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전 난민촌 천변촌 철거후 대단위 아파트 들어선 세교동
은실·안잔다리·벌잔다리만 남아
1.잔다리라고 불렸던 세교동
옛사람들은 산(山)과 내(川)로 지역간의 경계를 삼았다. 문명이 덜 발달했던 전통사회에서 산(山)과 내(川)는 교통에 큰 장애물이었기 때문이다. 평야가 발달한 평택지방에는 유난히 하천이 많다. 큰 하천만 해도 안성천, 진위천, 황구지천, 오산천이 있으며, 안성천으로 흘러드는 지류(支流)만도 20여 개에 이른다. 통복천은 통복동에서 세교동으로 넘어가는데 큰 장애물이었다. 지금은 축산폐수와 생활용수로 오염되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하얀 모래밭에 맑은 물이 흘렀고, 하류 쪽에는 갯벌과 조수가 밀려드는 규모 있는 하천이었다.
국회의원들의 공약 중에 마을에 다리 놓아준다는 약속이 가장 인기 있는 공약이었던 때가 있었다. 통복천에 다리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나무다리(木橋)를 놓고 건너다녔다. 비가 오고 홍수가 나면 쉽게 떠내려가곤 하는 다리였지만 마을과 마을 사이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이 다리들을 "잔다리"라고 불렀다. 잔다리는 구한말과 일제 초기 행정구역이 한자음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세교(細橋)"라고 바뀌었다. 1918년 조선의 행정구역 통합과정을 알려주는 "조선 부·군·면·리·동 명칭일람"에도 "세교리"라는 지명이 사용된 것으로 봐서 한자음으로 바뀐 시기가 100년 쯤은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세교동의 자연마을에는 은실, 안잔다리, 벌잔다리가 있었다. 그러다가 1950년대에 피난민들이 정착하면서 난민촌, 천변촌이 새로 생겼다. 10여 년 전 산업도로도 없고, 세교지역 개발이 시작되기 전 만해도 세교동으로 가는 길은 시장로터리에서 통복교를 넘어 중앙초등학교로 난 논길을 지나거나 성북파출소를 지나 통복2교를 건너야만 했다. 세교동 입구 중앙초등학교 뒤쪽에 있던 마을이 은실이었고, 범양연립 다음 마을이 안잔다리, 안잔다리를 지나서 산기슭에 기대어 벌판 쪽으로 나 있는 마을이 벌잔다리였다. 난민촌과 천변촌은 성북파출소 쪽 다리 너머에 있었는데, 봉천동 산동네처럼 얼기설기 지은 집에 하루하루를 고단하게 살던 사람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었다. 은실은 본래 "음곡" 또는 "음골"로 불렸다. 마을의 위치가 산비탈 남서쪽에 있어서 옛날에는 이곳이 음지였다고 한다. "음지말, 양지말 같은 지명은 우리나라 지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름인데, 농경을 하며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우리민족의 정서와 맞닿은 지명(地名)이라고 볼 수 있다.
세교동이 아파트단지로 변모한 것은 10년이 채 안 된다. 아파트와 도로시설이 갖춰지기 전 천변촌과 난민촌에 살던 주민들 대부분은 강제철거 당했다. 그리고 철거된 마을과 농경지 위에 아파트단지가 세워졌다. 논뚝길에는 아스팔트 길이 놓였고 길옆으로는 무슨무슨 식당, 무진장 싼 빵집, 세탁소, 슈퍼가 들어섰다. 이름 없던 통복천 변에 6차선으로 넓게 뚫린 도로에는 세교로라는 새 이름이 붙었고, 산업도로와 만나는 큰 사거리에는 "중앙로2가(중앙로 1가는 시청부근에 있음)"라는 새 이름이 붙었다. 아직도 은실, 안잔다리, 벌잔다리는 남아있지만 이 마을들도 언제 철거되고 아파트단지로 변할지 누구도 모른다. 그리고 새로운 이름이 붙고 옛 지명과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은 점점 사라질 것이다.
영신현 관아 있던 '큰말'·억새풀 많은 '모산골'
유서깊은 동삭동엔 이-마트·아파트 등 급격한 변화
2)고려시대 영신현이 있었던 동삭동
동삭동은 큰말(대촌), 중간말(중촌), 원동삭(동촌), 모산골, 서재 등이 모여 형성된 지명이다. 이 가운데 큰말, 중간말, 원동삭 마을을 합쳐 영신이라 부른다. 영신이라는 지명은 이 지역이 본래 고려시대 영신현의 읍치(邑治)였기 때문에 생겨났다. 영신현은 영풍이라고도 불렸는데, 고려 현종 때 양성현의 속현(屬縣=지방관이 파견되는 현(縣=주현)의 관할을 받는 현(縣)이었다가 조선 초에 폐현(廢縣)되어 수원부에 이속(移屬)되었고, 세종15년에 진위현에 편입되었다. 옛 행정의 중심지였지만 주민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알지 못했다. 큰말과 원동삭 마을에서 여러 사람에게 물었어도 현감이 어느 마을에 있었는지, 어디에 관아(官衙)가 있었는지 전혀 들어본 바가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다른 읍지(邑誌), 지리지(地理誌)의 기록으로 판단할 때 영신현의 관아(官衙)는 큰말(대촌)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마을 주민들이 세 마을을 합쳐 "영신"이라고도 부르지만 좁게는 큰말(대촌)만을 영신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또 큰말의 지형이 주산과 좌청룡, 우백호 형상의 중심부에 있어서 관아가 들어설 만한 위치에 있는 점도 고려된다. 중간말은 큰말과 원동삭의 가운데에 있어서 붙여졌으며, 동촌이라고 부르는 원동삭은 영신현의 동쪽에 생긴 마을이라서 생겨난 지명(地名)이라고 한다. 원동삭 마을 동쪽에는 예쁘게 생긴 산봉우리가 하나 있는데 이 산이 두리봉이다. 두리봉에는 "성곽유적"이 있는데 지제동의 태미산성과 함께 영신현의 방어망을 형성했던 산성이었다.
모산골은 평택여종고 사거리 북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억새풀(띠풀)이 많아서 모산곡(茅山谷)이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한자음이 바뀌어 모산(毛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서재마을은 상서재와 하서재로 나뉜다. 지금은 하서재 앞으로 법원이 들어서서 법원 뒤쪽마을로 잘 알려졌지만, 조선시대에는 삼남대로가 지나가는 대로변 마을이었다. 마을을 개척한 사람들은 조선의 2대 임금 정종의 아들인 전주 이씨 덕천군파(德泉君派)이다. 이들이 마을을 개척한 뒤 서당을 짓고 학문을 가르치면서 서재(書齋)마을로 불리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한자가 바뀌어 서재(西才)라고 부른다. 서재는 본래 상서재가 먼저 마을을 이루었고 나중에 분동(分洞)되면서 하서재마을이 형성되었다.
동삭동은 폭풍전야의 바다처럼 변화를 목전에 두고 있다. 지제동과 영신의 경계에 이-마트가 들어서면서 주변에 상권이 형성될 조짐을 보이고 있으며, 10여 년 전 모산골 부근에 평택여종고가 이전하면서 "여종고 사거리"같은 지명이 생기더니 재작년에는 세교중학교가 신설되었고, 현대아파트 앞에는 동삭초등학교가 건설 중에 있다. 또 10여 년쯤에 동삭동 현대아파트가 들어선 후 작년 초에는 삼익사이버아파트가 준공하였고, 또 다른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이야기가 나돈다. 서재마을 앞 통복천은 정비사업으로 도시형 하천으로 변모하고 있는데, 이 사업이 끝나면 주변 농경지가 택지로 개발된다는 소식이다. 그러면 동삭동의 옛 모습은 크게 변모되고, 새로 만들어진 지명이 옛 지명을 잠식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존재가치가 사라지면 소멸되기 마련이지만, 개발에도 신중을 기하고 새로 붙여지는 지명에도 신중을 기해서 마을과 지명에 담긴 민중들의 삶과 역사가 오래도록 남겨지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