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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문화생생톺아보기 프로그램 소책자(용량초과로 사진 제외 본)
대구작은도서관 활성화 프로그램
2021 주민과 함께하는
중구문화 생생 톺아보기
일시 : 2021년 6월 15일 – 12월 15일
장소 : 한국수필문학관, 대구 중구 일대
(사)한국수필문학관
자료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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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수필가, 근대기록물 조사원 )
이기도(시인, 대구문협 사무국장)
천윤자(수필가, 영남일보 시민기자)
기획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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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억선(수필가, 대구수필작은도서관장)
- 이 자료집은 대구시 작은도서관 활성화 프로그램 교재로서
집필자의 동의를 얻어 한국수필문학관에서 기획 편집하였습니다.
목 차
Ⅰ. 소통과 참여, 희망의 새 중구 /발표 홍억선
Ⅱ. 1코스, 경상감영길 / 발표 김영희
1. 대구문학관과 향촌문화관
2. 최고 번화가였던 북성로
3. 대구읍성
4. 교동시장과 쥬얼리 타운
5. 삼성그룹의 태동, 삼성 상회
Ⅲ. 2코스, 근대 문화 골목 /발표 백금태
1. 청라 언덕, 3.1만세 운동길
2. 기독교 성지와 선교사 주택
3. 약령시와 화교 소학교
4. 진골목
Ⅳ. 3코스, 달성공원 서문시장길 /발표 이미란
1. 달성공원
2. 순종황제 어가길
3. 서문시장
4. 계성학교와 신명학교
Ⅴ. 4코스, 남산 100년 향수길 / 발표 이숙희
1. 관덕정
2. 대구의 천주교 성지
3. 계산 성당과 화가 이인성
4. 이상화, 서상돈 고택
Ⅵ. 5코스, 봉산 대봉 문화길 /발표 안연미
1. 대구향교
2. 한국수필문학관
3. 건들바위
4. 김광석 길과 방천시장
Ⅶ. 그 외 명소
1. 2.28 민주화 운동 기념 회관
2. 동인아파트
3. 전태일 기념관
4. 동인 찜갈비
5. 수창초등학교
- 참고 자료
Ⅰ. 소통과 참여, 희망의 새 중구
1. 대구시 중구의 행정적 기능
중구는 중앙에 있는 자치구로써 도심이 형성되어 있다. 동편에 흐르는 신천을 경계로 동·수성구로 나뉘며 명덕로를 경계로 남구, 달성공원 서편 기슭과 비산동 동편을 경계로 서·달서구와 나뉜다. 또한 대구역의 동서로 뻗은 경부선 철길을 따라 북구와 경계를 이룸으로써 중구는 동·서·남·북·수성·달서구에 둘러싸여 있다.
또한 중구는 조선시대 이래 경상감영이 위치했던 곳이다. 지금도 시청 등 행정 기능과 각종 관리 기능이 집중되어 있을 뿐 아니라 중심 상가도 이곳에 형성되어 있다. 소매 기능 외에 도매 기능이 발달해 대구와 경북 일대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다. 중구가 심장부 역할을 수행하고 있어 오늘날의 대구로 발전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3대 도시로 성장한 근원지가 중구라 할 수 있다.
지역의 특성은 대구의 다운타운으로 비지니스 거점 도시이며, 교통 상권의 요충지로 도심 관리 기능이 확대되어 있다. 중구는 중앙부에 주간 활동 인구의 과밀 현상을 보이며 정보화 추진 기지로 금융, 유통, 행정 기관이 밀집되어 있다. 외곽에는 달성동,대신동, 남산동, 대봉동, 동인동 등 전통적 주택 지대가 도심을 둘러싸고 있다. 역사와 문화 유산이 산재된 중구는 문화와 예술, 관광의 중심지이다.
구정의 방침은 구민과 함께 만드는 사람 중심 중구로 도시 재생 창조 중구, 문화중심 관광 중구, 생활 밀착 복지 중구, 사람 중심 안전 중구, 인재 양성 교육 중구를 구정 방침으로 정하고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12개 행정동(57개 법정동)이 있다.
중구의 행정구역은 동인동, 삼덕동, 성내1~3동, 대신동, 남산1~4동, 대봉1·2동 등 12개 행정동이 있다 (법정동 기준 57개동). 구청 소재지는 대구광역시 중구 국채보상로 139길 1(동인동2가)이다. 대구시의 일곱 구 중에 면적이 가장 작아 7.06㎢이며 시 전체 면적의 0.8%를 차지한다. 지하철 1·2·3호선이 모두 중구를 지나가며, 대구시청의 소재지이기도 하다. 인구 77,282명(2020)있다.
2. 중구의 상징
중구를 상징하는 마크의 심벌 디자인은 대구시의 지역 형태를 나타내며 중구를 지역형태의 중심에 흰색 원으로 나타내고, 태양처럼 떠오르는 주황색으로 표현하였다. 기본 형태의 파랑색은 희망과 전진을 추구하는 젊음의 도시 이미지이고 안의 흰 원은 구민을 향한 순수한 봉사와 사랑 그리고 깨끗한 환경을 의미하며, 전체 모양은 역동적으로 날아가는 형태로서 미래로 뻗어가는 중구의 기상을 담고 있다.
중구 캐치프레이즈는 소통과 참여 희망의 새 중구이며 근대로의 여행 배지가 있다. 중구의 나무는 느티나무로 이는 굳건한 의지와 풍요롭게 번영하는 중구를 상징한다. 중구의 꽃은 백일홍으로 참을성이 많으며 끈기 있고 친숙한 구민 정신을 상징한다. 중구의 새는 백로이며 우아하고 정결한 기품과 화합·단결하는 구민 기상을 상징한다.
3. 중구의 역사
‘삼국사기’에 의하면 경덕왕(742~765) 때 수창군과 그에 딸린 대구현, 팔리현, 하빈현, 화원현 등 총 다섯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지역의 중심지가 오늘날의 달성공원인 달성 토성터이다.
그 후 1143년(인종 21)에 대구현이 주현으로 승격되면서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르게 되었다. 대구현은 인구가 증가하여 1419년(세종 1)에 대구군大丘郡으로 승격하였다. 이후 1466년에는 대구도호부로 승격하여 지리·군사적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이 지역이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1596년(선조 29) 대구 달성에 경상감영을 설치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통감부가 설치되고, 1910년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조선총독부 지방 관제’에 의해 종래의 감영제가 폐지되고 대구군은 대구부로 개칭되었다. 1938년에 다시 대구부의 행정 구역이 이전보다 11배 이상 크게 확장되었다.
대구 읍성은 1736년(영조 12)부터 축조하고 대수리 공사를 거듭해 1870년에 이르러 완전한 준공을 이루었다. 대구 읍성의 ‘진동문’은 현재 동아 백화점 남쪽 도로와 동성로가 교차되는 도로, ‘달서문’은 중부 경찰서를 거친 서향 도로와 서성로가 교차하는 도로, ‘영남 제일관’은 약전 골목 종로~남성로 교차 네거리, ‘공북문’은 대안 성당 뒷길과 북성로가 마주치는 지점에 있었다. 또한 ‘동소문’은 대구 백화점과 중앙 파출소가 연결되는 지점, ‘서소문’은 서문 교회 입구 골목 앞에 있었다.
대구 읍성의 성벽이 철거되고 성내에 남북으로 5칸 도로인 오늘날의 중앙로가 건설되었다. 1907년 4월에는 동•서•남•북의 성벽이 완전히 철거되었고, 철거된 성벽을 따라 동성로·서성로·남성로·북성로 총 4개의 간선 도로가 개설되었다.
1953년 4월에 대구시 직할 동 중 동인 1가 외 16개동을 관할하는 중부 출장소와 덕산동 외 37개동을 관할하는 종로 출장소가 설치되었다. 이후 1963년 1월 1일 중부·종로 출장소가 통합되어 중구라 칭하게 되었다.
1964년 12월 1일 북구 태평로 3가를 편입하였으며, 1970년 7월 1일 봉산동을 봉산 1구, 봉산 2구로 분동하였다. 1980년 4월 1일 남구 남산동·대봉동 일부를 남산 1동, 남산 2동, 남산 3동, 남산 4동으로, 남구 대명동 일부를 대봉 1동, 대봉 2동으로 중구에 편입하였고, 1981년 5월 16일 구청사를 현 시청주차장 소재인 동인 2가 1번지에서 동인 2가 78번지로 이전하였으며, 7월 1일 대구직할시 중구로 승격하였다. 1988년 5월 1일 자치구로 설치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 광역시 개칭으로 대구광역시 중구로 개칭되었다. 1999년 6월 1일 구청소재지가 동인동 2가 177-4번지로 이전 되었으며, 2011년 행정동 통폐합으로 13개 행정동에서 12개 행정동이 되었다.
4. 중구의 유물 · 유적
중구의 지정문화재로는 사적과 등록문화재, 중요민속 문화재 등이 있다.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제62호 ‘대구 달성’과 제290호 ‘대구 계산동 성당’, 제442호 ‘구 대구의학전문학교 본관’, 제443호 ‘구 도립대구병원’이 있다. 등록문화재로는 제5호 ‘구 대구사범학교 본관과 강당’, 제15호 ‘대구 동산병원 구관’이 있고, 중요민속 문화재로 제229호 ‘진주 하씨 묘출토 유물’이 있다.
‘대구 달성’은 1939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원래 대구의 옛 부족 국가였던 ‘달구벌’의 토성으로서 우리나라 성곽 발달 사상 가장 이른 시기에 축성된 성곽의 하나이다. ‘달성 공원’이라는 이름도 바로 그 토성에서 유래하였다.
‘계산성당’은 1887년에 착공하여 1899년 한국식 목조 십자형 건물로 완공되었으나 1900년 소실되어 1902년에 다시 고딕 양식이 가미된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로 건립되었다. 이 건물은 ‘로베트’ 신부가 설계했으며 공사는 화교가 맡았다고 한다. 당시 대구 지역에서 최초로 세워진 서양식 건물로, 화강석 기단 위에 붉은 벽돌을 쌓고 검은 벽돌의 고딕식 두 개의 종각이 우뚝 솟아 있어 ‘뾰족집’이라는 별명이 있다. 이 건축물은 대구 지방의 유일한 1900년대 성당 건축물로서 매우 중요한 종교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현재의 본당은 1918년에 증축된 것이고 1981년에 사적으로 선정되었다.
중요민속문화재 ‘진주 하씨 묘출토 유물’은 1989년 현풍 곽씨 문중에서 조상의 묘소를 이전하던 중 발견된 17세기 초반의 총 249점의 유물이다.
대구광역시 시도유형 문화재는 총 19점으로, 관찰사가 공무를 집행하던 곳과 관찰사의 관사인 제1호 ‘선화당’과 제2호 ‘징청각’이 있다. 그리고 일제 시대 선교사들의 주택이었던 제24호 ‘스위츠 주택’, 제25호 ‘챔니스’ 주택, 제26호 ‘블레어’ 주택이 있다. 제29호 ‘성모당’, 제30호 ‘대구 제일 교회’, 제43호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 성당’은 대구 지역에 천주교와 기독교가 뿌리내리게 된 성지로서 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 외에도 제44호 ‘남산 초등학교 강당’, 제45호 ‘계성학교 아담스관’, 제46호 ‘계성학교 맥퍼슨관’, 제47호 ‘계성학교 핸더슨관’, 제48호 ‘구 대구상업학교 본관’, 제49호‘한국산업은행 대구지점’ 등이 있다.
문화재 자료로 1914년에 지어진 신학교로서 대구 천주교 역사의 상징인 제23호 ‘성유스티노신학교’가 있다. 또한 조선 태조 7년(1398) 지금의 교동에 처음 창건된 것으로 소실과 재건이 반복된 후 1032년 지금의 자리에 위치하게 된 제1호 ‘대구향교 대성전’, 원래 경상감영의 정문이었던 제3호 ‘관풍루’, 서상돈 선생이 대지를 기증함으로써 1915년 세워진 제24호 ‘샬트르 성바오르 수녀원 코미넷관’이 있다.
1982년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된 ‘건들 바위’는 대구 분지의 지반 구조를 잘 나타내어 주는 바위로 그 모양이 삿갓을 쓴 늙은이 같다해서 ‘삿갓 바위’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또한 선사 유적지인 대봉동에서 출토된 고인돌과 초기국가 형성기의 달성 토성이 있다. 대봉동 고인돌은 현재는 경북대학교 박물관 앞에 복원되어 전시하고 있다.
5.중구의 교육·문화
중구에는 1601년(선조 34) 경상감영이 포정동 현재 경상감영공원 자리에 설치되어 행정, 산업, 군무를 통괄하는 관찰사가 상주하게 되었다. 이로써 대구뿐만 아니라 경상도 중심의 역할을 담당한 지역인 만큼 전통적으로 대구 교육의 본거지였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전통 교육 기관은 남산동의 대구 향교이다.
대구향교는 1398년(태조 7)에 현재의 교동에 창건된 후 1400년(정종 2)에 소실되었으나 곧 재건되었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다. 그 후 1599년(선조 32)에 달성 공원 근처에 이전되어 1601년에 중건되었고, 1605년에 다시 교동으로 이전되었다. 그러나 1932년에 또 다시 현 위치에 옮겨지게 되었으며 1973년에는 보수 정화 공사를 하였다.
대구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 ‘사립 달성학교’가 1899년 7월 경상감영 뒤편 공공건물에서 개교하였다. 이 학교는 대구 최초의 학교란 점에서 교육사적 의의가 높지만 일본인에 의해 근대 교육이 행해졌다는 부정적 평가도 함께 받고 있다. 이 학교는 이후 1916년에 ‘대구보통고등학교’에 최종 인계되었다.
대남학교는 1900년 미국에서 온 북장로회 선교사 ‘아담스’(1867~1929)가 제일교회 입구 대문채에 세운 학교이다. 같은 해 ‘브루엔’ 선교사의 부인 ‘마르타 브루엔’에 의해 ‘신명여자소학교’가 설립되었다. 두 학교는 1926년 ‘희도 보통학교’로 통합·개명되었고, 1955년 ‘종로국민학교’로 변경되었다. 이후 1996년 3월 1일 국민학교 명칭 변경으로 오늘날 ‘대구종로초등학교’로 불리고 있다.
1906년 대구 최초의 중등 교육 기관인 ‘계성학교’가 ‘남문안교회’ 내에 개교하였다. 이 학교는 남학생들의 상급 학교 진학 문제를 해결하고자 1946년 계성 중학교로 인가, 1951년 계성 고등학교를 설립, 1963년에는 계성초등학교 설립을 통해 지역의 전통을 지닌 학교가 되었다. 1907년에는 계성학교와 더불어 중등 여성교육을 목표로 한 ‘신명 여학교’가 설립되어, 이후 1952년 신명여자 고등학교로 경상북도로부터 경영권을 인수해 2004년부터 남녀공학으로 변경되어 신명고등학교로 불리고 있다.
현재 동인동에 위치한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은 1910년 동문동에 설립괸 ‘관립 대구 자혜 의원’ 내에 1923년 설립된 사설 의학 강습소에서 출발하였다. 이후 1925년 경상북도로 관리권이 이양되어 ‘도립 대구 의원’으로 개칭, 1933년 전문학교 인가를 받아 ‘공립 대구 의학 전문 대학교’가 되었다. 광복 이후 1951년 경북대학교가 개교하면서 의과대학으로 편입되었고, 병원은 1993년 독립 병원으로 바뀌어 경북대학교병원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구 콘서트 하우스’는 중구 태평로 2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역 문화 예술 진흥에 기여하고 향토 예술의 향상 발전 및 공공 집회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1975년 10월 개관 이래로 현재 약 3,465㎡의 대강당과 419㎡의 소강당 그리고 3개의 전시관을 비롯해 휴게시설 및 부대 시설을 갖추고 있다. 중구 봉산동에 위치한 ‘봉산 문화 회관’은 2004년 10월 5일 개관한 종합 문화 예술 회관으로 주민들의 문화욕구 충족 및 정서를 함양하고 지역 예술 발전을 목적으로 건립되었으며, 중구 문화원도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봉산 문화 회관’은 반월당 지하철역과의 접근성이 용이하며 ‘봉산 문화 거리’ 내에 위치하고 있어 문화 거리와 연계된 문화 예술 회관으로서 자리 매김하고 있다.
그리고 박물관으로는 ‘약전 골목’ 안에 건립된 ‘약령시 전시관’과 향토 역사관이 있다. ‘약령시 전시관’은 현재 각종 한약재와 ‘동의보감’, ‘동의수세보원’ 등의 한의서 및 한방 기구 등 300여 점이 전시되고 있다. 달성공원 내에 위치한 향토 역사관은 중구의 역사, 민속 등과 관련된 유물 자료를 통해 향토 문화유산을 이해하고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1995년 신설되었다.
문화 행사로는 1990년부터 시작하여 매해 5~6월 경 개최되는 ‘동성로 축제’를 비롯하여 ‘봉산 문화 거리’에서 열리는 ‘봉산 미술제’와 남산동 ‘인쇄 골목’ 일대에서 열리는 ‘남산 인쇄 거리 축제’, ‘약전골목’ 일대에서 개최되는 ‘약령시 축제’가 있다.
‘동성로 축제’는 젊은이들의 거리로 인식되는 동성로에서 시민 정서 함양 및 문화 예술의 대중화를 목표로 동성로 전역에서 열리는 축제이다. 이 축제는 1993년 제1회를 시작으로 매해 10월 중순 열리며 ‘봉산 미술제’는 대구 유일의 문화 거리를 중심으로 개최되고 있다.
‘남산 인쇄 거리 축제’는 2000년 제1회를 시작으로 매해 10월 개최되고 있으며 인쇄 기술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약령시 축제’는 1999년 ‘달구벌 축제’에서 독립하여 단일 축제의 모습으로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매해 5월 특별한 테마를 중심으로 개최되어 왔고, 2006년 축제는 전국유일의 ‘한방 특구’로 지정된 약령시를 대표하는 행사다.
Ⅱ. 1코스, 경상감영길
1. 대구문학관과 향촌문화관
대구는 영남학맥이 뿌리내린 곳이며, 기라성 같은 예술인들을 양성하고 배출해낸 자랑스러운 예향의 도시다. 특히 문학부분에서 걸출한 문인들이 한국문학사에 불후의 족적을 남긴 근현대문학의 도시다. 대구문학관은 대구문학의 역사성을 기리고 문학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설립되었다.
대구문학관은 1912년 대구 최초로 건립된 선남상업은행 대구지점의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조성한 문화시설로 2014년 10월 30일 개관하였다. 현재 1,2층은 ‘향촌문화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3,4층에 ‘대구문학관’을 운영하고 있다. 지하 1층에는 대한민국 제1호인 ‘고전음악 감상실인 녹향’이 자리 잡고 있다. 녹향은 1946년 10월 향촌동에서 축음기 한 대로 시작하였으며 지금은 원래의 자리는 아니지만 녹향을 살려야한다는 취지에서 지금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향촌문화관은 1층은 대구 향촌동 주변의 근대 모습을 담은 공간이다. 과거 우리 부모님 세대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2층은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라 할 수 있는 향촌동 다방, 음악감상실, 주점 등을 재현해 놓았으며 유명 예술인들을 사진으로나마 만날 수 있는 있는 공간이다.
대구문학관은 다양한 상설 및 기획전시를 통해 한국 근, 현대문학에 체험 기회를 제공함으로 누구에게나 열린 문학창작공간이자 친숙한 공간으로 문학인구의 저변확대를 운영목표로 삼고 있다.
3층 전시실은 대구근대문학의 찬란한 결실을 상징적으로 전달하는 공간으로 대구문학관 소장 자료를 활용하여 1920~60년대 대구문학사 및 문인을 소개하고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상징 조형물은 죽순을 형상화하여 대구문학의 새로운 미래 의지를 표현하며 죽순처럼 대구문학이 뻗어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작가와의 동행은 대구, 문학, 인생과 관련된 이미지와 문인들의 어록을 바탕으로 대구문학이 걸어온 골목길을 재현했다. 대구문학 아카이브에는 20~60년대 대구 문단사와 문인 47인을 소개하며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명예의 전당에는 대구가 고향인 민족시인 이상화, 사실주의 소설의 대가 현진건, 감각시의 지평을 연 이장희 선생을 소개하고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외 명작갤러리, 명작과 춤추다, 명작스캔들 코너가 마련되어 있다.
4층 전시실은 대구근대문학을 집중 조명하는 기획전시 개최 및 다양한 문학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자료 전시의 원칙은 대구 출신 또는 거주 작가 중 문학적 공적이 한국문학사나 지역문학사에 자리매김 될 수 있는 작가나 작품을 중심으로 전시되고 있다. 전시되고 있는 문인으로 이육사, 박목월, 유치환, 김춘수, 구상, 이영도 선생 등 우리 문단사에 기라성 같은 분들을 소개한다. 자료의 수시 교체 전시 및 기획은 물론 다양한 문학교실이나 세미나 등을 통해 보완하고 공론화해 나간다.
문학관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쉽게 접근하여 지역의 문학과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문학교육의 장소이다. 문학관의 관람객은 유치원생에서부터 연세 지긋하신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계층이 다양하다. 병아리들이 선생님 인솔 하에 줄지어 들어오면 앙증맞고 귀여운 인형의 행진을 보는 듯하다. 중, 고등학생들은 현장 학습을 목적으로 문학관을 찾는다. 학생들은 야외 수업이 주는 해방감으로 들뜬 마음이 표정에서도 읽힌다. 관람 문화가 많이 정착되어 스스로 질서를 잘 준수하니 우리 사회의 성숙한 의식을 느낄 수 있다.
가장 진지한 관람객은 머리가 희끗희끗하신 분들이다. 시간 여유가 많은 분이라 세세하게 읽고 관심을 보인다. 해설사가 모르는 문학의 외적인 부분을 생생하게 증언해 주신다. 향촌동 골목에 관심이 많은 분은 소싯적 인근에 살았거나 젊은 시절 이곳으로 왕래가 잦았던 분들이다. 옛 추억담에 젖어 풀어내는 이야기보따리 속에는 전쟁으로 힘들고 가난하게 살았던 삶들이 떡시루처럼 쟁여져있다. 켜켜이 쌓여있던 속내가 한번 봇물이 터지면 걷잡을 수 없이 술술 풀려나온다.
젊은이들은 부모님 세대가 어떻게 살았었는지 궁금해 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향촌동을 찾아와 사진을 찍고 풍물 사를 돌아보며 공감하는 시간을 가진다. 부모님들은 기억에서 잊히고 묻혀 버린 일상사를 이제 뒤돌아보며 추억에 젖어보는 시간을 가진다. 독특한 색깔과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있고 함께 공유할 수 있어 즐겁게 발품을 들인다. 마술처럼 멀리 서울이나 부산 등 타 지역에서 과거 대구의 모습과 문화예술인에 관심을 보이며 찾아온다.
대구문학관과 향촌문화관은 유치원생에서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계층의 문화공간이다. 과거로 떠나는 시간 여행의 공간에는 볼거리 즐길거리가 많다.
2. 최고 번화가였던 북성로
북성로는 대구읍성의 북쪽 성벽을 헐고 낸 신작로이다. 읍성시대에 공북문이 있었다. 북쪽에 계시는 임금을 향해 손을 모아 공경의 뜻을 표한다는 의미를 가진 문으로 대안성당 북쪽의 두 길이 모여 북성로와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
대구읍성 허물기는 일제에 의해 북성로 쪽부터 시작되었으며 성벽을 허물자 북성로는 자연스럽게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몰려 살았던 곳으로 대구 최고의 번화가였으며 이곳에 은행이 들어선 것도 이때 즈음이다. 대구에서 최초로 전기가 들어온 곳도 이곳이라 그리 멀지 않은 시대에 밤이 되면 주위는 캄캄했지만 이 골목은 불야성을 이루었다.
당시 대구 최초의 백화점이었던 미나까이 백화점이 자리 잡은 곳도 북성로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백화점은 5층 건물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백화점에는 엘리베이터를 타보려고 밀려드는 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하니 이 골목의 번성기를 상상할 수 있다.
더욱이 북성로는 향촌동과 맞닿아 있어 전성기를 누렸다. 도로 양쪽으로 2,3층 규모의 낮고 좁은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그것은 거리에서 보이는 폭에 따라 세금을 매긴 탓에 폭은 좁고 안쪽은 깊게 건물을 지었기 때문이다. 건물은 북향이 많은데 이것은 북향을 선호하는 일본인들의 특성이 담겨 있고 같은 상가라도 북향의 상가 땅값이 더 비쌌다.
골목이 한동안 전성기를 누리다가 광복이 되었다. 철공소, 금속과 같은 기계와 철물점이 들어섰다. 1950년대에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군수물자와 공구, 철물을 모아 판매하는 상인들이 모여 들었다. 현재 공구 골목은 해방이후 미군 부대가 들어서면서 공구 상점들이 옮겨와 형성되었다. 1970년대에는 제3공단, 이현공단과 같은 산업단지가 들어서자 그에 따른 용품을 사러 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1990년대 들어 산업공구 골목으로 발전하였으며 북성로는 대구의 산업과 함께 흥망성쇠를 같이 했다.
번화가의 골목은 돈이 많은 사람들로 상권이 활발했던 곳이라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북성로에 다방이 많아 예술가들의 아지트이기도 했다. 이곳은 한국전쟁시 피난 온 문인이나 예술가들이 다니던 곳이었다. 가난해도 마음만은 부자였던 예술가들은 인근의 골목에서 문학과 예술의 이야기꽃을 피웠다.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시절에 지식인들은 전쟁으로 인한 현실과 앞날에 대한 불안감을 이 골목에서 토로하였다. 북성로 골목은 한 때 문학과 낭만이 공존하는 골목이었다.
근래에 ‘북성로 근대건축물 리노베이션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보존 가치가 높은 근대건축물의 원형을 살려 문화 자산으로 활용하려는 사업이다. 일제강점기에 지은 목조 건물인 삼덕상회를 매입하여 카페로 꾸몄다. 이곳에서 예술가들의 그림이나 사진전이 정기적으로 열린다. 또한 미곡창고로 이용했던 목조 건물을 ‘북성로 공구 박물관’으로 개조하여 이 건물의 2층은 공구를 이용한 체험학습 공간으로 활용한다. 또한 일본식 가옥이나 오래된 집을 리모델링하여 새로운 공간으로 거듭 나는 곳이 곳곳에 있다.
언제부턴가 산업공구 골목은 검단동 유통단지를 조성하여 이전을 권유하고 있지만 사람들의 발길은 여전히 ‘길거리 공구점’으로 향하고 있다. 그래서 요즈음도 북성로 하면 공구 골목을 떠올린다. 시대와 함께 많은 변화가 있었던 북성로에 하루 속히 옛 명성을 되찾는 곳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3. 대구읍성
대구에도 읍성이 있었다. 최초의 대구읍성은 임진왜란 2년 전인 선조 23년 1590년에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하여 토성으로 쌓았다. 그러나 왜군에게 함락되면서 파괴되었다. 영조 12년 1736년 4월부터 돌을 쌓아 다시 축성 공사에 착수했다. 이듬해 완공되어 준공식을 열었다. 이후 여러 번 중수되다가 1906년 10월, 당시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 겸 대구 군수였던 박중양 등에 의해 불법 철거되었다.
대구읍성의 성벽은 지금의 대구 시가지 중심부를 에워싸고 있는 동성로와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 거리를 잇는 구간을 따라 서 있었다.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에 따르면 대구읍성의 전체 둘레는 2,700m, 높이는 5m에 달했다. 읍성의 동서남북으로 난 진동문, 달서문, 영남제일문, 공북문의 4대문과, 동, 서 2소문까지 여섯 개의 성문이 있었고, 성의 모퉁이에는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 망경루라는 4개의 망루가 있었다. 백성들은 출입이 까다롭고 엄격한 4대문 대신 동 서의 두 소문을 주로 이용하였다.
읍성 안으로 북동쪽에는 경상감영이, 북서쪽에는 객사인 달성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경상감영을 중심으로 관청들이 즐비했다. 읍성의 남서부와 동남부를 중심으로 백성들의 주거지역이 형성되어 있었다. 특히 달서문과 진동문 밖에서는 큰 시장이 열렸다. 대표적인 것이 서문시장이다. 달성관 앞마당에서는 매년 2월에 대구에서 약령시가 열릴 때마다 조선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상인들이 찾아드는 큰 장이 열렸다.
강화도 조약의 체결로 문호를 개방한 조선에는 일본인들이 하나둘씩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당시 대구는 읍성을 경계로 상권이 나누어져 있었다. 성내는 조선인 상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일본인 상인들이 이 상권을 장악하기 위해 성벽을 허물려고 했다. 이에 박중양이 그들의 요구를 쫓아 성벽을 허물고 도로를 만들었다,
대구읍성이 헐리고 난 뒤, 달성관도 일본인들에게 넘어갔다. 대구읍성의 철거는 결과적으로 조선인들이 가진 전통 상권을 일본인들에게 넘어가게 했다. 일본인들이 객사를 헐어버리면서 객사 앞 종로 부근을 중심으로 개설되던 약령시의 상권도 사라졌다. 약령시는 본래의 터전을 빼앗긴 채 1910년부터는 남쪽 성벽이 철거된 자리인 지
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성내 거주지역을 일본인들이 잠식하면서 원래 살던 주민들은 서남쪽 구릉지대로 밀려나게 되었다. 일제의 지배기구와 은행, 우체국, 일본인 상점들이 대구역을 중심으로 태평로, 동성로 등 대구 동북부를 중심으로 들어서면서 전통적인 대구의 모습은 사라지고 말았다.
대구시는 1980년 남문인 영남제일관을 대구 수성구 만촌동 망우공원 일대에 복원했다. 이후 중구청은 지난 2002년 대구 한방테마거리 조성공사 때 성벽 석축과 근대 우물, 영남제일관 토층 등을 발굴하면서 대구읍성의 실체를 확인하고 복원 시도에 나섰다.
2012년에는 대구읍성 상징 거리 조성을 위해 성돌 찾기 공모를 벌여 옛 계성고등학교 담장과 아담스관 벽 등 대구 곳곳에서 성돌 300여 개를 모으는 데 성공했다. 이와 같은 모양의 돌들을 동성로 대구백화점 앞 젊음의 광장 일대에 모아 조형물 겸 쉼터로 조성하기도 했다.
북성로와 동성로가 만나는 대구역 맞은편 모퉁이에는 대구읍성 복원 모형도와 안내문을 설치했다. 북성로 일대에서 발견된 성벽 주춧돌도 투명 구조물을 덮어 발굴된 모습을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들었다.
또 중세·근대 지도를 고쳐 현대 주요 도로를 표시한 한글판 읍성 복원지도를 제작하기도 했다. 성곽 터 대부분은 도로로 바뀌어 성곽을 원상 복원하기 힘들어 중구청은 성벽 형상 중앙분리대를 세워 원상 복원을 대신했다.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던 성벽이 결국 일본인들을 위해 철거되었다. 일본인들이 성벽을 철거하도록 한 것은 상권 차지 뿐만아니라 성벽을 파괴하듯이 한국의 전통적인 질서를 파괴하고 허물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4. 교동 시장과 주얼리 타운
교동시장은 대구시 중구 중심에 있어 전철 1호선과 버스 등 시장 접근성이 편리한 덕분에 유동인구가 꽤 많은 편이다. 인근엔 교동귀금속골목, 교동전자상가 같은 전문성 높은 업종부터 구제 의류가게, 수입식품, 식당, 오디오, 조명 상가 등도 있다. 이러다 보니 교동시장 인근 상권까지 함께 교동시장으로 묶어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교동이란 이름은 과거 이 주변에 향교가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대구향교는 1932년 남산동으로 옮겨지고 이름만 그대로 남게 되었다.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모여들어 양키시장이라고 했다. 미제 군복, 수입 과자 등을 파는 곳으로 이름을 떨치다 1956년 3월 교동시장으로 정식 허가를 받았다. 보따리 무역을 통한 수입품과 미군 부대 등에서 흘러나오는 군수품을 기반으로 1970~80년대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상가의 노후화와 협소함 등으로 지금은 꽤 쇠락한 편이다.
2005년 패션주얼리 특구로 지정된 후 2011년에 개관한 대구패션주얼리전문타운이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다. 대구 패션주얼리 특구의 핵심인 교동금속거리는 지역 최대 귀금속 상가가 밀집된 곳이다. 대구시는 오래된 금속거리의 이미지를 탈피하고자 야심 차게 대구패션주얼리타운을 건립했다. 주얼리타운은 제조, 판매자, 전시관, 소공인 특화 지원센터, 아파트형 공장이 이루어진 공간이다.
여러 가지 지원 사업도 타운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소공인을 위한 지원 사업, 일자리 사업 교육과 바이어 상담이 주얼리타운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8층으로 구성된 주얼리타운은 1층에는 20여 개가 모여서 판매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2층에는 웨딩몰이 있다. 3층에 소공인 특화 지원센터 홍보관과 제조업체 작품 전시관이 따로 있다. 시민을 위해서 일반 작가 제품들 전시도 하고 있다. 5층에서 8층까지는 열악한 제조업체의 아파트형 공장이 모여 있다. 진귀한 보석을 전시해 놓은 공간도 있다.
또 시민들이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여러 가지 있다. 반지 만들기, 전통 칠보 만들기, 사진으로 열쇠고리 만들기 등 여러 가지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많이 하고있는 것은 반지 만들기다. 은반지 만들기를 직접 체험하고 만든 것을 가지고 갈 수 있다.
교동전자거리에는 교동2길과 교동3길을 중심으로 백여 개 남짓한 전자제품 판매업소가 들어서 있다. 주로 판매하는 것은 컴퓨터, 음향 그외 텔레비전, 오디오 등의 각종 전기전자제품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게임기나 가전, 컴퓨터를 취급하는 상점이 하나둘씩 생겨나면서 90년대 들어 집단상가를 형성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이땐 대구의 용산상가격으로 점포 수만 400여 개에 이를 정도였지만, IMF 사태와 대형전자유통점 설립, 온라인 쇼핑 성행 등으로 위기를 맞았다. 2000년 초부터 북구 산격2동 대구종합유통단지 전자관 등으로 점포들이 옮겨가기 시작해 현재는 규모가 많이 줄어들었다. 컴퓨터, 음향 관련 상가들은 지금도 일정 규모는 유지되고 있다. 지역 특성상주차공간이 부족한 것은 단점이지만, 유동인구가 많은 대구 최대 번화가 동성로 인근에 있어 접근성이 편리한 것은 북구의 전자관보다 장점이다. 중장년 이상의 대구 소비층들은 여전히 전자제품 구입 장소하면 교동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아 상권이 유지되고 있다.
5. 삼성그룹의 태동, 삼성상회
대구시 중구 인교동 61-1번지. 옛 건물을 부조浮彫식으로 만든 조형물이 하나 세워져 있다. 주변은 조그마한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이곳이 바로 삼성의 발원지인 삼성상회 터로서, 우리나라 최대 재벌기업 삼성이 태어난 곳이니 대한민국 재벌의 발원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38년 3월 1일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이 28세의 나이에 무역업을 하기 위해 당시 대구 서문시장의 끝자락에 열었던 가게가 있었던 자리다. 삼성三星이란 크고, 많고, 강하며, 완전한 존재를 나타내는 숫자 삼三에다 밝고, 높고, 깨끗이, 그리고 ‘영원히 빛난다’는 의미인 성星을 합쳐 만든 이름이고, 여기에 ‘크고, 강하고, 영원하라’는 메시지를 담았다고 한다.
660제곱미터의 공간에 4층으로 지은 목조 건물에 전화기 1대에 직원 40명과 국수 기계 1대를 갖추고 사업을 시작한다. 1층은 사무실, 2․3․4층은 국수를 제조하고 건조하는 장소로 쓰이는 구조였다. 삼성상회는 인근에서 수집한 청과물과 건어물을 중국과 만주로 수출했다. 농수산물의 작황, 어황을 꼼꼼하게 조사해 수급을 조절하니 장사가 잘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삼성상회 앞에는 늘 소달구지와 짐꾼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수출과 함께 대 히트를 친 상품이 ‘별표국수’였는데, 당시에 대구에는 5개의 국수공장이 있었지만 품질과 맛에서 별표국수를 따라오지 못했다. 이를 발판으로 삼아 1930년 조선양조장을 매입하여 청주‧소주·사이다를 생산했다.
광복이 되자 서울로 활동 무대를 옮겨 1948년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하여 홍콩과의 직접 교역을 통해 급성장했다. 서울로 근거지를 옮길 때까지 약 9년간 삼성상회는 서문시장의 좋은 입지조건을 바탕으로 굴지의 대기업 삼성그룹으로까지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서울로 옮긴 뒤 대구의 삼성상회는 자금난으로 문을 닫았고, 별표국수 또한 생산이 중단되었으나 삼성상회는 1960년대 말까지 존속했다. 삼성상회가 있던 건물은 1998년에 허물고 야외박물관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2011년 이병철 회장 탄생 100주년에 맞추어 지역 상공인들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기념공원이 조성되었다.
Ⅲ. 2코스, 근대 문화 골목
1. 청라 언덕, 3.1만세 운동길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청라언덕 역에서 내려 동산의료원 남문 쪽으로 길을 따라 동산을 오르면 청라언덕이 나온다. 청라란 푸른 담쟁이넝쿨을 말하며, 선교사 사택에 심은 담쟁이가 붉은 벽돌을 타고 올라간다고 해서 붙여졌다. 이 언덕에 대구의 기독교가 지역사회에 뿌리내려 정착한 곳이다.
이곳에는 미국에서 건너온 초기 선교사들의 사택이 있다. 사택은 지난 100여 년간 지금의 동산의료원과 함께 대구의 역사로 호흡한다.
처음 이 언덕은 달성 서씨 문중 땅이었다. 서씨 문중에서 공동묘지로 사용하는 버려진 땅이었는데 선교사들이 쌀 3가마니 값을 치르고 이사한 곳이다. 선교사가 심은 대구 최초의 서양 나무는 능금나무인데 자손목으로 대구를 능금 주산지로 만든 계기가 된다.
옆에는 마르타 스윗즈 선교사가 살았던 사택이 풍경으로 자라 잡고 있다. 이 집은 1907년 일제에 의해 대구 읍성이 철거될 때 읍성 돌을 주춧돌로 깔았다. 그 위에 붉은 벽돌을 쌓아 집을 올리고 지붕은 기와를 얹어 한국적 정취를 풍긴다.
그림 같은 주택을 가로지르면 챔니스 주택이 눈에 들어온다. 동산병원을 발전시킨 마펫 병원장이 거주한 곳이다. 챔니스 주택 건너편에 블레어 주택은 교육 역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구 3.1운동 사진이 전시되어 민족애를 고취시키는 장소다.
한국 최초의 피아노가 사문진 나루터로 들여와 이곳 선교사 집에 놓여진다. 사람들은 난생 처음 듣는 피아노 소리를 ‘귀신통’이라 불렀다.
두 주택 사이에 이은상 작사, 박태준 작곡의 ‘동무 생각’ 노래비가 청라언덕을 지키고 있다. 청라언덕은 동무 생각의 노랫말이 배경이 된 곳이다. 박태준 선생이 계성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신명여고 여학생을 짝사랑했다. 고백도 못하고 끝난 사랑이지만 마산에서 교직 생활을 하며 이은상 선생을 만나 자신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이에 영감을 얻은 이은상 선생이 노랫말을 쓰고 박태준 선생이 작곡하여 알려진 노래다.
스윗즈 주택의 옆길은 3.1운동 길이다. 시내 쪽으로 내려가는 90계단이 있다. 만세운동을 준비했던 학생들이 경찰의 감시를 피하고자 이곳에 모여 서문시장으로 몰려갔다. 계단 곳곳에 3.1운동 정신이 어려 있다.
청라언덕은 사랑의 동산이다. 3.1운동 길은 나라 사랑의 길이다. 선교사는 사명감으로 태평양을 건너온 것 또한 사랑 정신이다. 또한 박태준 선생이 여학생을 짝사랑하며 애태웠을 마음이 떠올려진다. 서로 다른 동기로 시작되었지만 하나로 보면 아가페의 숭고한 사랑이 깃든 곳이다. 대구의 몽마르뜨로 자리매김한 청라언덕은 드라마 촬영 장소로 사랑 받고 있다. 대구 기독교가 뿌리 내린 과정이나, 3.1운동의 역사를 알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한다.
2. 기독교 성지와 선교사 주택
대구 중구 남성로 약전 골목에 있는 제일교회는 대구에 최초로 지어진 교회로 대구 유형 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었다. 전통적 양식과 서구의 건축 양식을 본딴 절충식 건물로 1908년 140여 평의 규모로 준공하였다. 13~15세기경 유럽에서 유행한 고딕 양식으로 웅장하고 아름답다. 현재 제일교회 예배당은 신명고 옆 신축건물을 지어 사용하고 옛 건물은 기독교 역사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1895년 아담스 선교사가 대구로 부임하면서 초가 5채와 기와집 4채를 구입하여 교회당으로 사용했다. 1898년 아담스 선교사 일가와 의사인 존슨 부부 등이 남문 안에 교회를 세웠는데 이것이 대구 제일교회의 전신인 대구읍교회다. 그후 교세가 크게 확장되어 1907년 새로운 교회 건축을 시작하여 이듬해 준공했다. 1933년 4월에는 다시 새로운 건물을 착공하여 붉은 벽돌 2층, 건평 488평의 현대식 예배당을 준공하였다. 이때 제일교회로 교회 이름을 바꾸었다. 1937년 벽돌조의 종탑을 세워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각부의 비례와 조적 수법이 정교하여 대구지방 근대건축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가치가 높다. 이후 교회는 더욱 성장하여 범어교회, 서문교회, 효목교회가 분립했다. 1918년 이만집 목사가 부임하여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제일교회가 중심이 되어 대구의 기독교인들이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지금의 제일교회는 동산동 옛 영남신학대학교 부지일대에 새 성전을 건축하여 1994년 6월에 이전하고 2002년 4월 헌당하였다. 교육문화관은 2007년 1월 7층 연건평 약 1,330평으로 완공하여 명칭을 100주년 기념관으로 개칭하여 교육 및 지역주민을 위한 문화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외 기독교 성지로 1910년쯤 지은 동산동의 대구 유형문화재 제24호 선교사 스윗즈 주택, 대구 유형문화재 제25호 챔니스 주택, 대구 유형문화재 제26호 블레어 주택 등이 있다.
스윗즈 주택은 평면구성은 남쪽 우측부에 현관으로 이어지는 베란다를 두고 현관 홀을 통하여 거실과 응접실을 직접 연결하였으며, 거실을 중심으로 침실, 계단실, 욕실, 부엌, 식당 등을 배치하였다. 외관은 안산암의 성돌로 바른층쌓기의 기초를 하고 그 위에 붉은 벽돌을 쌓았다. 지붕은 한식 기와를 이은 박공지붕이었으나 후에 개조하였다. 지붕 재료와 마감 재료의 일부가 바뀌었지만, 건물 전체의 형태 및 내부구조는 당시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동산의료원 개원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의료선교박물관으로 조성했다.
챔리스 주택은 스윗즈 주택의 남쪽에 있으며 남북으로 좀 긴 장방형 붉은벽돌 2층 집이다. 1층 서쪽 중앙에 계단으로 오르는 높은 목조 포치를 두어 현관을 내었다. 대구지역에 서양식 주거 양식과 생활상을 소개한 근대건축 유구중의 하나로 대구 개신교 선교사와 당시의 건축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블레어 주택은 선교사들 집 가운데 가장 남쪽 약간 경사진 대지에 반지하실을 둔 건축물이다. 건물의 평면구성은 남북이 약간 긴 장방형으로 1층 서쪽에 현관으로 이어지는 베란다를 두고 현관을 통하여 응접실, 거실, 계단실을 직접 연결하였으며 거실을 중심으로 침실, 부엌, 식당 등을 배치하였다. 외관은 기초와 지하실 부분을 콘크리트하고 그 위에 붉은 벽돌을 미국식으로 쌓았다. 1981년 8월 동산의료원에서 인수해 사택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내부의 마감재를 일부 바꾼 것 외에는 건물의 형태 및 구조는 비교적 잘 남아 있다. 같은 시기 미국의 방가로풍에 가까운 주거 건물이다.
대구에 선교거점을 확보한 기독교는 대구에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을 세워 의료사업을 시작했다. 또 계성학교와 신명학교를 세워 근대적 학교 교육을 시작했다. 이처럼 의료와 교육사업은 기독교 선교에 상당한 역할을 했고 대구사회의 복지 증진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3. 약령시 축제와 화교 소학교
현대백화점 뒤 약재상들이 들어선 거리를 약전골목 또는 약령시라 한다. 대구의 약령시는 전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약재시장이다. 약령시는 조선조 효종 연간에 시장이 개설 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350여 년의 전통을 이어온다. 시작은 경상감영 마당에서 열렸으나, 1908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다.
옛날부터 대구에 약령시장이 서면 멀리 함경도와 황해도부터 강원도 산골, 지리산 자락 등에서 약초를 지고 온 사람들이 대구에서 20일 동안 머물며 물건을 사고팔았다. 멀리 중국에서도 약령시에서 한약재를 사 갔다하니 그 명성이 자자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영 令바람 쐰다’는 말이 있었다. 전국의 약령시를 한바퀴 돌아보는 것을 뜻하던 말인데, 대구 영 바람을 안 쐬면 약효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대구약령시한방문화축제’는 조선시대 약령시 개장행사를 현대적으로 승화시킨 축제로 1978년 이래로 해마다 개최되고 있다. 약령시축제는 지역의 명소 약전골목을 무대로 전통 약령시의 맥을 잇고 명성을 되살리기 위해 약령시보존위원회 주최로 열린다.
약령시 축제 행사장에 들어서면 순하고 향긋한 약초 내음이 기분을 좋게 한다. 특히 요즈음은 건강의 관심이 많아지면서 현대인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약령시 축제는 한약에 관련된 다양한 행사와 시음회, 참여마당 등 한방 체험 프로그램이 가득하다.
축제장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관광객이 찾아온다. 약전골목 곳곳에 심마니, 포도대장, 야바위꾼 등 약령시의 다양한 캐릭터를 만날 수 있다. 특히 ‘약령밴드’는 활기가 넘치는 거리를 만들고 축제장의 감초 역할을 하는 등 다양한 볼거리도 제공한다. 약령시축제는 2001년부터 문화관광축제로 지정되었다. 한방문화의 전승보존과 진수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대표적인 한의약 축제로 자리매김한다.
약전골목 북쪽으로 대구화교 초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학교 출입문 벽면에 중국의 역사적 인물이 그려져 있다. 초등학교는 우리나라 초등학교에 비교해 규모가 작고 열약해 보인다. 초등학교 건물 옆에 화교협회가 있다.
화교협회 건물은 대구 지역 부호인 서병국의 주택이었으나 화교협회에서 매입하여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붉은 벽돌를 쌓아 벽체를 만들고 화강석을 사용하여 화려하다. 대구 지역의 대표적인 근대 건축물로 1929년에 건립되어 등록문화재 252호로 지정되어 있다.
약령시 축제가 우리 한의학의 우수성과 함께 약령시가 번창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또한 화교 초등학교를 통해 우리문화와 중국문화의 활발한 교류의 장이 되었으면 한다.
4. 진골목
진골목은 종로에서 대구화교소학교까지 약 50m정도 길이의 골목이다. 경상도 말씨로 '길다'를 의미하는 '질다'에서 기원한다. 진골목은 말 그대로라면 길고 좁은 길이다. 하지만 실제로 걸어보면 좁지만 그리 길지는 않다. 대구읍성의 남문이 있었던 구 대남한의원 사거리를 통과해 종로로 50m 정도 들어서면 우측으로 길게 뻗어 들어가는 골목이다. 1905년에 만들어진 대구읍성의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던 길이다. 무려 100년도 넘게 대구 시민들의 길로 이용되면서, 긴 역사만큼 많은 이야기를 품고 세월의 부침을 보여주는 골목이다. 일제 강점기 때 형성된 골목이기에 그 시대의 풍경과 건물들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건물이 정소아과의원, 미도다방, 대구화교협회 등이다. 식당과 기념품점도 입점해 있다. 감영시대부터 해방 전까지 이 골목은 달성서씨들의 집성촌이었다. 해방 이후에는 재력가들과 기업인들의 거주지로 각광받았다.
골목 중간쯤에 있는 서편 2층 양옥건물이 대구에서 최초로 지은 양옥이다. 달성서씨 서병직, 서병국의 가정집으로 1937년 200여 평 대지에 청나라 모금문이 설계, 시공했다. 나중에 황토와 시멘트로 보수작업을 했기에 지금은 그 당시의 모습과는 좀 다르다. 이곳에 1947년 정소아과의원을 개업했고 지금도 영업하고 있다. 김원일의 소설<마당 깊은 집>에도 등장할 만큼 한때 대구의 랜드마크였지만, 지금은 대구 근대사에서 가장 오래된 양옥으로 남았다. 가장 현대적이었던 것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변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이곳을 더 사랑하고 자주 찾는다.
미도다방은 전성기 시절, 전상열, 신동집, 김춘수 등 대구의 유명 시인들과 경북 출신 정치인도 많이 방문했을 정도로 인지도 있는 모임 장소였다. 대구 정계 소식을 알려면 미도다방으로 가야 한다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시인 김춘수의 작품에도 묻어나오는 역사 깊은 다방이다. 지금도 나이 많은 어르신들의 모임 장소이며 하루 300여 명 정도가 꾸준히 찾고 있는 역사적 장소이다. 어르신들은 그리움으로, 젊은이들은 호기심으로 방문해 옛날 다방에서 쌍화차를 마신다.
Ⅳ. 3코스, 달성공원 서문시장길
1. 달성공원-대구 역사와 함께한 옛터
달성達城 토성은 삼국시대에 자연적인 구릉을 이용하여 쌓은 토성이다. 토성은 영남의 중심도시로서 대구의 대표적인 유적지다.
성곽 아랫부분 출토품 중에서 초기철기 시대에 등장하는 조개더미나 목책의 흔적 등 다양한 유물이 나왔다. 유물로 보아 청동기 시대 이후 토착 집단이 생활의 근거지에 쌓은 성으로 초기 고대국가 형태를 이루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달성토성은 고려시대에는 달성서씨 집성촌이었고 조선시대는 행정과 군사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유서 깊은 토성은 일제의 침략과 함께 1905년 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이곳에 대구신사大邱神社를 조성하였으며, 놀라운 사실은 일본의 공원처럼 달성공원을 꾸몄다. 아름드리 일본 향나무가 공원 곳곳에 조성되어 그 시절을 생각하게 한다.
달성공원 안에는 지방문화재 제3호인 관풍루가 있다. 경상감사가 누상에서 세속을 살핀다는 뜻인 ‘관풍세속’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관풍루는 현재 달성공원 북쪽에 옮겨 세워져있다. 구한말 조선의 국운이 기울 무렵, 대구 읍성을 철거 할 때 이 건물만 옮겨 놓은 것이다.
넓은 잔디광장과 동물원이 잘 조성되어 예나 지금이나 대구 시민의 힐링 장소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타지에서 친척이 우리 집을 방문하면 필수적으로 들르는 곳이었다. 학교에서 학년별로 소풍을 가면 달성공원에 자주 갔었다. 주말 매표소에는 구경 온 사람들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정문에서 거인과 눈을 마주치는 것이 신기하였고, 볼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 코끼리와 호랑이, 사자, 곰 등을 보는 것이 마냥 좋았다. 특히 여름에는 물개가 시원한 물에서 헤엄치며 물살을 가르는 모습을 보면 우리들이 더 시원하게 느껴져 인기가 많았다.
세월이 흐르니 토성이 지닌 역사적 중요성과 가치가 잊혀져가는 것이 안타깝다. 그래서 토성 복원계획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달성공원이 옛 모습으로 복원이 되어 역사와 자연 문화가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공간으로 거듭나 대구시민에게 사랑받는 공원이 되었으면 좋겠다.
2. 순종황제 어가길
달성공원 입구 도로 중앙에 거대한 청동상이 있다. 조선 순종황제의 입상이다. 이 길은 순종 어가가 지나간 길이다.
황제의 순행은 지방의 시정을 살피고 백성의 고통을 헤아린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제로는 일제에 의해 계획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황제의 대구 방문은 큰 의의가 있다.
1909년 1월 7일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황제가 임시열차로 대구역에 도착했다. 나라가 망하기 직전 이또오 히로부미가 계획한 것이다. 고종의 강제 퇴위 이후 흉흉해진 민심을 달래고자 한 행사성 순행이었다. 황제는 첫날을 대구에서 보내고 타 도시를 순행하다 1월 12일 귀경길에 달성토성을 방문하여 기념식수를 했다.
3. 대구의 큰 장, 서문 시장
대신동에 터를 잡고 있는 서문시장은 조선 시대부터 3대 시장으로 불릴 만큼 크고 번창한 곳이다. 60년대 말까지만 해도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의 상권을 움직였으며, 섬유 거래량은 전국의 절반을 차지했다. 사람들이 서문시장에 가면 큰 장에 간다고 했을 정도였으니 시장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서문시장 곳곳에는 미로처럼 이어진 상가가 있어 재래시장의 분위기와 추억을 느낄 수 있다. 화재로 소실된 건물에 현대화 시설을 추진하고 편의시설을 갖추면서 서문시장은 근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모습이다.
서문시장은 지금도 큰 장의 규모를 가지고 있다. 대구 경북 인근에서 소매상인들이 모이는 도매 시장이다. 시장은 6개 지구로 형성되어 포목 직물 의류 등 섬유 관련 품목이 주종을 이루고, 청과물 건어물 신발 그릇 등이 구색을 갖추고 있다.
어린 시절, 나는 서문시장의 인근에 살았다. 엄마를 따라 시장에 가면 큰 소쿠리에 이고 나온 생선이나 밭에서 농사지은 단골 할머니의 채소를 주로 사곤 했다. 또한 집에서 몇 가지 옷을 지을 천을 사고 소 천엽이나 쇠고기 국거리를 샀다.
그 시절에는 서문시장이 직물이나 포목 등 섬유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다. 시장 인근의 골목에는 가내공업 형태로 베 짜는 소리가 들렸다. ‘찰가닥 찰가닥’ 섬유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밤이 늦도록 흔하게 들을 수 있었다. 우리 집에도 작은 공장이 있었는데 섬유 염색, 원단가공, 옷 만드는 가내 수공업을 위해 공장에 전세와 사글세를 얻겠다는 사람들로 활기를 띠었다. 하지만 그 소리가 언제부턴가 가뭇없이 사라졌다.
지금은 서문시장에 지상철 3호선이 생겨 생동감과 함께 세대교체가 이루어져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시장을 한 바퀴 돌면 볼거리 먹거리 즐길 거리가 가득해 재충전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야시장을 개장하여 인기 코너에서는 대기자의 행렬이 이어진다. 밤이 즐거운 야시장은 대구의 새로운 밤 관광지로 인기를 끌고 있다.
큰 장은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독립을 외친 대구 만세운동의 발상지다. 만세운동의 시작점은 큰 장 입구인 현 섬유회관 건너편 옛 서문치안센터 앞이다. 일제가 기미년 3.8 만세운동의 집결지였던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서문 밖인 지금의 동산동과 시장북로 일대에 흩어져 있던 시장을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 지금의 서문시장이다.
4. 최초의 사립 계성학교, 신명학교
아담스, 라이너, 핸더슨 등 미국인 선교사들이 1906년에 설립한 대구계성학교는 개교 115주년의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 사학으로 손꼽히며 대구에서 처음으로 개교한 중등학교로 특색 있는 건물들을 많이 갖고 있다. 그 건축물은 한국식과 서양식을 절충하여 지은 것으로 건축사建築史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1908년에 안의와 교장이 직접 설계하여 지은 아담스관에 붉은 벽돌과 함께 대구읍성을 헐고 나온 성돌로 기초와 테두리를 장식하여 아담하고 세련미가 넘치는 건축물이다. 1913년에 아담스관과 비슷한 모양의 맥퍼슨관을 지었고, 1931년에 건립된 핸더슨관은 당시 교장이었던 핸더슨이 설계하였는데 르레상스적 분위기를 띤 건물이다. 투박하지만 선이 분명한 대륙적인 느낌이 들고, 건축물을 뒤덥고 있는 담쟁이덩굴이 붉은 벽돌과 어우러져 고풍스런 멋을 자아내고 있다.
대구에 세워진 최초의 사립학교로서 전통있는 학교답게 근현대사에 많은 인재들을 배출했다. 일제강점기 3․1운동의 주도자였던 이문주, 이만집, 백남채, 김영서, 김태련 같은 교사들에 의해 민족 지도자를 양성했다. 또한 문화예술계에도 걸출한 인재를 많이 배출하였으니 시인 박목월, 소설가 김동리, 아동문학가 김성도, 작곡가 박태준․현제명, 연극인 홍해성 같은 이들이 이 학교 출신이다. 88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유도인 안병근, 이경근, 김재엽도 이 학교 졸업생이다.
계성학교 또 하나의 상징적 구조물은 1937년에 조성된 오십계단이다. 1937년에 조성된 오십계단은 계성학교의 상징이라 할 수 있겠는데, 개교 30주년 기념사업으로 졸업생들의 성금으로 조성되었다. 지금 대신동 계성학교에는 계성중학교만 남아있고 계성고등학교는 자율형사립고가 되어 서구 상리동으로 이전했다.
1907년 미국인 선교사 브루엔의 부인 마르다 여사가 남산동의 사택을 교사로 삼아 개교한 신명학교는 대구 최초의 여학교다. 1913년 지금의 학교 자리에 2층 벽돌조로 본관 건물을 세웠다.
1912년에 처음으로 이금례, 박연희, 이성례 세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나, 훗날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비행사 박경원도 이 학교를 나왔다.
신명학교는 1919년 3월 8일 대구 독립만세운동 당시 교사를 비롯해 졸업생, 전교생 등 50여명이 넘는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제 경찰에 연행 당하여 옥고를 치를 정도로 항일정신이 남달랐던 학교다. 신명학교 3‧1만세 운동 정신은 이후 국권 회복과 여권 신장을 목적으로 한 대한애국부인회와 조선여자기독청년회 활동으로 계승돼 광복의 밑거름이 됐다.
1937년 6월에는 미국의 유명한 여성 교육자 헬렌 켈러가 학교를 방문하여 “미래의 역사를 짊어질 신명의 딸들이여, 꿈을 가져라. 하느님이 택한 딸로 재능을 살려 아름다운 작품이 되어라.”는 특별한 강연으로 사명감을 일깨워 주기도 했다.
1944년 일제의 강요에 의해 교명을 대구남산여학교로 변경했다가 광복후 다시 신명고등여학교로 복원되었다.
신명학교는 학생들의 3·1만세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72년 10월 23일 개교 65주년 기념사업으로 ‘신명 3·1운동 기념탑’을 전국 최초로 교내에 건립을 하였고, 그 때 3·1만세운동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였던 이갑성 지사가 참석하여 교정에 향나무 한 그루를 기념 식수하였다. ‘신명 3·1운동 기념탑’은 2003년 2월 국가보훈처로부터 현충시설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거의 같은 시기에 미국인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계성학교와 신명학교는 같은 기독교계 학교로서, 양 학교는 행사도 같이 하는 등 마치 남매의 연을 맺은 것처럼 친근하게 지내온 전통이 있다. 이제는 양 학교 모두 남녀공학교가 되었지만 대구 사학의 명문으로 인재의 산실이 되고 있다.
Ⅵ. 4코스, 남산 100년 향수길
1. 관덕정
관덕정 순교기념관은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제2 주보인 이윤일 요한 성인과 18명 성인의 유해, 18명 복자의 유해까지 총 37명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거룩한 순교 성지다. 천주교 대구대교구가 1991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맞아 이곳에서 순교한 성인의 유해를 모시고 순교자들의 유품을 모아 전시하고 있다.
천주교가 대구에 들어온 것은 1829년 무렵으로 당시 양반 관료 중심의 사회에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기까지 천주교는 여러 차례 박해를 받았고 많은 신자가 순교했다.
관덕정은 조선 후기에는 군관과 별무사를 선발하던 넓은 연병장이 있었다. 한쪽은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이용되었다. 관덕정이 천주교와 깊은 연관을 맺기 시작한 것은 바로 연병장 가장자리인 아미산 등마루, 속칭 '관덕정 말랭이'로 일컬어지는 옛 적십자 병원 남쪽 언덕배기 처형장에서부터다. 1864년 3월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가 처형된 곳이다. 천주교인들은 박해 때마다 이곳에서 온갖 참혹한 방법으로 처형되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관덕정에서 순교한 이들은 44명에 이른다. 이곳 순교자들 가운데서 1867년 군문효수형을 받은 이윤일은 훗날 성인품에 올랐다. 지하 경당에는 이윤일 요한 성인의 유해를 모신 중앙제대와 감실 십자고상, 초상화가 있다.
지하 성인 유해실 제대에는 우리나라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 그리스도교를 탄압하다가 다마스커스에서 회심하여 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도 바오로 등 18명 성인의 유해와 동남아에서 순교한 파리 외방전교회원 복자 등 18명 복자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2. 대구의 천주교 성지
대구 중구 남산동 일대 남산100년 향수길을 따라 걷다보면 대구 천주교 성지를 만날 수 있다. 1913년 서양식 2층 벽돌집인 주교관에 이어 성유스티노신학교와 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이 차례로 지어졌다. 유스티노캠퍼스 내 성모당은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초대 교구장이었던 안세화Florian Demange 주교가 자신의 모국인 프랑스의 루르드에 위치한 성모의 발현지인 마사비엘 동굴을 본따 1917년 7월 착공하여, 1918년 8월 15일 완공했다.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성지이며, 대구대교구청 내에 있다. 1990년 12월 15일에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29호로 지정되었다.
안세화는 루르드의 성모를 대구대교구의 주보성인으로 먼저 정하고 주교관, 신학교, 성당을 짓기를 바랐다. 그리고 루르드의 성모의 장소인 마사비엘 동굴과 똑같은 동굴을 만들어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하겠다고 하느님께 약속한다. 그 와중에 동료 선교사가 병에 걸렸고, 성모 마리아에 치유 기도를 하게 된다. 이후 동료 선교사의 병이 낫자 성모당 건립을 계획하여 완공하게 된다.
오른쪽 면의 뒷쪽이 안으로 약간 꺾여 들어간 직사각형의 내부를 암굴처럼 꾸미고 그 위에 성모 마리아상을 모셨다. 화강암으로 기초를 쌓았고 흑색 벽돌로 각 모서리의 버팀벽을 쌓고, 나머지 벽은 붉은 벽돌로 쌓았다. 각 부분의 비례 구성이 아름답고 벽돌의 짜임이 정교한 건물로 지금까지도 완공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성모당에 얽힌 사연으로 인해, 병을 낫게 해 준다는 치유의 장소로 알려져 천주교 신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마더 테레사 수녀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80년대 이곳을 방문했다.
드망즈 주교는 1912년 프랑스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에 고아와 노인을 돌보는 의료사업을 담당할 수녀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1914년 수녀의 파견이 결정되자 수녀원 건축에 착수하여 다음 해인 1915년 코미넷관 준공과 함께 대구 샬트르성 바오로 수녀원이 건립되었다. 건물터는 대구 국채보상운동의 주역이었던 천주교 신자 서상돈이 기증하였고, 건물 설계는 로버트 신부가, 건축 공사는 중국인들이 담당하였다.
유럽 중세 시대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을 혼용한 서양식 건물로, 서양의 건축 양식과 함께 벽돌을 쌓아 올리는 기법을 소개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또한 대구광역시 지역 천주교 역사와 건축의 변천사를 담고 있는 건물로, 지금까지도 당시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성유스티노신학교는 1914년 개교한 대구의 첫 신학교다. 드망즈 주교가 교구 사제 양성을 위해 1914년 5월 27일 신학생 58명으로 개교한 대구의 첫 신학교다.
30년대엔 고 김수환 추기경이 성유스티노신학교에서 공부하기도 했고, 김 추기경의 어머니도 성모당에서 아들을 위해 기도했다고 한다.
3. 계산 성당과 화가 이인성
계산성당에서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까지 이르는 골목길은 대구시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대구보통고등학교, 계성학교, 신명학교 학생들이 이 골목에서 3월 8일 만세운동을 시작했다. 바로 옆에 서상돈, 이상화의 고택이 있다. 대구 최초의 가톨릭 성당인 계산성당과 대구 최초의 개신교 예배당인 제일교회는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다. 교파를 초월하여 계산동, 동산동 일대는 대구 그리스도교 역사의 출발 지점이다.
건립 당시 현 위치와 서편 청라언덕 사이에 고민하다가 노인 신자들의 요청으로 현 위치에 성당을 건립하기로 정했다고 한다. 원래는 한옥식 건물이었지만, 화재로 1901년에 전소되자 새로 고딕식 성당을 지었다. 이 성당은 영남권에서 최초로 건립된 서양식 성당이며 서울과 평양에 이어 전국에서 세 번째로 지어진 고딕 양식의 성당이다. 서양의 건축 양식이 대구에 도입된 표본이며, 1981년 대한민국의 사적 제290호로 지정되었다.
설계는 명동성당을 건축하고 전주 전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가 맡았고, 외부공사나 벽돌 조달은 청나라 인부들이 맡았다. 부지공사나 벽돌공장 건설 등은 일반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했다. 스테인드글라스 같은 것들은 프랑스에서 산지 직송, 직접 공수했다. 1901년 2월 성전 부지정리작업을 시작하여 1902년 12월 1일 외부공사를 완료하고, 1903년 11월 1일 축성식을 거행했다. 1911년 4월 천주교 대구대교구가 설정되면서 주교좌성당으로 지정되었으며, 1918년에 증축 공사를 시행했다. 초창기 스테인드글라스는 12사도와 성당 제대 뒷편에 위치한 성인상 그리고 성당 입구에 있는 장미창으로 이루어졌다. 1991년에는 대대적인 보수 인테리어 공사가 있었는데, 이때 한국 순교자들과 4대 복음사가 스테인드글라스를 추가했다. 또 마루바닥을 대리석으로 교체하고 함석지붕을 동판으로 교체하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결혼한 장소이기도 하다. 결혼식 주례를 보던 대구시장 허억이 신랑 육영수 군, 신부 박정희 양이라고 소개한 일화가 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가톨릭 신자는 아니다. 원래 가톨릭 성당에서 가톨릭식 결혼식을 올리려면, 신랑과 신부 중 최소한 한쪽은 신자여야만 한다. 성당 결혼식은 단순히 예쁘고 멋있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가톨릭의 가르침대로 가정생활을 꾸리고 자녀를 양육하겠다는 다짐이기 때문이다. 신자도 아닌 두 사람이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당시가 전쟁 중이라 결혼식 장소가 없었기 때문인듯하다. 이 성당 안에는 이인성 나무라는 이름의 감나무가 있다,
이인성은 1912년 대구 남성로에서 태어난 대구의 대표적인 화가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이 뛰어났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11살이 되어서야 수창보통학교, 지금의 수창초등에 입학했다.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하여 13살 때 일본 도쿄에서 열린 세계아동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했다. 보통학교 졸업 후 대구미술사에서 일하며 작품활동을 계속했고, 대구의 미술가 단체인 영과회, 향토회 등에도 참가했다. 1929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처음 입선한 뒤로 1936년까지 천부적 재능과 신선한 표현 감각을 발휘한 수채화와 유화로 입선·특선을 거듭하여, 천재적인 화가로 인정받았다.
1932년부터 일본의 다이헤이요 미술학교에서 공부하며 일본의 최대 공모전인 제국미술원전, 문부성미술전에 입선했다. 해방 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미술과 강사로 출강했고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서양화부 심사위원을 지냈다. 6·25전쟁 당시 39세에 총기사고로 사망했다. 대표작으로는 경주 산곡에서, 계산동 성당, 사과나무 등이 있다. 그의 그림 계산동 성당에는 성당을 배경으로 감나무가 그려져 있다.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성당 안에 있는 감나무는 이인성 나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의 그림 사과나무는 명덕초등학교에 소장하고 있었는데 1972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탁했고, 2012년 다시 고향인 대구미술관으로 돌아왔다. 그가 사과나무를 그렸던 북구 산격동에는 그의 그림이 벽화로 그려진 이인성 사과나무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대구시는 한국근대미술사에 큰 업적을 남긴 그의 작품세계와 높은 예술세계를 기리고 한국 미술발전을 위해 1999년부터 매년 이인성 미술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다.
4. 이상화 고택과 서상돈 고택
대구는 민족시인 이상화의 고향이다. 1901년 4월 5일 서문로에서 부친 이시우와 모친 김신자 사이 사 형제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첫째 형은 독립운동가 이상정, 둘째 이상화, 셋째 우리나라 초대 IOC 위원을 지낸 이상백, 넷째 수렵인 이상오 형제다. 사람들은 이들 네 형제가 모두 걸출하다하여 용봉인학으로 불린다.
선생은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셨다. 어린 시절에는 큰아버지 밑에서 기숙학교인 우현서루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 뒤 서울에서 학교를 마치고 대구에 있을 당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다. 선생은 지인들과 거사 모의를 하였지만 주동을 했던 인물들이 검속되어 차질을 빚었다. 유학을 꿈꾸며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이듬해 관동대지진으로 귀국하여 서울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선생은 1920년대를 기점으로 활발한 문학 활동을 했다.1921년 현진건의 소개로 《백조》 동인이 되며, 1922년 《백조》창간호에 「말세의 희탄」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한다. 1926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개벽》 70호에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주요 작품으로 「나의 침실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별을 하느니」 등이 있다. 선생의 시비는 현재 달성공원에 있다.
선생은 몸을 던져 투쟁하는 혁명가는 아니었지만 나라를 사랑했고, 우리 말과 글을 사랑했으며, 고향인 대구를 사랑했다. 교남학교 교사 시절 젊은이들을 깨우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이상화 고택은 대구에서 태어나 고택에서 생을 마감한 선생의 항일 민족정신을 되새겨 볼 수 있는 장소다. 마흔넷 안타까운 나이에 광복을 보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떠나셨다. 조국이 처한 식민 치하의 울분을 글로써 표현했던 시는 우리들의 가슴에 영원히 남아있다. 고택은 한 때 사라질 위기에 처했으나 2008년 ‘이상화기념사업회’가 관리를 맡으면서 보존되고 있다.
이상화 고택의 맞은편에 서상돈 고택이 있다. 서상돈 선생은 조선 말기의 기업인이자 관료였고 민족 독립운동가다. 대구에서 지물 행상과 포목상으로 성공한 분이다. 1907년 정부가 일본에 빚을 많이 져 국권을 상실하자 광문사 사장인 김광제와 함께 금연으로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2017년 10월 31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Ⅴ. 4코스, 봉산 대봉 문화길
1. 대구향교
향교는 지방에 설립한 국립교육기관으로서,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기능과 학생을 교육하는 강학 기능을 동시에 담당하였다. 대구향교는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 선조 32년(1599)에 달성공원 근처에 다시 세웠다가 선조 38년(1605) 교동으로 옮겼고, 1932년 남산동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웠다.
대구향교로 들어서면 교육 공간인 명륜당과 학생들이 숙식하는 동재·서재가 있으며 내삼문을 열고 뒤채로 들어서면 제사 공간인 대성전이 나타난다. 대성전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성현 18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건물로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지었다.
대성전은 대구 시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향교의 중심 건물로 전체적으로 엄숙하고 단아한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건물이다.
명륜당은 앞 5칸, 옆 2칸.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대성전과 같은 시기에 창건되었으며, 향교 안에서 대성전과 나란히 꼽히는 기본건물로 대구 지역의 유림들이 모여 학문을 강론하고 도의를 닦던 곳이다. 교동에서 이건되기 직전의 대구향교는 대성전을 앞에 두고 명륜당이 뒤에 오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지만, 지금의 자리로 이건된 뒤에는 대성전 옆에 명륜당이 위치하는 좌묘우학(左廟右學)의 배치를 갖추게 되었다. 건물이 노후되자 1974년 중건하였다.
향교 내에는 대구성大邱城의 축성 및 유래를 기록한 축성비築城碑와 수성비修城碑, 경상도관찰사, 판관, 군수 등을 지냈던 사람들의 불망비不忘碑, 송덕비頌德碑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을 지원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 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대성전은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전교 1명과 장의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2. 수필발전소, 한국수필문학관
한국수필문학관은 봉산동 대구향교를 마주 보고 서 있다. 2015년 9월 9일에 개관한 수필문학관은 문학 장르별 문학관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건립되었으며, 본관 3층과 별관 2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부지 580㎡, 연면적 660㎡의 아담한 규모이다.
우리나라에는 백 수십 곳이나 되는 문학관이 지역과 문인의 이름을 달고 운영 중이다. 하지만 국립 한국문학관이 이제야 건립 중에 있으며, 장르별 문학관은 거의 활성화 되어 있지 않다. 이런 실정에 수필전문 문학관이 건립된 것은 수필인들의 자부심이요, 문단에서도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수필문학관은 수필인구의 저변확대가 폭발적으로 일어나던 2000년대 초, 대구에서 열린 전국수필인 모임에서 ‘수필인의 집’ 건립이 논의되었으며 수년간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 발제처인 대구에서 오랜 준비 끝에 건립되었다.
문학관은 일반적으로 전시와 발표 기능, 자료 발굴과 보존, 강학講學에 그 역할이 있다. 이에 한국수필문학관 3층은 문학 분야는 물론 각종 문화예술의 세미나 장으로서, 작고한 문인을 비롯하여 왕성하게 창작활동을 하고 수필가들을 집중 조명하는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2층은 다목적 강의실로서 수필과 소설 등 다양한 인문강좌가 진행되고 있으며, 1층은 자료실로서 대구수필작은도서관으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수필문학관은 수필자료를 어디엔가 모아두어야 하겠기에 데이터베이스 역할을 자임한다. 이에 전국에서 발간되는 수필전문 문예지와 수필동인지, 개인 수필집 등 5만여 점의 수필관련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특히 문예지 창간호 400여 권과 우리나라에서 발간된 각종 문화예술 분야의 창간호 2,000 권의 소중한 문화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수필문학관은 현재 문학아카데미와 문예지 창간호 전시회, 김규련수필문학상 등의 폭넓은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이 문학관이 각지의 문인들이 즐겁게 들리고, 무언가 남기고 가는 수필발전소가 될 때에 작지만 품 넓은 문학관으로 쓰일 것임을 믿는다.
3. 건들바위
대구 중구 대봉동에 위치한 건들바위는 고생대에 암벽의 균열로 생긴 입석으로 옆 절벽과 더불어 대구분지의 지반구조를 잘 나타내는 바위이다. 1982년 대구시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됐다.
건들바위란 이름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삿갓 쓴 늙은이와 같다 하여 ‘삿갓바위’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200년 전만 하더라도 이곳은 맑은 물이 흘러 낚시를 하면서 즐기던 경치 좋은 명소였다. 서거정의 대구십경大邱十景 중의 입암조어笠巖釣魚 시제가 바로 이곳이다.
가을 옛 굽이에 안개비 부슬부슬 낚시 드리우고 혼자 앉아 생각하는 제 고기야 얼마나 물릴련고 금자라를 낚으리라. (노산 이은상 역)
1776년 정조 때 이 일대의 하천 범람을 막기 위하여 제방을 쌓아 물줄기를 신천으로 돌렸기 때문에 지금은 물이 흐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 후로 질퍽한 논으로 변하여 이 바위는 절벽 앞 논 가장자리에 위치하게 되었다. 때때로 무당이나 점장이가 촛불을 켜놓고 치성을 드리기도 하고, 홀로 떨어진 곳에 우람하게 치솟은 외형 덕에 속칭 득남석으로 인기가 높아 아낙네의 비손하는 곳이기도 하다.
중구청은 2012년 이곳에 건들바위 역사공원을 조성했고, 2019년에는 새단장을 했다. 옛 대구천의 의미를 살려 도심 속에서도 물이 흐르도록 수경시설을 재정비하고 편의시설 및 경관조명 설치, 수변식생 정비, 휴게 쉼터 정비 등 공사를 시행했다. 특히 야간경관을 위해 건들바위 및 후면 암석층 조명을 위한 투광등, 보행등도 설치했다. 근처에 대구도시철도 3호선 건들바위역이 있다.
4. 김광석 길과 방천 시장
대구 중구 대봉동은 가수 김광석이 태어난 곳이다. 신천 둑방길에는 그를 기리는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이 조성되어 350m의 길에 그의 삶과 노래를 주제로 다양한 벽화가 그려져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다. 실물 크기의 동상과 벽화를 구경하며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그의 노래를 들으며 걷다 보면 추억여행을 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는 1964년 1월 22일, 방천시장 번개전업사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서울로 이사 가서 그곳에서 학교에 다녔다. 중 고등학교 시절 현악부 활동을 하며 선배들로부터 바이올린을 다루고 악보를 보는 법을 배웠고, 합창부 활동을 하면서 음악적 감성을 키웠다. 이후 대학연합 동아리에 가입하여 민중가요를 부르고 선배들과 함께 소극장에서 공연을 했다.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
그의 노래 '서른 즈음에'는 지금도 많은 사람이 즐겨 부르는 노래 가운데 하나다. 2007년 음악 평론가들에게서 최고의 노랫말로 선정되었다. 이 외에도 류근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너무 이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비롯하여 ‘이등병의 편지’, ‘바람이 불어오는 곳’,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등 많은 노래가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서른셋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죽음은 많은 의문을 남겼지만, 그가 떠난 후 2014년 제5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 표창장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대한민국의 영원한 가수로 남아 있다.
길은 방천시장과 이어진다. 1960년대 싸전과 떡전으로 유명세를 떨치던 시장이 90년대 들어서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전통시장 활성화 사업으로 미술계 작가들과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공방과 아트센터가 들어서고 전통시장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이 사업의 가장 큰 성과가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조성이었다.
Ⅷ. 그 외 명소들
1. 2.28민주화운동 기념회관
대구시 중구 남산동 2113–10번지 명덕초등학교 에 2·28민주운동 기념회관이 있다. 먼저 1962년 명덕네거리에 건립되었던 2·28민주운동 기념탑은 1990년 두류공원으로 옮겨져 갔고, 시내 동성로2길에는 2·28기념 중앙공원이 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 2·28민주운동은, 1960년 이승만 독재정권의 부패와 무능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저질러진 불의와 부정에 분노해 대구지역 8개 공립 고등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발생한 최초의 민주화 운동이다.
1960년 2월 28일 오후 1시경 경북고 학생 800여 명이 대구 중심부인 반월당을 거쳐 경북도청으로 향했으며, 교문 돌파에 어려움을 겪던 대구고 학생들도 마침내 가두시위를 시작했다. 대구는 곧 불의를 규탄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시위대는 인구가 밀집했던 중앙통 매일신문사를 거쳐 경북도청과 대구시청, 자유당 경북도당사, 경북도지사 관사 등을 돌며 자유당 정권의 불의를 규탄했다. 시민들은 경찰에게 구타당하는 학생들을 숨겨주고 시위대에 박수치며 동조했다.
곧 바로 시위에 합류할 수 없었던 경대사대부고와 대구상고 등의 학생들은 교내에서 단식농성에 돌입하거나 학교 담을 넘어 시위대에 합류했으며, 수성천변 선거 유세장으로 간 경북여고와 대구여고, 대구공고, 대구농고 등의 학생들도 시민들과 합세해 저녁 늦게까지 산발적인 시위를 계속했다. 이 날 시위현장에서 약 220여명의 학생들이 경찰에 체포됐고,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면서 각 학교의 교사들도 모진 책임추궁을 받았다.
서슬 퍼런 자유당 이승만 독재정권에 움츠렸던 대구지역 언론들은 어린 고등학생들의 용기에 힘을 얻어 ‘2·28대구학생의거’를 대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마산, 대전, 부산, 서울 등으로 학생 시위를 확산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2·28의 함성은 전 대한민국에 울려퍼져 3·15마산의거와 4·19혁명으로까지 이어졌으니, 2‧28은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뿌리이자 민주주의 실천 운동으로서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에 큰 이정표를 세웠고 2018년 2월 6일 마침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1960년 대구에서 발생한 2·28민주운동과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5·18민주운동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대구(달구벌)와 광주(빛고을)가 달빛동맹을 맺은 후 해마다 열리는 여러 분야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2. 동인 아파트
2020년 11월 13일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아파트인 ‘동인시영아파트’가 ‘비수도권 제1호’ LH 참여형 가로주택정비사업으로 추진되어 재건축 착공식을 갖고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1969년 대구시 중구 동인동3가 228번지에 건설된 동인아파트는 준공식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였으며, 서양식 양변기, 나선형 통로가 설치되어 전국민의 주목을 받는 대구의 자랑거리였다.
그러나 50년 세월의 무게로 노후화 되어 2018년부터 한국토지주택공사와 동인시영가로주택사업조합이 참여하여 재건축사업을 시작했다. 동인시영아파트는 철거 후 태왕이앤씨가 공사를 진행하여 오는 2023년 2월 입주예정으로 5개동 373가구(지상 21층 규모, 행복주택 101호 포함)의 새로운 주민 보금자리로 재탄생할 예정이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대구경북본부는 철거에 앞서 '동인시영 삶의 기록, 그리고 행복한 첫걸음'이라는 주제로 사진전을 열어 철거로 사라질 동인시영아파트의 지난 50년의 삶을 추억하고 새로운 미래를 향한 행복한 첫걸음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됐다. 이 날엔 대구 중구 지역구 의원, 중구청, 지역 주민 등 50여명이 참석하여 동인시영아파트의 마지막을 함께 했다.
2019년 겨울에는 동인아파트를 배경으로 영화도 촬영했다. 이정호 감독이 연출한 영화 ‘비스트’는 대구의 연극배우 출신 이성민이 주연으로, 현직 대구 연극배우 이송희가 조연으로 출연하는 범죄 스릴러물이다. 아파트 정비사업 계회에 다른 이주와 철거를 앞두고 동인아파트의 옛 모습이 사라지는 아쉬움을 채워주는 기록영화가 된 셈이다.
그 이전인 2018년 여름에는 대구 독립영화 전용극장 오오극장 삼삼다방 갤러리에서 열린 ‘동인아파트_아이들의 기록 전’이라는 전시회가 있었다. 동인아파트를 배경으로 아이들이 천진스럽게 노는 영상을 보면서 어린 시절 동인아파트 바로 옆에 살면서 이 아파트와 같이 나이를 먹어온 사람으로서 느끼는 감회는 남달랐다.
1970년대 아이들은 거의 동무들과 어울려 몸으로 부대끼며 놀고 자랐다. 동인아파트 내 마당에서 일명 ‘야구사이’라고 손으로 작은 공을 쳐서 야구를 하는 것처럼 시합하며 놀기도 하였고, 아파트 둘레를 돌아 넘어지고 자빠지며 자전거 타기를 배우고 놀았던 추억이 아련하다.
3. 전태일 기념관
2020년 11월 13일은 전태일 열사의 50주기를 맞는 날이다.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맞아 ‘사단법인 전태일의 친구들’은 대구시 중구 남산동 2178-1번지 전태일 열사의 집에 그의 이름을 새긴 문패 달기 행사를 마친 뒤 그곳을 '전태일 기념관'으로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그곳은 열사의 가족이 1963년부터 1년 남짓 방 2칸을 세를 얻어 살았던 집이다. 당시 열사가 쓰던 방은 현재 허물어져 없어진 상태다. 그러나 열사는 자신의 일기에서 청옥고등공민학교를 다녔던 이때를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청옥고등공민학교는 현재 명덕초교 강당 부지에 있던 야간학교로. 1990년에 사라졌다. 1948년 대구 남산동에서 태어난 그는 초교 2년, 고등공민학교 1년 외에는 배움의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50년 전,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근로기준법 책을 낀 청년 전태일은 자신의 몸을 불길에 맡긴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구호를 외치던 스물두 살 나이의 청년은 쓰러지기 직전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산화한다. 그의 죽음이 당시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은 컸다.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에 희생돼 온 노동자 삶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노동문제의 심각성을 고발함으로써 사회적 관심을 널리 불러일으켰다.
전태일은 깊고 넓은 마음에 따뜻함을 가득 담은 인간이었다. 그는 단순한 노동운동가를 넘어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향한 사랑과 이타심을 실천한 참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전태일 열사의 50주기를 맞아 그의 동생인 전순옥 전 국회의원과 전태삼·태리 씨를 청와대로 초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국민훈장 중 1등급에 해당하는 무궁화장이 노동계 인사에게 추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맞아 노동인권 개선 활동을 통해 국가 사회 발전에 이바지한 고인의 공을 되새기고, 정부의 노동존중사회 실현 의지를 표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맞아 전국 곳곳에서도 열사를 기리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서울 도봉구에서는 도로명주소위원회를 열어 전태일 열사의 옛 집터 인근 도로 이름을 향후 5년간 '전태일로'라고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4. 동인동 찜갈비 골목
이른바 대구의 십미 十味 라 불리는 음식이 있다.납작만두, 논메기매운탕, 누른국수, 동인동 찜갈비, 따로국밥, 막창구이, 무침회, 뭉티기, 복어불고기, 야끼우동 등이 그것이며 그 중에서도 동 이름까지 들어가는 것은 ‘동인동 찜갈비’가 유일하다.
1960년대 중반 동인동 골목 일대에 식사와 술안주용으로 소갈비에 마늘과 고춧가루를 넣어 연탄불에 양재기로 찜을 해 요리하는 것이 점차 호응을 얻어 한집 두집 개업하고 확장하여 현재의 찜갈비 골목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동인동 찜갈비는 대구 특유의 매운맛이 살아있는 전통 음식이기도 하다. 2003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 이후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 때 대구예총이라는 예술문화단체 사무처장으로 근무하면서 국제 행사에 초대하여 동인찜갈비골목으로 모셨던 중국, 일본 등의 외국인 손님들에게 맛나다고 호평을 받았던 기억이 새롭다.
갈비하면 일반적으로 간장 양념을 떠올리게 되는데, 동인동 찜갈비의 특성은 고춧가루와 마늘을 이용하여 매콤 달콤한 붉은 양념으로 소비자의 입맛을 신선하게 자극한다. 질기지 않고 부드럽게 씹히는 고기맛과 마지막 남은 양념에 비벼먹는 밥맛이 일품이다.
동인동찜갈비만의 매력은 찜갈비를 담는 용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현대인들에게 익숙한 세련된 용기 대신 6,70년대에 쓰던 노란색 찌그러진 양은 그릇이 밥상 위에 올라오는데, 이는 먹는 재미와 동시에 구수한 고향냄새까지 느낄 수 있으며 빠른 시간에 조리가 되어 신선도가 좋은 찜갈비로 내·외국인 모두에게 각광받고 있는 음식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마늘과 생강 범벅인 양념을 처음 본 외지인들은 지레 겁을 먹지만, 한번 맛본 사람들은 그 특유의 맛에 빠져들어 다시 찾게 되는 음식이다. 느끼하지 않고 칼칼하고 개운한 맛으로 현재 대구 맛의 명소로 자리 잡았으며 매출액의 일부를 정기적으로 기부하여 「착한골목 1호」로 지정되었다.
5. 수창초등학교
수창초등학교는 1907년 중구 교동에 있던 대구향교에서 신식교육의 필요성을 지각한 지식인들이 사립수창학교를 설립하였다.
수창학교와 순종황제의 인연은 1909년 경부선 개통을 축하하는 의미로 순종황제가 순행할 때, 일본으로 모셔가려 한다는 헛소문이 돌아 수창학교 학생들이 경부선 철로에 드러누워 길을 막으려 했었다. 늦게 사실을 알게 된 순종황제는 학생들의 의기에 감명하여 수창학교에 은사모를 하사하셨다.
그 이유로 학교가 폐교 위기를 맞았지만 2007년 개교 100주년을 맞았다. 개교 이래 가장 오래된 학교 이름을 지닌 역사가 깊은 수창 초등학교다.
수창 초등학교 담벼락에 순종 어가가 지나간 그때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순종황제 궁정열차와 어가 행렬 모습을 사진과 모형으로 살펴 볼 수 있다. 어가길은 부끄러운 역사라 하여 없애야 한다는 여론도 있었지만, 역사적 사실이기에 후손들에게 제대로 알려야 한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었다.
과거의 아픈 역사를 교훈 삼아 더 나은 내일을 바라보며 반성과 역사 재인식 등 미래지향적 역사공간으로 활용되기를 바래본다.
참고 자료
-김종욱, 『대구 이야기』, 2010
-네이버 지식백과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
-대구매일신문, 경향신문 보도
-대구시 중구청 홈페이지
-대구광역시, 『천년 대구를 거닐다』 2020,
-위키 백과
-2‧28 민주운동기념회 홈페이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향토사교육연구회, 『대구역사기행』 1998.
-황희진 『골목길 거닐다 대구를 만나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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