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경대(蔡慶大) |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
서대문(西大門) 형무소(刑務所) 수감당시 모습 | 채경대(蔡慶大) 연령(年齡): 개국(開國) 499년(年) 12월(月) 9일(日) 본적(本籍): 전라남도(全羅南道) 무안군(務安郡) 비금(飛禽) 지당(池溏) 624 주소(住所): 만주국(滿洲國) 봉천성(奉天省) 심양현(瀋陽縣) 영안촌(永安村) 어화원(御花園) 입소일(入所日): 소화(昭和) 13年(1938.2.16) 출소일(出所日): 소화(昭和) 14年(1939.5.23) 보석(保釋) |
인도교(人道敎)의 창교자 구악(龜岳) 채경대(蔡慶大), 호(號)는 구악(龜岳)은
단기 4223년(서기 1890년) 12월 9일에 전남(全南) 신안군(新案郡) 비금면(飛禽面) 지당리(池溏里)에서 태어났다.
유소년(幼少年) 시대(時代)에 고향(故鄕)에서 한문학(漢文學)을 ᄇᆡ우시고
25세(歲)되는 갑인(甲寅 1914年)에 장형님(長兄任, 蔡奎一)을 ᄯᅡ라서
보천교(普天敎)에 입도(入道)하엿스며,
채경대는 탁월한 식견과 비범한 언행으로 교주인 차경석(車京石)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아 최고위 간부 중의 한 명이 되었다.
1922년 14명의 동지(同志)들과 함게 보천교(普天敎)를 떠나
증산(甑山)의 탄강지인 객망리에 성전을 짓기 시작하여 1923년에 완공하였다.
그리고 전국 8도에 공소를 두고 포교와 수련에 매진하였다.
<참고자료> 보천교 연혁사, 상(上) |
동년(同年 1923) 11月 경(頃)에 소한주(小寒主) 채경대(蔡慶大)가 탈퇴(脫退)하다. 채경대 (蔡慶大)는 전남(全南) 무안군(務安郡) 비금면(飛禽面) 사람(人)이요, 채규일(蔡奎壹)의 친제(親弟)이라. 제주(濟州) 교도(敎徒)의게 교금(敎金) 2만여원(二萬餘圓)을 받아 낭비(浪費)하엿고 간음사(姦淫事)가 유(有)함으로 교주(敎主)께서 경계해 깨우치게(戒喩) 하시나 이를 불복(不服)하고 탈퇴(脫退)하다. 그 후에 고부(古阜) 객망리(客望里)에서 삼성교주(三聖敎主)라 자칭(自稱)하고 광가난무(狂歌亂舞)로 도통(道通)한다하야 보천교(普天敎) 사람(人)을 유인(誘引)하는 중(中)이다. |
갑자(甲子) 1924년(年) 3월(月)에 고부(古阜) 객망리(客望里) 성탄지(聖誕地)에 성전(聖殿)을 모시고
수천(數千)의 교인(敎人)을 포덕(布德)하섯스며
무진(戊辰 1928)년 겨울에 법사(法師) 귀신사(鬼神寺)에 들어가사 공부(工夫)을 시작하여
기사(己巳 1929) 4월(月)에 호신주(呼神呪)와 단주주(丹朱呪)을 어드시고, 105공사(公事)을 보섯스며,
105신명공사(神明公事)의 법도(法度)을 각(覺)하시니라.
경오(庚午 1930)년 사당(祠堂)에 선도종장증산신성(仙道宗長甑山神聖) 불도종장진묵대사(佛道宗長震默大師)
유도종장회암선생(儒道宗長晦菴先生) 등 삼성(三聖)을 봉안하고,
삼도합일공사(三道合一公事)을 보섯스며, 삼성교(三聖敎)라는 이름으로 포교하였다.
신미(辛未 1931)년 6월(月) 1일(日) 오후(午后) 2시(時), 신월암(新月庵)에서 대도(大道)을 어드시니
이ᄒᆡ가 바로 입도(入道 1914)하신 ᄒᆡ로붓터 18년(年)이러라.
도각후에 옛 동지들을 어렵게 모아 본사(本司)에 돌아와서
김형식(金亨植)과 임봉규(林鳳圭)과 삼인(三人)이 도원결의(桃園結義)을 하야 천하사(天下事)을 하자하고,
교단재건을 위한 치성(致誠)을 올렸다.
증산신성(甑山神聖)의 위패(位牌)을 중앙(中央)에,
동서남북(東西南北)으로 사명당(四明堂)을 써붓치고
남(南)ᄭᅩᆨ에 남두칠성(南斗七星)을 써붓치고 신위(神位)을 모셨다.
본사(本司)에 삼실(三室)의 조직을 만들어
법실(法室)은 김형식(金亨植)이 맡아 도법(道法)을 전수(傳受)하고
전수실(傳受室)은 김언수(金彦洙)가 맡아 심법(心法)을 전수(傳受)하고
운기실(運氣室)은 임봉규(林鳳圭)가 맡아 기전(氣傳)을 받은 후(后)에
출가(出家)에 서약(誓約)하고 포교(布敎)로 나서도록 하엿다.
1930년에 이르러 많은 보천교인이 증산교로 모여들어 교세는 6,000여 명으로 급격하게 늘어났다.
1936년 4월 조선총독부가 증산계 각 교단에 탄압을 가하자
그는 교단을 만주(滿洲)에 이전하기로 결심하고 그해 여름에 만주를 다녀왔으며,
김형식과 임봉규를 보내 농장개설과 교인촌 건설을 서두르도록 하였다.
그리고 만주이전계획에 찬성하는 교인 600여 세대로 新農社를 조직하고 만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만주로 먼저 보낸 두사람 봉악(鳳岳 金亨植)과 인악(麟岳 林鳳圭)은
법사님(法師任)과함게 공사(公事)로 결정(決定)한 서약(誓約)과는 달이
경성(京城) 정능(貞陵) 부근(附近) 산골자기에 공소(公所)집을 짓고 포교(布敎)을 시작하니라.
봉악(鳳岳 金亨植)과 인악(麟岳 林鳳圭)은 그 당시(當時)에 정능(貞陵) 부근(附近)에서
한약방(韓藥房)을하는 김지현(金智鉉)이라는 자(者)와 갓치
손을잡고 일을하려다가 막대(莫大)한 불행(不幸)을 초래(招來)하고 말앗다.
그 사람은 원래(元來)가 인면수심(人面獸心)으로 표리(表裏)가 부동(不同)하야
한편으로는 종교(宗敎)을 잘밋는체하면서, ᄯᅩ 한편(片)으로는 일인(日人)의 압재비가되야
내용(內容) 사정(事情)을 밀고(密告)함으로,
간부(幹部) 전원(全員)이 연행(連行)하야 고문(拷問)을 당(當)하고 옥(獄)사리을 하다가
우리 도인(道人)이 5명(名)이나 옥중(獄中)에서 순도(殉道)을하고 세상(世上)을 ᄯᅥ낫스니
그 중(中)에 인봉(麟鳳) 양인(兩人)도 포함(包含)되엿다 한다.
법사(法師)게서도 수원(水源)게시다가 수원(水源)경찰서로 연행(連行 1938.2.16))하야가시니라.
채경대는 2년 후에야 보석(1939.5.23)으로 풀려났다.(龜鑑)
* ‘인도교사건’은 1936년 7월 말 최언환(崔彦煥)이라는 자가 수원지역을 돌아다니며,
‘인도교에서 만주에 신농사(神農社)라는 회사를 만들어 농지를 구입해서 교인들에게 무료로 나누어줄것’이라고
포교하면서 기부금 등을 걷다가 1937년 2월 24일 체포되면서 전말이 드러났다. (국사편찬위)
이후 교주 채경대(蔡慶大) 등 주요간부 14명이 3월 말 체포될 당시에는
기타(其他) 간부(幹部)들은 각자(各自)의 연비(連比)에게 연락(連絡)하야
가산(家産)과 토지(土地)을 방매(放賣)하여 연원주(淵源主)에게 밧치고
연비(連比)들은 연원주(淵源主)을 ᄯᅡ라서 게속 만주(滿洲)로 들어가니라.
이ᄒᆡ가 정축(丁丑 1937) 무인(戊寅 1938) 양년(兩年)이라.
이미 그 세력이 경기도․ 강원도 등 국내 각지뿐만 아니라 만주방면까지 확장된 상태였다고 한다.
* 서대문(西大門) 형무소(刑務所) 수감〔소화(昭和) 13年(1938.2.16)~14年(1939.5.23)〕
채경대는 출소한 후 신농사(神農社)를 조직하여 만주 봉천성(奉天省)에 있는
박인촌(博仁村)으로 신도들을 집단 이주시켜 신농농장(神農農場)을 세웠고,
퉁화성 류허현 대전자촌(大甸子村) 부근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교인촌을 건설하였다.
감옥에서 나와 만주 봉천으로 간 그는 봉천성(奉天省) 강평현(康平縣) 박인촌(博仁村) 료양와보(遼陽窩堡)라한
유벽(幽僻)한 곳에 농장(農場)을 마련하엿다.
이곳은 만주(滿洲)하고 몽고(蒙古)와 접경(接境) 지대(地帶)로 사막(沙漠)이 갓차운곳이라 한다.
수십호(數十戶)가 이주(移住)하야 농사(農事)을 짓고 “신농농장(神農農場)”이라 하엿스며
ᄯᅩ 큰집이라 정(定)하시니라.
농장(農場)을 개척(開拓)할ᄯᆡ 보을막고 갈ᄃᆡ밧을 개간하며
무한한 고생을 하엿다 한다.
ᄯᅩ 삼월(三月) 곡우절(穀雨節)에 신농제(神農祭)을 모시고
법사(法師)게서는 료양와보(遼陽窩堡) 본사(本司)에서 선화(仙化)하실ᄯᆡᄭᆞ지 게시니라.
1940년(年) 9월(月) 2일(日)
진희문(陳希文), 문명구(文明九) 등에게 후사를 부탁한 후 조용히 운명하였다.
교조가 사망하자 몇개의 분파가 생겨 교단이 침체되고
교무(敎務)인 진희문 (陳希文) 등 간부들마저 일제에 체포되어 복역하다가 해방 후 출옥하였다.
광복 후 김종수 등 20여 세대가 귀국하여 전주시 금암동에 판자촌을 건설하고 집단생활을 하다가 1974년에 철거당하자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백오동에 집을 마련하여 본부로 정하고
김종수가 개발한 갱생법(更生法)이라는 건강법을 보급하는 방법으로 교화활동을 하였다.
1996년 김종수가 사망함으로써 현재는 거의 소멸상태에 있다.
< 인도교사건(人道敎事件) >
※ <昭和 12年 61 人道敎事件 檢擧에 關한 書類>
(정리 중~)
<1937년 ‘人道敎 사건’으로 검거된 채경대 외 3명에 대한 소송기록 >
인도교는 1932년 채경대가 창시한 甑山敎가 1936년 개명한 교단이었다. 수원경찰서가 채경대 등 인도교 관련자들에게 적용한 죄명은 보안법 위반, 사기, 횡령, 사문서 위조 행사, 인장 위조였다.
인도교의 교주 채경대는 일찍이 甑山敎, 보천교 등의 교조가 되는 姜一淳에게 사숙한 인연으로 1915년 보천교에 입교해 중요한 간부가 되었다. 보천교의 간부로 활동하던 중 채경대는 『鄭鑑錄』를 탐독하다가 자신이 훗날 조선의 元首가 될 천명을 타고났다고 맹신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보천교 교주 車京石(錫)의 독단에 불만을 품고
1923년 자신을 따르는 김형식, 林奉圭, 張文煥, 金周鉉, 최학명, 黃義鵬 등을 데리고 보천교를 탈퇴했다.
보천교를 탈퇴한 채경대는 차경석을 응징하고 새로운 교단을 세우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교조 강일순 생전의 高弟인 安乃成을 비롯해 金亨烈, 李致福, 金京學, 申京元, 黃應鍾 등과 회합해 신흥 교단 설립을 모의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채경대는 농업에 종사하며 후일을 도모했다.
채경대는 1924년 4월경 정읍에 있는 강일순의 탄생지에 사당을 짓고 성전이라 칭하며 본사로 삼았다. 1930년 11월 9일 강일순의 탄생일에는 사당에 ‘三聖奉安式’을 거행하였는데, 仙敎 강증산, 불교 진묵대사, 유교 주자를 모셨다. 이 때문에 인도교를 삼성교라 부르기도 하였다.
1931년 김형식, 임봉규 및 추종자 20여 명을 기반으로 본격적으로 보천교 교도 및 지방 농민들을 대상으로 포교에 진력해 이듬해 가을경에는 천여명의 신자들을 확보했고, 교명도 증산교로 정하였다. 1935년 10월경에는 신자수가 약 6천명에 달할 정도로 교세를 확장했다.
채경대의 증산교는 1935년 後天開闢과 後天仙境의 도래를 예언하며 신도들을 끌어 모았다. 그러나 연말이 되어도 개벽의 징조가 나타나지 않자 실망한 신도들이 동요를 일으켰고 교단 간부들간에도 다툼이 일어 결국 교세가 점차 몰락해갔다. 이에 채경대는 1936년 5월 총본사를 경성으로 옮기고 교명을 인도교로 개칭하였다.
1936년 6월 유사종교 해산 방침에 따라 동대문경찰서가 해산을 종용하자 총본사는 폐쇄되고 각지의 포교도 신통치 않았다.
타개책으로 채경대는 교단 간부들과 협의해 교인 1만 2천명을 모집해 만주로 이주할 계획을 세웠다. 일종의 신앙공동체를 만주에 설립하려 한 시도인데, 공동체의 농업을 경영하기 위해 허위로 자본금 90만원의 神農社(주)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당시 신문에서는 신국가 건설을 표방한 공산주의 비밀결사라며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주 계획에 따라 채경대를 비롯한 간부들은 만주로 넘어갔지만, 만주로 이주할 교인 모집과 자금 징집은 신통치 못했다.
순사가 1937년 5월 22일자로 수원경찰서장에게 올린 보고서는 인도교 교주 채경대 등이 인도교의 의식을 거행할 때 칙령(勅令)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등 흡사 군주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어 이면으로 비밀결사를 조직한 것은 아닌가 추측된다는 내용이다.
신문받은 증인들은 모두 증산교 또는 인도교 교인들이었는데, 신문 내용은 주로 입교 동기, 인도교의 목적, 증인의 교내 지위, 헌금 액수, 경전 「歌詞大全」 통독 여부, 「가사대전」에 실린 일본인에 대한 적대적인 구절을 부르도록 권유받았는지 여부, 만주 이주와 신농사 관계자 성명 등이다.
수원경찰서에서는 인도교 간부 이규학(李春京?)에 대한 수배를 내렸는데, 그는 본적지인 전라북도에서 검거되었다. 이에 따라 전라북도경찰부에서는 수원경찰서의 촉탁을 받아 이규학을 피의자 신문하는 한편, 그의 사기 혐의에 대해 강기문, 박순례, 강명집, 이양순, 이용운을 증인 신문했다.
경찰의 수사가 진행되는 와중인 7월 17일 수원역 구내 변소 한 칸에 버려진 수상한 문서 6매가 발견되었는데, 「인도교연혁」이라는 제목의 문서였다. 이희재는 폐렴과 만성위염으로 안정 치료가 필요하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수배의 건’에는 인도교에 가입하였거나 금품을 제공한 혐의가 있어 수사 중이나 소재 불명으로 수배를 내린 37명(마지막 목록은 앞장과 중복)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수배가 떨어진 사람은 인도교 간부인 崔允杰, 金承俊 등을 비롯해 강원도, 평안남도, 전라도 등지에 본적을 둔 농민 교인들이었다. 간부들은 長孫無忌, 房玄齡 등 인도교에서 부여한 ‘神明’이 부기되어 있다.
나주경찰서의 회답서는 임봉규의 행위에 대한 조사 보고서이다. 임봉규는 본적지가 나주였는데, 보천교에서 탈퇴하고 증산교에 가담한 뒤 증산교 본부가 있던 정읍과 나주를 오가며 포교 활동에 전념했다. 나주경찰서장의 보고서에는 임봉규가 병자들에게 주문을 알려주거나 부적을 태워 마시게 하면 치유될 수 있다고 교시하고 기도의 대가로 금품 등을 수수한 혐의가 적혀 있다.
신문을 받은 증인들은 주로 함경도의 나남, 문천, 영흥, 고원, 함흥, 경기도의 장단, 용인, 강원도의 홍천, 횡성, 평창, 인제, 금화 지역에 거주하며 그 밖에 부산, 충청도 당진, 평안도 영변 등지의 증인들도 환문되어 신문을 받았다.
피고인란에는 ‘채경대’라는 이름 위에 붉은 글씨로 ‘保釋’이라 씌어 있으며, 반대로 김중룡, 이조승은 각각 구류로 날인되어 있고, 다시 김정목은 ‘보석’이라 씌어 있다. 그 옆에 정종진, 채동기, 황응선, 김장옥은 붉은 글씨로 ‘면소’라고 적혀 있다.
본 문서는 예심부의 수사기록과 법원의 공판 기록이 편철되었다. 예심 과정에서 김형식은 위축신(신장경화증), 임봉규는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김정목과 채경대는 보석 출감했다. 예심에서 정종진 외 3명은 면소되었고, 이에 대해 경성지법 검사국은 「상소포기서」를 제출했다.
인도교 사건의 예심종결결정서와 판결문은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채경대, 김중룡, 이조승, 김정목이 공판에 회부되어 1940년 2월 20일 징역 1년에서 8개월을 각각 선고받았다.
<예심청구서>에서 예심이 청구된 채동기, 황응선, 정종진은 보천교 신자였다가 증산교로 옮긴 뒤 포교를 담당하는 간부로 발탁되어 활동했다. 김정옥 또한 증산교 신자로 김형식의 권유로 입교하였다. 이들은 모두 증산교가 인도교로 개명한 뒤에도 계속해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경찰의 수사에 따르면, 정종진은 1936년 8월부터 이듬해 2월경까지 강원도 인제에서 인도교 교주 채경대가 장래 조선의 왕이 될 것이며 신통력으로 질병도 치유할 수 있다는 등의 말로 포교했다. 황응선도 충청남도 당진에서 포교하면서 정종진과 유사한 말을 했다. 또 1937년 3월경 채경대 등이 수원경찰서에 구속되자 정종진, 채동기, 황응선, 김정옥 등은 채경대 등에 대한 변호사 비용을 교도들에게 거둬 편취하려 했다. 이외에도 만주 이주계획에 따라 교도들에게 허위 사실을 유포하며 토지매매 대금을 편취했다.
검사는 정종진 등의 행위가 채경대 외 6명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병합 심리를 요청하였고, 병합 심리 결정이 내려졌다.
(국사편찬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