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산서원기〔玉山書院記〕
합천 군수(陜川郡守) 권덕린(權德麟) 공은 회재(晦齋) 이 선생(李先生)의 제자이다. 융경(隆慶) 6년(1572) 9월에 내게 편지를 보내 “선생을 위해 서원(書院)을 세웠으니, 그 시말(始末)을 기록해 주고 재사(齋舍)의 명칭도 정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편지를 받아서 간직해 두고도 병을 앓느라고 즉시 초안을 잡지 못하였다. 만력(萬曆) 계유년(1573, 선조6) 겨울에 선생의 손자인 이준(李浚)이 찾아와서 권군(權君)이 이미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기에 놀라 애도하였다. 학문에 뜻을 둔 젊은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되었으니, 아! 이 무슨 운명이란 말인가. 감회에 젖어 죽은 벗의 부탁을 생각하고는 삼가 졸렬한 글을 엮어서 이군이 돌아가는 편에 부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선생의 의용(儀容)을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날에 운 좋게 뵌 적이 있었고, 선생의 덕행을 또 퇴계(退溪) 선생이 지은 행장(行狀)을 통해서 잘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매우 존경하고 우러러 감탄한 지가 오래되었다. 일찍이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보니,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지나간 지역은 한 번 말을 멈추었거나 한 번 시를 읊조린 곳이라도 빠짐없이 서원을 세웠다. 명나라 사람들이 현인(賢人)을 한없이 좋아한 것이 이와 같았는데, 더구나 선생이 머물며 학문을 강론한 곳이겠는가.
경주 부윤 이후 제민(李侯齊閔)이 13개 고을 인사들의 바람을 수합하여 몸소 터를 정한 뒤에 감사에게 고하여 서원을 세우기를 청하고, 여유분의 재정으로 그 비용을 담당하였으며, 고을의 원로들과 선비들도 힘껏 이를 도왔다. 임신년(1572, 선조5) 2월에 역사를 시작하여 8월에 완공하였는데, 사우(祠宇)와 강당, 동서 양재(兩齋) 및 전면의 누를 합해서 모두 40여 칸이다. 아, 성대하다.
경주 안강현(安康縣)의 양좌동(良佐洞)은 선생이 사셨던 곳이다. 양좌동에서 서쪽으로 15리 되는 곳에 자옥산(紫玉山)이 있는데, 선생이 별서(別墅)를 지어 노닐며 휴식하고 강학(講學)하는 곳으로 삼았다. 여기에 탁영대(濯纓臺), 징심대(澄心臺), 관어대(觀魚臺), 세심대(洗心臺) 등이 있으니, 모두 선생이 이름을 붙이고 일찍이 소요하며 즐기셨던 곳이다. 지금의 서원이 바로 세심대 옆에 있는데, 아래위의 용추(龍湫)가 맑고 깊어 사랑스럽다. 내가 비록 이곳에 가 보지 못하였지만, 권공이 보내 준 글만 보고도 이미 저절로 공경하는 마음이 들었다.
내가 비록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지는 못했지만, 선생의 말씀을 듣고 《심경부주(心經附註)》를 볼 수 있었기에 내심 스스로 존경하여 나의 스승으로 생각하였다. 마침내 그 동재(東齋)를 ‘민구(敏求)’라고 명명하였으니, 공자(孔子)께서 가르치신 ‘옛것을 좋아하여 민첩하게 구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그 서재(西齋)를 ‘암수(闇修)’라고 명명하였으니, 주자의 자찬(自贊)에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날마다 닦는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누는 ‘납청(納淸)’이라고 명명하였다. 맑은 것은 기운이고 기운은 양(陽)이니, 이 누에 오르는 자가 맑은 기운을 받아들여 양을 기르고 양을 길러 도(道)가 모인다면 제대로 되었다고 할 것이다.
만력 계유년(1573, 선조6)에 조정에서 옥산서원으로 사액(賜額)하였으니, 주자가 의리를 강론했던 곳을 떠올리게 하는 것으로, 명호(名號)의 아름다움과 사문(斯文)의 영광됨이 지극하다고 하겠다. 아, 내가 늙고 병들어서 한번 서원으로 들어가 사우(祠宇)에 참배한 뒤 고을의 선비들과 더불어 선생의 바른 학문을 강구하여 밝힘으로써 분발시키고 각성시키는 데에 이르지 못하고, 그저 동쪽을 바라보며 아쉬워할 뿐이다.
오직 하나 바라는 것은, 이 서원에서 공부하는 선비들이 부윤이 서원을 건립한 뜻에 감동하고 선생이 머무셨던 곳임을 늘 생각하여, 그 높고 두터운 도덕을 사모할 뿐만 아니라 깊이 침잠하고 치밀하게 연구했던 그 자세를 배우고, 깊이 침잠하고 치밀하게 연구했던 자세를 배울 뿐만 아니라 독실하고 확고했던 뜻에도 힘쓰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선생의 고을이 길이 공맹(孔孟)의 고향인 추로(鄒魯)처럼 많은 선비가 배출될 것이고, 우리 국가에서 인재를 취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더욱 유원(悠遠)하여 다함이 없을 것이니, 어찌 선생에게도 영광되지 않겠는가. 아,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력 갑술년(1574, 선조7) 맹춘(孟春)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성균관대사성 지제교 양천(陽川) 허엽(許曄)은 삼가 기문을 쓴다.
玉山書院記[許曄]
陜川郡守權公德麟。晦齋李先生之學徒也。隆慶六年季秋。以書來曰。爲先生起書院。其記始末。且名齋舍哉。曄受而藏之。疾病遷延。未卽起草。萬曆癸酉冬。先生之孫浚來傳權君已下世。爲之驚悼。少年志學之士。遽至於是。噫。是何司命也。感念亡友之囑。謹寫拙詞。以付李君之還。竊惟先生之德容。幸及瞻覩於遊泮之日。先生之德行。又得備聞於退溪所撰行狀。景慕而仰嘆者久矣。嘗見大明一統志。程朱所過一憩馬一嘯詠之地。無不起書院。好賢之無已有如是者。況先生之所棲遲做業者乎。府尹李侯齊閔。採鄕十三之願。躬卜定其基。告于監司。請建書院。出其庫餘。以主其費。鄕老儒士亦盡其力。壬申二月始事。八月訖功。則祠宇與講堂曁東西兩齋及乎前樓總四十餘間。吁盛矣哉。慶州安康縣之良佐洞則先生之居也。洞之西十五里。有紫玉山。先生建別墅。以爲游息藏修之所。有濯纓,澄心,觀魚,洗心等臺。皆先生所題目。而嘗逍遙自樂者也。今之書院。正當洗心臺之上。上下龍湫。澄泓可愛。予雖未得踐斯境。而據權公之示。已竦然興起矣。予雖未及摳衣於先生之門。而聞先生之語。得見心經附註。竊自尊之。以爲吾之師矣。遂名其東齋曰敏求。取孔子所訓好古敏以求之之意也。其西齋曰闇修。取朱子自贊中闇然而日修之意也。樓曰納淸。淸者氣也。氣者陽也。登斯樓者納淸而養陽。養陽以凝道。斯其具也。萬曆癸酉。賜額玉山書院。依然朱子講義之地。名號之美。斯文之光。可謂至矣。嗟夫。予衰且病。無由一入院中。瞻拜祠宇。得與鄕士子講明先生之正學。以致提撕警覺之事。徒爲東望悵悵而已。惟願士子之居是院者。感府尹營建之意。思先生棲息之所。不但慕其道德之高厚。而且學其深潛縝密之功。不但學其深潛縝密之功。而且勵其篤實堅確之志。則先生之鄕。永爲鄒魯之多士。而我國家取材而經世者。益悠遠而無窮矣。豈不于先生有光哉。嗚呼。可不勉哉。萬曆甲戌孟春。通政大夫成均館大司成知製敎陽川許曄。謹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