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장 생사일여(生死一如)
1. 무신년(戊申年 1908) 겨울 문공신(文公信)의 집에 오시어 쉬시다가
정읍(井邑)으로 출발하려 하시며,
공신(公信)에게 옛 시조(時調) 한수(一首)를 일러 주시니 이러하니라
대천(大天) 일해(一海)에 무근수(無根樹) 떠 있으니
가지(枝)는 열두 가지,잎은 삼백육십 잎(葉)에
뚜렷이 일월이 흼(白)이여
구시월 세단풍(細丹楓) 바람 잡아 탄금(彈琴)하니
슬프다 저 새 소리, 귀촉(歸蜀)도 불여귀(不如歸)를 일 삼더라 하시고
표연(飄然)히 뒤도 돌아보지 않으시고 가시더라 하니라.
2. 대흥리(大興里)에 계실때, 하루는 고부인(高夫人)을 불러 앉히시고,
부인의 무릎을 베고 누으시더니 가라사대,
너는 내가 죽으면 머리를 풀겠느냐 아니 풀겠느냐 하고 물으시거늘,
부인(夫人)이 대답이 궁하여 머뭇거릴세 다시 물으시며 대답하라 하니,
고부인(高夫人)이 난처하나 부득이 대답하여 가로대
어찌 머리를 풀지 않으리까 그러한 일은 염려 마소서하며 머리를 풀겠다고 응락하드라.
웃방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종도(從徒)들은 무슨 뜻인지 모르고 웃기만 하였으나
그후 화천(化天)하시고 보니 그때의 말씀이 앞일을 예시하신 일임을 몰랐노라하고
문공신(文公信)이 전하며 말하기를
나도 그때 껄껄대고 웃었을뿐 아무의미를 몰랐다 하니라
3. 기유년(己酉年 1909) 봄에 정읍 대흥리에서
고부인(高夫人)에게 명(命)하여 영변(寧邊) 수심가(愁心歌)를 부르라 하시며
선창(先唱)하시니 이러하니라
소슬 동풍(東風)에 궂은 비는 오는데
울퉁불퉁 저기 저 남산(南山) 보아라
우리도 죽어지면 저기 저 모양(模樣) 되리라 하시니,
고부인(高夫人)도 따라 부르시였다 하니라.
용화전경-제4장 1절 |
3. 정읍 차경석 집에 계실새 고부인을 명하사 영변 수심가(愁心歌)를 부르라 하시며 선창하시되 음성을 가다듬으사 스슬 동풍(東風)에 궂은비는 오는데 울퉁불퉁 저기지 남산보아라 우리도 죽어지면 저기 저모양되리라 하시니 고부인이 따라 불은지라 |
4. 하루는 종도(從徒)들에게 가라사대,
봉서사(鳳棲寺)에 진묵(震默)은 삼둔(3遁)을 하였고
주(周) 나라의 강태공(姜太公)은 오십이둔(52遁)을 하였으나
나는 칠십이둔(72遁)을 다 쓰노라 하시었다 하니라
5. 기유년(己酉年 1909)에 경석에게 가라사대,
지상에 전탑(殿塔)을 세우지 말고 네 마음위에 세워라
또 이르시기를,
번거롭고 좀스러운 예의(禮儀)는 반드시 세상을 부패(腐敗)하게 하느니라 하시더라
6. 기유년(己酉年 1909) 봄에 종도(從徒)들과 공사를 보시려
전주(全州)로 행하시며 김형렬(金亨烈)을 돌아보시고 가라사대
오늘 너희들이 서로 다투면 내가 죽으리라 이르시니
형렬(亨烈)이 황공(惶恐)하여 무슨 상서롭지 못한 말씀을 하시나이까 하고 대답을 올렸더라.
그러나 그날 해질 무렵에 우연히 종도(從徒)들간에 다툼이 일어났다 하니라
7. 상제(上帝)께서 윤경(輪京)을 거느리고 백암리(白岩里)로부터 대흥리(大興里)에 오시어
고부인(高夫人)과 희남(熙南 차경석의 장남)의 병을 낫게 하신후 고부인(高夫人)에게 가라사대,
내가 수만리 밖에 가있으면 찾겠느냐 하시니
고부인(高夫人)이 대답하시기를 어찌 찾지아니 하오리까하시니
이로써 공사를 보실세, 마당으로부터 방에까지 책과 부서(符書)를 번갈아 까르시며
고부인(高夫人)으로 하여금 밟고 들어오게 하신후 부서와 책을 소화하시며,
고부인(高夫人)에게 북쪽에 앉아 시천주(侍天呪)를 스물한번 읽으라 하시고
두 분이 서로 마주서서 절하신후 글을 써 읽으시고 소화하시니 이러하니라
吾君誓約重十山(오군서약중십산)
踏盡高高太乙檀(답진고고태을단)이라 하시고
이어서 종도(從徒)들의 서약을 받으시고 또 글을 읽으시니 이러하니라
無語別時情若月(무어별시정약월)
有期來處信通潮(유기래처신통조)라 하시며 고부인(高夫人)에게 가라사대
내가 없으면 크나큰 세 살림을 어떻게 감당하리오 하시니 고부인께서 가라사대
어디로 가시려 하시는지 저도 따르려 하나이다 하시니
상제께서 가라사대 너는 따라올 곳이 못되느니라
그러면 언제나 오시려 하시나이까
응 네가 꼬부랑(高婦郞) 꼬부랑(高婦郞) 하면 오리라 하시였다 하니라
천지개벽경<정영규>, 제1장 천강인세(天降人世) (링크) |
22. 어느날 공사를 행하실세 종도들을 늘려 앉히고 대학(大學) 한권과 부도책(符圖冊) 한권을 마당으로부터 번갈아 깔으시며 고부인(高夫人)으로 하여금 책을 밟아서 방으로 들어와 방가운데 눕게하시고 고부인(高夫人)의 배위에 걸터앉아 큰 칼을 부인의 목에 대고 가라사대, 천지대업(天地大業)을 이루려 함에 있어서 네가 중도에 번개(變改)하여 그릇침(誤謬)이 있겠느냐 하시며 물으시니, 고부인이 대답하여 가로대 변개함이 없겠나이다하고 대답하거늘 이때에 상제께서 가라사대 그러면 그렇지 하고 기뻐하시더니 상제께서 방가운데 누우시며, 고부인으로 하여금 상제님의 배 위에 걸터 앉으라 명하시며 전과같이 묻도록하여 상제께서 변할리 있으리까 조금도 염려마시라 대답하시고 글과 부도(符圖)를 써서 불사르시며 천지에 확약(確約)하셨음을 선포(宣布)하시였다 하니라 |
8. 상제께서 대흥리(大興里)를 출발하려 하실세
고부인이 거처에 경석의 가권과 종도들을 벌려 앉히시고
양지(洋紙)에 부도(符圖)를 그리시고 글을 써서 북을 향하여 소화하시니
그 글에 쓰시기를 將相方伯守令蒼生點考后妃所라 하였더라
이때에 종도(從徒)들과 경석의 가권에게 이르시기를
이 공사는 후비(后妃)책임을 정하는 공사이니
너희들은 선위봉공(善爲奉恭)하라 하시니라
9. 기유년 어느날 종도(從徒)들에게 옛글 한수를 읽어주시니 이러하니라
乾坤不知月長在하니
寂寞江山近百年이라
10. 기유년(己酉年/1909년) 6월23일 상제께서 여러 종도(從徒)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나의 일은 수부가 있어야 되는 일이라
이제는 일이 절박하였으니 너희들중에 임술생으로 누이나 딸이 있거든 수부로 내세우라 하시니
형렬이 여쭈어 가로대 수부는 저의 딸로서 들여 세우겠아오니 염려 마르시고 하루 속히 사업이나 추진하사이다
가라사대 네 딸을 들여 세우겠느냐 형렬이 대답하여 가로대 그리히겠나이다.깨끗한 옷을 갈아입혀 데리고 오라하시니
형렬이 명하신대로 그 딸을 약방으로 데려오거늘 종도들로 하여금 약장(藥藏)을 방가운데 옮겨 놓게 하신후 형렬의 딸에게 명하사 약장을 안고 약장(藥藏)주위를 세번 돌게 하신후에 약장 옆에 세우신후 여러 종도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초취와는 아주 이연(離緣)하였음을 선언하노라
후일에 너희들이 증인이 될지어다하시고 경석을 명하사 양지에
大時太祖出世帝王將相方伯守令蒼生點考后妃所라는 글을 쓰라 하였더니 경석이 받아 쓸세 후비소(后妃所)를 후비소(后妣所)라고 그릇 쓰니 가라사대 잘못썼느니라 하시며 불사르게 하시고 다시 쓰라하여 약장에 붙이게하신후 가라사대 이것이 예식이니 너희들이 증인이라 하시며 형렬의 딸을 안으로 드려보내신 다음에 경석으로 하여금 그 글을 거두어 불사르라 하시니라
11. 기유년(1909년) 6월20일 구릿골 약방에 종도(從徒)들을 모으시고
각기 믿음에 대하여 하나 하나 다짐을 받으시고 이로써 천지공사를 마치셨다 선언하시며
이를 천지에 질정(質定)하리라 하시면서 가라사대
오직 천지는 무언(無言)이니 뇌성과 지진으로 응답을 받으리라 하시고
布敎五十年工夫終畢(포교오십년공부종필)이라 써서 불사르시니
문득 천둥과 지진이 아울러 크게 일어나더라
이때에 김경학이 청하여 가로대,
천지공사를 마치셨으면 이제 출세를 하사이다 하고 아뢰니
사람이 없어 출세치 못한다 하시며 가라사대 8월1일에 환궁하리라 하시더라
기유년(1909년)6월24일 巳時(열시)에 상제께서 화천하시니 종도들이 각기 흩어져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7월말경 차경석과 김광찬이 구릿골로 김형렬을 찾아와 장차 앞일을 의논할세 경석이 말하되 선생님께서 생전에 말씀하시기를 스스로 미륵불이라 하셨으니 우리들이 금산사 미륵불에게 정성을 드리면서 장랫를 생각해보면 반드시 감응이 있을듯 하니 그리함이 어떠하뇨 하니 모두 옳은 말이라하여 그리하기로 결정하고 치성 공물(供物)을 장만하여 금산사 미륵전에가서 미륵님께 옥황상제지위라 써서 붙이고 정성을 다하여 치성을 올린후 붙였던 종이 위패(位牌)를 떼어 모시고 사실(舍室)에 가서 벽에다 붙여 모시고 각기 정심하고 앉았드니 형렬이 문득 신안이 열려 대장전에 들어가 석가불에게 장래일을 물으니 석가불이 책을 들고 입을 열어 막 가르치려하는 순간에 미륵불이 들어오시더니 입을 막고 책을 빼앗는지라
형렬이 하릴없이 물러나와 그들에게 사유를 말하며 공부를 파하고 돌아가자 하여 일행이 돌아와 생각해보니 바로 이 날이 8월1일 환궁하신다는 날이었음을 깨쳤다 하니라.
그때 일행이 치성 공물을 준비하여 금산사로 올라갈세 무지개 돌문(石門)
이르니 늙은 비구니(김경학의 삼종(三從)수가 과부가 되여 금산사에 신중으로 있었음)가 돌문밖에 나와 있다가 환영하여 가로대 어젯밤 나의 꿈에 금산사 여러 부처님과 오백나한이며 호위신장들이 돌문 밖에 나와 있다가 어느 거룩한(聖) 행차를 맞이하여 들어가는데 그 행차뒤에 그대들이 따라오더니 내 꿈이 어찌하여 이와같이 현실과 같으리요
내 꿈이 하도 거룩(聖)하고 생생하기에 여기에 나와 꿈을 생각하며 서 있던 참이라 하더라
12. 기유년(1909년) 6월에 상제께서 안필성에게 임어하사 필성에게 가라사대,
내가 오늘은 너에게 부탁이 있어 찾아왔노라
구릿골 위 지소(紙所 구릿골에서 청도리로 넘어가는 곳에 지소(紙所)가 있었음)에서 아무날 내가 죽으리라
죽기전에 그 방에서 연삼일 동안을 다투는 소리와 호령하는 소리며 꾸짖는 소리와
신음하는 소리등 여러 가지 이상한 소리가 나리라
모든 소리가 그치고 조용하면 문을 열되,
다른 사람은 아무리 문을 열려하여도 열리지 않으나 너는 열리리라.
문을 열때에는 나의 이름을 세번 부르고 필성이 왔다 고(告)하면 문이 열리리니,
그러면 너는 나를 너의 손으로 장사하라 하시며,
또 가라사대 너와는 오십년 후에 만나리라 하시니라
안필성은 부탁하신 날이 이르니 반신반의하면서 장정들을 거느리고,
구릿골 지소(紙所)로 가보니 과연 이르신 바와 같이 별 이상한 소리가 다 들리거늘
멀리서 이윽히 기다리다 고요해 지므로 힘센 장정을 시켜 문을 열라 하였더니,
장정이 문을 못 열고 말거늘,
그제야 필성이 문 앞에 이르러 증산을 세번 부르고
필성이 왔음을 고(告)한 후에 문을 여니 힘 안들고 문이 열리더라
방안에 들어가 보니 과연 상제께서 주무시는 듯 누워 계시는 데,
이미 화천하셨거늘 하릴없이 필성의 손으로 장사하고 오니라.
몇일후에 소문을 들으니 구릿골 약방에서 상제 화천하시어,
장태날에 장사했다하거늘 필성이 깜짝 놀래 생각하되,
내가 분명히 증산의 시신을 장사했거늘,
한 증산이 두 곳에서 화천했다함은 믿을 수 없는 일이로다.
내 이길로 가서 확인하리라 생각하고 달려가 헤쳐보니
시신이 없고 빈 무덤이었으며 이 날이 화천하신지 이레되는 날이였다 하니라
13. 말대의 선천을 열어 잔피에 쌓인 인류를 구원하고
따르던 종도(從徒)들에게 무쌍한 영화를 마련하여 주실 것으로 믿도 따르다가
뜻밖에 기유년(1909년)6월24일에 화천하시니
종도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하릴없어 몇 사람은 탄식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원평으로부터 올라오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대들의 선생께서 장승백이 술집에 계시며 술을 잡수시는 걸 보았으니 속히 가보라 하거늘
종도들이 의아하면서 장승백이로 달려가 주모에게 물으니 그러한 일이 없었다 하더라.
한 종도는 주막에서 술 잡수시더라는 말이 귀에서 떠나지를 아니하여,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이목을 피하여
몇일후에 구릿골 장태날에 이르러 황혼녘에 초빈을 헤치고 보니
관속이 텅비여 있더라 하며
초빈으로부터 청홍의 서기가 한울(天上)에 뻗치어 석달동안이나 가더라 전하니라
14. 그후 금구(金溝)에 사는 안필성의 친구가 필성을 찾아와 말하기를,
상제께서 찾아오셨기에 술을 대접했더니 잡수시며 환담하고 노시다 가셨다 전하며
또 다른 사람도 상제께서 찾아 오셨더라고 필성에게 말하더라 하며
필성이 항상 사람들과 그 자손들에게 말했다고 전하니라
15. 그 후에 또 어느 종도(從徒)는 전주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친구를 만나 이야기하며 증산께서 별세하였다 하니,
그 친구는 거짓으로 돌리며 말하되,
그대는 지금 무슨 거짓말을 농하는고
내가 방금 용머리 고개에서 증산님을 뵈었느니라
의젓이 술 잡수시는 어른을 뵈었거늘 별세했다 말하니,
그대가 이상하지 아니하냐 하더라고 전하니라
16. 상제께서 화천하신지 여섯달만에 전주 승암사(僧岩寺/중바우 절)에 오시어
최거사와 단란하게 노시다가 떠나심으로
거사가 대접이 소홀했음을 미안히 여기며 다시 한번 찾아 주시기를 청하여 가로대,
아무날은 불공이 있아오니 그날 오시옵서서 하며 기일을 정하여 드렸더라.
가신 다음 즉시 종도 김병욱에게 그 사실을 전갈하니,
병욱은 김형렬에게 그 일을 통지하고
형렬은 차경석과 김경학에게 통지하여 한자리에 모이니라
모인 사람들이 서로 상의하여 새옷 한벌을 지어 가지고
그날 전주 승암사(僧岩寺)로 가서 종도들과 최거사가 하루 종일 기다리니 오시지를 아니하고
서산에 해는 지니 하는 수 없이 절에서 하산했다 전하니라
17. 고창사람 김재인이 상제님을 뵈올때마다 항상 지성으로 공대하더니,
기유년 봄에 경상도에 가서 무슨 일로 죄를 짓고,
대구 감옥에 갇혀 삼년 형을 마치고 신해년 여름에 출옥되었더라
옥에서 나왔으나 갈 바를 모르고 탄식하며 있다가 무심히 고개를 들어보메,
자기 앞에 상제님께서 계시거늘,
너무 반가워 슬피우니 위로하여 가라사대
"마음을 잘 지키면 앞일이 열리리라"훈계하신후 따르라 이르시거늘 따라가니
의복을 사서 갈아 입히시고 배부르게 밥을 사주시며,
여비까지 주시면서 집으로 속히 가라 하시더라.
그 사람은 그 길로 자기집으로 돌아와 월여간(月餘間)을 쉬고나서
상제님을 찾아뵙고 사례하러 대흥리를 찾아오니
화천 하신지 수년이 되었다 하거늘,
이 말을 들은 김재인은 거짓으로 돌리고 가로대 뵈옵고
은혜입었음을 인사드려야 하겠다 하며 구지 계시는 곳을 알려달라 조르더라 전하니라
18. 무신년(1908년)겨울에 대흥리에 계실세
어느날은 고부인의 방에 임어하사 붉은 주머니 두개를 주시며
고부인의 귀에 대고 가만히 "옥황상제"노라 하시고,
두 주머니를 품 속에 잘 간직하라 하시니라
註 기유년(1909년) 6월24일 상제께서 화천하시었으나 고부인은 모르고 계시더니,
집안 사람들이 부인만 돌려놓고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종도들의 동태도 전과 같지 아니하니 의아하여 차경석에게 물으면 경석이 대답하기를 큰 공사가 있어 멀리 淸國에 가시었다 대답하더라
경술년(1910)년 9월 초순에 고부인이 주문을 읽고 계시는데 영안이 열리어 보니 방문 앞으로부터 청홍색 서기(瑞氣)가 길을 따라 북으로 나있는데 서기(瑞氣)의 끝에 초빈이 보이므로 의혹하더니 다음날 밤에는 문득 상제께서 들어오시더니 가라사대 "내가 죽었거늘 네가 어찌 나의 묻힌 곳을 찾지 않느냐"하시거늘 고부인이 대답하여 가로대 "어찌 상서롭지 못한 말씀을 하시나이까"하니 가라사대 "진실로 내가 죽었으니 묻힌 곳을 찾아보라"하시고 고부인의 손을 잡고 이별가 한곡조를 부르신 뒤에 문밖으로 나가시니 문득 보이지 아니하니라
부인이 크게 당황하여 고민으로 밤을 새우고 이튿날 새벽에 홀로 출발하여 광명속에 나타났던 길을 바라보고 걸어가니 조금도 길이 다르지 않으며 걸음이 빨라져서 날으는 것과 같더라
경석의 가족은 고부인이 없음을 깨닫고 찾아 나서니 들의 농부들이 말하되 이른 새벽에 고부인이 정읍 통로를 바라보고 급히 가시더라 하거늘 경석과 윤칠은 급히 뒤를 좇아 태인도챙(泰仁道昌)이 고개 밑에서 만나게 되었더라
차경석이 부인에게 묻기를 어디를 가시기에 간다는 말씀한마디 없이 가시나이까 하고 물어보나 부인께서는 아무 대답을 않으시고 걸음만 걸으시니 경석이 따라가며 말하기를 아마도 선생님을 뵈러 가시는듯 하나 선생님께서 3-4일 전에 청나라(淸國)남경(南京)으로 부터 귀국하여 구릿골 약방에서 중대한 공사를 보시는 중인데 부르심이 없이는 아무도 절대로 오지 말라는 엄명의 통지가 계셨으므로 따로 명령이 계시기 전에는 아무도 가서 뵈옵지 못하고 있는 터인즉 졸지에 찾아가 뵈오면 누님은 고사하고 저에게까지 큰 책망이 있으리니 이를 어찌 하시려고 이와같이 명령없이 가시나이까.바라건대 이 길을 회정(回程)하여 집에 가서 계시면 일간에 무슨 명령이 계시지 않겠나이까 하며 집으로 돌아가기를 간청하나 고부인은 들은척도 하지 않고 걸음만 계속하여 원평에 이르시더니 윤칠에게 명하여 약간의 주과(酒果)를 준비시켜 들리더니 길을 버리고 논둑과 밭둑을 가리지 않고 걸어서 구릿골 장태날에 올라 초빈앞에 당도하였더라
고부인께서 윤칠에게 초빈을 헤치라 이르니 경석이 깜짝 놀래 가로대 만약에 남의 초빈을 헤치다가 초빈의 자손이 보고 달려와 힐난하면 그 추궁을 무슨 수로 감당하려 하시나이까 바라건대 속히 돌아가사이다 하니 고부인이 듣지 아니하고 손수 헤치기 시작하거늘 경석이 하릴 없어 윤칠에게 명하여 초빈을 헤치고 관의 천개(天蓋)를 열어보니 상제님의 천안(天顔)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더라.이때 구릿골의 김형렬이 바라보고 달려와서 참관(參觀)하니라
고부인은 품안으로부터 주머니를 꺼내 한 주머니에서 진주구슬을 내어 상제님 입안에 넣으시고 한삼을 가슴에 덮은 후 또 주머니에서 종이쪽을 꺼내시더니 피여서 한삼(汗衫)위에 덮으니 그 종이에 쓰여 있기를 옥황상제(玉皇上帝)라 하였더라
이로서 관의 천개(天蓋)를 덮은후 원평에서 준비해온 주과포를 차려 놓고 잔을 올리며 사배한 후에 초빈을 봉하고 형렬의 권유에 따라 형렬의 집으로 내려와 이틀 동안을 형렬집에서 쉬었다가 경석과 윤칠을 거느리고 귀가하시니라
19. 상제께서 화천하신 후에 박공우는 항상 허망함을 못 이기어 애통하는 마음이 간절하더니
신해년(辛亥年/1911년)봄에 전주에 가서 장을 볼세 장꾼들에게 휩싸여 경황없이 장터를 돌아다니는데
누가 등뒤에서 공우야 하고 등을 치기에 돌아보니 상제님이시라
너무나 반가워 부여잡고 슬피우니 가라사대
울기는 왜 우느냐 날 따라 오너라 하시며 공우를 끌고 주점으로 데리고가 술을 사주시나
공우는 술을 받아 들고 눈물이 흘러 마시지 못하며 고하기를 참으로 야속하여이다.
어찌하여 저희들을 그다지도 답답하게 하시나이까 하니 상제께서 가라사대
"그놈 먹으라는 술은 아니 먹고 무슨 사설(私說)만 하느냐 어서 술이라 들어라"하시며
거듭 석잔을 권하시고 일어서시므로 공우도 따라나와 따르니 사라사대
어서 불일을 보아라 하시기에 공우 대답하기를 볼일이 다 뭐이오니까
장보기를 작파하겠아오니 같이 가시기 바라나이다 하니 대답하시되
"내가 바뻐서 너하고 같이 가지 못하리라"하시며
장꾼들 사이로 이리저리 가시므로,
공우는 황급히 장꾼들을 헤치고 따르다가 보니,
어디로 가셨는지 보이지 아니하여 온장을 헤메다 힘 없이 돌아왔다 하며
공우는 말하기를 우리들의 눈 앞에서 숨었을 뿐이요
별세하셨다함은 당치 않다하면서 6월24일을 숨을 둔자(遁字) 둔일(遁日)이라 하니라
20. 상제께서 화천하신후 차경석은 매양 탄식하며
자기의 장래사를 누구에게 의탁하리 하더니
하루는 우연히 입암산 상봉에 올라가 홀로 앉아 생각하기를
만고없을 대신인께서도 가시는데 우리 같은 초로(草露)인생이 무엇 하느라
세상에 나서 이렇듯이 애통하는가 하는 생각에 젖어 저절로 슬퍼지며,
앙천통곡(仰天痛哭)하더니 등 뒤에서 경석아 하고 부르기에
깜짝 놀래 돌아보니 상제께서 부르시거늘,
급히 일어나 배례한즉 가라사대 내가 죽지 않았느니
너는 너무 애통말고 어서 내려가 모든 일을 잘 처리하라
후일 다시 만나리라 하시고 인홀불견(人忽不見)이 되었다 하니라
21. 상제께서 화천하신후 전주 사람이 김을 무역하려고
전라남도로 내려가다가 송정리를 지나는데,
도로변 주막 옆에 상제께서 약방을 차려놓고 계시거늘
하도 반갑고 이상하여 인사를 드린후 주안(酒案)을 대접하며,
여러가지 말씀을 물은후 고(告)하기를
김을 무역(貿易)하고 돌아오는 길에 또 들리겠나이다 하고 떠났다가
그 후에 돌아오며 그 곳에 와보니 약방이 없거늘 물으니,
그 노인은 저안 동네로 옮겨가셨다 하거늘,
그 마을에 가서 물으니 그런 분이 약방을 이사한 일 없다 하더라고 전하니라
이 외에도 남원에서 김병선이 만나 뵈었다 공언했고
갈재 넘어 사거리에 약을 걸고 계심을 뵈었다는 사람이 나타나고
또 영광 땅에서 뵙고 왔다는 사람이 나오고 하니
상제님의 신성하심은 사람의 지량(知量)의 범주(範周)로는
감히 측도(測度)할 수 없는 신적(神跡)이라 아니할 수 없더라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