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김대건, 최양업 신부 관련 사적지
1. 이국 땅의 우리 사적지
이미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과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는 최초의 한국인 신학생이요 사제였으며, 조선인 중에서는 가장 먼저 서양의 새로운 학문을 직접 배운 사람들이었다. 또 그들은 외국 땅에 이르기까지 가장 멀리,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고난의 여행을 경험하였다. 이처럼 그들이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바로 이땅의 복음을 지켜 나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고, 그들로서는 이것이 곧 억압받는 민초(民草)들과 조선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1836년 초부터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서울 후동(后洞)의 모방 신부 댁에서 라틴어를 배우던 최양업과 김대건, 그리고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그해 12월 3일(음력 10월 25일)에 모방 신부 앞에서 성서에 손을 얹고 신학생으로서 선서를 하였다. 모방 신부는 당시 선발된 지 4-5개월밖에 되지 않은 김대건은 제외하려고 하였지만,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으로 생각하여 마지막에 그를 포함시켰다. 조선 신학생들은 이어 중국으로 돌아가는 여항덕(余恒德, 파치피코) 곧 유방제(劉方濟) 신부와 함께 조선 밀사들에게 안내를 받아 중국의 국경 관문인 봉황성의 책문(柵門)으로 떠났다. 이에 앞서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샤스탕 신부는 약속대로 12월 25일에 이미 책문에 도착하여 그들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의 신학생 일행이 압록강을 건너 책문에 도착한 것은 12월 28일이었다. 이후 그들은 샤스탕 신부가 정해 준 2명의 중국 밀사들과 함께 대륙을 횡단하여 1837년 6월 7일(음력 5월 5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당시 그곳에 있던 파리 외방 전교회의 극동 대표 르그레즈와(Legregeois) 신부는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들의 교육을 부탁받고는 대표부 안에 임시로 '조선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 이로써 마카오 대표부는 비록 중국 땅에 있었지만, 최초의 조선 신학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사실, 모방 신부는 조선에 입국하기 전에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와 의논하여 '요동 신학교'의 설립을 계획했었는데, 라틴어 공부와 박해의 위험 때문에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이 계획을 취소하였다.
2) 이후 김대건과 최양업은 1842년에 프랑스 군함을 타고 마카오를 떠날 때까지 4년여를 이곳에서 공부하게 되었는데, 그 동안 두 차례의 큰 변화를 겪어야만 하였으니, 동료 최방제의 죽음과 마닐라로의 피신이 그것이다.
최방제는 마카오에 도착한 지 얼마 안되어 위열병에 걸렸다. 그리고 1837년 11월 27일에는 친구들의 슬픔을 뒤로 한 채 십자고상에 입맞춤을 하면서 죽고 말았다. 이어 1839년에 김대건과 최양업은 광동과 마카오에서 아편 문제로 소요가 일어나자, 몇몇 선교사들과 함께 4월 6일 마카오를 떠나 소서양(小西洋)으로 불리던 마닐라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도미니코 수도회의 도움을 받아 마닐라에서 약 70km 떨어진 수도회의 '롤롬보이'(Lolomboy) 농장으로 가서 계속 수업을 받게 되었다.
3) 그들이 마카오 신학교로 귀환하기 전까지 이곳에 체류한 것은 5월 3일부터 약 6개월 반이었다.
롤롬보이에 있는 동안 조선 신학생들은 조선의 밀사들인 조신철(가롤로)과 유진길(아우구스티노)이 북경에서 보낸 1839년 3월(3월 10일 또는 3월 11일)의 서한 1통을 받고 기해박해(己亥迫害) 이전의 조선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이 때 최양업은 부친 최경환(프란치스코)에게 편지를 썼는데, 이 편지는 훗날 조신철을 통해 전달되었다.
사실 마카오 신학교는 따로 교사(校舍)가 갖추어진 것도 아니었고, 전담 교수가 임명된 것도 아니었다. 초대 교장 칼르리(Callery) 신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임지로 가기 전에 잠시 머물던 중국 선교사들이나 대표부의 신부들이 겸하여 신학생들을 지도하였다. 따라서 신학생들의 거처와 교실은 대표부 안에 있던 작은 방에 불과하였다. 그렇지만 이곳은 틀림없는 조선 신학교였고, 김대건과 최양업은 여기에서 배운 신학 교육을 바탕으로 훗날 사제품에 오를 수 있었다. 현재 마카오에 있던 외방 전교회의 대표부 건물은 아파트로 바뀌어 옛 모습은 사라졌다. 반면에 조선 신학생들이 잠시 거처하던 롤롬보이 농장의 한 쪽에는 조선 교회의 사적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1986년 건립한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서있다. 또 그들이 고향에서 온 편지를 읽었다는 자리에는 오래된 '망향의 망고 나무'가 자라고 있다.
2. 만주의 소팔가자와 상해의 금가항
1842년 아편전쟁이 일어나고 프랑스 함대가 이권을 차지할 목적으로 중국에 입항하게 되자, 김대건은 2월 15일에 스승이자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매스트르(Maistre, 李) 신부와 함께 에리곤 호에 몸을 싣게 되었다. 이어 최양업도 7월 17일에는 만주 선교사인 브뤼기에르 신부와 함께 파보리트 호를 타고 마카오를 떠나게 되었다. 이 때 프랑스 함대에서는 통역이 필요했고, 조선 신학생들과 매스트르 신부는 이 기회에 조선에 입국하는 길을 얻게 되기를 바랐다.
최양업과 김대건은 8월 말에 양자강 하구에서 상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함장 세실(Cecille)이 더 이상의 북상을 꺼려하였으므로 할 수 없이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상해를 떠나 10월 23일에는 요동반도 남단에 있는 태장하(太莊河)에 상륙하였다. 이곳에서 체포될 위험을 가까스로 면한 그들 일행은 이웃 '백가점'(白家店) 교우촌으로 가서 그곳 회장 집에 유숙하게 되었다. 이후 최양업은 먼저 요동반도 북단의 개주 인근 '양관'(陽關) 교우촌을 거쳐 11월에는 길림성의 장춘(長春) 서북쪽 70리 지점에 위치한 '소팔가자'(小八家子) 교우촌으로 가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이 중에서 양관 교우촌을 그후 1843년 12월 31일에 제 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Ferreol, 高) 주교의 주교 서품식이 개최된 곳이다.
한편 백가점에 남아있던 김대건은 조선 입국로를 알아보기 위해 홀로 봉황성 책문으로 갔다. 이곳에서 그는 조선 교회의 밀사 김 프란치스코
4)를 만난 뒤 12월 29일에는 압록강을 건너 의주 땅을 밟게 되었으나, 신분이 노출되자 곧 바로 백가점으로 되돌아와 그곳에서 새해를 맞이하였다. 그런 다음 1843년 3월에는 다시 책문으로 가서 조선의 밀사를 만난 뒤 소팔가자로 가서 최양업과 합류하였다.
'소팔가자' 교우촌은 본래 만주의 한 작은 교우촌일 뿐이었는데,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으로 만주교구의 초대 교구장에 임명된 베롤르(Verolles, 方) 주교가 1841년에 이 일대의 광대한 토지를 매입한 뒤 성당을 건립하고 만주 전교의 거점으로 삼은 곳이다. 조선 선교사 페레올 주교와 매스트르 신부, 그리고 최양업과 김대건이 이곳에 거처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곳 성당은 훗날 폐허가 되었다가 유명한 의화단 사건을 겪은 뒤인 1908년에 재건되었다.
페레올 주교 아래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던 김대건은 1844년 초에 북방 입국로를 탐색하라는 주교의 명에 따라 2개월 동안 훈춘을 거쳐 조선 동북방 국경에 있는 경원까지 가서 조선의 밀사를 만난 뒤 소팔가자로 귀환하였다. 그런 다음 그해 12월 초에는 최양업과 함께 부제품을 받았으며, 1845년 1월에는 책문에서 조선의 밀사를 만나 귀국하게 되었다. 이때 김대건 부제가 서울에 잠입하여 매입한 집이 바로 '돌우물골'(石井洞)의 초가집이었다. 이곳은 지금의 서울 소공동에 있는 조선 호텔 옆으로, 기록에는 "돌우물골의 남별궁(南別宮) 뒤편 우물가를 지나 두 번째 초가집"으로 나온다.
5) 훗날 페레올 주교도 조선에 입국한 뒤 이 집을 주교관으로 삼아 거처하였다.
돌우물골에서 약 3개월을 지낸 그는 4월 30일에 마포를 떠나 상해로 가서 페레올 주교를 만난 뒤, 8월 17일에는 그곳 '금가항'(金家港) 성당에서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와 조선 신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런 다음 그곳에서 약 30리 떨어진 '횡당'(橫堂) 성당에서 첫미사를 집전하였다. 현재 이곳 금가항과 횡당 성당에서는 정기적으로 김대건 신부의 업적을 기리는 미사를 봉헌하고 있으며, 한국인 신자들도 자주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
3. 제주 비양도와 강경의 나바위
김대건 신부는 1845년 8월 31일에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라파엘(Raphael) 호를 타고 상해를 출발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그 배는 앞서 김대건 신부가 신자들과 함께 마포에서 타고 간 것으로 도저히 서해를 건널 수 없는 작은 배였고, 실제로 그들 일행은 풍랑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상해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배였으므로 중국 배와는 달리 해안에서 발각될 염려는 아주 적었으며, 이에 페레올 주교는 서슴지 않고 그 배를 택한 뒤 김대건 신부를 선장으로 임명하였다.
이 조각 배로 다시 서해를 건넌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실제로 상해를 떠난 지 얼마 안되어 만난 풍랑으로 라파엘 호의 갑판은 부서지고, 키는 부러졌으며, 돛은 찢어져 버렸다. 할 수 없이 그들 일행은 돛대를 잘라버리고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놓을 수밖에 없었다. 어렇게 하여 김대건 신부 일행이 처음 도착한 곳은 제주도 서쪽은 작은 섬 '비양도'(飛揚島)였다. 이곳에서 물과 식량을 얻은 일행은 처음의 계획을 바꾸어 곧바로 서울로 가지 않고 충청도 강경 인근의 작은 교우촌 '나바위'(羅岩)로 가기로 하였다. 체포의 위험 때문이었다.
6) 10월 12일에 그들은 고대하던 조선 땅에 발을 디디게 되었지만, 그들의 입국은 찬란한 것은 못되었다.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하면서 모든 것을 조용하고 은밀하게 처리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당시 나바위 신자들은 서양 사람의 얼굴과 모습을 가릴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이 페레올 주교에게 변복을 시켰다.
그들(나바위 신자들)은 내(페레올 주교)가 상복 차림으로 배에서 내리는 것이 적당하다고 판단하였으므로 굵은 베로 만든 겉옷을 걸쳐주고, 머리에는 짚으로 만든 커다란 모자를 씌웠는데, 그것은 어깨까지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자는 반쯤 접은 작은 우산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내 손에는 두 개의 작은 막대기가 들렸는데, 거기에는 헝겊이 달려있어 호기심 많은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내 열굴을 가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7) 얼마 동안을 나바위 교우촌에서 머무르던 김대건 신부는 11월 초에 페레올 주교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으며, 이내 돌우물골과 미나리골(서대문구 미근동), 쪽우물골(남대문로 남정동) 등에서 신자들에게 성사를 준 뒤 고향 골배마실로 내려가 모친과 상봉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부활 대축일까지 이웃 은이 공소를 사목 활동의 터전으로 삼아 경기도 일대를 순방하였다.
1846년 4월 13일 골배마실을 떠난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에 따라 서해 해로를 통한 안전한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마포를 출발, 5월 25일에는 연평도에 도착하였다. 이어 인근에서 중국 어선을 만나 편지와 지도를 중국의 매스트르 신부에게 전한 그는 6월 1일에 '순위도'(巡威島) 등산진(登山鎭)으로 귀환하였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그런 다음 해주 감영에서 여러 차례 문초를 받고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다시 40여 차례나 문초를 받은 후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1846년 9월 16일(음력 7월 26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8) 그는 옥중에서 여러 차례 편지를 썼는데, 그중 스승 신부들과 동료 최양업 신부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있다.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형제 토마스여, 잘 있게. 천당에서 다시 만나세. 나의 어머니 우르술라를 특별히 돌보아주도록 부탁하네.
저는 그리스도의 힘을 믿습니다. 그분의 이름 때문에 묶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끝까지 형벌을 이겨낼 힘을 저에게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하느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의 환난을 굽어보소서. 주께서 만일 우리의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여, 누가 감히 당할 수 있으리이까!
9) 4. 상해의 서가회 성당과 배티 교우촌
한편 소팔가자에 남아있던 최양업 부제는 1846년 1월에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조선 입국을 위해 만주의 훈춘을 거쳐 두만강 가까이 갔지만, 경원에는 들어가지 못한 채 그곳 관헌에게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어 다시 소팔가자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어 그해 말에는 조선의 서북쪽인 압록강 근처로 갔다가 조선의 밀사들에게 김대건 신부의 순교 사실과 병오박해(丙午迫害) 소식을 듣고는 홍콩으로 건너갔다. 당시 파리 외방 전교회의 극동 대표부가 그곳으로 이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홍콩에 머물면서 조선 순교자들의 전기를 라틴어로 번역하던 최양업 부제는, 1847년 7월 28일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조선 원정에 나선 프랑스 군함을 타고 전라도의 '고군산도'(古群山島) 인근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군함 한 척이 난파하는 바람에 잠시 그곳에 상륙하였다가 상해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때 최양업은 조선에 남도록 해달라고 라피에르 함장에게 부탁하였지만, 그의 청은 거절되고 말았다. 2년 뒤에 그는 김대건 신부의 편지에 따라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다시 한 번 백령도를 통하여 입국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1849년 초 최양업 부제는 상해에 있던 예수회의 '서가회'(徐家匯) 신학원에서 마지막 공부를 마쳤고, 4월 15일에는 마침내 그곳 대성당에서 매스트르 신부가 지켜보는 가운데 강남 교구장 마레스카(Maresca)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게 되었다.
10) 이 서가회는 1773년에 해산되었다가 1813년에 부활된 예수회가 다시 중국에 진출하면서 마련한 전교 활동의 중심지였다.
최양업 신부는 곧 조선 입국을 위해 요동으로 가서 기회를 엿보며 만주의 베르뇌(Berneux, 張敬一) 신부 아래서 성직을 수행하였다. 베르뇌 신부는 1854년에 제 4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된 바로 그분이다. 이곳에서 최 신부는 1849년 11월 3일에 매스트르 신부를 만나게 되었고, 그와 함께 다시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서양인이 육로로 입국하기에는 위험하다.'는 조선 밀사들의 만류 때문에 매스트르 신부와 헤어져 12월 3일, 단신으로 조선에 입국해야만 하였다. 실로 15살의 나이로 고국을 떠난 지 13년 만이었다.
서울에 도착한 최양업 신부는 다블뤼 신부와 페레올 주교를 만난 뒤, 용인 한덕골로 가서 중백부인 최영겸과 기해박해 이후 그곳에 살고 있던 넷째 아우 최신정(델레신포로)를 만났다. 아마 이때 산너머 골배마실에 거주하고 있던 김대건 신부의 모친 우르술라도 만났던 것같다. 이어 그는 사목 순방에 나서 충청도 '도앙골'(충남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에 임시 거처를 정하고 6개월 동안 5개 도를 순회하였으며, 그 해 말에는 '배티'(梨峙,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교우촌에 거처하면서 인근 교우들을 돌보았다. 이곳은 전형적인 교우촌 골짜기로, 그의 셋째 아우인 최우정(바실리오)이 살고 있던 동골을 비롯하여 절골, 삼박골, 불무골 교우촌이 산재해 있었다. 또 둘째 아우인 최선정(안드레아)은 이웃의 목천 서덕골(충남 천안시 목천면 송전리) 백부 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고난의 생활은 계속되었지만 최양업 신부는 순교자의 자세로 이 고난을 달게 받았으며, 언제나 착취와 억압 아래 놓여있는 하층민 신자들을 중심으로 사목 활동을 전개하였다. 언제는 그는 "비참하게 지내는 민초(民草)들을 도와줄 수 없는 자신의 초라함" 때문에 가슴을 앓던 목자였다. 이에 그는 무지한 신자들을 위해 틈틈이 한글 교리서를 저술하거나 기도서를 한글로 번역하였다. 그러던 중 1860년에는 경상도의 '죽림'(경남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교우촌에서 성사를 집전하다가 경신박해(庚申迫害)를 만나 그 뒷산의 굴에서 숨어 지낸 적도 있었다. 이 때 그는 다음과 같이 주님의 자비를 구하면서 가련한 조선 포교지를 선교사들에게 부탁하였다.
원수들이 우리에게 달려들고 있습니다. 당신의 보배로운 피로 속량하신 당신의 유산을 파멸하려 덤벼들고 있습니다. 당신이 높은 데서 도와주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그들에 대항하여 설 수가 없습니다. …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
11) 5.마지막 안식처 배론
사목 순방 중에 최양업 신부는 언제나 순교자의 모범을 따르고자 하였다. 그의 활동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을 정도였고, 대신 감당해 줄 수도 없었다. 실제로 그가 담당한 지역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갈 수 없던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지역의 산간 오지에 숨겨있는 교우촌들이었으니, 훗날 베르뇌 주교는 그 어려움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였다.
그는 굳건한 신심과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같은 열심, 그리고 무한히 귀중한 일로는 훌륭한 분별력으로 우리에게 귀중한 조재였던 유일한 본방인(本邦人) 신부였습니다. … 그가 성무를 집행하던 곳은 크나큰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서양 사람이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많은 교우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12)
이처럼 그가 조선으로 귀국하여 활동한 기간은 약 12년이었다. 그 동안 그는 수많은 신자들을 찾아내 성사를 줄 수 있었다. 특히 경상도 지역의 순방을 끝내면 문경의 '새재'(鳥嶺)와 충청도 '연풍'(延豊)을 거쳐 '배론'(舟論, 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 신학교로 가서 선교사들과 함께 쉬곤 하였다. 이중에서 새재는 박해를 피해 비밀리에 경상도로 이주하던 신자들이 넘던 고개였는데, 그 때문에 포졸들이 언제나 연풍 주막에 머물면서 범죄자들과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여 공을 세우려고 혈안이 되어있었다. 또 이곳은 교회 초창기에 복음이 전파된 지역으로 훗날 순교하는 황석두(黃錫斗, 루가)의 고향이기도 했다. 그는 25세 무렵인 1837년경에 연풍 일대에 전해진 복음을 듣고 입교하였다.
한편 배론은 이미 교회 초창기에 교우촌이 형성된 곳으로, 1801년에는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데르)이 이곳 옹기점에 숨어 지내면서 [백서](帛書)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그후 이곳 교우촌은 황사영이 체포되면서 폐허가 되었으나 다시 신자들이 복구하였다. 또 1855년에는 한국 교회의 장상인 메스트르 신부가 배론의 회장인 장주기(張周基, 요셉)가 제공한 초가집에 학생들을 받아들여 '성 요셉 신학교'를 설립하였고, 이듬해에는 푸르티에(Pourthie, 申) 신부를 교장으로 임명하였다. 최양업 신부가 자주 이곳에 들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1861년 초여름, 그 해도 최양업 신부는 경상도 지역의 교우촌을 순방한 뒤 교구장 베로뇌 주교에게 성사 집전의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던 중이었다. 그런나 누적된 피로가 더 이상 그의 몸을 지탱해 주지 못하였다. 특히 경신박해는 그의 교우촌 순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그래서 낮에는 80리, 100리를 걸어야 했으며, 밤에는 고해를 들어야 했고, 날이 새기 전에 다시 떠나는 일을 되풀이하였으므로 그가 한 달 동안에 쉴 수 있는 날은 나흘 밤을 넘지 못하였다. 이로써 결국 그는 6월 15일 문경의 한 신자집에서 선종하고 말았다. 그가 몸져누웠다는 소식을 들은 배론의 프르티에 교장 신부는 곧 그에게로 달려와 '예수 마리아'를 힘없이 부르는 그에게 병자성사를 줄 수 있었다.
푸르티에 신부는 우선 최양업 신부의 시신을 문경에 가매장하였다. 그런 다음 베르뇌 주교와 의논하여 1861년 11월 초에는 그 유해를 배론 뒷산으로 옮겨 안장하게 되었다. 그 후 배론 교우촌과 신학교는 병인박해로 완전히 초토화되고 말았으며, 푸르티에 신부와 장주기 회장도 이때 체포되어 서울과 충청도에서 각각 순교하였다.
B.주문모 신부와 신유박해 관련 사적지
1. 한강개의 신앙과 성직자 영입 운동
한국 천주교회의 사적지와 성지는 교회 창설과 함께 탄생하기 시작하였다. 그중에서도 초기의 대표적인 사적지라고 할 수 있는 '수표교'(水標橋) 인근에 있던 이벽(李檗, 요한)의 집, '명례방'(明禮坊, 현 외환은행 본점과 명동 대성당 사이)에 있던 김범우(金範禹, 토마스)의 집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수표교는 1784년 겨울에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곳이고, 명례방은 교회 창설 직후에 수표교의 신앙 공동체가 새 집회소를 마련하면서 이전된 곳이었다.
1) 그러다가 197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로 윤지충(尹持忠, 바오로)과 권상연(權尙然, 야고보)이 전주 남문 곧 '풍남문(豊南門, 현 전주시 전동 소재) 밖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아 순교함으로써 이곳이 한국의 첫 순교터가 되었다.
2) 이후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일반 사적지보다 순교터나 순교자의 무덤, 그 유해가 있는 곳을 성지로 여겨왔으며, 1984년에 103위 성인이 탄생하면서 이들과 관련된 곳을 모두 성지라고 일컬어왔다. 물론 가톨릭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순교자의 무덤이나 유해가 있는 곳을 순례하고 공경해 왔다. 반면에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그들의 탄생지나 피신처도 무덤이나 유해 못지않게 중시해 왔는데, 이는 한국교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순교의 시작과 과정을 중시한 데서 나온 결과였다.
이렇게 볼 때 한국의 성지는 순교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순교자의 탄생이 바로 박해의 결과였으므로 성지와 박해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신해박해 이후 새로운 성지가 형성된 것은 1795년의 을묘박해(乙卯迫害)였으며, 이것이 1797년의 정사박해(丁巳迫害),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이어지게 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조선의 첫 선교사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의 활동이나 순교 행적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천주교회 창설 이듬해인 1785년 봄에 일어난 명례방 사건으로 신앙 공동체가 와해되고, 김범우가 형벌을 받고 유배형에 처해지자, 몇몇 양반 지도층 신자들은 집안의 박해로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벽은 부친에 의해 갇혀있다가 1786년 봄에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첫 세례자 이승훈(李承薰, 베드로)은 마음이 약해져 천주교를 비판하는 글을 썼으며,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정약용(丁若鏞, 요한),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 등은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생활하였다.
3) 교회 지도층에서 다시 재건을 꾀하기 시작한 것은 1786년부터였다. 이때 그들은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를 수립하였고, 이승훈을 비롯하여 다른 10명의 신자들은 신부로 임명되어 성사를 집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788년 무렵에 류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이 그 오류를 지적하여 성사 집전이 중단되고, 이어 북경에서 성직자를 영입해 와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면서 고난의 '성직자 영입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때 한국 천주교회의 밀사로 선발된 사람이 바로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이었다.
4) 윤유일의 집안은 본래 이천에서 세거하던 집안이었으나, 그가 태어나 살던 곳은 양근(楊根)의 '한강개'(漢江浦, 지금의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였다. 이곳은 바로 그의 스승이자 이벽과 정약용, 홍낙민(洪樂敏, 루가), 류항검,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의 스승이기도 하였던 녹암(鹿庵)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과 그의 아우 권일신의 고향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 녹암계(鹿庵系) 이물들이 모여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고 토론하던 마을이었으니, 1784년에 이벽이 이승훈에게 받은 천주교 서적들을 가지고 찾아간 곳이 바로 여기였다. 이에 앞서 녹암계 인물들이 권철신, 이벽과 함께 강학(講學)을 하던 곳은 한강개 뒤편에 위치한 앵자봉 자락의 주어사(走魚寺)와 천진암(天眞庵)이었다.
5) 양근 권씨 집안의 제자였던 이존창과 류항검은 이후 자신들의 고향인 '여사울'(餘村, 현 충남 예산군 신종면 신암리)과 '초남'(草南, 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을 중심으로 각각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 결과 이존창은 내포(內浦)의 사도로, 류항검은 전라도의 사도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한강개 마을에서 비롯된 천주교 신앙이 수표교와 명례방에 이어 여사울과 초남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윤유일은 한국 천주교회의 첫 밀사였다.
6) 이후 윤유일은 1789년과 1790년 두 차례에 걸쳐 북경을 다녀왔으며, 1789년에는 라자로회의 북당 선교 단장인 로(Raux, 羅黃祥) 신부에게 조건 세례를 받고, 남당(南堂)에 있던 북경 교구장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를 만나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어 1790년에는 다시 구베아 주교를 만나 성직자 파견을 약속받고 귀국하였다.
7) 2.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살곶이다리
구베아 주교는 윤유일을 통해 조선 신자들과 약속한 대로 1791년 봄에 마카오 교구 소속의 레메디오스(dos Remedios, 吳) 신부를 선발하여 조선으로 보냈지만, 약속 날짜가 맞지 않은 탓에 조선의 밀사들을 만나지 못하고 되돌아가고 말았다. 바로 이 해에 신해박해가 일어나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하고, 권일신이 이듬해 유배를 가다가 도중에 사망하면서 천주교회는 다시 한번 타격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1790년에 구베아 주교가 내린 제사 금지령으로 몇몇 양반층 신자들이 교회를 멀리하기 시작하였으니, 그 안에는 권철신, 이승훈 등이 끼어있었다.
조선 신자들이 다시 성직자 영입 운동을 추진한 것은 1793년이었다. 당시 교회의 지도층으로 활약하던 윤유일과 최창현(崔昌顯, 요한), 최인길(崔仁吉, 마티아), 지황(池璜, 사바), 그리고 여교우 강완숙(姜完淑, 골롬바)이 지황과 백(白) 요한을 북경으로 파견한 것이다. 강완숙은 본래 충청도 덕산에 살았으나, 당시에는 서울로 옮겨와 남대문 인근의 창동(현 중구 남창동)에 살고 있었다.
지황은 구베아 주교를 만난 뒤 1794년 초에 귀국하면서 다시 한번 성직자 파견 약속을 받았다. 이때 구베아 주교가 선발한 사람이 바로 북경 신학교의 첫 졸업생인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였다. 그는 조선의 밀사들과 약속한 대로 1794년 2월에 북경을 떠나 요동의 봉황성 책문(柵門, 국경 관문)으로 가서 조선 신자들을 만났지만, 압록강이 얼 때와 연행사가 다시 북경에 갈 때를 기다려 입국하기로 하였다.
그 무렵 최인길은 서울 '정동'(貞洞)에 장차 신부가 거처하게 될 집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1794년 12월 14일(양력 1795년 1월 4일), 주문모 신부는 마침내 지황, 윤유일 등의 안내를 받아 서울에 도착한 뒤 줄곧 이 집에서 머무르며 조선 말을 배웠다. 그리고 1795년 윤 2월 16일(양력 4월 5일) 한국 땅에서 최초로 부활절 미사를 집전하였으니, 이로서 정동 최인길의 집은 조선 포교지의 유일한 본당 역할을 하게 되었다.
8) 그러나 한 밀고자에 의해 주 신부의 거처가 포도청에 알려졌고, 5월 11일에는 체포령과 함께 포졸들이 정동으로 파견되었다. 을묘박해가 시작된 것이다. 다행히 주 신부는 남대문 안에 있던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하였지만, 집주인 최인길이 체포되고 이어 윤유일, 지황도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포도대장은 자신의 손으로 주 신부의 거처를 알아내어 일을 빨리 매듭지으려고 무서운 형벌을 사용하였다. 그 결과 1795년 5월 12일(양력 6월 28일) 이들 세 명은 포도청에서 매를 맞아 순교하게 되었으니, 훗날 밀사에게 이 소식을 전해들은 구베아 주교는 다음과 같이 그들의 행적을 기록하였다.
선교사의 안내자들인 지황, 윤유일, 최인길 세 교우는 체포된 바로 그날 밤에 법정으로 인도되어, 재판관들의 악의와 술책과 잔인성을, 침묵과 인내와 항구함으로 이겨냄으로써 재판관들을 지치게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를 믿고 십자가에 못박힌 자를 공경하느냐는 질문에 그들은 용감히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저주하고 모독하라고 하자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참된 하느님이시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모독하기보다는 차라리 천 번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재판관들은 세 사람들로부터 웃음거리와 조롱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또 외국인의 입국에 대해 대답을 얻어내지 못한 데 절망하고 격분한 나머지 죽을 때까지 그들에게 고문을 가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 증거자들은 거의 같은 시각에 고문 가운데 숨을 거두었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예수의 이름을 불렀으며, 얼굴에는 예수와 교회를 위한 고통에서 맛보는 영적인 기쁨의 평온함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9) 이렇게 하여 박해자들의 재판소인 '포도청'은 한국 천주교회의 사적지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순교터가 되었으니, 이 사건은 앞으로 수많은 순교자들이 이곳에서 탄생하게 되리라는 것을 예견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후 세 순교자들의 시신은 관례대로 동쪽의 '광희문'(光熙門, 일명 水口門 또는 屍軀門)을 통해 강물에 버려지게 되었다. 장안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시신은 이곳을 통해 내다버리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광희문 밖의 인근 언덕은 훗날 수많은 순교자들의 시신이 묻힌 곳이기도 하였다.
그러면 순교자 윤유일, 최인길, 지황의 시신이 버려진 강물은 어디였을까? 당시에도 지금과 거의 유사하게 광희문을 지나면 왕십리와 행당동을 거쳐 '살곶이다리'(현 한양대학교 동쪽)을 건너게 되어 있었다. 이 다리는 경기도 양주군 일대의 상인과 주민들이 서울로 들어오던 관문이기도 하였다. 아마도 광희문을 거쳐 나갔다면 그들의 시신은 이 부근에서 한강 쪽으로 버려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장된 터로, 시성 운동이 시작되면 반드시 확인해야 할 장소 가운데 하나임이 분명하다.
3. 장고봉과 정사박해의 순교자
주문모 신부는 이에 앞서 1795년 초에 경기도 양근, 전라도 고산(高山) 땅으로 이주해 살던 이존창의 집과 류항검의 집을 순방한 적이 있었다. 그때 주 신부는 충청도를 거쳐 전라도로 내려가다가 윤지충, 권상연의 무덤 아래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신자들이 '이 무덤은 우리 나라 신자들 가운데 유명한 분의 무덤입니다.'라고 하자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성교(聖敎)를 공부하여 만약 성인품에 오른다면 마땅히 천주당을 그 사람의 무덤 위에 건립해야 하는 것입니다. 훗날 조선 땅에 성교가 크게 성행하게 된다면, 이 두 사람의 무덤은 마땅히 천주당 안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10) 이처럼 주 신부는 교회의 전통에 따라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다면 이들 순교자의 무덤 위에 성당이 건립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였다. 그곳은 현 충남 금산군 진산면 막현리의 '장고봉'(長古峯) 인근으로, 한국 최초의 순교자들이 묻혀있는 의미있는 사적지라고 할 수 있다.
11) 그러나 지금 이곳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고, 주 신부가 말한 대로 신앙의 자유를 얻고 시복 작업이 추진되어 왔지만 성당은 건립되어 있지 않다.
이후 6년 동안 주 신부는 강완숙의 집에 머무르면서 지방의 교우들을 자주 순방하였다. 이존창과 류항검을 다시 한번 방문하기도 하였으며, 양근 한강개에 있는 권일신의 아들 권상문(權相問, 세바스티아노)을 찾기도 하였고, 충청도 덕산의 인언민(印彦敏, 마르티노)과 정산필(鄭山弼, 베드로)을 만났다. 그리고 정산필을 내포의 회장으로 임명하고, 1795년 7월경에는 충청도 연산 출신의 황심(黃沈, 토마스)을 밀사로 선발하여 이듬해 겨울에 그를 북경으로 보냈다. 이때 주 신부는 신자들과 의논하여 구베아 주교에게 서한을 보내면서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는 계획에서 '서양 선교사들을 태우고 올 선박의 파송'을 요청하였지만, 허락을 얻지는 못하였다.
1797년부터 1799년까지 충청도에서는 정사박해가 일어나 여러 신자들이 순교하게 되었다. 그 결과 1798년에는 이도기(李道起, 바오로)가 정산에서, 정산필이 덕산에서 순교하였으며, 다음해에는 박취득(朴取得, 라우렌시오)과 인언민,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코)이 '해미'(海美)에서 순교하였다. 그 유명한 해미 순교터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중에서 인언민의 사적지가 삽교 본당 신자들에 의해 1991-1992년에 고향인 '주래'(현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에 조성되었다.
12)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주 신부는 경향으로 피신해 다니면서도 여러 차례 황심과 김유산(金有山, 토마스), 옥천희(玉天禧, 요한) 등을 북경에 파견하였으며, 평신도들의 신심 단체인 명도회(明道會)를 설립하였다.
4. 신유박해와 서소문, 새남터
1800년 무렵, 한국 천주교회의 신자수는 1만 명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곧 이어 일어난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어느 때보다 혹독한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에 앞서 1800년 4월과 5월에는 여주와 양근에서 경신박해(庚申迫害)가 일어나 신자들이 체포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대박해의 전주곡과도 같았다.
1801년 1월 10일(양력 2월 22일), 대왕대비 김씨 곧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이름으로 반포된 윤음을 법적 토대로 하여 시작된 박해는, 그 초기에 명도회장 정약종(丁若種, 아우구스티노)의 책 상자 사건(柵籠事件)이 일어남으로써 좋은 명분을 얻게 되었다. 이로써 관직에 있거나 학문으로 이름이 있는 신자들이 체포되었으며, 정약종을 비롯하여 홍낙민, 홍교만, 홍인 등 4명이 순교하였다. 이어 박해는 주문모 신부가 3월 12일(양력 4월 24일) 의금부에 자수함으로써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9월 29일에는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데르)이 체포되고 [백서](帛書)가 발각되면서 세 번째 단계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등지에서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100여 명이 순교하거나 처형되었고, 400여 명이 유배를 당하였다. 이들의 순교터로는 우선 서울의 '서소문 밖'과 '새남터'(현 새남터 성당의 남쪽 지점)를 들 수 있다. 또 전라도에서는 전주의 풍남문 밖, 무장의 '개갑(開甲) 장터'(현 고창군 공음면 갑촌), 김제 등지에서, 충청도에서는 공주와 예산에서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뿐만 아니라 경신박해 때 체포되어 옥중에 있던 경기도 신자들의 순교터인 '경기 감영'(현 서대문구 적십자 병원 자리)과 '여주 남문 밖', '양근 서문 밖'이 있으며, 포천과 '남한산성 동문 밖'에서도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이때 지방의 순교자들은 서울에서 판결을 받았을지라도 해읍정법(該邑正法)에 따라 각 거주지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는데, 이는 그곳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였다.
13) 이중에서도 가장 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킨 곳은 서울의 '서소문 밖' 형지로, 대부분의 순교자들이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바로 이곳은 [서경](書經)의 '형장은 사직단 우측에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따른 서울의 공식 처형장이었다. 반면에 '새남터'는 조선 개국 이래로 군인들의 연무장으로 이용되던 곳이었으며, 모반 죄인과 같은 중죄인을 처형할 때는 이곳을 형장으로 사용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바로 이곳에서 4월 19일(양력 5월 31일)에 군문효수형을 받았다.
한편 이밖에도 기록상으로 정확히 나타나는 순교터는 '여주 남문 밖'과 '양근 서문 밖'이 있다. 1800년에 여주와 양근에서는 모두 18명이 체포되었는데, 조용삼(베드로)이 경기 감영의 옥중에서 1801년 2월 14일(양력 3월 17일)에 순교하였고, 3월 13일(양력 4월 25일)에는 여주에서 최창주(마르첼리노), 이중배(마르티노), 원경도(요한), 임희영, 정종호 등 5명이, 양근에서 윤유오(야고보), 유한숙 등 2명이 순교하였다. 그 장소가 바로 '여주 관아의 문에서 남쪽으로 1리쯤 떨어진 큰길가'와 '양근 관아의 문에서 서쪽으로 2리쯤 떨어진 큰길가'였다.
14) 신유박해의 순교자들 가운데 그 무덤 소재지를 알 수 있는 신자는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윗배알미리'(현 경기도 동부면 배알미리)에 있는 정약종의 무덤과 '어농리'(현 경기도 이천군 모가면 어농리)에 있는 윤유오(尹有五, 야고보)의 무덤이 알려지게 되었다. 어농리에는 이밖에도 윤유오의 형 윤유일과 숙부 윤관수(안드레아), 사촌 여동생 윤점혜(아가다)와 윤운혜(마르타), 정광수(바르나바) 부부, 그리고 주문모 신부와 여회장 강완숙의 의묘가 조성되어 있다. 한편 배알미리에 안장되어 있던 정약종의 유해는 1959년 4월에 반월 사사리로 옮겨졌다가 1981년 11월에 천진암으로 이장되었다.
이처럼 한국 천주교회의 유명한 순교 사적지는 대부분 신유박해 때에 이미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물론 그중에는 명례방, 여사울, 초남, 풍남문 밖, 포도청, 광희문 밖, 해미, 새남터, 서소문 밖, 남한산성 동문, 배알미리, 어농리 등과 같이 널리 알려져 왔거나 오래 전에 사적지로 개발된 곳도 있다. 반면에 수표교, 한강개, 살곶이다리, 장고봉, 주래, 개갑 장터, 경기 감영, 여주 남문 밖, 양근 서문 밖처럼 널리 알려져 있지 않거나 아직까지 그 정확한 위치가 밝혀져 있지 않은 사적지도 많다. 그러므로 앞으로 이들의 위치를 고증하여 그 내용을 기록으로 남겨두거나 사적지로 개발하는 작업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신유박해 이전의 미확인 사적지 일람>
사적지 | 구분 | 성격 및 의미 | 현재 지명 |
수표교 앞 | 한국 천주교회가 청설된 곳이요, 첫 세례식이 있던 이벽(요한)의 집 | 서울 종로구 소표동 인근 |
살곶이다리 | 1795년 을묘박해 때의 순교자 윤유일, 최인길, 지황의 시신이 버려진 곳(추정지) | 서울 성동구 행당동 |
장고봉 |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권상연의 무덤 소재지(추정지) | 충남 금산군 진산면 막현리 부근 |
여주 남문 밖 |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최창주, 이중배, 원경도 등 5명이 참수된 순교터 | 경기도 여주시 창리 인근 |
양근 서문 밖 |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윤유오, 유한숙, 민경배 등이 참수된 순교터 |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양근리 인근 |
C.모방 신부와 기해박해 관련 사적지
1. 잊혀져 가는 만주의 '마가자' 교우촌
1801년의 박해가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흩어져 있던 복음의 씨앗은 다시 자라나기 시작하였고, 권기인, 신태보 등 새 지도자들은 1811년에 교황과 북경 주교에게 서한을 올려 성직자를 파견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이때 이여진(요한)이 고난의 밀사 역할을 맡아 1811년과 1813년 두 차례 북경을 왕래하였으며, 1816년 겨울에는 순교자 정약종의 아들 성 정하상(丁夏祥, 바오로)이 22살의 청년으로 이 일을 자임하였다.
이후 정하상은 1837년까지 21년 동안 밀사로 활동하였다. 또 1824년 말에는 역관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이, 2년 뒤에는 하급 마부로 북경을 왕래하던 조신철(趙信喆, 가롤로)이 고난을 함께 나누었다. 당시 국내에서는 1819년에 순교한 조숙(베드로)과 권 데레사 부부, 1827년에 순교한 이경언(바오로), 그리고 성 현석문(가롤로) 등이 밀사들을 도와주었다. 1825년경에 정하상은 조선 신자들이 두 번째로 교황에게 올리는 서한을 북경에 전달하였다.
1) 이 서한은 그 후 교황청에 전달되어 여러 성직자들을 감동시켰는데, 그 내용을 보면 조선의 신자들이 얼마나 성직자 영입을 간절하게 기원하고 있었는지 잘 알 수 있다.
박해를 피해 살아남은 교우들은 삶에 지치고 비탄 속에 잠겨있어 슬픔과 고뇌가 점점 가슴을 억누릅니다. 북경 주교님께서는 여러 차례 저희들의 청원을 들으셨지만,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성직자를 보내주지 못하였습니다. 아아! 이러한 불행은 저희 죄인들이 얻은 것인 만큼 다른 이들을 원망해서는 안되고, 저희 스스로를 책망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 그러므로 겸손되이 청하오니 먼저 성직자를 파견해 주시고, 아울러 이 비참하고 불쌍한 교회의 장래를 영신적(靈神的)으로 보장해 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831년 9월 9일 조선 포교지가 독립 교구로 설정됨과 동시에 샴(태국) 교구에서 활동하고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의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가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듬해 이 소식을 듣자마자 페낭 신학교 출신인 왕(王) 요셉과 함께 마닐라를 거쳐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그때 샴 교구의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신부도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였다. 또 포교성성(지금의 인류복음화성)에서는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2) 신부에게 먼저 조선에 들어가 주교를 맞아들일 준비를 하도록 하였다.
유방제 신부는 1833년 겨울(양력 1834년 1월), 유진길과 조신철을 봉황성 책문(柵門, 중국측 변문)에서 만나 조선에 입국하였다. 반면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4년 10월에야 내몽고인 서만자(西灣子) 교우촌에 도착하여 머무르다가 연락을 받고 1년 만인 1835년 10월 7일에 그곳을 출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11월 21일에 서부 달단 요녕성의 '마가자'(馬架子, 일명 펠리구)라는 교우촌에서 과로로 죽고 말았다.
이때 서만자에 있던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는 주교의 사망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마가자로 달려가 "주교의 거룩한 시신 앞에서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기도를 드렸다." 그런 다음 교우들의 도움을 받아 인근의 교우들 묘역에 시신을 안장하였다. 이로서 마가자 교우촌은 조선에 입국하기를 그토록 갈망하면서 고난을 참아낸 초대 교구장이 부활을 기다리며 잠든 곳이 되었다. 그 후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는 1931년에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이하여 용산의 성직자 묘지로 이장되었는데, 모방 신부가 그의 무덤 앞에 주교의 중국 성인 소(蘇)자를 기록한 묘비를 세워놓았던 탓에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3) 2. '후동'의 첫 교구청과 신학교
모방 신부는 본래 중국의 사천(四川)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를 만난 뒤인 1833년 3월 9일에 조선 선교를 희망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는 주교의 시신을 안장한 뒤 곧바로 마가자 교우촌을 떠나 책문으로 가서 정하상, 조신철 등을 만났다. 그런 다음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1836년 1월 13일(음력 1835년 11월 25일) 밤에는 의주 변문(邊門)에 도착하였고, 비밀리에 성벽의 수문을 통과하여 조선에 입국하였다.
앞서 정하상은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전해 받은 돈으로 서울의 '후동'(后洞)
4)에 새 집을 마련하고 돌보아 왔는데,
5) 유방제 신부와 모방 신부가 서울에 도착하여 거처한 곳이 바로 여기였다. 또 모방 신부는 1836년 초부터 자신이 선발한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을 이 집으로 불러올려 라틴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니, 바로 한국에서 가장 먼저 신학 교육이 시작된 곳이었다.
6) 샤스탕 신부는 1837년 1월 1일(음력 1836년 11월 25일) 조선에 입국한 뒤 일시 후동에 있다가 권득인(權得仁, 베드로) 회장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어 1837년 12월 18일(음력 11월 21일)에는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였다. 이후 그는 주로 후동의 거처에 머물렀으며, 1838년에는 정하상 등 4명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자신의 거처에서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7) 그 결과 후동의 집은 조선 최초의 교구청 역할을 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시 한번 신학교 구실도 하게 되었다.
3. 비밀리에 형성된 교우촌과 공소
모방 신부는 조선 입국 이래 끊임없이 지방 교우촌을 순방하면서 가는 곳마다 회장을 임명하거나 신자 집단을 새로 조직하는데 열중하였다. 이때 성 이문우(李文祐, 요한)가 그의 복사로 활동하였는데, 그는 이천의 '동산밑'(경기도 이천시 동산리) 출신으로 춧날 천주가사 [옥중제성](獄中提醒)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모방 신부가 방문한 교우촌 중에서 유명한 수리산(修理山, 경기도 안양시 안양 4동의 담배촌)과 골배마실(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이 들어있었다.
수리산은 최양업 신부가 신학생으로 간택된 성소의 터전으로,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성인을 탄생시킨 곳이었고, 성인의 시신이 묻혀있던 성지이다. 1970년대까지도 그 앞으로는 수리산 자락의 뒤뜸이 마을과 좁은 입구로 가려진 병목 안 마을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개발되어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수리산 교우촌의 중심지인 뒤뜸이는 본래 아무도 살지 않던 곳이었는데, 신자들이 새 마을을 이루면서 신촌(새말)이라 불리게 되었고, 담배 농사를 지으며 생활한 탓에 담배촌으로도 불리었다.
이 교우촌이 형성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일설에는 1837년경이라고 하지만 근거는 없다. 여러 가지 사실들로 미루어볼 때, 이보다 훨씬 전인 1832년경에 성 최경환이 처음으로 가족들을 이끌고 이곳에 정착했다고 생각된다. 최경환은 1804년 충청도 다락골의 새터(지금의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태어나 세 살 위인 이성례(마리아)와 혼인하였다. 그리고 18세 때인 1821년에 아들 최양업을 얻은 뒤 형제 가족들과 함께 서울 낙동(서울 중구 회현동)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거처가 발각될 위험이 있게 되자, 이곳 저곳으로 옮겨 살다가 마침내 이곳 수리산에 정착하여 교우촌을 일구게 되었다.
8) 1836년 초에 15세의 장남 최양업을 천주의 종으로 바친 최경환은 회장으로 임명되어 교우들을 돌보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갖은 형벌을 받으면서 40일 이상을 항구함으로 버텨냈다. 이에 형리조차 그를 바위와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그러나 형벌로 헤어진 몸을 가누지 못하고 마침내 옥사로 순교하였으니, 때는 1839년 9월 12일이요 그의 나이는 36세였다.
최경환 회장이 순교한 뒤, 옥졸들은 그 시신을 가마니에 넣어 노고산(老姑山, 마포 노고산동의 서강대학교 뒷산) 밑에 갖다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둘째 형 최영겸(崔英謙) 부자가 그 시신을 찾아 이름을 적은 사발과 함께 그 산 중턱에 가매장하였다가, 몇 해가 지난 뒤 시신을 발굴하여 뒤뜸이 앞 수리산으로 이장하였다. 그 후 최경환 회장이 1925년에 복자품에 오르게 되자 교회 당국에서는 1930년 5월에 그의 무덤을 찾아 시신을 발굴하여 명동 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치하였고, 1967년에는 다시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옮겨 모셨다.
9) 수리산이 성 최경환과 최양업 신부의 신앙이 서려있는 곳이라면, '골배마실'은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 성인과 김대건 신부의 신앙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김대건 신부의 가족이 고향인 충청도 솔뫼를 떠나 서울 청파동을 거쳐 용인 땅에 정착한 것은 대략 1827년경이었다. 당시 그의 가족이 정착하여 교우촌을 일군 곳은 골배마실이 아니라 남쪽 산너머에 있는 '한덕골'(寒德洞,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묵4리)이었다.
10) 앞에서 말한 최경환의 형 최영겸도 1832년 무렵에 이곳 한덕골로 이주해 왔으며, 1839년 이후에는 최양업 신부의 넷째 아우인 최신정(델레신포로)이 이 집에서 성장하였다. 지금의 한덕골은 용인읍에서 미리내 방향(남쪽)으로 가다가 6km 쯤에서 왼쪽으로 올라간다. 이곳에서 다시 원천(샘골) 부락을 지나면 영보 수녀원과 신원 컨트리 클럽 간판이 나타나고, 더 왼쪽으로 가다보면 한덕골 본동이 나타난다.
김제준은 그 후 가족들을 이끌고 1835년 무렵에 한덕골에서 골배마실로 이주하였다. 이 골배마실은 본래 한덕골에서 북쪽으로 뻗은 산과 어은이고개를 넘으면 곧바로 갈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이 길이 막혀 버리고, 양지 방면에서만 들어갈 수가 있게 되어있다. 한편 골배마실 서쪽에 있는 '숨은 이들의 마을'인 '은이'는 지금으로부터 약 160년 전에 형성된 교우촌으로, 이곳 형제봉 아래는 박해 때문에 떠돌게 된 경기도와 충청도 교우들이 모여 비밀리에 신앙 공동체를 이룩한 곳이다.
모방 신부는 1836년 초에 김제준의 방문을 받고, 7월 경에 골배마실실을 들러 김대건을 신학생으로 선발한 뒤 은이 공소에서 성사를 집전하였다. 이처럼 이동면의 한덕골, 내사면의 골배마실과 은이 공소는 일찍부터 교우촌으로 일구어진 곳이며 김대건과 최양업 두 신부 집안과 관계가 깊은 곳이었다. 또 한덕골에는 김 신부의 조부인 김택현과 숙부인 김제철의 무덤, 최 신부의 중백부인 최영겸의 무덤이 있었고, 1839년에 체포되어 순교한 김제준 성인의 무덤도 골배마실 어딘가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 이들의 무덤을 찾을 길은 없다.
4. 구산, 남한산성 성지와 갓등이 교우촌
모방 신부가 방문한 공소 중에서 그 자취가 남아있는 곳으로는 거북뫼 곧 '구산'(龜山, 광주군 동부면 망월리로 현 하남시)이 있다. 이곳은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 성인의 고향으로, 그는 1830년경에 셋째 아우인 윤심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이때 둘째 아우 덕심(아우구스티노)은 입교를 망설이던 끝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 후 3형제의 신앙 실천과 전교 활동은 실로 눈부셨으니, 얼마 안되어 구산 마을 전체는 하나의 교우촌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김성우는 3년 뒤인 1833년에 유방제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성사를 자주 받기 위해 서울 느리골(어의동, 즉 서울 효제동)로 이주하였다가 동대문 밖 가까이에 있는 마장안(서울 마장동)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구산으로 내려와 자신의 집에 작은 강당을 마련하고, 1836년 여름에는 모방 신부를 모셔와 성사를 받았다. 이때 모방 신부는 김성우의 신심을 높이 사서 이곳의 공소회장으로 임명하였다.
1839년 박해가 일어나자마자 그는 3월 21일(양력) 포졸들에게 형제들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약간의 돈을 주고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해 말에 다시 포졸들이 들이닥쳐 집에 있던 그의 아우들과 사촌 김주집을 체포하여 광주 유수가 있던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끌고 갔다. 그중 둘째인 덕심은 체포된 후 고문을 참아 받으면서 관헌들 앞에서 천주교 교리를 열심히 설명하였고,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1841년 1월 28일에 통회와 신앙심을 지닌 채 병사로 순교하였다. 반면에 셋째인 윤심과 사촌은 그 후에도 오랫동안 갇혀 있다가 사망하였다고 한다.
11) 이렇게 하여 남한산성은 1801년 12월 27일 한덕운(韓德運, 토마스)이 동문 밖에서 순교한 이래 두 번째로 순교자들을 탄생시킴으로써 유명한 순교터로 자리잡게 되었다.
아우들이 체포되기 전에 김성우는 지방으로 피신하였으나, 끝내 포졸들의 수색망에 걸려 1840년 1월경에 체포되었으며, '사학(邪學)의 괴수'라는 명목 아래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옥에 갇혀있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집에 온 것처럼 행동하였고, 외교인 죄수들에게 교리를 전하여 2명을 입교시키기까지 하였다. 또 석방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옥중에서 생애를 다하려고 다짐하기까지 하였다.
다시 1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그의 순교 열망은 사라지지 않았고, 치도곤 60대를 맞고도 오히려 순교가 가까워졌음을 알고 즐거운 낯으로 질문에 답하곤 하였다. 결국 포도대장은 음력 윤 3월 18일 그에게 교수형을 언도하였다. 옥중에서 그가 남긴 한 마디는 다음과 같이 순교를 각오한 단 한 마디였다.
나는 천주교인이오.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입니다.
순교 후 그의 유해는 아들 김성희(암브로시오) 등에게 거두어져 고향에 안장되었으며, 1927년 5월 30일에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명동 성당을 거쳐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현재 구산 성지에는 그의 무덤과 두 형제의 무덤, 1868년 3월 8일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김성희와 김윤심의 아들인 김경희의 무덤이 있으며, 같은 날에 순교한 김덕심의 둘째 아들 차희와 김주집의 아들 윤희의 가묘, 그리고 1867년에 포도청에서 순교한 최지현의 무덤이 있다.
12) 이처럼 모방 신부의 순방지들이 나타나는 데 비해 샤스탕 신부가 방문한 공소나 교우촌은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앵베르 주교가 방문한 곳 중에서는 유일하게 "갓등이"(旺林, 경기도 화성군 왕림리) 공소가 기록에 나타난다. 언제부터 이곳에 교우촌이 형성되었는지는 분명하게 알 수 없지만, 수리산, 골배마실 등과 같이 대략 1830년을 전후하여 이미 교우촌이 형성되었음이 분명하며, 그 무렵에는 인근에도 교우촌들이 있었다.
앵베르 주교는 그 후 이곳에 교회 전답을 마련해 놓았다. 그리고 인천 출신인 성 민극가(閔克可, 스테파노) 회장에게 이곳에 거처하면서 교우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교회서적들을 번역하도록 하였다. 이에 앞서 그는 천주가사 [삼세대의](三世大義)를 저술하여 신자들에게 순교 신심을 심어주기도 하였다.
13) 1838년 12월 20일부터 다음해 초까지 앵베르 주교는 서울을 떠나 인근의 공소들을 순방하였다. 처음 수리산 공소에 들러 성탄 축일을 지낸 그는 1839년 1월 25일에는 갓등이 공소에서 성사를 집전하였다. 그러나 이미 수리산에 있을 때부터 박해 소식을 듣게 되었고, 갓등이 공소에서는 다시 서울의 박해 소식을 듣게 되었다.
14) 이에 서둘러 상경한 그는 되도록 많은 신자 집단을 방문하고 성사를 주려고 하였으나, 남명혁(南明赫, 다미아노)과 이광헌(李光獻, 아우구스티노) 회장을 비롯하여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자 일단 지방으로 피신하기로 하였다.
주교의 피신을 도운 것은 홍주 출신의 교우 손경서(안드레아)였다. 그는 비밀리에 서해안 가까이에 있는 수원의 '송교'(松橋,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마을에 은신처를 마련해 놓았으며, 주교는 인천에서 배를 타고 이곳으로 피신하였다.
15) 그 동안에도 밀고자 김순성(金順性, 일명 여상)에 의해 후동 주교의 집을 지키던 정하상, 수리산의 최경환 회장 등이 체포되었다. 이어 1839년 8월 10일에는 마침내 김순성이 포졸들을 이끌고 온 것을 안 앵베르 주교가 자수하였고, 9월 6일에는 모방과 샤스탕 신부가 충청도 홍주에서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5. 끝없는 순교의 터전
기해박해로 서소문과 새남터는 다시 한번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게 되었다. 이때 대부분의 신자들은 서소문에서 순교하였지만, 프랑스 선교사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는 대역 죄인의 판결을 받고 9월 21일(음력 8월 14일) 새남터 사장에서 군문 효수형을 받았다.
이들 세 명의 시신은 처음 3일 동안 백사장에 방치되었다. 그러나 용감한 신자들은 20일만에 그 시신을 수습하여 '노고산'에 안장하였으며, 1843년에는 '삼성산'(三聖山, 관악구 신림동의 관악산 줄기)으로 이장하였다. 그리고 1901년 시복 조사가 이루어지는 동안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에 의해 유해가 발굴되어 명동 대성당 지하 묘지로 옮겨졌으며, 1967년 시성 작업이 추진되면서 다시 절두산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16) 이 밖에도 기해박해와 관련된 순교터로는 앞서 말한 남한산성과 포도청이 있고, 최해성(崔海成, 요한)이 순교한 강원도 원주, 전 베드로가 순교한 공주 감영의 옥이 있다. 뿐만 아니라 1827년의 정해박해(丁亥迫害) 때 체포되어 12년 동안이나 전주 감영에 갇혀있던 신태보(申太甫, 베드로) 등 5명의 신자들이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에 순교하였다. 신태보는 이에 앞서 샤스탕 신부의 명으로 옥중 수기를 남기기도 하였다. 이들 5명의 처형 장소가 전주 '숲정이'(전주시 진북동 해성고등학교)로, 1801년 이순이(李順伊, 누갈다)와 가족들이 순교한 곳이다.
17) 기해박해의 마지막 순교터는 '당고개'(堂峴, 용산구 원효로 2가)였다. 박해도 거의 끝나가던 12월 27일(음력)과 28일에 이곳에서 10명의 순교자가 탄생한 것이다. 그중 갓난 아이 때문에 마음이 약해진 적이 있던 최양업 신부의 모친 이성례(마리아)를 제외한 박종원(朴宗源, 아우구스티노)과 이문우 등 9명은 훗날 성인품에 오르는 영광을 차지하였다. 이 당고개는 본래 형지가 아니었으나, 상인들이 곧 닥쳐올 설날 대목장이 방해받지 않도록 조정에 요청한 결과 처형 장소가 옮겨지게 된 것이다.
D.베르뇌, 다블뤼 주교 관련 사적지
1. 다블뤼 신부와 공주의 교우촌
박해 시대 조선 땅에서 가장 오랫동안 활동한 선교사는 훗날 제5대 교구장에 오르는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였다.
그는 본래 류우쿠(琉球) 선교사였으나 1844년 9월에 마카오에 도착한 뒤 제3대 주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간청을 받아들여 조선 선교사가 되었고, 1845년 10월에 27세의 나이로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안내를 받아 충청도 강경에 발을 딛게 되었다. 그때부터 1866년 3월까지 그는 사제로서 11년 5개월 동안, 주교로서 9년 동안 이땅에서 생활하면서 갖가지 유형 무형의 자취와 업적을 남겨 놓았다.
조선에 도착한 다블뤼 신부는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 한양 근처의 작은 교우촌에 머물면서 조선어를 배운 뒤, 이듬해 정월부터 눈 속에 숨겨진 교우촌을 찾아 다니며 성사를 베풀었다. 그러다가 병오박해로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자 페레올 주교와 함께 충청도의 한 교우촌으로 피신하여 지내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1846년 11월 2일 성모 마리아의 보호에 감사를 드리려고 가까운 교우촌으로 거처를 옮기고 몇몇 신자들과 함께 성모 성심회(聖母聖心會)를 창설하였으니, 그 곳 이름이 곧 '수리치골'(현 충남 공주군 신풍면 鳳甲里)
1) 이었다.
선교사들은 성모 마리아께 대한 감사의 표시로 파리 '승리의 성모 성당'에 본부를 둔 '성모 성심회'를 조선에 설립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곤란한 것은 이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 데 적합한 장소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당시 그들에게는 경당(經堂)이 없었으므로 많은 신자들이 모이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결국 그들은 외딴 곳에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는 신입 교우 한 가족이 사는 조그마한 오막살이를 골라 잡았다
.2) 위의 기록을 볼 때 수리치골에는 처음부터 교우촌이 형성된 것이 아니었고, 다만 신입 교우 한 가족만 살고 있던 외딴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가 이곳을 방문하여 성모 성심회를 설립함으로써 자연히 인근의 신앙 중심지가 되었으며, "주일이면 신자 몇 명이 이곳에 와서 전세계에 퍼져 있는 성모 성심회 회원들과 뜻을 모아 성모 마리아의 성화(聖畵) 앞에서 몇 가지 기도문을 외우면서 그분을 찬양하고 죄인들의 회개를 빌게 되었다."
3) 다블뤼 신부는 이때 수리치골 한곳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그가 담당한 지역은 공주를 비롯하여 충청도 전역과 경상도와 전라도 일부 지역으로 매우 넓었기 때문이다.
3년 뒤인 1849년 12월에는 최양업(토마스) 신부가, 1852년에는 매스트르 신부가 입국하면서 조선에서 활동하는 성직자의 수가 어느 때보다도 많아지게 되었다. 그러나 1853년 2월 3일에는 페레올 주교를 잃게 되었다. 이에 앞서 한양으로 올라와 인근에서 성사를 집전하고 있던 다블뤼 신부는 이틀 후 주교댁에 도착하여 다음날 아침 주교의 시신을 모시고 미사 성제를 드린 다음, 그 관을 한 신자에게 맡겨 놓았다가 4월 11일에야 미리내에 안장할 수 있었다. 페레올 주교가 사망한 다음 한국 교회의 장상은 연장자인 매스트르 신부가 맡아보았다.
1854년에는 새로 쟝수(Jansou, 楊)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였다. 그때 다블뤼 신부는 충청도 유구(維鳩) 인근의 산간 마을인 '둠벙이 교우촌'(현 공주군 신하면 造平里)에 머물고 있었는데, 쟝수 신부가 입국하자마자 심한 뇌염에 걸렸으므로 그를 둠벙이로 데려와 보살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보살핌에도 병을 이겨내지 못한 채 1854년 6월 18일 둠벙이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4) 이렇게 볼 때 둠벙이는 다블뤼 신부가 공소로 설정한 교우촌 가운데 하나였음이 분명하고, 이곳 교우촌 신자들이 쟝수 신부의 마지막을 지켜 보았을 것이다.
2. 베르뇌 주교의 활동과 본당 중심지
다블뤼 신부는 1851년에 한때 병으로 공소 순방을 할 수 없게 되면서 어린 소년들을 신학생으로 양성하는 임무를 맡아보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1855년 초 장상 매스트르 신부가 '배론 성 요셉 신학교'를 설립한 후에도 별도로 계속되었는데, 그 이유는 배론 신학교가 비좁고 위험한 탓에 많은 신학생들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의 상황이 이러했을 때, 1854년 8월 5일 제4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2월 27일 요동에서 성성식을 가진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푸르티에(Pourthie, 申),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와 함께 1856년 초에 입국하여 3월 29일에는 한양에 도착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한양 '전동'(典洞, 현 종로구 견지동)에 있던 이군심(李君心)의 집에 머물면서 조선어를 배운 뒤 한양과 경기도 일대의 교우촌을 순방하였다. 전동은 앞서 매스트르 신부가 머물던 곳이기도 했으며, 한국 천주교회 최초로 성성식이 치러진 곳이기도 했다. 곧 베르뇌 주교는 교황청에서 위임한 대로 1857년 초에 다블뤼 신부를 자신의 보좌 주교로 선택했는데, 그의 성성식은 3월 25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에 전동의 주교관에서 아주 비밀리에 조촐히 거행되었다.
성성식 다음날인 3월 26일, 베르뇌 주교는 3일 동안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성직자 회의를 열고 여기에서 결의한 사항을 [장주교윤시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라는 이름으로 신자들에게 반포하였다. 그런 다음 신자들의 기도 생활과 교리 교육을 위해 다블뤼 주교와 최양업 신부에게 교회 서적을 번역하거나 저술하도록 하였으며, 1859년에는 한양에 목판 인쇄소를 세우고 그 운영을 최형(崔炯, 베드로)에게 위임하였다. 이 목판 인쇄소는 1864년 이전에 두 개로 늘어났다.
1861년 초에 조선의 성직자 수는 크게 늘었다. 리델(Ridel, 李福明) 신부 등 4명의 선교사가 새로 입국했기 때문이다. 이에 고무된 베르뇌 주교는 같은 해 10월에 조선교구를 주보이신 성모 마리아께 봉헌하면서 배론 신학교 지역을 제외한 교구 전체를 모두 7개의 지역 본당으로 나누어 전담 선교사를 임명하였다. 이때 정해진 본당들은 베르뇌 주교가 담당한 한양을 비롯하여 페롱(Feron, 權) 신부가 담당한 경상도 서북부 지역, 칼래(Calais, 姜) 신부가 담당한 경상도 서부 지역, 다블뤼 주교의 상부 내포 지역, 랑드르(Landre, 洪) 신부의 하부 내포 지역, 그리고 공주에 중심지를 둔 리델 신부와 죠안노(Joanne, 吳) 신부 지역이었다. 최양업 신부는 이에 앞서 전국의 외딴 교우촌들을 순방하다가 6월 15일에 사망하였다.
이들 가운데 리델 신부의 본당 중심지는 '진밭'(현 공주군 사고면 新永里)
5)에 있었고, 죠안노 신부의 본당 중심지는 앞에서 말한 둠벙이에 있었다. 리델 신부는 이때 충청도 동북부와 전라도, 경상도 지역을 담당하였으며, 죠안노 신부는 주로 공주 지역과 충청도 서북부 지역을 순방하였다. 그리고 랑드르 신부의 본당 중심지는 '황모실'(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好音里)에 있었는데, 이곳은 본래 매스트르가 담당했던 지역으로 그는 1858년에 사망하여 황모실 교우촌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본당 분할은 얼마 안되어 와해되고 말았다. 죠안노 신부와 랑드르 신부가 1863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조선 입국 이후 둠벙이 교우촌에서 생활하던 죠안노 신부는 병을 얻어 오랫동안 리델 신부에게 보살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1863년 4월 13일 병이 악화되어 그곳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어 리델 신부는 6월 19일에 또 다른 동료의 죽음을 전해 듣게 되었으니, 그것은 황모실에서 열병으로 고생하던 랑드르 신부가 그 전날 사망했다는 것이다. 당시 리델 신부는 죠안노 신부의 최후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였다.
부활 축일 전날 죠안노 신부가 너무나 쇠약해져 있었으므로 종부성사를 주고 그와 함께 밤을 지샜습니다. 그동안 그는 기도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입술에서는 자주 화살기도와 천주께 대한 열렬한 갈망의 말이 새어 나왔습니다. … 4월 13일 월요일 정오쯤에 그는 두 번 하늘을 향해 눈과 팔을 올리고 미소짓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내 저녁 7시 반에 조용히, 그리고 아무런 동요없이 그의 아름다운 영혼을 천주께 바쳤습니다.
6) 31세의 젊은 나이에 병사한 죠안노 신부의 시신을 신자들은 둠벙이 교우촌의 동쪽 골짜기에 안장하였다. 이후 그의 무덤은 1970년대 초 유구 본당의 크랭캉(강 요한) 신부에게 발견되었고, 그의 묘비를 건립한 이래 지금까지 그곳 산 중턱에 남아 있으며, 이름없는 교우촌 신자들의 무덤 몇 기가 그 아래로 함께 조성되어 있다.
7) 한편 랑드르 신부의 시신은 황모실에 안장되었다가 1970년 4월 30일에 매스트르 신부의 유해와 함께 합덕 본당 경내로 이장되었다.
3. 병인박해와 베르뇌, 다블뤼 주교
최양업 신부가 사망한 뒤 다블뤼 주교는 그의 지역을 맡아 경상도를 순방하였다. 그러면서 1857년부터 계속해 온 한국 순교자들의 자료들을 수집하는데 노력하였으니, 이것이 유명한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다. 그는 이 자료들을 1862년에 1차로 정리하여 파리 외방 전교회 본부로 보낸 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자료들을 정리하면서 계속 보완 자료들을 수집하였다. 그러나 1863년 초에 그 자료를 보관해 놓았던 '판서골'(현 충남 보령군 미산면 삼계리)의 주교댁에 화재가 일어나 그 안에 있던 자료들이 모두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이후 다블뤼 주교는 '신리'(현 당진군 함덕읍 新里)와 그 이웃의 '거더리'(현 예산군 고덕면 上官里)를 오가며 생활하였다.
8) 한편 베르뇌 주교는 거처를 전동에서 '태평동'(太平洞, 현 서대문구 서소문동)
9)으로 옮겨 홍봉주(토마스), 이선이(李先伊) 등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이 무렵에 그는 파리 외방 전교회 본부로 보낸 1865년의 연말 보고서에서 한국 천주교회의 총 신자 수를 2만 3천명으로 보고하는 기쁨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과 희망은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로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박해 초기에 베르뇌 주교는 이선이의 밀고로 자신의 거처에서 체포되었고, 3월 7일(음력 1월 21일)에는 3명의 선교사와 우세영(알렉시오) 등과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하여 신자들이 '와서'(瓦署, 현 용산구 한강로 3가의 왜고개 인근)에 안장하였다. 주교의 시신은그 후 1899년 10월 30일에 발굴되어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에 안치되었다가 명동 대성당을 거쳐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옮겨졌다. 순교 직전 베르뇌 주교는 옥문 앞에 몰려들어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웃고 놀리지 마시오. 당신들은 오히려 울어야 할 것이요. 우리는 당신들에게 영원한 행복을 마련해 주려고 왔었는데, 이제는 누가 천국의 길을 당신들에게 가르쳐 주겠소. 정말로 당신들은 불쌍하오.
10) 베르뇌 주교가 순교한 지 4일 뒤에는 거더리에서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었으며, 이튿날에는 위앵(Huin, 閔) 신부가 '쇠재'(현 충남 예산군 봉산면 金峙里)에서, 오매트르(Aumaitre, 吳) 신부가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함께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이후 그들은 군문효수형의 판결을 받고 황석두(루가), 장주기(요셉) 등과 함께 충청도 '갈매못'(현 충남 보령군 오천면 永保里의 고마 수영)으로 이송되어 3월 30일에 순교하였다. 그 뒤 황석두를 제외한 4명의 시신은 남포(南浦) '서재골'(현 충남 보령군 미산면 平羅里의 서짓골)
11)로 옮겨져 안장되었고, 1882년에 일본 나가사키로 옮겨졌다가 명동 대성당을 거쳐 1967년에 절두산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때 경상도 지역의 교우촌을 순방하던 리델 신부는 박해 소식을 듣고는 공주 진밭으로 돌아와 숨어 있다가 '버시니 교우촌'(현 공주군 신풍면 仙鶴里)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5월 18일에는 인근의 열심인 과부 집에서 페롱 신부를 만날 수 있었다. 여기에서 그들은 '목천 서들골'(현 충남 천안시 목천면 松田里)에 피신해 있던 칼래 신부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런 다음 리델 신부가 먼저 중국으로 피신하기로 하고, '관불 옹기점 교우촌'(현 충남 공주군 유구면 鹿川里)을 거쳐 7월 1일에 아산 용당리에서 배를 타게 되었다. 그 뒤 페롱과 칼래 신부도 중국으로 탈출하였다.
이렇게 베르뇌, 다블뤼 주교와 선교사들이 순교한 뒤에도 박해는 계속되었다. 특히 1866년 9월과 11월 사이에 발생한 병인양요(丙寅洋擾)로 흥선 대원군은 선참후계(先斬後啓)의 법령을 반포하였으며,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함이 거슬러 왔던 양화진(楊花鎭) 인근의 잠두봉에는 새 형장이 조성되었다. 이후 1866년 10월 22일(음력 9월 14일)에 이의송(프란치스코) 가족이, 10월 25일에 황해도 출신의 박영래(요한) 회장이 효수된 것을 비롯하여 이곳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는데, 이때부터 잠두봉은 '절두산'(切頭山)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4. 계속되는 박해와 순교
박해가 계속되면서 전국에서 신자들이 체포되어 각 도의 수부(首府)나 군사들의 주둔지인 진영(鎭營)에서 희생되었다. 먼저 흥선 대원군이 1866년 11월 21일 천주교도들을 남김없이 색출해 내도록 전국에 명한 이틀 뒤인 11월 23일에는 성연순 등이 '강화 진영'에서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전라도에서는 정문호(바르톨로메오), 조화서(베드로) 등 6명이 체포되어 형벌과 문초를 받은 뒤 1866년 12월 13일(음력 11월 7일)에 '서문 숲정이'(현 전주시 진북동의 옛장대)에서 순교하였다.
12) 또 조화서의 이들 조윤호(요셉)는 전주 '서천교 장터'(현 전주시 동완산동)에서 매를 맞아 순교하였다.
경기도에서는 광주 유수가 거처하던 '남한산성'(현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에서 정은(바오로)을 비롯하여 여러 순교자가 탄생하였으며, 수원과 죽산의 '이진터'(현 경기도 안성군 일죽면 죽림리), 남양 등지에서도 많은 신자들이 칼날 아래 희생되었다. 또 대구 '관덕정'(현 대구시 중구 남산 2동)에서는 1867년 1월 21일에 이윤일(요한)이 군문효수형을 받았고, 경상남도에서도 정찬문(안토니오) 등이 순교하였다.
13) 충남 지역에서는 손자선(토마스)이 1866년 3월 30일에 공주 '황새 바위'(현 충남 공주시 교동)에서 순교한 이래 해미와 홍주 진영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처형되었다.
무진년(1868)에는 독일 상인 오페르트의 덕산 굴총 사건(德山掘총事件)으로 박해가 재연되었다. 대원군은 다시 한 번 이 사건을 빌미로 천주교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이미 체포되어 있던 신자들에게 역률(逆律)을 적용하여 처단하였고, 배교한 경우도 유배형에 처하였다. 이때 먼저 오페르트에게 협력한 손경노(요한), 이영중 등이 체포되어 보령 갈매못에서 효수형을 받았다.
이어 한양의 포도청과 각 도의 감영에 신자들을 수색, 체포하도록 하는 명이 내려졌다. 그 결과 우선 중국을 왕래했던 교회 밀사 장치선 등이 처형되었고, 굴총 사건이 일어난 충청도 덕산과 해미 일대는 물론 서울의 포도청과 절두산, 경기도의 수원, 죽산, 남양, 충청도의 공주, 홍주, 충주, 청주, 전라도의 전주, 나주, 여산, 경산도의 대구, 울산, 진주, 황해도의 해주, 황주, 함경도의 영흥 등지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이처럼 무진박해와 관련된 순교 사적지는 그 어느 박해 때보다도 많게 되었다.
당시 조정에서 내린 명령은 주로 참수형이었지만, 지방에서는 주로 교수형이나 장살, 생매장 등 남형(濫刑)을 적용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교수형으로 순교한 신자들이 많았는데, 이 형벌에는 구명이 있는 큰 돌(일명 형구돌)이나 벽에 뚫은 구명에 줄을 넣고 순교자의 목을 얽어맨 다음 반대편에서 줄을 당기는 방법이 있었고, 한 번에 많은 신자들을 처형할 경우에는 두껍고 큰 널판 가운데로 여러 구명을 뚫고 줄을 꿴 다음, 신자들의 목을 구명에 넣도록 하고 양쪽에서 줄을 당겨 죽이는 방법이 있었다. 또 생매장의 예는 충청도 순교자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는데, 수부인 공주에서는 행해지지 않고 지방인 홍주나 해미 진영에서만 적용되었다.
무진박해는 1869년에 이어 1870년대 초까지 계속되다가 잠잠해지게 되었으나, 1871년에 미국 함대가 내침하는 '신미양요'로 재개되었다. 이때 대원군은 그 함대를 격퇴한 다음 6월 12일(음력 4월 25일)자로 명을 내려 서울의 종로와 8도 각 지역에 척화비(斥和碑)를 건립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서양 오랑캐가 침범해 오면 싸우거나 화친해야 하는데,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글귀를 새기도록 하여 척사 사상을 고취시켰다.
물론 양요 사건은 조선의 위정 척사 의식을 더욱 고착시키면서 천주교를 서양 세력의 앞잡이로 인식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대원군은 '위정'이 아니라 '척사'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고, 적어도 천주교에 대해서만은 위정에 필요한 교화 정책을 전혀 쓰려고 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아울러 그는 천주교 신자들을 매국자로 매도하고 처형함으로써 병인박해를 집권의 한 방편으로 이용하였고, 이것은 북경 조약 이후 더욱 강하게 드러난 조선 사회의 위기 의식이나 위정 척사사상과 맞물려 정당성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반면에 교회 내적으로 볼 때, 우선 병인박해는 최대의 박해로 유례없이 많은 순교자들을 탄생시켰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최후의 박해였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다음으로 이 박해 때문에 한국 천주교회는 다시 한 번 침체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박해가 복음의 씨앗을 더 멀리 뿌리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박해 과정에서 깊어져 간 순교 신심은 훗날 순교터와 순교자들의 무덤들이 사적지로 조성되면서 순교자 현양 운동과 함께 현대의 교회로 이어지게 되었다. 다만, 병인박해 순교자 중에서 24위만이 시성되었을 뿐이므로 아직 시성되지 못한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하고, 관련 사적지들을 개발하는 일이 과제로 남아 있다.
1) 차령 산맥의 막다른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는 수리치골에는 현재 '미리내 천주 성삼 성직 수도회'의 수련원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곳에는 전답의 흔적이 없고 마을은 그보다 훨씬 아래쪽에 있다.
2) "페레올 주교의 1846년 11월 6일자 서한", [한국 천주교회사] 하, 136-137면. 이 성모 성심회는 1836년 12월 16일, 파리 '승리의 성모 성당'에 재임하던 데쥬넷트(Desgenettes) 신부가 창설한 신심 단체로, 최양업(토마스) 신부도 귀국하기 전에 만주에서 스승 리브와(Libois) 신부와 함께 여기에 가입한 적이 있었다.
3) "다블뤼 신부의 1847년 10월 서한", [한국 천주교회사] 하, 137면.
4) [한국 천주교회사] 하, 206-207면. 쟝수 신부의 무덤은 아마도 둠벙이 가까이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재 그 무덤이 발견되지 않고 있는데, 훗날 이곳에서 선종하여 그곳 뒷산에 안장된 프랑스 선교사 죠안노(Joanno, 吳) 신부의 무덤 이웃에 있지 않나 추정된다(다음의 본문 내용을 참조). 둠벙이 교우촌은 그 후에도 유지되었으며, 1866년에는 순교자를 탄생시키게 되었다.
5) '진밭'은 지금까지 공주군 사곡면 신영리(新永里) 또는 운암리(雲岩里)의 '장밭'(長田)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훗날 진밭에서 오랫동안 거처했던 리델 신부가 그린 지도를 보면 운암리가 아니라 신영리인 것이 분명하다([리델문서 I],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1994, 57, 189면 지도 참조).
6) "리델 신부의 1863년 9월 9일자 서한", [한국 천주교회사] 하, 344면.
7) 차기진, "청양 일대의 사적지와 명곡리 교우촌"(II), [교회와 역사] 210호(1992. 11.), 1920면 참조.
8) 다블뤼 주교가 병인박해 이전에 거처하던 '신리의 주교댁'은 1927년 5월 1일 합덕 본당의 페랭 신부와 신자들이 매수하여 사적지로 조성하였으며, 1969년 4월 30일 그 앞에 병인 순교복자 기념비를 제막하였다. 본래 신리의 주교댁은 초가였으나, 사적지 조성 과정에서 함석집으로 개조하였다고 한다.
9) 다른 증언 기록에는 태평동 주교관이 '관우물골'(井洞, 현 중구 태평로 2가)로도 나오는데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현대문-],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1987, 338면), 태평동과 관우물골은 함께 붙어 있던 마을이다.
10) [한국 천주교회사] 하, 400면.
11) 당시 황석두의 시신은 집안 사람들이 곧바로 찾아갔으며, 다블뤼 주교 등 4명의 시신은 신자들에 의해 일단 갈매못 인근에 묻혔다가 1866년 7월 13일에 발굴되어 2, 3일 뒤 남포 서재골(또는 서짓골) 담배밭에 안장되었다(앞의 책, 370-373면). 서재골은 흔히 '남포 서들골'로 알려져 왔으며, 현재 그 정확한 위치는 밝혀 있지 않다.
12) 전주 숲정이의 순교자 6명의 시신은 진북동 범 바위(일명 부엉 바위) 밑에 가매장되었다가 후손들이 '막고개'(전북 완주군 소양면 유상리)와 '다리실'(전북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의 天呼聖地) 등에 반장하였다. 그 중 막고개의 이명서(베드로) 유해는 1920년에 '모시골'(전북 진안군 진안면 어은동)로, 1968년에 절두산으로 옮겨졌다가 1988년에 천호 성지로 옮겨져 안장되었으며, 이에 앞서 천호산에 안장되어 있던 무덤들은 1939년에 순교자 묘역으로 단장되었다. 그러나 조화서 부자 등 몇몇 순교자들의 무덤은 소실되었다.
13) 이 중에서 정은의 시신은 후손들이 고향으로 옮겨 현재 '단내 사적지'(경기도 이천군 호법면 단천리)에 안장되어 있으며, 이윤일의 시신은 대구에서 미리내로 옮겨져 안장되었다가 1991년에 대구 '관덕정 순교 기념관'으로 옮겨졌고, 정찬문의 무덤은 1947년에 진주 문산에서 발견되어 이듬해 순교 사적지로 조성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