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현이 화가로서의 수준을 높게 평가한 고려 공민왕의 대표작 "천산대렵도". 사냥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전체 그림의 일부로 보이며 훼손이 극심하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TV 드라마에서 혜원 신윤복을 여자로 묘사한 적이 있었다. 드라마에서 그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여자라는 사실을 숨긴 채 남장을 하고 도화서(조선시대 그림 그리는 일을 담당하던 관청)에 들어간다.
화풍이 여성적인 데다 생애가 거의 드러나 있지 않아 그가 여자였을 수도 있다는 일부의 주장을 반영한 것이지만 결론적으로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신윤복은 위로 누나, 아래로 남동생이 있었다. 역시 도화서 화원이었던 아버지 신한평이 그린 '자모육아도'에 신윤복과 그 가족이 잘 묘사돼 있다.
▲ 용재총화. 서울대 규장각 소장.
도화서는 남성의 전유물이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조선 전기 문신 성현이 쓴 '용재총화'에 도화서에 근무했던 미모의 여성 화사(畵史)가 언급돼 있다. 조선 전기의 대문장가 서거정(1420~1488)은 젊은 시절 패를 이뤄 몰려다니며 술을 마시고 활을 쏘면서 난동을 피우다가 사헌부에 끌려왔다. 마침 그 자리에 홍천기(洪天起)라는 화사가 다른 일로 잡혀와 함께 조사를 받는 상황이 됐다. 성현은 홍천기의 용모를 말하면서 '당대의 절색'이었다고 썼다.
서거정은 홍천기와 마주하자 미모에 넋이 빠져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죄를 추궁하던 대사헌 남지가 이 모습을 보고 한심하다 못해 "유생을 속히 놓아주라"고 하였다. 풀려나온 서거정은 오히려 "공사(公事)는 마땅히 범인의 말을 묻고 또 자술서를 받아서 옳고 그름을 분별한 뒤에 천천히 할 것이거늘 어찌 이렇게 급하게 하는가"라고 투덜거리자 친구들은 듣고 모두 웃었다.
조선시대 여류화가가 실존했고 또한 도화서에도 소속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홍천기는 산수화로 이름을 떨쳤지만 화격이 그리 높지는 못했으며 전해지는 작품은 없다.
1525년(중종 20) 처음 간행된 용재총화는 총 10권으로 구성돼 있으며 고려로부터 조선 성종대에 이르기까지의 인물뿐만 아니라 역사, 문학, 제도, 풍속, 설화 등 문화 전반에 걸쳐 다루고 있다. 조선 전기에 집중적으로 출간된 잡록 필기의 대표적 저술에 해당한다.
성현은 관료 생활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 문화예술에 대한 취향, 야담, 과거 혹은 당대의 소문과 진실 등 편찬된 역사에서 찾을 수 없는 조선 전기의 생생한 현실을 전한다.
태종 이방원의 오른팔인 하륜(1347∼1416)은 여색을 매우 밝혔던 모양이다. 예천군수로 재직할 때 관아에 소속된 기생 모두와 문란하게 관계하다가 발각돼 벼슬길이 막힐 뻔한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됐다. 이때 평소 하륜의 기개를 높게 산 지방감사 김주가 "한 고을에 머물러 있을 자가 아니다"며 감싸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다.
김주는 후일 이방원이 사병을 동원해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고 실권을 잡은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측 인사로 분류돼 목숨이 위태로웠다. 김주의 아내가 말을 타고 있는 하륜 앞에 꿇어 앉아 "남편을 살라달라"고 간청하자 하륜이 지난 날을 떠올리고 적극 구원에 나서 김주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반면 예종의 친아들로 사촌형이었던 성종에게 보위를 양보해야 했던 '비운의 왕자' 제안대군(1466∼1525)은 여색을 멀리했다. 용재총화는 "음식과 남녀의 교정(交情)은 사람들의 큰 욕망인데 지금 색을 모르는 사람이 셋 있다"며 그 중 한 명이 제안대군이라고 했다.
제안대군은 무한히 아름다운 아내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부녀자는 더러워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한다"며 부인과 마주앉으려도 하지 않았다. 제안대군은 육체적으로는 전혀 이상이 없었지만 여성의 성기를 혐오하는 증세가 있었다고 야사는 전한다. 자식은 없었지만 성종을 비롯해 연산군, 중종 등 역대 왕들과 사이가 좋아 천수를 누렸다.
우리나라의 대표 학자들을 비평한 대목도 흥미롭다. 최치원은 당에서 문명을 떨쳐 문묘에 배향됐지만 시구에서 말이 정교하지 못하고 정돈되지도 않았다고 했다. 성리학을 들여온 정몽주의 문장은 순수하기만 할 뿐 중함이 없고 목은 이색이 모든 것을 집대성했다고 세상은 말하지만 비속하고 엉성하다고 비판한다.
그림에서는 우리나라에 명화가 매우 적은데 고려 공민왕의 화격이 매우 높다고 했다. 지금 도화서에 소장된 노국대장공주의 진영과 흥덕사에 있던 석가출산상은 모두 공민왕이 손수 그린 그림이며 간혹 큰 부잣집에 산수를 그린 것이 있는데 비할 데 없이 뛰어나다고 논평했다.
공민왕 사후 100년이 경과한 시점이어서 여전히 그의 작품이 다수 남아있었던 것이다. 최고 작품으로는 안견(세종부터 세조 때까지 활동한 화가)의 것을 들었다. 성현은 "내가 승지가 됐을 때 궁중에 간수된 안견이 그린 '청산백운도'를 보았는데 참으로 뛰어난 보물이었다"며 "요새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금옥처럼 사랑하고 보관하고 있다"고 전했다.
조선은 유교를 표방했지만 불교 유풍이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세조 때 그 폐단이 극에 달해 승려들이 마을에 섞여 살면서 음탕하고 난폭한 일을 해도 조정 관리와 수령들이 손을 쓰지 못했다고 책은 기술한다.
도성 안에는 비구니절이 10여 채로 늘어 절집에 비단을 깔고 단청으로 꾸몄으며 어린 여성 중에는 아이를 낳는 이도 있었다. "예전에는 서울의 대가 중에서 3~4집만 양잠을 했는데 지금은 모두가 양잠을 하며 뽕나무를 심어 이득을 얻는 사람이 많다"는 풍속 묘사도 무척 낯설다.
▲ 무늬가 없는 사각, 원형의 경회루 기둥. 용재총화에는 이 가둥은 용무늬가 새겨져 있었다고 서술돼 있다.
7권은 조선 전기 경회루의 화려한 모습을 전하고 있다. 정유년(1477, 성종8)에 유구국 사신이 우리나라에 와 임금이 경회루 밑에서 접견했다. 당시에는 기둥에 꿈틀대는 날아가는 용이 조각돼 있었다.
사신은 이를 보면서 "경회루 돌기둥에 종횡으로 그림을 새겨서 나르는 용의 그림자가 푸른 물결 붉은 연꽃 사이에 보였다 안보였다 한다"라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경회루의 기둥은 1867년 재건하면서 공기를 줄이기 위해 사각형·원형으로 단순하게 만들었다.
9권에서는 조선 사람의 습성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조선 사람은 간사하고 교묘하게 남을 속이며 의심이 많아 항상 사람을 믿지 않는다. 조그마한 일에도 경솔하게 떠들어 사람이 많아도 성취하는 일은 별로 없다. 많이 마시고 먹으며 한 끼라도 굶으면 배가 고파 어쩔 줄 모르며 군사가 출정하게 되면 군량의 운송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노비가 인구의 절반을 차지해 유명한 고을이나 큰 읍일지라도 군졸이 적다." 조선을 경험했던 외국인들의 부정적 평가들과 많이 다르지 않다.
▶성현(成俔, 1439~1504) =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호가 용재이다. 24세이던 1462년(세조 8)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으며 예조판서, 한성부판윤, 공조판서, 대제학 등 요직을 두루 지냈다. 명문가 출신에 고급 관료였지만 다방면에 조예가 깊어 '만물박사'로 통했다. 그는 시문 1000여 편을 남긴 대문장가였다. 세 차례나 명나라에 사절단의 일원으로 가서 중국 문인선비들과 시를 지어 화답하는 과정에서 뛰어난 문사로서 크게 각광받았다. 또한 음악이론가로서 명성이 높았는데 55세이던 1493년(성종 24)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악서 '악학궤범'을 편찬했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영남본부장 : <고전으로 읽는 우리 역사> / 매경프리미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