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림리 마을 연혁
상림리 가분(駕紛)마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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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면사무소에서 동쪽으로 6km 지점 해발 10m에 위치한 중산간마을이다. 서기 1010년대 고려 초기 현종(顯宗)때 부안임씨(扶安林氏) 시조인 임계미(林季美)는 벼슬이 평장사 태사(太師)에까지 올랐으나 정적의 모함으로 왕이 차마 목을 벨 수 없어 평택 나루터에서 임계미(林季美)를 포함 세 사람을 배에 태워 띄웠는데 표류하다 보안현 안흥창(남포리)에 표백하여 천명으로 살았다 한다.
그 후 고려 조정에서 평원부원군이 작호와 보안백(保安伯)에 봉작하여 현 상림리에 터를 잡고 자손이 번창했다. 그 후 임충남(林忠男), 임귀남(林貴男) 형제는 정유재란 때 현재 개암사 앞 장밭(현 장전리) 뜰 철새밭에서 노약자, 아녀자 등과 집단 피난 중 충남, 귀남 두 어린애의 울음소리에 우는 어린애를 죽이자는 여론이 일자 고부이씨인 어머니는 두 아이(忠男, 貴男)를 안고 현재 큰숲말(원상림) 임창길(林昌佶) 집 뒤편 감나무 밑에 오두막집을 짓고 모자가 외로이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왜구가 급습했으나 밥만 해먹고 집 근처 숲속에서 피하여 생활했기 때문에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 때 왜군이 숲속을 뒤지던 중 원인모르는 피리소리에 놀라 도망간 후로 곧바로 이 지역이 평정되어 간신히 살게 되었다고 전한다. 멍에뜰(駕野), 망자뜰(駕洞 : 옛날에는 망대가 있었다 함) 이라는 이름으로 보아 가야(駕野)마을 뒷산에 소의 멍에(駕)모양을 이루고 앞에는 들(野)이 있어 멍에뜰(駕野)로 칭하고, 분동(粉洞)마을 앞들이 병목현상이 되도록 쭉 뻗어 내려온 산줄기를 분토(粉土)줄기라 이르러 분토산(粉土山)이라 칭하고 분토산(粉土山) 남쪽에 점한 마을은 분동(粉洞)마을이라 칭하였다 한다. 1963년 가야와 분동을 합병 가분이라 칭하였으며 분토산을 와우상(臥牛像 : 누어있는 소)이라고도 하였다.
(자료제공 : 임창식·임대근·김용
상림리 상석교(上石橋) 마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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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면사무소에서 동북쪽으로 7.2km지점 해발 20m에 위치한 중산간마을이다. 촌락을 이룰 당시 정읍군 관청리, 신흥리 흥원, 그리고 상석교, 하석교를 잇는 큰 징검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그 징검다리 즉 돌다리를 중심으로 해서 아랫마을은 아랫독다리 위에 있다고 하여 윗독다리 즉 상석교라고 하였다. 1972년 신성산 마을을 합병하여 오늘의 상석교 마을이 되었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전 조선 말기 상석교에서 동남쪽으로 약 1.2km 지점 부곡 및 흥원 앞은 넓은 늪지대를 이루고 있었다한다.
그 늪지대를 다니기 위하여 각 마을 사람들이 동원되어 징검다리를 놓아 편히 다닐 수 있게 한 것이 마을 이름이 되었다. 그 후 1922년경 왜정 때 늪지대를 흙으로 메꾸워 논을 만든 과정에서 징검다리 즉 돌다리는 형태가 없어지게 되고 대신 마을이름으로 만이 남게 된 것이다. 지금은 상석교에 편입되어 있지만 그 옛날 신성산이란 마을은 토성이 있었다 하고 지금도 토성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토성 주위에서는 동학혁명 때 쓰던 것으로 보이는 깃대도 발굴되었다. 신성산이란 마을은 토성이 완공된 뒤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해서 새성매 즉 신성산이라 한다. 이곳엔 옛날 장군묘라고 하는 큰 무덤이 있었는데 지금도 묘의 봉문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후에 도벌꾼들이 묘를 파헤쳐 귀중한 자기류와 칼 등 유물을 가져갔다 한다. 또한 마을 뒤 언덕은 옛날엔 소나무 숲이었으나 그 소나무를 베고 밭을 일구워 작물재배하면서부터 마을이 빈촌으로 기울게 되었으나 소나무숲을 벌목한 날 밤 마을사람들의 꿈에 마을에서 금빛 찬란한 송아지가 소부곡쪽으로 뛰어 가는 것이 선몽되었다 한다.
즉 마을의 업이 나간 것이다고 구전되고 있다. 그 후 다시 숲을 만들어 보았지만 한 번 나간 업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다. 이 이야기는 마을에서 옛날부터 구전으로 내려오는 설화이지만 조선조 말기 왜정 36년의 피폐된 생활성과 연결된 주민들의 체험인 듯 하다. 해방과 6.25를 겪는 동안 마을 성쇄가 교차되는 동안 상석교마을은 착실히 성장 오늘에 이르렀다. (자료제공 : 이종용·고석진·이진백)
상림리 원상림(元上林)마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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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면사무소에서 동북쪽으로 7km 지점 해발 30m에 위치한 중산간 마을이다. 옛 마을 이름은 숲말, 숲촌, 숲마을이라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보안임씨(保安林氏) 18세손인 충남(忠男)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임진왜란을 피난하기 위하여 여기저기 피하여 다니던 중 숲이 거창하게 우거진 이곳에 숨어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움막을 치고 난민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였다 한다.
숲의 우거진 형태 및 지형을 보고 숲이 조금 덜 우거진데는 작은 숲마을(현재 하림), 더 많이 우거진 지형으로 생긴 곳을 큰숲마을(현재 元上林)이라 부르면서 피난 생활을 하여 오던중 어느날 이곳가지 왜군들의 습격이 있었다 한다. 그러나 숲이 어찌나 울창하게 우거지고 지형세가 험하든지 대낮인데도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숲(林)의 울창함과 크나큰 아름드리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 있어 왜군이 습격을 하였으나 찾지를 못하고 돌아갔다 한다.
지금도 외처에 가서 마을 이름을 숲말이라고 하면 기억을 하지만 원상림(元上林)이라 하면 모른다고 한다. 숲속의 피난 생활이 계속되면서 제일 어려운 것이 식수난이었다. 근처 여러 곳의 샘을 파보았지만 식수를 할 만한 물이 고이지를 않아 밤잠을 자지 않으면서까지 물을 구하려 여기저기 다녔다고 한다. 그렇게 물을 구하러 다니던 중 어느 여자 한사람이 큰 바윗돌에 옴폭 파여진 곳에 물이 고인 것을 치마폭에 감싸들고 돌아와 집 주위에 놓고 고인 물을 사용하는데 어떠한 영문인지 이상하게도 그 물이 줄어들지도 불어나지도 않아 후에는 큰숲말(元上林)전체가 사용하여도 그대로 있어 그 샘을 이상한 샘이라 하여 「별샘」이라 부르며 사용하면서 식수걱정을 덜었다 한다.
그 당시 아낙네들이 식수를 얻고자 헤매며 고생하는 것을 그 거대하게 울창했던 숲속의 신령이 가상히 여겨 그 고인물의 바윗돌을 내려보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고들 있으면서 1980년 정부에서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새마을사업의 일환으로 간이상수도를 지원 받아 시설하여 식수난을 해결하고 비가 오는 날이나 겨울에 눈이 녹은 후에는 마을 안길이 흙탕물에 빠져 다닐 수가 없다하여 속담에「부인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의 지리적 조건이 열악한 마을이었다.
(자료제공 : 김낙연·임영진·신중호
상림리 하림(下林)마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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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면사무소에서 동쪽으로 5km 지점 해발 10m에 위치한 평야마을이다. 하림마을에는 타원형의 반들반들한 큰 바윗돌이 하나 있는데 지금 사람들의 힘으로는 들어 운반하지 못할 만한 아주 큰 돌이다.
이 돌의 연대는 도저히 추측할 수 없으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 조상들 몇몇이 칡넝쿨을 이용하여 형상이 비슷한 두 개의 바윗돌 중 큰 바윗돌은 원상림(元上林)마을에, 조금 작은 바윗돌은 하림(下林)마을 가운데 부분에 각각 운반하여 상림과 하림마을을 구분했다는 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조금이나마 고증할 수 있는 자료는 조선조 선조 25년(서기1592년)경 임진왜란 당시 많은 사람들이 피난지로써 가장 적합한 곳이구나 하여 보안임씨의 18세손인 충남(忠男)은 큰 숲말 현재 임창길(林昌吉)의 집 뒤편에 감나무(지금도 뿌리 부분이 남아있음) 아래에 우두막집을 짓고 피난생활을 하던 중 왜군(倭軍)이 이곳까지 습격을 하였으나 밥만 해먹고 사람은 집근처 울창한 숲 속에 몸을 피하여 살았기 때문에 잡히지 않고 살았다 한다.
이와 같이 숲이 울창하여 자연스럽게 마을의 이름을 순수한 우리말로 부르기 쉽게 숲마을, 숲말, 숲촌 등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러다 아주 낮은 언덕너머 동쪽편으로도 사람이 살게 되어 큰 돌이 있는 곳은 큰숲말(지금의 원상림)이라 부르고, 작은 돌이 있는 곳을 작은숲말(지금의 하림)이라고 불러 내려오면서 하림(下林)이란 마을명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큰 숲말의 돌은 볼 수 있으나 작은 숲말의 돌은 새마을사업으로 안길 확장과 꽃동산 설치에 따라 꽃동산에 사장되어 볼 수 없음이 안타깝다.
(자료제공 : 임석근·변동운·임종근)
상림리 하석교(下石橋)마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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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면사무소에서 동북쪽으로 8km지점에 위치한 중산간 마을이다. 조선시대 보안현 입하면 교상리(交上里)와 교하리(交下里)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한일합방이 되면서 하석교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촌락을 이룰 당시 고부면 신흥리와 이 마을 사이 늪지대를 잇는 큰 징검다리가 있었다 하여 이름이 붙여진 돌다리는 그 위치에 따라 윗마을을 윗독다리, 그리고 아랫마을에 있었다고 하여 이 마을을 아랫독다리(下石橋)라고 칭하였다 한다.
지금부터 약 250여년 전 조선조 숙종 때 전주이씨 사직공 이만종(李萬種)이 이 마을에 터를 닦고 이경린(영조 대 동지 중추부사), 이상린(정조 때 성균관 진사) 두 형제를 출사시켜 당시로서는 대단한 부귀영화를 누렸다는 노인들의 구전이 전할 뿐이고 지금은 그 후예들도 인근 마을이나 또는 서울로 삶터를 찾아 흩어져 그 옛날의 누렸던 영화와 흔적은 찾아 볼수가 없어졌고 빈 집터만은 옛날을 말하려는 듯 마을 아이들의 놀이터로 변하여 남아 있다.
그 후 전주최씨 고령신씨 등이 터를 닦고 비교적 문필과 부유촌으로 이어지면서 외지로부터 부러움이 자자하여 부안군에서 살기 좋은 5대 지명 중 하나가 삼석교(三石橋)라고 하는 것 같다. 지금은 마을 앞 잘 다듬어진 농경지는 마을의 부유함을 보는 듯 하고 농로겸 부안과 정읍을 잇는 도로가 말끔히 포장되어 마을 진입로에 연결되어 교통이 한결 편리해진 마을로 변하여 있다.
마을 소유 경지면적은 호당 평균 1.3ha로 비교적 부유한 마을이면서 이곳에서 성장 또는 출생하여 각계에서 활발히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자료제공 :김희준·나순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