Antiquities, 3. 7). 솔로몬 성전에서 금향단의 위치는 분명치 않다. 열왕기상 6:22, ‘내소[지성소]에 속한 단’이라는 원어(함미즈베아크 아쉐르 랏데비르)는 ‘내소를 향한 단’이라는 뜻 같다.
9) Byz א Clement Origen 등이 그러함. ‘나의 갇힘들’이라는 말은 본서가 바울의 저작임을 보이는 것 같다.
10) Byz vgms syr 등에 있음.
11) Byz p13 vgmss copbo eth 등이 그러함.
12) 본장에서는 ‘믿음’(2회), ‘믿음으로’(20회), ‘믿음을 좇는’ 혹은 ‘믿음을 따라’(2회)라는 단어나 구절이 24회나 나온다.
13) Byz syr 등이 그러함.
14) ‘죽은 자와 방불한 사람’이라는 원어(네네크로메누 nenekrwmevnou)는 완료수동태 분사, 남성소유격으로 아브라함을 가리킨다.
15) ‘더 나은, 더 좋은’이라는 말은 신약성경에 19번 사용되었는데, 그 중 13번이 히브리서에 나온다. 예를 들면, ‘더 좋은 소망’(7:19), ‘더 좋은 언약의 보증’(7:22),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8:6), ‘더 좋은 제물’(9:23), ‘더 낫고 영구한 산업’(10:34) 등이다.
16) 이사야의 승천과 순교자 저스틴의 트리포와의 대화(A Dictionary of the Bible, ed. James Hastings, II, 486).
17) 원문에서 1, 2절에 중심적인 말(주동사)은 ‘경주하자’이며 ‘벗어버리고’ ‘바라보자’는 말들은 분사 형태이다.
18) Byz C vgmss syr Clement 등이 그러함.
19) Byz syrc 등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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