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행장 [行狀]
글/錦城 吳駿善
번역/羅千洙
公諱錫珍字台完自號蘭坡/공의 이름은 석진(錫珍), 자는 태완(台完), 스스로 호를 난파(蘭坡)라 하였으며
羅州之鄭胄于高麗文靖公雪齋先生諱可臣(나주지정주우고려문정공설재선생휘가신)/나주 정(鄭)의 혈통으로 고려 때 문정공 설재(文靖公雪齋)선생은 이름이 가신(可臣)이다.
文靖公登中朝科爲翰林學士(문정공등중조과위한림학사)/문정공은 중국 조정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를 하므로서
有大名於世其後永慕齋(유대명어세)/그후 설재서원(雪齋書院)의 영모재(永慕齋)에서 세상에 크게 이름을 떨쳤다..
景武公諱軾事世祖(경무공휘식사세조)/ 경무공(景武公)의 이름은 식(軾)으로 세조(世祖)를 섬기며
官止兵判(관지병판육전)/관직은 병조판서에 그쳤다.
六傳而進士諱善卿號樂天齋於公爲九世祖(육전이진사휘선경호락천재어공위구세조)/6세대를 전하여 진사로 이름이 선경(善卿)이며 호(號)가 낙천재(樂天齋)는 공(公)에게 9세조이다.
自是連數世官不達(자시연수세관부달)/이로부터 연달아 여러 세대 동안에 벼슬이 영달하지 못하였다.
五代祖諱奉周贈工參(오대조휘봉주증공참)/5대조의 이름은 봉주(奉周)인 데 증직이 공조참판이었으며
高祖諱楚明同樞(고조휘초명동추)/고조의 이름은 초명(楚明)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했으며
曾祖諱壽民贈參議(증조휘수민증참의)/증조의 이름은 수민(壽民)인데 증직이 참의(參議)였으며
祖諱啓華贈參判(조휘계화증참판)/조부의 이름은 계화(啓華)인데 증직이 참판(參判)이고
考諱讚基參奉贈左承旨(고휘찬기참봉증좌승지)/아버지의 이름은 찬기(讚基)인데 참봉으로 증직이 좌승지이다.
妣贈貞夫人海州崔氏師崙女(비증정부인해주최씨사륜여)/어머니는 증직으로 정부인(貞夫人)이시며 해주최씨 사륜(師崙)의 따님이다.
以哲廟辛亥八月九日生(이철묘신해팔월구일생)/철종조 신해년 1851년 8월9일 태어났는데
公于羅州治西明堂里第生(공우나주치서명당리제생)/공(公)은 나주 읍치 서쪽 명당리(明堂里) 집에서 살았는데
而岐嶷姿貌雄偉(이기억자모웅위)/얼굴 모습이 뛰어나고 우람하였으며
志氣遠大大異(지기원대대이)/의지와 기개가 원대하고 크게 달랐다.
凡兒甫入學(범아보입학)/보통 아이로 커서 학교에 들어갔는데
文藝夙就(문예숙취)/문예를 일찍 성취하였다.
雖不肯屈首課程(수불긍굴수과정)/비록 고개를 숙여 공부하는 과정(課程)을 즐기어 하지 않았으나
而能通大義(이능통대의)/대의(大義)에 능통하였다.
性篤孝友善事父母(성독효우선사부모)/효우의 품성이 독실(篤實)하고 부모를 잘 섬겼으며
母夫人抱宿病積以歲月(모부인포숙병적이세월)/公의 어머니가 묵은 병을 안고 오랜 세월이 되었는데
公邀醫調治誠敬備至(공요의조치성경비지)/공(公)이 의원을 불러서 조리하며 정성으로 공경하기를 지극히 하니
終至復常(종지복상)/마침내 정상으로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以至接待醫師有同一家(이지접대의사유동일가)/의사를 접대에 이르기까지 한집안처럼 같이 하기를
久而不衰(구이불쇠)/오래도록 시들지 않았는데
此可見加人數等也(차가견가도록인수등야)/여기에서 보통 사람보다 몇 배 더한 것을 볼 수 있었다.
於兄弟有無共之未嘗見鬩墻之恥(어형제유무공지)/형제간에는 있고 없고를 함께하였으며
未嘗見鬩墻之恥(미상견혁장지치)/일찍이 집안 담장에서 싸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형제간에 싸우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며
推以及於宗族(추이급어종족)/미루어 종족 간에도 그리 미치게 하니
各得其歡心(각득기환심)/각각 그 환심(歡心)을 얻고자
尤能輕財好施(우능경재호시)/더욱 재물을 거벼이 여기고 베풀기를 좋아하였다.
見有書塾之貧(견유서숙지빈)/글방이 곤궁하게 보이는데
不能肄業者(불능이업자위지출력)/학업을 익힐 수 없으면
爲之出力優助(위지출력우조)/재력을 내어 넉넉한 도움으로
使之勸學塾人(사지권학숙인)/글방 사람들에게 학문을 힘써 배우도록 하였기에
賴以成立(뢰이성립)/학문을 성취하고 입신하는데 힘 입었는데
如是者數處(여시자수처)/이와 같이 한 것이 여러 곳이었다.
往在癸巳飢荒(왕재계사기황)/지난 계사년[1893년] 기근으로 황폐하였는데
滿目官無設賑之方(만목관무설진지방)/관(官)에서 진휼(賑恤)을 베푸는 방도가 없는 것이 눈에 가득 차니
公以義出財(공이의출재)/공(公)이 의롭게 재산을 내어
多所賙給闔境至(다소주급합경지)/구역안의 온통 많은 곳에 이르기까지 진휼하여 주었기에
今頌其惠(금송기혜)/이제야 그 은혜를 칭송하였다.
公少有經濟之志(공소유경제지지)/公이 젊어서 경세제민의 뜻을 있었지만
而無可展布(이무가전포)/이를 펼 수가 없었는데
初事州牧閔公種烈(초사주목민공종열)/처음 나주 목사 민종열(閔種烈) 공을 섬기면서
閔公亟稱之(민공극칭지)/민(閔)공이 지극히 칭찬을 하였다.
逮夫甲午東匪擾攘(체부갑오동비요양)/갑오년에 이르러서 동학 비적들의 소요를 일으켰는데
先自古阜敗衄官軍(선자고부패뉵관군)/먼저 고부(古阜)로 부터 관군이 패배하여
其勢鴟張(기세치장)/그 기세가 올빼미 날개를 펼친 듯
連陷州郡(연함주군)/연달아 주군을 함락하였다.
豕突于長城(시돌우장성)/장성에서는 돼지가 달려들 듯
隊官被殺(대관피살)/관군의 대장을 피살하니
人心離析莫可收合(인심이석막가수합)/인심은 거두어 모울 수 없을 정도로 떠나고 나뉘었다.
羅州介在衝要之地(나주개재충요지지)/나주(羅州)는 요충의 땅에 끼어 있어
孤城守禦(고성수어)/외로운 성을 지키고 방어하는데
勢甚危急(세심위급)/그 기세가 매우 위급하자
於是閔公(어시민공)/이에 민(閔)공이
辟公爲都統將(벽공위도통장)/공(公)을 도통장으로 삼아 물리치라 하면서
悉以軍務委任焉(실이군무위임언)/군무를 다하도록 위임하였다.
公登壇壯士歡聲如雷(공등단장사환성여뢰)/공(公)이 단상에 올라가니 장사(壯士)들의 환영의 소리가 우레 같았다.
密勿協贊(밀물협찬)/부지런히 힘써 협찬을 하고
奮發義勇(분발의용)/의리와 용기로 분발하여
守城則固出戰必勝(수성칙고출전필승)/성을 굳게 지켰고 싸움에 나가면 반드시 승리하였다.
八朔拒守前後(팔삭거수전후)/여덟 달 동안 앞뒤를 막아 지키면서
告捷凡六度(고첩범육도)/승리를 알리는 것이 무릇 여섯 번으로
而軍容嚴肅(이군용엄숙)/군사의 모습은 엄숙하였고
禁戢曓掠(금집포약)/해치거나 노략질을 금하도록 단속하였다.
由是所至(유시소지)/이 때문에 가는 곳마다
民皆持牛酒歡迎(민개지우주환영)/모든 백성들이 소와 술을 가지고 환영하였다.
是歲十一月(시세십일월)/이 해 11월
閔公陞招討使(민공승초토사)/민(閔)공은 초토사(招討使)로 승진하였다.
於是公承令出征南救靈巖東保南平(어시공승령출정남구영암동보남평)/이에 공(公)이 명령을 받고 출정하여 남쪽 영암(靈巖)을 구제하고, 동쪽 남평(南平)을 지켰으며
威聲所及賊徒散落(위성소급적도산락)/위엄의 명성이 미치는 곳마다 적(賊)의 무리들은 흩어져 따로 떨어졌다.
繼以王師下來(계이왕사하래)/잇달아 임금이 거느린 경군(京軍)이 내려와
餘黨就捕(여당취포)/나머지 무리들을 체포하였다.
招討使馳報軍功于政府(초토사치보군공우정부)/초토사는 군공(軍功)을 정부에 급히 보고 하였는데
以公爲首其錄功別紙曰(이공위수기록공별지왈)/공(公)을 별지의 록공(錄功)에 맨 먼저 쓰며 말하기를
七月初五日西門之勝(칠월초오일서문지승)/“7월 초 5일 서성문 전투에서 승리하였는데
公嚴束吏民分正行伍(공엄속이민분정항오)/공(公)은 아전과 백성들을 엄히 단속하고 군대를 바르게 나누고
不避矢石(불피시석)/화살과 돌팔매를 피하지 않고
大鏖一塲(대오일장)/한 마당 전투에서 크게 무찔러
捕捉賊徒百餘名(포착적도백여명)/적(賊)의 무리 백여 명을 붙잡고
多獲軍器(다획군기)/많은 무기를 획득하였다.” 라고 말하였다.
十月十二日砧山之役(십월십이일침산지역)/10월12일 침산(砧山)의 싸움에
匪魁孫化中(비괴손화중)/비적의 괴수 손화중(孫化中)이
率萬餘名(솔만여명)/만여 명을 인솔하고
聲言屠戮(성언도륙)/도륙하겠다고 공언하니
羅州羣情驚危(나주군정경위)/나주(羅州)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위태로움에 놀라
城中蕩沸(성중탕비)/성(城) 안이 들끓었다.
公激勵忠義/공(公)은 충의로 격려하고
領率軍兵(영솔군병)/군병들을 인솔하여
出陣于光州(출진우광주)/광주(光州)로 출진하였다.
賊徒彌滿在枉屯結(적도미만재왕둔결)/적의 무리들은 굽은 곳에서 가득하게 찬 모습으로 진을 치고 집결하고 있었지만
公小不動心(공소부동심)/공(公)은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으며
身先士卒(신선사졸)/몸소 사졸의 선두에 서서
飛砲急擊(비포급격)/돌쇠뇌를 날리면서 급히 돌격하니
彼徒未及措手(피도미급조수)/저들 무리들은 미처 손을 쓰지 못하였으며
望風逃走(망풍도주)/풍문만 듣고도 도주하였다.
追入社倉(추입사창)/사창(社倉)으로 추격해 들어가
仙巖等地收其器糧(선암등지수기기량)/선암(仙巖) 등지에서 무기와 식량을 수거하고
燒其巢穴(소기소혈)/적의 소굴을 불태워 버렸다.
十一月二日聳珍之役(십일월이일용진지역)/11월2일 용진산(聳珍山) 싸움은
匪類數萬就屯於北倉(비류수만취둔어북창)/비적들의 무리 수 만 명이 북창(北倉)에 모여 진을 치고
上下十餘里放火攘奪(상하십여리방화양탈)/위 아래로 십여 리를 함부로 불을 지르고 남의 재물을 억지로 빼앗으니
五六面坊人烟垂絶(오육면방인연수절)/5-6개 면의 동네 사람들 그림자가 거의 끊어졌다.
公尤不勝憤痛(공우불승분통)/공(公)은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領率砲軍數百(영솔포군수백)/포군 수백 명을 인솔하여
出其不意齊討(출기불의제토)/예기치 못하게 나아가 일제히 토벌하면서
神速手砲(신속수포)/귀신처럼 빠르게 수포(手砲)를 쏘아
廝殺剿獲無筭(시살초획무산)/마구 쳐 잡아서 소탕한 것을 셀 수가 없었다.
十一月十六日古幕之戰(십일월십육일고막지전)/11월16일 고막(古幕) 전투에서는
務安匪徒聚(무안비도취)/무안(務安)의 비적 무리들이 모였는데
其旅若林聲勢甚壯(기여약임성세심장)/그 군사들이 마치 숲같이 성세가 매우 장엄하였다.
公又統諸將領保合民兵(공우통제장령보합민병)/공(公)은 또 여러 장령들을 통솔하고 민간인 병사를 보호하여 모았다.
距賊十餘里而陣(거적십여리이진)/적(賊)과의 거리 10여리를 두고 진을 쳤는데
彼衆我寡(피중아과)/저들이 많고 아군이 적어서
惟以計勝(유이계승)/승리를 헤아려 생각건대
指揮砲軍(지휘포군)/포군을 지휘하여
兩面埋伏(양면매복)/양면에 매복하고
示之以弱(시지이약)/악한 체 보이기로 하였다.
彼果輕易之數萬之卒(피과경이지수만지졸)/저들은 과연 쉽게 얕잡아보고 수만 무리들이
兩路分派(양로분파)/두 갈래 길로 나누어
冲火放砲(충화방포)/횃불로 돌진하며 포를 쏘며
風擁而來(풍옹이래)/바람을 안고 오니
公當先出陣(공당선출진)/공(公)은 마땅히 먼저 출진하여
使善砲者(사선포자)/포를 잘 쏘는 자로 하여금
先放大椀砲(선방대완포)/먼저 대완포를 쏘고
兩處伏兵一齊吶喊(양처복병일제눌함)/양 곳의 복병들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니
千步隊鳥銃軍(천보대조총군)/천보 조총 군대는
賈勇先登(가용선등)/용맹을 잃지 않고 의연히 적진에 앞장서서 오르자
賊衆一時披靡四散奔走(적중일시피미사산분주)/적의 무리들은 한꺼번에 쪼개어 쓰러지면서 사방으로 분주히 흩어졌다.
橫屍相枕(횡시상침)/죽은 시체가 이리저리 서로 포개어져 있고
落水死者甚衆(낙수사자심중)/물속으로 떨어져 죽은 자도 매우 많았다.
整軍而還/군사를 정돈하고 귀환하니
不傷一人一騎/한 사람도, 한필의 말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
招討使大加稱賞曰/초토사가 상을 주고 칭찬을 더하며 말하기를
不意干城之才在吾幕下/“뜻밖에도 우리의 막하에는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있다.”라고 하였다.
同月二十四日南山之捷(동월이십사일남산지첩)/11월24일 남산전(南山戰)의 승리로
賊徒蓄憾於累敗(적도축감어누패)/적(賊)의 무리들은 여러 번 패배를 하여 서운함이 쌓여
思欲血戰(사욕혈전)/혈전을 할 생각으로
誑誘十餘邑匪類分三路而來(광유십여읍비류분삼로이래)/십여 고을의 비적 무리들을 속이고 유혹하여 세 길로 나누어 와
必欲屠城而後已(필욕도성이후이)/반드시 성(城)을 함락 하려고야 말 것이다.
公從容整暇分作奇兵(공종용정가분작기병)/공(公)은 조용히 여유를 갖고 기습 군을 만들어
乘其少懈當先突擊(승기소해당선돌격)/적들이 조금 느슨한 틈을 타 마땅히 먼저 돌격하니
賊膽落於疇昔之敗(적담락어주석지패)/적(賊)들은 예전에 패했을 때처럼 간담이 떨어지고
望風奔潰(망풍분궤)/풍문만 듣고도 달아났는데
追兦逐北剿殺三百餘名(추망축배초살삼백여명)/달아나는 자를 뒤좇아 추격하여 3백여 명을 잡아 죽였으며
所得銃劒馬牛甚多(소득총검마우심다)/총과 칼, 말과 소를 매우 많이 획득하였다.
自是賊不敢犯城(자시적불감범성)/이로부터 적(賊)들은 감히 성(城)을 범하지 못하였다.
此皆馳報中語而文多不盡錄(차개치보중어이문다부진록)/이 모두를 급히 보고 하는 것 중에 말과 글이 많으나 다 기록해 놓지 못하였다.
時朝著不靖/당시 조정안이 맑지 않아서
爵賞不及(작상불급)/작위의 포상이 미치지 못하였는데
而謙退不伐(이겸퇴불벌)/겸손하게 물러나 공(功)을 자랑하지 않았지만
獨無幾微見於色辭(독무기미견어색사)/어찌 안색과 말투에서 기미를 볼 수 없겠는가.
最後因諸公訟寃(최후인제공송원)/인하여 맨 나중에 제공(諸公)들이 억울함을 하소연하여
特除海南郡守(특제해남군수)/특별히 해남군수(海南郡守)로 제수 하였는데
公不欲往赴(공불욕왕부)/공(公)이 부임하려 하지 않자
而以母夫人故黽勉之任(이이모부인고민면지임)/공(公)의 어머니 때문에 마지못해 맡았다.
時參書官安宗洙攝州事(시참서관안종수섭주사)/이 때에 참서관 안종수(安宗洙)가 나주 고을 일을 대행(代行)하면서
勤行薙髮氣焰甚熾(근행치발기염심치)/부지런히 다니며 상투 자르는 기세가 지나칠 정도로 심하게 하였다.
觀察使蔡奎祥見逐(관찰사채규상견축)/관찰사 채규상(蔡奎祥)이 축출(逐出) 당함을 보고
招討令公亦遭侵逼以及於公(초토령공역조침핍이급어공)/초토 영공(나주목사 민종열) 또한 핍박을 당하였는데 공(公)에게까지 미쳤다.
公曰(공왈)/공(公)이 말하기를
頭可斷髮不可斷(두가단발불가단)/“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내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라고 하면서
終不屈(종불굴)/끝내 굴복하지 않았는데
由是衆情憤怒(유시중정분노)/이로 말미암아 대중들의 마음은 분노하였다.
先是奸黨挾外援(선시간당협외원)/이보다 먼저 간사한 무리들이 외부 지원을 끼고
誤國母后見弑(오국모후견시)/나라를 그르치니 왕후가 죽임을 당하고
君父播遷於俄館(군부파천어아관)/임금은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하였으며
中外義兵在在團結(중외의병재재단결)/중앙과 지방의 의병들은 곳곳에서 단결하였다.
湖南則前參奉奇公宇萬爲之首倡(호남칙전참봉기공우만위지수창)/호남의 전 참봉 기우만(奇宇萬)공이 제일 먼저 창의하고
將以伸大義於天下(장이신대의어천하)/장차 온 천하에 대의를 펼치고자
而公與之同事(이공여지동사)/공(公)과 더불어 같이 일을 하였었다.
以此凶徒持公甚急及(이차흉도지공심급급)/이 때문에 흉도들은 (상투 자르는 일이) 공적(公的)임을 유지하기가 매우 급함에 이르고
州人之爭殺參書也(주인지쟁살참서야)/고을 사람들은 다투어 참서관을 죽이고자 하였다.
謂公所指使尤含毒焉(위공소지사우함독언)/생각건대 공소(公所)에서 (상투 자르는 일을) 지휘하여 부리는 것에 더욱 독을 품었다.
然此則公赴任後事也(연차칙공부임후사야)/그러나 이 일은 공(公)이 해남군수로 부임한 후의 일이다.
方隊將金炳旭領軍下來(방대장김병욱영군하래)/바야흐로 대장(隊長) 김병욱(金炳旭)이 군사를 이끌고 내려와서
受奸軌指嗾(수간궤지주)/간사한 무리들의 사주를 받아
構陷義兵恣行殺戮擧一道(구함의병자행살육거일도)/의병을 모함하고 살육을 자행하는 것이 온 도에서 일어나니
惴惴焉無人色次(췌췌언무인색차)/벌벌 떨면서 산사람의 기색이 없던 차에
到羅州密遣巡捕(도나주밀견순포)/나주에 도착하여 비밀리 순포(巡捕)를 파견하여
捕公載車(포공재차)/공(公)을 체포하고 수레에 실었다.
盖公甫下車(합공보하차)/대체로 공(公)이 부임하여 수레에서 내려
禮邑之賢士訪問(예읍지현사방문)/예의 바른 고을의 어진 선비들이 방문하였으며
民間疾苦(민간질고)/질병으로 괴로워하는 민간들은
治績著聞未數月也(치적저문미수월야)/잘 다스렸다는 공적이 (부임한 지) 몇 개월도 되지 않았는데 소문나자
吏民愛戴(이민애대)/백성과 아전들이 사랑하고 떠받들었다.
以故及公逮捕也(이고급공체포야)/이런 까닭에 공(公)이 체포된 것은
闔境士庶莫不憤惋(합경사서막불분완)/지경(地境)안의 모든 선비와 서민들이 통분(痛憤)하게 여기지 않은 자가 없으며
將欲出死力(장욕출사력)/장차 죽을 힘을 다 내어
救之公(구지공)/공(公)을 구원하겠다고 하니
麾止之曰(휘지지왈)/(公께서) 손을 흔들어 저지하며 말하기를
我是朝家命吏(아시조가명리)/“나는 조정이 명령한 관리이다.
雖有罪過固當推鞠(수유죄과고당추국)/비록 죄과가 있다고 하나 진실로 추국[訊問]을 하면
而況全無所犯乎(이황전무소범호)/이에 범한 바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旣至炳旭無一辭(기지병욱무일사)/이윽고 김병욱(金炳旭)에게 이르자 한마디 말도 없이
供招卽命行刑(공초즉명행형)/공초 즉시 형(刑)의 집행을 명령하자
公大呼曰(공대호왈)/공(公)이 크게 호통 치며 말하기를
我有何罪(아유하죄)/“내가 어떤 죄가 있으며
爾是何人而敢自擅殺乎(이시하인이감자천살호)/너는 어떤 사람이어서 감히 친히 마음대로 죽이려 하느냐.”라고 하였다.
炳旭俯首無語竟害之/김병욱(金炳旭)은 머리를 숙인 체 말이 없다가 마침내 해치고야 말았으니
卽三月十一日也(즉삼월십일일야)/곧 3월 11일이었다.
滿城士女奔走號哭曰/성안 가득 선비들과 여자들이 분주히 울부짖으며 말하기를
鄭海南死矣/“정(鄭) 해남(군수)이 죽었으니
吾其奈何/우리는 이제 어쩌면 좋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不擧火者三日(부거화자삼일)/봉화(烽火)를 3일간 든 것은 아니지만
遠近聞者(삼일원근문자)/원근에서 소문을 들었던 자는
莫不齎咨涕洟(막불재자체이)/탄식하며 눈물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嗚呼寃哉(오호원재)/오호 원통하도다.
盖嘗論之(개상론지)/대개 일찍이 논하기를
東匪之亂固國家初有之變也(동비지란고국가초유지변야)/동학 비적들의 난은 진실로 국가에서 처음 발생한 변고로
始焉誦呪倡邪(시언송주창사)/처음에는 주문(呪文)을 외우고 사악함을 주장하면서
誑惑愚民終焉(광혹우민종언)/끝내는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이고 미혹시켰으며
稱兵肆暴貽憂君父(칭병사폭이우군부)/군사행동을 취하여 갑자기 방자하게 임금에게 근심을 끼치고
以至隊官之殉節而梟首(이지대관지순절이효수)/관군의 대장(隊長)이 순절하기에 이르러 목을 메여 처형하였다.
綸使之奉命而燒殺(륜사지봉명)/임금이 보낸 윤사(綸使)가 명을 받들었는데 불태워 죽이고
連陷完府(연함완부)/잇달아 완주부(完州府)가 함락되어
兩殿睟容蒙塵(양전수용몽진)/경기전(慶基殿)과 어용전(御容殿) 두 전(殿)의 임금 화상[睟容]을 피난시켰으며
剽略州縣燒死命吏(표약주현소사명리)/州와 縣을 위협하고 노략질하면서 임금이 명한 벼슬아치를 불태워 죽였다.
八道皆然(팔도개연)/8도 모두가 그러하므로
無敢嬰其鋒者(무감영기봉자)/감히 그 예봉(銳鋒)을 대들지 못하였는데
惟洪州與羅州保全(유홍주여나주보전)/오로지 홍주(洪州)와 나주(羅州)는 온전하게 보호하였으며
而羅州全勝(이나주전승)/나주(羅州)가 전부 이긴 것은
緊公之功(긴공지공)/절박할 때 공(公)의 공(功)이었으니
固當十世宥之(고당십세유지)/진실로 마땅히 10대에 걸쳐서도 죄를 용서하여 줄만한 것인데
而一不免其身(이일부면기신)/한번도 그 몸이 죄를 면치 못하니
尙可忍言哉(상가인언재)/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安參書之恣暴實難枚擧(안참서지자폭실난매거)/참서관 안종수(安宗洙)의 방자하고 횡포함은 실로 낱낱이 거론키 어려운데
而其犯逆肆惡之尤著者(이기범역사악지우저자)/그가 반역을 범하고 극에 달한 악한 짓은 더욱 두드러졌던 것이며
則其於國母之被弑曰(칙기어국모지피시왈)/국모가 시해(弑害) 당하는 일(1895년 양력 10월8일[음력8월20일] 시해 당함)에 있어서 말하기를
甲午六月宜有此事(갑오육월의유차사)/“1894년 갑오년 6월에 이 일이 있었다면 마땅한데
而拕至今日(이타지금일)/그런데 금일까지 질질 끌은 것이
亦是異事(역시이사)/또한 이상한 일이다.”라 하였으며
且云立校養士(차운입교양사)/또 말하기를 “학교를 세우고 선비를 기르는 것은
無關於國(무관어국)/나라와는 상관없는 일이므로
毁校存堂(훼교존당)/학교를 헐어버렸는데 집이 있으니
以置兵隊(이치병대)/군대를 둔다 하고
客舍望賀虛文可厭(객사망하허문가염)/객관(客館)의 망하례(望賀禮)는 실상이 없는 법제(法制)여서 싫어할만 하다“라고 말한 것이
宜存實事(의존실사)/정말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版籍者人命之所繫也(판적자인명지소계야)/판적(版籍)은 사람의 목숨이 매달려 있는 바
聖人式負版者(성인식부판자)/성인(聖人)께서도 판적(版籍)을 진 사람〔負版者〕에게 예의를 표시하였는데
而盡爲曳出(이진위예출)/(호적을) 다 끄집어내 보니
以付塗壁休紙(이부도벽휴지)/벽(壁)에 바르고 부치는 휴지였다.
碑閣者追思前侯之遺化也(비각자추사전후지유화야)/비각에 써진 것으로 전 후작(前 侯爵/나주목사 민종열)이 남긴 교화를 추억하고
以爲後人之師法(이위후인지사법)/후세 사람들이 본보기로 삼아야 하는데
而盡毁之(이진훼지)/모두 헐어 버렸다.
以充各廳火木爲邑宰者(이충각청화목위읍재자)/각 관청에서 충당하는 불 때는 나무는 수령을 위한 것이니
有一於此罪(유일어차죄)/여기에 죄가 하나라도 있으면
不容於王法(불용어왕법)/나라의 법령으로 용서하지 않는데
而況兼而有之乎(이황겸이유지호)/더구나 이 두 가지가 모두 해당되는 경우이겠습니까?
春秋討逆之法(춘추토역지법)/《춘추》의 역적을 다스리는 법은
人人得以誅之(인인득이주지)/사람마다 잡아 베어야 하지만
名正言順(명정언순)/이름도 바르고 말도 순한데
而謂公爲謀主(이위공위모주)/공(公)이 주모자라고 말하였지만
又謂奇松沙所厚(우위기송사소후)/또한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께서도 후대하였는데
枉被殺死時(왕피살사시)/잘못되어 잡혀 죽을 때
輩之無忌(배지무기)/무리들은 거리낌 없이
奸細之構誣(간세지구무)/간사하게 무고로 얽었으니
可勝誅哉(가승주재)/이루 다 주벌할 수 있겠는가?
公之有功(공지유공)/공(公)은 공(功)이 있고
而無罪被誣(이무죄피무)/죄가 없는데도 무고함을 당하였으니
而抱寃可以建天地質鬼神(이포원가이건천지질귀신)/품은 원통함을 하늘과 땅을 세우고 귀신(鬼神)에게 물어보아도
而無疑矣(이무의의)/의심이 있을 수 없다.
百世之後(백세지후)/백세가 흐른 뒤에
必有公議之不泯(필유공의지불민)/반드시 공의(公議)가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니
惟竢知者知之(유사지자지지)/생각건대 지혜로운 자가 알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難與不知者道也(지지난여부지자도야)/알지 못하는 자와는 말하기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公之配淑夫人光山金氏洪權女(공지배숙부인광산김씨홍권여)/공(公)의 아내는 숙부인 광산김씨로 홍권(洪權)의 따님인데
聞公之死卽欲絶粒下從(문공지사즉욕절입하종)/공(公)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즉시 밥을 끊고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而旋念尊姑在堂(이선염존고재당)/돌이켜 생각하면 시어머니께서 집에 계시고
諸孤滿室(제고만실)/집안 가득한 여러 아들들이
隱忍不死(은인불사)/은근히 참고 죽지 말라고 하였는데
終至成立家事(종지성립가사)/마침내 집안일을 세워 이룩하게 되었으니
可謂賢矣(가위현의)/가히 현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凡擧三男三女(범거삼남삼녀)/무릇 3남 3여를 낳았으니
男長遇燦議官(남장우찬의관)/장남 우찬(遇燦)은 벼슬이 의관(議官)이고
次遇卿參奉(차우경참봉)/차남 우경(遇卿)은 참봉이며
次遇權(차우권)/삼남은 우권(遇權)이다.
女適朴正錫梁周煥曺道基(여적박정석양주환조도기)/따님의 사위는 벅정석(朴正錫), 양주환(梁周煥), 조도기(曺道基)이다.
公之葬初在終南壬坐之原(공지장초재종남임좌지원)/공(公)을 처음에는 종남(終南)의 임좌지원(壬坐之原)으로 장사지냈는데
後以宅兆不利(후이택조불리)/뒤에 무덤 터가 이롭지 않다는 점괘로
移窆于葛馬甲坐之原(이폄우갈마갑좌지원)/갈마(葛馬)로 이장하여 갑자지원(甲坐之原)으로 모셨다.
遇燦謁余而泣曰(우찬알여이읍왈)/우찬(遇燦)이 나에게 울면서 고하며 말하기를
先人之功烈(선인지공열)/“돌아가신 아버지의 커다란 공적은
如彼其卓卓(여피기탁탁)/그처럼 뛰어 난데
而抱寃而歸(이포원이귀)/원통함을 품고 돌아가셨으니
叩地叫天(고지규천)/땅을 치고 하늘에 외쳐도
無所逮及(무소체급)/미치지 못하여
迄未蒙伸雪之擧(흘미몽신설지거)/아직도 원한을 풀고 치욕을 씻는 일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데
今則世運變嬗(금칙세운변선)/이제 세상의 운이 변하고 바뀌었지만
國事罔極訴寃無地(국사망극소원무지)/나라 일이 망극하여 원통함을 하소연할 곳이 없어
不肖之罪(불초지죄)/불초하게도 죄를 지었는데
於是益功(어시익공)/ 이에 더욱 공치사(功致辭)하는 것은
惟有記述狀德(유유기술장덕)/ 오로지 행장(行狀)을 기술할 수 있다면
以俟後世(이사후세)/후세를 기다려야 하는데
而四顧無肯爲吾先人把筆者(이사고무긍위오선인파필자)/사방을 돌아보아도 저의 선인을 위하여 기꺼이 붓을 잡을 자가 없습니다.
惟公與先人情誼有素(유공여선인정의유소)/생각건대 공(公)과 선인(先人)은 평소에 정의(情誼)가 있어
敢邀惠一言(감요혜일언)/감히 은혜로운 한 말씀을 구하옵니다.
將以請於作家(장이청어작가)/장차 작가에게 청하고자 했지만
願公無讓焉(원공무양언)/바라옵건대 공(公)께서는 사양치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余不忍辭(여불인사)/내가 차마 사양할 수 없고
亦不忍文(역불인문)/또한 차마 글을 짓지도 못하지만
因竊念在昔高麗元帥金公得培(인절염왕석고려원수금공득배)/따라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옛적 고려 때 원수 김득배(元帥 金得培)공은
破紅巾復松京(파홍건복송경)/홍건적을 격파하고 수도 송도(松都)를 회복하였는데
未及受賞(미급수상)/상을 받지 못하고
爲奸臣金鏞所構梟首尙州(위간신김용소구효수상주)/간신 김용(金鏞)이 얽어 상주(尙州)에서 효수를 당하였다.
圃隱鄭文忠公哭之曰(포은정문충공곡지왈)/포은 정문충공[정몽주]이 울면서 말하기를
遂使泰山之功(수사태산지공)/“마침내 태산 같은 공(功)을 세웠는데
轉爲鋒刃之血(전위봉인지혈)/도리어 칼날에 피를 묻히게 했으니
吾知其忠魂壯魄(오지기충혼장백)/나는 안다, 그의 충성스런 혼과 장한 넋이
千秋萬世必飮血於九泉之下(천추만세필음혈어구천지하)/천추 만 세대에 반드시 구천 아래에서 피를 머금고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嗚呼(오호)/오호,
若金公雖寃死(약금공수원사)/만약 김공(김득배)이 억울하게 죽었다 할지라도
旋得文忠之筆(선득문충지필)/도리어 문충공(정몽주)의 글을 얻고
至今不朽(지금불후)/지금도 썩지 않고 있으니
而公之寃死(이공지원사)/공(公, 정석진)이 억울하게 죽었어도
實與金公相符(실여금공상부)/사실은 더불어 김공(金公, 김득배)과 서로 부합하니
而誰能爲之褒揚哉(이수능위지포양재)/누구든지 능히 표창(表彰)하고 선양(宣揚)할만 하다.
雖然松沙奇公(수연송사기공)/비록 그러하였지만 송사 기공(奇公, 奇宇萬)은 《난파유고》의 시문에서
以義吾義死吾死詡之(이의오의사오사후지)/ ‘내가 의로우면 나의 죽음도 의로운 죽음이다’라고 자랑 하였으며
招討閔公以干城才稱之(초토민공이간성재칭지)/초토사 민공(閔公)은 간성(干城)의 인재로 칭찬하면서
以此報於政府(이차보어정부)/이것을 정부에 보고하였다.
轉運使趙公弼永(전운사조공필영)/전운사 조필영(趙弼永) 공은
將欲訟寃而未果(장욕송원이미과)/장차 억울함을 논쟁하려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는데
直指李公以勒構寃死狀(직지이공이륵구원사장)/호남직지사 이겅(李公, 李承旭)은 억지로 없는 죄를 얽어 억울하게 죽었다는 상소장을
密啓于上(밀계우상)/비밀리에 임금께 아뢰었으며
州之多士以公寃死事聯訴于觀察使及繡衣者(주지다사이공원사사연소우관찰사급수의자)/고을의 다사(多士)들도 공(公)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일을 잇달아 관찰사와 암행어사에게 하소연하는 것이
不止一再(부지일재)/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는데
今雖未得伸雪(금수미득신설)/비록 지금도 억울한 죄를 펴거나 씻지도 못하였지만
亦足以徵信於來後矣(역족이징신어래후의)/또한 뒷날에 증거 삼아 믿기에 충분하니
遂爲之撰次如右(수위지찬차여)/마침내 우(右)와 같이 차례를 매겨 지었으니
以俟立言君子之裁擇焉(이사입언군자지재택언)/후세에 모범이 될 만한 훌륭한 말을 남기는 군자들이 취사선택하기를 기다리노라.
崇禎五辛亥臘月上幹錦城吳駿善撰(숭정오신해납월상간금성오준선찬)/1911년 신해년 음력 섣달 상순에, 금성 오준선(吳駿善) 짓다.
<해설>
◯鄭軾(정식/1407-1467)은 1432년 식년시에 합격하였으며, 자는 憑甫, 시호가 景武, 본관 나주, 관직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이다.
◯明堂里(명당리)는 오늘날 나주시 산정동 일대를 말하는데, 필자가 사는 錦溪里 바로 옆이다.
◯母夫人(모부인)은 남의 어머니를 높여 부른 말이니, 이는 곧 글쓴이(錦城 吳駿善)가 정석진의 어머니를 두고 호칭한 것이다.
◯加人數等(가인수등)은 다른 사람보다 몇 배나 더하다,
◯鬩(혁)의 원문 해독을 겨우 했다,
鬩墻(혁장)은 담 안에서 다투다,
◯書塾(서숙)은 사사로이 한문을 가르치는 곳을 이르던 말, 글방, 서당, 서재, 학당,
◯初事(초사)는 직역하면 “처음 하는 일”이지만 “처음 섬기다”의 뜻이 있다.
앞글에서도 “事世祖/세조를 섬겨”란 구절이 있음을 보았다.
◯辟(벽)은 임금, 제후, 장관 등의 뜻이 있는데, 난파유고집에서는 민종열을 후작으로 지칭하고 있음으로 제후의 뜻이 맞다고 본다.
◯王師(왕사)는 직역하면 임금이 거느린 군사, 여기서는 京軍으로 해석코자함,
◯行伍(행오)는 군대를 지칭함,
◯吏民(이민)은 아전과 백성
◯砧山之役(침산지역)은 침산의 싸움, 여기서 침산은 오늘날 광주광역시 광산구 동곡동 일대(꽃게장 집이 유명한 곳)이다.
◯望風(망풍)은 풍문만 듣고, 소문만 듣고,
◯仙巖(선암)은 討平日記에도 언급되었는데, 오늘날 광주 지역으로 침산지역 인근 같이 여겨진다.
추후에 정확한 위치를 추적할 것이다.
◯ “衝火放砲/불을 지르고 포를 쏘다” “明火放砲/횟불을 밝혀 포를 쏘다”이다.
冲은 돌진하다, 돌파하다란 뜻이 있으니
“冲火放砲/횃불로 돌진하며 포를 쏘다” 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誑誘(광유)는 속이다, 속여 유인하다,
◯疇昔(주석)은 이전, 옛날, 예전,
◯不伐(불벌)은 功을 자랑하지 않다,
◯薙髮(치발)은 머리를 깎다, 여기서는 “상투를 자르다”로 해석하는 것이 역사논리와 맞는 것 같다.
◯“公曰(공왈)/公이 말하기를
頭可斷髮不可斷(두가단발불가단)/“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내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라고 하면서
終不屈(종불굴)/끝내 굴복하지 않았는데”의 말은
안종수의 강압에도 정석진은 상투를 자르지 않았다는 의미 같다.
◯播遷(파천)은 임금이 도성을 떠나 난리를 피하는 일을 이르던 말,
閔 황후가 일본 자객에게 살해되자, 고종왕은 위험을 느끼고, 러시아 대사관으로 몸을 피신한 것을 말한다.
◯持公(지공)은 공공성을 가지다란 말 같다.
즉 상투를 자르는 것이 공공성을 가지다란 의미로 표현한 것 같다.
◯公所(공소)는 사무소,
◯指使(지사)는 일을 시키고자 지휘하여 부림, 使嗾, 부추기다,
◯指嗾(지주)는 使嗾, 달래고 꾀어서 부림
◯闔境(합경)은 領內
◯憤惋(분완)은 통분하게 여기다,
◯供招(공초)는 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하는 일,
◯“炳旭俯首無語竟害之/김병욱은 머리를 숙인 체 말이 없다가 마침내 해치고야 말았으니
卽三月十一日也(즉삼월십일일야)/곧 3월 11일(양력4월23일)이었다.”의 음미
이 말은 3월11일(양력4월23일) 정석진을 처형했다는 말이다.
우리가 단발령 의거라고 말하는 단발령은 1895년 음력 11월17일을
양력으로 1896년 1월1일로 시작하면서 음력을 폐지하였다.
그런데 한편 당시상황을 필자가 이미 나주초등학교 백년사에서 발표한 바 상황은 다음과 같다.
「1896년 2월 27일(음력 1월15일) 나주 향교 제일(祭日)에 장성의 기우만(奇宇萬)이 나주 선비들에게 통문을 전달하였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진란 때 우리 국토를 더럽힌 일인들이 다시 들어와 국모를 시해하고, 삭발을 강요하며, 고종임금은 러시아 공관에 피신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이런 못된 짓을 자행하는 왜인들을 우리나라에서 쫓아내자는 것이다.
1896년 3월 17일(음력2월4일) 나주지역에서 의거에 동참하고자 하는 100여인이 연기(連記)서명한 통문(通文)을 장성 창의소(倡義所)에 보내졌다.
1896년 3월18일(음력2월5일) 동학군 진압에 공이 많았던 나주 관찰부 주사(主事) 정석진(鄭錫珍)이 해남군수로 승진 발령 되어, 나주 향교에 가서 유림들에게 의거가 너무 늦었으니 마땅히 다른 고을에 앞장서 의병을 일으켜야 한다고 격려하자 이에 동조 하였다.
1896년 3월 21일(음력2월8일) 참서관 안종수의 열 가지 죄상을 성토한 통문이 나주인에게 전달되었다.
1896년 3월 22일(음력2월9일) 정석진의 해남군수로 부임하는 환송이 있었으며, 영산포 나루까지 전송을 마친 김창곤과 정석진의 동료인 군교(軍校)들이 돌아와 곧바로 관찰부 정청에 들어가 안종수 등을 죽이고 단발에 앞장선 자들을 구타하는 등 사건이 발발하였다.
1896년 3월23일 나주에 창의소가 설치되고 의거를 체계적으로 추진하는 인적 구성도 하였다.
그러나 어찌 관군을 이기랴,
1896년 4월17일(음력3월5일) 전주의 진위대장 김병욱이 나주를 입성하자, 관군은 삼엄한 경비 하에 수색, 추적, 체포 하는 과정에서 주모자 김창곤과 그 외 연루자가 속속 검거되었으며, 나주 고을은 발칵 뒤집혀 전전긍긍 하였다. 그 배후에서 조종하였다는 이유로 해남군수로 갔던 정석진이 압송되었고 담양군수로 간 민종열도 잡아들였다.
이 사건의 계기가 정석진 군수가 사주한 것으로 되어 4월23일(음력3월11일) 사형이 집행되고, 사건을 주도했던 김창곤과 그의 장남 김종석까지 무학당에서 죽임을 당하였다고 한다.
1896년 5월 28일(음력4월16일) 민심이 수습되자 윤헌 관찰사와 이우규 나주 군수가 부임하였다. 」
※날짜의 ( )내서는 필자가 환산한 음력 날짜이다. 양음력을 환산하고 보니 각기록마다 양음력은 혼용하면서 양음력을 구분하지 않았기에 혼동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위 글을 보면 정석진은 1896년 3월24일(음력2월11일) 나주에서 해남군수로 부임해 떠나간 날이고, 4월22일(음력 3월10일)에 나주로 압송되어 처형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 蘭坡遺稿 行狀의 기록은 3월21일(이것이 양력이라면 음력2월6일이다) 정석진이 처형되는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
그런데 蘭坡遺稿 卷之二의 祭文 글에서도 제사의 날자가 5월25일이었다. 이 말은 5월26일(이것이 양력이라면 음력으로 4월14일이다) 날 처형되었다는 말이란 뜻이다.
제삿날은 죽기 전날 즉 살아있는 마지막 날이기 때문이다.
한편 李炳壽가 기록한 금성정의록 丙編에는
1896년 2월 초9일(양력3월22일) 새벽에 해남군수로 나주에서 떠나는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단발령 의거가 일어난 날이 1896년 2월 초9일(양력3월22일)이란 말이다.
<금성정의록 발췌>
「초9일, 새벽에 해남현감(海南縣監) 정석진(鄭錫珍)이 부임길을 떠나면서 본 향교에 들려 선생께 참배하고 이주서(李注書) 및 여러 유생들과 1시간이 넘도록 이야기하며 이 국란을 극복해야 한다고 격려하고,
“급한 일이 있을 때는 당연히 밤중이라도 달려오겠다.”
하며 곧 길을 떠나갔다. 그래서 수성하는 군교들도 모두 전송차로 밖을 나갔다.
이 날 오전 10시 경에 교복(校僕)이 밖으로부터 바삐 들어와 아뢰기를,
“성 안에서 큰 소동이 일어나 고을 아전과 군교 수백 명이 관사로 들어가서 참서관을 잡아 죽였는데, 박총순(朴摠巡)·여순검(呂巡檢) 2사람도 역시 맞아 죽고, 박시찰(朴視察)·복주사(卜主事) 등 6사람은 모두 잡혀 갇히곤 하여 광경이 몹시 해괴하다.”
고 하였다.」
필자가 양/음력을 환산해보니, 李炳壽가 쓴 금성정의록 丙編의 2월9일은 음력이고, 3월22일은 양력의 날이었다.
이후의 관공서 기록은 양력으로 기록되었겠지만, 양력에 익숙치 못한 민간인들은 음력으로 기록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같은 사건의 날짜도 기록마다 다른 것은 양력과 음력의 표기 차이라고 보여 진다.
이 부분은 유집 전체를 번역하고, 타 문서의 기록도 비교하여 정확히 정리하고자 한다.
◯閔황후 시해: 1895년(을미년) 10월8일(음력 8월20일임/고종실록 참조)
◯고종의 俄館播遷: 1896년 2월11일 - 慶運宮(지금의 덕수궁) 환궁: 1897년 2월20일(양력임/고종실록 참조)
※http://www.wildlife.re.kr/lunar-calendar/calendar.html 양음력 환산 도구
◯綸使(윤사)는 官員
◯梟首(효수)는 목을 베다,
◯睟容(수용)은 임금의 얼굴을 그린 그림, 영정, 임금의 화상,
◯兩殿(양전)은 전주에 있는 慶基殿과 御容殿을 말함,
◯剽略(표약)은 사로잡다,
◯望賀禮(망하례)는 조선 시대, 나라의 경사스러운 날에 고을 수령이 전패에 절하던 예식,
客館에 殿牌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왕궁을 향해 望闕禮를 드렸는데, 나주 錦城館이 그러한 장소로 활용되었다.
◯版籍(판적)은 호적, 版圖와 호적, 토지와 호적을 기록한 장부,
◯式負版者(식부판자)는 직역하면 “나라의 호적과 지도를 가진 자에게는 절을 하였다.”란 뜻,
논어 향당편에서 나온 말이다.
◯前侯(전후)는 문맥으로 보아 前 侯爵이다.
前 侯爵은 閔種烈 牧使를 지칭한 것이다.
◯“版籍者人命之所繫也(판적자인명지소계야)/戶籍을 가진 자에게 사람의 목숨이 매달려 있는 바
聖人式負版者(성인식부판자)/聖人께서도 나라의 戶籍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경의를 표시하였는데
而盡爲曳出(이진위예출)/(호적을) 다 끄집어내 보니
以付塗壁休紙(이부도벽휴지)/塗壁으로 붙일 정도로 휴지였다.”의 음미
조선조 말까지 우리나라 사람은 姓을 가진 자가 30% 정도 였다는 설이 있다.
거의 70%는 성이 없는 서민들이었다.
그런데 일제가 이 땅에 들어와 개화를 빙자하여, 甲午更張 이후에 모든 사람들은 姓을 의무적으로 갖도록 하였다.
즉 호적을 가진 자와 못가진 자가 곧 양반과 상놈의 구분이었는데, 모두 호적을 갖게 하므로 호적이란 것이 한갓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는 뜻으로 필자는 이해된다.
◯謀主(모주)는 어떤 일의 중심이 되어 꾸며 나가는 사람, 주모자,
◯奇宇萬(기우만)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 당시 유생들이 농민군에 가담한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며, 1895년 나주에 동학당 토평비를 세울 때 비문을 지었다.
을미사변에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를 반대하는 극렬한 상소를 올렸다. 1896년 2월 유인석(柳麟錫)의 격문이 이르자 3월에 광주향교에 들어가 거사를 의논했으며, 기삼연(奇參衍)이 장성의 의병을 이끌고 합류하자 광주의 광산관(光山館)을 본영으로 삼고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고종이 신기선(申箕善) 등을 선유사(宣諭使)로 보내어 해산할 것을 명하자 이에 응했다.
5월에 다시 기병했으나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908년 순천 조계산의 암자에서 재기를 노리던 중 고종의 강제퇴위 소식을 듣고 은둔했다. 저서로 〈송사집〉이 있다. 1980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絶粒(절입)은 직역하면 식량이 떨어졌다는 말인데, 여기서는 밥을 끊다 라는 말.
◯下從(하종)은 자결, 따라 죽다,
◯尊姑(존고)는 시어머니를 높여 부른 말,
시어머니는 정석진의 부인측에서 보면 정석진의 모친이 시어머니인 것이다.
이 글 쓴이는 정석진의 모친을 尊姑로 호칭한 것 같다.
◯議官(의관)은 조선 말기, 1895(고종 32)년에 두었던 중추원(中樞院)의 한 벼슬.
대한 제국, 1905(광무 9)년에 찬의(贊議)로 고쳤다.
◯終南(종남)은 영암군 종남면을 말한다.
◯葛馬(갈마)라는 오늘날 광주광역시 산수동 근처로 여겨진다.
◯狀德(장덕)은 行狀,
◯金得培(김득배)는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을 지내고, 전객부령(典客副令)으로 강릉대군(뒤의 공민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宿衛)했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우부대언(右副代言)이 되었으나, 조일신(趙日新)의 무고로 파직되었다.
1359년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가 되었으며, 그해 6월에 기철(奇轍)을 숙청한 공으로 2등공신에 올랐다. 같은 해 겨울에 홍건적이 침입하여 의주(義州)·정주(靜州)·인주(麟州) 등지가 함락되자, 서북면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가 되어 도원수 이암(李嵒), 부원수 경천흥(慶千興)과 더불어 적에 대비했으나 서경이 함락되었다.
그뒤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서경을 탈환하고 압록강 밖으로 적을 격퇴시켰다.
이 공으로 1360년 수충보절정원공신(輸忠保節定遠功臣)에 책봉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
1361년 다시 20만의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삭주(朔州) 이성(泥城)으로 침입하자 서북면도병마사가 되어 이를 방어했으나, 안주(安州)에서 크게 패하여 개경까지 함락되었다.
이듬해 총병관 정세운(鄭世雲)의 지휘로 안우·이방실·최영·이성계 등과 함께 20만의 군사를 이끌고 적 10만여 명을 죽이고 개경을 수복했다. 이때 정세운과 권력을 다투던 평장사 김용(金鏞)의 간계로 정세운·안우가 모살되자, 그도 체포되어 상주에서 효수되었다.
그의 문하생 정몽주가 왕에게 청하여 시신을 거두고 장사지냈다.
그뒤 1392년(공양왕 4) 누명이 벗겨졌다.
◯轉爲鋒刃之血(전위봉인지혈)은 도리어 칼날의 피가 되다,
즉 이 말은 도리어 칼날에 피를 묻히다란 뜻
정몽주의 祭金得培文에 보면
奈何汗馬未乾。凱歌未罷。遂使泰山之功。轉爲鋒刃之血歟。此吾所以泣血而問於天者也。吾知其忠魂壯魄。千秋萬歲。必飮泣於九泉之下。嗚呼命也。如之何如之何。
어찌하여 말[馬]에 땀이 마르지 아니하고 개가(凱歌)를 마치기도 전에 태산 같은 공을 도로 칼날의 피로 만드는고. 이것을 내가 피맺히게 하늘에 묻는 바이다. 나는 안다. 그 충혼과 장백(壯魄)이 천추만대에 반드시 구천 아래에서 울고 있을 것이다. 아, 슬프다. 명이구나. 어찌할꼬. 어찌할꼬.
위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金鏞(김용)은 ?∼1363(공민왕 12). 고려 후기의 정치가. 본관은 안성.
1352년(공민왕 1) 연저수종공신(燕邸隨從功臣) 1등에 봉하여졌고,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된 뒤 수충분의공신(輸忠奮義功臣)의 호를 받았다. 조일신의 난이 일어났을 때 궁중에서 숙직하면서도 적을 막지 않고 홀로 무사하였다고 하여 마침내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1354년 원나라의 요청으로 장사성(張士誠)을 토벌할 군대를 조직할 때 안성군(安城君)에 봉해져서 이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돌아와서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에 제수되었고, 그뒤 홍의(洪義)·정세운(鄭世雲) 등과 함께 일의 대소를 막론하고 모든 정사를 마음대로 하였다.
한편, 이들과 권행(權幸)을 다투던 김보(金普)가 어머니상을 당하자 비밀리에 행성도사(行省都事) 최개(崔介)를 설득하여 왕에게 백관들로 하여금 삼년상을 행하도록 청하여 김보를 견제하려고 왕지(王旨)를 고친 사건이 발각되어 제주로 유배되었다.
1356년 기철(奇轍)일당을 제거한 뒤 다시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으며, 1358년에는 중서문하시랑평장사(中書門下侍郎平章事)가 되었다. 순군만호(巡軍萬戶)가 되어서는 무뢰배들을 모아 순군에 두고 항상 자기를 따르게 하였으며, 1361년 홍건적이 쳐들어오자 총병관(摠兵官)으로 임명되어 이를 방어하였다.
1362년 평소 사이가 나쁜 정세운이 홍건적과의 전투에서 공을 크게 세우자 이를 시기하여 음모를 꾸며 안우(安祐)·김득배(金得培)·이방실(李芳實)로 하여금 죽이게 한 다음, 안우 등이 주장(主將)인 정세운을 살해하였다는 죄목으로 이를 또한 참살하였다.
그뒤 찬성사(贊成事)에 올랐으며, 홍건적이 침입하였을 때 쉽게 항복하여 군(郡)으로 강등된 수원부(水原府)에 대하여 주민들의 뇌물을 받고 다시 부로 승격시켜 주었다.
1363년 순군제조(巡軍提調)가 되어 흥왕사(興王寺)의 행궁에 머무르고 있던 왕을 시해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우정승 홍언박(洪彦博) 등을 살해하였다. 이 음모가 실패하자 도리어 난병을 토벌하고 비밀을 유지하기 위하여 잡힌 자는 모두 죽여 난이 진압된 뒤에는 오히려 일등공신에 봉하여졌다.
그러나 마침내 그와같은 사실이 드러나 밀성군(密城郡: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에 유배되었다가 계림부(鷄林府:지금의 경주)로 옮겨진 뒤 처형되었다.
◯飮血(음혈)은 피를 마시다, 눈물을 삼키다, 흐느껴 울다,
◯以義吾義死吾死詡之(이의오의사오사후지)의 풀이
나의 義가 義로우면 나의 죽음도 義로운 죽음이다,
송사 기우만의 贈蘭坡序에 보면
“若鄭君者以義吾義死吾死爲秉執(야정군자이의오의사오사위병집)/鄭君 같은 자가 ‘내가 의로우면 나의 죽음도 의로운 죽음이다’라는 것을 떳떳한 본성으로 삼았는데도
在外之賞爵(재외지상작)/포상과 작위에서 제외 되었으니”란 구절이 있다.
◯秉執(병집)은 떳떳한 본성을 잡다, 본래 갖고 있는 것,
◯趙弼永(조필영)은 년(고종 20) 김제군수로서 전 장흥부사 윤(尹)의 비행에 대하여 사정관(査正官)이 되었고 그뒤 대구판관으로서 각종 일을 잘 처리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1886년 이후 총무관(總務官)으로서 호남전운사(湖南轉運使)가 되었는데 당시 직권을 이용, 수세미에 대한 불법수탈을 자행함으로써 동학농민혁명운동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1894년 전라도 강진현 고금도에 유배되었다가 그 이듬해 석방되었다.
그뒤 1904년에는 내장원경(內藏院卿)이 되었다.
◯李承旭(이승욱)은 조선왕조실록 고종조에 보면 幼學이었다.
순종조(1911년)의 실록을 보면 日省錄 편집원을 대신하였다.
한편 인터넷 경매에 나온 고문헌을 보면 高宗搢紳錄에서 나주 향교에 보낸 통문에 湖南直指使 李承旭란 기록이 보인다.
※直指使는 漢나라 때 조정에서 직접 지방에 파견하여 문제를 처리했던 벼슬로 우리나라 암행어사와 같다. 그런데 구한말에 그러한 벼슬로 나주에 온 듯하다.
조선 말기의 학자 김녹휴(金祿休)의 시문집인 莘湖集 해설 내용에
“「답이직지사(答李直指使)」는 1898년(광무 2) 직지사 이승욱(李承旭)에게 종사(宗事)에 관하여 협조를 요청한 편지이고, 조성가에게 보낸 「답조직교(答趙直敎)」ㆍ「여조직교(與趙直敎)」 등 10여 편의 편지는 2년 전에 일어난 동학란을 비롯하여 민비시해사건과 단발령 등에 항거하여 일어난 의병운동의 단편적 상황 설명과 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란 기록이 있다.
◯裁擇(재택)은 취사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