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神明)
1. 신명(神明)이란 천신(天神)과 지기(地祇) 즉 하늘과 땅의 신령을 말한다. 그 헤아리지 못함을 神이라 하고 靈이 거울같이 밝은 것을 明이라 하여 신명(神明)이라 하며 불가사의한 능력을 지니고 자연계를 지배하며, 인류에게 화복(禍福)을 내리는 초월적인 존재로 신앙의 대상이 된다. 줄여서 신(神)이라고도 한다. 또한 귀신을 신명이라고도 하여 존중하기도 하는데 상제님께서도 척신을 존중하여 신명이라 표현하기도 하셨다.
참고문헌
신명(神明) ①天神과 地祇를 말함. 헤아리지 못함을 神이라 하고 靈이 거울같이 밝은 것을 明이라 함. 無量壽經下에 「日月이 照明하고 神明이 記識한다」하였고, 賢劫經一에 「諸天과 神明이 人과 非人이 至德을 愛重한다」 하였으며, 藥師經에 「神明에게 아뢰어 풀고 魍魎을 부린다」하였고, 大方等陀羅尼經에 「마땅히 신명이 證據한다」하였음, ②衆生의 識姓이 된다 함. 釋門歸敬儀中에 「神明의 正路를 열고 正道의 明津을 通한다」하였음. (韓國佛敎大辭典, 明文堂, 1993, p46~47)
神 ①귀신신 ㉠하늘의 신(神). 하느님. 상제(上帝). ‘攘竊-祇之犧牷牲用’《書經》. ㉡신령. ‘水-’. ‘雲陽有涇路-’《漢書》. ②신선신 선인(仙人). ‘方士求-者’《史記》. ③혼신 영혼. 마음. ‘精-’.‘-飛魄散’. ‘費-傷魂’《呂氏春秋》. ④정기신 정수(精粹)한 기운. ‘天之-捿平日, 人之-捿平日’《皇極經世》. ⑤영묘할신 신비(神秘)스러움. 변화 무쌍함. ‘-妙’. ‘聖而不可知之, 之謂-’《孟子》. ⑥성신 성(姓)의 하나. 字源 : 形聲. 示+申[音]. 金文에서는 ‘申’과 같은 자로, 번갯불을 본뜬 것이 있음. 번갯불의 象形에서, 하늘의 신의 뜻을 나타내고, 일반적으로, ‘신’의 뜻을 나타냄. [神明]<신명> ①하늘의 신령(神靈)과 땅의 신령. 신기(神祇). ②사람의 마음. 정신(精神). (漢韓大字典, 민중서림, 2002, p1473~1474)
신 불가사의한 능력을 지니고 자연계를 지배하며, 인류에게 화복(禍福)을 내린다는 신앙의 대상이 되는 초월적인 존재. 한국에서는 하느님 ·하나님 ·한울님 ·천지신명(天地神明)이라고도 부른다. 여러 종교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는 성스러운 실재(實在)는 인격적인 것과 비인격적인 것, 애니미즘적인 것과 마나이즘(마나에 종교의 기원을 구하려는 학설)적인 것의 두 이질적인 면에서 파악된다. 좁은 의미로서는 인격적 ·애니미즘적으로 파악된 성스러운 존재가 신이다. 미개사회에서는 자연물이나 자연현상에 초자연적인 정령(精靈)이 머물러 있다고 믿었고, 문명사회에서는 이들을 지배하는 것은 초월적인 인격신(人格神)이라고 믿는 일이 많다. 그러나 산삼(山蔘)에 정령이 깃든 것으로 믿는 것과 같이 어떤 특정한 자연물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정령, 악마와 같이 현실의 세계에는 있으나 구체적인 것과는 관계가 없는 초감각적인 영귀(靈鬼), 그리스신화의 제우스와 같이 개성이 명확하고 고유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 현세를 초월한 성격을 지닌 신 등은 원래 별개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을 일괄해서 신령이라고 부른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신의 종류 신령은 단순히 인간이 머리 속에서 생각해 낸 추상적인 것이 아니며, 또한 어떤 사회에도 무차별하게 있는 것도 아니다. 특정한 시대나 환경 속에서 특정한 사회생활을 영위하고, 특정한 문화를 지닌 인간에게 각기 제나름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그야말로 다종 다양하다. 그 유형은 다음과 같다. ① 본체(本體) · 성질 및 있는 곳에 따라 자연신(太陽神 ·月神 ·水神 ·風神 ·山神 ·動物神 ·植物神 등)과 인격신(祖上神 ·英雄神 ·文化祖神 등), 선신(善神)과 악신(惡神), 천상신(天上神)과 지상신 ·지하신 등으로 분류된다. ② 기능에 따라서 농업신 ·수렵신 ·상업신 ·복신 ·빈곤신 ·사신(死神) ·무신(武神) ·문신(文神) ·감시신 ·창조신 ·수호신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③ 모습에 따라서 인간형태신 ·식물형태신 ·동물형태신 ·반인반수신(半人半獸神), 무형의 신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④ 신령의 수(數)에 따라 다신교(多神敎) ·이신교(二神敎) ·일신교(一神敎) ·범신교(汎神敎) 등으로 불리는 종교체계의 분류방식도 있다. 또한 다신교 안에서 주신(主神)이 인정되는 것을 단일신교, 때와 장소에 따라서 주신이 교체하는 것을 교체신교라고 한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한국에서 신 ‘god’의 역어(譯語)로서의 신에 그리스도교의 일신론적 성격이 짙은 바와 같이 한자(漢字)의 ‘神’에는 ‘하늘의 신(天神)’, 곧 하느님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한국의 경우 천신은 천상에 존재하며, 최고의 신으로서 우주의 모든 현상을 지배하고 통솔하여 인간세상의 행복과 불행, 인간의 명운을 좌우하는 것으로 믿는 옥황상제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예로부터 추수 다음에 거행하던 제천의식(祭天儀式)은 곧 천신에 대한 제사이다. 또한 천계에 존재하여 인간의 운명을 조종하고 인간의 소원을 풀어주기도 한다고 믿어 기원(祈願)의 대상이 되는 북두칠성이나 견우 ·직녀성은 천체신이라 할 수 있다. 천제(天帝:天神)의 자손으로 고조선을 개국한 단군은 후에 국조신(國祖神)으로 숭상받게 되었으나 그는 아사달(阿斯達)에서 자연신인 산신(山神)이 되었다. 또한 고구려 ·신라에서 국조신으로 제사를 지낸 주몽 ·박혁거세도 천신 ·해의 아들(弗矩內)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국조신 ·개국신으로 받들던 시조는 하느님의 아들로 일컬어진다. 한편 거의 모든 개국시조의 탄생과 깊은 관련이 있는 산을 신령시하여 예로부터 백두산과 묘향산 ·북한산 ·금강산 ·설악산 ·태백산 ·지리산 등 전국의 명산은 옥저 ·고구려 ·예(濊) ·백제 ·신라 ·고려 ·조선 등에서 신산으로 받들어 제사를 지내왔다. 흰 옷을 입은 백발노인의 형상으로 나타나 산신 ·산신령으로 불리는 이 신은 영검하고 큰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져 나라와 부락단위로 제를 올리고 국태민안(國泰民安) ·풍작 ·기우 등을 빌어왔다. 자연신 가운데는 해신(海神) ·하천신(河川神) ·용왕신으로 불리어 바다 ·강 ·연못 등 물을 관장하는 수신(水神)이 있다. 나루터에 있는 독신(瀆神), 못에 있다는 지소신(池沼神)도 물에 관계되는 신이며, 물귀신으로도 표현되는 수신은 물에서 불의에 죽은 사람의 원령(怨靈)이 남아 심술을 부린다는 악령적(惡靈的)인 성격을 띠기도 한다. 민간에서 격이 높은 수신으로 숭상되는 용왕신은 여러 어촌의 용왕당에 모셔져 풍어제(豊漁祭)를 올리고 음력 설이나 보름날에 주부들이 제를 올린다. 또한 자연신 가운데는 한 가옥의 터, 한 마을, 그리고 한 지역이나 한 나라의 땅을 관장한다는 지신(地神:土神)이 있다. 고구려 ·신라 ·고려 ·조선 시대에는 사직단(社稷壇)을 만들어 지신인 태사(太社)와 곡신(穀神)인 태직(太稷) 두 신에게 제사를 지냈고, 민간에서는 정초에 지신을 위하는 지신밟기를 하였다. 또한 ‘터주’ ‘터줏대감’ 이라고 불리어 집터를 담당하는 지신에게는 명절 때나 큰 굿을 할 때 터줏상을 차려서 위하는데 터주가 노하여 재앙을 받게 되는 일을 동티[動土]라고 한다. 이 밖에 마을을 수호하는 신으로 서낭 ·골맥이 ·부군 등으로 불리는 동신(洞神)이 있는데 이들을 모시는 곳을 당(堂)이라 하여 당신이라고도 부르며, 부락마다 동제 ·당산제를 지내 협동심과 공동의식을 다진다. 자연신에는 또한 바위신[岩石神]이 있다. 기자(祈子)의 대상으로 믿는 바위신의 신앙은 전국적인 분포를 보여, 바위에 돌을 던지거나 자식을 낳게 해달라고 빌면 생남(生男)할 수 있다고 믿었고 남근석(男根石) ·자지석(子持石) 등으로 불리는 바위, 또는 석물(石物)에 고사를 지내거나 그 위에 앉았다 일어나면 아이를 갖는 데 효험이 있다고 믿었다. 바위신과 같은 기능신(機能神)에는 방위를 관장하여 지키는 오방신(五方神)이 있다. 오방신은 각기 계절을 맡은 계절신이기도 하여 동방의 신[太昊]은 봄을 맡고, 남방의 신[炎帝]은 여름을, 서방의 신[少昊]은 가을을, 북방의 신[ 頊]은 겨울을 맡았으며, 중앙의 신[黃帝]은 토(土)를 맡았다. 민간신앙상 일반적으로 최고의 신으로 인식되는 하느님 ·옥황상제는 최상의 명복신(命福神)으로 여기는 제석천(帝釋天)과 더불어 무속신앙(巫俗信仰)에서 그 신앙의 대상이 되는 무신(巫神)으로도 받들어진다. 300종에 달하는 무신은 출산신(出産神)인 삼신[産神]의 경우와 같이 거의 독특한 일을 맡은 기능신으로 그 중에는 앞서 자연신으로 분류하였던 일월신 ·일월성신 ·칠성신이 있고, 지역신인 골맥이신 ·서낭신[城隍神] ·본향신(本鄕神) ·군웅신(軍雄神) ·바리공주신 등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거족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조령숭배(祖靈崇拜)이다. 유교의 가례(家禮)에 의해서 더욱 뒷받침되어 내려온 조상신에 대한 숭배는 조선 500년을 내려오면서 한국 문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끝으로 주부들과 가장 가깝게 지내온 신으로 가신(家神)이 있다. 성주(成主) ·조왕( 王) ·치귀[厠神] ·문신(門神:守門神)으로 대표되는 가신은 각기 그 맡은 기능에 따라 걸맞은 대우를 받아왔다. 이 가운데 성주는 집안의 여러 신을 통솔하면서 가내의 평안과 부귀를 관장하는 신으로서 가신 중 최고의 신으로 신앙된다. 조왕은 아궁이를 맡고 있는 신으로서 불을 때고 음식을 만드는 가정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일을 맡는다 해서 재산신으로도 받들어 성주 못지 않게 섬긴다. 문신 ·수문신은 대문을 지키는 신으로서 선한 복만 들어오게 하고 악한 재화(災禍)는 못들어오게 막는다. 여성으로 상정하는 치귀는 뒷간을 담당하는 신으로서 가신 중에서는 악귀에 속하여 특별히 섬기지는 않고 음력 섣달 그믐날 밤에 부엌 ·장독 ·대문 등과 함께 뒷간에 불을 밝혀주는 정도이다. 이 밖에 전라도 지방에서 ‘철룡님’이라고 부르는 장독신은 간장 ·된장 등을 맡은 신으로, 재산신으로도 섬긴다. 이상 한국 민족이 예로부터 신앙의 대상으로 섬겨온 신 또는 신령들은 서두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인격적인 것과 비인격적인 것, 애니미즘적인 것과 마나이즘적인 것이 혼유되어 있음을 알 수 있고, 한국 조상들은 일상생활의 어려움 속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많은 신들과 어울려 섬기면서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한 방편으로 삼아왔음을 또한 알 수 있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2. 전경에는 구천상제의 명을 받들고 행하는 무수한 신(神) ․ 신명(神明) ․ 신장(神將)등이 등장하는 다신교적인 신관도 분명히 나타난다. 이러한 신들의 명칭은 대략적으로 척신(慼神), 호소신(好笑神), 중천신(中天神), 황천신(黃泉神), 선령신(先靈神), 유불선도통신(儒佛仙道通神), 문명신(文明神), 보은신(報恩神), 역신(逆神), 황극신(皇極神), 천하음양신(天下陰陽神), 천하자기신(天下自己神), 천하통정신(天下通情神), 천하상하신(天下上下神), 천하시비신(天下是非神), 만사신(萬死神), 백복신(百伏神), 아표신(餓殍神), 예고신(曳鼓神), 예팽신(曳彭神), 석란신(石蘭神), 조왕(竈王), 시두손님, 망량(魍魎), 칠성(七星), 삼신(三神), 우사(雨師), 상계신(上計神), 중계신(中計神), 하계신(下計神), 장상신(將相神), 지방신(地方神), 동학신명(東學神明), 조선신명(朝鮮神明), 서양신명(西洋神明), 청국만리장신명(淸國萬里長神明), 오방신장(五方神將), 사십팔장(四十八將), 이십팔장(二十八將), 이십사장(二十四將), 육정신장(六丁神將), 괴질신장(怪疾神將) 등이 있다. 여기서 『전경』에 나타난 신들과 그에 대한 특징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 척신(慼神) : 나에게 남이 원한을 가질 때 생기는 신으로 대단히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척신은 사람이나 사물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그 성향은 복수(復讐)지향적이다. 척신이 범하게 되면 사람은 그 기능을 상실(喪失)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 선령신(先靈神) : 선령신은 각 족속 또는 각 성씨(姓氏)의 선조를 말한다. 선령신은 그들이 생전에 지은 공덕의 결과에 따라 천상으로부터 쓸만한 자손을 얻어 내는 역할을 하며, 자손을 척신의 무리로부터 보호하기도 한다. 이러한 선령신은 후사(자손)을 둔 황천신(黃泉神), 그렇지 못한 중천신(中天神)으로 구별되며, 선령신은 천상공정(天上公庭)에 참여하기도 한다. ― 유불선도통신(儒佛仙道通神) : 유도(儒道)․불도(佛道)․선도(仙道)의 도통을 담당한 신명으로서 수행을 통해 도통을 얻고자 할 때 응감하는 신이다. ― 문명신(文明神) : 문명신은 천상으로부터 인계에 문명을 전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신명이나 그와 관련하여 인류 문명 역사에 크게 이바지한 신이다. 세계문화와 문명을 관장하며 그에 해당하는 직능을 지니는 신이며 특히 후천문명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 아표신(餓殍神) : 굶어 죽은 자의 신을 지칭한다. ― 지방신(地方神) : 각 영역에 머물러 그 영역이나 지역을 관장하는 신으로, 지방은 한 나라안의 여러 지역으로 해석될수 있으며, 그것을 좁히면 일가(一家)의 개념으로도 이해할수 있다. ― 조왕(竈王) : 조왕은 부엌을 관할하는 신으로 가정신앙의 하나이다. 조왕 신앙의 형태는 일반적으로 부뚜막에 청수(淸水)를 떠놓고 안녕을 빌었다. 또한 부엌은 불을 상징하므로 화신(火神)숭배의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 시두손님 : 시두(時痘)는 천연두를 말하는 것으로 두신(痘神)을 제사한 기록은 『조선무속고』에 많이 등장한다. 이는 천연두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어갔던 당시의 환경을 반영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천연두를 ‘손님’또는 ‘마마손님’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두신의 노여움을 풀고 안녕을 기원하자는 의도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 망량(魍魎) : 망량은 산수목석(山水木石)의 정기가 응집된 괴물로 물속에 살고 어린아이와 비슷하며,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내 홀린다고 한다. ― 칠성(七星) : 인간의 화복을 관장하는 북두칠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탐랑(貪狼)․문곡(文曲)․거문(巨門)․녹존(祿存)․염정(廉貞)․무곡(武曲)․파군(破軍)이라고도 한다. ― 삼신(三神) : 삼신은 인간의 출생과 관련된 태신(胎神)인데 여기에 제사를 지내고 자손을 위해 기도하면, 복(福)를 얻을 수 있다도고 한다. ― 우사(雨師) : 우사는 비를 담당한 신이다. ― 오방신장(五方神將) : 오방은 동․서․남․북․중앙의 다섯 방위를 의미하고 있는데 오방신을 오방신장 또는 오방장군이라 하여 무신(武神)으로 섬기기도 한다. 또 오방의 신을 청룡, 백호, 주작, 현무, 황룡이라고도 한다. 이때 청색, 백색, 적색, 흑색은 동서남북을 의미하며, 황색은 중앙을 의미한다. 오방을 지킨다는 장군도 동의 청제, 서의 백제, 남의 적제, 북의 흑제, 중앙의 황제라고 일컫는다. ― 이십팔장(二十八將) : 이십팔장이란 후한(後漢)의 명제 때(서기60년경), 광무제(서기 25~56년)의 공신으로 남궁운대에 그려진 이십팔인의 무장을 가르키며, 28수를 담당하고 있다. ― 이십사장(二十四將) : 이십사장은 당나라 때 능연각(凌堧閣 : 지금의 협서성 장안현의 성안에 있던 전각)에다 당 태종이 정관17년(서기643년)에 나라에 공로가 큰 신하 스물네명의 초상을 그려서 걸어 놓았었던 일에서 유래하였으며, 24절후를 담당하고 있다. ― 육정신장 : 정축, 정묘, 정사, 정미, 정유, 정해를 지칭하고 있는데 무속에서는 갑자, 갑인, 갑진, 갑오, 갑신, 갑술의 육갑과 함께 육정육갑신이라 하여 12방위를 지키는 수호신 혹은 시간을 맡은 시신(時神)으로 섬기고 있다. (대순사상의 이해, 대순종학 교재연구회, 대진대학교 출판부, 2001, p117~120)
3. 전경에서 신명과 관련된 구절
상제의 신성하심이 하운동(夏雲洞)에도 알려졌도다. 이 곳에 이 선경(李善慶)이란 자의 빙모가 살고 있었도다. 상제께서 주인을 찾고 <그대의 아내가 四十九일동안 정성을 드릴 수 있느냐를 잘 상의하라> 분부하시니라. 주인은 명을 받은 대로 아내와 상의하니 아내도 일찍부터 상제의 신성하심을 들은 바가 있어 굳게 결심하고 허락하니라. 상제께서 다시 주인에게 어김없는 다짐을 받게 하신 뒤에 공사를 보셨도다. 그 여인은 날마다 머리를 빗고 목욕재계한 뒤에 떡 한 시루씩 쪄서 공사 일에 준비하니라. 이렇게 여러날을 거듭하니 아내가 심히 괴로와하여 불평을 품었도다. 이날 한 짐 나무를 다 때어도 떡이 익지 않아 아내가 매우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노라니 상제께서 주인을 불러 <그대 아내는 성심이 풀려서 떡이 익지 않아 매우 걱정하고 있으니 내 앞에 와서 사과하게 하라. 나는 용서하고자 하나 신명들이 듣지 아니하는도다>고 이르시니라. 주인이 아내에게 이 분부를 전하니 아내가 깜짝 놀라면서 사랑방에 나와 상제께 사과하고 부엌에 들어가서 시루를 열어보니 떡이 잘 익어 있었도다. 부인은 이로부터 한결같이 정성을 드려 四十九일을 마치니 상제께서 친히 부엌에 들어가셔서 그 정성을 치하하시므로 부인은 정성의 부족을 송구히 여기니 상제께서 부인을 위로하고 그대의 성심이 신명에게 사무쳤으니 오색 채운이 달을 끼고있는 그 증거를 보라고 하셨도다.(행록 1-29)
어느 때인지 분명치 않으나 상제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때가 있느니라. <고부에 나보다 항렬이 높은 친족들이 계시는도다. 내가 그들을 대할 때에 반드시 항렬을 좇아 말하게 되느니라. 이것은 윤리상 전통이라. 무슨 관계가 있으리오만 모든 신명은 그들의 불경한 언사를 옳지 않게 여기고 반드시 죄로 인정하느니라. 나는 이것을 어렵게 생각하여 친족과의 왕래를 적게 하느니라>하셨도다.(행록 1-38)
상제께서 계묘년에 객망리에 계셨도다. 삼월 어느날에 형렬에게 “신명에게 요금을 줄터이니 礪山 尹 公三에게 가서 돈을 얻어오라” 하시니 옆에서 시좌하고 있던 김 병욱이 전주 거부인 白 南信을 천거하는도다. 상제께서 형렬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하시고 위정 술을 많이 드신 후에 신발을 벗으신체 대삿갓을 쓰시고 병욱을 앞세우고 그의 집에 가시니라. 이 때 張 興海가 와 있었으며 마침 남신이 병욱의 집에 들어서는지라. 병욱이 상제께 손님이 온 것을 아뢰이니 누워 계시던 상제께서 몸을 일으켜 앉으시나 처음 대하는 예를 베풀지 않으시고 다짜고짜 그에게 “그대가 나의 상을 평하라” 말씀 하시니 그가 “상리를 알지 못하나이다”하거늘 상제께서 “상리는 참되지 못하나니 속평을 하라” 하시니 그가 “속평에 얼굴이 방정하고 풍후하면 부하고 미간 인당에 백호주가 있으니 가히 부귀 쌍전하리로 소이다”고 아뢰니 상제께서 웃으시며 “그대의 상을 평하면 입가로 침이 부글부글 나오니 이는 소가 마구 삭이는 격이라. 가히 부호가 되리라. 내가 쓸 곳이 있으니 돈 십만냥을 가져오라” 이르시니라. 남신이 묵묵히 말이 없다가 “칠만냥을 드리겠나이다. 어떠 하나이까” 여쭈니라. 상제께서 응락하시지 않으시니 남신이 다시 여쭈니라. “십만냥을 채우려면 서울에 있는 집까지 팔아야 하겠나이다.” 그는 드디어 십만냥을 만들어 드릴 것을 응락하는도다. 병욱이 증인이 되어서 증서를 써서 상제께 올리니 상제께서 그 증서를 받으셔서 병욱에게 맡기시니 병욱과 흥해가 세상에 드문 도량이심을 탄복하였도다. 그후 증서를 상제께서 불사르셨도다. 이로 인하여 백 남신이 상제를 좇기 시작하였도다.(행록 2-20)
상제께서 감방을 옮기신 후에 형렬.자현에게 가라사대 “세 사람이 모이면 관장의 공사를 처결하나니 우리 셋이면 무슨 일이든지 결정하리라.” 하시고 또 자현에게 가만히 가라사대 “비록 몇 십만인이 이러한 화액을 당하였을 지라도 일흐의 상처가 없이 다 풀리게 할지니 조금도 염려말라” 하시니라. 그믐날 밤에 우뢰와 번개가 크게 일어나는 것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이것은 서양에서 신명이 넘어옴이니라”고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옥중에서 과세하셨느니라.(행록 3-61)
상제께서 최 창조의 집에서 종도 수십명을 둘러 앉히고 각기 세 글자씩을 부르게 하시니라. 종도들은 천자문의 첫 글자부터 불러오다가 최 덕겸이 日자를 부를 때 상제께서 말씀하시니라. “덕겸은 日本王도 좋아 보이는가보다.” 하시며 “남을 따라 부르지 말고 각기 제 생각대로 부르라” 이르시니라. 이튿날 밤에 상제께서 덕겸으로 하여금 담뱃대의 진을 쑤셔 내되 한번 잡아 놓치지말고 뽑아서 문밖으로 버리게 하시니 그는 말씀하신대로 진을 바깥에 버리자 온 마을의 개가 일시에 짖는도다. 덕겸이 신기하게 느껴 “어찌 개가 일제히 짖나이까”라고 여쭈니 상제께서 가라사대 “大神明이 오는 까닭이니라.” 그가 무슨 신명이니까“고 여쭈니 상제께서 ”시두 손님이니 天子國이라야 이 신명이 들어오나니라“고 일러 주셨도다.(행록 4-8)
상제께서 전주 김 준 에 집에 가셔서 김 덕 .김 준 .김 낙범들과 좌석을 함께 하시다가 가라사대 “근자에 관묘에 치성이 있느냐”고 하시기에 낙범이 있음을 아뢰었도다. 이에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그 신명이 이 지방에 있지 않고 멀리 西洋에 가서 대란을 일으키고 있나니라”고 알리셨도다.(행록 4-11)
그후 어느날 공우가 정읍에 가서 상제를 모시고 臥龍里 네 거리에 이르렀도다. 이 곳에서 북쪽으로 回龍里가 있고 이곳에 申 京洙가 살고 서북쪽 교동에 黃 應鐘이 살고 있었도다. 상제께서 네거리 복판에서 공우에게 “어디로 가는 것이 마땅하냐”고 물으시니 공우가 “자기 집으로 가시옵소서” 하고 청하니 상제께서 세번이나 되물으시므로 공우도 세번 한결같이 대답하니라. 그러나 상제께서 먼저 응종의 집에 들르셨다가 곧 공우를 데리시고 병욱의 집에 가셨도다. 상제께서 병욱에게 돈 서돈을 청하시기에 그가 올리니 그것을 공우에게 간수하게 하시고 또 두냥을 병욱으로부터 받아서 다시 그에게 그것을 갈무리하게 하신 후에 병욱의 아내를 불러 앞에 앉히고 “왜 그리하였느냐”고 세번 되풀이 꾸짖고 외면하시면서 “죽음을 다른 사람에게 가라”고 혼자 말씀을 하시니라. 병욱이 상제께 공양할 술을 준비하려 하기에 상제께서 나 먹을 술은 있으니 준비하지 말라“ 이르신라. 병욱의 장모가 상제께서 오신 것을 알고 술과 안주를 올리니 상제께서 그 술을 드셨도다. 응종의 집에서 밤을 새우고 다음 날 새벽에 구릿골로 행차하셨도다. 가시는 도중에 공우에게 “사나이가 잘 되려고 하느데 아내가 방해하니 제 연분이 아니라. 신명들이 없애려는 것을 구하여 주었노라. 이제 병은 나았으나 이 뒤로 잉태는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과연 그후부터 그 아내는 잉태하지 못하였도다.(행록 4-20)
상제께서 하루는 公又를 데리고 어디를 가실 때 공우에게 우산을 사서 들게 하셨도다. 공우는 상제께서는 원래 우산을 받는 일이 없었고 비록 비오는 날 길을 가실지라도 비가 몸에 범하는 일이 없었던 일을 생각하여 이상히 여기더니 뜻밖에 비가 오는도다. 상제께서 공우에게 우산을 받으라 하시니 공우는 상제께 받으시길 청하여 서로 사양하다가 함께 비를 맞아 옷이 흠뻑 젖으니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뒤로는 우산을 들지 말라 의뢰심과 두마음을 품으면 신명의 음호를 받지 못하나니라.”고 하셨도다.(행록 4-40)
상제께서 하루는 경석에게 검은 색 두루마기 한 벌을 가져오라 하시고 내의를 다 벗고 두루마기만 입으신 후에 긴 수건으로 허리를 매고 여러 사람에게 “일본 사람과 같으냐”고 물으시니 모두 대하여 말하기를 “일본 사람과 꼭 같사옵나이다” 하노라. 상제께서 그 의복을 다시 벗고 “내가 어려서 서당에 다닐 대 이웃 아이와 먹으로 장난을 하다가 그아이가 나에게 지고 울며 돌아가서는 다시 그 서당에 오지 않고 다른 서당에 가서 글을 읽다가 얼마 후 병들어 죽었도다. 그 신이 원한을 품었다가 이제 나에게 해원을 구함으로 그럼 어찌 하여야 하겠느냐 물은 즉 그 신명이 나에게 왜복을 입으라 하므로 내가 그 신명을 위로 하고자 입은 것이니라”고 이르셨도다.(행록 4-54)
상제께서 기유년 어느날 원평 시장 金 京執의 음식점에 사관을 정하시고 오랫동안 왕래하셨도다. 그는 상제의 말씀이라 하여 주식을 청하는 사람에게 대금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고 음식을 제공하였도다. 이즈음에 청석골에 살고 있는 姜 八文이란 자가 술과 밥을 먹고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대금을 내지 않고 상제께 미루고 가니라. 팔문은 그 음식을 먹고 난 뒤부터 배가 붓기 시작하더니 사경을 헤매느니라. 이 사실을 신 경수가 상제께 아뢰니 아무 대답도 아니 하시니라. 병세가 더 위급하여졌다는 소식을 전하여 듣고 가라사대 “몹쓸 일을 하여 신명으로부터 노여움을 사서 죽게 되었으니 할 수 없노라” 하시더니 그후 곧 그의 사망이 전하여졌도다.(행록 5-4)
시속에 말하는 개벽장은 삼계의 대권을 주재하여 비겁에 쌓인 신명과 창생을 건지는 開闢長을 말함이니라. 상제께서 대원사에서의 공부를 마치신 辛丑년 겨울에 창문에 종이를 바르지않고 부엌에 불을 지피지 않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음식을 전폐하고 아흐렛동안 천지공사를 시작하셨도다. 이 동안에 뜰에 벼를 말려도 새가 날아들지 못하고 사람들이 집 앞으로 통행하기를 어려워 하였도다. (공사 1-1)
상제께서 “선천에서는 인간 사물이 모두 상극에 지배되어 세상이 원한이 쌓이고 맺혀 삼계를 채웠으니 천지가 常道를 잃고 갖가지의 재화가 일어나고 세상은 참혹하게 되었도다. 그러므로 내가 천지의 도수를 정리하고 신명을 조화하여 만고의 원한을 풀고 相生의 도로 후천의 선경을 세워서 세계의 민생을 건지려 하노라. 무릇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신도로부터 원을 물어야 하느니라. 먼저 도수를 굳건히 하여 조화하면 그것이 기틀이 되어 인사가 저절로 이룩될 것이니라. 이것이 곧 三界公事이니라”고 김 형렬에게 말씀하시고 그중의 冥府公事의 일부를 착수하셨도다.(공사 1-3)
상제께서 어느날 종도들에게 “내가 이 공사를 맡고자 함이 아니니라. 천지신명이 모여 상제가 아니면 천지를 바로잡을 수 없다 하므로 괴롭기 한량 없으나 어찌할 수 없이 맡게 되었노라”고 말씀하셨도다.(공사 1-9)
상제께서 계묘년 정월에 날마다 백지 두 서너장에 글을 쓰거나 또는 그림(符)을 그려 손이나 무우에 먹물을 묻혀 그것들에 찍고 불사르셨도다. 그 뜻을 종도들이 여쭈어 물으니 “그것은 천지공사에 신명을 부르는 부호이노라”고 알려주셨도다.(공사 1-10)
상제께서 김 병욱에게 “이제 국세가 날로 기울어 정부는 매사를 외국인에게 의지하게 됨에 따라 당파가 분립하여 주의 주장을 달리하고 또는 일본과 친선을 맺고 또는 노국에 접근하니 그대의 생각은 어떠하느냐”고 물으시니 그가 “인종의 차별과 동서의 구별로 인하여 일본과 친함이 옳을까 하나이다”고 상제께 대답하니 상제께서 “그대의 말이 과연 옳도다” 하시고 서양 세력을 물리치고자 신명공사를 행하셨도다.(공사 1-12)
병오년 정월 초사흘에 김 형렬과 김 성화의 부자와 김 광찬의 숙질이 동곡에서 상제를 시좌하고 상제의 명하신 대로 하루 동안 말도 아니하고 담배도 끊고 있을 때 상제께서 이틀 후에 여러 종도를 둘러앉히고 당부하시기를 “오늘 호소신이 올 것이니 너희는 웃지 말라. 만일 너희중 누구 한사람이라도 웃으면 그 신명이 공사를 보지 않고 그냥 돌아갈 것이고 그가 한번 가면 어느 때 다시 올지 모를 일이니 깊이 명심하고 주의하라.” 종도들은 깊이 명심하고 조심하더니 갑자기 성백이 큰 웃음을 터뜨리니 모두 따라 웃은지라. 그날 오후에 성백은 별안간 오한을 일으켜 심히 고통하더니 사흘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있노라니 상제께서 성백을 앞에 눕히고 글 한절을 읽으시니 그가 바로 쾌유하였도다. 상제께서 날마다 백지에 그림 같은 약도와 글자를 써서 불사르셨도다.(공사 1-16)
상제께서 이달 그믐에 동곡으로 돌아오신 다음날 형렬을 데리고 김 광찬이 가있는 만경에 가셨을 때에 최 익현이 洪州에서 의병을 일으키니 때는 모를 심는 시기이나 가뭄이 오래 계속되어 인심이 흉흉하여 사람들이 직업에 안착치 못하고 의병에 들어가는 자가 날로 증가하여 더욱 의병의 군세가 왕성하여 지는지라. 상제께서 수일간 만경에 머무시면서 비를 흡족하게 내리게 하시니 비로소 인심이 돌아가 농사에 종사하는 자가 날로 늘어나더라. 이때 최 익현은 의병의 갑작스러운 약세로 순창에서 체포되니라. 그가 체포된 소식을 들으시고 상제께서는 만경에서 익산 만중리 정 춘심의 집으로 떠나시며 가가사대 “최 익현의 거사로써 천지신명이 크게 움직인 것은 오로지 그 혈성의 감동에 인함이나 그의 재질이 대사를 감당치 못할 것이고 한재까지 겹쳤으니 무고한 생민의 생명만을 잃을 것이니라. 때는 실로 흥망의 기로이라 의병을 거두고 민족의 활로를 열었느니라”고 하셨도다. (공사 1-24)
상제께서 어느날 종도들이 “중천신은 후사를 못둔 신명이니라. 그러므로 중천신은 의탁할 곳을 두지 못하여 황천신으로부터 물과 밥을 얻어먹고 왔기에 원한을 품고 있었느니라. 이제 그 신이 나에게 하소연 하므로 이로부터는 중천신에게 복을 주어 원한을 없게 하려하노라.”는 말씀을 상제로부터 들었도다.(공사 1-29)
상제께서 어느날 가라사대 “조선을 서양으로 넘기면 인종의 차별로 학대가 심하여 살아날 수가 없고 청국으로 넘겨도 그 민족이 우둔하여 뒤 감당을 못할 것이라. 일본은 임진란 이후 도술 신명사이에 척이 맺혀 있으니 그들에게 一時天下統一之氣와 日月大明之氣를 붙여주어서 역사케 하고자 하나 한 가지 못 줄 것이 있으니 곧 仁이니라. 만일 인자까지 붙여주면 천하가 다 저희들에게 돌아갈 것이므로 인자를 너희들에게 붙여주노니 잘 지킬지어다”고 이르시고 “너희들은 편한 사람이 될 것이오. 저희들은 일만 할뿐이니 모든 일을 밝게 하여주라. 그들은 일을 마치고 갈 때에 품 삯도 받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리니 말대접이나 후덕하게 하라” 하셨도다.(공사 2-4)
상제께서 十二월에 들어서 여러 공사를 마치시고 逆度를 조정하는 공사에 착수하셨도다. 경석, 광찬, 내성은 대흥리로 가고 원일은 신 경원의 집으로 형렬과 자현은 동곡으로 떠났도다. 상제께서 남아 있는 문 공신, 황 응종, 신 경수들에게 가라사대 “경석은 誠 敬 信이 지극하여 달리 써 볼까 하였더니 스스로 청하는 일이니 할 수 없도다”고 일러주시고 또 “본래 동학은 輔國安民을 주장하였음은 후천일을 부르짖었음에 지나지 않았으나 마음은 각기 王侯將相을 바라다가 소원을 이룩하지 못하고 끌려가서 죽은 자가 수만명이라. 원한이 창천하였으니 그 신명을 그대로 두면 후천에는 逆度에 걸려 정사가 어지러워지겠으므로 그 신명들의 해원 두목을 정하려는 중인데 경석이 십 이제국을 말하니 이는 자청함이니라. 그 부친이 동학의 중진으로 잡혀 죽었고 저도 또한 동학 총대를 하였으므로 이제부터 동학 신명을 모두 경석에게 붙여보냈으니 이 자리로부터 王侯將相의 해원이 되리라” 하시고 종이에 글을 쓰시며 외인의 출입을 금하고 “훗날에 보라.금전소비가 많아질 것이며 사람도 갑오년 보다 많아지리라. 풀어두어야 후천에 아무 꺼리낌이 없느니라”고 말씀을 맺으셨도다.(공사 2-19)
또 상제께서 가라사대 “지기가 통일되지 못함으로 인하여 그속에서 살고 있는 인류는 제각기 사상이 엇갈려 제각기 생각하여 반목 쟁투하느니라. 이를 없애려면 해원으로써 만고의 신명을 조화하고 천지의 도수를 조정하여야 하고 이것이 이룩되면 천지는 개벽되고 선경이 세워지리라” 하셨도다.(공사 3-5)
김 형렬은 심법을 받은 후부터 수련을 계속하다가 九월 十九일에 끝마쳤도다. 이 날에 상제께서 형렬에게 가라사대 “그만 그칠지어다. 다른 묘법은 때가 이르면 다 열어주리라” 하시니라. 상제께서 모든 천지공사에 신명을 모으고 흩어지게 하는 일과 영을 듣는 일에 무리들을 참관케 하고 또 풍우를 짓게도 하시면서 그 참관한 공사의 조항을 일일이 묻고 그 본 바의 확실 여부를 시험하셨도다. 이로써 상제께서 자신을 좇는 무리들에게 공사의 확신을 얻게 하셨도다.(교운 1-8)
상제께서 어느 날 김 형렬에게 가라사대 “서양인 利瑪竇가 동양에 와서 지상 천국을 세우려 하였으되 오랫동안 뿌리를 박은 유교의 폐습으로 쉽사리 개혁할 수 없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도다. 다만 천상과 지하의 경계를 개방하여 제각기의 지역을 굳게 지켜 서로 넘나들지 못핟건 신명을 서로 왕래케 하고 그가 사후에 동양의 文明神을 거느리고 서양에 가서 文運을 열었느니라. 이로부터 지하신은 천상의 모든 묘법을 본받아 인세에 그것을 베풀었노라. 서양의 모든 문물은 천국의 모형을 본딴 것이라” 이르시고 “그 문명은 물질에 치우쳐서 도리어 인류의 교만을 조장하고 마침내 천리를 흔들고 자연을 정복하려는 데서 모든 죄악을 끝임없이 저질러 신도의 권위를 떨어뜨렸으므로 천도와 인사의 상도가 어겨지고 삼계가 혼란하여 도의 근원이 끊어지게 되니 원시의 모든 신성과 불과 보살이 회집하여 인류와 신명계의 이 겁액을 구천에 하소연하므로 내가 西洋 大法國 天啓塔에 내려와 천하를 大巡하다가 이 東土에 그쳐 母岳山 金山寺 三層展 彌勒金佛에 이르러 三十年을 지내다가 최 제우에게 濟世大道를 계시하였으되 제우가 능히 유교의 전헌을 넘어 대도의 참 뜻을 밝히지 못하르모 甲子年에 드디어 천명과 神敎를 거두고 辛未年에 강세하였노라”고 머말씀하셨도다.(교운 1-9)
종도들이 모인 곳에서 상제께서 三월 어느날 가라사대 “지금은 신명 해원시대니라. 동일한 五十년 공부에 어떤 사람을 해원하리오. 최 제우는 경신에 득도하여 侍天呪를 얻었는 바 기유까지 오십년이 되니라. 충남 비인 사람 김 경흔은 五十년 공부로 태을주를 얻었으되 그 주문을 신명으로부터 얻을 때에 그 주문으로써 많은 사람을 살리라는 명을 받았느니라”고 말씀을 하시고 이어서 “이 두 사람 중의 누구를 해원하리오”라고 물으시니 시좌하고 있던 종도들 중에서 광찬이 “상제님의 처분을 기다리나이다”고 아뢰니 상제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시천주는 이미 행세되었고 태을주를 쓰리라” 하시고 읽어 가르치시니 그 주문은 이러하였도다. [훔치훔치 태을천상원군 훔리치야도래 훔리함리사바아](교운 1-20)
상제께서 하루는 종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부안지방 신명을 불러도 응하지 않으므로 사정을 알고자 부득히 그 지방에 가서 보니 원일이 공부할 때에 그 地方神들이 호위하여 떠나지 못하였던 까닭이니라. 이런 일을 볼진대 공부함을 어찌 등한히 하겠느냐” 하셨도다.(교운 1-63)
종도들에게 칠성경을 외우게 하시고 도주께서 대원사에 들어가셔서 백일 도수를 마치셨도다. 마치신 날이 바로 신유년 칠월 칠석날이라, 그때에야 종도들이 칠성경을 외운 뜻을 깨달으니라. 그들을 보시고 도주께서 “이곳이 바로 상제께서 천지신명을 심판한 곳이니라. 아직 응기하여 있는 것을 내가 풀었노라”고 말씀하셨도다.(교운 2-21)
계해년 九월에 이를 마치시고 도주께서는 十月 중순까지 청도의 적川寺 도솔암에 있는 칠성각 뒤에 돌단을 높이 쌓고 二十四방위를 정하고 천지신명을 응기케 하고 공부시간은 저녁 일곱시부터 다음날 아침 여섯시로 정하여 일분 일초도 어김없이 넉달 동안 계속하셨는데 낮에는 공부 행하실 때 쓰실 글을 많이 쓰셨도다. 이때에 공부는 단도수라 하셨으며 시종한 사람은 배문걸, 이우형, 박 민곤이니라.(교운 2-28)
상제께서 몇 달동안 객망리 앞 주막에서 천지공사를 행하시니 종도가 많아지니라. 그 덕에 주막집 주인 吳東八이 돈을 모았는데 그후 상제께서 비용이 떨어진 것을 알고 배척하는지라. 모든 종도가 그 주인의 무례에 노하니 상제께서 종도들의 언행을 억제하고 “무식한 사람이 어찌 예절을 알겠느뇨. 내가 무례에 성을 내면 신명이 그에게 큰 화를 줄 것이니 대인의 과차에 큰 덕을 베풀지 못하고 도리어 화를 끼친다면 그것이 무엇이 되리오”하고 타이르셨도다.(교법 1-17)
신명은 탐내어 부당한 자리에 앉거나 일들을 편벽되게 처사하는 자들의 덜미를 쳐서 물리치나니라. 자리를 탐내지 말며 편벽된 처사를 삼가하고 덕을 닦기를 힘쓰고 마음을 올바르게 가지라. 신명들이 자리를 정하여 서로 받들어 앉히리라.(교법 1-29)
상제께서 박공우가 아내와 다투고 구릿골을 찾아왔기에 별안간 꾸짖으시기를 “나는 독하면 천하의 독을 다 가졌고 선하면 천하의 선을 다 가졌노라. 네가 어찌 내 앞에 있으면서 그런 참되지 못한 행위를 하느뇨. 이제 천지신명이 운수자리를 찾아서 각 가정을 드나들면서 기국을 시험하리라. 성질이 너그럽지 못하여 가정에 화기를 잃으면 신명들이 비웃고 큰 일을 맡기지 못할 기국이라하여 서로 이끌고 떠나가리니 일에 뜻하는 자가 한시라도 어찌 감히 생각을 소홀히 하리오” 하셨도다.(교법 1-42)
트집을 잡고 싸우려는 사람에게 마음을 누그리고 지는 사람이 상등 사람이고 복된 사람이니라. 분에 이기지 못하여 어울려 싸우는 자는 하등 사람이니 신명의 도움을 받지 못하리라. 어찌 잘 되기를 바라리오.(교법 1-55)
서교는 신명의 박대가 심하니 감히 성공하지 못하리라.(교법 1-66)
사람마다 그 닦은 바와 기국에 따라 그 사람의 임무를 감당할 신명의 호위를 받느니라. 남의 자격과 공부만 추앙하고 부러워하고 자기 일에 해태한 마음을 품으면 나의 신명이 그에게 옮겨가느니라.(교법 2-17)
속담에 “무척 잘 산다” 이르나니 이는 척이 없어야 잘 된다는 말이라. 남에게 억울한 원한을 짓지 말라. 이 것이 척이 되어 보복하나니라. 또 남을 미워하지 말라. 사람은 몰라도 신명은 먼저 알고 척이 되어 갚나니라.(교법 2-44)
상제께서 “나는 하늘도 뜯어고치고 땅도 뜯어고치고 사람에게도 신명으로 하여금 가슴 속에 드나들게하여 다 고쳐 쓰리라. 그러므로 나는 약하고 병들고 가난하고 천하고 어리석은 자를 쓰리니 이는 비록 초목이라도 기운을 붙이면 쓰게되는 연고이니라” 말씀하셨도다.(교법 3-1)
천지에 신명이 가득차 있으니 비록 풀잎 하나라도 신이 떠나면 마를 것이며 흙 바른벽이라도 신이 옮겨가면 무너지나니라.(교법 3-2)
이제 하늘도 뜯어고치고 땅도 뜯어고쳐 물샐 틈없이 도수를 짜 놓았으니 제한 도에 돌아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 또 신명으로 하여금 사람의 뱃속에 출입케 하여 그 체질과 성격을 고쳐 쓰리니 이는 비록 말뚝이라도 기운을 붙이면 쓰임이 되는 연고이니라. 오직 어리석고 가난하고 천하고 약한 것을 편이하여 마음과 입과 뜻으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죄를 조심하고 남에게 척을 짓지 말라. 부하고 귀하고 지혜롭고 강권을 가진 자는 모두 척에 걸려 콩나물 뽑히듯 하리니 묵은 기운이채워 있는 곳에 큰 운수를 감당키 어려운 까닭이니라. 부자의 집 마루와 방과 곡간에는 살기와 재앙이 가득 차있나니라. (교법 3-4)
지금은 신명 시대니 삼가 힘써 닦고 죄를 짓지 말라. 새 기운이 돌아 닥칠 때에 신명들이 불칼을 들고 죄 지은 것을 밝히려 할 때에 죄 지은 자는 정신을 잃으리라.(교법 3-5)
상제께서 깊은 밤중에 태인읍에서 종도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서 공사를 행하신 후에 그들에게 “이 공사에 천지 대신명이 모였으니 그들이 해산할 때에 반드시 참혹한 응징이 있으리라”고 말씀을 마치시자 뜻밖에 태인읍으로부터 군중의 고함소리가 일어나는지라. 종도들이 상제를 모시고 산에서 내려와 이를 살피니 군중이 辛敬玄의 주막에 뛰어들어가서 세간살이와 술 항아리를 모두 부쉈도다. 원래 신경현은 술 장사를 시작한 이후 읍내 청년들의 호감을 얻어서 돈을 모았으나 그 청년들이 궁핍하면 냉대하므로 그들이 그의 몰인정에 분개하여 습격한 것이었도다. 그 이튿날 상제께서경현의 주막에 가시니 그 부부가 서로 울면서 다른 곳으로 이사하려 하거늘 상제께서 아무 말씀을 않고 경현의 부인에게 술을 청하였으나 그 여인이 “술 항아리를 모두 깨었으니 무슨 술이 있사오리까”고 말하거늘 가라사대 “저 궤속에 감추어 둔 소주를 가져오라” 하시니라. 그 여인은 당황하여 “선생님 앞에서는 조금도 숨길 수 없나이다”고 말하면서 적은 병에 담겨있는 소주를 따라 올리니 상제께서 경현 부부에게 “모든 일에 옳고 그름이 다 나에게 있는 것이지 위치에 의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후로 모든 일을 잘 생각하여 할지어다. 그렇게 하면 앞 길이 다시 열리고 영업이 흥성하리라”고 타이르시니라. 이 부부는 타이르신 대로 이사를 중지하고 허물을 고치니 장사를 계속하더니 얼마 안 되어 영업이 다시 흥성하여지니라.(교법 3-18)
조선과 같이 신명을 잘 대접하는 곳이 이 세상에 없도다. 신명들이 그 은혜를 갚고자 제각기 소원에 따라 부족함 없이 받들어 줄 것이므로 도인들은 천하사에만 아무 꺼리낌 없이 종사하게 되리라.(교법 3-22)
상제께서 교훈하시기를 “인간은 욕망을 채우지 못하면 분콩이 터져 큰 병에 걸리느니라. 이제 먼저 난법을 세우고 그후에 진법을 내리나니 모든 일을 풀어 각자의 자유 의사에 맡기노니 범사에 마음을 바로하라. 사곡한 것은 모든 죄의 근본이요. 진실은 만복의 근원이 되니라. 이제 신명으로 하여금 사람에게 임하여 마음에 먹줄을 겨누게 하고 사정의 감정을 번갯불에 붙이리라. 마음을 바로 잡지 못하고 사곡을 행하는 자는 지기가 내릴 때에 심장이 터지고 뼈마디가 퉁겨지리라. 운수야 좋건만 목을 넘어가기가 어려우리라.”(교법 3-24)
상제께서 이런 말씀을 종도들 앞에서 하신 적이 있느니라. “내가 출세할 때에는 하루 저녁에 珠樓 寶閣 십만간을 지어 각자가 닦은 공덕에 따라 앉을 자리에 앉혀서 신명으로 하여금 각자의 옷과 밥을 마련하게 하리라. 못 앉을 자리에 앉은 자는 신명들이 그 목을 끌러내리라.”(교법 3-44)
이듬해 봄 기후가 순조로와 보리농사가 잘 되어 풍년의 징조가 보이는지라.농부들과 김보경, 장흥해는 지난 가을에 상제께서 들판을 보시고 보리 농사가 실패될 것을 염려하시기에 보리 농사를 짓지 아니한 형렬을 비웃으니라. 이것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그것은 신명공사에서 작정된 것인데 어찌 결실하기도 전에 농작을 예기할 수 있으리오” 하시고 종도들의 성급함을 탓하시니라. 五月 五日에 폭우가 쏟아지니라. 보리이삭에 병이 들어 이삭이 마르기 시작하더니 결실이 되지 않는도다. 쌀값이 뛰고 보리 수확이 없게 되자 농부들이 상제의 말씀을 깨닫고 감복하기만 하였도다.(권지 1-6)
상제께서 언제나 출타하시려면 먼저 글을 써서 신명에게 治道令을 내리시니라. 상제께서 계셨던 하운동은 원래 산중이라 길이 매우 좁고 험하고 수목이 우거져 길에 얽혀 있느니라. 치도령을 내리시면 여름에는 나무에 내린 이슬을 바람이 불어 떨어뜨리고 겨울에는 진흙 길이 얼어붙기도 하고 쌓인 눈이 녹기도 하였도다.(권지 1-9)
상제께서 아우 永學에게 부채 한 개에 학을 그려주시고 “집에 가서 부치되 너는 칠성경의 무곡 파군까지 읽고 또 大學을 읽으라. 그러면 도에 통하리라.”고 이르셨도다. 영학이 돌아가는 길에 정남기의 집에 들르니 그 아들도 있었는데 아들이 부체를 탐내어 빼앗고 주지 않으니라. 영학이 그 부채의 내용 이야기를 말하니 아들이 더욱 호기심을 일으켜 주지 않으니 하는 수 없이 영학은 빼앗기고 집에 돌아왔도다. 아들은 부채를 부치고 대학의 몇 편을 읽지도 않는데 신력이 통하여 물을 뿌려 비를 내리게 하며 신명을 부리게 되는 지라. 남기는 기뻐하여 자기 아들로 하여금 상제의 도력을 빼앗고자 아들과 함께 하운동에 가는데 때마침 상제께서 우묵곡로부터 하운동에 오시는 길이었도다. 남기의 아들이 상제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겁을 먹고 도망가거늘 남기가 붙들고 와서 상제께 배알하니 상제께서 그의 속셈을 꿰뚫고 남기의 무의함을 꾸짖으시며 그 아들의 神力을 다 거두신 후에 돌려 보내셨도다.(권지 1-15)
그러므로 상제께서 오셔서 천지도수를 정리하고 신명을 조화하여 만고에 쌓인 원한을 풀고 상생의 도를 세워 후천 선경을 열어놓으시고 신도를 풀어 조화하여 도수를 굳건히 정하여 흔들리지 않게 하신 후에 인사를 조화하니 만민이 상제를 하느님으로 추앙하는 바가 되었도다.(예시 1-9)
상제게서 삼계가 착란하는 까닭은 명부의 착란에 있으므로 명부에서의 상극도수를 뜯어고치셨도다. 이로써 비겁에 쌓인 신명과 창생이 서로 상생하게 되었으니 대세가 돌려 잡히리라.(예시 1-10)
상제께서 하루는 김형렬에게 “삼계 대권을 주재하여 천지를 개벽하고 後天仙境을 열어 고해에 빠진 중생을 널리 건지려하노라.”라고 말씀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제 말세를 당하여 앞으로 無極大運이 열리나니 모든 일에 조심하여 남에게 척을 짓지말고 죄를 멀리하여 순결한 마음으로 天地公庭에 참여하라.” 고 이르시고 그에게 신안을 열어주어 신명의 회산과 聽令을 참관케 하셨도다.(예시 1-17)
또 말씀하시기를 “신농씨(神農氏)가 농사와 의약을 천하에 펼쳤으되 세상 사람들은 그 공덕을 모르고 매약에 신농유업(神農遺業)이라고만 써 붙이고 姜太公이 부국강병의 술법을 천하에 내어놓아 그 덕으로 대업을 이룬 자가 있되 그 공덕을 앙모하나 보답하지 않고 다만 디딜방아에 庚申年庚申月庚申日姜太公造作이라 써 붙일 뿐이니 어찌 도리에 합당하리요. 이제 해원의 때를 당하여 모든 신명이 신농과 태공의 은혜를 보답하리라“ 고 하셨도다.(예시 1-22)
상제께서 계묘년에 종도 김형렬과 그외 종도들에게 이르시니라. “조선 신명을 서양에 건너보내어 역사를 일으키리니 이 뒤로는 외인들이 주인이 없는 빈집 들듯 하리라. 그러나 그 신명들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제 집의 일을 제가 다시 주장하리라.”(예시 1-25)
상제께서 매양 뱃소리를 내시기에 종도들이 그 연유를 여쭈니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우리나라를 상등국으로 만들기 위해 서양 신명을 불러와야 할지니 이제 배에 실어오는 화물표에 따라 넘어오게 됨으로 그러하노라.” 고 하셨도다.(예시 29)
또 이르셨도다.“부녀자들이 제 자식이라도 비위에 맞지 아니하면 급살맞으라고 폭언하나니 이것은 장차 급살병이 있을 것을 말한이니라. 하루 짚신 세켤레를 닿기면서 죽음을 밟아 명자를 구하러 다니리니 이렇게 급박할 때 나를 믿으라고 하면 따르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으리오. 그러므로 너희는 시장판에나 집회에 가서 내말을 믿으면 살 길이 열릴 터인데 하고 생각만 가져도 그들은 모르나 그들의 신명은 알것이니 덕은 너희에게 돌아가리라.”(예시 43)
이런 일이 있은 후 어느날에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오늘 청국 만리장 신명이 오리니 잘 대접하여야 하리라.”고 이르셨도다.(예시 69)
4. 지침에서 신명과 관련된 구절
도인들은 항상 어디서나 신명의 수찰이 있음을 명심하고 속임과 거짓이 없이 도인의 본분을 바로 지켜야 한다. <80.7.22>p39
예(禮)라는 것은 사람으로서 일생동안 움직일 때나, 정지할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누워 있을 때(起居動靜)를 가리지 않고 항상 정도를 넘는 일이 없이, 공경심으로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여 주는 인도(人道)를 갖추는 것을 이른다. “도덕과 인의(仁義)도 예가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풍속도 예가 바로 서지 않으면 갖추어지지 않는다. 부자 형제도 예가 아니면 윤리가 정립되지 않는다. 스승을 섬기고 학문에 힘쓰는 일도 예가 아니면 바른 수업(受業)이 될 수 없다. 군률(軍律)을 세우고 관직에 있어서 법을 행하는 것도 예가 아니면 위엄이 서지 않는다. 조상을 받들고 신명(神明) 앞에 치성을 드리는 일에도 정성의 예를 갖추어야 하므로 사념(邪念)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공경심을 가져야 한다.” <83.5.1>p68
신명공판(神明公判)이란 운수를 받는 자리에 가서 있는 것이 아니고 수도 과정에서 먼저 받게 되므로, 상제께서도 “나는 해마(解魔)를 위주하므로 나를 따르는 자는 먼저 복마(伏魔)의 발동이 있으니 복마의 발동을 잘 견디어야 해원하리라.”고 타이르셨으니 깊이 명심하라. <80.1.3>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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