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싫지 않은 앙탈을 부려 보았지만 사내는 막무가내였다.
우악스런 완력이 블라우스의 단추를 온통 뜯어버릴 기세여서 여자는 이내 체념을 했다.
사내의 능숙한 손길이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걷어내자 율동적인 곡선이 부끄럽게 노출되었다.
"아이 참.."
부끄러운 듯 달싹거리는 입술마저 사내의 입이 우악스럽게 봉해 버렸다.
"아.."
사내의 숨결이 거칠어지면서 여자는 사내의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들의 만남은 늘상 이렇게 시작되었다.
허공을 쫓던 여자의 시선이 문득 멎었다.
어울리지 않는 액자 속의 그림이 여자의 시야 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그건 정말 어설픈 그림이었다.
도심 한가운데에 자리한 특급 호텔의 특실에 어울리는 담황색의 우아한 커튼이나 소파 등의 고급스런 실내 장식과는
격이 지는 싸구려 풍의 그림을 담고 액자는 늘상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여자는 그 액자를 볼 때마다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마치 사내와 자신의 관계처럼 어설픈 그림이었다.
연하의 사내..
더구나 이방인인 그와는 호텔방에서의 밀월로만 이어져 오는 사이였다.
언제부터였을까, 여자에게 도뚜렷한 기억은 없었다.
그녀의 의상실에 출입하며 누나처럼 따르던 사내와의 관계가 이렇게 어설픈 관계로 발전된 것이..
여자는고개를 저었다.
청산하자.
마음속으로 다져보지만 30대 중반의 성숙할대로 성숙한 몸은
사내만 떠올려도 후끈 달아올라 시위를 떠난 살처럼 걷잡을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그녀였다.
문득 액자 속의 어설픈 그림이 격렬한 요동을 했다.
우산을 받쳐 든 그림 속의 중세 여인이 분해를 하듯 와해되는 순간 그녀는 격정의 나락 속으로 빠져 들었다.
"미친 년!"
거울 속의 자신을 향해 추 마담은 나직한 탄식을 터뜨렸다.
한바탕의 격정이 휘몰고 간 후의 나른함이 얼굴에서 묻어 나왔다.
광란하듯 불사른 열정의 찌꺼기가 아직도 몸 속을 맴도는 느낌에 추 마담은 흠칫 몸을사렸다.
야릇한 흥분과 함께 주책스러운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녀는 불현듯 떠오르는 갖가지 상념들을 털어버리듯 부지런히 콜드를 찍어발랐다.
"누님!"
샤워를 마친 신타로가 불쑥 거울 속으로들어왔다.
추 마담의 손길이 주춤 멎었다.
딱 벌어진 신타로의 상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가슴 속에서 새롭게 일기시작하는 충동을 느끼며 추 마담은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어떻게 됐습니까?"
"뭐가?"
그녀는 짐짓 외면하면서 손놀림을 계속했다.
"지난번에 부탁드렸던 공작 말입니다."
"으흥?"
추 마담이 콧소리를 냈다.
이제서야 조금씩 안정이 되는 그녀였다.
"추진 중이야."
"서둘러야겠어요."
"음?"
추 마담의 손길이 다시 멎었다.
"서두르다니?"
"후.."
담배를 붙여 문 신타로가 연기를 한모금 길게 내뿜었다.
"일본에서 새로운 정보가 들어와 있어요. 금성사 쪽에서 모종의 움직임이 있다구."
"그렇다구 뭐.."
"쉽게 넘길 일이 아닙니다."
"천하의 신타로상답지 않게 왜 그래? 그까짓 금성사의 조무래기들이 움직여 봤자지."
"그런게 아니라니까요."
"응?"
"이번엔 사정이 다릅니다."
"무슨 소리야?"
추 마담의 손놀림이 다시 멎었다.
"두고 보시면 알게 됩니다."
"점점 모를 소리만 하네."
"후.."
신타로가 동그란 연기를 허공으로 만들어 날렸다.
"이제 한판 멋지게 벌어질 겁니다!"
여유낙락하는 거울 속의 신타로를 추마담이 빤히 올려다 보았다.
"난 이해를 못하겠어. 그까짓 금성사 정도를 가지고 신타로상이 기를 쓰고 덤비고 있으니."
"그까짓 게 아니라니까요!"
"호호.. 금성사가 그렇게 대단해?"
추 마담이 빙긋 웃었다.
"누님답지 않게 왜 그러세요? 오늘날의 무역은 전쟁입니다. 전쟁!
죽느냐,죽이느냐! 이런 아귀다툼에서 살아남는 길은 오직 정보 뿐입니다.
남들보다 1분1초라도 빠른 정보 말입니다!"
"누가 그걸 모른대?"
"오늘날 처럼 치열한 정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어느 한가지라도 소홀히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건 이세상의 모든 정보예요.
영국의 대처수상이 아침 몇 시에 잠자리에 일어났는데 침대에 노란 털이 몇 개 떨어져 있었다든지,
레이건 대통령이 아침 식사 증상인지, 아니면 노인병의 시초 증상인지,
주치의는 어떤 진단을 내렸는데 백악관은이 사실을 은폐하려 한다는 이런 사소한 일상의 정보까지 필요하다 이겁니다."
추 마담은 더욱 모를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금성사도 그런 범주에 끼인다는거야?"
"하하.. 두고 보시라니까요!"
"......?"
"정확한 소식통에 의하면 바로 어제 저녁 일곱 시에 금성사 그룹 사장단 회의에 그룹의 사활이 걸린 중대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금성사 뿐만이 아니라 한국의 기업체로선 최초로 시도하는 엄청난 모험이란 겁니다.
꿈 치고는 야무진 꿈한번 꾼 셈이죠.
하지만 그게 어디 이를말입니까? 하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쥐가 고양이를 문다지 않습니까?
금성사가 바로 그런 꼴이죠. 막다른 코너에 몰린 새앙쥐!
우리는 그 새앙쥐가 벌이는 마지막 발악을 보면서 한번 즐겨보자 이 말입니다. 하하.."
추 마담의 동공이 크게 확대되었다.
그리고 신타로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실내를 크게 울렸다.
하늘은 금방 눈이라도 쏟아 놓을 듯회색으로 웅크려 있었다.
구자경 회장은 눈길을 돌려 고가도로를 내려다 보았다.
만리동에서 서울역을 가로질러 퇴계로로 이어지는 고가도로에는 차량들이 빽빽하게 밀린 채 정체 현상을 빚고 있었다.
1977년을 마감하는 거리의 세모 풍경은 구자경 회장의 가슴을 더욱 답답하게 내리눌렀다.
오늘은 돌아가신 선친의 기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창업주였던 선친의 뒤를이어서 럭키금성 그룹의 경영대권을 잡은 지 벌써 8년째나 되었다.
깊숙이 파묻힌 채 구자경 회장은 상념에젖어들고 있었다.
세월 참 빠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강산이 한번 변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야 비로소
그룹의 사활이 걸린 대모험에 뛰어들 결심을 했다는 사실이 설레임과 착잡함으로 변하여 가슴을 뿌듯하게 했다.
초창기 럭키금성 그룹은 '럭키', 이름 그대로 운이 좋았다.
1945년, 창업주 고 구인회 씨가 우리나라에서 무역업 등록 1호로 조선흥업사를 설립,
일본과 무역을 하다 실패하여 실의에 빠져 있을 때였다.
같은 고향 아랫마을(下村)에 살고 있는 허만정 씨가 아들을 데리고 부산에나타났다.
그는 실의에 빠져 있는 구인회에게 아들을 부탁하면서 공동투자를 제의했다.
그 아들이 당시 24세의 청년인 허준구씨(현 럭키금성그룹 부회장)였고,
만석군이었던 허만정 씨가 출자한 금액은 조선흥업사 자본금의 4분의 1에 달했었다.
용기 백배한 구인회 씨가 무역업에서 제조업으로 사업 방향을 바꾸기로 결심하고 사업 대상을 물색할 즈음,
동생 구정회씨가 당구장에서 우연히 만난 화장품 기술자 김준환 씨를 데리고 왔다.
화장품 기술의 마술사라는 김준환 씨를만나는 순간 구인회 씨의 눈은 어떤 영감으로 번뜩거렸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1945년 12월 부산 대신동의 초라한 판자집에서 럭키화학공업사가 발족되었고,
이것이 이 무렵 시중에 나오는 화장품은 보잘것없는 조잡한 것이어서 질은 말할 것도 없고 포장이나 양도 형편없었다.
구인회 씨는 진주에서 포목상을 할 때의 경험을 살려서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 내려고 애를 썼다.
크림, 병의 색깔, 모양,포장, 상표에 이르기까지 신경을 썼다.
새까만 병에 럭키 상표가 붙은 '크림'은 언제나 병이 가득 차 있었다.
해방 후의 사회적인 혼란 속에서도 제품이 나오자,
제품은 날개 돋힌 듯이 팔려 단번에 시장을 석권하여 떼돈을 벌게되었다.
6.25 사변이 일어난 후, 구인회 씨는 2차사업 확장 계획을 세웠다.
전황은 점점 불리하여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고향을 버리고 쫓겨온 사람들에게 화장품만을 팔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더우기 시설 투자가 별로 들지 않던 화장품 제조인지 너도나도 공장을 지어 화장품 제조회사 과잉 사태를 빚고 있었다.
소비자는 한정되어 있는데 공급이넘쳤다.
질이 나쁜 것은 물론, 급기야는 럭키 상표를 도용한 가짜 화장품까지 범람했다.
화장품업계의 전망은 점점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전란이 최고도에 달한 50년 가을,
구인회씨는 '플라스틱'을 가공하는 두 대의 사출성형기를 주문했다.
남들은 제주도나 일본으로 피난을 가지 못해 안절부절 하고있을 때 미국에 기계 도입을 발주했던것이다.
설치하여 공장을 차리고 우선 빗을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곧 이어 비누갑, 세수대야,식기류 등의 일용 잡화를 만들어 냈다.
크림' 제조업을 할 때도 그랬듯이'플라스틱' 공업도 제대로 적중한셈이었다.
'플라스틱' 공업의 활용 분야는 날로 넓혀져 갔다.
전쟁 중에는 주로 일상 생활품 분야에만 사용되던 것이 전쟁이 끝나자 건설 자재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휴전이 성립된 후 전화 복구와 경제건설은 요원의 불길처럼 산업 자재에 대한 수요를 불러 일으켰다.
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농어촌에도, 건설, 광공업 등 산업부문에서도 이 '플라스틱' 자재는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되어 갔다.
다시 말하면 목재나 사용하던 산업이 휴전이 성립된 전후였다고 할 수 있을것이다.
그리고 '콜게이트'라는 미국제 치약이 판을 치고 있을 때 등장한 '럭키치약'은 럭키를 재벌로 도약시킨 기폭제가 되었다.
1956년 11월 '럭키'의 제 3차 확장이단행되었고, 그 첫 시도가 금성사의 전신인 금성산업의 설립이었다.
금성산업에서는'소켓', '플러그', '캡' 등 각종 전기 부품및 식기류를 제조했다.
금성산업이 이러한 생산업종을 만들어 내는 동안 구인회 씨는 다각도로 그 생산 전망을 분석했다.
열경화성수지 메이커로 하느냐, 전기 부속메이커로 나가느냐를 두고 며칠을 생각했다.
그 결과 인구의 증가, 경제 성장과 주민 판단했다.
더구나 생활 안정으로 인한 문화생활 등을 고려할 때
'수지' 메이커보다 오히려 전기 부품 쪽이 훨씬 전망이 밝을것으로 판단했다.
1959년 9월 말, '금성사'로 발전적 개편을 한 후 얼마 안 돼 국산 '라디오'가 국내 최초로 생산됐다.
금성 마크가 선명히찍힌 '라디오'가 시중에서 판매되자,
외제'라디오'만 알고 있던 소비자들을 놀라게함과 동시에 인기를 끌었고,
뒤이어 전기,선풍기, 전축에서 드디어 전기 냉장고,텔레비전을 내어놓기에 이르러
금성사는 가히 우리나라 전기, 전자의 대 메이커로 부각됐다.
크림 제조업으로 출발하여 플라스틱 공업을 일으켜 도약의 발판을 만들었고,
금성사를 설립하여 반석위에 올려 놓았고 제 4차 사업 확장 계획에 전력 투구를했다.
그것이 호남 정유였다.
60년대에 들어서서 한국의 산업 판도가 획기적으로 변모하자 유류의 수요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석유 한방울 나오지 않는 나라에서,
막대한 기름을 외국의 완제품으로 감당한다는 것은 이만저만한 외화 소비가 아니었다.
현 상태가 그대로 지속된다면,
수출이 아무리 늘어도 그 수출고와 유류 도입고가 맞먹어 무역수지 타산이 안 맞을 수 밖에 없었다.
그때 대한 석유공사가 울산 공장을 가동시켜 석유 정제를 하고는 있었지만
그시설만으로 도저히 국내 수요를 채워 줄 수 없었다
공장을 건설하기로 결정하여 그 수요자 선정에 나섰다.
정부가 제2정유공장을 민간 기업에 떠맡기기로 결정하자 경제계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제2정유 공장의 실수요자야말로 우리나라 최대의 재벌이 될 것이다.-
재계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제2정유공장의 실수요자로 한국화학, 롯데그룹, 삼양개발, 판본그룹, 한양그룹
그리고럭키금성그룹 등이 신청을 했다.
그런데, 구인회 씨는 이미 일년 전부터 용이주도하게 사업 계획을 꾸며
완벽한 서류를 다듬었을 뿐만 아니라 건설부지까지 확보해 두었다.
그 부지가 전라남도의 유수한 항구인 여수였는데,
여수항은 그총선거를 앞두고 고개를 들기 시작했던 '호남푸대접'론을 봉쇄하는 데도 기여를 할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수요자로 신청한 기업들 모두가 만만찮은 라이벌들이었고,
갖가지 루머가 나돌았으나 막상 뚜껑을 여는 순간, 그 날은 럭키금성 그룹 최고의 럭키데이가 되었다.
"장사꾼이 돈을 번다는 것은 소비자가있기 때문이다. 그 소비자를 깔보아서는 안된다.
소비자를 깔보면 미움을 사게 되고, 그 미움은 장사꾼의 손해로 돌아온다."
"돈이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것이다. 절대로 의타심을 버리고 또 골육상잔하지 말아라."
럭키금성 그룹의 생성 과정과 앞으로의정세 전개를 모두 헤아려서 구인회 씨가 그 재계의 부러움을 한몸에 지니고
재벌의 정상에까지 올랐던 구인회 씨는 1969년12월 31일 홀연히 세상를 떠났다.
그 때 럭키금성 그룹은 연간 외형고 3천억원, 총자산 1천억 원, 회사 수 12개,
제품생산 품목 4천 1백 29개, 종업원 2만 명을거느린 국내 굴지의 재벌 그룹으로 성장해 있었다.
2대 구자경 회장이 취임하면서 럭키금성 그룹은 책임 경영 시대가 시작되었다.
각 회사 사장들에게 책임을지우고 소신껏 경영을 하게 한 것이다.
창업주 구인회 회장이 직접 그룹을 통괄하며 '친정체계'를 다져 왔던 것과는 경영 패턴이 크게 달라진 셈이다.
모험을 싫어하는 구자경 회장의 개인적인 성격이
확대보다는 기존의 모기업들이 세포분열을하는 방향으로 방향선회를 했다.
그로부터 8년.
구자경 회장대에서도 럭키금성 그룹은 꾸준히 성장,
총 매출액 4조원, 총 자산2천3백 15억원, 수출 15억 1천만 달러, 기업수 35개, 종업원 4만 5천명을 거느리게돼
국내 굴지의 재벌임을 다시 한번 과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룹의 번영을 구가하게 된 이시기에 구자경 회장은 그룹의 사활을 건 대모험을 시도하려 하고 있었다.
아니 그런 절박한 상황으로 몰리고 있었던 것이다.
1977년 말을 전후하여 세계 경제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리고 있었다.
75년의 1차 오일 쇼크 이후 세계 경제는 그 여파로
국내 경제계 역시 최대의 부도율 발생과 함께 침체의 수렁에 빠져 좀처럼 회생할 기미가 없었다.
TV, 냉장고, 선풍기 어느것 하나 속시원하게 팔리는 게 없었다.
도산하는 중소기업이 급증하고 대기업에도 부도 위협이 끊일 날이 없었다.
금성사역시 그런 위협에서 제외된 것은 아니었다.
비록 모험을 싫어하는 구자경 회장이지만 해외에서 국내 불황의 돌파구를 찾아 커버한다는 경영전략에는 이견이 없었다.
"이상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세계 무역고중에서 '카운터 트레이드'에 의한 무역량이 30%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최근들어 세계 경제의 추세이자 흐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동구권에서 시작된 바터제가 선진국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하시고,
따라서 우리도 이에 대한 대응책을 시급히 세우지 않으면 안 될 단계에 와 있다는 얘깁니다."
박승찬 사장이 마지막 차트를 넘기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박승찬과 더불어 생산, 영업, 경영의 엑스파트인 구자경과 허신구(당시 럭키사장)가 동조의 눈빛을 띠었다.
"박 사장."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겨 있던 구자경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네 회장님."
"카운터 트레이드의 현황을 좀 더 들어보제이."
"네, 그럼 최근의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박승찬은 기침을 뱉으며 말을 계속했다.
"자동차 메이커에 부품의 수입관세 면제와의 교환 조건으로 1989년까지 총액 210억 달러의 자동차를 수출하기로 했습니다.
또 이란 정부는 뉴질랜드의 식육심의회를 설득해서 이란 원유와 바터로 약 2억 달러 상당의 양고기를 매입하기로 한 겁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허신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영업의 귀재로 불릴 만큼 감각이 뛰어난 허신구는 그 큰 눈을 껌벅이며 박승찬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스웨덴 정부는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에서 전투기용 엔진을 수입하는 대신으로
제너럴 일렉트릭에 스웨덴제 공업제품을 매입하는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리고 '카운터 트레이드'는 직접적인 물물교환에만 그치지 않은 예도 있습니다.
그 예로 최근 제너럴 일렉트릭은 오스트리아와 컴퓨터 단층 촬영 장치의 대형 상담을 벌이다 패퇴 했습니다."
"원인은 뭐꼬?"
구자경이 박승찬의 말을 토막내며 다시물었다.
"네, 그 원인은 서독의 라이벌 회사 시멘스가
오스트리아 자회사의 증산에 의한 고용 확대를 오스트리아 정부에 약속하고 이 대형 상담을 채어갔기 때문입니다."
"음.."
구자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세계 각국의 대응책은 나와있습니까?"
이번엔 허신구가 물었다.
"네, 지금까지 소련이나 동구 제국이 카운터 트레이드의 상습범이었는데
중공, 멕시코, 브라질 같은 제 3세계와 캐나다, 스웨덴, 스위스 등의 선진공업국까지도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현 상태에서 가장 빠르게 대응하는국가는
역시 일본과 구주 등 동구 제국과의 무역으로 카운터 트레이드에 익숙해져 있는국가들입니다.
특히 일본의 상사는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살린 3국간 무역으로 세계적인 보호무역 추세를 뚫고 있고,
미국 기업들도 이젠 좋든 싫든간에 보증 상품을 인수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되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코비스천, 엔지니어링 등 미국의 제조 기업이 잇달아 수출 자회사를 설립하는 최근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 대응책을 세워야되겠노?"
"네.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우리 금성사도 이번 기회에 미국 시장에 네트워크를 확충해야 한다는 얘깁니다."
박승찬이 침을 꿀꺽 삼키며 얘기의 매듭을 지었다.
"미국 시장이라꼬?"
"네, 그렇습니다."
"아니 그럼 미국 같은 거대한 시장에 쿼터 제한 없이 진출할 수 있다는 얘기가?
그건 꿈같은 얘기 아니가? 그런 꿈이 과연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나?"
구자경은 언제나 처럼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몸짓을 했다.
"충분히 가능한 얘기로 믿습니다."
박승찬이 분명한 어조로 말을 잘랐다.
"그럼 청사진이나 한번 들어 보제이."
버리려는 듯 박승찬은 확신에 찬 표정을지었다.
"우리가 지금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는 바이어 브랜드 수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것입니다."
"아니, 박 사장."
"네, 회장님."
"바이어 브랜드 수출로 우리 그룹의 주력 상품인 전자 제품이 올해 1억 달러의 수출 신장을 했다 아이가!"
"그보다 중요한 건 바이어가 요구하는대로
우리 제품에 제니스, RCA 등의 상표를 붙여 파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수출신장이 되고있다카이!"
"그 수출신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박승찬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사실 아무리 수출 신장이 된다 하더라도 골드스타 제품에 RCA니 제니스니 하는
외국 브랜드를 붙이는 한은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벗어 날 수가 없었다.
골드스타 브랜드를 붙이지 않는 한 외국 시장에서 골드스타의 기술 수준을 인정받을 수는 없지 않은가.
또 언제까지 바이어 브랜드 수출에만 의존할 수 없지 않은가!
박승찬은 바로 여기에 바이어 브랜드 수출의 문제점이 있다고 파악하고 있었다.
구자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은 대책이 있습니까?"
허신구가 불쑥 끼어들었다.
"방법은 단 한 가지! 현재의 적자를 돌파구는 역시 수출 뿐입니다.
그리고 미국은 칼라 TV를 연간 일천 이백만 대나 먹어 주는 거대한 황금시장 입니다.
그런데 쿼터에 묶인 한국 제품의 시장 점유율은 고작 5% 안팎 입니다.
거기에 비해 흑백TV의 시장 점유율이 33.8%인 점을 감안하면 컬러 TV도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우리도 이번 기회에 미국 시장에 현지 판매법인을 설립하고 나아가서 현지 생산공장을 설립해야 합니다."
구자경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게 정말 가능하겠소?"
"네, 가능합니다."
박승찬은 확신에 가득찬 대답을 했다.
"1%의 가능성만 있어도 도전해야 합니다. 그냥 앉아서 불황의 태풍에 말려 들 수는없습니다."
구자경은 박승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모험을 싫어하는 구자경에게 박승찬은 고집스런 확신으로 대들고 있었다.
그래! 얼마나 우직한 브레인 들인가!
난공불락의 미국시장이지만 못 할 게어디 있는가!
구자경의 가슴속엔 잔잔한 감동이 차 오르고 있었다.
"좋데이. 내사마 박승찬이가 휘두른 도깨비 방망이에 얻어 맞은 것 같기도 하지만도,
우리라고 몬 할 것 뭐 있노.일본이 하는 거믄 우리도 할 수 있제. 한번 해보제이. 승찬이 지금부터 계속 밀고나가래이."
"감사합니다. 회장님."
미국은 컬러 TV를 연간 1천 2백만 대나 먹어 주고 있는 세계 최대의 수출로
미국 시장을 장악한 일본을 표적으로 해외로부터의 수입을 쿼터제로 규제하고 있었다.
일본을 표적으로 실시한 쿼터제였지만,
대만이나 한국까지 싸잡아 규제당한 것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래서 한국은 연간 200만 대 가까운 생산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대미 수출은20~30만 대 선으로 억제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도대체 1천만 대가 넘는 시장에 몇 십만대로 수출을 제한한다니 될 법이나 한말인가!
아무래도 일본에 당한 컬러 TV충격을 한국에 덮어씌우려 한다는 피해의식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일본의 전자업계가 미국에 현지공장을 서둘러 건설한 것은 한국보다 몇 배나
도시바, 히다찌, 마쯔시다, 샤프 등 유명기업이 미국의 각 주에 TV공장을 세운 것은 벌써 4~5년 전의 일이었다.
일본은 미국 업계가 수입 규제를 들고나오자마자 현지공장을 설립,
쿼터 규제 따위는 무시할수 있다는 자세로 미국 시장을 거의 독점할 수 있었다.
게다가 날렵하고 스마트한 새디자인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미국인들의 기호를 맞춰가며 무법자 마냥 행세해 왔었다.
그러니까 미국의 컬러 TV 쿼터제는 일본을 첫번째 과녁으로 실시되었다지만
결과적으로는 일본에게 배타적인 시장을안겨주고 만 꼴이 되었던 것이다.
국내업계는 이를 두고 비위가 상했지만 실력이 따르지 못하는 한 별 수가 없었다.
또 현지들 뿐 아니라 까다로운 노동 조건 때문에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해외에 현지 공장을 건설하였다가 그실패로 말미암아 대기업까지 휘청거린 사례가 왕왕 있었던 것이다.
구자경은 오래 전부터 집무실의 소파에서 물끄러미 흑송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소장하고 있는 10여 점의 난과 분재 중에서 수령 1백년의 흑송을 가장 아끼고 있었다.
수령이 1백년이 넘었는데도 높이가 50cm에 불과하고 옆으로 구부러진 가지와 잎새의 생김새가 독특한 흑송이었다.
꽃가꾸기를 유달리 좋아하는 천성 탓도 있었겠지만
구자경은 분재를 가꾸고 꽃과 함께 소일할때는 무엇보다 마음이 차분해지고 머리가 맑아졌다.
가장 아끼는 흑송을 어루만지며 중요한 사업 구상에 몰두하는 것도 이젠 한가지 버릇이 되어 버렸다.
'특공대의 인선을 어떻게 짤까?'
구자경은 시선을 허공에 던진 채 여러 인물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룹의 사활이 걸린 중요한 기획인 만큼 특공대 조직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했다.
인재를 적시 적소에 투입해야 하는것이 성공의 비결이 아닌가.
셀러리맨은 대체로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즉,'제너럴리스트(gendralist)','펑셔널리스트' 또는 '스페셜리스트'인 것이다.
제너럴리스트는 인사에서 생산, 구매,판매, 재무 등
여러 분야에 관한 것을 조금씩 고루 알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구매에 관한 것을 제너럴리스트보다 깊게 알고 있는 사람이 펑셔널리스트인 것이다.
구매 방법의 종류라든가 장단점에서 견적이나 입찰을 받는 요령, 원가 계산요령, 평가하는 요령에서
계약 체결 요령이나 구매 행정 등에 관해서 제너럴리스트보다는 깊이 알지만 스페셜리스트보다는 지식이나 경험이 얕다.
한편 스페셜리스트는 원가 계산이면 원가계산에 관해서는 사내의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깊이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소리치고 자랑할 만한 것은 그것 뿐이다.
그러니까 제너럴리스트는 폭은 넓지만 깊이가 없다고 할 때,
스페셜리스트는 깊이는 있지만 폭이 좁다는 얘기가 되고, 이 중간을 달리는 것이 펑셔널리스트인 셈이다.
기업의 인원 배치가 제너럴리스트를 정점으로 해서 그 밑에 약간의 평셔널리스트가 있고
다시 그 밑에 많은 스페셜리스트가 피라밋형으로 구성되는것이 바람직하듯이
특공대 역시 그런 분포가 바람직하지 않을까?
뚜_
인터폰 소리가 구자경의 상념을 퍼뜩 일깨웠다.
창 밖에는 벌써 어둠이 성큼 밀려와 있었다.
서울의 밤거리는 유난히 어둡다.
서울의 밤거리가 어두운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노용악은 오늘따라 더욱 어둡다고느꼈다.
-젠장! 대륙붕에서 석유나 콸콸 쏟아지면
-아니면, 전력이 소모되지 않고도 불야성처럼 휘황한 전등을 발명할 순없을까?
오늘따라 어두워 보이는 서울의 밤거리가 짜증스러웠다.
오일 쇼크 이후 에너지 절약이란 정책적인 차원에서 네온싸인이 금지되고 가로등마저 줄인 탓도 있겠지만,
서울의 야경에는 외국 관광객들이 오래전부터 비명을 질렀다.
도대체 밤이 너무 무섭다는 것이다.
밤은 인간에게 이상한 힘을 주고 안식과 충동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낮에는 보일수 없는 행동을 밤은 스스럼없이 충동과 욕구를 발산할 수 있는 기회를 주며 유혹을한다.
그래서 세계적인 대도시는 모두 밤이 낮보다 더욱 밝다.
막대한 관광 달러가 밤에 이루어진다는데..
서울의 어두운 밤거리가 관광 머니를 과연 어느 정도나 빨아들일까?
노용악은 쓴웃음을 지었다.
노용악이 벌써 30분 넘게 이덕주를 기다리고 있는 퇴계로의 대한극장 일대는
비교적 흥청거리는 번화가인데도 어둡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거리는 인파로 붐볐다.
어두운 거리에 이미 불감증으로 익숙하게 숙달된 사람들이 오직 77년의 마지막 날을 기념하고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축복을 받기 위해 이리 저리 휩쓸리며 흘러가고 있었다.
"본부장님!"
레스토랑의 문을 밀고 신동기가 어떻게 됐냐는 듯 급한 눈짓으로 물어왔다.
30분이 넘도록 다소곳이 앉아 있는 신현주를 힐끗보았다.
끈기가 대단한 아가씨다.
이덕주하고 잘 어울릴 것도 같은데, 하고 생각하니 입맛이 썼다.
신동기가 답답하다는 듯 노용악을 안으로 이끌었다.
"이덕주 이 친구! 아직도 자리만 지키고 앉아 있단 얘깁니까?"
신동기가 노용악에게 짜증을 부렸다.
"자리에도 없어."
"그럼 퇴근한 것 아닐까요?"
"회사 안에 있는 건 확실한데.."
노용악은 구석자리에서 찻잔만 만지작거리는 신현주를 곁눈질하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쪽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현주는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그렇게 앉아 있었다.
노용악은 다시 한번 시계를 보았다
"이 친구 이거 정말 뭐가 잘못된 거아냐? 숙녀를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해도되는 거야?"
"사람 피말리는 것도 여러 가집니다. 이거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도 없고, 에이 참."
신동기는 애꿎은 보리차만 축내며 투덜거렸다.
"어쨌든 조금만 더 기다려 봐야겠어. 수배해 놨으니까 연락이라도 오겠지!"
"본부장님께서 가셔서 사과 좀 하시죠."
"무슨 소리야? 자네가 중매했잖아!"
"사람 좀 살려 주십쇼! 벼룩도 낯짝이 있다는데 사십 분 동안에 벌써 세 번이나사과했습니다.
근데 어떻게 또 하란겁니까? 그리고 이 친구 쪽은 본부장님 불찰입니다."
"아니 뭐야?"
"그럼 아닙니까?"
"난 똑똑히 확답까지 받았었다니까!"
"어쨌든 전 더 이상 모르겠습니다!"
"자, 자, 짜증만 부릴 게 아니라 저 숙녀분 끈기도 대단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더 잡고 늘어지자구. 자 어서 일어나."
"나 참! 노총각 어른 만들기 되게힘드네."
신동기는 마지 못한 듯 일어나 노용악을 따라 자리를 옮겼다.
노용악이 현주 앞에 앉으며 목례를 했다.
"죄송합니다. 숙녀분을 이렇게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신현주는 의외로 시원한 대답으로 어색한분위기를 씻어 주었다.
"끈기를 시험하시나 보죠?"
바람을 맞히고 있는 건 이덕주인데 신동기는 자기가 지은 죄처럼 면구스러워했다.
"할 말 없습니다. 이 친구 이런 적이한번도 없었는데.."
"네! '약속' 하면 그 친구였어요."
노용악까지 거들고 나서는 우스꽝스런 모습이 재미있어서 신현주는 쿡하고 웃음이 터질 뻔 했다.
"정말입니다. '약속' 하면 그 친구 대명사예요."
"호호.. 친구분 감싸시는 마음은 알지만 대명사까지는 너무하네요."
"네?"
"기다린지 한 시간 다 됐어요. 대명사란.."
"이거 할 말 없습니다."
신동기는 머리를 긁적였다.
노용악은 애꿎은 담배만 축내고 있었고, 현주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즐기고 있다는 기분이들었다.
"그분 서른이 넘도록 장가 못 간 이유를 알 것 같네요."
"아, 그런 게 아닙니다. 아, 말 좀 해보세요, 본부장님. 부처님 가운데 토막처럼 앉아만 계시지 말구요."
신동기가 담배 연기만 뿜어내는 노용악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응원을 청해 왔지만
노용악이라고 별 뾰족한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오늘 된통 잘못 걸렸다는 느낌 뿐이었다.
노용악은 천성이 이런 난처한 자리를 없을까 하는 일념 뿐인데 문득 동생 주현이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그 녀석이라도 좀나타났으면..
동생 노주현이는 TV 탤런트였다.
형과 아우가 얼굴은 흡사 닮았는데 성격은 판이했다.
여자 앞에서 주눅부터 드는 노용악에 비해
노주현은 어떤 자리에서도 서글서글하게 이야기를 잘풀어가는 타입이었다.
그래! 그놈이라면 이런 자리도 쉽게 마무리 지을 수 있을텐데..
같은 부모의 같은 피를 물려 받았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일까?
형보다 나은 아우 없다는데 나는 왜이럴까?
생각할수록 속이 상했다.
노용악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생각들로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손님 중에 노용악 씨 계시면 전화받으세요!"하는 카운터의 멘트가 노용악의 귀를 번쩍 뜨이게 했다.
"어이구 됐습니다! 연락이 왔어요."
노용악은 구세주나 만난 듯 카운터로 뛰어갔다.
"전화 바꿨습니다. 아, 덕주! 이 사람 어떻게 된 거야? 사람을 이렇게 난처하게 만들 수 있어?"
한편 세 사람씩이나 레스토랑에서 전전긍긍하게 만든 장본인 이덕주 역시 속을 태우며 사무실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덕주는 지금 막 전송되어 오는 텔레타이프 용지를 시선으로 쫓으며 다급하게 양해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본부장님! 사고가.."
"사고라니, 무슨 사고야?"
수화기 저쪽에서 노용악의 목소리가 굵은 톤으로 달려왔다.
"자세한 건 모르겠구요, 지금 텔렉스가 들어오고 있는 중인데 태국입니다. 아마 무슨 분쟁이 생긴 모양입니다."
이덕주는 수화기 저쪽에서 소리치는 노용악의 노여움을 감지하면서 텔렉스용지를 북 찢어 눈으로 읽기 시작했다.
다급한 심정이야 이덕주가 노용악보다 못할리 없었다.
안달하시는 덕주의 부모님도부모님이지만 덕주 스스로 올해는 총각때를 벗고 싶었는데 주위 형편이 용납하지 않지 않는가.
금성사는 태국 콘솔티데이트사에 흑백 TV생산 기술을 수출하고
7년 동안 3백만불로 양측의 잠정적인 합의를 거쳐 이미 계약완결 단계에 들어가 있었다.
또,금성계전도 태국에 마하작 인터내셔널 전기회사를 합작 설립하고 산업용 전기기로얄티로
연간 매출액 3%씩을 받고있었는데 아마 흑백 TV 기술 수출 계약과정에서 무슨 문제가 발생한 모양이었다.
"알았어! 나도 더 이상 모르겠어! 환갑된 다음에 자식을 보든 손자를 보든 마음대로해!"
노용악은 이덕주가 걱정이 되면서도 억하심정으로 뱉아 버리고 수화기를놓았다.
난감한 일이었다.
벌써 40분씩이나 기다린 신현주에게 어떤 변명이 통할까?
"어떻게 된 겁니까? 무슨 전화가 그렇게길어요?"
언제 다가왔는지 신동기가 옆에서물었다.
노용악은 한숨을 쉬었다.
"못 나온대요?"
"사고야!"
"사고라뇨?"
"숙녀분, 자네가 처리할 수 있어?"
"아니 무슨 말씀입니까?"
"상황이 그렇게 됐어!"
"그렇다면 덕주가 발병이라도 났답니까? 별안간 병으로 병원에 실려 가기라도 했어요?"
"그런 건 아니고, 무역 사곤데 급박해. 나도 회사에 들어가 봐야겠어."
"본부장님!"
"자네가 알아서 하라니까!"
"여지껏 기다린 사람을 그냥 돌려 보내란 얘깁니까?"
"맘대로 해, 자네가 장가 한번 더 가든지."
뻥해서 서 있는 신동기도 아랑곳 없이 노용악은 횡하니 레스토랑을 나가 버렸다.
따르르르르..
노용악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자명종의 보턴을 눌렀다.
숙취로 인해 뒷골이 뻐개질듯이 아팠다.
새해 첫날부터 늦잠이라니!
한해의 첫 출발치곤 산뜻하지 못한 느낌이다.
노용악은 묵직한 뒷머리를 감싸안고 이불 속에서 뒤척였다.
"웬 술을 그렇게 하셨어요?"
오 여사가 꿀물 탄 쟁반을 받치고 들어왔다.
"누구랑 하셨어요?"
"음.."
어제 밤, 회사로 다시 뛰어 들어갔다가 울적해 하는 이덕주를 위로할 겸, 화풀이겸, 망년회 겸,
겸사겸사로 거나하게 마셔버렸던 술이 아무래도 탈이 난 모양이다.
입안이 깔깔하고 뱃속까지 편치 않았다.
"새벽에 김 비서 전화 왔었어요."
"김 비서가?"
"네, 전할 말이 있으시다구.."
"무슨 일일까? 신년 벽두부터.. 깨우지 그랬소?"
"너무 곤하게 주무시길래.. 다시 전화 하신댔어요."
"무슨 일이래?"
"그냥 급한 전갈이라구.. 직접 말씀드려야겠대요."
따르르르릉..
때마침 전화 벨이 요란하게 울었다.
노용악은 어떤 예감 때문에 전화를 받으려는 아내를 손짓으로 말리고 수화기를 들었다.
새벽에, 그것도 새해 첫날 새벽에 김비서의 전화라니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회사에 사고라도 터진 게 아닐까?
"본부장님이시군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조바심치는 노용악과는 달리 수화기 저편의 김 비서는 태평스럽게 신년 인사부터 건네왔다.
"아, 김 비서! 무슨 일이요? 회사에 무슨일 난 거요?"
"그런 건 아닙니다만 이거 신년 초부터 죄송하게 됐습니다."
"사장님께서 본부장님을 찾으십니다."
"네! 신년 연휴에 죄송합니다만 오늘 회사에 나와 주셨으면 합니다."
"알았소! 몇 시까지 나가면 되겠소?"
김 비서의 느긋한 말투로 보아서 자신의 조바심은 기우로 그칠 모양이었다.
그러나 무슨 일일까?
신년 연휴에 박승찬 사장이 자신을 찾는다는 일 자체가 예삿일은 아니지 않은가.
지금까지는 없던 일이었다.
그래! 김 비서 조차도 모르는 일이 회사 내에서 조용하게 벌어지는지도 모른다.
노용악은 수화기를 내려 놓으면서 묘한 흥분에 휩싸였다.
"어머나! 오늘도 회사에 나가요?"
히스테리컬한 아내의 짜증을 귓등으로 흘리면서 노용악은 화장실로 뛰어 들었다.
입속 가득하게 구취감을 풍기는 어젯밤의 술 내음을 토해 내는게 무엇보다 급선무였다.
노용악이 시간을 맞추느라 허겁지겁 당도했을 때 사무실에는 뜻밖에도
신동기,우남균, 남용, 이덕주들이 웅성거리고 서서 무언가 수군대다가 놀란 듯한 얼굴로 노용악을 맞았다.
"아니! 본부장님! 웬일이세요? 오늘 쉬는날 아닙니까?"
"자네들이야말로 웬일이야?"
"사장님 호출입니다."
"아니! 자네들도?"
"그럼? 본부장님 역시.."
"그렇다면 이거 심상찮은데요?"
못내 걱정스런 얼굴을 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 오인방이 모두 호출 당했다니.. 그것도 새해 첫날! 신정 연휴 아닙니까!"
노용악을 필두로 신동기, 우남균, 남용, 이덕주는
사내에서 오인방으로 불리울 만큼 수출본부의 핵심 멤버들이었다.
무슨 일일까?
노용악은 조금 전까지의 느긋하던 기분이 일시에 싹 가시는 것 같았다.
불같은 성격이긴 하지만 공과 사를 철저히 가리는 박 사장이
새해 첫날부터 오인방을 호출했다면 예삿일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혹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슨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 아닐까요?"
노용악이 가장 염려하고 있는 기우를 이덕주가 불쑥 끄집어냈다.
"실수?"
"그렇잖음 우리 오인방을 오늘 같은 날 한꺼번에 호출할 리가 없잖아요."
"그래! 아무래도 무슨 문제가 생긴 건분명해!"
"난린데요, 이거.."
"자네들 무슨 일 있었어?"
"예?"
"정말 무슨 일 생긴거 아냐?"
노용악이 다짐하듯 물었다.
"본부장님두 참, 그걸 알면 저희들이 이러구 있겠어요?"
노용악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제 신현주와 이덕주를 소개하기 위해 조금 일찍 자리를 비운 것이 새해 첫날부터뭘까?
아뭏든 이유를 알아야 적절한 답변을할 수 있을 텐데,
하고 답답한 생각들을 굴리고 있는데 김 비서의 웃는 얼굴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김 비서를 따라 영문도 모른 채 사장실로 불려간 오인방들은
박 사장에게서 어떤 말이 나올까, 잔뜩 긴장하며 소파에 앉았다.
누가 뭐란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특별히 잘못한 일도 없는데 주눅부터 들어있었다.
그런데 박승찬 사장의 첫마디는 의외로 선선하고 부드러웠다.
"요즘 어때요?"
박 사장은 노용악을 비롯한 네 사람을 번갈아 보며 얼굴 가득히 미소를 띠웠다.
박 사장을 바라 보았다.
"연말이라 서로 바쁘고 같이들 오붓하게 시간을 보낼 틈도 없었겠네만."
"아,네."
박 사장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서 더욱 어려웠다.
"오늘 쉬는 날인데 쉬지도 못하게 여러분을 부른 건 우리 회사의 사활이 걸린 문제를 의논하고 싶어섭니다."
박 사장의 말이 잠깐 끊기는 사이에 여비서가 찻잔을 날라다 놓고 나갔다.
"자, 차들 들면서 얘기 들어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노용악이 궁금증부터 풀어야겠다는 표정으로 박 사장을 바라 보았다.
"네, 사장님!"
"수출업무를 맡고 있으니 누구보다 현전자업계의 실정을 잘 알 것 같아서 묻는데
이 상태가 계속 유지된다면 어떤 결과가나올 것 같소?"
박 사장의 시선이 예리하게 노용악의 얼굴에 꽂혔다.
노용악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만..
장기 불황에다 장기적자를 타개하기 위해선 획기적인 대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박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동기, 우남균, 남용, 이덕주들은 박 사장과 노용악을 번갈아 보며
나름대로 화제의 방향을 어림잡아 계산하고 있었다.
노용악은 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사장실엔 긴장이 높아지고 있었다.
"어떤 획기적인.. 좀 도박이라 싶을만치의 변화 있는 대책이 아니면 해결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바로 그거요!"
박 사장이 확신하듯 무릎을 바짝 당겼다.
그의 얼굴에는 비장한 각오가 서려 있었다.
"실은 오늘 여러분을 부른 건 그때문입니다.
현재의 장기 불황을 타개하는데는 단순 처방으로는 회복이 어려운게 사실이오.
자, 차 식는데 들면서들 얘기들어요."
박 사장이 먼저 커피 잔을 들었다.
창밖으로 희끗희끗한 눈발이 날렸다.
어제부터 찌푸렸던 하늘이 이제서야 눈발을 뿌리고 있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박 사장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우리 회사에서는 쇼크 요법을 실시하기로 했습니다!"
박승찬이 애초에 말했던 대로 의논을하기 위해서 그들을 부른 게 아니란 걸 노용악은 깨달았다
그들은 은밀한 임무를 부여받기 위해서 호출당한 것이었고, 박승찬은 굳이 의논 상대로 표현했었다.
그것이 바로 박승찬 방식이었다.
"타업계에서 총력수출 작전으로 일관하고있는 이때에
우리도 과감한 수출 작전의 교두보를 만들자는 생각이에요.
그렇다고 현재의 바이어 브랜드 수출 체제를 금방 무너뜨릴 수는 없고.."
박 사장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오인방을 둘러 보았다
"자칫 바이어의 비위를 긁어서 역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데 우리의 어려움이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을 택한 겁니다.
수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서 노본부장하고 네 사람이 현지로 가 주었으면합니다."
"현지라면? 어디를 말입니까?"
"미국입니다!"
미국!
전 세계가 오일 쇼크로 휘청거려도 끄덕이지 않는 단 한 곳, 황금시장 미국!
노용악은 가슴속에서 불끈 치솟는 희열을 꾹 눌렀다.
미국, 그곳은 자신의 꿈이 서린 곳이 아닌가!
수출본부를 맡은 후 노용악은 미국시장 공략을 위해 온 힘을 쏟았었다.
그러나 날로 높아지는 무역 장벽은 날로 요새로 만들었고, 자신의 꿈은 요원하다고 느끼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박승찬은 그 미국을 향해 집중 공격을 명령하고 있었다.
"미국 시장에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만드느냐 못 만드느냐 하는건 여려분의 손에 달렸습니다..
이번 작전의 승패에 회사의 사활이 걸려 있다는 각오로 임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헤헤..그럼 일명 아메리카 특급작전 인가요?"
신동기의 너스레가 팽팽하던 긴장을 일시에 무너뜨려 버렸다.
박승찬도 환하게 웃었다.
"아메리카 특급작전이라.. 그 명칭 부르기 쉽고 듣기 좋군. 좋아, 그렇게부르지.
근데 한 가지 일러둘 것은 당신들만이 알고 있어야 한다는 거요."
"그렇게까지 비밀을 요합니까?"
"물론! 그 비밀 유지에 이번 승패가 달려있다고 봐야 할 거요.
극단적인 비유를해서 안 됐지만 여러분의 가족들에게도 일체 비밀로 해야 합니다."
의상실 A-ONE의 소파에 파묻히듯 앉은 현주는
테이블에 펼쳐진 채로 널려 있는 잡지들을 흐릿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현주의 건너편에서 추 마담이 찻잔을 양손에 받쳐들고 현주의 표정을 세밀히살폈다.
차가운 눈매로 한점 바람이 칼소리를 내듯 스쳐 지나갔다.
현주는 눈을감았다.
"그래서 엉뚱한 사람하고 저녁만 먹고 돌아왔다는 거야?"
"......."
"잘 됐다 싶었겠군. 가슴 가운데 민지섭의 모습을 안고 갔을 텐데, 얼마나 핑계가 좋았을까."
추 마담이 빈정대며 웃음을 지었다.
물위에 기름이 뜨듯 그 웃음은 현주의 창백한 얼굴을 흙빛으로 바꾸며 빙글빙글 떠다녔다.
"아무래도 자기 자신을 잊고 있는 것 아냐?"
날카로운 추 마담의 서슬에 현주는 천천히 눈을 떴다.
추 마담은 이른 봄꽃샘바람 처럼 차가운 얼굴로 현주를 보고있었다.
"혹시 만나기 싫으니까 딴짓하다 들어온건 아니지..?
"언니!"
"여러 가지 아픔을 늘 기억하고 살라는 말은 못 해. 현주도 인간이니까."
현주의 눈이 허공을 달렸다.
그 눈속으로 시커멓고 커단 바위덩이가 찔러들어왔다.
아아, 이 바위에 치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현주는 입술을 자근자근 물었다.
"소홀히 해서 될 일이 있고 안 될 일이 따로 있는 거야."
어느새 추 마담의 목소리는 가을날의 강물 속처럼 차분하고 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칼날처럼 차갑게 날이 서려 있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접근해야 돼. 더구나 내 아이디어는 기가 막혀.
노총각이 보고자 하는 거야. 거기다 배우 뺨치는 미모 있어. 돈 있어."
현주가 눌리우듯 눈을 감았다.
그 얼굴위로 고래만한 구름덩이가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마음대로 해. 식물인간 내 동생은 어차피 그렇게 됐으니까.."
"언니 안 하겠다는 게 아니에요."
"후훗 말은 그렇게 해야겠지."
"......"
"내 동생의 처가 자살을 하고, 자살한 엄마 옆에서 울다 지쳐 죽은 애기를 어떻게 생각해?
처자식 거느린 내 동생이 현주의 유혹없이 그 방엘 갔었을까?"
추 마담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입을 통해 칼날이 들락거린다는..
"내 동생이 설사 술이 취해 그 방엘 들어갔다고 해. 피하면 되지 어떻게 해서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그 애가 비명만 지르지 않았으면 살인도 했을 것 아냐? 다행히 내가 그곳엘 들렀기망정이지.."
현주의 콧잔등으로 땀방울이 솟았다.
그녀의 눈앞에 가물거리는 물체 하나가 벌떡 일어서고 있었다.
술취한 사내가 그녀의 방을 찾아왔을 때 현주는 파리의 지섭에게 편지를 쓰고있었다.
방문이 벌컥 열리고, 자리에서 용수철 처럼 튀어 일어난 현주는 건장한 사내의 음흉한 눈과 마주쳤다.
그리고,사내가 다가섰다.
술냄새가 방 안을 휩쓴다고 생각했다.
현주는 도망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사내를 벽으로 밀고 의상실로 뛰어 나왔을 뿐이었다.
잠시 후 방으로부터 신음이 새어 나왔고 밖에서 현주를 찾는 추 마담의 음성을 들은 건 거의 동시였었다.
그리고 정신을 잃은 사내를 병원으로 옮기고..
현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추 마담이 그런 현주에게서 눈을 돌려 의상 잡지를 뒤적이며 말을 이었다.
"벽에 부딪혀 뇌에 금이 갔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건 흉기로 머리를친 거야.
그애가 어떤 앤지 알아? 나한테 단 하나 뿐인 동생이야.
6.25때 부모 잃고 단 둘이 살아남아 의지한 동생이야.
고아원을 전전하면서 그 애 하나 희망으로 살아온 애를 식물인간으로 만든 거야.
그것도 내 덕으로 살며 애인 공부 시키는 현주가 말야."
추 마담이 잡지를 덮고 현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현주의 얼굴 위로 하얀 백납이덩이처럼 응결되고 가슴 저 밑바닥으로 쿵쿵 바위가 내려앉고 있었다.
첫댓글 재밌네요^^
잘 보고있어요
즐감하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