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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자찬묘지명
다산 정약용의 자찬묘지명(집중본)입니다.
자찬묘지명은 다산 자신이 직접 쓴 묘지명으로, 다산선생의 파란만장한 일생이 정리된 글입니다. 다산선생의 묘지명은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문집에 넣기 위한 <집중본>이고, 다른 하나는 무덤 속에 넣기 위한 <광중본>입니다.
이 자료는 디지털한국학 개발팀이 다산학술문화재단 홈페이지를 구축할 때 재단으로부터 넘겨받은 것으로, 박석무 정해렴 선생님이 공역하신 것입니다.
나의 삶, 나의 길 自撰墓誌銘(集中本)
이 무덤은 열수(洌水) 정약용(丁若鏞)의 묘이다. 본 이름은 약용(若鏞)이요, 자(字)는 미용(美庸), 또 다른 자는 용보(頌甫)라고도 했으며, 호는 사암(俟菴)이고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인데, 겨울 내를 건너고 이웃이 두렵다는 의미를 따서 지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재원(載遠)이며 음사(蔭仕)로 진주 목사(晉州牧使)까지 지냈다. 어머니는 숙인(淑人) 해남 윤씨(海南尹氏)로 영조 임오년(壬午年:1762) 6월 16일 약용을 한강변의 마현리(馬峴里)에서 낳았다. 이때는 청나라 건륭(乾隆) 27년이었다.
정씨(丁氏)의 본은 압해(押海)로 고려 말에 배천(白川)에서 살다가 이씨조선을 세울 무렵부터 드디어 서울에서 살았다. 맨처음 벼슬을 한 선조는 승문원(承文院) 교리를 지낸 자급(子伋)으로 이때부터 쭉 이어져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수강(壽崗), 병조 판서 옥형(玉亨), 의정부 좌찬성 응두(應斗), 사헌부 대사헌 윤복(胤福), 강원도 관찰사 호선(好善), 홍문관 교리 언벽(彦璧), 병조 참의를 지낸 시윤(時潤)은 모두 옥당(玉堂)에 들어갔었다. 그 이후부터 세상이 어긋나자 마현에 이사와서 살았는데 3세를 모두 포의로 마쳤다. 고조의 이름은 도태(道泰), 증조의 이름은 항신(恒愼), 조부의 이름은 지해(志諧), 오직 증조만이 진사였다.
약용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제법 문자를 알았었다. 9세에 어머니의 상을 당했고 10세부터 비로소 과예(課藝)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후 5년 동안 아버지께서 벼슬을 하지 않고 한가히 계셨는데, 이 때문에 나는 경전(經典)과 사서(史書)·고문(古文)을 매우 부지런히 읽었으며, 또 시율(詩律)을 잘 짓는다는 칭찬을 받기도 했었다.
15세에 결혼을 하자 마침 아버지께서 다시 벼슬을 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이 되셨으므로 서울에서 셋집을 얻어 살게 되었다. 이때 서울에는 이가환(李家煥) 공이 문학으로써 일세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자형인 이승훈(李承薰)도 또한 몸을 가다듬고 학문에 힘쓰고 있었는데, 모두가 성호(星湖) 이익(李瀷) 선생의 학문을 이어받아 펼쳐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약용도 성호 선생이 남기신 글들을 얻어 보게 되자 흔연히 학문을 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정조 원년 정유(丁酉:16세, 1777)에 아버지께서 화순(和順)현감으로 나가시게 되어 나도 따라가서 그 이듬해에는 동림사(東林寺)에서 독서를 했다. 경자년(庚子年:19세, 1780) 봄에 아버지께서 예천(醴泉)군수로 옮기셨으므로 진주(晉州)에 들러 노닐다가 예천으로 가서 쓰러져가는 관청집에서 공부를 했다. 임인년(壬寅年:21세, 1782) 가을에는 봉은사에 머물면서 경의과(經義科)의 과목을 공부하였다. 계묘년(癸卯年:22세, 1783) 봄에는 경의과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태학(太學)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때 임금이 중용강의(中庸講義) 80여 조목에 관하여 답변토록 과제를 내려주셨는데 이때 나의 친구 이벽(李檗)이 학식이 넓고 품행이 고상하다는 이름을 얻고 있어서 함께 과제에 답변할 것을 의론했다. 이발기발(理發氣發)의 문제에 있어서 이벽은 퇴계의 학설을 주장했고 내가 답변한 내용은 문성공(文成公)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학설과 우연히 합치되어서 임금이 다 보시고 난 후 매우 칭찬하시고 1등으로 삼아주셨다. 도승지(都承旨) 김상집(金尙集)이 밖에 나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정아무개는 임금의 칭찬을 받음이 이와 같으니 크게 이름을 떨치리라”고 했었다.
갑진년(甲辰年:23세, 1784) 4월 이벽을 따라 두미협(斗尾峽)으로 배를 타고 내려가다 처음으로 서교(西敎)에 대하여 듣고 한 권의 책을 보았다. 그러나 변려문(騈儷文)의 학습에 온 마음을 기울여 공부하고 표(表)·전(箋)·조(詔)·제(制)를 익히며 그런 글들을 여러 백권 수집을 하면서 태학에서 달마다 내리는 과제와 열흘마다 보는 시험에 높은 점수로 뽑혀 서적이나 종이·붓 등을 자주 하사받기도 하고 경연에 올라가는 가까운 신하처럼 임금께서 자주 면담하도록 해주시어 그 밖의 일에는 참으로 마음을 기울일 겨를을 내지 못했었다.
정미년(丁未年:26세, 1787) 이후로는 임금의 총애가 더욱 높아갔고 자주 이기경(李基慶)의 정자(亭子)에 나가 과거 공부에 열중하였다. 이기경도 서교 듣기를 즐겨하여 손수 한 권의 책을 베껴놓기까지 했는데 그가 두 마음을 먹기는 무신년(戊申年:정조 12년, 1788)부터였다.
기유년(己酉年:28세, 1789) 봄에 나는 성균관에서 보던 시험에 표문(表文)으로써 수석하여 임금 앞에서 실시하는 대과에 응시, 갑과(甲科) 2등으로 합격하여 희릉 직장(禧陵直長)으로 발령을 받고 대신들의 품의로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뽑혀 규장각(奎章閣)에서 매월의 과제에 답변을 올리게 되었다.
경술년(庚戌年:29세, 1790) 봄에는 약용이 김이교(金履喬)와 함께 추천을 받아 한림(翰林)에 들어가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그러나 곧 사람들의 말이 있어 스스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다시 사헌부 지평(持平), 사간원 정언(正言)에 승진하고 월과(月課)에 수석하여 말과 호랑이 가죽을 하사받는 등 총애를 받았다.
신해년(辛亥年:30세, 1791) 겨울에 내각(內閣)에서 모시강의(毛詩講義) 800여 조를 내렸었는데, 나의 답변이 제일 많이 채택되었었다. 임금이 비평한 말씀에 “백가(百家)의 이론을 인용하여 나타낸 주장이 무궁하다. 진실로 평소에 쌓아둔 박식한 공부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러한 내용을 얻었겠는가”라고 하시며 조목마다 잘했다고 평가해 주시어 모두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평가를 받았었다.
이 무렵 호남에서 권(權)·윤(尹)의 옥사(獄事)가 있었는데 악인(惡人) 홍낙안(洪樂安) 등이 이 사건을 핑계삼아 착한 무리들을 모두 제거해버릴 것을 꾀하려고 하여 번옹(樊翁)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총명한 재주와 지혜로 보란 듯한 관료와 선비들의 열 명 중 7, 8명은 모두가 서교(西敎)에 빠져 앞으로 황건(黃巾)·백련(白蓮)의 난리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임금께서 채제공으로 하여 조사하는 관청에 앉아 목만중(睦萬中)·홍낙안·이기경 등을 불러다 그 허실을 조사하게 하였다. 이기경이 답변하기를 “그 책 속에는 좋은 곳도 있습니다. 저와 이승훈이 옛날에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함께 그 책을 읽었습니다. 만약에 책을 읽은 죄를 논하게 된다면 저와 승훈은 마땅히 똑같이 엄한 벌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말했었다. 곧바로 또 나에게 편지를 보내서 답변했던 내용에 대하여 말하기를 “임금께 대답한 말에 저울질이 있었다. 풀려나게 하려고 한 것이다”라고 했다.
내가 이치훈(李致薰)을 불러다가 말하기를 “성균관에서 그 책을 읽은 것은 실로 심리를 받아야 할 것이다. 마땅히 사실로써 답변을 해야지 임금을 속이는 일은 옳지 못하다”라고 했더니, 이치훈이 말하기를 “임금께 비밀히 아뢰었으니 이미 자수한 거니까 옥중에서 피고가 답변한 것은 사실에 위배되더라도 임금을 속인 것까지는 되지 않는다”라고 해서 내가 “그렇지 않다. 밀고라는 것은 정식의 재판은 아니나 답변한 내용은 곧 임금께 고한 것이다. 조정에서는 오직 옥중의 답변 내용만 관찰하지만 훌륭한 집안과 이름 있는 족당에서의 집안마다의 공론도 무서운 것이다. 지금 어지신 임금이 위에 계시고 정승이 잘 도와 처리하고 있으니 이런 때에 종기를 따내버림이 옳지 않겠는가. 나중에 비록 후회한다 해도 손을 쓸 수가 없을 것이다”라고 했지만 이치훈은 끝내 듣지 않았다. 그리고는 이승훈이 감옥에서 조사받을 때 이기경이 무고(誣告)했다고 말하자 마침내 죄가 없다고 풀려나오고 말았다. 이러하자 이기경은 초토신(草土臣)으로 상소하여 조사한 일이 불공정했다고 대신(大臣)을 헐뜯으니 성균관에서 서서(西書)를 읽은 일이 더욱 상세하게 드러났다.
임금께서 화를 내시고 이기경을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유배를 보내자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겼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 우리 편의 화란이 이로부터 시작하리라”라고 말했다. 나는 때때로 이기경의 집을 찾아가서(그때 연지동에 있었다.―原註) 그의 어린 자식들을 어루만져 주었고 그의 어머니의 소대상(小大祥) 제사 때에는 천전(千錢)의 돈으로 도와주었다. 을묘년(乙卯年:34세, 1795) 봄에는 나라에서 대사면이 있었으나 이기경만은 석방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이익운(李益運)에게 말하기를 “이기경이 비록 마음은 불량하나 송사(訟事)에는 당해낼 사람이 없습니다. 일시적으로는 통쾌한 일이나 다른 때의 우환이 될 것입니다. 들어가 상감께 고하여 풀어주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라고 했더니, 이익운도 “내 생각도 그러하다”라고 하고는 곧바로 상감께 올라가 말한 대로 고했더니 임금께서 특별히 이기경을 풀어주게 하셨다. 이기경이 풀려온 지 꽤 지나자 점차로 조정에 들어와 벼슬하게 되었는데 아는 친구로서 그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나만이 홀로 옛날처럼 안부와 날씨를 물으며 평상시처럼 지냈다. 이른바 “친구란 친구로 삼았던 것을 없앨 수 없다”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이기경은 그가 주모한 신유사옥에서까지도 기어코 나를 죽여 없애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홍의호(洪義浩) 등 나와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을 대할 때에 이야기가 나에 대해서 나오면 반드시 철철 눈물을 흘렸다고 하니, 비록 큰 계획을 수행하고 있으면서도 한가닥 양심은 사라지지 않았던 것 같다.
신해사건 이듬해인 임자년(31세, 1792) 봄에 내가 선발되어 홍문관에 들어가 수찬이 되고 내각에 가서『경화시집(?和詩集)』을 만들었다. 4월에는 아버지께서 진주 임소에서 돌아가셨다. 병보를 듣고 급히 진주로 가던 중 운봉(雲峰)에서 돌아가신 소식을 듣고 분상했다. 다음달에야 관을 모시고 와 충주(忠州)에 장사를 지내고 마현의 가묘(家廟)에 혼백을 모셨다. 임금께서도 자주 안부를 물어 오셨다.
이 해 겨울에 수원(水原)에 성을 쌓는데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기유년(28세, 1789) 겨울에 한강에 부교(浮橋)를 놓을 때 약용이 그 방법을 아뢰어 주어 일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었다. 그에게 명하여 집에 있으면서 성곽 제도에 대해 조목별로 올려 바치게 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내가 윤경(尹?)의『보약(堡約)』과 유성룡(柳成龍)의 성설(城說)에서 도움을 받아 그중에서 좋은 방법을 따다가 초루(?樓)·적대(敵臺)·현안(懸眼)·오성지(五星池)의 여러 방법을 이치에 맞게 밝혀 임금께 올렸다. 임금은 또 내각에 있는『도서집성(圖書集成)』과『기기도설(奇器圖說)』을 내려보내 무거운 물건을 끌어올리고 세우는 인중기중(引重起重)의 방법을 강구하도록 하셨기에 내가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을 작성하여 올려바치고 활차(滑車)와 고륜(鼓輪) 등을 써서 작은 힘으로 크고 무거운 물건을 운반할 수 있게 했었다. 성 쌓는 일을 끝마쳤을 때 임금이 말씀하시기를 “다행히 기중가(起重架)를 사용하여 4만 냥(兩)의 비용을 절약했다”라고 하셨다.
계축년(32세, 1793) 여름에 문숙공(文肅公) 채제공이 화성유수(華城留守)로 있다가 영의정이 되어 들어와 상소를 올려 다시 임오년의 참소했던 사람에 대하여 논했는데, 김종수(金鍾秀)가 말하기를 “임자년(1792)에 연명으로 올린 차자(箚子) 후에 다시 이 문제에 대하여 제기하는 사람은 역적이다”라고 하며 몹시 공격하였다. 임금께서 영조대왕의 금등의 말씀(金?之詞)을 꺼내 보이면서 장헌세자의 뛰어난 효도를 명확히 밝혀주어 일이 끝나게 되었다. 이때 홍인호(洪仁浩)가 한광부(韓光傅)공에 대항하여 역시 채제공의 상소문을 공격하였는데, 말 중에는 망발이 많아 친히 지내던 관료나 선비들이 모두 입을 모아 홍인호를 공격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갑인년(33세, 1794)의 사건이었다. 홍인호는 자기를 공격하는 일에 주된 역할을 하는 사람이 나인 줄 의심하고 마침내 틈이 나게 지냈으나 그 뒤에 의심은 조금씩 풀렸지만 우리 당(黨)의 참혹한 화란은 대개 이 사건에서 움트고 있었다.
갑인년(1794) 7월에 아버지의 복을 마치자 성균관 직강으로 제수받았으며 8월에는 비변사(備邊司)의 낭관을 맡고 10월에 다시 홍문관에 들어가 교리(校理)·수찬(修撰)이 되었다.
마침 관청에서 숙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임금의 명령으로 노량진의 별장(別將) 겸 장용영(壯勇營) 별아병장(別牙兵將)으로 쫓겨났는데 밤중에 임금의 침전(寢殿)으로 불리어 들어가 보니 그건 경기 암행어사를 시키는 명령이었다. 이때 서정승(徐相)의 집 사람으로 마전(麻田)에 살던 사람이 있었는데, 꾀를 부려서 향교(鄕校)의 땅을 정승의 집에 바쳐 묘지로 삼으려고 “땅이 불길하다”라고 속이고 고을 유림들을 협박하여 향교를 이전키로 해서 이미 명륜당(明倫堂)을 헐어버렸었다. 내가 이 사실을 탐지해내고 곧바로 체포해 처벌해버렸다. 또 관찰사(觀察使) 서용보(徐龍輔)가 강가에 인접한 7개읍에서 관청 곡식을 팔아서 돈을 만드는 데 너무 비싸게 팔고 있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이 돈은 금천(衿川)의 도로를 보수할 비용이다. 싼 값으로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이에 힘없는 백성들이 원망하면서 말하기를 “괴롭구나, 화성이란 곳이여. 과천에도 길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금천으로 지나는가”라고 하고 있었으니, 이는 임금이 자주 아버지의 묘소를 다니기 때문에 번거로운 비용까지를 물게 된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암행을 마치고 돌아와 이 사실을 올려 바쳤었다. 내의(內醫) 강명길(康命吉)은 삭녕(朔寧)군수, 지사(地師) 김양직(金養直)은 연천(漣川)현감으로 있었는데 모두가 임금이 총애를 믿고서 법을 어기고 거리낌없이 탐학질을 했었다. 내가 이들을 탄핵하여 임금께 올려 바쳐 의법 처리되도록 하였다.
그해 12월에 임금께서 의론하시기를, 명년에 장헌세자에게 존호(尊號)를 올려 바쳤으면 한다고 하셨다. 을묘년(1795)은 바로 장헌세자의 회갑의 해여서 역시 태비(太妃)나 태빈(太嬪)에게도 존호를 올리기로 하고 예조(禮曹)에 그 문제를 전담하는 도감(都監)을 설치하였다. 채제공이 도제조(都提調)가 되고 나와 권평(權坪)이 도청랑(都廳郞)이 되었다. 이때 조신(朝臣)들이 올려 바칠 휘호(徽號) 여덟 자를 의론해 놓았는데 그 내용에는 영조께서 내려주신 금등(金?)에 담긴 세자의 효성스러웠던 점을 빛나게 해주는 점이 없었기 때문에 임금께서는 바꿀 의론을 생각하면서도 흠잡을 말이 없어서 은밀히 채제공에게 자문을 구했는데 이가환이 말하기를 “올려 바친 여덟 자 중에는 개운(開運)이라는 두 글자가 들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석진(石晋)의 연호이니 당연히 그 이유를 대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매우 기뻐하고 바꾸도록 명령하여 올려 바쳤으니 ‘장륜융범 기명창휴(章倫隆範基命彰休)’였다. 바로 이곳의 장륜융범이란 금등의 내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대제학(大提學) 서유신(徐有臣)이 옥책문(玉冊文)을 지었는데 또 금등의 일을 말하지 않았다. 당시 응교(應敎)이던 한광식(韓光植)이 상소를 올려 옥책문의 소루함을 논했었다. 임금께서 한광식의 상소문을 도감청의 여러 신하들에게 내려 보내고 다시 짓는 일이 옳은가 그렇지 않은가를, 혹 몇 개의 글귀만 고쳐도 될 것인가를 의론하라고 하셨다. 이때 도감 제조(都監提調)인 민종현(閔鍾顯)·심이지(沈?之)·이득신(李得臣)·이가환 등이 모두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아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내가 말하기를 “무릇 표(表)·전(箋)·조(詔)·고(誥)의 종류란 만약 글귀에 잘못이 있다면 약간씩 깎아내도 괜찮으나 지금의 옥책에다 금등의 일을 말하지 않았음은 기본 줄거리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니, 부득이 다시 지어서 임금께 근심을 끼쳐 드리지 않는 게 좋겠다”라고 했었다. 그러자 도제조(都提調) 채제공이 다시 짓기를 청하기로 하였다.
다시 짓는 일이 끝나 올려바칠 때 궁리(宮吏)가 말하기를 “태빈궁(太嬪宮)에 바칠 옥책과 금인(金印)에 글을 쓸 때 신근봉(臣謹封)이라고 쓸 것인가 아니면 신(臣)이라고는 하지 말아야 할 겁니까”라고 물었다. 채제공이 여러 책이나 의궤(儀軌)를 살펴보라고 했으나 근거가 될 만한 것을 찾지 못하고 낮이 다 되도록 결정을 못한 채 우왕좌왕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기에 내가 말하기를 “신 근봉이 옳습니다” 했더니, 채공이 눈빛으로 망언을 못하도록 암시해 주었다. 민(閔)·심(沈) 양공이 말하기를 “왜 그런가”라고 하기에 내가 답하기를 “지금의 옥책·옥보(玉寶)·금인의 여러 물건은 도감청의 여러 신하들 이름으로 태비나 태빈에게 올리는 것이라면 조정에서 태빈에게만은 보통 때 신(臣)이라고 칭하지 않기 때문에 이번의 일도 신이라고는 않는 게 옳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신하들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이 옥책 등의 물건을 만들어 대전(大殿)에 계시는 임금께 올리는 것이고 임금이 스스로 효도하는 정성으로 태비와 태빈에게 올려바치는 것인데 지금 우리가 대전의 임금에게 왜 신이라고 안해야 하는 겁니까”라고 했더니, 채공이 크게 깨닫고 “좋다”라고 하니, 그 좌석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잘되었다고들 했었다. 이날 여러 하급관리 및 궁중에 근무하는 궁리들로 그 일을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통쾌한 논리라고 해서 의론이 결정되었다.
그 뒤 며칠 후에 채공이 말하기를“신(臣)이라고 하는 것과 신(臣)이라 하지 않는 것은 대단히 큰 문제요(追崇하는 것으로 여겨 혐의 받을 것을 말함이다.―原註), 내가 처음 그대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는데 말뜻을 해석해낸 걸 듣고서야 마음이 풀렸구려”라고 하였다.
이 무렵에 내각학사(內閣學士) 정동준(鄭東浚)이 병이 났다는 핑계로 집에서 지내며 음흉하게 조정의 권한을 잡아보려고 사방의 뇌물을 긁어 모으고 귀신(貴臣)과 명경(名卿)들이 밤마다 백화당(百花堂)에 모여 잔치를 베풀고 있자 안팎으로 눈을 찌푸리게 되었다. 내가 늘 정동준을 공격하고 싶어 상소문을 초해 놓기를 “내각을 설치한 것은 임금께서 옛날의 아름다움을 이어받고 문치(文治)를 펴나가게 하자는 것이며 또 원대한 경륜을 계획하려 함입니다. 무릇 신하로 있는 사람으로서 누가 그 일을 흠앙치 않으리요. 그러나 그 인원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더러는 적합치 못한 사람이 뽑혀서 임금의 총애를 분수 외로 받게 되자 교만심과 사치하는 마음이 움터 비방의 소리가 일어나게 되었으니 각신(閣臣)인 정동준과 같은 사람은 병을 핑계삼아 집안에 머무르면서 아침 저녁으로 공부하고 몸 닦는 일도 하지 않으니 그 일을 괴이하게 여겨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더구나 그의 저택은 규제를 벗어나 지나가는 사람마다 손가락질을 하고 있으니, 이거야말로 각신으로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좋은 소식이 될 게 없으리라 싶어 걱정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임금께서는 조금씩 억제해 주시고 분수를 지킬 수 있게 해주신다면 조정이나 조정 밖의 의심을 푸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행복일 것입니다”라고 적어놓았는데 갑인년(33세, 1794) 겨울에 두번째로 옥당에 들어갔고 곧 자리가 바뀌는 바람에 상소를 올리지 못하고 말았었다. 그러다가 을묘년 봄에 정동준이 일이 발각되어 자살해버려 마침내 그만두었다.
이 해 정월에는 특별히 사간(司諫)으로 임명되고 이어서 통정대부(通政大夫)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으니 도감(都監)의 노고 때문이었다. 2월에 임금께서 태빈을 모시고 부왕(父王)의 소생인 여러 누나 및 누이동생들과 함께 화성에 납시는데 하루는 약용에게 명하시기를, 따라갈 채비를 하라 하셔 무슨 직책을 주시려나 했더니, 며칠 후에 특별히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제수하시고 시위(侍衛)해서 따라오도록 하셨다. 화성에 있으며 연회석상마다 임금의 시를 화답해 지었는데 총애를 주심이 융숭했었다. 환궁한 뒤 병조에서 근무중인데 밤중에 칠언 배율(七言排律) 100구를 지어올리라 하셔, 올렸더니 칭찬해 주시고 예문관과 규장각의 여러 학사(學士)들인 민종현·심환지(沈煥之)·이병정(李秉鼎) 등에게 비평하여 올리라고 명령하고, 내각학사 이만수(李晩秀)에게 낭독하게 하시고는 임금의 비평을 곁들여 장려하고 깨우쳐 주심이 융숭하시고 사슴 가죽을 하나 하사해 주시며 총애해 주셨다. 임금께서 가까이 있는 신하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앞으로 약용에게 관각(館閣)의 일을 맡기려고 먼저 그 뜻을 보인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 해 봄에 약용이 회시(會試)의 일소(一所) 동고관(同考官)이 되었는데 합격자를 발표하고 보니 남인(南人)으로 진사가 된 사람이 50여 명이었다. 이에 시배(時輩)들이 어긋난 소리로 내가 사심으로 자기 당을 구제했다고 말하니, 임금께서 들으시고 매우 성을 내시며 다른 일을 가지고 하옥(下獄)하여 10여 일에 이르게 하고 심하게 꾸짖으며 방자하고 거리낌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유시하기를 “평생에 다시는 시험관 노릇 하지 말라” 하셨고 또 이조(吏曹)로 하여금 관직을 주지 못하게까지 하셨다. 그런 후 며칠 뒤에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서 과거 시험을 보이는데 특별히 나를 대독관(對讀官)으로 삼았다. 약용이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니 임금이 채홍원(蔡弘遠)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뒤에 알았다. 남인으로 함께 뽑힌 사람이 모두 이소(二所)에서였으며 정약용은 일소(一所)를 맡았다. 사심으로 한 일이 없었다”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규영부(奎瀛府)에 들어가 근무하며 이만수·이가환·이익운·홍인호·서준보(徐俊輔)·김근순(金近淳)·조석중(曺錫中) 등과 함께『화성정리통고(華城整理通考)』를 편찬하라 하셨으니 내가 담당한 분야가 특별히 많았었다.
며칠 후에 상원(上苑)에서 백화가 만발하자 임금께서 영화당(映花堂) 아래서 말을 타시며 내각의 신하 채제공 이하 10여 인과 나와 6, 7인도 모두 말을 타고 따르라 하여, 임금을 호위하며 궁궐의 담을 돌아서 석거문(石渠門)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농산정(籠山亭)으로 돌아 들어가 물굽이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모든 궁궐 안 동산에 있는 수석(水石)·화훼의 뛰어난 경관과 궁중에서 사용하는 책상, 비장된 도서 등 구경하지 않은 게 없었다. 또 임금이 행차를 옮겨 서총대(瑞蔥臺)에 이르러 활을 쏘시며 여러 신하들에게 구경하게 하였고, 석양 무렵쯤 부용정(芙蓉亭)에 이르러 꽃을 구경하고 고기를 낚았다. 그러면서 우리들에게 태액지(太液池)에서 배를 타고 시를 읊게 하셨다. 저녁밥을 마치고 궁중에서 사용하는 초(燭)를 하사받고 모두 돌아왔었다. 며칠이 지나서 임금이 세심대(洗心臺)에 행차하여 꽃을 구경하셨는데 내가 또 따라갔었다. 술이 한 바퀴 돈 후 임금께서 시를 읊으시고 여러 학사들에게 임금의 시에 화답하는 시를 짓도록 하셨다. 내시(內侍)가 채전(彩?) 한 축을 올려바치니 임금께서 나에게 임금이 계시는 장막 속에 들어와 시를 베끼도록 명령하셨다. 내가 임금님 바로 앞에서 붓을 뽑아들고 글씨를 쓰려는데 임금께서 지세가 고르지 못하니 두루마리 종이를 임금님의 책상 위에다 편편하게 놓고서 글씨를 쓰라고 하셔 내가 머리를 조아리며 감히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더니, 임금께서 급히 독촉하여 내가 마지못해 명령대로 책상 위에 놓고 글씨를 썼다. 임금께서 모든 글자를 바싹 다가서서 보시고는 잘 썼다고 칭찬해 주셨으니 나를 대해 주시던 일이 이와 같았었다.
여름 4월에 중국의 소주(蘇州) 사람 주문모(周文謨)가 변복을 하고 몰래 들어와서 북악산 아래 숨어서는 서교(西敎)를 몰래 펴고 있었다. 진사 한영익(韓永益)이 그걸 알아내서는 이석(李晳)에게 말하자 나도 그 이야기를 들었다. 이석이 채상공(蔡相公)에게 알리자 채공이 임금에게 은밀히 아뢰고는 포도대장 조규진(趙圭鎭)에게 체포하라고 명령하였다. 주문모는 놓쳐버리고 최인길(崔仁吉)·윤유일(尹有一) 등 3인을 붙잡아 장살(杖殺)해버렸다.
목만중(睦萬中) 등이 선동을 하고 뜬소문을 퍼뜨려서 이 사건을 트집잡아 착한 무리들을 완전히 구렁텅이에 빠뜨리려 하고는 음험하게 박장설(朴長卨)을 사주하여 상소를 올리게 하였다. 상소문에서 이가환을 무고하였으니, 내용인즉 “정약전(丁若銓)이 경술년의 회시 때 지은 책문(策文)의 답변에 오행(五行)을 사행(四行)으로 하였어도 이가환이 뽑아서 회원(會元)으로 했다”라고 했다. 임금이 그 대책문(對策文)을 읽어보시고 무고임을 살피시고 유시를 내려 잘잘못을 가리고는 박장설을 육지의 끝 변두리로 유배시켰다. 그러자 악당(惡黨)들이 유언비어를 날마다 퍼뜨리니 당시의 재상, 세력 있는 집안에서 이런 일을 귀에 익게 들어서 말하기를 “이가환 등이 주문모 사건에는 참으로 밑바탕이니 죄를 주지 않으면 안된다”라고들 했다. 임금이 괴로워하시다 가을에는 이가환을 충주목사(忠州牧使)로 좌천하고 나를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좌천하여 임명하고 이승훈은 예산현(禮山縣)으로 유배를 보내며 그날 유시를 내리기를 “그가 만약 눈으로 성인의 책이 아닌 걸 읽지 않고 귀로 상도에 어긋나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죄없는 그의 형(若銓)이 벌을 받았겠느냐? 그가 만약 뛰어난 문장을 쓰고 싶었다면 육경(六經)과 양한(兩漢)의 문장이 좋은 모범이 될 터인데, 기이(奇異)를 힘쓰고 새로운 것만 찾다가 몸과 이름을 낭패보기에 이르렀구나! 무슨 버릇인가! 비록 그의 행적이 완전히 탄로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건의 깊고 얕음을 캐냈으니 그 죄가 판명된 것이다. 만약 선으로 마음이 향해 그가 이로 인해 스스로 뉘우친다면 그에게 있어서는 다 훌륭한 인재로 되는 길이다. 전 승지 정약용을 금정찰방으로 제수하니 즉각 출발해서 목숨이나 살아 한강을 넘어올 방법을 도모케 하라”고 하셨다. 금정(金井)은 홍주(洪州)에 있는 곳으로 역속(驛屬)들이 대부분 서교를 믿고 있었다. 임금께서 나로 하여금 잘 회유시켜 금지시키도록 하려는 뜻에서였다.
내가 금정에 도착하여 그곳의 세력가들을 불러다가 조정의 금령(禁令)을 거듭거듭 설명해 주고 제사지내는 일을 권고하였더니, 사림(士林)들이 듣고는 사태를 바꿀 만큼의 효과가 있었다고들 했었다. 이 무렵에 목재(木齋) 이삼환(李森煥)에게 청하여 온양(溫陽)의 석암사(石岩寺)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그때에 내포(內浦) 지방의 이름난 집안의 자제로 이광교(李廣敎)·이명환(李鳴煥)·권기(權夔)·강이오(姜履五) 등 십여 명이 소문을 듣고 모여들어 매일 수사(洙泗)의 학문을 강론하고 성호 선생의 문집을 교정하면서 열흘 만에 마쳤다. 또 북계(北溪) 윤취협(尹就協)과 방산(方山) 이도명(李道溟)을 방문하였는데 모두 뜻이 높은 선비들이었다.
겨울에 임금의 특명으로 내직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이때 이정운(李鼎運)이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나갔다. 전 관찰사 유강(柳?)이 이존창(李存昌)을 체포하여 말하기를 그 일을 나와 함께 모의한 일이라 하였으니, 공로가 나에게 돌아가 발탁되게 하려는 뜻에서였나 보다. 임금께서 그 이야기를 듣고는 이정운에게 은밀히 유시하여 부임한 즉시 자세히 올려바치게 하였으니, 나로 하여금 그것 때문에 진로가 열리게 하려 했던 것이다. 이익운(李益運)이 또 전해주기를, 임금이 유시하기를 “약용으로 하여금 사실을 열거해서 이정운의 이야기와 부합하게 하라”고 하셨다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럴 수는 없다. 사군자(士君子)가 몸을 세우고 임금을 섬길 때 비록 이징옥(李澄玉)이나 이시애(李施愛)를 체포했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런 것으로 자기의 공로를 삼지 않는 것인데, 하물며 그 따위 조그만 놈을 잡아서 그렇게 하겠는가. 그리고 그자를 체포하려 모의하거나 계획을 꾸몄던 게 없었는데 이제야 보라는 듯이 과장해서 찬양하여 임금의 혜택을 얻어내려 하는 일은 죽어도 못할 짓이다”라고 하여 임금의 뜻이라도 나를 부끄럽게 해주는 일에는 애걸해도 따르지 않았더니, 이익운이 겸연쩍은듯이 가버렸다. 모두들 이것 때문에 임금의 뜻을 어겼다고까지 말하기도 했었다.
그후에 김이영(金履永)이 금정 찰방으로 보직을 받고 나갔다가 돌아와 내가 금정에 있으며 성심으로 계도하였고 또 직무 중 청렴하고 근엄하게 하였다고 아뢰자 심환지(沈煥之)가 임금께 상주하기를 “정약용이 군복사(軍服事) 때문에 특명으로 관리에 추천하지 못하도록 되어 지금까지 풀리지 못하고 있는데 그 사람을 등용시키는 게 옳습니다. 또 금정에 있을 때 백성을 많이 계도하였으니 다시 임용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자 임금이 허락하셨다.
병진년(丙辰年:35세, 1796) 봄에 형조(刑曹)에서 올린 기록 때문에 임금이 유시하시기를 “요즘 연신(筵臣)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내포(內浦) 일대에 찰방으로 외직나간 사람이 성심껏 백성을 깨우쳐 괄목할 만한 효과가 있었다 하니 중화척(中和尺)을 특사한다”라고 하시고 임금이 지은 시 두 편을 내리시고는 나에게 화답하여 올리게 하였다.
가을에 임금께서 검서관(檢書官) 유득공(柳得恭)을 보내어 『규운옥편(奎韻玉篇)』의 의례(義例)에 대하여 이가환과 나에게 상의하도록 하였으며, 겨울이 되자 나를 부르셔 규영부에 들어가 이만수·이재학(李在學)·이익진(李翼晋) 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사기영선(史記英選)』을 교정하도록 하셨다. 출판할 책의 이름을 결정하는 데 자주 참여하도록 해주셨고, 날마다 진귀한 선물과 맛있는 음식으로 배불리 먹게 해주셨다. 또 자주 쌀이나 땔감·꿩·젓갈·홍시·귤 등 과일 및 아름답고 향기로운 보물들을 하사해 주셨다. 12월에는 병조참지(兵曹參知)에 제수하셨고 이어서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옮겨 좌부승지로 승진시켜 주셨다.
정사년(다산 36세, 1797) 봄에 대유사(大酉舍)에 불리어가서 식사를 대접받고 화식전(貨殖傳)·원앙전(袁?傳)의 의심나는 문제에 대하여 논의를 받고 답하였으며, 임금의 명을 받고 외각(外閣)에 나가 이서구(李書九)·윤광안(尹光顔)·이상황(李相璜) 등과함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교정하였고, 또 성균관에서 보는 시험의 대독관(對讀官)이 되었다. 임금의 명령으로 고시관이 되었음은 딴 사람에 비하여 유독 자주 있던 일이었다.
6월에는 다시 승정원에 들어가 동부승지가 되었는데 사직 상소를 올려 얽힌 문제의 앞뒤를 투철하게 진달하여 서교 문제로 비방받던 까닭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드렸다. 간략히 말하면 “말을 박절하게 않으려 해서 간서(看書)라고 하는 것이지 참으로 책만 보고 멈춰버렸다면 어찌 죄라고 하겠습니까. 애초부터 마음속에 기뻐서 즐거워 사모하듯 했고 처음부터 치켜세우며 여러 사람들에게 자랑하며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마음의 본바탕에 처음부터 기름이 엉키고 물들고 뿌리박고 가지가 얽혀 있듯이 했으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했습니다”라는 내용으로 반복해서 수천 마디의 이야기를 했었다.
임금이 답변을 내리시기를 “착하겠다는 단서(端緖)의 움이 분명하여 봄에 만물이 솟아나는 부르짖음같이 모든 글 내용이 조리 있어 말을 듣고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라고 하셨다. 다른 연신(筵臣)들도 또한 나를 위해서 말해 주는 사람이 많았다. 임금께서 가상하게 여겨 권장해 주시려는데 마침 곡산 도호부사(谷山都護府使)가 잘못으로 바뀌게 되자 임금이 어필로 나의 이름을 써서 나에게 임명장을 주셨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상소한 글은 이야기 내용도 좋았지만 마음씨도 밝았으니 참으로 다시 변하진 못하리라. 정말로 한번 올리어 쓰고 싶었지만 의론들이 귀찮도록 많으니 무엇 때문인 줄 모르겠다. 그리고 근심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거두어라. 1, 2년이 더 늦더라도 괜찮을 것이다”라고 하셨으니, 떠날 때 다시 불러서 근심과 슬픔을 보이지 말라고 하심이었다. 그때 세력을 잡은 자로 참소하고 질투하는 자가 많아 임금의 뜻은 내가 몇 년 외직에 근무하도록 하여 그 불길을 식히려 함이었다.
전에 임금이 김이교(金履喬)·김이재(金履載)·홍석주(洪奭周)·김근순(金近淳)·서준보(徐俊輔) 등 여러 신하로 하여금 『사기선찬주(史記選纂註)』를 편찬케 하여 이미 올려바치었는데, 그 책의 내용이 번거롭고 어려운 탓으로 줄여서 바르게 하려던 생각이셨는데 이때서야 임금이 말씀하기를 “곡산은 한가한 고을이다. 그곳에 가면 그 일을 해다오”라고 하셔 내가 명령을 받고 물러와 매일 공문서를 처리한 틈틈에 깊고 넓고 정밀하게 연구하여 휜 것과 뒤틀린 것을 바로잡아 완성한 후에 내각을 통해 올려바치게 했더니 이만수가 전해주기를 “책을 올리자 칭찬이 있었다”라고 했다.
곡산 사람에 이계심(李啓心)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백성들이 당하는 괴로움에 대하여 말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지난번의 도호부사가 재직하고 있을 때 포수보(砲手保) 면포 1필 대금으로 돈 900문씩을 거두어들였는데 이계심이 백성 천여 명을 인솔하고 관청에 들어와 항의하자 부사가 벌을 주려 하니 천여 명이 벌떼처럼 일어나 이계심을 둘러싸고 계단으로 올라가며 소리를 지르니 천지가 동요하게 되었다. 아전과 관노배들이 몽둥이를 들고 쫓아내자 이계심은 달아나버려 오영(五營)에서 기찰하여 붙잡으로 해도 붙잡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부임차 곡산 땅에 이르니 이계심이 백성들의 괴로워하는 사항 10여 조목을 들어 기록하여 올려바치고는 길가에 엎드려 자수하였다. 옆사람들이 체포하기를 청했으나 내가 말하기를 “그러지 말라. 한번 자수한 사람은 스스로 도망가지 않는다”라고 하여 석방시키면서 말하기를 “관장이 밝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백성이 자기 몸을 위해서만 교활해져 폐막을 보고도 관장에게 항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 같은 사람은 관에서 마땅히 천냥의 돈을 주고라도 사야 할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그런 후에는 서울 군영에 상납해야 할 모든 포목은 내가 친히 면전에서 자(尺)로 재어 받아들였다.
곡산 향교에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가 있었는데 그 책에는 포목을 재는 자의 그림이 실려 있었다. 그림의 자와 그때 사용하던 자와 비교해 보니 차이가 2촌(寸)이나 있었다. 그래서 자의 그림에 맞도록 새로 자를 제작하여 서울 군영에서 사용하는 구리자(銅尺)와 일치케 하여 면포를 거두어들였더니 백성들이 편하게 여겼었다. 그 이듬해에는 포목이 더욱 귀하게 되자 나는 칙수전(勅需錢)과 관봉전(官俸錢) 2천 냥을 풀어서 평안도에 가서 포목을 사다가 서울에 바칠 것을 충당하였고 그 가격을 백성들에게 징수해서 채웠으니, 모두 해야 한 집에 200푼이 넘지 않아서 백성들은 호마다 송아지 한 마리를 얻은 셈이었다.
국법에는 대개 창곡(倉穀)은 반드시 순차로 나누어 배급하도록 하였으나 더러는 여덟번·아홉번까지 나누어 배급하는 경우가 있었다. 나는 매 초하루에 몇개 면(面) 사람들을 불러다가 한꺼번에 다 타가게 하여 그 번거로움과 비용을 줄여 주고 왔다갔다 하는 불편을 간략하게 했다.
무오년(1798) 겨울 환곡을 거두어들이는 일이 거의 끝났는데 재신(財臣) 정민시(鄭民始)가 곡산에서 쌀 7천 석을 팔(?)게 하도록 주청하였다. 이해는 대풍년이어서 쌀값이 1곡(斛:15말이다.―原註)에 200푼 정도인데 상정(詳定)한 가격이 420푼이나 되었다. 내가 조목별로 이해를 가려 상급 관청에 보고하고는 백성들을 독촉하여 양곡을 모두 수납하고 창고를 닫고 기다리고 있었다. 정민시가 다시 주청하기를 “나라가 나라인 것은 기강 때문입니다. 저희들이 주청하여 임금께서 허락하셨고 감사가 발표한 일을 수령(守令)이 성깔을 내고 따르지 않는다면 어찌 나라가 되겠습니까”라고 하여 나에게 죄를 주어 징계할 것을 청하였다.
임금께서 본래 올려바친 보고문을 가져다 읽어보시고는 “옛날에 양곡과 세금을 담당한 신하들은 팔도의 시장가격을 두루 알아 값이 싸면 사들이고 값이 비싸면 곡식을 방출하는 게 법이었다. 그런데 지금 경(卿)은 시장가격이 싼데 비싸게 팔라고 하니 약용이 따르지 않음은 옳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무릇 호적을 정리하는 해가 되면 아전들이 백성을 위협해 호구 수를 늘리도록 하고 백성들은 부산하게 뇌물을 바쳐 호구 수를 늘리려 하지 않기 때문에 본래부터 가난한 마을은 뇌물을 바치지 못해 호구 수는 늘어만 가서 마을은 갈수록 말라빠지고 돈이 있는 마을은 호구 수가 늘지 않으므로 더욱 부자가 되어 백성들의 살림이 균등하지를 못했다. 내가 먼저 침기부(砧基簿)를 수정하고 종횡표(縱橫表)를 작성하였으며, 또 지도를 그리고 경위선(經緯線)을 만들어놓아 백성들의 허와 실, 강하고 약함, 지역의 넓고 좁음, 멀고 가까움을 상세히 알 수 있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적감(籍監)·적리(籍吏)를 없애버리고 관장이 호액(戶額)의증감을 실정에 맞도록 할 수 있었다. 며칠이 안되어 호적단자(戶籍單子)가 일제히 들어왔는데 한 사람도 억울함을 하소연해 오는 사람이 없었다. 향갑(鄕甲)이 군정(軍丁)의 명단을 올릴 때마다 내가 몰래 그 사람의 딱한 처지를 알아내 가지고는 즉석에서 소리내어 꾸짖기를 “모 농민은 새로 모 군(郡)에서 이사오고 홀아비인데다 절뚝발이 병신인데 어떻게 군포(軍布)를 물겠는가”라고 하면 향갑이 깜짝 놀라 다시는 그런 말을 못하고 말았다. 나는 이미 침기표(砧基表)를 보고 그 집의 사정을 알아두었던 것이지 특별한 술수(術數)를 써서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다.
절도사(節度使) 정학경(鄭學?)이 허록(虛錄)과 백골(白骨)의 군정(軍丁)을 뽑는 데 대해서 신칙하려고 하자 내가 말하기를 “왜 그런 일을 하려 합니까. 군포란 허록(虛錄)보다 더 좋은 것이 없고 군적은 백골보다 더 좋은 것이 없는데 괜히 일거리를 만들지는 마십시오”라고 했더니, 정학경이 잘 이해하지를 못하자 내가 다시 말하기를 “군포계(軍布契)와 역근전(役根田)이 있는데 이는 호포(戶布)입니다. 호포란 국가에서도 곧장 시행하고 싶어하나 되지 않는 겁니다. 그것을 백성들이 스스로 하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어지럽게 만들렵니까”라고 했더니, 그때서야 알아듣고 그만두어버렸다.
곡산의 정당(政堂)을 새로 짓고 다른 관청의 건물들을 수리했으며 모든 창고 모든 청사의 예규(例規)의 문서들을 파기해버리고 새로 조례를 만들어서 시행케 하였다. 전에는 관공서 비용이 부족하면 다시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들였는데 이때부터는 충분히 남아 돌아갔다. 그 뒤에 부임한 사또들이 조례를 고치고자 했으나 아전이나 백성들이 물고늘어져 한 조목도 끝내 고치지 못했다고 한다.
무오년(37세, 1798) 겨울 12월에 괴상한 질병이 갑자기 평안도 쪽에서 들어와 내가 먼저 앓아 누웠다. 고을의 노인들이 걸리기만 하면 틀림없이 죽어갔는데 며칠이 못가 울음소리가 온 주변을 진동케 했다. 내가 백성들에게 권해서 서로 도와 병을 낫게 하거나 급한 대로 곡식을 풀어 주기도 했고, 또 주인 없는 시체들은 장사 지내서 매장시켜 주도록 했다.
새해(己未:38세, 1799)가 되자 내가아직 요를 둘러쓰고 있으면서 칙수감리(勅需監吏)를 불러서 배천(白川)의 강서사(江西寺)에 가서 진 곳에 까는 화문석을 사오게 했다. 모두가 깜짝 놀라며 알아차리지 못하고 “칙사가 옵니까”라고 해서 “그렇지 않다”라 하고는 빨리 가서 사오기나 하라 하니, 아전이 가서 사가지고 오는 도중에 평산(平山)에 도착하였는데, 의주(義州)에서 파발말이 나는 듯이 달려가며 “황제가 죽어 칙사가 왔다”라고 하였다. 아전이 고을에 돌아와 소문을 내자 온 마을이 깜짝 놀라 야단법석이었다. 내가 말하기를 “이상할 것이 없다. 돌림병이 서쪽으로부터 왔으며 노인들이 다 죽는 것을 보고 알았다”라고 했다.
봄에 임시로 호조참판(戶曹參判)의 직함을 띠고 황주(黃州)에서 영위사(迎慰使)가 되어 50여 일을 머물렀다. 임금께서 은밀하게 유시를 내려 나로 하여금 황해도 내 수령들의 잘잘못과 사신 접대로 인한 여러 폐단 등을 염찰(廉察)토록 하셨으니, 수령이 수령을 염찰토록 해주신 일도 퍽 드문 일이었다. 전에 황해도 내에는 해결치 못한 옥사(獄事)가 두 건이나 있었는데 내가 임금께 은밀히 올려바쳤더니 임금이 감사에게 유시하여 조사토록 하니 감사 이의준(李義駿)이 나를 차출해다가 조사케 하였기에 두 옥사가 모두 해결을 보았다.
마침 여름에 가뭄이 심하자 임금께서 여러 가지의 미결된 옥사들을 심리하고 싶으셔 내가 재판한 내용에 대하여 칭찬해 주던 일을 생각해내고는 마침내 병조참지(兵曹參知)를 제수하시고 올라가는 도중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바꾸고 서울에 들어가자 형조참의(刑曹參議)로 제수하셨다. 어전에 오르니 임금께서 형조판서 조상진(趙尙鎭)에게 말씀하시기를 “경은 이제 늙으셨소.참의는 나이가 젊고 매우 총명하니 경은 마땅히 높은 베개를 베고 쉬면서 모두 참의에게 넘기시오”라고 하셨다. 판서가 이 유시를 듣고는 모든 일반 범죄 사건이나 판결지어야 할 상소사건을 위임하자 내가 옥사를 상당히 해결해내었다. 어떤 무식한 농부가 억울하게 걸려 옥사가 매우 오래 끌며 판결나지 않는 사건이 있었는데, 내가 초검(初檢)과 재검(再檢)의 조서를 검토하여 그 억울함을 밝혀냈더니, 임금께서 형조(刑曹)에 명하여 의관(衣冠)을 지급해 주고 석방하라고 하셨다.
무신 이성사(李聖師)가 계집종 하나를 샀는데 성사가 죽어버리자 소송이 일어났다. 때마침 사헌부의 진언이 임금을 격노케 하여 명령하기를, 성사의 손자 모(某)를 잡아다가 장형(杖刑) 100을 내리도록 하니, 임금의 위엄에 눌려서 형을 집행하려고 하면서 형조 전체가 겁을 먹고 있기에 내가 말하기를 “참으로 고문을 참혹하게 하면 죽을 뿐입니다. 선비를 죽이는 것은 임금의 뜻이 아닐 겁니다”라고 하고 주의시켜 매의 숫자만 채우고 그치게 하고, 그의 무죄임을 말씀드렸더니 임금의 마음이 풀어졌던 일도 있었다. 간사한 백성이 한 사람 있어 나라에 바치는 공물(貢物)을 이중으로 팔아먹고 핑계대기를 “주권(朱券)이 화성(水原)에 있어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하기에 내가 국문(鞫問)을 받게 하고는 “쥐새끼 같은 놈이 감히 화성에 빙자해서 성호사서(城狐社鼠)를 하려고 하니 되겠느냐?”라고 호령하니 이틀 만에 주권이 이르렀었다.
하루는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황해도로부터 왔으니 당연히 그곳의 고질적인 병폐를 말해야 한다”라고 하셔서 나는 초도(椒島)의 둔전(屯田)에 있는 소(牛)의 문제를 말씀드렸더니, 임금이 즉각 명령을 내려 모든 소의 장부를 없애버리게 하였다. 또 중국 칙사 영접에서 오는 여러 가지 폐단을 말씀드렸더니 임금께서 “정승 이시수(李時秀)가 새로 원접사(遠接使)로 나가니 그가 갈 때 의론하라”고 하시고 마침내 드는 비용의 모두를 문서로 적어서 보고하도록 명령하시었다.
이 무렵 임금님의 보살핌과 관심을 가져주심이 날로 깊어져 밤이 깊어서야 문답이 끝나고 하니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시기를 했었다. 홍시보(洪時溥)가 나에게 말하기를 “자네 좀 조심하게. 우리 청지기에 옥당의 아전이 된 자가 있는데 말하기를 ‘야밤에 정공(丁公)의 야대(夜對)가 끝나지 않으면 옥당에서아전을 보내 엿보느라 걱정되어 잠을 자지 못합니다’라고 하데그려. 자네는 그런 걸 감당하겠나”라고 하였다. 며칠이 못되어 대사간 신헌조(申獻朝)가 계(啓)를 올려 권철신(權哲身)에 대하여 논죄하고 이어서 나의 형 약종(若鍾)의 일을 아뢰자 계가 끝나기도 전에 임금이 성을 내며 꾸짖으셨다. 조보(朝報)에는 그런 내용이 없어 나는 그런 사항도 모르고 있었는데 사헌부의 대관(臺官) 민명혁(閔命赫)이 또 약용이 혐의(嫌疑)를 무릅쓰고 벼슬살이하고 있다는 상소를 올렸기에 나는 병이 남을 이유로 나가지 않아 달이 넘어 교체가 되었다.
겨울에 서얼 출신 조화진(趙華鎭)이라는 자가 급변(急變)을 상고하니, 내용인즉 “이가환·정약용 등이 음험하게 천주교를 주장하며 궤도에 벗어난 짓을 음모하고 있고 한영익(韓永益)은 그들의 심복이 되어 있다”라고 했었다. 임금이 그것은 무고임을 살펴내고 그 변서(變書)를 이가환 등에게 돌려보도록 하고 또 말씀하시기를 “한영익은 북산사(北山事)를 올려바친 사람인데 어떻게 심복이 되겠는가”라고 하셨고, 내각의 신하 심환지(沈煥之), 충청도 관찰사 이태영(李泰永)이 모두 무고라고 하자 일은 끝나버렸다. 조화진이 전에 한영익에게 구혼을 했었는데 한영익이 들어주지 않고 그 누이를 나의 서제(庶弟) 약황(若鐄)에게 시집 보냈는데, 이런 일 때문에 한영익을 죽일 속셈으로 나까지 끌고들어간 것이었다.
임금이 책 한권 읽기를 다 끝마치면 태빈(太嬪)이 음식을 준비하여 세서례(洗書禮)를 하셨으니, 일반 민간들의 어린이들이 책을 다 배우면 책씻이하던 것을 따라서 하신 일이다. 이 일에 대하여 임금이 시를 짓고 나로 하여금 화답시를 짓게 하자 화답했었다.
경신년(39세, 1800) 봄에 나는 참소하고 시기하는 사람이 많음을 알고 고향으로 낙향하여 칼날을 피하려고 처자식을 거느리고 마현(馬峴)의고향으로 돌아가버렸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임금께서 들으시고 내각을 시켜 급히 나를 부르신다 하기에 돌아와 보니, 임금께서 승지를 통해 유시해 주시기를 “규영부는 이제 춘방(春坊)이 되니 처소를 정하기를 기다려 들어와 교서(校書)의 일을 하게 하라. 내가 어찌 그를 놓아두겠느냐”라고 하셨다 한다.
여름 6월 12일 마침내 달밤이어서 한가하게 앉아 있었더니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어 들어오도록 하니 내각의 아전이었다. 『한서선(漢書選)』 10질을 가져왔는데 하는 말이, 임금께서 유시하시기를 “오래도록 서로 보지 못했다. 너를 불러 책을 편찬하고 싶어서 주자소(鑄字所)를 새로 벽을 발랐으니 그믐께쯤 경연에 나올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하니, 위로의 말씀이 대단하셨다. 또 “이 책 5질은 남겨서 가전(家傳)의 물건을 삼도록 하고 5질은 제목의 글씨를 써서 돌려보내도록 하라” 하셨다 한다. 아전이 말하기를, 유시를 내리실 때 얼굴빛이 못견디게 그리워하는 듯하셨고 말씀도 온화하고 부드러워 다른 때와는 달랐다고 하였다. 아전이 나가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고 마음이 동요되어 어찌할 줄 몰라 했는데, 그 다음날부터 임금의 건강에 탈이 났고 28일에 이르러 하늘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날 밤에 하인을 보내 책을 하사해 주시고 안부를 물어 주신 것이 끝내는 영결의 말씀이었고 임금과 신하의 정의(情誼)는 그날 밤으로 영원히 끝나고 말았다. 나는 이 일에 생각이 미칠 때마다 눈물이 홍수처럼 쏟아짐을 참지 못하곤 한다.
임금이 승하하신 날 급보를 듣고 홍화문(弘化門) 앞에 이르러 조득영(趙得永)을 만나 서로 가슴을 쥐어뜯고 목놓아 울었었다. 임금의 관(棺)이 빈전(殯殿)으로 옮겨지는 날에는 숙장문(肅章門) 옆에 앉아 조석중(曺錫中)과 함께 슬픔을 이야기하였다. 공제(公除)의 날이 지난 뒤부터 점차 들리는 소리는 악당들이 참새 떼 뛰듯 날뛰며 날마다 유언비어와 위험스러운 이야기를 지어내고 사람들의 귀를 현혹시키고 있다 했다. “이가환 등이 앞으로 난리를 꾸며 4흉 8적(四凶八賊)을 제거한다”는 이야기까지 꾸며대고는 그 네 명과 여덟 명의 이름에 절반은 당시의 재상들과 명사들의 이름이 끼여 있었고 절반은 자기네들 음험한 무리들의 이름을 끼여넣고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분노를 격발시키게 하고 있었다. 나는 화란의 낌새가 날로 급박해짐을 헤아리고 곧바로 처자를 마현으로 돌려보내고 혼자 서울에 머무르며 세상 변해감을 관찰하고 있었다. 겨울에 임금의 졸곡(卒哭)이 지나자 영영 열상(洌上)으로 낙향해버리고는 오직 초하루나 보름날의 곡반(哭班)에 참가할 뿐이었다.
신유년(순조 1년, 40세, 1801)에 태비(太妃)가 유시를 내려 서교를 믿는 사람은 코를 베고 멸종시켜버린다는 경고를 하였다. 정월 그믐 하루 전날 이유수(李儒修)·윤지눌(尹持訥) 등이 편지를 보내 책롱사(冊籠事)를 알려오자 나는 즉시 서울로 달려들어왔다. 이른바 책롱이라는 것은 5, 6사람의 편지들이 섞인 문서인데 그중에는 나의 집안 편지가 들어 있었다. 윤행임(尹行恁)이 그러한 상황을 알아내서 이익운(李益運)과 의논, 유원명(柳遠鳴)을 시켜서 상소하여 나를 붙잡아다 조사를 하여 나와 관계 없는 일임을 밝혀내 화봉(禍鋒)을 미리 꺾어버리자고 하였고, 최헌중(崔獻重)·홍시보(洪時溥)·심규(沈逵)·이석(李晳) 등이 애쓰며 권하기를 그렇게 받아들여서 앞으로 전화위복이 되게 하라 하였지만 내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2월 8일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죄상을 적어 임금께 올리어 국문(鞫問)을 청하게 되자 이가환·정약용·이승훈이 모두 투옥되었고 나의 형 약전과 약종 및 이기양(李基讓)·권철신·오석충(吳錫忠)·홍낙민(洪樂敏)·김건순(金健淳)·김백순(金伯淳) 등이 차례로 투옥되었다. 그러나 그 문서 뭉치 중에서는 내가 관계 없음이 분명히 드러났다. 이어서 형틀에서 풀어주고 사헌부 안에서 편히 있게 해주었다. 여러 대신들이 모여 의론을 하고 있었는데 옥사의 위관(委官)인 이병모(李秉模)가 말하기를 “자네는 앞으로 무죄로 풀려날 걸세. 음식도 많이 들며 몸을 아끼시게”라고 했고, 심환지(沈煥之)가 말하기를 “쯔쯔, 혼우(婚友)가 운명이 어찌 될지 알 수 없구나”라고 했다. 지의금(知義禁) 이서구(李書九), 승지 김관주(金觀柱) 등도 공정히 판결하여 용서될 거라고 했고, 국문할 때 참관했던 승지 서미수(徐美修)가 은밀히 기름 파는 노파를 불러다가 재판 소식을 나의 처자에게 전해 주라고 하면서 나의 죄질은 가벼워 죽을 걱정은 없으니 식사를 하게 하여 살아나게 하라고 시킨 일까지 있었다. 여러 대신들이 모두가 무죄로 풀어줄 것을 의론했으나 오직 서용보(徐龍輔)만이 고집을 부려 안된다고 해서, 나는 장기현(長?縣)으로 유배당하고 형님 약전은 신지도(薪智島)로 유배형을 받았다. 약종뿐만이 아니라 나머지 사람들, 이가환·권철신·이승훈·김건순·김백순·홍낙민은 살아남지 못했다. 오직 이기양은 단천(端川), 오석충(吳錫忠)만은 임자도(荏子島)로 유배를 당했다.
이때 악당들이 내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헝클어진 편지뭉치 속의 삼구(三仇)의 학설을 억지로 뜯어 맞추어 정(丁)씨 집안의 문서에 있는 흉언(凶言)이라고 무고하여 마침내 약종에게 극형을 추가함으로써 내가 재기할 수 있는 길까지를 막아버렸다. 그러나 고(故) 익찬(翊贊) 안정복(安鼎福)의 저서에 분명히 삼구(三仇)의 해석이 있으니, 우리 집안에서 만든 말이 아니고 보면 그거야말로 무고임이 분명했다. 이 해 여름에 옥사(獄事)가 더욱 확대되어 왕손(王孫) 인(?), 척신 홍낙임(洪樂任), 각신 윤행임(尹行恁) 등이 모두 사사(賜死)당하였다. 내가 장기에 도착하자 ?기해방례변(己亥邦禮辨)?을 지었고 『삼창고훈(三倉?訓)』을 연구해내고 『이아술(爾雅述)』 6권을 저술하였고 수많은 시를 읊으며 스스로 걱정과 근심을 견디며 지냈다.
겨울이 되어 역적 황사영(黃嗣永)이 체포되자 악인 홍희운(洪羲運:樂安)·이기경 등이 백 가지 계책을 동원하여 조정을 공갈 협박하기도 하고, 자기들이 자원해서 사헌부의 벼슬자리에 들어가기도 해서는 발계(發啓)하여 다시 국문하자고 청하여 약용 등을 기어코 죽이고야 말겠다는 것이었다. 홍희원이란자는 낙안의 바꾼 이름이다. 이때 정일환(鄭日煥)이 황해도로부터 들어와 “정모(丁某)는 서쪽지방에서 백성을 아끼는 정치를 남겼으니 죽여서는 안된다”고 세차게 발언하였고, 또 죄인의 공초(供招)에 이름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체포해오는 법은 없다고 심환지에게 국문하자는 요구에 동의하지 말라고 권했으나, 심환지가 태비에게 청하여 봄철 대간(臺諫)의 계사(啓辭)를 윤허받았다. 이에 약전·약용및 이치훈(李致薰)·이관기(李寬基)·이학규(李學逵)·신여권(申與權) 등이 또 체포되어 투옥당했다. 위관(委官)이 흉서(凶書:帛書)를 나에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역적의 변고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조정에서도 무슨 걱정인들 미치지 않으리요. 무릇 서양 서적의 글자 하나라도 읽은 사람은 죽음이 있을 뿐 살아날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사건을 조사해 보니, 모두 참여해서 알았던 정상이 없었고 또 여러 대신들이 압수해간 예설(禮說)이나 이아설(爾雅說) 및 여러 시작품을 검토해 본바 모두가 안한(安閒)하고 정밀하여 알맹이가 있고 적(賊:황사영)과 서로 통했던 낌새가 없기 때문에 불쌍하게 여겨서 어전에 들어가 무죄임을 올려바치니, 태비도 그것이 무고임을 살펴내고 여섯 사람을 모두 적당히 석방하라고 명령하고는 말하기를 “호남에는 아직도 서교에 대한 우려가 있으니 나를 강진현으로 유배시켜 진정시키도록 하고 약전은 흑산도, 나머지는 모두 영남과 호남으로 옮겨서 유배보내라”고 하였다.
이 무렵 윤영희(尹永僖)가 내가 사나 죽나를 알아보러 대사간 박장설(朴長卨)의 집을 방문하여 재판이 되어가는 형편을 물어보았는데, 마침 그 때 홍희운이 도착함으로써 윤영희가 골방으로 피해 들어가자 홍희운이 말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오며 발끈 성을 내면서 말하기를 “천 사람을 죽이고 약용을 죽이지 않으면 아무도 죽이지 않은 거와 같소. 공(公)은 왜 힘꺼 다투지 않습니까?”라고 하니, 박장설이 대답하기를 “그자가 스스로 죽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죽일 수가 있나”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홍희운이 가버리자 박장설이 윤영희에게 말하기를 “답답한 사람 같으니라고, 죽어지질 않는 사람에게 음모해서 죽이려고 재차 큰 옥사를 일으켜놓고는 또 나보고 다투지 않는다고 책망하는구려”라고 하더란다.
내가 강진에 도착하자 문을 닫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있었는데, 임술년(1802) 여름에 강진 현감 이안묵(李安?)이 하찮은 일로 또 무고를 하였으나 사실이 없어서 끝나버렸다. 계해년(1803) 겨울에 태비의 특별명령으로 나와 채홍원(蔡弘遠)을 함께 석방하라고 했지만 정승 서용보가 가로막아버렸다. 무진년(1808) 봄에는 다산(茶山)으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다 대(臺)를 쌓고 못[池]을 파서 줄을 맞춰 꽃과 나무를 심고 물을 끌어다 비류폭포를 만들었다. 동암(東菴)과 서암(西菴) 두 초막을 짓고 천여 권의 장서(藏書)를 두고 저술을 하면서 스스로 재미를 느끼고 살았다. 다산(茶山)은 만덕사(萬德寺)의 서쪽에 있었는데 처사(處士) 윤단(尹?)의 산정(山亭:茶山草堂)이었다. 바위로 된 절벽에 ‘정석(丁石)’ 두 글자를 새겨서 표시를 해놓았다.
경오년(1810) 가을에 나의 아들 학연(學淵)이 바라를 두들겨 억울함을 하소연했기 때문에 형조판서 김계락(金啓洛)이 그 사실을 올려바쳐 석방시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라는 명령이 났었으나 홍명주(洪命周)가 상소하여 불가하다고 논했으며, 이기경이 급히 대계(臺啓)를 올려 석방되지 못하고 말았다.
갑술년(1814) 여름에 사헌부 장령 조장한(趙章漢)이 정계(停啓)를 하고 의금부에서 해배 명령서를 보내려 하는 때에 강준흠(姜浚欽)이 상소하여 독살스러운 소리를 해놓으니, 판의금(判義禁) 이집두(李集斗)가 두려워서 감히 해배 공문을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무인년(1818) 여름 응교(應敎) 이태순(李泰淳)이 상소하여 “정계가 되었는데도 의금부에서 석방 공문을 보내지 않은 것은 국조(國朝) 이래 아직까지 없던 일입니다. 여기서 파생될 폐단이 얼마나 많을지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라고 하니까, 정승 남공철(南公轍)이 의금부의 여러 신하들을 꾸짖으니, 판의금(判義禁) 김희순(金羲淳)이 마침내 공문을 보내어 내가 고향으로 풀려 돌아왔으니, 가경(嘉慶) 무인(순조 18, 1818) 9월의 보름날이었다.
처음 신유년(1801) 봄에 옥중에 있을 때 하루는 근심하고 걱정하다 잠이 든 꿈결에 어떤 노인이 꾸짖기를 “소무(蘇武)는 19년도 참고 견디었는데 지금 그대는 19일의 괴로움도 참지 못한다는 말인가”라고 했었다. 옥에서 나오던 때에 당하여 헤아려 보니, 옥에 있던 것이 꼭 19일이었다. 유배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옴에 당하여 헤아려 보니, 경신년(1800) 벼슬길에서 물러나던 때로부터 또 19년이 되었다. 인생의 화와 복이란 정말로 운명에 정해져 있지 않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고향집에 돌아오고 보니, 서용보(徐龍輔)가 마침 벼슬길에서 물러나 서쪽 이웃 마을에 살고 있었다. 사람을 보내어 대단히 관곡(款曲)한 위로의 말을 보내왔다.
기묘년(58세, 1819) 봄에 서용보가 다시 정승으로 들어갔는데 오고갈 때마다 은근하게 위로의 문안을 해주었다. 그해 겨울에 조정의 의론이 경전(經田)하는 일에 다시 나를 기용해서 쓰기로 결정이 났으나 서용보가 극력 저지하여 끝나버렸다. 이해 봄에 배를 타고 남한강(濕水)을 거슬러 올라가 충주(忠州)에 있는 선산에 성묘하였다. 가을에 용문산(龍門山)에 유람갔다.
경진년(59세, 1820) 봄에 배를 타고 산수(汕水)를 거슬러올라가 춘천과 청평산(淸平山) 등지를 유람했다. 가을에는 다시 용문산에 가서 유람하는 등 산과 시냇가를 산보하면서 인생을 마치기로 했다.
나는 해변가로 귀양을 가자 ‘어린 시절에 학문에 뜻을 두었지만 20년 동안 속세와 벼슬길에 빠져 옛날 어진 임금들이 나라를 다스렸던 대도(大道)를 알지 못했다. 이제야 겨를을 얻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그때야 흔연스럽게 스스로 기뻐하였다. 육경(六經)과 사서(四書)를 가져다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고 밑바탕까지 파내었다. 한(漢)나라·위(魏)나라 이후로부터 명(明)·청(淸)에 이르기까지 유학사상으로 경전(經典)에 도움이 될 만한 모든 학설을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넓게 고찰하여 잘못되고 그릇되었음을 확정해 놓고는 그런 것 중에서 취사선택하고 나대로의 학설을 마련하여 밝혀놓았다.
선대왕(正祖)의 비평을 받았던 『모시강의(毛詩講義)』 12권으로부터 시작하여 별도로 『모시강의보(毛詩講義補)』 3권을 저술해 놓고, 『매씨상서평(梅氏尙書平)』 9권, 『상서고훈(尙書古訓)』 6권,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 7권, 『상례사전(喪禮四箋)』 50권, 『상례외편(喪禮外編)』 12권, 『사례가식(四禮家式)』 9권, 『악서고존(樂書孤存)』 12권, 『주역심전(周易心箋)』 24권, 『역학서언(易學緖言)』 12권, 『춘추고징(春秋考徵)』 12권,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40권, 『맹자요의(孟子要義)』 9권, 『중용자잠(中庸自箴)』 3권, 『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 6권, 『대학공의(大學公議)』 3권, 『희정당대학강록(熙政堂大學講錄)』 1권, 『소학보전(小學補箋)』 1권, 『심경밀험(心經密驗)』 1권을 저술했으니 이상 경집(經集) 232권이었다.
『시경(詩經)』에 대한 학설로는 시(詩)란 간림(諫林)이다. 순(舜)의 시대에 “오성육률(五聲六律)로써 오언(五言)을 받아들인다”라고 했을 때 오언(五言)이란 육시(六詩) 중에서 다섯을 말한다. 풍(風)·부(賦)·비(比)·흥(興)과 아(雅)가 다섯이며 단지 송(頌)만을 세지 않은 것이다. 고몽(??)이 아침 저녁으로 풍자하는 노래를 부르면 가수들이 따라서 합창해 부르며, 거문고나 비파를 타기도 하면서 임금으로 하여금 착한 것은 들어서 감발시키게 하고 악한 것은 듣고서 잘못을 뉘우치게 하기 때문에 시의 포폄(褒貶)은 『춘추(春秋)』보다 더욱 무서운 역할을 하며, 임금들이 두려워하기 때문에 “시가 없어지고 나서 춘추를 제작했다”라고 했었다. 풍·부·비·흥은 풍자한다는 말이고 소아(小雅)·대아(大雅)란 정언(正言)으로 간(諫)한다는 말이다.
『서경(書經)』에 대한 학설로는 매색(梅?)이 전한 25편은 가짜이다. 『사기(史記)』 『양한서(兩漢書)』 및 『진수서(晉隋書)』에 있는 유림전이나 경적지(經籍志)를 고찰해 보면 그게 가짜임이 분명하며 『서경』에서 그 부분을 없애지 않으면 안된다. 선기옥형(璿璣玉衡)이란 하늘의 모형을 딴 의기(儀器:渾天儀)를 뜻하는 것이 아니며, 우공(禹貢)의 삼저적(三底績)은 아홉 해 동안에 세번 고적(考績)한다 함이고 홍범구주(洪範九疇)는 정전(井田)의 모형이기 때문에 2와 8이 서로 대응되고 4와 6이 서로 이어지는 것이다.
『예경(禮經)』에 대한 학설로 정현(鄭玄)의 주(註)는 전해 물려받은 착오가 없지 않은데 선유(先儒)가 성경(聖經)처럼 떠받든 것은 잘못이다.
상의유광(喪儀有匡)에서는 ‘질병(疾病)’이란 목숨이 이에 끊어짐을 말함이다. 남녀 개복(男女改服)이란 순수한 흰색으로 갈아입는 것이다. 천자나 제후의 상에는 먼저 성복하고 뒤에 대렴(大斂)한다. 천자·제후·대부·사(士)는 삼우(三虞)로 졸곡제(卒哭祭)를 지내는 것이지 졸곡제란 따로 지내는 제사가 아니다. 부(?)란 신도(神道)를 부한다 함이지 신주에 곁붙이는 것도 아니고 묘(廟)에다 곁붙인다는 것도 아니다. 길제(吉祭)란 사계절에 정해진 제사이지 소목(召穆)을 가리는 일이 아니다.
상구유정(喪具有訂)에서는 모(冒)란 이불 같은 것이요 자루(?)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악수(握手)란 양우(兩?)가 아니며 가운데를 모양만 두 개로 한다. 이미 머리를 가렸으니 복건(幅巾)은 폐하는 것이 마땅하며, 수직으로 옷깃끝[첩]을 하는 것은 옳지 않고 마땅히 횡(橫)으로 옷깃끝을 해야 한다. 심의(深衣)의 폭은 12폭이고 앞에 3폭 뒤에 4폭임은 다른 치마에도 같으며 다음의 3폭은 앞자락에다 다시 겹치고 2폭은 겨드랑이에다 접어넣는다. 구변(鉤邊)이란 옆에다 접어넣는다 함이다. 마침내 장인(匠人)이 납거(納車)한다 할 때 널[柩]을 싣는 신거(蜃車)라는 것은 신탄(蜃炭)의 거(車)를 말하는 것이지 4바퀴로 땅에 굴리는 것을 만드는 게 아니다.
상복유상(喪服有商)에서는 수질(首?)의 맺는 곳은 당연히 목[項]의 뒷부분이고 만약에 맺음이 좌우에 있으면 좌측으로 본(本)을 한 것은 좌측의 끝을 겸하게 하고 우측을 본으로 한 것은 우측 끝에 겸하게 해야 한다. 요질(要?)에 칡을 넣는 것은 삼규(三糾)로 꼬아야지 삼중(三重)으로 하면 예가 아니다. 상관(喪冠)에 무(武:갓끈)가 있다 했을 때 베(布)로 사용해야지 노끈으로 갓끈을 만듦은 예가 아니다. 오복(五服)의 최(衰)는 모두 제복(祭服)의 모형인데 최란 가슴에 붙이는 것이며, 적(適)이란 구부린 옷깃[曲領]이고 부(負)란 뒤에 다는 끈이다. 벽령(?領)을 조각하는 것은 법식이 아니다. 경복(輕服)에서 최와 적과 부를 제거하는 것은 예(禮)가 아니다. 대하척(帶下尺)은 횡란(橫?)으로 만들어서는 안되고 임당방(?當旁)은 연미(燕尾)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소렴(小斂)에 질(?)을 두르는 것은 조복(弔服)의 칡으로 만든 질이다. 천자(天子)가 국군(國君) 이하를 조문할 때에는 질을 두르고 하기 때문에 군(君)·대부(大夫)·사(士)가 모두 한가지라고 한다. 소렴 때 곧바로 규질(繆?)을 착용한다 함은 질이 두 가지라 함은 아니다.
상기유별(喪期有別)에서는 기년(朞年:1년)의 복(服)을 입는상(喪)에서는 11월이 지나 연(練)을 하는데 조부모·백숙부모(伯叔父母)·형제간·형제의 아들에게도 마땅히 연을 해야 한다. 연을 못하는 경우에는 아버지가 계시고 어머니를 위한 복으로, 연을 하면 그 복이 도리어 가벼워지기 때문이다. 남에게 양자(養子) 가서 아들이 된 사람은 자기의 조부모·백숙부모는 대공(大功)으로 내려 입지 않고 내려 입는 경우는 형제 이하부터라 함은 마융(馬融)의 가르침이다. 남의 양자가 된 사람으로는 아우가 형을 위해서, 손자가 할아버지를 위해서 뒤(後)가 되기 때문에 칭호를 바꾸지 않으나 부모의 뒤를 잇는 경우는 부모로 바뀌는 것이다. 조부모의 승중(承重)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소렴 때 위치가 선두에 있던 사람(長子)은 승중할 수 있으나 소렴 때 뒤에 섰던 경우(次子)는 승중할 수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는 계시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승중하지 못한다. 첩(妾)의 아들의 아들은 그 첩인 할머니를 승중을 하지 못한다. 천자나 제후의 상에는 모후(母后)도 또한 참최(斬衰)를 하여 촌수(寸數)가 먼 사람도 모두 참최를 하는데 가까운 처지에서는 당연히 먼저 참최를 해야 한다.
제례유정(祭禮有定)에서는 제후의 나라 대부(大夫)의 제사에는 삼세(三世)를 넘어서는 안된다. 태조(太祖)의 신주(神主)는 옮기지 않으며 또 다른 묘(廟)로 옮기지도 않는다. 지자(支子)가 최장방(最長房)으로 넘겨온 신주에게 제사지내지 않음은 예가 아니다. 대부(大夫)는 1년에 두번 제사지낼 뿐이지 4계절에 다 지내지 않는다. 합호(闔戶)란 상염(?厭)의 예다. 유(侑)하고 삼헌(三獻)하는 것은 합호에서는 옳지 않다. 태뢰(太牢)·소뢰(少牢)·특생(特牲)·특돈(特豚)은 그 제기 그릇과 크고 작은 제기, 국그릇의 가짓수가 각각 정해져 있다 함이다. 그 의미는 삼례(三禮)와 『춘추(春秋)』에 산견되어 있으니 임금·대부(大夫)·사(士)는 각각 등급이 있으며 마음대로 증감해서는 안된다. 또 술잔·국그릇은 기수(奇數)로 사용하며큰 제기나 일반 제기는 우수(偶數)로 사용하는 것이니 혼잡하게 해서도 안된다.
『악(樂)』에 대한 연구에서는 오성(五聲)과 육률(六律)은 절대로 한가지임이 아니다. 육률이란 악기를 제작하는 것으로 음악가의선천(先天)이다. 오성이란 곡조를 분별하는 음악가의 후천(後天)이다. 추연(鄒衍)·여불위(呂不韋)·유안(劉安) 등의 학설인 취율정성(吹律定聲)의 사악한 학설을 변척(辨斥)하고 삼분손익(三分損益)·취처생자(娶妻生子)의 학설이나 괘기월기(卦氣月氣)·정반변반(正半變半)의 학설은 하나도 인용하지 않았다. 육률을 각각 셋으로 나누어 하나씩을빼내 육려(六呂)가 되는 것이니, 이는 영주구(伶州鳩)의 대균세균(大均細均)·삼기육평(三紀六平)의 옛법을 따랐다.
『역경(易經)』에 관한 학설로는 역에는 삼오(三奧)가 있다. 하나는 추이(推移)요, 둘은 효변(爻變)이요, 셋은 호체(互體)다. 12벽괘(十二?卦)는 4시(四時)를 형상하였고 중부(中孚)와 소과(小過)는 양윤(兩閏)을 형상하며 여기에서 추이(推移)하여 50연괘(五十衍卦)를 만들어내는데 그걸 추이라고 한다. 건초구(乾初九)는 건(乾)의 후(?)다. 손(巽)은 입복(入伏)이기 때문에 잠룡(潛龍)이라 한다. 건구사(乾九四)란 건(乾)의 소축(小畜)이다. 손(巽)이 고(股)가 된다 함은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기 때문에 혹약(或躍)이라 한다. 곤초육(坤初六)은 곤(坤)의 복(復)이다. 일음(一陰)이 비로소 합해져 장차 순건(純乾)이 되고 건(乾)이 빙(氷)이 되기 때문에 이상견빙지(履霜堅氷至)가 되니 이를 효변(爻變)이라 한다. 태(泰)의 양호(兩互)는 곧 귀매(歸妹)가 되고 사효(四爻)의 움직임이 또 임괘(臨卦)를 이루기 때문에 펄펄 날아도 모두 실재를 잃지 않는다. 비(否)의 양호(兩互)는 곧 점괘(漸卦)가 되고 오효(五爻)의 움직임이 또 중간(重艮)을 이루기 때문에 기망기망(其亡其亡)이 상(桑)에 걸렸다 한다. 온갖 물건이 찬덕(撰德)함은 모두 호상(互象)에서 취하는데 이것을 호체(互體)라 한다. 삼오(三奧)가 갖추어 있어 물상(物象)이 묘합(妙合)하고 삼오가 갖추어 있어 오르고 내리며 가고 오며 줄어지고 커나가며 생겨나고 없어져버리게 되고 만가지로 움직여지는데 성인(聖人)이 그러한 모습을 글에다 나타내 놓은 게 역(易)이다. 팔(八)로써 팔(八)을 탄다 함은 변화를 모른 채 막혀 있는 이론이다.
시괘(蓍卦)의 수(數)를 삼천양지(參天兩地)라 하고 일천이지(一天二地)라 하면 소양칠(少陽七)이다. 일지이천(一地二天)은 소음팔(少陰八)이다. 삼천(三天)은 노양구(老陽九)가 되고 삼지(三地)는 노음육(老陰六)이다. 노(老)는 변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구륙(九六)을 효(爻)라 하며 육화(六?)은효(爻)가 아니며 육획의 움직임이 효가 되는 것이다. 반대(反對)라고 함은 역(易)의 차례다. 그 반대(反對)라는 것이 없으면 또 도체(倒體)를 취하기 때문에 대과전(大過顚)이라 한다. 전이(顚?)란 길(吉)이다. 감(坎)의 육삼(六三)이 손입(巽入)이 되고 이(離)의 초구(初九)가 진도(震倒)가 된다. 역(易)에는 역수(逆數)가 있고 본래 순수(順數)는 없다. 선천(先天)의 괘(卦) 위치는 이치로 보아 주자(朱子)가 왕자합(王子合)에게 답한 글 중에서 나타낸 것과는 합치되지 않는다.
『춘추(春秋)』에 관한 학설로는 제후(諸侯)들이 ‘왕정(王正)’을 받드는 것은 예(禮)이다. 비록 주(周)나라가 쇠약해졌다 해도 마땅히 ‘왕정(王正)’을 내걸었다. 또 그 당시에 열국(列國)에서 하정(夏正)을 참작해서 썼으므로 여름은 온(溫)의 보리에서 취한 거고 가을은 주(周)나라의 벼에서 취한 것이다. 반드시 왕정월(王正月)이라고 써서 그 자월(子月)이 됨을 밝혀둔 것이다. 한 글자의 포(褒)를 더러 선(善)과 같다고 하나 용례(用例)는 다르고, 한 글자의 폄(貶)을 악(惡)과 다르다고 하나 용례는 모두 같은 걸로 되어 있다. 하오(夏五)와 같은 것은 역사책에 빠진 것으로 여겨 선유(先儒)처럼 잘못 해석할 필요는 없다. 좌씨책서(左氏策書)가 춘추(春秋)의 전(傳)이 아니라 함은 그러한 경전을 해석해 놓은 한유(漢儒)들이 없애고 더해 놓음과 같지 않다고 하여 공씨(公氏)나 곡씨(穀氏) 것까지 없애버려서는 안된다. 상제(上帝)를 교제(郊祭)하는 것은 그 제사를 다섯 장소에서 지낸다. 상제(上帝)란 한나라 유자들이 진(秦)나라 사람들의 잘못을 답습한 것이다. 체(?)란 오제(五帝)에 대한 제사인데 주례(周禮)에는 체(?)라는 말이 없다. 오제에게 제사지낸다 함이 체(?)다. 그렇기 때문에 사보(射父)를 보면 자주 체교(?郊)의 일을 쭉 이어서 말해 놓은 것이다. 동지(冬至)에 원구(?丘)의 제사를 지낸다 함은 별도의 회례(?禮)이며 교천(郊天)의 제사는 아니다. 춘추시대에 상기(喪期)가 불변(不變)한다 함은 두예(杜豫)가 양암(諒闇)의 뜻을 세우면서 춘추시대의 단상(短喪)의 잘못됨을 꾸며놓았는데 따를 수 없는 이론이다.
『논어(論語)』에 대한 학설은 새로운 주장이 더욱 많다. 효제(孝弟)란 바로 인(仁)이다. 인(仁)이란 총괄해서 하는 말이고 효제(孝弟)란 분할해서 하는 말이다. 인이란 효제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효제란 인(仁)을 하는 근본이다”라고 했다. “북신(北辰)이 제 자리를 잡았다”라고 함은 남극(南極)으로 마주 서게 한 것으로, 임금이 마음을 바르게 갖는 형상을 말함이다. 임금의 마음이 바르게 되면 백관(百官)이나 만민(萬民)이 더불어 함께 운화(運化)가 되는 것이니, 그래서 “모든 별들이 함께 돈다”라고 했다. ‘共’자를 향(向)이라 함은 무의미한 말이다.
“붉고 또 뿔이 난 것”이란 소[牛]의 천품(賤品)이다. 소란 검푸른 색깔이어야 값이 나가고 갓낳은 송아지라야 귀하게 여기고 뿔이 네치[四寸] 정도 되는 거라야 귀중하게 여긴다. 붉은 빛깔에 뿔까지 나 있다면 산천(山川)의 제(祭)로 쓸 수밖에 딴 도리가 없다. 중궁(仲弓)의 어짊은 백우(伯牛)보다 못했기 때문에 폄하(貶下)하면서도 그 존재의의를 인정한 것이다.
곡삭(告朔)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곡삭(告朔)이요 둘은 제삭(祭朔)이며 셋은 시삭(視朔)이다. “네번 ‘시삭’을 하지 못했다”고 했지만 제(祭)는 일찍이 궐한 적이 없었다. “네번 시삭을 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모함을 해서 백년 동안 시삭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치에 맞지 않는다. 묘(廟)에서 제사지내는 생(牲)은 희(?)라고 부르지 않으니 희란 곧 빈희(賓?)다. 주나라 왕실이 쇠미해져서 제후의 나라에다 곡삭(告朔)을 반포하는 왕의 사신이 오지 않기 때문에 자공(子貢)이 그 접대용으로 마련한 양을 버리려 했었다.
동주(東周)란 동로(東魯)의 은어(隱語)였다. 공산불요(公山弗擾)가 계씨(季氏)를 배반하고 공실(公室)을 부축하려고 했기 때문에 공자가 공실을 옮겨 비읍(費邑)을 근거지로 하여 동로(東魯)로 하려 했으니 동주와 같은 것이다.
승당(升堂)이란 당상(堂上)의 음악이니 아(雅)와 송(頌)이 바로 그것이다. 입실(入室)이란 방중(房中)의 음악이니 이남(二南)이 그것이다. 자로(子路)의 비파(瑟)는 아와 송은 되어도 이남은 되지 못하기 때문에 공자가 깨우쳐 준 것이다. 공자가 남자(南子)를 만나서 태자 괴외(??)를 불러다 등용토록 권했던 것은 어머니와 아들의 은정을 오롯이 하고자 함이었다.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지 못하게 했다면 하늘이 싫어했을 것이다”라고 했었다. 대부(大夫)가 소군(小君)을 만나보는 것은 당시에 으레 있었던 예(禮)였다.
상지(上智)와 하우(下愚)는 성품(性品)을 구별해서 하는 이름이 아니다. 착함을 지키려는 사람은 악한 사람과 아무리 어울려도 습성(習性)이 옮겨지지 않기 때문에 상지(上智)라고 하는 것이며, 악한 일에 안주해버리는 사람은 아무리 착한 사람과 어울려도 습성이 옮겨지지 않기 때문에 하우(下愚)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에 사람의 성품에 본래부터 바꿀 수 없는 품성이 있다고 한다면, 주공(周公)이 말한 “성인(聖人)이라도 염(念)하지 아니하면 광(狂)이 되고 광(狂)이라도 능히 염(念)하면 성인이 된다”라고 한 것은 성품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한 말이 되어버릴 것이다.
영무자(?武子)가 처음에 위 성공(衛成公)을 좇아서 온몸이 젖고 진흙탕에 발이 빠지는 험난과 어려움을 도맡아 했는데 이는 자기 몸을 잊고 순국(殉國)하려던 우충(愚忠)이었다. 성공(成公)이 본국으로 돌아옴에 당해서는 공달(孔達)이 독권을 부리자 그 권세를 피하여 가버렸는데 그건 몸을 편안히 해서 집안을 보호하려던 지혜였다. 몸을 편안히 하는 지혜야 따를 수도 있지만, 순국의 우직함은 따르기 힘든다고 한 말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도회(韜晦)함이 우직한 거라고 해버린다면 임금과 함께 어려운 시대를 구제할 수 있는 사람이 없게 되어버리고 만다.
『맹자(孟子)』에 대한 학설로는 천자의 신하가 천승(千乘)을 차지한다고 하면 삼공육경(三公六卿)이 각각 천승을 차지하여 나머지는 천승뿐이다. 천자와 구신(九臣)이 각각 천승을 가지면 십경(十卿)이 녹(祿)을 받지 못한다. 소재(小宰)나 소사도(小司徒) 이하의 관리들은 한치의 녹도 혜택받지 못하게 되어버릴 것이다. 만승(萬乘)이란 진(晉)이나 제(齊)와 같은 나라이며, 한(韓)·위(魏)·조(趙)와 전(田)씨 등은 천승의 집으로 임금을 죽이고 차지한 것이다. 맹자는 확실히 연(燕)·제(齊)를 가리켜 만승이라고 했던 것이다. “사람을 죽이기를 즐기지 않는다”란 곧 사람을 죽이지 않는 정치를 한다는 말로 흉년에 구휼(救恤)하는 것 등을 말하는 것이지, 한고조(漢高祖)나 송태조(宋太祖)가 사람 죽이기를 즐겨하지 않았던 경우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후씨(夏后氏)는 오십묘(五十畝)이고 은인(殷人)은 칠십묘(七十畝)라 함은 참(塹)을 막고 험악한 등성이를 평평하게 해서 정전(井田)으로 바꿔 만든 것은 아니다.
기(氣)란 의(義)와 도(道)에 짝하는 것으로 의와 도가 없다면 기는 시들해져버린다. 이는 여자약(呂子約)이나 이이(李珥)가 가르쳐 준 뜻이다.
성(性)이란 기호(嗜好)다. 형구(形軀)의 기호도 있고 영지(靈知)의 기호도 있는데 똑같이 성(性)이다. 때문에 소고(召誥)에 ‘절성(節性)’이란 말이 있고 왕제(王制)에는 ‘절민성(節民性)’이라 했으며, 맹자도 ‘동심인성(動心忍性)’이란 말을 썼고, 또 이목구체(耳目口體)의 기호가 성(性)이라 했으니 이들은 형구(形軀)의 기호다. 천명(天命)의 성(性), 성과 천도(天道), 성선(性善)·진성(盡性)의 성은 영지(靈知)의 기호다.
본연의 성(本然之性)은 원래 불서(佛書)에서 나온 것으로 우리 유교의 천명이나 성과는 서로 빙탄(氷炭)이 되어 함께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만물이 모두 나의 마음속에 구비되어 있다” 함은 힘써서 서(恕)를 행하고 인(仁)을 구하라는 계율이다. 사람의 자식이 되고 사람의 아버지, 사람의 형제, 부부나 빈주(賓主)의 도리라든가, 경례(經禮)의 300가지, 곡례(曲禮)의 3천 가지 모든 원리가 다 나의 마음속에 구비되어 있으니 자기 몸을 반성하여 참다워진다면 극기복례(克己復禮)가 되고 천하가 귀인(歸仁)한다 함이지 만물일체(萬物一體)니, 만법귀일(萬法歸一)의 의미가 아니다. 맹자의 성에 대하여 논할 때 아울러 이목구체에 대하여 언급해서 이(理)만 논하고 기(氣)를 논하지 않는 폐단이 없었다. 왕망(王莽)이나 조조(曹操)는 기질(氣質)이 대체로 청(淸)했고, 주발(周勃)·석분(石奮)은 기질이 대체로 탁(濁)했다는 것인가. 선과 악이란 힘써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지 기질에 달려 있는 게 아니다.
『중용(中庸)』에 대한 학설로는 순(舜)이 전악(典樂)에게 명령하여 주자(?子)를 가르치는데, 직(直)하되 온(溫)하며 관(寬)하되 율(栗)하며 강(剛)하되 학(虐)이 없으며 간(簡)하되 오(傲)가 없게 하도록 했는데, 주례에 대사악(大司樂)이 국자(國子)를 가르칠 때 중화(中和)와 지용(祗庸)으로 한 것은 바로 그 유법(遺法)이었다. 고요(皐陶)는 구덕(九德)으로써 사람을 등용하였고 주공(周公)이 입정(立政)에서 “구덕의 행실에 침순(?恂)하게 가르친다”라고 한 것도 그 유법이다. 홍범(洪範)에 “고(高)하고 명(明)함이란 유(柔)로 극(克)함이며 침(沈)하고 잠(潛)함이란 강(剛)으로 극(克)함이다”라 했음은 모두 중화(中和)의 뜻이다. “진실로 그 중(中)을 붙잡다”라 함은 이러한 모든 말들의 대강설(大綱說)이다. 용(庸)이란 상구부단(常久不斷)의 덕(德)이다. “도(道)란 잠시도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라 함도 용(庸)이다. “일반 백성이 할 사람 적은지 오래다”라 함도 용(庸)이다. “여러 달 지키지 못한다” 함도 용(庸)이다. “중간에 그만두어버리는 자는 나도 어찌하지 못한다” 함도 용(庸)이다. “용덕(庸德)의 행(行)과 용언(庸言)의 근(謹)”이라 함도 용(庸)이다. ‘지성무식(至誠無息)’‘불식즉구(不息則久)’도 용(庸)이다. “문왕(文王)의 순역불이(純亦不已)”도 용(庸)이다. “회(回)는 석 달 동안 인(仁)에 위반되지 않으며 그 밖의 사람은 날과 달로 이른다” 함도 용(庸)이다. “능히 하루가 다하도록 임금의 교도(敎導)를 힘쓰지 아니함”도 용이다. 고요(皐陶)가 구덕(九德)을 들면서 ‘창궐유상(彰闕有常)’이라고 결론을 맺었고 입정(立政)의 구덕의 계(戒)에서도 부연하기를 “오직 상덕(常德)이라”고 했었다. 역(易)에서는 “능히 중(中)에 오래함이다” 했다. 이 모두 중용의 뜻이니 중(中)을 지키고 능히 용(庸)하면 곧 성인일 뿐이다.
부도(不睹)란 내가 보지 못하는것이며 불문(不聞)이란 내가 듣지 못한다 함이다. 하늘의 일에서 은(隱)이란 하늘의 체(體)이며 미(微)란 하늘의 적(跡)이다. “은(隱)해서 아무리 숨겨도 안 보일 리 없고 미(微)해서 아무리 미세해도 나타나지 않음이 없다.” 때문에 공구계신(恐懼戒愼)하게 되면 하늘이 알지 못한다고 생각?
부도(不睹)란 내가 보지 못하는것이며 불문(不聞)이란 내가 듣지 못한다 함이다. 하늘의 일에서 은(隱)이란 하늘의 체(體)이며 미(微)란 하늘의 적(跡)이다. “은(隱)해서 아무리 숨겨도 안 보일 리 없고 미(微)해서 아무리 미세해도 나타나지 않음이 없다.” 때문에 공구계신(恐懼戒愼)하게 되면 하늘이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리껴 함이 없게 된다고 했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의 미발(未發)이란 평상시에 으레 있는 마음 상태이고 심지사려(心之思慮)의 미발(未發)이 아니다. 고획함정(??陷?)이란 유사(有司)의 형화(刑禍)가 아니다.
색은(索隱)이란 이유없이 벼슬하지 않고 백이(伯夷)나 태백(泰伯)처럼 인륜(人倫)의 변란을 맞아 그러하던 것이 아니다. ‘개이지(改而止)’란 가(柯)를 견주어 보아 길면 고치고 짧아도 고치고 커도 고치고 작아도 고쳐서 본래의 가(柯)와 같게 한 뒤에야 멈춘다 함이다. 사람의 강서(强恕)도 이와 같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개과(改過)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은 도경(道經)에서 나온 이야기이고 유일(唯一)과 유정(唯精)은 순자(荀子)에게서 나온 말이기 때문에 의미를 서로 연결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도(道)와 인(人)의 사이란 그 가운데를 붙잡을 수 없으며 하나인 이후에 정(精)이니 둘을 붙잡아 가지고 운용하는 것이 아니다.
『대학(大學)』에 대한 학설로는 대학이란 주자(朱子)와 국자(國子)의 학궁(學宮)이다. 주자나 국자는 벼슬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책임이 있기 때문에 치평(治平)의 술(術)을 가르쳤다. 필부(匹夫)나 서민(庶民), 일반 백성의 자식들이 함께 어울리는 게 아니었다. 명덕(明德)은 효제자(孝弟慈)이지 사람의 영명(靈明)이 아니다. 격물(格物)이란 물(物)에는 본말(本末)이 있다 할 때의 물을 격(格)하는 것이다. 치지(致知)란 먼저 하고 뒤에 할 바를 지(知)한다 할 때의 지(知)를 치(致)함이다. 성(誠)이란 물(物)의 종시(終始)이기 때문에 성의(誠意)가 나아가 제일 위에 놓여진 것이다. 정심(正心)이란 수신(修身)하는 것인데 몸에 분치(忿?)가 있으면 고쳐지지 않음을 말한다. 노노(老老)란 태학(太學)에서 양로(養老)함이다. 장장(長長)이란 태학에서 세자(世子)의 나이 순서대로 앉힘이다. 휼고(恤孤)란 태학에서 고아들을 위해서 향연을 베풂이다. 일반 백성의 욕심은 부(富)와 귀(貴)다. 군자(君子)가 조정에 있을 때에는 귀를 바라서이고 소인(小人)이 야(野)에 있을 때에는 부를 바라기 때문에 사람 등용하는 일이 공정치 못하고 어진이를 어진이로 모시지 않고 친한 사람을 친하게 여기지 않으면 군자는 떠나가고 재산을 모으는 일에 절제가 없게 되며 즐거움을 즐거움으로 해주지 않고 이익을 이익으로 해주지 않으면 소인은 반기를 들어 나라는 망해버리기 때문에 『대학』의 마지막 편에서는 이 두 가지를 신신당부하였다.
선왕(先王)의 도(道)에 대한 연구를 종합해 보면 마음의 허령(虛靈)은 하늘에서 받은 거지만 본연(本然)이니, 무시(無始)니, 순선(純善)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마음이 생각(思)을 주관(主官)함은 “반하여 미발(未發) 이전의 기상을 살핀다”라고 해서는 마음을 닦는 일이 되지 못한다.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 것은 재(才)이며, 선하기는 어렵고 악하기는 쉬운 것은 세(勢)이다. 선을 즐겨하고 악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성(性)이니, 이 성을 따르며 위반됨이 없게 한다면 도(道)에 이를 수 있다. 때문에 성은 선하다는 것이다. 어질 인(仁)자는 두 사람을 뜻한다. 효(孝)로 아버지를 섬기면 인(仁)이다. 형을 공순하게 섬기면 인이다. 충(忠)으로 임금을 섬기면 인이다. 벗과 믿음으로 사귀면 인이다. 자애롭게 백성을 다스리면 인이다. 인을 가지고 동방의 물을 낳는 이치(理)니, 천지(天地)의 지공(至公)한 마음이니 해서는 인의 설명이 되지 않는다. 강서(强恕)로 행함이 인을 구하는 데에는 가장 가까운 길이어서 증자(曾子)가 도(道)를 배울 때 일관(一貫)을 공자가 가르쳐 주었다. 자공(子貢)이 도(道)를 물을 때에도 일언(一言:恕)으로써 가르쳐 주었다. 경례(經禮)의 300, 곡례(曲禮)의 3천을 꿰뚫는 것은 서(恕)다. 그래서 “인을 함이 자기로 말미암는다”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간다”는 말이야말로 유교(儒敎)의 바른 취지다. 성(誠)이란 서(恕)에 참되어야 함이요, 경(敬)이란 예로 돌아감이다. 인(仁)이 되게끔 해주는 거야말로 성(誠)과 경(敬)이다. 그래서 두려워하고 경계하며 삼가하며 자기 가슴을 비추고 있는 듯 상제(上帝)를 섬기는 것은 인이 될 수 있는 것이지만 헛되이 태극(太極)만을 높이고 이(理)를 천(天)이라 하면 인이 될 수가 없고 하늘을 섬기는 데 돌아가고 말 뿐이다.
처음에 내가 역(易)을 탐색하고 예(禮)를 연구하여, 다른 여러 경서에 손을 대면서 하나의 깨달음이 신명(神明)이 통하고 저절로 알아지는 듯하여 누구에게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많이 있었다. 나의 형 약전(若銓)이 흑산도 바다 가운데 계시며 한편의 책이 완성될 때마다 보시고는 “네가 이런 정도에까지 도달한 것은 너 스스로도 알지 못할 것이다. 오호라! 도(道)가 잃어버린 지 천년에 백가지로 가리어서 덮여져 있었는데 헤쳐내고 분해해내서 그 가리어 있음을 확 열어젖혔으니 어찌 너의 힘만으로 해낸 것이겠느냐”라고 해주셨다. 『시경』에 “하늘이 백성을 깨우치는 것은 훈(塤)을 부는 듯, 지(?)를 부는 듯하도다”라고 했거니와 성(性)이 기호(嗜好)임을 알아냈고 인(仁)이란 효제(孝弟)임도 알아냈으며 서(恕)란 인술(仁術)임도 알고 하늘의 강감(降監)이 있음을 알아, 경계하고 공경하며 부지런히 힘쓰고 힘써 장차 늙음이 이를 것을 잊은 것은 하늘이 나에게 내려주신 복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또 시(詩) 작품집으로 18권이 있는데 깎아내서 6권이 되게 했고, 잡문(雜文) 전편 36권, 후편 24권이 있다. 또 잡찬(雜纂)의 책은 종류가 각각 다른데 『경세유표(經世遺表)』 48권은 미완성이고, 『목민심서(牧民心書)』 48권, 『흠흠신서(欽欽新書)』 30권, 『아방비어고(我邦備禦考)』 30권은 미완성이며,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10권, 『전례고(典禮考)』 2권, 『대동수경(大東水經)』 2권, 『소학주천(小學珠串)』 3권, 『아언각비(雅言覺非)』 3권, 『마과회통(麻科會通)』 12권, 『의령(醫零)』 1권을 합해서 문집(文集)으로 하면 도합 260여 권이 된다.
『경세유표』는 어떤 내용인가. 관제(官制)·군현제(郡縣制)·전제(田制)·부역(賦役)·공시(貢市)·창저(倉儲)·군제(軍制)·과제(科制)·해세(海稅)·상세(商稅)·마정(馬政)·선법(船法) 등 나라를 경영하는 제반 제도에 대해서 현재의 실행 가능 여부에 구애되지 않고 경(經)을 세우고 기(紀)를 나열하여 우리의 구방(舊邦)을 새롭게 개혁해 보려는 생각에서 저술한 것이다.
『목민심서』는 어떤 내용인가. 현재의 법을 토대로 해서 우리 백성을 다스려 보자는 것이다. 율기(律己)·봉공(奉公)·애민(愛民)의 세 가지를 기(紀)로 삼았고,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을 여섯 가지 전(典)으로 만들어 진황(賑荒) 한 단원으로 끝맺었으며 하나의 조목마다 6조(條)를 포함케 하였다. 고금의 이론을 찾아냈고 간위(奸僞)를 열어젖혀 목민관(牧民官)에게 주어 백성 한 사람이라도 그 혜택을 입을 수 있게 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마음씀이었다.
『흠흠신서』는 어떤 내용인가.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옥사(獄事)에서 다스리는 사람이 더러 알지 못하는 게 있기에 경사(經史)로써 근본을 삼고 비의(批議)로써 보강하고 공안(公案)으로써 증거가 되게 하였으며, 모든 것을 상정(商訂)하여 옥사를 관리하는 사람들에게 주어 백성들의 억울함이 없기를 바라는 게 나의 뜻이었다.
육경사서(六經四書)로써 자기 몸을 닦게 하고 일표이서(一表二書)로써 천하 국가를 다스릴 수 있게 하고자 함이었으니, 본(本)과 말(末)이 구비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알아주는 사람은 적고, 꾸짖는 사람만 많다면 천명(天命)이 허락해 주지를 않는 것으로 여겨 한 무더기 불 속에 처넣어 태워버려도 괜찮다.
어머니는 윤씨(尹氏)로 그분의 아버지는 덕렬(德烈), 조부는 두서(斗緖), 증조는 이석(爾錫)으로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였다. 아내는 풍산 홍씨(豊山洪氏), 아버지는 화보(和輔)로 승정원 동부승지, 함경북도 절도사였으며 조부는 중후(重厚)로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였고 증조는 만기(萬紀)로 승정원 우부승지였다. 홍씨가 6남 3녀를 낳았으나 어려서 죽은 애들이 3분의 2였다. 큰아들은 학연(學淵), 둘째는 학유(學游)며, 딸 하나는 윤창모(尹昌謨)에게 시집갔다. 학연의 아들은 대림(大林)이다.
나는 건륭(乾隆) 임오년(1762)에 태어나 지금 도광(道光)의 임오(1822)를 만났으니 갑자(甲子)가 한 바퀴 돈 60년의 돌이다. 뭐로 보더라도 죄를 회개할 햇수다. 수습하여 결론을 맺고 한평생을 다시 돌려 내가 금년부터 정밀하게 몸을 닦아 실천한다면 명명(明命)을 살펴서 나머지 인생을 끝마칠 것이다. 그리고는 집 뒤란의 자(子)의 방향 쪽에다 널 들어갈 구덩이의 모형을 그어놓고 나의 평생의 언행(言行)을 대략 기록하여 무덤 속에 넣을 묘지(墓誌)로 삼겠다.
명(銘)에 이르기를
네가 너의 착함을 기록했음이
여러 장이 되는구려.
너의 감추어진 사실을 기록했기에
더 이상의 죄악은 없겠도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사서(四書)·육경(六經)을 안다”라고 했으나
그 행할 것을 생각해 보면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
너야 널리널리 명예를 날리고 싶겠지만
찬양이야 할 게 없다.
몸소 행하여 증명시켜 주어야만
널리 퍼지고 이름이 나게 된다.
너의 분운(紛?)함을 거두어들이고
너의 창광(猖狂)을 거두어들여서
힘써 밝게 하늘을 섬긴다면
마침내 경사(慶事)가 있으리라.
補 遺
경술년(1790) 겨울에 임금의 명령에 따라 상의원(尙衣院)에서 『논어』를 읽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각(內閣)의 아전이 와서는 소매 속에서 종이쪽지를 꺼내 보여 말하기를 “이건 내일 강독(講讀)할 『논어』의 장(章)입니다”라고 했다. 내가 깜짝 놀라며 “이런 걸 어떻게 강독할 사람이 얻어다 엿볼 수 있단 말인가”라고 했더니 하인배가 “염려할 것 없습니다. 임금께서 지시하신 겁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그렇지만 미리 엿보는 일은 할 수 없다. 마땅히 『논어』 전편을 읽어보리라” 하니 그 아전은 웃으면서 돌아갔다. 그 다음날 경연(經筵)에 나가니 임금이 각신(閣臣)에게 말씀하기를 “정약용은 별도로 다른 곳을 하도록 하라”고 했다. 강(講)을 틀리지 않고 끝내자 임금이 웃으시며 “과연 전편을 읽었구나”라고 하셨다.
며칠 후에 밤은 깊었는데 눈과 바람으로 몹시 추웠다. 내전(內殿)으로부터 글 읽는 여러 신하들에게 음식을 보내왔다. 나는 상의원으로부터 내각으로 달려왔는데 어둠이 칠흑 같아서 담장에 스쳐서 광대뼈 있는 부분이 긁혔다. 다음날 춘당대(春塘臺)에 들어가 임금을 모셨는데 임금께서 광대뼈에 있는 납지를 보시고는 “납지가 어찌해 있는 것인가. 간밤에 술을 너무 많이 먹고 취해서 넘어진 게 아닌가”라 하시기에 답하기를 “감히 과음하진 않았습니다. 어둠이 칠흑 같아서 그랬습니다”라고 했더니, 임금이 “옛날에도 취학사(醉學士)와 전학사(顚學士)가 있다는데 취하지 않았다면 넘어진 학사로군”이라고 하셨다.
계축년(1793) 무렵 대정(大政) 며칠 전에 임금이 채제공에게 밀유(密諭)로 묻기를 “남인 중에서 대통(臺通)에 급한 사람이 누구냐”고 하고 아울러 이가환·이익운·정약용 등에게 각각 자기의 소견을 피력하게 하도록 했다 한다. 채제공과 두 이씨(가환·익운)가 함께 말하기를 “권심언(權心彦)이 가장 급합니다”라고 했다. 무릇 백년 이래로 남인들이 오랫동안 벼슬길이 막혀 있어도 한 차례 대통이 있을 때마다 겨우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한 거였다. 내가 소록(疏錄)을 작성하여 28명을 적어넣고 자세하게 그들의 세벌(世閥)과 과명(科名) 및 문학과 정사(政事)의 우열(優劣)을 밝혀서 올리면서 말하기를 “이 28명은 시급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누구를 먼저 하고 누구를 뒤에 할 것인가는 오직 임금의 판단 여하에 있으니 신은 그것까지 관여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했더니, 며칠 후 대정날에 별도로 전관(銓官:吏曹判書 李文源―原註)에게 유시하여 소록에 들어 있는 사람 중 8명이 대통이 되게 하였다. 며칠 뒤에 또다시 대통이 되고 몇 년이 지나지 않는 사이에 거의 다 시행되었다.
을묘년(1795) 3월에 임금이 용산(龍山) 읍청루(?淸樓)에 납시어 강화도에 있는 왕손 인(?)을 불러다가 연회를 베풀었다. 금군(禁軍)들이 그 북쪽을 지키기를 철벽처럼 하여 대신(大臣)이나 근신(近臣)들이 모두 들어갈 수 없었다. 연회가 끝나자 특별히 누(樓) 위로 나를 불러다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시켜 주셨다. 궁궐로 돌아오자 깊은 밤에 나를 부르셔 가보니 내 앞에 갑자기 머리 위로부터 땡그렁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게 있어 무언가 보았더니 상방검(尙方劍)이었다. 유시하시기를 “이가환·이익운 등이 속습(俗習)으로써 강화도에 귀양가 있는 사람(은언군)을 성토한다는데 그들께 상소하여 자수(自首)토록 하라고 하시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칼로써 두 사람의 목을 베겠다”라고 하셨다. 나는 임금의 유시가 지당하며 거역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 물러나와 상소하도록 하여 일이 무사하게 되었다.
무인년(1818) 가을에 내가 살아서 돌아왔는데 목태석(睦台錫)이 지독한 내용으로 상소하였다. 나는 사람을 시켜서 말해 주기를 “너의 할아버지가 그 당시에 나에 대하여 논할 때에도 ‘처지로 보나 문장으로 보나 어떤 벼슬인들 못하겠나, 들어와서 임금 앞에 성실한 말을 하고 나가서는 여전히 추종하여 따라다니며 스스로 잘못을 고칠 생각을 않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너는 지금 웬 독살을 이처럼 부리느냐?”라고 했었다. 혹자는 말하기를 “그건 그 집안의 가계(家計)로세”라고 하기도 했다. 이어서 영남 사람 신석림(辛碩林)이 상소로 목태석을 공격했던 일이 있는데 이태순(李泰淳)에게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주례(周禮)』를 연구하여 새로운 뜻을 많이 세웠다. 육향(六鄕)에 대한 해석은, 육향이란 왕성(王城)의 안에 있다. 장인(匠人)이 나라의 도시계획을 이룩할 때에 구구(九區)로 만들어 왕궁(王宮)은 가장 가운데 위치하게 하였고 전면은 조정(朝廷)이고 후면은 저자(市)이고 좌와 우는 육향(六鄕)이다. 양양상향(兩兩相嚮)이라 할 때 향(鄕)이란 향(嚮)이다. 하관(夏官)에서 사람 수를 헤아려 도(都)와 비(鄙)를 만드는데 모두 구주(九州)로 만들었다. 기자(箕子)가 평양성(平壤城)을 만들 때에도 성(城) 안에다 정(井)의 모양으로 구획 정리를 했던 것은 다 그런 법이었다. 정현(鄭玄)은 육향이 교외(郊外)에 있다 했는데, “ 향삼물(鄕三物)로 만민을 가르친다”라는 것은 모두 시행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승지 신작(申綽)은 정현의 해석을 옳다고 고수하자 나는 왕복 서너 차례의 편지를 하면서 그렇지 않음을 밝혀 주었다.
직각(直閣) 김매순(金邁淳)이 나의 『매씨상서평(梅氏尙書平)』을 보고는 평(評)하기를 “미묘한 부분을 건드려서 그윽한 진리를 밝혀낸 것은 비위(飛衛)가 이[蝨]를 보고도 적중시킨 것과 같고 헝클어져 있음을 추려내어 견고히 굳어 있는 것을 찢어냈음은 포정(?丁)이 쇠고기를 재단해냈음과 같도다. 독한 손으로 간사함을 파헤쳐냈음은 상군(商君)이 위수(渭水)를 통치하던 것 같고 피흘리는 정성으로 올바름을 지키려 했음은 변화(卞和)가 형산(荊山)에서 울부짖던 거로다. 한편으로는 공벽(孔壁)의 어지러움을 올바르게 밝혀낸 원훈(元勳)이 되지만 한편으로는 주자(朱子)를 업신여기는 일을 막아낸 경신(勁臣)이다. 유림(儒林)의 대업(大業)이 이보다 더 클 수가 없도다. 아득하게 먼 천년의 뒤에 와서 온갖 잡초가 우거져 있는 구이(九夷)의 가운데서 이처럼의 뛰어나고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고 말하지 않으랴”라고 하였다.
自撰墓誌銘(集中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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