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1장 1-11절. 감사와 기도
1절.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Paul and Timothy, bond-servants of Christ Jesus, To all the saints in Christ Jesus who are in Philippi, including the overseers and deacons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Παῦλος καὶ Τιμόθεος δοῦλοι Χριστοῦ Ἰησοῦ
Paul and Timothy, bond-servants of Christ Jesus,
디모데가 바울과 같이 편지의 송신자로 나타난 곳은 데살로니가 전후서, 고린도후서, 골로새서, 빌레몬에 나타납니다.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호칭한 것은 빌립보서, 로마서, 디도서 뿐입니다.
‘종’이란 의미는 바울이 예수님의 소유이고, 예수님께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관계임을 의미합니다.
‘디모데’는 아버지가 헬라인이었으나, 유대인인 어머니의 경건한 신앙적 감화 속에서 자랐고(디모데후서 1:5), 바울 사도의 신앙적 아들과 같은 위치에 있었습니다(디모데전서 1: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πᾶσιν τοῖς ἁγίοις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τοῖς οὖσιν ἐν Φιλίπποις σὺν ἐπισκόποις καὶ διακόνοις·
To all the saints in Christ Jesus the being in Philippi, with the overseers and deacons
‘있는’(οὖσιν)은 현재분사로서(being) 현재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편지하노니’는 의미상 첨가한 것입니다.
1.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었고, 육적으로는 빌립보에 살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성도’(τοῖς ἁγίοις)란 하나님께 거룩하게 바쳐진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종’이고, 빌립보 교인들은 ‘거룩한 사람들’이란 것은 대조적인 면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감독’은 각 교회들을 지도 감독하는 지도적인 직분을 가리켰고, 어떤 경우에는 ‘장로’와 같은 직분으로도 쓰였습니다(베드로전서 5:1-3).
‘집사’ 직은 처음에는 일곱 집사처럼(사도행전 6:1-6)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는 직분이었으나, 나중에는 넓은 의미에서 일반적인 봉사의 직을 가리켰습니다.
2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New American Standard Bible: Grace to you and peace from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χάρις ὑμῖν καὶ εἰρήνη ἀπὸ Θεοῦ Πατρὸς ἡμῶν καὶ Κυρί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grace to you and peace from God Father of us and Lord Jesus Christ
‘있을지어다’는 의미상 첨가한 것입니다.
1. ‘은혜’를 기원하는 것은 헬라인의 인사법이었고, ‘평강’을 기원하는 것은 유대인의 인사법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두 가지 축복이 겸하여 주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문안 인사에는 ‘그리스도 예수’라는 말이 송신자인 바울에게도 적용되었고, 수신자인 빌립보 교인들에게도 적용되었고, 축원문에도 적용되어 있습니다.
3절.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New American Standard Bible: I thank my God in all my remembrance of you,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Εὐχαριστῶ τῷ Θεῷ μου ἐπὶ πάσῃ τῇ μνείᾳ ὑμῶν,
I thank the God of me upon every of the remembrance of you
직역하면 ‘모든 너희의 기억에 대해 내가 나의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뜻입니다.
한글성경은 잘 풀어서 번역한 것입니다.
‘감사하며’(Εὐχαριστῶ)는 현재형으로서(I thank) 현재도 언제나 감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1.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는 마음이 늘 들었습니다.
(1) 바울이 매 맞고 감옥에 갇히는 수난을 당했는데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잘 할 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힘든 가운데서도 일편단심 바울 사도를 위해서 가장 많은 사랑을 가지고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습을 볼 때, 아무리 감옥에 있어도 외롭지 않고 감사가 나왔던 것입니다.
(2) 이처럼 변함없는 사랑이란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변함없는 사랑을 기대하기가 침 힘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변함 없는 사랑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이러한 변함 없는 사랑은 주님의 은혜에 근거를 둔 사랑만이 가능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말썽 피는 남편에 대해서도 주님의 은혜 속에서 변함없이 사랑한 아내들을 보면, 얼마나 귀한 모습인지 모릅니다.
그러한 변함없는 사랑을 실천한 사람들의 가정과 자녀들은 복을 받아서 잘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절.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lways offering prayer with joy in my every prayer for you all,
πάντοτε ἐν πάσῃ δεήσει μου ὑπὲρ πάντων ὑμῶν, μετὰ χαρᾶς τὴν δέησιν ποιούμενος,
always in every supplication of me for all of you, with joy of the supplication making
직역하면 ‘너희 모든 이들을 위해서 나의 모든 기도에 항상, 기쁨으로 기도를 하며’란 뜻입니다.
맨 뒤에 나오는 동사(ποιούμενος)는 현재분사로서(making) 기도를 항상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1. ‘간구함’(δέησις. supplication)은 간절히 간청하는 기도를 가리키고, ‘기도’(προσευχή, prayer)는 일반적인 기도를 가리킵니다.
(1) ‘기쁨’이란 말은 빌립보서에 핵심적인 단어입니다. (1:18, 2:17-8, 3:1, 4:4).
빌립보서 1: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빌립보서 2:17-18.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빌립보서 3: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빌립보서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2)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는 기쁨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 동족 유대인을 위해서 기도할 때는 근심 중에 기도했습니다( 로마서 9:1).
또한 갈라디아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때도 근심으로 기도했고( 갈라디아서 1:9-10), 고린도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때도 근심으로 기도했을 것입니다(고린도후서 2:4).
2.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간구할 때마다 기쁨으로 간구할 수 있었습니다.
(1) 그러나 바울 사도가 다른 교회에 대해서는 기쁨으로 간구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갈라디아 교회와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는 근심으로 간구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오늘날에는 위대한 사도라고 모두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았습니다.
일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도 바울을 배척했고, 일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도 바울의 복음 전도를 의심했고, 일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을 거짓 사도라고 배척했습니다.
(2) 그런데, 바울 사도를 가장 신임하고 사랑한 교회는 빌립보 교회였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에도, 바울에 대한 사랑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다른 교회는 일반적으로 바울 사도를 교회에서 만났을 때에만, 선교비를 조금 보조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회는 바울 사도가 어느 곳에 가서 선교를 하더라도 변함없이 오로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랑을 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떠나서 데살로니가에 갔을 때에도 두 번이나 선교비를 보냈고(빌 4:16), 바울이 멀리 고린도에 가서 선교할 때에도 바울이 디모데를 보내왔을 때 기꺼이 선교비를 보냈습니다(고린도후서 11: 9).
그리고,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바울에 대한 신임과 사랑이 변함없이, 선교비와 시중들 사람까지 보냈습니다.
(3) 사람은 서로 멀리 떨어져서 보지 않으면, 사랑도 식는 법입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인들의 바울 사랑은 식을 줄 몰랐습니다.
특히, 예루살렘 교인들과 갈라디아 교인들과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에 대한 사랑이 변질되어, 심지어 바울을 거짓 사도라고 매도하고, 바울이 구제 헌금을 착복했다고 악소문을 냈습니다.
그렇지만 빌립보 교회 성도들만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변함없이 바울을 사랑하고 기도와 물질적 후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4) 이런 사랑은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 영원히 변함없이 사랑하는 그런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헤세드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8장에는 주님의 이런 변함없는 사랑에 대해서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내가 너를 ‘무궁한 사랑’으로 사랑했노라고 하십니다. (렘 31:3)
축도할 때,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을 축원하는데, 바로 우리가 어떠한 상황 가운데 있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변함없다는 그런 무궁한 사랑을 말합니다.
에베소서 6: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5절.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in view of your participation in the gospel from the first day until now.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ἐπὶ τῇ κοινωνίᾳ ὑμῶν εἰς τὸ εὐαγγέλιον ἀπὸ τῆς πρώτης ἡμέρας ἄχρι τοῦ νῦν,
for the participation of you in the gospel from the first day until the now
직역하면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 안에서 너희의 참여 때문에’란 뜻입니다.
1. ‘첫날부터 이제까지’란 바울이 루디아를 전도하여 빌립보 교회를 설립한 때부터(사도행전 16:12-15) 현재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있는 때까지를 가리킵니다. (사도행전 28:16)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는 말씀은 ‘바울의 복음 전도에 빌립보 교인들이 물심양면으로 나와 교제하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감사하고 기뻐한다는 뜻입니다. (빌립보서 1:3-4)
(1) ‘교제’(κοινωνίᾳ, fellowship)란 ‘물질적 기부로 도움을 주는 것’(contributory help, 로마서 15:26, 고린도후서 9:13, 히브리서 13:16), ‘친교에 동참하는 것’(sharing in communion, 고린도전서 10:16, 빌립보서 2:1, 3:10), ‘영적인 교제’(spiritual fellowship, 갈라디아서 2:9, 고린도후서 6:14)를 가리킵니다.
특히 본 절에서 ‘교제’란 빌립보 교회가 바울의 복음 전도에 선교 헌금으로 도운 것을 가리킵니다.
즉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의 첫 방문 때 숙식으로 대접하였고(사도행전 16:15), 바울이 빌립보를 떠나 데살로니가로 전도하러 갔을 때도 두 번 쓸 것을 보내주었습니다(빌립보서 4:16).
그 후에 바울이 고린도에 전도하러 갔을 때, 실라를 통해서 헌금을 보내주었고(고린도후서 11:9), 지금 로마 감옥에 있을 때도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선교 헌금을 보내주었습니다(빌립보서 4:18).
물론 빌립보 교회는 바울에게 물질적 후원을 한 것만이 아니라, 바울을 위해 기도로 도왔고,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바울을 지지하고 온전히 이해해주었습니다.
(2) 이 ‘교제’(κοινωνίᾳ, fellowship)란 본래 인간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아담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과의 막힌 담을 예수님의 희생으로 다시 하나님과 사람간의 교통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즉 성령님이 인간의 마음에 교통하시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교통이 회복된 성도들은 성도들끼지 교제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란 하나님과의 교통이 회복된 사람들끼리 서로 교제하는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과연 예수님의 십자가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교통이 이루어지고, 인간과 인간의 교제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2. 복음에서 교제한다는 것은 원문에 ‘복음을 위해서 교제한다’(εἰς τὸ εὐαγγέλιον: for the gospel)는 뜻입니다.
(1) 세상 사는 재미는 교제하는 데 있습니다.
교제가 없다면, 홀로 외로워서 행복이 없습니다.
지금은 ‘교제의 시대’입니다.
과거에는 얌전만 뺏지만, 지금은 교제가 왕성한 시대입니다.
국가도 국제적으로 교제하지 않으면 고립됩니다.
(2) 그런데, 교제의 목적이 무엇이냐가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정치적 목적으로 교제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상으로 교제합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하고, 애를 낳기 위해서 교제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도의 교제는 복음을 위해서 교제한다는 것입니다.
복음 전도를 위해서 함께 기도하고, 함께 전도하고, 함께 헌금하면서 교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복음 전도를 위해서 열심히 교제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6절.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I am confident of this very thing, that He who began a good work in you will perfect it until the day of Christ Jesus.
우리가 확신하노라.
πεποιθὼς αὐτὸ τοῦτο,
having been persuaded of the very thing this
직역하면 ‘바로 이 사실을 내가 확신하노니’란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가’는 남성 단수이기 때문에 ‘내가’로 번역해야 합니다.
‘확신하노라’(πεποιθὼς)는 완료분사로서(having been persuaded of) 이미 확신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ὅτι ὁ ἐναρξάμενος ἐν ὑμῖν ἔργον ἀγαθὸν
that the (One) having begun in you work good
‘시작하신’(ἐναρξάμενος)은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begun) 과거에 분명하게 시작하신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ἐπιτελέσει ἄχρι ἡμέρας Χριστοῦ Ἰησοῦ·
will complete until day Christ Jesus
‘이루실 줄’(ἐπιτελέσει)은 미래형입니다(will complete).
1. 앞 절에서는 빌립보 교회가 헌금한 일을 말했으나, 본 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 하실 일을 확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1) 즉 하나님께서 빌립보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착한 일들을 이루어주실 것을 바울은 확신한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착한 일’이란 빌립보 교인들이 행한 선교 헌금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하나님께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착한 일을 하게 하시고, 훌륭한 성도로 살아가게 하신 일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빌립보 교인들이 선교 헌금이라는 착한 일을 한 것은 그들이 스스로 했다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빌립보 교인들을 예수 믿게 하시고(Calvin, Bengel), 선교 헌금이라는 착한 일을 하게 하신 것을 가리킵니다. (Meyer, Lightfoot)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 즉 재창조하신 것은 더욱 선한 일이고, 이 구원을 통해서 빌립보 교인들은 선한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2) ‘그리스도 예수의 날’이란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을 가리킵니다(데살로니가전서 1:10, 데살로니가후서 1:7-10, 고린도전서 5:5).
2.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변함없이 아름다운 신앙생활 할 것을 믿었습니다.
(1)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할 때, 빌립보 교인들을 확신할 수 있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믿기 힘든 세상에서 이렇게 서로 믿을 수 있는 빌립보 교인들이 있었으니까요.
바울이 체포되고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나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거짓 사도라고 배반하고 떠나갔으나(디모데후서 4:16), 빌립보 교인들은 변함없이 바울을 신뢰하고, 선교 헌금을 보내주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체포되고 감옥에 갇혔지만, 빌립보 교인들처럼 바울을 변함없이 믿고 사랑해준 빌립보 교인들이 있는 것은 바울에게 정말 위로가 되고 행복하게 만든 일이었습니다.
(3)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들입니다.
우리 주님은 성춘향이의 이 도령처럼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시고 가셨습니다.
과연 성춘향이와 같이 세상에 몸을 버리지 않고, 정결한 몸과 마음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성도가 얼마나 있을까요?
지금 세상은 ‘문화’라는 미명하에 영화나 연속극이나 소설이나 예술 작품도 모두 육신의 정욕을 자극하는 유혹물들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늘 깨어 기도하면서,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7절.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it is only right for me to feel this way about you all, because I have you in my heart, since both in my imprisonment and in the defense and confirmation of the gospel, you all are partakers of grace with me.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καθώς, ἐστιν δίκαιον ἐμοὶ τοῦτο φρονεῖν ὑπὲρ πάντων ὑμῶν,
accordingly, it is right for me this to think about all of you
‘생각하는 것이’(φρονεῖν)는 현재 부정사형 동사로서(to think) 원형(φρονέω)은 ‘이해하다, 생각하다, 판단하다, 관찰하다’(understand, think, judge, observe)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땅하니’에서 동사(ἐστιν)는 현재형입니다(it is).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διὰ τὸ ἔχειν με ἐν τῇ καρδίᾳ ὑμᾶς,
since the to have me in the heart you
직역하면 ‘내가 너희들을 마음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라고 번역할 수 있고, 또한 ‘너희들이 나를 마음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가지고 있다’(ἔχειν)는 현재 부정사형 동사로서(to have) 현재 계속 가지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ἔν τε τοῖς δεσμοῖς μου καὶ ἐν τῇ ἀπολογίᾳ καὶ βεβαιώσει τοῦ εὐαγγελίου
in both in chains of me and in the defense and confirmation of the gospel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συνκοινωνούς μου τῆς χάριτος πάντας ὑμᾶς ὄντας.
fellow partakers with me of the grace all you being
‘됨이라’에서 동사(ὄντας)는 현재분사로서(being) 현재 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1. 우리 성경과 대부분의 역본들에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it is only right for me to feel this way about you all, because I have you in my heart, since both in my imprisonment and in the defense and confirmation of the gospel, you all are partakers of grace with me.
그런데, 특별히 NRSV에는 ‘너희가 나를 마음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New Revised Standard Version: It is right for me to think this way about all of you, because you hold me in your heart, for all of you share in God’s grace with me, both in my imprisonment and in the defense and confirmation of the gospel.
2.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빌립보 성도들을 이처럼 사랑하고 신뢰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1) 첫째는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이 항상 서로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에, 바울은 이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① 바울은 자신이 빌립보 감옥에 갇히고 죽을 위험을 당하면서 빌립보 교회를 설립했기 때문에, 늘 빌립보 교인들을 마음에 두고 기도하고, 사랑했습니다.
또한 빌립보 교인들도 늘 바울을 마음에 두고 기도하고 물질적 후원을 한 것은,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과연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언제나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법입니다.
아기를 사랑하는 엄마는 설거지를 하든지, 청소를 하든지, 빨래를 하든지 언제나 마음이 아기에게 가 있습니다.
이처럼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을 사랑하고 늘 마음에 두었기 때문에, 항상 바울을 위해서 기도하고, 기회가 되는 대로 물질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② 그러나 돈을 주고, 물질적 후원을 한다고 해도, 마음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표현대로, 돈을 주고, 몸으로 희생하고, 좋은 말을 해줄지라도, 마음에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와 같습니다.
밥을 주어도, 옷을 입혀주어도, 사랑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서울의 유명한 영락보*원에서는 고아들을 부유한 가정의 아이들 못지않게 고급 옷과 고급 음식과 고급 시설로 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과 같은 사랑은 없기 때문에 아기들은 너무나 눈에 기가 없고, 건강도 좋지 않았습니다.
③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도 밥 한 그릇을 대접해도 사랑이 담긴 밥을 먹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도 빌립보 교인들처럼 서로 기도해주고,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 사도를 변함없는 사랑하고 신뢰하는 것은 비록 바울 사도가 유대인들에게 온갖 핍박을 받고 로마 감옥에까지 들어갔을지라도, 바울을 참 사도로 알고, 변함없이 사랑하면서, 정성과 사랑을 다 해서 헌금하고 시중들 자를 보내기까지 한 것을 말씀합니다.
①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사람은 환경의 동물입니다.
환경 따라서 마음도 변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도 처음에는 바울을 위해서 눈이라도 뽑아서 줄 만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예루살렘 교회 율법주의자들이 들어와 서 바울을 거짓 사도라고 매도하자, 바울에 대한 처음 신뢰와 사랑을 접고서 율법주의자들을 따라갔습니다.
고린도 교인들도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고, 신령한 은사를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떠나간 다음에는 마음이 변하고 신앙도 변질되어서, 바울을 거짓 사도로 의심하고, 심지어 바울이 헌금을 착복했다고까지 의심했습니다.
② 이런 상황에서 빌립보 성도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히기까지 해도, 바울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를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8절.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God is my witness, how I long for you all with the affection of Christ Jesus.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μάρτυς γάρ μου ὁ Θεός,
witness for my the God (is),
직역하면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시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ὡς ἐπιποθῶ πάντας ὑμᾶς ἐν σπλάγχνοις Χριστοῦ Ἰησοῦ.
how I long after all you in affection of Christ Jesus
직역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심장으로 얼마나 내가 너희 모두를 사랑하고 있는지’란 뜻입니다.
‘사모하는지’(ἐπιποθῶ)는 현재형입니다(I long after).
‘심장’(σπλάγχνοις)이란 단어는 ‘심장, 간, 허파 같은 내장’을 가리키고(the inward parts as heart, liver, lungs, etc.), 사랑과 감정의 자리를 가리킵니다( affections, seat of the feelings.).
1. 참된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같은 사랑입니다.
(1) 세상적인 사랑은 모두 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착하니까 사랑하고, 예쁘니까 사랑하고, 내게 잘하니까 사랑하는 그런 것입니다.
또 세상의 사랑은 이기적입니다.
내게 잘할 때는 사랑하다가도, 내게 잘못하면 미워합니다.
세상에서 좋은 평판을 들으면 같이 사랑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나쁜 평판을 들으면 같이 욕합니다.
(2)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멀리하고 도외시하던 세리나 죄인들이나 병든 자들, 쓸모없는 사람들도 사랑하셨습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사회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외로운 사람들,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사랑하셨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소문난 죄인인 여자가 가까이 와서 주님께 대한 사랑을 고백할 때도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죄인 여자를 멀리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심지어 현장에서 죄를 짓다가 잡혀온 여인을 사람들이 돌을 들어 죽이려고 할 때조차도, 예수님은 사람들의 군중심리에 동요되지도 않고 그 가련한 여인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여 살려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랑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3) 바울 사도는 빌립보 성도들에 대해서 이런 변함없는, 조건을 초월한 사랑을 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먼저 바울 사도가 법정의 죄수가 되었는데도, 변함없이 사랑한 것과 같이, 바울 사도도 빌립보 성도들을 세상의 평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변함없이 초월적인 사랑으로 사랑했습니다.
9절.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this I pray, that your love may abound still more and more in real knowledge and all discernment,
내가 기도하노라.
καὶ τοῦτο προσεύχομαι,
and this I pray
직역하면 ‘그래서 이것을 내가 기도하노라’란 뜻입니다.
‘기도하노라’(προσεύχομαι)는 현재형입니다(I pray).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ἵνα ἡ ἀγάπη ὑμῶν, ἔτι μᾶλλον καὶ μᾶλλον περισσεύῃ ἐν ἐπιγνώσει καὶ πάσῃ αἰσθήσει,
that the love your, yet more and more may bound in knowledge and all discernment,
직역하면 ‘너희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더욱 더욱 풍성하게 되기를’ (내가 기도하노라)란 뜻입니다.
‘풍성하게 되기를’(περισσεύῃ)는 현재가정법 동사입니다(may bound).
1. 3-8절은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감사이고, 9-11절은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기도입니다.
(1)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사랑’이 더욱 풍성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이 ‘지식과 총명’과 더불어 풍성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빌립보 교회처럼 신앙 연륜이 짧은 교인들은 ‘지식과 총명’이 결여된 사랑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연륜이 오래된 교인들은 ‘지식과 총명’은 발달하지만, 열정적인 사랑을 식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이 열정적인 사랑을 하지만, ‘지식과 총명’이 부합된 사랑을 하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2) 여기서 ‘지식’이란 발달된 온전한 지식을 가리키고, ‘총명’이란 판단력과 통찰력과 사려분별력을 가리킵니다.
즉 지식은 일반적인 삶의 원리를 가리키고, 사려분별력은 생활에서 지식을 활용해서 얻는 경험적인 통찰력과 분별력을 가리킵니다.
‘모든 총명’이란 여러 가지 경험으로 여러 방면에 대한 분별력을 갖춘 것을 가리킵니다.
마치 결혼에서 처녀 총각은 사랑의 열정에만 빠지기 쉬우나, 부모님들은 인생 경험을 통해서 사랑 이외에 여러 가지 경험적 통찰력을 가진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특별히 ‘지식과 모든 총명’을 말한 것은 빌립보 교인들이 뜨거운 첫사랑을 가지고 있는 것이 좋지만, 지식과 사려분별력을 겸비하지 않으면, 자칫 사랑이 미움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지식과 사려분별력을 겸비하면, 그 사랑은 환경이 변해도 변하지 않고 오래가는 진정한 사랑이 되기 때문입니다.
2. 그런데 사랑은 갈수록 더욱 성장합니다.
(1) 처음에는 육정적인 사랑으로 시작합니다.
엄마가 젖을 주니까 사랑합니다.
내 몸으로 배 아파서 낳았으니까, 사랑합니다.
그러나, 지식이 없고 지혜가 없는 사랑은 아이를 버립니다.
진정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는 자식이 잘못할 때는 근실히 징계하면서 사랑합니다.
무조건 자식을 밥만 많이 먹이고, 많이 놀리고, 편하게 해주면 그것이 사랑은 아닙니다.
(2) 그런나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식의 장래를 생각하면서 사랑합니다.
지혜로운 갑부 회장은 자식을 사랑해서 아주 혹독하게 남 밑에서 훈련을 시킨 다음에 회사를 맡깁니다.
지금 자식이 배가 불러서 더 먹으면 괴로운데도 그냥 더 먹으라고 강권하는 것은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를 진정 사랑하는 성도님들은 목사에게 과식을 시키지 않는다고 합니다.
(3) 사랑도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여우와 황새의 사랑을 들어보셨지요.
여우가 황새를 대접하면서 접시에 음식을 내놓았습니다.
황새는 아무 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황새가 여우를 초대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병 속에 넣어서 내놓았습니다.
여우는 배고파서 돌아갔습니다.
(4) 남자와 여자도 차이가 많습니다.
남자는 화성에서 왔다고 하고, 여자는 금성에서 왔다고 할 정도로 차이가 많답니다.
서로 차이점을 잘 알아야 제대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5) 요즘에 청년들과 사랑을 나누려면, 인터넷을 잘해야 하고, 청년들 용어를 알아야 합니다.
70대 할머니도 인터넷을 잘해서, 청년들과 많은 친구를 사귀는 분도 알고 있습니다.
(6)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충성을 해보아야 서로 더욱 깊은 성도의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할 수 있으면, 말씀 공부를 같이 많이 해서, 신앙 노선이 같아야 깊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교회에 다니면 같은 식구라도 신앙적 교제가 깊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7) 그러므로, 사랑은 서로 지각적 통찰력과 분별력을 가져야 더욱 깊어집니다.
악한 것과 선한 것, 그리고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분별하여 올바르게 행동함으로써 보다 더 깊고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10절.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New American Standard Bible: so that you may approve the things that are excellent, in order to be sincere and blameless until the day of Christ;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εἰς τὸ δοκιμάζειν ὑμᾶς τὰ διαφέροντα,
for the to approve you the things being exellent
첫 번째 단어(εἰς)는 앞절의 목적을 말한 것으로서, 지식과 총명을 겸비한 사랑을 가질 것을 권고한 목적이 바로 ‘진실하고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도록 지극히 선한 것들을 분별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분별하며’(δοκιμάζειν)는 현재 부정사형 동사로서(to approve) 앞의 전치사(εἰς)와 합하여 ‘분별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지극히 선한 것’(τὰ διαφέροντα)은 ‘선한’이란 의미가 첨가된 것으로 원래는 ‘지극히 뛰어난 것들’(the things being exellent)을 가리키고, 뒤의 동사(διαφέροντα)는 현재 분사인데(being exellent) 원형(διαφέρω)은 ‘다르다, 뛰어나다’(I am different, I surpass, excel)이란 뜻입니다.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ἵνα ἦτε εἰλικρινεῖς καὶ ἀπρόσκοποι εἰς ἡμέραν Χριστοῦ,
so that you may be pure and blameless unto day of Christ
직역하면 ‘그리스도의 날까지 너희가 순전하고 흠이 없게 되도록’이란 뜻입니다.
여기 동사(ἦτε)는 현재 가정법 동사입니다(you may be).
11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having been filled with the fruit of righteousness which comes through Jesus Christ, to the glory and praise of God.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πεπληρωμένοι καρπὸν δικαιοσύνης τὸν διὰ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having been filled with fruit of righteousness that (is) through Jesus Christ
‘가득하여’(πεπληρωμένοι)는 완료분사로서(having been filled) 완전히 가득찬 모습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εἰς δόξαν καὶ ἔπαινον Θεοῦ.
to glory and praise of God
동사는 없으나 의역한 것입니다.
1. 전 절(10절)에서는 흠이 없기를 기도했는데, 본 절에서는 적극적으로 ‘의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여기서 ‘의의 열매’란 인간 자신의 노력만으로 이루는 의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마암아 맺혀진 신앙적인 열매 즉 날마다 기도하고 성령님 따라서 살아감으로써 맺혀진 아름다운 열매들(갈라디아서 5:22-23)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성령님을 온전히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께 찬송을 돌리는 아름다운 삶입니다.
2. 바울 사도의 마지막 기도는 세 가지입니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면서 착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허물이 없이 정결한 모습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의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장차 재림하실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으로 날마다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성도님들은 행복이 가득하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