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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형제를 사랑함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
1-5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시
[1절]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 즉 중생(重生)한 자이다. 성경에 증거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즉 신적 구주이시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를 단지 훌륭한 선생으로 믿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을 의미한다. 선지자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아께서 신적 인격일 것을 예언하였다. 이사야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선지자 미가도 메시아의 신성(神性)을 예언했다.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영원부터니라].” 사도 요한은 그가 쓴 요한복음의 목적을 이렇게 말하였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0-31).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그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가 하나님께로서 난 자, 즉 중생(重生)한 자라고 말한다. 즉 중생의 증거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신학은 중생의 증거를 회개와 믿음이라고 말한다. 회개와 믿음은 같이 간다. 회개는 하나님 없이 살던 자가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를 믿고 그가 보내신 구주 예수님을 믿는 것이며, 참으로 주를 믿는 자는 죄를 버리고 그를 믿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중생의 증거이다. 요한복음 1:12-13, “영접하는[영접한] 자 곧 그[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의 여러 구절들, 즉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여러 구절들(요 3:16, 36; 5:24; 6:40 등)은 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중생의 증거임을 전제하거나 포함하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중생해야 영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본절은 우리를 중생케 하신 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들 곧 중생한 성도들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주신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요 13:34). 우리는 다 하나님의 백성이다. 세상에서 육신의 형제들을 사랑하며 형제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요 그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듯이, 영적 형제들 간에도 그래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는 육신의 가족보다 더 사랑스런 자들이다. 육신의 부모님이 낳으신 형제들도 귀하나 그들은 백년 동안 형제이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낳으신 형제들, 구원받은 성도들은 영원한 형제들이다.
[2-3절]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11)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것임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며 그의 계명의 내용은 하나님의 자녀된 형제들을 사랑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한다면 그의 계명대로 형제를 사랑할 것이다.
그의 계명들은 결코 무겁지 않다. 우리가 중생치 않았을 때 즉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기가 심히 무거웠으나, 우리가 중생한 후에는 하나님의 씨가 우리 속에 심겨졌고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 속에 계셔서 역사하시므로 우리는 비록 연약함이 있어 때때로 넘어질지라도 하나님의 법을 즐거이 지키며 또 지킬 수 있다. 마태복음 11:29-30,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갈라디아서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4-5절] 대저[이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이김이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하나님의 계명이 무거운 짐이 아닌 것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기 때문이다. 세상은 죄악되고 이기적인 세상이며 세상은 자기 사랑, 돈 사랑, 쾌락 사랑으로 가득하다. 세상을 이긴다는 말은 죄와 사망과 마귀의 세력을 이긴다는 뜻이다. 즉 죄 짓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 속에는 성령께서 계시고 그의 생명 원리가 심겨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죄와 세상을 이길 수 있다. 요한일서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계속]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사역은 우리를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로부터 건져내어주셨다. 로마서 6:14, 18,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성도가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믿음, 곧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영생을 얻었고 부활을 소망하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로써 마귀와 그 세력들은 성도들 앞에 완전히, 영원히 패배하고 말았다. 이 귀한 사실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복음 진리와 그 은혜 안에 다 들어 있다. 죄는 죽음과 불행을 가져왔으나 의는 생명과 영원한 복과 영광을 가져왔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 5:1-2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하였다. 믿음의 결과는 기쁨과 확신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중생의 표를 가진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었다면 우리는 중생의 표를 가진 자이다. 우리는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백성된 형제 자매들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를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가 중생케 하신 다른 형제 자매들을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이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겨야 한다. 우리는 우리 같은 죄인을 구원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죄악된 세상, 이기적인 세상, 자기 사랑, 돈 사랑, 육신의 쾌락 사랑으로 가득한 세상을 이길 수 있다. 계명 순종은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니다. 우리는 은혜로 얻은 얻은 의와 거룩 안에서 의와 거룩을 실천할 수 있다.
6-10절, 물과 피와 성령의 증거
[6절]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물과 피로 임하셨다는 뜻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선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가리킨 것 같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피와 물을 흘리셨다. 요한복음 19:34,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초대교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부정하는 이단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되셨다.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때가 되어 사람의 본질을 취해 참으로 사람이 되셨다(요 1:14).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표현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이후 계속 그리고 영원히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다.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다’는 표현은 물과 피라는 말이 그의 인성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또한 상징적 의미도 가짐을 나타내는 것 같다. 그러면 물은 죄씻음을, 피는 속죄사역을 가리킬 것이다. 이 둘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적 내용이다. 그것은 세례와 성찬의 의식으로 표현되는 것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까닭은 속죄제물이 되시기 위함이었다. 그는 우리의 죄 씻음을 위해 속죄제물로 죽기 위해 사람으로 오셨다. 그의 속죄사역은 우리의 죄 씻음의 근거가 되었다. 요한복음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마태복음 20:28, “인자(人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6:28,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7절]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성령께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신다. 즉 성령께서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우리 죄를 대속하신 구주이심을 증거하신다. 성령께서는 참되시며 그가 증거하시는 내용도 참되다. 예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고(요 15:26), 또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6: 13-14). 오늘날도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밝히 증거하시며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게 하신다.
[8절]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12)
성령과 물과 피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또한 그 셋의 증거는 하나이다. 그 셋은 공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 되심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 같은 죄인들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의 증거의 요지이다. 디모데전서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9절]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이는]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그의 증거임이니라].
우리는 날마다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들의 증거를 받아들이며 세상을 살고 있다. 우리는 매일 신문의 뉴스들을 믿는다. 또 법정의 판결도 많은 부분 사람의 진실한 증언들에 의존한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세상 생활은 지극히 불안정할 것이고 의심으로 가득할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의 진실한 증거가 믿을 만하다면, 하나님의 증거는 더 확실하고 믿을 만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에 관하여 그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증거하셨다. 그는 친 음성으로 자기 아들에 관해 두 번 증거하셨다. 마태복음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성경의 모든 말씀은 실상 하나님의 증거의 말씀들이다. 또 성령의 증거는 하나님의 증거이다.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저주받은]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모든 말씀들 속에서 자기 아들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에 대해 그리고 그의 속죄사역에 대해 증거하셨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도 또 그의 물과 피도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과 속죄사역을 증거한다.
[10절]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그]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그 증거가 있다. ‘증거가 있다’는 원어(에케이 텐 마르튀리안)는 ‘그 증거가 있다’는 말이다. ‘그 증거’는 하나님의 증거를 가리킨다고 본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증거하시는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였고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을 믿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증거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자들이다. 왜냐면 그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해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하나님이시며 거짓말하지 않으시는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증거를 믿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큰 잘못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과 속죄사역을 믿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물과 피로 오신 자이시다. 그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사람의 본질을 취하셨다. 그의 몸 속에는 물과 피가 있으셨다. 그는 죄가 없으신 중보자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자기 피로 친히 우리를 위한 속죄를 이루셨다. 우리는 신적 구주 예수님과 그의 속죄사역을 믿고 확신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성령의 증거를 믿어야 한다. 성령의 증거는 사도들을 통해 주신 증거이며 또 그들의 증언들인 신약성경의 증거이다. 우리는 그 증거들을 다 믿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는 하나님의 증거를 우리 속에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그 증거, 즉 하나님께서 아들에 대해 증거하신 그 증거를 소유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자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많은 증거들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기 때문이다.
11-13절, 영생을 주심
[11-13절]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증거하신 내용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그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을 증거하셨다. 사람은 본래 영생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었다.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시험하시는 첫 명령을 어느 기간 동안 잘 지켰더라면 그는 영생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고 하나님의 경고하신 대로 죽었다. 모든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시 49:12). 그러나 사람 속에는 여전히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 싶은 강렬한 소원이 있다. 죽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은 모든 사람에게 있다. 전도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말했다(전 3:11).
생명의 원천이신 창조주 외에는 아무도 사람에게 영생을 줄 수 없다. 그런데 그가 우리에게 영생을 주기를 약속하셨다. 요한일서 2: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사도 바울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음을 증거하였다. 디도서 1:2,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영생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진리의 중심 주제이다. 영생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삶이다. 그것은 병약하지 않고 강하고 영광스러운 생명이다(고전 15:42-44). 영생은 이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복된 선물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는 ‘썩어질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다(요 6:27).
하나님께서는 그의 약속하신 영생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셨다. 사도 요한은 본 서신 1:1-2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심을 증거하였고 또 5:20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고 증거하였다.
영생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사도 요한이 쓴 요한복음에서도 드러나 있다. 요한복음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47-48,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요한복음 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래 영원한 생명이시지만 사람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대속(代贖) 제물이 되셨고 그 대속 사역을 통해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 죄의 값은 죽음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의 결과는 영생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에서 잘 증거했다. 로마서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썼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매우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영생을 얻는 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영생이 된다는 것은 특히 요한복음에 풍성히 증거되어 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2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본문의 교훈은 확실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하셨고 그 영생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를 믿는 자들은 영생을 얻는다. 우리는 영생의 가치를 깨닫고 어리석게 그것을 세상의 것들과 바꾸지 말자. 영생과 바꿀 만한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또 우리는 이 영생을 감사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확신하고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에 절대 복종하고 또 모든 사람에게 이 영생의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을 널리 전해야 한다.
14-17절, 기도의 응답
[14절]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성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성경에 나타나 있다. 그것은 성경의 어떤 한 부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전체를 읽고 듣고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알도록 힘써야 한다. 성경말씀 읽기와 듣기를 거부하는 자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을 것이다. 잠언 28:9는,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고 말했다.
여호수아 7장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큰 성 여리고를 정복한 후 작은 성 아이에서 실패한 이유를 기록하였다. 그것은 아간이라는 한 사람이 여리고 정복 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노략한 물건 중에서 시날산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200세겔과 50세겔 무게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서 취하여 장막 안에 감추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죄가 있었을 때, 그리고 그 죄를 찾아내어 권징하여 제거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를 듣지 않으셨고 아이성 전투는 실패하였던 것이다.
사무엘하 21:1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다윗의 시대에 연부년 3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다윗의 통치 시대에 이스라엘 땅에 3년 기근이 있었는데, 그것은 사울 시대에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죄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전쟁 때에 기브온 사람들과 맹세로 약속하며 그들을 살려주었다. 그러나 사울은 그 맹세와 약속을 저버리고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고 그 죄 때문에 이스라엘 땅에는 3년 기근의 재앙이 임했던 것이다. 죄는 평안 대신 재앙을 가져온다.
이사야 1:15-16은,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라”고 말하였고, 이사야 59:1-2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말하였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3:7에서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교훈하였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 믿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라는 것이다. 성경말씀 읽기와 듣기를 좋아하는 자의 기도는 응답받을 것이다. 우리가 성경의 교훈을 거슬러 범죄하면 우리는 기도 응답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버리면 기도 응답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의 계명들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무엇을 기도해야 하며, 그때 기도의 응답을 얻게 되는 것이다.
순종은 평안의 길이다. 이사야 48:17-18은,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이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슬프다, 네가 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만일 들었더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라고 말한다.
[15절]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면서 그의 뜻에 맞게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그의 뜻대로 구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도 중요하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간구의 응답을 믿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기도의 효력을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한 것을 그가 들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또한 믿어야 한다. 마가복음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받는 줄로](전통본문)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16-17절]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죄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이며, 또 하나는 ‘사망에 이르는 죄’이다. 사도 요한은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라고 말한다. 죄의 값은 죽음인데(롬 6:23)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다는 말씀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로 구원을 얻고 영생을 소유한 후 실수로나 연약성 때문에 범하는 죄를 가리킬 것이다. 사도가 앞에서 중생한 자가 범죄치 않는다고 말했으면서 여기에서는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범한다고 말하는 것은, 중생한 자가 계속 죄 가운데서 생활할 수 없다는 뜻이며 중생한 자가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중생한 자도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그는 그 죄에 머물러 있지 않고 즉시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올 것이다. 그는 그 실수 때문에 구원과 영생을 잃어버리고 영원한 멸망에 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형제가 그런 죄를 범하는 것을 보면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하며 그러면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회개하고 영생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가 범해서는 안 되는 죄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언급하신 ‘성령을 훼방하는 죄’와 같은 죄라고 본다. 그런 죄는 사함을 받을 수 없다. 그것은 성령의 일을 고의적으로 방해하고 대적하며 양심의 감동을 극도로 억압하는 죄로 생각된다. 교회 안에 이런 죄를 짓는 자가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종종 이단자들 속에서 이런 유의 죄를 볼 수 있다. 이단은 실수나 무지나 연약의 죄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이론적으로 다 아는 자들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부정하는 것은 무지해서가 아니고 고의적이다. 그들은 고의적으로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의 신념을 가지고 진리를 대항하고 부정하고 왜곡하는 것이다. 그들은 인류 역사의 초기에 에덴 동산에서의 뱀처럼 확신 있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고 대적한다. 이런 이단과 배교의 죄는 너무 크고 두려운 것이어서 실상 그런 자들을 형제로 여길 수도 없을 것이다. 이들은 구원의 가망이 없어 보인다.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그런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열심히 읽고 듣고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그 뜻대로 기도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면서 그의 뜻대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라는 것도 믿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심을 믿는 것도 중요하다.
셋째로, 우리는 어떤 형제가 범죄하는 일을 볼 때 그가 돌이켜 회개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고의적으로 대항하는 이단자와 배교자를 위해 기도할 자신이 없지만, 주를 진실히 믿는 형제에 대해서는, 비록 그에게 실수와 연약이 있을지라도 그를 끝까지 사랑하고 그의 회개와 구원과 성화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18-21절, 바른 지식과 삶
[18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계속]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자신을 지키며]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원문에는 ‘우리는 아노라’는 말(오이다멘)이 18, 19, 20절에 각각 한 번씩 모두 세 번 반복하여 나온다. 첫째로, 본절에 우리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계속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 즉 죄 가운데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이 진리는 본 서신 3:6, 9-10에서 이미 말씀한 바이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계속]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계속]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계속]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계속]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원문의 현재시제, NIV).
중생한 성도들은 계속 범죄할 수 없다. 중생한 자는 그 영혼 속에 범죄할 수 없는 새 생명의 원리가 심어져 있고 영혼의 지배적 성향이 새로워졌기 때문에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중생한 자들 속에 심긴 새 생명은 하나님만 향하고 의(義)만 향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사역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생명의 성향이다.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라는 구절은 전통사본13)의 원문에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자신을 지키며”라고 되어 있다(KJV). 중생한 자는 계속 범죄치 않는다고 자신을 방임해서는 안 되고 항상 자신을 지키며 범죄치 않기 위해 힘써야 한다(딤전 5:22; 약 1:27). 사람의 마음 속에는 악한 것들이 많다. 중생한 자에게도 죄성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19-21에서 여러 죄악들을 열거하며 그것들을 버려야 할 것을 말했고, 고린도후서 7:1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 말했다.
그러나 중생한 자는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므로 악한 자 곧 사탄이 그를 만지지도 못할 것이다. 시편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 121:3,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로마서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19절]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하나님께로서 났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둘째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로서 나서 하나님께 속하여 있다는 것을 안다. 중생(重生, 거듭남)은 우리의 영혼이 죄와 허물로 죽었던 어두운 세계에서 생명을 얻어 다시 살아나는 사건이다. 중생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거듭남은 하나님께서 홀로 행하시는 구원 사역이다. 그때 사람은 하나님을 돕거나 협력하지 못한다. 중생한 자는 하나님께 속한다. 그는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된다. 이사야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救贖)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로마서 1:5-6,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그러나 우리는 온 세상이 악한 자, 곧 사탄 안에 처해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관자이시지만, 하나님께서는 사탄과 악령들이 세상에 활동하게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사탄을 이 세상 임금이라고 부르셨다. 요한복음 12: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4:3-4에서,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라”고 말했고, 에베소서 2:2에서는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말했다. 지금 세상에는 사탄과 악령들의 활동들이 많이 있다.
[20절]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깨닫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참된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또 우리가 그 안에 있다는 사실도 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심을 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시요(요 1:1) 크신 하나님이시며(딛 2:13) 참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요일 5:20). 또 그는 우리에게 영생이시며 또 친히 영생을 주시는 구주이시다. 요한복음 10:27-28에 보면, 예수께서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고 그 안에 있다.
[21절]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 [아멘.]14)
사도의 마지막 교훈이다. 성도가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근본이다. 우상이란 하나님이 아니면서 하나님처럼 높임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우상숭배는 가장 근본적이고 큰 죄악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에서 모든 우상을 제거해야 한다. 현대인은 돈과 육신의 쾌락, 지식과 과학, 아니 인간 자체를 하나님처럼, 혹은 하나님 대신에 높이고 가치 있게 여긴다. 이런 것들, 돈이나 육신의 쾌락이나 지식과 과학과 인간 자체는 다 우상이다. 우리는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만 경외하고 섬기며 순종해야 하며 모든 우상, 즉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을 조심해야 한다. 중생한 성도들은 우상들을 멀리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만일 우리가 그런 것들을 사랑하고 큰 가치를 둔다면, 우리는 범죄하는 것이고 그런 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고 멸망할 수밖에 없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몇 가지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한다. 첫째, 중생한 자는 계속 범죄하지 않는다. 우리가 중생한 자라면 우리는 자신을 지켜 범죄치 않아야 한다. 둘째, 중생한 자는 하나님께 속한다.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있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된 자들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감사하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 셋째, 우리는, 참 하나님이시며 영생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고 그 안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영생이며 우리는 그를 믿으며 그를 사랑하며 그를 끝까지 순종하며 따라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자신을 우상으로부터 지켜야 한다. 야고보서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우리는 특히 돈과 쾌락 사랑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
미주
1) 이단 반박, 3. 11. 1.
2) Byz A C vgcl copbo arm 등이 그러함.
3) Byz A vgcl ww copbo 등에 있음.
4) Byz에 있음. 그러나 א A B C 등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5) Byz에 있음. 그러나 א A B C latt syr cop Clementlat 등에는 없음.
6) Byz vgms copbo-ms 등은 생략함. 그러나 א A B C lat syr cop Origen, Cyprian 등에는 있음.
7) Byz vgms 등은 생략함.
8) Byz (א vgms syrp arm) eth Origenlat 1/3 (Cyprian) 등에 있음.
9) Byz A ita b e ff2 vg syrc arm Irenaeuslat 1/3 등이 그러함.
10) Byz 등; ‘하나님을’--א 048 vgcl syrp copbo arm 등.
11) 원문에 ‘하나님의 사랑’(hJ ajgavph tou' Qeou')은 직역하면 ‘하나님의 사랑’이지만(KJV, NASB),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라고도 번역된다(NIV).
12) KJV는 한글성경의 7절이 6절에 있고 7절과 8절 처음에는 “하늘에서 증거하는 이가 셋이 있으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시요 이 셋은 하나이니라. 그리고 땅에서”라는 말이 있다. 이 본문은 서방교회(로마 천주교회)의 전통적 성경이었던 라틴어 벌게잇역(Vg)과 헬라어 전수사본(TR)에 있다. 이 구절이 사도 요한의 글이라면, 그것은 삼위일체에 대한 놀라운 증거의 말씀이다. 8절에 “또한 이 셋이”라는 표현은 앞에 생략된 부분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남기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본문에 대한 고대 사본들과 역본들의 증거는 매우 약하며 그 신빙성도 약하다. 헬라어 사본들에는 14세기 소문자 사본 하나(629)와 16세기의 소문자 사본 둘(61, 918), 그리고 18세기 소문자 사본 하나(2318)에만 있다. 기타 증거들은 7세기의 itl q vgcl armmss lAD와 3세기의 Cyprian 등이 있다. 전통적 헬라어 다수사본들(Byz), 몇 개의 고대사본들(א B A 048vid), 고대역본들(vgww st syrp copsa bo armmss eth geo), 및 Clementlat (Origenlat) Lect 등은 이 구절을 생략하고 있다.
13) Byz א syrp arm Origen 등이 그러함.
14) Byz vgcl에 있음. א A B vgww st syrp copsa bo arm geo는 생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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