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공동주례를 모신 이야기
- 사회적 배경과 함께 말한다
남재희
서울대 의예과 2년을 다니고 서울법과대학에 신규 입학한 나는 집안에서 기대하던 대로 고등고시 공부는 하지 않고 학생운동에 빠져 들었다. 요즈음은 동아리라고 하지만 그때는 써클이라고 하였다. 신조회,사회법학회 등 써클운동을 활발히 하여 후배 학년에까지 그 범위를 확대하였다. (15대 국회의원 선거에 강서 을구에서 당선된 이신범 의원도 그 멤버이다.)그러다가 학생위원장 선거에 출마하기로 마음먹고 선거운동을 전개하였다. 학생위원장이 되려면 우선 한 학년에 4명씩인 운영위원이 되어야 했으며 운영위원은 학생들이 직접 선거하였다. 그런데 250명이 얼마간 넘는 한 학년에서 경기고등학교 출신이 50명쯤으로 압도적으로 많고 그 다음이 경복고, 서울고 순으로 되어 있다. 지방 고등학교로는 경북고등학교 출신이 약간 많은 정도고 수가 많은 학교는 별로 없었다. 내가 나온 청주고등학교는 그해따라 가장 많은 5명이 진출했다. 그러니 우선 한 학년 4명을 선출하는 운영위원 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요행히 운영위원은 되었는데 경기고, 경복고, 서울고, 청주고 출신 4명이 몽땅 학생위원장에 출마하였다. 부위원장에 출마한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치열한 4파전이 전개되고 결국 압도적 다수인 경기고 출신이 위원장에 당선되고 나는 차점으로 부위원장이 되었다.
그때가 1957년이다. 그해 육군사관학교를 다니던 집권자유당의 2인자 이기붕 국회의장의 아들이며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인 이강석 군이 서울법대에 뒷구멍으로 편입학을 했다. 그리고 서울법대 교수회의에서 그 부당함을 놓고 논란이 있었다. 그 사실은 당시 야당지로 명성이 높던 동아일보가 지면에 1단으로나마 보도하여 학생들도 알 수 있었다.나는 그때 마침 고향인 청주에 내려가 있었는데 지급 상경하라는 학생위원장의 전보가 날라 왔다. 그때는 가정에 전화가 매우 드문 때라 전보가 연락수단이었던 것이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차리고 급히 서울로 올라와 학교로 달려가 보니 어둑어둑 밤이 되어 가는데 학생운영위원 모두가 구내식당 방에 모여 회의 중이었다. 운영위원은 각 학년에서 4명씩 선출된 운영위원과 학생위원장이 임명한 몇몇 부장으로 구성된다. 내가 방에 들어서니 학생위원장이 “지금 부정편입학에 반대하여 동맹휴학을 하자는 측과 동맹휴학은 하지말자는 측이 반반으로 갈려 결정을 못하고 있다.”고 말하며 나의 의견을 묻는다. 나의 의견에 따라 동맹휴학이냐 아니냐를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매우 중요한 순간인데 시골 출신으로 약간 저돌적인 데가 남아있는 나는 서슴없이 동맹휴학에 손을 들어주었다. 당시 4사5입에 의한 3선 개헌으로 대통령이 된 이승만 정권의 전횡과 독재 경향이 점차 노골화된 배경도 있다.
그런데 일이 약간 공교롭게 되었다. 학생위원장인 이강혁(李康爀)군은 이강석(李康石)군과 동성동본, 동 항렬이다. 그는 나에게 처지가 그러니 차마 그가 동맹휴학을 주도할 수 없고 나에게 전권을 맡기겠으니 나보고 동맹휴학을 이끌어 달란다. 학생위원장 대행이 된 셈이다. (그 후 이강혁 군은 충실히 나를 뒷받침해 주었다.)촌각을 지체할 수 없었다. 서울법대는 동대문경찰서 관할인데 사찰계의 정보망이 감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운영위원 중 적극적인 사람들을 즉각 학교에서 가까운 종로3가의 접선지대로 데리고 갔다.그곳이 감시망을 피하는데 가장 적합한 곳인 것 같아서이다. 행동의 주역은 나와 3학년의 김종호(후에 내무부장관, 국회부의장), 2학년의 박양식(후에 영남대 교수)의 3명으로 압축되었다.
다음 날이 화요일이다. 아침 일찍 그날 나온 대학신문을 사무실 창구에서 학생들에게 배포하며 김종호 군이 학생총회의 시간과 장소를 귓속말로 알려주었다. 곧 강의 동 2층의 대 강의실에서 임시 학생총회가 열렸는데 참석학생은 한 300명쯤 되었던 것 같다. 이강석 군의 부정편입학에 반대하는 동맹휴학은 즉각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스트라이크는 화, 수, 목, 금 4일 동안 완벽하게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등교하는 학생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교정에는 학생 간부 몇 사람과 정보형사들만이 나타났을 뿐이다. 동대문서 외에 경무대 경찰서, 종로서 등에서도 정보형사들이 나왔다는 소문이었다. 그때의 정보형사 말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당신네들이 서울법대라 선배 잘 둔 줄 알라. 판사, 검사, 변호사의 대부분이 서울법대 출신이 아닌가. 만약에 다른 대학이었으면 주모자들을 후미진 데서 요절낼 수 있었는데, 서울법대라 그럴 수도 없고……” 사실 그때만 해도 법조인의 압도적인 다수는 서울법대 출신이었다.
금요일 날 서울대학총장 윤일선 박사와 내가 대학교 본부에서 만나 협상을 했다. 윤일선 총장은 당시 야당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제2공화국의 대통령이 된 윤보선 씨의 멀지않은 친척이었음을 나중에 알았다. 협상 끝에 윤 총장이 “이번은 스페셜 케이스(특별한 경우)이니 양해해 달라” 고 사실상 사과를 하여 그것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토요일 문리과대학 대강당에서 학생총회를 개최하는 것을 대학 측에서 허용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당시 법과대학에는 강당이 없었다.) 몇몇 신문에 급히 학생총회 소집공고도 냈다.
문리과대학 대강당은 서울대학교에서 가장 큰 대강당이다. 법과대학생 1,000여 명을 전원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토요일 오전 학생총회가 열리자 나는 대학 측과의 합의사항을 설명하였다. 그러자 잇따라 등단하여 발언한 학생들은 모두 이강석 군이 퇴교할 때까지 동맹휴학을 강행하자고 열변이다. 대단한 웅변가들이 그렇게 많을 줄 몰랐다. 특히 김덕군(나중에 김영삼 정권에서 안기부장, 통일원장관), 최광율 군(나중에 헌법재판관)등은 뛰어난 논리와 웅변 실력을 보였다. 나는 발언 요구자 모두에게 발언 기회를 주어 시간을 끌대로 끄는 사실상 일종의 김 빼기 작전을 쓴 셈이다. 날이 어둑어둑 해 질 무렵 모두가 피로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를 기다려 “학생회의 타협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현 학생회 간부들은 책임을 지고 일괄사퇴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니 학생들은 어떻게 하겠는가. 총회는 유야무야 끝나고 결국 타협안을 받아들이는 셈이 되었다. 나중에 후배인 최동규 군(후에 동력자원부장관)은 나에게 꼼수를 썼다고 따지기도 했는데 그때 그 방법밖에 달리 무슨 방법이 있었겠는가. 1,000 명쯤의 법대생이 총장의 허락 하에 대강당에 모여 하루 종일 부정편입학을 성토할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 대성공이 아니겠는가. 그때는 ‘의식화’라는 개념이 등장하지 않았다.그 후 학생운동이 심화되면서 의식화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1,000 명쯤의 학생이 하루 종일 강당에 모여 부정편입학을 성토했으니 그야말로 학생들의 대단한 의식화가 아니었겠는가. 그때 내가 4학년으로 1958년 졸업인데 당시의 1, 2학년은 4·19 세대에 해당한다. 그들 중 황건(황산덕 교수 동생), 심재택(졸업 후 동아일보 기자)은 4·19 공간의 맹렬한 투사로 활약했다. 이강석군은 그 후 하루 잠깐 권총을 옷 속에 찬 경호원과 학교에 나타났다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법대 졸업식 다음날 황산덕, 정인흥, 한태연 세 교수가 이강혁 군과 나에게 한 턱 내겠다고 만나잖다. 동맹휴학에 대한 지지 격려와 위로 차원이다. 이강석 군이 부정 편입학하였을 때 교수회의에서 이들 세 교수가 이의를 제기하였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화식 집에서 1차를 잘 먹고 마셨다. 그 후 정인흥 교수는 빠지고 황산덕, 한태연 교수 둘이 우리 둘을 명동의 바로 데리고 갔다. 그때부터 오랫동안 명동의 대표적인 바로 유명했던 ‘갈릴레오’는 졸업생에게 바 출입의 창문을 열어준 셈이다.
황산덕 교수는 법철학 담당이다. 평안도 출신으로 경성제대를 나온 그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법철학 학자이며 동시에 불교철학에도 조예가 깊어 <여래장>등 몇 권의 훌륭한 불교서적을 냈다.
정인흥 교수는 정치학을 강의했는데 경상도 출신인 그는 경도제대를 나왔으며 매우 깐깐한 성격으로 아주 성실하게 강의에 임했다. 나는 그에게 졸업 후의 진로를 상의하기도 했다. 그는 독일의 유명한 정치학자이기도 했던 막스베버가 현실정치에 참여해서는 성공하지 못했다는 점을 특히 강조해 말하기도 했다. 한태연 교수는 헌법학 담당인데 함경도 출신으로 와세다 대학을 나왔다. 우리나라의 헌법학의 대부 격인데 후에 헌법기능공처럼 되어 유신헌법을 만드는 데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비례대표로 국회의원도 3번 지냈다.
법대를 졸업한 후 나는 광야에 던져진 것처럼 갈 곳이 막연하였다. 그때의 서울법대생에게는 고등고시가 주요 관문이며 그 밖의 졸업생들은 관청, 은행, 신문사가 주요 취직 처였다. 그 무렵 큰 기업체가 별로 없었다. 내 친구 중 한 사람은 럭키화학에 취직했는데 그때의 럭키화학은 치약을 만드는 곳으로 이름이 난 소규모 기업체였다. 그래서 나는 대통령의 양자를 동맹휴학으로 쫓아낸 나의 신변보호도 할 겸 신문사에 들어가기로 마음먹고 마침 채용공고가 난 한국일보의 7기생으로 입사했다. 신문사의 월급은 참 박했다. 최소한의 생활을 겨우 유지할 수 있는 선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시골의 집에 매달 손을 벌려야했다. 신문사 입사 1년쯤 법대 동기생인 여학생과 결혼하게 되었는데 우선 주례를 택하는 일을 결정해야 했다. 둘이 상의한 결과 모두가 존경하는 인격자인 황산덕 교수를 주례로 모시되 황교수 부부가 아주 모범적인 부부상이어서 이왕이면 파격적으로 부부를 공동으로 주례석에 모시기로 했다. 주례는 말하자면 신혼부부의 모범이 되어야 할 부부상의 인물이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주례 한 분을 모시는 것보다 주례부부를 신혼부부의 본보기로 모시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여하간 그런 이치로 황교수 부부에게 부탁을 드렸더니 두 분은 흔쾌히 수락하여 주례석에 서셨다. 물론 주례사는 황교수 한 분이 하였고 사모님은 옆에 서셨을 뿐이다. 이런 부부주례는 내가 아는 한 아마 전무한 일일 것이다. 가난한 초년 신문기자였기 때문에 주례 답례는 아주 빈약하게밖에 못해 오래도록 죄스러운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내가 서울신문 편집국장으로 있을 때다. 황산덕 교수가 법무부장관으로 발탁되었다. 그래서 나는 좀 색다른 기획을 하였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두 분 법철학자인 황 박사와 홍익대학총장인 이항녕 박사의 대담을 크게 신문에 싣는 일이다. 이 대담은 아주 내용이 좋았다. 그것을 신문에 크게 지면을 내어 게재하였더니 반응도 매우 좋았다. 황 박사는 그 후 얼마 안 있어 문교부장관으로 전보되었는데 법무부장관으로 재직 시 많은 사형집행서류가 대기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의 사형집행도 장관결제를 하지 않은 것으로 이름이 나있다. 독실한 불교도다운 그의 처신이며 사형집행을 반대하는 법 철학자다운 그의 신념에 따른 것이라 하겠다. 13대 국회의원 선거 때다. 12대까지는 1선거구 2인제였지만 13대부터는 1선거구 1인제로 바뀌고 강서구는 강서구와 양천구로 나뉨과 동시에 각각 구가 갑을로 분할되고 선거구마다 1인의 국회의원을 선출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부위원장으로 있던 주식회사 신안 건설 산업 우경선 사장을 그의 기반이 탄탄한 강서 갑 구에 공천을 추천하기로 하고, 부위원장인 양창중 강서 성모 병원장을 그의 거주지가 있는 양천 을 구에 공천 추천하기로 하였으며, 나는 강서 을 구로 정했다. 나머지 양천 갑 구에는 박병진 씨를 공천키로 했는데 조선일보 정치부시절 함께 일했던 그를 법대 동기동창인 심명보 사무총장이 나에게 서울 어디라도 배치해 주었으면 하여 양천 갑 구로 끌어당긴 것이다. 그런데 각 시도조직책들이 공천 작업을 위해 비밀장소로 옮기려고 중앙당에 모였을 때 우경선 씨가 급히 달려왔다. 그는 집안 회의를 여는 등 여러모로 숙고해 보았으나 이번에 출마를 안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이라며 단념 의사를 말했다. 이왕에 공천윤곽을 다 정해놨는데 좀 당황스러웠다. 우경선 씨는 전남 신안군의 섬 출신으로 적수공권으로 상경하여 사업가로 크게 성공한 사람인데 모든 일을 심사숙고하고 돌다리도 두드려보며 건너는 신중한 인물이다. 그래서 공천 작업을 하며 호남지역에 출마하겠다는 모든 사람들의 인사카드를 보았다. 강서 갑 구는 그때 호남세가 매우 강했다. 따라서 호남 출신을 공천하는 것이 유리할 듯했다. 또한 이왕이면 학력이 좋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전남 여수에 공천신청을 한 유영 씨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기도 하여 그를 선택했다.
공천자가 결정되면 지구당마다 지구당 개편대회를 연다. 강서 갑 지구당 개편대회도 열렸는데 유영 씨가 정책위의장을 지낸 나의 위급인 사무총장이 와주었으면 하고 강청하여, 심명보 사무총장이 오고 나는 다른 지구당의 개편대회에 참석하였다. 그런데 며칠 지나 알려진 일이지만 황산덕 박사가 유영 씨의 장인이어서 그 개편대회에 참석했다는 것이 아닌가. 참 오래간만에 존경하는 은사이며 주례를 맡아주셨던 분을 만날 기회를 놓친 것이다. 유영 박사는 국회의원 선거에는 실패했으나 그 후 강서 구청장 선거에는 성공하여 강서지역에서는 낯익은 얼굴이 되었다. 강서지역에서는 황산덕 박사의 따님이자 유영박사의 부인인 황남채 여사의 인품에 대한 평판이 훨씬 더 높다 .그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매우 훌륭한 부부 아래서 훈육을 받은 따님이니 당연히 그럴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