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선
김 관 식
저장성 닝보항(원나라 때는 경원항)에서 출항할 무역선 경원선 선원들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저장성은 오랜 옛날부터 따뜻한 기후로 벼농사가 잘 되어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 거기다가 바다와 접하여 농산물은 물론 해산물이 풍부하고 국제 무역항으로 진귀한 물건들이 교역되는 고장이었다.
닝보는 양쯔강 어귀에 있는 구제무역항으로 춘추 시대 때에는 월나라의 영토였고, 전국 시대 중기에 초나라에 병합되는데, 기원전 222년 진나라의 영토로 병합되어 회계 군이 설치되었었다. 당나라 시절에는 명주明州라고 불렸고, 남송에서는 경 원부, 원나라에서는 남원 부로 불리었던 곳이었다.
이미 당나라 때부터 닝보는 경원 항이라 불렸고, 국제 무역항으로 일본, 신라, 동남아시아의 배가 이곳을 자주 왕래하는 항구였으며, 송·원나라 때에는 고려와 일본과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일본과 교역이 활발하여 일본 승려들이 이곳으로 유학해왔기 때문에 닝보는 일찍부터 국제교육문화 도시였다.
불교 문화가 발전하고 이미 화폐 경제가 발달한 원나라는 신新나라(8~23) 14년에 발행된 ‘화천貨泉’이라는 화폐가 통용되고 있었고, 뒤이어 1310년에 제작된 원나라의 ‘지대통보至大通寶’, ‘대원통보大元通寶’가 소통되는 등 국제 무역에서도 금속화폐로 서로 교역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물물교환의 형태를 띠기도 했고, 금과 은, 쌀이 화폐수단이 되기도 했지만, 상거래가 활발하게 되자 화폐로 거래가 되었는데, 당시 베트남과 고려 또한 건원중보를 주조하여 무역 거래에 이용하는 등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막대한 자금을 들여 원나라의 동전을 대량으로 수입해갔다. 그 까닭은 물물교환을 위한 수단으로 화폐가 아니라 동전을 다시 제조하여 구리 생산할 목적으로 중국이나 이웃 나라의 동전을 수입하고 있었다.
그 무렵 고려는 산둥성 평이라 이 시와 고려 개경에서 서쪽으로 30리 떨어진 서해와 맞닿는 예성강에 있는 항구로 예선 항이라고도 불리었던 벽란도 항을 중심으로 고려청자, 인삼, 금 등의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었다.
이미 당나라 시대 때부터 신라와 울산항, 그리고 청해진을 이용해 무역이 성행하여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들을 소탕하기도 하는 등 국제 무역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도록 보호하는 역할을 해왔었다.
“진 선장, 무역품은 다 실었는가요?”
제법 값비싼 비단옷을 입은 경원 상단의 우두머리 왕 행수가 경원 항의 무역선 선착장에 도착하자 가마에서 내렸다.
왕 행수가 무역선의 들러보기 위해 온다는 연락을 받은 선장과 선원 일행들은 왕 행수의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던 차였다. 왕 행수는 가마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무역선이 있는 부두 쪽으로 다가갔다,
무역선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선주와 선원 일행이 일제히 고개를 숙여 왕 행수를 맞이했다.
“왕 행수 어른, 어서 오십시오.”
“이번에는 왕후께서 특별히 하카타 성주께 내리는 시화 접시도 있고 하니 무탈 없이 일본 후쿠오카현 하카타와 교토의 도호쿠 지에 전해져야 하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분부하신 대로 룽취안 가마 청자와 징더전 가마 백자, 등 2만 5천여 점, 그리고 일본에서 원하는 동전 800만 개, 자단목 1,000여 개, 금속제품 1,000여 개, 향신료, 칠기, 석제 품(벼루), 붓, 유리 제품, 선원들의 생활용품 등 값비싼 물건들을 모두 실어 준비를 완료했습니다.”
진 선장은 경원 상단 행수 왕대인 앞에 머리를 굽히며 자신 있게 말했다.
“잘하셨소.”
“거세개탁 하신 굴원 선생 제사인 5월 5일 여기서 지내고, 다음 날 6일 출항이 길일이라 합니다. 왕 대인”
“5월 5일 굴원 선생 제사는 지내고 떠나야 하겠지요. 만둣국은 든든히 먹고 출항해야 굴원 선생이 항해를 도와드릴 겁니다그려. 허허허.”
왕 행수는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너무 짐이 많아 실어 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소이다. 그래도 괜찮겠소?”
“지난해에도 이번보다 더 많은 짐을 무탈하게 일본에 수출했었습니다. 아마 동전을 실었기 때문에 그리한 줄로 알고 있습니다.”
진 선장은 왕 행수의 걱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너무 무리하게 짐을 실은 것은 사실이었다. 내심으로 걱정이 되긴 하지만, 지난해도 무탈하게 다녀온 일이 있기에 반신반의하고 있던 참이었다.
당시 저장성에서는 초나라의 충신 굴원屈原이 나라가 망하자 이를 한탄하며 자결한 것을 기리는 제사에서 유래 “온 세상이 모두 혼탁하다”라는 거세개탁이라는 말로 국원이 망국의 한을 품고 자결했었다. 그 후 매년 음력 5월 5일 초나라 지역이었던 중국 남동부에서 굴원을 기리며 경주를 하고 만두 빚은 음식을 해 먹는 민간의 행사가 관습처럼 행해지고 있었다.
굴원은 초나라의 왕족으로 중구 최초의 비극 시인이다. 그는 친척이었던 회왕의 신임을 받아 20대에 좌도라는 중책을 맡은 적이 있었다. 법령을 입안할 때 궁정의 정적인 상관 대부와 충돌해 그의 중상모략으로 면직당하고 국왕 곁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이때 그의 최대걸작으로 꼽히는 장편 서정시 <이소>를 써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굴원은 제나라와 동맹해 진나라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왕은 제나라와 단절했으나 결국 진에게 기만당하고 살해되었다. 회 왕이 죽은 뒤 큰아들인 공양왕이 즉위하고 막내인 자란이 재상이 되었다. 굴원은 회 왕을 객사하게 한 자란을 백성들과 함께 비난하다가 또다시 모함을 받아 양쯔강 이남으로 추방되었다. <어부사>는 그때 쓴 작품이다. 굴원의 작품들은 고대 중국의 명시 선집인 <초사>에 실려 있다.
그 무렵 굴원을 제사 지내는 풍습이 우리나라에 건너와 단오라는 풍습으로 전해오게 되었는데, 단오端午의 단端은 ‘처음’, ‘시초’의 의미이고 오午는 오五, 곧 ‘다섯’의 의미이기 때문에 단오는 ‘초닷새’로 음력 5월 5일을 뜻하는 말이다. 음양 사상에서 홀수를 양陽의 수라 하고 짝수를 음陰의 수라고 해서 양의 수를 상서로운 수로 여겼는데, 단오는 양의 수인 5가 겹치는 날로서, 대표적인 길일吉日로 알려져 있다.
당시 저장성에서도 5가 겹치는 굴원이 자결한 날을 길일이라 하여 이사, 혼인, 묘지 이장 등을 행하는 풍습이 있었다.
무역선의 경원 하는 일본으로 떠날 준비가 완료되었다. 다소 물건이 많이 실어 배가 바닷물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일본의 귀족들이 요구하는 물품들을 품목별로 도자기, 동전, 자단목, 금속품, 향신료 등등이었는데, 견 원호에 도자기 종류로는 중국의 여러 가마에서 생산된 수준 높은 완전한 형태의 청자, 백자, 청백자 등 2만여 점을 구해 실었고, 고려국과 교역을 통해 구해놓은 고려청자도 고려로부터 수입하여 되팔기 위해 일곱 점을 배에 실었다.
동전은 일본이 모아 달라는 대로 교역을 통해 모아놓은 신新나라(8~23) 14년에 발행된 ‘화천貨泉’ 1310년에 제작된 원나라의 ‘지대통보至大通寶’, ‘대원통보大元通寶’, 베트남과 교역을 통해 받은 베트남 동전 등 닥치는 대로 모아 그보다 비싼 가격을 받기 위해 돈을 수출하기 위해 800만 개 정도 오늘날의 무게로 따지면 28t이 넘는 많은 양의 동전을 실었다. 동전의 가치보다 더 받기 위한 동전의 수출은 나라에서는 금하고 있었으나 이문을 챙기려는 욕심으로 왕 행수는 몰래 동전 밀거래를 하고 있었다.
배의 아래쪽에 왕 행수와 진 선장 둘만 아는 비밀로 선원들도 모르게 보안을 철저히 하여 실어놓았다.
배에 실은 물건마다 품목별로 자단목에 기록하여 배에 실은 물건을 구분했다. 자단목이란 동남아 등 열대 지역에서 나는 목재로 공예품이나 가구를 만들 때 사용하는 물건으로 원목 상태인 것과 잘게 자른 것의 두 종류를 골고루 선적했다.
자단목에 한자, 로마 숫자, 아라비아 숫자, 알파벳 등 다른 나라와 거래할 때 쓰였던 것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했다. 자단목은 물건의 소유주나 수량을 표시한 것으로 품목별로 아주 중요한 화물표인 셈이었다. 품목별로 구분해놓아야 하므로 구분해놓은 품목의 수효만큼 자단목이 있어야 하고, 다른 나라에서 수입해올 때 붙었던 자단목은 그대로 한자로 몇 자만 적어 재활용하기도 했었다.
솥, 냄비, 국자, 깔때기와 같은 조리도구와 저울추, 자와 같은 도량기구 같은 금속제품을 상자에 담아 가득 쌓았다.
이 밖에도 후추, 계피, 정향, 등의 향신료, 중국산 칠기, 일본과 교역을 통해 싸게 산 칠기를 되팔기 위해 쌓아두었다. 유리 제품으로는 비녀, 구슬, 그리고 수공예제품으로 노리개, 장신구 등 일본의 귀족층들이 좋아하는 품목들을 실었다. 당시 일본은 차를 마시고, 향을 피우고, 꽃을 감상하는 문화가 선종 사찰의 승려라든가 가마쿠라 막부의 주요 인사, 상급 무사들 사이에서 중국의 향, 향신료 등이 큰 인기를 끌었다. 이에 중국제 물건, 즉 ‘가라 모노唐物’가 일본에 대량으로 수출되었다.
경원 하는 국제 무역선으로 수출 무역품을 가득 싣고 경원 항을 1323년 음력 5월 5일, 고려 제27대 충숙왕忠肅王 10년에 저장성 양쯔강 어귀의 경원 항(닝보항)을 출발했다. 경원 호의 제원은 최대 길이 34m, 폭 11m, 중량 200t의 대형 목선으로 선원들이 노를 저었고, 바람이 불 때는 돛대를 올려 바람을 이용하여 빠른 속력으로 움직이기도 했다.
경원 호가 서해를 건너 고려의 5일 후인 5월 10일경 목포항에 도착했다. 진 선장이 목포항으로 배를 댄 까닭은 배에 실은 중량을 줄이기 위해 선원들의 필수품을 고려국에서 조달하기 위해서였다. 중국에서 고려국을 거치지 않고 일본으로 항해할 때 많은 짐을 실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일본에 도착하기도 전에 선원들이 마실 물과 식량 등이 바닥이 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시 배에 많은 짐을 실을 수 있는 것도 고려국에서 선원들이 먹고 마실 식량과 물을 조달함으로써 배의 중량을 줄일 수 있었다.
고려국의 목포항에서 진 선장은 물을 채웠다. 그리고 선원들이 먹을 생선과 일본에서 특별히 부탁한 강진의 청자를 구해 실었다. 그 무렵 목포의 압해도에는 지역의 상단을 거느리고 지방 토호 세력의 수장 해송 행수가 중국, 일본과 국제 무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해송은 태조 왕건 시절 압해도의 거상이었던 능창 집안 후손이었다. 해송은 압해도를 거느리는 호족으로 배를 가지고 있었는데, 오십여 명의 일꾼을 거느리고 있으며, 어업과 농업에 종사하는 압해도 호족 거상이었다.
해송은 중국 선박이 일본으로 수출품을 이동할 때 고려에서 물과 식량, 그리고 고려청자를 구해 일본에 전달하는 중계무역을 하고 있었으며, 일본으로 가는 중국 무역선의 편의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진 선장이 압해도에 배를 정박하자 해송이 마중 나와 반겼다.”
“어서 오시오. 진 선장”
“그동안 잘 계시었소. 해송.”
“전번에 부탁하신 고려청자는 7점밖에 구하지 못했소. 그리고 고려인삼 6년근 100뿌리, 선원들에게 필요한 물과 쌀 10가마, 젓갈 10통을 모두 준비해놨소.”
“고맙소. 해송 행수.
경원호 선원들은 압해도에 도착하자마자 해송이 준비해놓은 물건들을 실었다.
“이거 받으시구려. 해송에 특별히 드릴 선물 사오싱을 준비했소이다.”
진 선장은 해송을 위해 준비 간 사오싱 한 병을 건넸다. 사오싱은 중국 황주의 대표적인 술이었다. 중국 남방 인들은 백주의 강한 맛보다는 황주의 부드럽고 달콤한 맛을 좋아한다. 사오싱은 찹쌀, 밀 등의 원료에다가 일 초, 진피, 대 회향 등 10여 종의 약초를 섞여 만든 중국의 명주로 알려진 술이었다. 향기와 빛깔이 좋고 맛이 깊어 동방의 명주로 춘추전국시대 때부터 전해오는 명주였다. 오나라와 월나라가 원수처럼 싸우던 시절에 월나라 왕이 오나라 왕에게 이 술을 선물로 보냈는데, 오나라 군대가 물 마시듯이 마셔댔기 때문에 술 항아리가 산더미처럼 쌓였더라는 고사가 전해지는 술이었다.
“진 선장님 도대체 무슨 물건을 실었기에 배가 착 가라앉았는가요. 짐을 너무 많이 실었어요.”
“이것저것 일본에서 가져와 달라는 부탁이 있고 하여 싣다 보니 그리되었네요.”
“좀 걱정이 되네요. 조심하세요. 귀한 사오싱은 잘 마시겠습니다.”
“다음 달 일본에 무사히 선적한 물건들을 싣고 귀국길에 다시 목포에 들르겠소. 귀국길에 고려청자 호로병, 접시, 향로와 고려인삼 6년 근, 고려 토종벌, 100단지 모시 50필을 준비해주시구려. 일본에서 필요하신 물품이 있거들랑 말씀하시지요. 제가 구해드리겠소.”
“유황 10근 정도만 구해다 주시구려.”
당시 고려국은 일본으로부터 수은과 유황을 수입했다. 유황은 민간에서 오리에게 먹여 유황오리를 먹기 위해서였다. 유황을 법제화하여 먹으면 장생 술을 얻을 수 있다고 하여 민간에서 약제용으로 쓰였다. 법제가 어려운데 오리가 생체에너지로서 유황의 그 신비한 힘을 몸으로 받아들여 법제화하여 마치 살아있는 금단金丹이 된다는 이치를 발견하여 이용했다.
법제한 유황은 최고의 보양제로 양기 부족을 다스리고 각종 궤양, 염증, 냉증, 부인병 등에 두루 쓰여 왔다. 예로부터 여러 병 처방제로 유황을 사용하였는데 이미 고려 시대 때에 민간에서도 유황을 병 치료제로 이용하고 있었다.
유황을 먹으면 즉사하는 독성이 강한 약초나 수은, 유황 등을 지혜롭게 명약으로 써왔다. 가령 궁중에서 사약으로 자주 쓰였던 부자나 초오는 그 열독을 거르기 위해 검은콩이나 감초로 법제했다.
유황도 그 속의 독을 다스려 약으로 이용해 왔는데, 유황을 생강즙이 섞인 황토물에 담가 열다섯 번을 끓여 내거나, 무와 함께 넣고 아홉 번 푹 삶아서 법제화했다. 이 법제한 유황은 양기 부족, 십이지장 궤양과 염증, 방광염, 냉증, 변비, 두통 등 민간요법에서 치료제로 쓰여 왔다. 또한, 무좀, 옴, 부기 등에는 법제하지 않은 유황가루를 돼지기름이나 송진 등에 개어서 바르거나 태워서 연기를 쐬기도 하여 병을 치료해왔었다.
그뿐만 아니라 유황은 농약으로 오염된 논밭의 흙을 회복시키기 위해 유황을 뿌리기도 했다. 인삼을 4∼5화 연작하고 나면 땅의 지력이 떨어지게 되는데, 땅의 지력을 회복시키고 병충해 방지를 위해 황토와 같은 효력을 가진 유황을 뿌리기도 했다. 이렇게 다양하게 쓰인 독이 있는 유황은 사람이 직접 먹지 못하고 한 단계 걸친 법제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섭취해 왔다.
유황을 오리에게 먹여 그 오리를 잡아먹으면, 체질이 개선되고 몸의 병증이 호전되어가는 여러 현상이 나타나는데 그것을 명현 현상, 또는 호전 반응이라고 전해오는데 민간에 유황 오리에게 먹이기 위해 유황을 수입했다.
유황오리를 먹으면 몸 안에 쌓인 온갖 유해 독을 풀어주고, 정력이 좋아지는 보양 효과가 있으며, 항생제, 소염제의 역할을 한다고 하여 민간에서 자주 이용되어왔다.
“네, 잘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진 선장은 목포 압해도 송공에서 짐을 다 실 자 배를 띄웠다.
“선원들이여! 돛을 올려라.”
황급히 몇몇 선원들이 돛을 올렸다. 그리고 노를 저어대자 달리도를 지나 바다로 나가기 시작했다.
목포 앞바다는 섬이 많아 섬을 벗어나 방향을 잡기가 무척 어려웠다. 나침반을 이용하여 방향을 잡아 항해를 해왔는데, 풍향을 이용하기 때문에 바람의 방향에 따라 배가 가끔은 엉뚱한 방향으로 가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침반으로 방향을 수정하고 해도를 이용하기도 했다.
선장은 자주 뱃길을 자주 다녔으나 항상 목포와 신안 앞바다를 빠져나오는데 방향을 짐작하기 어려울 때가 있었다. 그것은 해무가 끼었을 때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이었다.
아침 해무가 끼어있는 압해도에서 대항 덕도 앞을 지날 때까지 진 선장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겨우 갈매 섬을 지날 때에서야 해무가 가시기 시작했다. 묘시에 압해도 항을 출발했는데 진시 경에서야 갈매 섬을 겨우 벗어나고 있었다. 사시 경(9∼11시)에 신안군 증도면 방축리 앞 해역을 지날 무렵 난데없이 돌풍이 일어나 파도가 거세졌다.
신안 증도면 방축리 앞바다는 물살이 거세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수심 20m밖에 되지 않는 곳으로 죽음의 바다로 알려졌다. 이곳 주변의 어부들은 이 해역이 고기가 잘 잡혀 5월과 6월경에는 병어, 민어가 많이 잡히는 바다로 날씨가 맑은 길일을 선택하여 제를 지내고 고기를 잡아 왔다.
배는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짐을 많이 실은 경원 하는 속수무책으로 돌풍과 파도에 휩쓸렸다.
“노를 힘차게 저어라.”
진 선장은 놀란 마음을 억누르고 선원들에게 소리쳤다.
선원들이 합심하여 노를 저었으나 선체가 힘없이 빙그르르 한 바퀴를 돌더니 때마침 다가오는 삼각파도에 의해 맥없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배가 기울고 있습니다.”
선채가 기울자 몇몇 선원이 뛰어내렸다. 갑판 위에 있던 물통들이 바다로 떨어져 내렸다. 선원들은 바다로 떨어지는 나무 물통을 잡고 파도와 허우적거리거나 그냥 헤엄을 치는 선원, 기울어가는 돛대를 붙잡고 발버둥 치는 선원, 부서진 노를 붙잡고 물 위에 둥둥 떠서 헤엄을 치는 선원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경원 하는 서서히 걷잡을 수 없이 기울어져 가라앉고 있었다. 경원 하는 길이 32m, 너비 10.9m, 높이 4m(흘수선까지는 2.95m), 무게 187t에 쌍돛대를 규모가 대형 선박이었다. 거기에 실을 수 있는 짐은 무려 150t이나 170여 톤이나 되는 물품을 무리하게 실은 것이 원인이었다.
국립박물관에서는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한 650년 전의 경원 하는 1976년 전남 신안 앞바다에서 확인된 중국 원나라 무역선은 신안 호로 이름이 바뀌었다. 대한민국의 해역에서 침몰했으므로 중국 원나라의 배이나 대한민국의 배가 되었다.
마치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있는 세계 각국의 값진 문화재들이 프랑스 것인 것처럼 주인이 뒤바뀐 것이었다.
우리나라는 1976년부터 1984년까지 10차례에 걸쳐 중국 송, 원대 유물 22,000여 점이 발굴되었다. 1976년, 1월 어느 날, 신안군 지도면 방축리 도덕도 앞에서 저인망 어선으로 고기를 잡던 어부가 그물에 벌 흙과 굴 껍데기가 다닥다닥 붙은 청자 항아리를 발견했다. 그는 그 항아리를 집으로 가져와 잘 씻어놓고 보니 청자의 본래 모습이 드러났다.
우연히 어부네 집을 들른 초등학교 선생님은 어부에게 혹시 고려 시대 청자일지도 모르니 군청에 신고하라고 어부에게 권유했다. 어부는 청자를 가지고 군청으로 갔다. 그러나 문화재 일을 맡은 군청 공무원은 신안 바다에서 고려청자가 나올 리가 없다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어부가 군청에 보상금을 노리고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꾸짖기까지 했다. 그런데 어디서 들었는지 서울에서 골동품 상인이 어부를 찾아왔다. 그는 청자를 보고는 원나라 룽취안 가마에서 만들어진 진품이라고 감정했다. 4월에는 이 마을 또 다른 어부가 또다시 같은 장소에서 청자와 백자를 건져서 군청에 신고했다. 그러자 군청 문화재 담당자가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신안 앞바다에 보물선이 가라앉아 있다는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이 소문을 들은 도굴꾼들이 도덕도 앞바다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주민들 모르게 밤에 낚싯배를 가장하여 침몰지점의 값비싼 도자기들을 건져 올려 골동품 가게에 팔아넘겼다. 이때부터 원나라와 고려 시대의 보기 드문 명품 도자기들이 한꺼번에 여러 점씩 골동품 가게에 나돌거나, 일본으로 몰래 팔려나갔다. 중국과 고려의 진품 도자기가 그처럼 많이 거래된 일은 일찍이 없었다. 전국의 골동품 상인과 도굴꾼들이 알음알음으로 신안에 몰려들었다. 9월에 접어들어서야 낌새를 알아차린 경찰이 수사에 착수해서 도굴꾼들을 붙잡았다. 그들을 조사해 그동안 도굴해간 문화재들을 숨겨놓은 비밀창고를 알아냈다. 비밀창고에는 값을 따질 수 없는 국보급 중국 도자기 수백 점을 압수했다.
이 일로 말미암아 당시 문화재관리국은 ‘신안 해저유물 발굴 조사단’을 만들게 되었다. 청자 한 개가 어부의 그물에 걸린 지 아홉 달 만에 비로소 정식 발굴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후 이것이 처음 발견한 653년 동안 바다 밑에 숨겨진 경원 호의 비밀이 드러난 처음 사건이었다. 이후 “신안 보물선”은 인양되었다.
그 많은 해저유물 가운데 백자 접시에 분홍빛 나뭇잎 두 개가 마주 보고 그려져 있고, 원나라 궁중에 사는 왕족의 시 한 편이 새겨진 접시가 신안 호에 실려 있었다. 그것은 650여 년 전 중국 원나라의 왕족이 지은 당시에 알려진 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流水河太急 흐르는 물은 어찌 급한고
深宮盡日閑 깊은 궁궐은 종일토록 한가한데
慇勤謝紅葉 은근한 마음 붉은 잎에 흘려보내니
好去倒人間 인간 세상으로 쉬이 흘러가기를
이 시구처럼 급한 물길과 궁궐의 한가함, 그리고 흐르는 물길처럼 덧없는 세월의 흔적을 우리는 어찌할 것인가.
2 신안해저유물 발굴된 지 만 40년이 된 2016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신안 해저선 발굴 문화재 특별전 ‘신안 해저 선에서 찾아낸 것들’을 전시했었다.
그 후로 여러 차례 신안 해저 선에서 발굴된 문화재들을 전시했는데, 종류별로 대표성이 있는 것들만을 골라서 공개한 명품 위주에 전시했었다.
일반인들에게 2만 4천여 점에 이르는 발굴품 가운데 지금까지 공개된 것은 전체의 5% 정도인 1천여 점에 지나지 않았다.
2016년 특별전에서는 신안 해저 선의 전모를 생생히 실감할 수 있도록, 발굴된 2만 4천여 점의 문화재 가운데 현시점에서 전시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모아 최초로 공개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특별전 역사상 가장 많은 수량을 전시한 특별전이었다.
특별전은 3부로 구성하여 첫째, 제1부 '신안 해저 선의 문화기호 읽기'였다. 당시 복고풍의 그릇들과 차, 향, 꽃꽂이 등과 관련된 완성품들을 소개했었다. 그 당시 동아시아에서 유행한 중국적 취향과 그에 따른 일본 상류층이 선호했던 문화생활을 알 수 있고, 나아가 고려에 있었던 비슷한 문화적 취향을 유추해볼 수 있는 전시였다
둘째, 제2부 '14세기 최대의 무역선'이었다.
여기에서는 신안 해저 선이 닻을 올렸던 중국 저장성 닝보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역 활동을 소개하고, 당시 신안 해저 선의 선원과 승객들의 선상 생활을 살펴볼 수 있었다.
셋째, 제3부 '보물창고가 열리다'였다.
여기는 으뜸 전시공간으로서 신안 해저 선에 실렸던 '화물'을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도록 도자기, 동전, 자단목, 금속품 및 향신료 등을 '큰 덩어리'로 소개했었다. 일부는 당시의 발굴 상황 등을 재현해 전시했는데, 신안 해저 선의 실체와 함께 중세 동아시아의 문화교류 양상을 알 수 있는 전시였다.
당시 신안 해저 선의 발굴은 우리나라 수중 고고학의 효시가 되었으며, 그 경험과 성과는 이후 수많은 수중 문화재 조사의 밑바탕이 되었다. 발굴된 문화재들은 14세기 동아시아의 경제·문화 교류 등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신안해저유물이 발굴된 방축리 부근에 신안해저유물발굴해역과 보물선을 당시의 선박 제조 기법으로 복원하여 ‘700년 전의 약속’이라 하여 전시하기도 했었다. 발굴해역은 사적 274호, 신안해저유물발굴을 기념하는 기념비, 전시실에 발굴된 전시모형 170점을 전시해놓고 있다.
박 기자는 신안 호의 침몰한 정확한 연대를 해저유물에서 발견된 저울추에 새겨진 글씨에서 단서를 알아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경원로慶元路(현재 중국 절강성 영파)가 새겨진 저울추는 배의 출항지를 밝히는 결정적인 자료로 지치삼년명至治(원나라 연호 1323) 연호와 일본인 성명, 일본 사찰명이 적힌 물표木牌가 발견됨으로써 출항연대와 목적지를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안선은 1323년에 중국 영파항에서 일본 구주 하카타항으로 항해하던 중 우리나라 해안에 침몰했음이 밝혀진 것이었다. 그밖에 단서로는 목간에 “至治三年六月一日”라고 새겨졌고, 목패에 “至治蔘年 云云”이라는 명문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지치3년은 서기 1323년에 해당하기 때문에 침몰연대가 정확하게 밝혀진 셈이었다.
박 기자는 지방신문 신안 증도 주재 기자로 당시 신안해저유물의 도굴사건에 대해 신문에 보도된 것 제외하고도 지역 어민과 짝짜꿍이 되어 끝내 밝혀지지 않지만, 몇 점의 문화재는 인사동 고미술품 상으로 흘러 팔려나갔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많은 사건 중 임 순경의 사건 보고서는 박 기자에 의해 “신안해저유물 도굴 청년 사망”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됐다.
임 순경은 그 당시 도덕도 출장소에 근무하면서 감시초소 관리도 맡고 있었다. 당시 도덕도에는 노인 1명만이 거주하고 있었다.
임 순경과 인터뷰의 진술에 따르면, “큰 값이 나간다고 말이 떠돌았지만, 실제 감정가격이 그리 높지는 않았다. 그걸 욕심내다가 패가망신하거나 아파서 죽고 살림 망한 경우가 엄청나게 많았었다. 신안 유물로 돈 벌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우환이 깃든 물건이다’라는 말이 떠돈 것도 이 때문이었다.”라고 말했다.
그 무렵 인근 어촌 청년 김 모 씨가 목숨을 잃었던 사건이 있었다. 이 청년은 도굴을 몇 차례 하여 재미를 보고 있었다. 재산이 없는 그는 낙도 섬에서 값비싼 오토바이를 사서 타고 다녔다고 했다.
몰래 해저유물을 도굴해서 밀거래하여 과분한 돈을 손에 쥐자 오토바이를 사고 씀씀이가 커진 것이었다. 끝내 그는 해저유물 도굴에 손을 댔다가 물속에서 질식사했던 것이었다.
도굴사건이 많이 있었다. 박 기자는 이 사건 보도로 특종을 했다. 그때의 사건을 회고하며 박 기자는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오래전에 있었던 특종의 기사였지만 이 기사로 가짜로서의 입지를 굳혔기 때문에 이 시간을 그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박 기자는 그 후 “공무원이 낀 신안해저유물 도굴단 검거”라는 특종기사를 써 언론인 보도 부분 대상을 받기도 했었다.
공무원이 낀 도굴사건도 유명하다. 78년 치안본부 특수대는 신안군청 소속 공무원이 낀 대규모 도굴단을 적발했었다. 도굴에 가담한 군청 공무원은 면장을 지낼 정도로 승승장구 승진을 거듭했다. 그를 기억하는 공무원들은 “머리가 비상한 사람”이라고 입을 모았다. 최 모 씨의 유혹에 못 이겨 공범을 저지른 정 모 씨에 의하면 “아직도 해저유물이 많이 묻혀있다”라는 최 모 씨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도굴에 참여했다.
이들 도굴단은 여수·부산에서 UDT 출신 잠수부들을 끌어들여 본격적으로 도굴작업을 진행했었다. 이들은 도굴 선에 돼지머리 고기와 떡을 차려놓고 고사까지 지냈다. 두 차례에 걸쳐 모두 200여 점의 유물을 도굴하는 데 성공했다.
범행은 들키지 않고 성공했지만, 문화재 밀거래 자들에 의해 소문이 퍼지면서 일본인과 미국인들 밀거래 자들의 이들을 찾아오기도 했다. 이들은 한두 점씩 팔면서 톡톡히 거액의 돈을 만질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무렵 ‘장영자 사건’에서 신안해저유물 도굴사건의 실체가 드러나 세상을 들끓게 했다.
‘큰손’ 장영자가 소유한 도자기 일부가 신안 유물이라는 것이 발각되면서 중간상을 통해 팔았던 이들 일당의 정체가 드러나고 만 것이었다.
87년에는 신안지역 우체국장이 가담한 도굴사건이 또 발생했었다. 언론은 ‘○○파’ ‘○○파’니 하면서 마치 조직폭력배의 계보를 연상시키는 조직범죄로 보도해댔다.
도굴의 유혹은 끈질겼다. 최초의 도굴사건의 주범으로 신안 유물을 세상에 알린 조 모 씨는 이후 수차례 구속됐다. 조 씨와 함께 첫 도굴사건의 주인공인 강 모 씨도 3차례 구속됐다. 작은 규모의 수산업을 했으나 살림은 모두 기울었다. 손을 뗀 그는 자주 교도소를 들락거렸다.
강 씨는 재벌회사 회장을 가장한 검사에게 붙잡혀 숨겨두었던 유물까지 모조리 빼앗겼다. 당시 밀매꾼들은 대개 현물 대신 문공부에서 발행한 컬러판 유물 사진첩을 갖고 다니며 판로를 찾았다. 강 씨는 검사가 50억 원을 주겠다며 보여준 돈 가방을 보고 그 책자에 갖고 있던 유물을 연필로 표시했다가 몽땅 압수당했다.
주민들 사이에 문화재관리국 사범 단은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사범 단은 목포시 무안동 ○○여관에 본부를 차렸다. 그들은 돈 많은 사람을 행세하며 도굴조직에 접근했다. 단속과 발굴이 병행된 것이다. 이 작업은 문화재관리국의 호랑이로 소문난 정○○이 총괄했다.
최초의 도굴사건을 시작으로 10여 년 동안 줄잡아 300여 명의 도굴꾼과 밀매범들이 적발됐다. 유물이 발견된 도덕도 양쪽 마을인 증도면 방축리와 임자면 이흑암리 주민들은 부근 어장이 폐쇄되는 바람에 생계까지 위협받고 잦은 수사에 쑥대밭이 되다시피 했다.
새우·민어·농어 등 어족이 풍부했던 황금어장은 10월 발굴이 끝날 때까지 폐쇄됐다.
도굴사건이 터지기만 하면 마을 사람들은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인심도 흉흉해졌다. 엿장수만 마을에 나타나도 마을 사람들은 불안한 눈길을 보냈다. 이런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보물선은 ‘귀신 붙은 배’라는 속설이 돌았다. 경찰들도 재수 없는 사건을 맡았다고 투덜댔다.
유물로 인한 화는 경찰관들에게도 미쳤다. 그 무렵 담당 경찰서 경찰관 4~5명이 유물 사건과 관련되어 치안본부 감찰에 걸려 곤욕을 치러야 했다. 사건의 발단은 유물 수사를 담당했던 형사가 익사했는데 그의 집과 친척 집에서 신안 유물이 나왔다는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이다. 당시 수사를 전담했던 경찰들이 모두 조사를 받았다.
그 무렵 서울지검에서 1천여 점의 유물을 해외로 밀반출하려던 일본인 1명 등 7개 파 17명을 구속한 뒤 도굴은 표면상 잠잠해졌다. 그러나 일본 도쿄 등 대도시의 골동품상에서는 90년대 중반까지도 ‘신안 해저 출토유물’이라며 공개적으로 팔아왔다고 한다. 도굴된 유물의 규모가 정식 발굴된 수치와 맞먹을 것이라는 추정이 무리가 아닌 부분이다.
지금도 해저에 묻혀있는 유물을 도굴하기 위해 첨단장비를 갖춘 도굴꾼들이 신안 바다를 누비고 있는지도 모른다….
박 기자는 이제 그의 나이 팔십을 넘겼다. 젊은 시절 도굴사건 보도를 하느냐 밤잠을 설친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문제는 문화재를 사유화하여 일확천금을 노리려는 한탕주의를 꿈꾸는 도굴꾼 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박 기자는 백발을 휘날리며 신안해저유물이 증도면 방축리 앞바다를 찾아 오랜만에 옛날 기억을 떠올렸다. 650년 전의 울부짖음이 가슴으로 다가왔다.
650년 중국 닝보항을 출발한 진 선장만 아는 비밀로 역사 속에 묻혔으나 발굴된 신안 해저유물만 남아 그날의 이야기들을 전해주고 있다.
바다는 참으로 냉혹하다. 모든 비밀을 감추어버린 채 말이 없다. 다만 애처롭게 울어대는 갈매기의 울음만 해저에 묻힌 참상의 비밀을 토로할 뿐이었다.
첫댓글 좋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