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한 줄기 바람이 될 수 있을까
바람 속에 몰래 숨어 본 적이 있는가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는
그 바람 속에 숨어들면
나도 한 줄기 바람이 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나는 한 줄기 바람이 되어 바람 속으로 사라진 사랑
그 희미한 끝자락에 가끔 머물 수 있을 테지만
바람도 앞서만 가고
나의 몸은 이미 너무 젖어 있어
떠나간 사랑이 서먹하듯 바람도 낯선 오늘,
차라리 바람 속 빛으로 녹아들면
나도 보이지 않는 한줄기
그 바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바람 속에 숨어들어 바람이 될 수 있다면
바람 속으로 사라진 사랑
그 끝자락에서라도 가끔 머물 수가 있으련만....
그는 나에게
사랑을 잃은 내가
바람난 바람처럼 흔들리고 있을 때
그는 나에게
흔들리며 피는 들꽃이 되라 했다
눈물을 배우지 못한 내가 소리 없는 슬픔에 갇혀 있을 때
그는 나에게 쉽게 울며 날아가는 가벼운 새가 되라 했다
나의 행방을 알 수 없는 내가
길 가는 자의 앞을 가로막을 때
그는 나에게
날마다 나를 수소문하는
낯선 사람이 되라 했다
그러나 나는 그 뒤로
그 무엇이 될 수 없었다.
그 무엇으로는
살아갈 수 없었다.
그 강가에서
그 강가에 앉아 물끄러미
강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오래 전
그 강물에게 던졌던
어리석은 물음의
답들이 하나씩
물 위로 떠오른다
서둘러 살아 내려 했던 그때의 삶과
함부로 가늠하려 했던
나의 운명까지 버무린 채
많은 물음들은 거침없이 강물로
녹아들고만 있었을 뿐,
오늘처럼 그 강물이 나에게
말문을 터주고 기꺼이
물음표를 되돌려 주기까지에는
몇 개의 산들이 천천히
자리바꿈을 하고
많은 나무들이 고요의 숲을
조용히 떠나간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새벽 강가에서
식은 강물에
머리를 감으며
하얗게 물든 밤을 씻어냅니다
물안개를 피우던 강물이
나를 나무랍니다
너만 외로움 밤이었냐고
첫 날개짓으로
막 날아오던 새들이
나를 타이릅니다
너만 사랑을 잃었느냐고
잴 수 없는 밤의 무게를
여린 가지로 버텨 낸 나무들이
나를 달랩니다
외로운 나무들이
숲을 이루었다고
바람에게 묻다
뜬소문마저 그리운 오늘
창틈을 기웃거리는 바람에게
당신의 안부를 묻는다
산다는 것은
안부를 묻는 것이라던
바로 당신의 안부를
기웃거리는 바람에게 묻는다
숨겨진 나의 아픔마저 몰래 떠안고
서둘러 떠나간 당신의 안에서
나는 또다시 아플 수 없겠지만
뜬소문마저 그리운 오늘,
산다는 것은
안부를 묻는 것이라던
바로 당신의 안부를
한 줌 기웃거리는 바람에게 묻는다
위로慰勞
이제,
찬바람을 덮고 자던
강 건너 마을의 빈집은 잊어라
하나의 입만으로는 차마 호소할 수 없었던
숱한 억울함도 잊어라
멍든 새끼발가락 하나 건사하지 못하던
낡은 구두의 행방도
더 이상은 수소문하지 마라
끄트머리에서만 서성이던 너를 생각하면,
얼굴에서 솟아난 눈물이
왜 얼굴보다 뜨거워야 하는지,
이제 그런 막연한 이유에 갇혀
뿌려대던 눈물이 고인 접시는
잘게 부수어도 좋다
이미 아프게 강을 건넜으니,
찬바람을 덮고 자던
강 건너 마을의 빈집은 그만 잊어라
너와 함께 침묵하던 나무들도 서둘러
너의 여림을 눈감아 줄 것이다
네가 그토록 아껴 쪼이던 햇볕에게는 그저
가벼운 인사만 하고 떠나라
더는 미안해 하지 마라
그리움도 사랑이다
환절의 끝
나목은
허공을 열고 사라진
새들의 뒷모습을 그리워한다.
새들은
버림의 방식앞에서 울어대던
숲을 그리워한다.
만남은 언제나
이별의 예감으로 주어지고
사랑은
이별의 그림자를 비켜가려 한다
환절의 끝,
사라진 만남을 그리워하는
나목과 새들
그리움의 자유에 지쳐가고 있다.
그리움도
사랑이다.
마을버스를 기다리며
쉽게 다가올 수 있는 것과
다가올 수 없는 것은
그 기다림의 모습도 다르다
쉽게 다가올 수 있는 것은
이내 멀어질 수 있어 우리는,
기다렸다 말하지 않는다
다가올 수 없는 것은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어
그 기다림을 우리는,
그리움이라 한다
마을버스를 기다리며
기다림에 대해 생각했다
나를 기다리지 않은
세월을 생각했고,
그리움에 물든
나를 생각했다
눈물
고비사막 쌍봉낙타,
난산의 고통을 잊지 못해
새끼에게 곁을 주지 않는 어미에게
유목민들,
마두금(馬頭琴) 애절한 선율로
어미에게 심금을 울려주면
비로소 새끼에게 젖을 물리며
눈물을 뚝뚝 흘린다는데
어머니, 그 시절
마두금의 애절한 선율도 없이
온몸으로 흘렸던
그 가려진 눈물
눈물은, 뜨거운 사랑의
다른 말이었음을
나를 이긴다는 것은
삶의 모서리에서
슬픔이 차오를 때, 슬픔을
슬픔이라 하지 않는 것은
그 슬픔을, 두터운 침묵으로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불어난 아픔이
나의 삶을 짓누를 때, 아픔을
아픔이라 하지 않는 것은
그 아픔을, 고된 순응으로
녹여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무너진다는 것은 결국
나에게 지는 것
슬픔이 차오르거나
아픔이 짓누를 때,
눈물이 쉬 흐르지 않는 것은 내가,
뜨거운 눈물의 강을
이미 건넜기 때문이다
무너진다는 것은 결국
나에게 지는 것
나를 이긴다는 것은
나에게 져주지 않는 것이다
권유勸諭
삶의 쓸쓸한 모서리에서
잠시 외롭더라도 다시
너의 길을 떠나라
저울질 할 수 없는 너의 선택이
잠시 기울더라도
머뭇거리지 말고 다시
너의 길을 떠나라
때로는 지나 온 길
지울 수 없어 함은
네 삶과의 타협이
무르익지 않았음을
삶의 멍든 모서리에서
잠시 아프더라도
더 아팠던 날들에 감사하며
눈물 없이 다시
너의 길을 떠나라
아날로그를 위하여
오늘 하루쯤은 신문이 없었으면 한다
오늘 하루쯤은 텔레비젼을 끄려 한다
먼동이 틀 무렵 새벽 강가로 나가
갓 깨어난 강물에 머리를 감고
밤새 달려온 풋풋한 바람에
낮은 자세로 안겨
새들이 다투어 전하는 여명의 비결을 귀담아 들어보려 한다
오늘 하루 쯤은 휴대전화의 전원도 일찌감치 끄고
인터넷 접속도 오늘 하루쯤은 걸렀으면 한다
소리와 문자의 소통이 아닌
마음에서 빚어낸
침묵의 언어와 심상을 곱게 날려
따분한 텔레파시의 존재 논란에 미루었던 마침표를 찍고자 한다
오늘 하루쯤은 심심한 생수가 무색할 구수한 보리차를 팔팔 끓이고
습관성 커피를 잠재울 그윽한 녹차향을 잔뜩 우려 내려 한다
잃어버린 향기의 아련한 기억이
낯익은 춤사위로 고개를 들면
향내 나는 연필을 정갈하게 깎아
빛바랜 편지지라도 좋으니
소식 뜸한 고향 친구에게 황토 빛 안부를 꼼꼼히 물으려 한다
오늘 하루쯤은 느지막이 집을 나서
무릅이 아려 올 때까지
버려진 흙길을 터벅터벅 걷다가
뜨거운 노을에 몸을 흠뻑 달구며
느긋하게 돌아오려 한다
해가 뉘엿뉘엿 떨어질 무렵이면
창백한 형광램프와 타협한
그윽한 촛불을 밝히려 한다
그리고 오늘 하루쯤은 물으려 한다
나는 날마다 무엇을 잊으며
또 무엇을 잃어 가는지를
곡선에 물들다
강물이 때때로
마을을 휘돌아 흐르는 것은
결코 휘어짐이 아니다
강물은 풍문으로 떠도는
그 강 끝의 비밀을 가리기 위해
곡선의 묘미를 넌지시
곁눈질할 따름이다
강물이 때때로
굽이진 노래를 부르는 것은
결코 무너짐이 아니다
강물은 비켜설 수 없는
올곧음과의 상생을 위해
곡선의 멋을 슬며시
흉내 낼 따름이다
인생의 길은
그 끝이 가려진 곡선
내가 기꺼이
둘러서 가는 것은
그 곡선에 물들기 위함이다
어느 날 나는
어느 날 나는
보이지 않는 바람이고 싶다
뜨거운 투명을 앓고 난 뒤
보이지 않는 소리마저 닮아버린,
그러한 바람이고 싶다
어느 날 나는
심각한 부재(不在)이고 싶다
녹슨 시곗바늘과의 타협에 물들어
시간이 멈춘 고요의 숲으로 사라진,
그러한 부재이고 싶다
어느 날 나는
무거운 행방불명이고 싶다
소리 없는 삶을
하루도 살아 내지 못한 채 울먹이며
침묵을 사랑하기 위해 숨어버린,
그러한 행방불명이고 싶다
어느 날은,
그러한 투명이 그립다
어느 날은,
그러한 내가 그립다
가슴으로 듣다
꽃망울 터지는 소리를
가슴으로 듣던 날 그것이
개화의 아픔임을 알았다
봄눈 날리는 소리를
가슴으로 듣던 날 그것이
산란(散亂)에 물든
탄식임을 알았다
꽃잎 떨어지는 소리를
가슴으로 듣던 날 그것이
서러운 낙화의
속 울음임을 알았다
봄눈 사라지는 소리를
가슴으로 듣던 날 그것이
부재(不在)를 막지 못한
한탄임을 알았다
소리 없는 소리를
가슴으로 듣던 날 그것이
나를 일깨우는 일침(一鍼)임을 알았다
그림자
눈을 뜨면
세상은 온통
먹물이 그리운 화선지
붓을 들어
오늘의 나를 그린다
고뇌도 약점일까
자화상이 흐릿하다
나를 그리려 하였으나
나를 닮아 버린 그림,
부릅뜨지 못했던 눈이
서둘러 감긴다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도
세상은 온통
먹물이 그리운 화선지
흐릿한 수묵화 한 점
지웠다 그리며
늘 부끄럽게 산다
단념
인연이 필연을 앞서지 못할 때
우연도 인연을 앞설 수 없음을
서둘러 인정해 주어야 한다
이별이
만남의 그림자를 비켜가려 할 때
아파도 눈감아 주어야 한다
서글퍼 고인 석별의 눈물은
마를 수 없어
깊고 짧게 울어 주어야 한다
초록을 단념한 숲이
아름다운 단풍을 이룬다
때늦은 깨달음
게으름을 인정한 뒤
하루가 그리
길지 않음을 알았다
망설인 다음에야
좋은 사람이 이미
떠나 있었음을 알았다
하늘을 잇따라 올려다본 뒤
나의 자리가 가장
낮은 곳임을 알았다
침묵의 시간을 늘리고 나서야
변명에 짙게
물들어 있었음을 알았다
막다른 골목에서 무너진 뒤
그 길이 곧
엇길이었음을 알았다
그날을 위해서라고
길을 걸어 갈 때면 언제나
바람이 나에게 물었다
너는 어떤 날을 위해 그렇게
시린 발로 걷고 있느냐고
강가에 홀로 앉아
강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언제나
강물이 나에게 물었다
너는 어떤 날을 위해 그렇게
역류를 꿈꾸고 있느냐고
어둠이 스며드는 숲 속을
무겁게 돌아나올 때면 언제나
새들이 나에게 물었다
너는 어떤 날을 위해 그렇게
침묵의 기도로만 살고 있느냐고
참아 낸 내가
바람과 강물에게 말했다
그날을 위해서라고
기도에 지친 내가
새들에게 말했다
그날을 위해서라고
권유(勸諭)
삶의 쓸쓸한 모서리에서
잠시 외롭더라도 다시
너의 길을 떠나라
저울질 할 수 없는 너의 선택이
잠시 기울더라도
머뭇거리지 말고 다시
너의 길을 떠나라
때로는 지나 온 길
지울 수 없어 함은
네 삶과의 타협이
무르익지 않았음을
삶의 멍든 모서리에서
잠시 아프더라도
더 아팠던 날들에 감사하며
눈물 없이 다시
너의 길을 떠나라
그 사람이 그립다
내가 나의 이름을
외면하려 하였을 때,
어둠 속에서
나의 이름을 아껴 불러준
그 사람이 그립다
내가 나의 이름으로
살지 않으려 하였을 때,
나의 곁에서
비스듬히 머물러준
그 사람이 그립다
내가 나의 이름을
강물에 던졌을 때,
그는 나의 안에서
낮게 울어준 사람이었다
그 사이,
게으른 바람이
철 지난 안부를 전하며 스쳐갔다
이름 없는 나무는 없었다
이름 없는 들꽃도 없었다
내가 나의 이름이 된 오늘,
나를 놓아준 그 사람이
더욱 그립다
달관에 관하여
기쁨을 쉽사리
기쁨이라 하지 않는 것
슬픔을 쉽사리
슬픔이라 하지 않는 것
마음으로만 두 눈을 부릅뜬 채
때로는 세상을,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짙게 헤아리며
무거운 침묵의 숲을 찾아
기꺼이 길 떠나는 것
직선만이 선이라는,
올곧은 나무의 곁을
귀먹은 척 서둘러 스치며
곡선도 선이라는,
굽은 나무의 속울음에
잠시라도 귀를 빌려주는 것
그것,
소리 없이 다가와
보이지 않게 머무는
그것
나를 미워한 날이 있다
보이지 않는,
나를 앞세운 내가
나를 미워한 날이 있다
미워함에 대한
하찮은 물음조차 없이,
묵묵히 나를 지켜주던
그러한 나를
미워한 날이 있다
세상과의 낡은 불화를
훌쩍 떠넘기듯
애꿎은 나를
미워한 날이 있다
허물어짐을 인정하지 않으려
때로 우리는
스스로를 미워한다
미워하며
눈물을 배우고
미워하며
사랑을 배운다
살아가는 동안
살아가는 동안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살아가는 동안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고된 만남이 아니어도 좋다
화려한 만남이 아니어도 좋다
그저 무심한 바람처럼
가볍게 스쳐만 가도
그 닿음에 전율하리
그 흔적에 입맞추리
살아가는 동안
지울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살아가는 동안
버릴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이별의 방식
눈물로 지는 꽃
가슴에 묻는다
애증에 지친 나무
홀로 서게 한다
사랑의 깊이보다
더 아파한 것은
사랑을 미처
엿듣지 못한 때문
필연으로 보듬은 새
우연으로 날린다
외로운 그림자
바람으로 지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