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머~
소 울음소리가 정겹게 축사에서 들려왔다. 그 앞에서 여물을 열심히 먹는 소 한 마리를 화준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도련님 도대체 그 추리닝은 어디서 나신 거예요?”
농장 관리인인 경호는 백수들이 즐겨 입는다는 추리닝을 입고 있는 화준에게 여물을 털어내며 물었다.
“아, 이거 어제 오일장 갔는데 예쁘길래 샀어. 깔별로.”
화준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경호는 그런 화준이 심히 걱정된 듯 표정이 굳었다.
서화준, 뜻대로 되었다면 지금쯤 골든 백화점 대표이사가 되어 화려하게 백화점 꼭대기 주인이 됐어야 할 골든 백화점 장남이었다. 하지만 두 달 전 여동생인 화진에게 밀려 대표이사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그 자리를 자신의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왔던 화준에게 이사회에서 결정 난 안건은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화진은 여전히 화준이 백화점 상무로 일해주길 제안했지만 그는 바로 거절하고 아버지 소유의 시골 농장에 내려온 지 두달이 지났다.
“도대체 여기에 얼마나 계시려고 열 벌이나 사셨어요?”
경호가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처음 그가 시골에 내려오던 토요일 밤은 추적하게 비가 내렸다. 세차게 몰아치던 그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놀라 뛰쳐나온 경호에게 안길 때 만해도 이렇게 오랫동안 화준이 이 시골구석에 처박혀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었다.
“아저씨?”
화준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네, 도련님.”
“혹시 나 여기 있는 거 싫어? 나 귀찮아?”
세상 섭섭한 표정으로 화준이 물었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나요, 도련님처럼 큰일 하실 분이 소나 쳐다 보고 계시니까 걱정 되서 그러죠.”
“큰일 할 사람은 무슨, 걱정하지 마. 나 지금 너무 좋아.”
화준이 다시 소 앞에 앉으며 여물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경호는 더는 할 말이 없어 여물을 다 주고는 발걸음을 옮기려던 차였다.
“내일부터 소 여물은 내가 줄게.”
그 말에 경호가 놀라 뒤돌아보았다.
“도련님이요?”
“언제까지 아무것도 안 할 수 없잖아?”
“회장님 아시면….”
“아셔도 상관없어.”
화준이 담담한 척 말했지만 웃는 얼굴은 아니었다.
“점심 뭐 드시고 싶으세요?”
경호의 말에 화준이 방긋 웃으며 돌아보며 말했다.
“열무국수.”
“준비해 놓으라고 하겠습니다.”
“응.”
화준은 그 후로도 여물 먹는 소를 바라보며 한참을 있었다.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 화준 또한 오래 있을 거라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하루 이틀 있다 보니 몸이 편했다. 늘 새벽에 일어나 늦게까지 일하던 화준에게 편안함이란 건 생소한 경험이었다. 언제 자리를 빼앗길 줄 몰라 전전긍긍하며 불면증 약을 먹던 화준이 여기 온 지 딱 한 달만에 약을 먹지 않아도 잠을 아주 푹 잘 잤다.
“아, 도련님.”
멀리서 경호가 말했다.
“왜?”
“이번 주 토요일에 재경이가 옵니다.”
“재경이?”
화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제 딸이요.”
경호의 딸이라는 말에 화준이 벌떡 일어났다.
“선재경?”
“네.”
경호는 그 말을 끝으로 식당으로 향했다.
선재경, 경호의 딸. 고등학교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방학 때마다 내려오면 만나서 늘 치고 박고 싸우던 사이었다.
시골은 벌레를 죽도록 싫어하는 화진은 자주 오지 않았고 화준은 늘 방학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럴 때마다 만나서 사사건건 시비가 붙고 피터지게 싸운 게 선재경이었다.
화준이 대학을 미국으로 진학하면서 더 이상 시골 농장에 내려오는 일은 없었고 재경 또한 시골을 떠나 서울에서 자취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들은 소식이 몇 해전 골든 백화점 인천지사에 취직했다는 소식이었다. 경호 아저씨가 참 좋아했던 기억이 화준에게 남아 있었다.
주말이라 내려오는 모양이었다. 싸운 기억밖엔 없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같은 나이 또래의 사람을 만난다는 생각에 화준은 좋았다.
“아저씨, 내가 선재경 데리러 갈게.”
“도련님이요?”
경호는 화준의 놀라며 말했다.
“응. 놀면 뭐해? 내가 터미널에 나갈게.”
“제가 다녀와도 됩니다.”
“오늘 오일장이잖아, 장 구경도 하고 몇 시 도착이랬지?”
“5시 도착입니다.”
“전화번호 알려줘.”
경호는 잠시 망설이다 재경의 번호를 화준의 핸드폰에 찍어 주었다. 화준은 씩 웃으며 방으로 들어가더니 깔 별로 샀다던 추리닝 중에 검정색을 골라 입고 나왔다.
“이 색은 덜 백수 같지? 외출용으로 딱이겠더라고.”
경호는 화준을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화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신나서 주차장으로 향하다 다시 돌아왔다.
“아무래도 제가 가는 게 낫겠죠?”
경호가 묻자 화준이 고개를 저었다.
“트럭 키 줘.”
“트럭 몰고 가시게요?”
“어. 저번에 내 차 끌고 갔다가 동네 꼬마들이 잔뜩 와서 뚜껑 열린다고 뚜껑 열어봐 달라고 그래서 몇 번을 열어
줬나 몰라. 귀찮아. 트럭 몰고 다녀올게.”
화준은 경호에게 키를 받아 트럭을 몰고 신나게 읍내로 향했다. 읍내는 농장에서 차로 10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제법 작은 터미널도 있고 얼마 전 큰 마트도 생겼다. 오일장이 서는 날에는 먹거리도 볼거리도 많은 이 구역 번화가였다.
터미널에 주차를 하고 옆에 열린 장으로 향했다. 온동네 어르신들은 다 모인 것 같았고 경치도 좋고 물고 좋아 캠핑족이 늘면서 관광객들도 꽤 많았다.
“총각!”
그때 누군가 화준의 등짝을 세 개 쳤다. 화준은 놀라 인상을 쓰며 뒤를 돌아보았다. 화를 버럭 내려는데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때 그 총각 맞네?”
일전에 화준에게 싸다며 바가지를 왕창 씌워서 추리닝을 판 아주머니였다. 처음 가격을 듣고 어이가 없었지만 지역 사회 발전을 위해 한 번 정도는 이바지 하고자 하는 아름다운 마음이었다.
“옷이 딱! 잘 어울리네, 신상 또 나왔는데 구경하고 가.”
“오늘은 안 사요.”
“왜에?”
실망이 가득한 얼굴로 아주머니가 물었다. 지나가는 화준을 본 순간 오늘도 조기 퇴근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안 산다니 하니 아쉬운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매번 여기서만 사면 오일장이 번창하겠어요? 오늘은 다른 집 가서 살 거예요.”
“뭐에?”
아주머니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많이 파세요.”
화준이 방긋 웃으며 옆 가게로 웃으며 들어갔다. 잠시 후 화준은 일하시는 아주머니들의 일복을 한 바가지 사서 옆집에서 나왔다. 함께 먹을 간식도 사고 이것저것 사다 보니 양손이 묵직했다.
신나게 쇼핑을 하다 보니 무언가 까먹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선재경을 깜짝했다.
시계는 5시 20분을 향하고 있었다.
-아빠가 마중 나오는 거 아니었어?
재경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아, 도련님이 대신 나간다고 하시고 네 번호도 받아갔는데? 못 만났어?
-도련님?
-그래, 화준 도련님 말이야.
화준이란 말에 순간 재경은 미간이 좁혀졌다. 재경도 화준의 소식을 들었다. 화진에게 밀려 쫓겨났다고 들었는데 시골에 와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재경 또한 편히 쉬려고 시골에 온 건데 서화준이 있다면 불편할 것 같은 마음에 다시 올라가려고 매표소로 향했다.
-아빠는 서화준 와 있다는 걸 왜 지금 말해?
-왜? 도련님 와 계시면 안돼?
-몰라, 일단 끊어. 다시 올라갈게.
전화를 끊고 매표소로 향하던 재경은 검은 추리닝을 입은 남자에 의해 앞길을 가로막혔다.
“내가 그렇게 싫어? 다시 돌아갈 만큼?”
고개를 든 순간 화준이 재경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놀란 재경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자신보다 훨씬 키가 큰 화준이 요상한 추리닝을 입고 재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와, 몇 년 만에 보는데 반갑게 인사를 나누지 못할 망정 귀신 보것 같은 그 표정은 뭐야?”
재경은 살짝 인상을 썼다. 도대체 저런 추리닝은 어디서 산 건지 온 동네 사람들에게 백수 아우라를 풍겨대는 옷이었다.
예전에 인천지사에 내려온 화준을 멀리서 본 적이 있었다. 그 때 참 예전과 다르게 멋진 사람이 됐구나, 생각했는데 그 사람은 어딜가고 정말 시골 백수가 서 있는 것 같았다.
“짐은 이게 다지?”
화준은 재경이 잡고 있던 캐리어를 끌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놀란 재경은 화준의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다시 인천으로 갈 거예요.”
재경의 말에 화준이 돌아보며 오만 인상을 쓰며 말했다.
“어색하게 존댓말을 하고 그래? 우리 사이에?”
어릴 땐 서로 욕도 해가며 바락바락 싸웠었다. 재경도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어쨌든 재경이 몸 담고 있는 회사의 오너가 사람이니 자신도 모르게 존댓말이 나와 버렸다. 그렇다고 해도 존댓말을 쓴 건 좀 오버스럽다고 그녀도 생각했다.
재경은 다시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내 가방 돌려줘. 다시 갈 거야.”
그 말에 화준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며 방긋 웃었다.
“너 되게 못 됐다. 아침부터 너 온다고 목 빠지게 기다린 아저씨 생각은 안 해?”
“…….”
화준의 말에 재경은 입을 꾹 다물며 그를 흘겨보았다. 그 표정에서 어린 시절 재경이 겹쳐졌다. 여전한 모습이었다.
“눈 예쁘게 뜨고 따라와.”
재경은 화준의 말이 못마땅했지만 하는 수 없이 그를 따라 주차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