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판 족보 1권 22쪽에 실린 내용임
단양우씨대종회운영약사
종문의 일이란 세계의 정통성을 유지하면서 바르게 운영되어야 한다. 본인이 종사에 몸 담은지 어언 30여년 : 1976년11월~2007년2월, 그간 대종회의 대동단결과 조상의 빛나는 위업을 현창하기 위해 문희공파를 대표한 한 사람으로서 그간에 해온 일들을 정리해 본다.
시중공 묘소와 희역당재사는 본래 우리 문희공파에서 관리를 해 왔었다. 부연하면,
⦁1600년경 우복룡공 : 안동부사 이 묘소를 찾았고,
⦁1768년경 우정룡공, 우정봉공 형제분이 묘비를 세웠다.
⦁1919년에 위토자산 : 대지, 전, 임야, 재사, 주사을 마련하고 10월 시향 등을 모두 문희공파에서 관리하였는데 당시 시향 참석 제관은 30여명 내외였다.
이후 양호당파에서 단양 시향에 참여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1919년 위토자산을 마련할 때 대지, 전, 답, 건물은 우희목공 : 의성 명의로, 임야 정은 우성현공 : 수원 명의로 등기를 했는데 우희목공 명의분은 1993년 12월 희역당종중으로 등기를 필하고, 산판은 우성현공 명의로 된 것을 우성현공의 차남 호환이가 타인에게 매각하려는 무렵 관리인 우동식공 : 예천이 이를 막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썻으나 대책이 없자 우성구씨 : 안동의 협조로 대구 우종식씨와 상의하여 16인 위원회 : 당시 전우문대표 모임를 열어 이십구명이 성금을 모아 1976년에 묘역 주변 이십칠정만 환수하였는 바 이러한 연유로 양호당측이 단양에 출입하게 된 것이다. 그 이전의 단양 재산은 모두 우리 문희공파의 재산이였다.
지금의 시중공 묘비는 네(四)차례의 파손이라는 환란을 치룬 끝에 세워진 것이다.
⦁일차 파손은 1976년에 양호당측이 파손 했다. 이는 오대보인 대구보서문과 양호당 파보 백천보에 길생을 탁할아버지의 양자로 등재 : 환부역조 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저지른 사건이었다. 그해 가을 우주성공 : 의성이 문회를 열고 처음과 같은 비를세웠다.
⦁2차 파손은 세운 비를 다시 양호당측이 부수고 칠척비를 세웠다.
⦁3차 파손은 1976년 11월 우재희공 : 안동, 우문성공 : 의성 두분이 이 비를 파손하니 양호당측이 단양경찰서에 고발하여 문성공이 구속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에 본인과 순성공이 양호당측의 종묵 억기 양씨를 만나 격한 항의 끝에 풀려 나오게 되었다. 그후 시중공 묘비사건으로 16인 회의를 한다는 종묵씨의 연락을 받고 참석하여 이 일을 무리하게 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니 그들은 일방적으로 상계를 날조한 비를 또 세웠던 것이다.
⦁4차 파손은 당연히 우리 문희공파가 해야할 일로 내가 우병동공 : 영주에게 연락하여 파손케한 것이다.
이 비극은 날조한 상계를 정당화 하려는 양호당측과 상계의 정통성을 지키려는 우리 문희공파와의 대결구도에서 빚어진 일로서 이렇게 비를 파손하면서까지 길생을 탁할아버지의 양자로하여 거짓 족보를 만드는 의도가 도대체 어디에 있을가? 이는 바로 위대하신 탁할아버지의 후광을 입고자 햇던 것이니 참으로 천하가 공노할 일로 세인에게는 극히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종회에서는 그간에 많은 위선사업을 해왔다. 1994년에서 1998년까지 9억여만원의 기금을 모아 이루어 온 사업을 대략 정리하면,
①희역당 개보수 3,773만원
②사인암 기적비 보수 267만원
③태지비 건립 1,294만원
④사적비 건립 5,311만원
⑤역동우탁선생기념사업 : 안동대학 6,088만원
⑥육세 시중공 묘역확장, 주차장 2개소 1,000평 설치, 진입로 확장 1㎞11,500만원
⑦상조 오세 제단건립 12,200만원
⑧역동선생 유허비 이건 : 안동 5,700만원
⑨단양우씨 유래비 건립: 대전 3,604만원
⑩ 구계서원 준공 41,158만원 대종회 26,158만원, 영남대학교 15,000만원 이러한 일들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우병동공 : 영주의 노고가 많았음을 지적해 둔다.
대종회는 전종문의 대동단결과 위선사업 그리고 후세를 위해 힘써야 한다. 그간의 대종회가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①1976년 시중공 묘소 묘비사건 이후 양측대표 4(四)인(문희공파) 순성, 동화와 양호당파(억기, 종묵)이 상계문제 해결을 위해 수차례 논의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였고 그 이후 소위원회를 구성 해결방안을 모색하였으나 결과 없이 끝났다.
②1982년도에는 단합추진위원회 : 양측 각 10명을 조직 운영하여 단합의 조짐이 보이자 지금까지 대종회에 참여하지 못한 3개파 : 문강공파, 문숙공파, 정평공파를 동참케 하여 총 26명으로 구성되는 단양우씨 10파 대표자회의를 운영하게 되었다.
③1988년부터는 단양시향을 10개파가 윤번제로 시행하기로 하고 대종회에서 매년 150만원을 지원하고 있다.
④1993년에는 위토재산을 모두 종중자산으로 등기하였고
⑤1995년에는 종회명칭을 대종회로 개칭하였다.
⑥2002년에는 단양우씨의 대동단합을 위해 단양우씨대종사를 편찬하기로 의결하여 그해 7월 15일에 사무실을 열고 홍보지를 만드는 등 실무에 착수 하였으나
⑦2002년 10월 1일 예안군파와 대제학파에서 대종사편찬에 불참을 선언함으로써 진행하던 사업은 중단되었다.
⑧2007년 5월 18일에는 10개파의 대표자만 모여 대종회임원을 새로 선임하고 새로이 출발을 하게 됨에 우리 문희공파에서는 우남준공 : 안동이 대종회 부회장직을 맡게 되었고 이공공팔년부터는 봉상정공파 대표로 우병동공 : 영주, 참의공파 대표로 우희원공 : 상주이 부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단양우씨 천년의 위대한 자취가 별처럼 빛나고 아름다우니 모름지기 후손된 자 조상의 뿌리를 바르게 알고 강상을 꿋꿋하게 지키면서 면문으로서의 위상을 드높이는데 10파가 대동단결하는 날을 기대해 본다.
2008년무자 매월상완
단양우씨종친회
4대회장 우동화 근서
첫댓글 놀랍습니다.!
꿋꿋하게 진실을 지키신분들께 감사와 함께 큰 절 올립니다.
따지고 보면 한줄기 인데 왜~저런 행동을 일삼는지 의구심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