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세월은 지나가지만 따라붙는다. 털어낸 줄 알았던 전단지가 신발 바닥에 붙어 서걱거리며 딸려오듯. 연산로터리 메디컬센터 앞에 서서 올려다 본 잿빛 하늘은 비를 머금어 무겁게 짙눌렸다. 옥외 광고판 자막은 태풍 하이선의 북상을 알리고 있었다. 약봉투를 받아 들고 건널목 앞에 섰다. 그건 두려움이었나, 슬픔이었나 아니면 아픔이었나. 의사들의 진단은 가능성이 높았고, 그래서 정확했고, 정확해서 나를 찔렀다. 진단명은 메말랐고, 메말라서 나는 바스라졌다. 누군가는 눈물을 흘릴 것 같았고, 누군가는 탓하고 원망할 것 같았다. 그런 오해들이 서글펐다. 그럴 때면 눈앞이 하얀색으로 번져 덮여가고, 여기는 어딘지 내가 어디로 가는지 방향성을 잃는다. 덜컹. 119 구급차 문이 열리고 미끄러지며 들어가는 카트 위가 차라리 편안했다. 덜컹. 중앙수술실 문이 열리고 쏟아지는 오버헤드빔에 오히려 눈은 휴식할 수 있었다. 하루가 지나면서 하이선은 부울경을 타격방위로 잡고 북진하고 있었다. 북풍이 강해지며 여름의 잔해들을 밀어 올린다. 송정을 나와 연화리로 달리는 목측 마루마루 마다 검푸른 바다 위 묵색 구름들이 커다란 원반으로 겹쳐져 선회하고 있었다. 디딤발과 내뻗는 발이 만들어 주는 공간 속에서 속도감과 안도감이 느껴졌다.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서기 전 지녔던 주저함이나 망설임, 두려움은 그 크기가 눈에 띄게 왜소해져 있었다. 두려움은 떨쳐지는 것이 아니었다. 한 평생 지니고 가며 정확한 크기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구덕포를 나와 청사포로 넘어가는 해마루에 섰다. 잿빛 하늘 아래 검푸른 바다로부터 세찬 바람이 불어와 안면을 휘감는다. 우측 저 아래 해안을 따라 펼쳐진 도시 위에는 콘크리트와 유리벽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기둥이 세로 박혀 있다. 겹겹이 쌓인 먹구름은 인간이 만들어 인간에게 이어지는 죄를 씻기 위해서 금방이라도 성수를 뿌려 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 비를 다 맞아내면 녹아 내릴 수 있을까. 나를 나라고 오해하는 이 자아가 소멸할 수 있을까. 맞바람에 눈이 시리다. 몸을 돌려 왼편으로 비켜서니 허공과 이어지는 해마루 너머의 오르막 끝이 보였다. 저 난간 끝에 바다 위로 이어지는 투명 계단이 있을까. 그 곳을 오르면 문에 이르러, 열고 나아갈 수 있을까. 막이 내리고 불이 꺼진 이 세상이라는 무대 위의 지리한 연극을 마치고 돌아갈 수 있을까. 우산을 펴들고 그 밑으로 걸어갈 때, 푸드트럭 라디오가 지직거린다. 10호 태풍 하이선 (HAISHEN) 은 중국에서 제출한 이름이며 ‘바다의 신’을 의미한다고 알려줬다.
#1
탕. 회사가 지꺼가. 씨발. 사무실을 채우고 있던 키보드와 손가락이 부딪히는 소리. 급지함에서 종이를 빼내고 말아 올리는 프린터 소리, 전화 오더를 받고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 복사기 커버가 열고 닫히는 소리. 그 사이로 본부장의 상기된 외침과 내쳐진 다이어리가 뒤섞였다. 잠이 덜 깬 아침의 먹먹함을 깨우고 있던 소리들은 일순간 정지했다. 수화기를 턱에 괸 채 타이핑을 이어가던 손가락들도 타이밍을 잃고 머뭇거렸다. 30분간 사장실에 앉아 있다 나온 본부장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고. 파티션 위로 검은 머리와 하얀 이마들이 솟아오르며 눈짓으로 묻는다. 초식성 목 긴 파충류들이 검은 숲에서 조용히 머리를 들어올리는 것 같았다. 온순한 녀석들은 사방을 확인한 후 위험요소가 발견되지 않자 다시 숲 속으로 조용히 숙인다. 하나 둘 탕비실에 모인 직원들이 조용히 읖조렸다. S 가 내년 인원 갖고 닥달했다데. 본부장 지야 나름대로 방어는 좀 했을낀데. 얼마나가긋노. 내년되면 매출이 없는데. 인원은 어쩔거냐고 그룹에서 S 한테 매일같이 연락한다더라. 그룹. 아크죠그룹...유럽 소재의 그룹이라는 것은 허깨비와도 같아서 누구인지, 어떤 결정을 왜 내리는 지, 부산이라는 도시의 400평 남짓한 사무실을 알기나 할런지 불분명했다. 이 불분명함은 본부장이 외친, 회사가 누구거냐는 허깨비 같은 소유주를 향한 외침과 닮아 있었다. 그 외침은 닿을 곳이 없어서 허망했고, 닿을 곳이 없었기에 반향되지 않았고, 알 수 없는 곳에 이르러 소멸했을 것이다. 몰라도 내년 초에 한 두 명은 내 보내야 할 걸. 알 수 없는 불안한 가능성은 나를 향할 수도 있었고, 너를 향할 수도 있었다.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었기에 가능성으로만 얘기할 수 있었고, 그 곳까지 이르는 시간은 얼어붙어갈 것이었다.
#2
해가 짧은 계절이라 빛은 재빨리 그 힘을 잃고 도시의 거리가 어둠 속으로 숨어 드는 시간이 되었다. 퇴근 전 인사팀장이 보낸 메일을 통해 S 와의 면담이 금요일에 잡혔다는 것을 확인했다. 말없이 노트북을 닫고 동료들과 사무실을 나섰다. 엘레베이터를 등 뒤로 하고 회전문을 힘주어 밀고 나왔다. 건널목을 사선으로 내리꽂는 비바람 앞에서 바지 자락은 다리에 휘감겼다. 누가 먼저 말했는지, 우리 넷은 고기를 굽기 위해 둘러 앉았다. 양철 테이블에 내려놓는 수저 소리가 차가웠다. 아무도 금요일의 면담에 대해선 말을 꺼내지 않았다. 손에 든 술잔으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드라마나 주말에 다녀온 등산 코스에 대해 읊조렸다. 식당 한 켠에 얹혀진 텔레비전에는 뉴스가 켜져 있었고, 화면 자막은 신종바이러스와 미국 확진자 천만명을 알리고 있었다. 천만이라는 숫자와 병든 개인의 조건은 서로 무관해 보였다. 구운 고기 한 점을 집으려 고개를 떨어뜨릴 때 다리 사이로 드러난 바닥에 벌레가 기어가고 있었다. 오래 전 부터 알아온 얼굴을 알아챈 것처럼 멈춰서 더듬이를 세웠다. 반쯤 구겨 신고 있던 구두를 쓸어 당겨 오자 검은 날개로 몸을 가리고는 구석으로 사라졌다.
#3
S 는 커다란 의자를 연신 뒤로 젖혀댔다. 금요일 오후 백양산 능선을 넘어가는 햇살은 17층 서편에 위치한 사장실을 가득 채웠다. 휴우. 매출 감소로 많은 인원이 퇴사하는데도 여기 앉은 영업 당사자들은 양심에 가책도 없나요? 지금 당장 그리고 일거리가 없는데 어디에서 영업을 할것인지? 올해 실적 봤나요. 선박 부문 손실만 -5% 이상을 기록하고 있는데. 누구 하나라도 용단을 내리는 사람이 없고. 지금까지 회사는 얼마나 큰 고통이 있었는데, 어떻게 그런 사고로 양심을 가지고 직장생활하나? 이해가 안돼.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 사람은 어디 한 번 얘기 좀 해봐요.
#4
참나. 아무런 아이디어가 없는 사람들이랑 무슨 얘기를 하나. 인사팀장은 본부장과 논의해서 희망퇴직 다시 한 번 더 신청 받으세요. 어떻게 책임지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쯧. 사장은 자리를 고쳐 앉은 후 모니터로 의자를 돌렸다. 인사팀장과 본부장, 영업담당자 네 명은 주섬주섬 펜과 노트를 챙겨들고 일어났다. 본부장이 회의실로 따로 불렀다.
“나도 아주 죽겠다. 하루 멀다하고 인원가지고 입을 대니..받아주기만 하면 차라리 내가 쓰고 싶다.”
15년전 신입 시절 그는, 넌 좋아하는 게 뭐냐, 꿈은 뭐냐, 시간 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냐, 거래처로 가는 차안에서 줄곧 물어보곤 했다. 젊은 대리이자 사수였던 그가 이제는 줄에 매달린 인형이 되어 외줄을 타고 있다. 이렇게 된 걸 어쩌겠냐는 말로 마리오네트는 고개를 떨궜다. 줄을 잡은 손이 힘을 풀어지면 그의 인생도 풀썩 주저 않을 것이었다. 나는 엘레베이터를 등 뒤로하고 도망치듯 나와 또 다시 건널목 앞에 섰다. 오늘도 차가운 바람이 바지 자락을 다리에 휘감았다. 등에 맨 가방을 내린 뒤 장갑을 꺼내 손가락을 끼우고 손목까지 당겨올렸다. 일단 해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곳이었다. 적당한 스펙을 쌓고, 졸업 즈음 면접을 보고, 그래서 먹고 살아갈 수 있으면 최선이라고. 남들처럼 가정을 이루고 연차가 차서 진급을 하고, 그것이 내 삶이 될 것이라 믿으며 십오년 넘게를 고집스럽게 버텨왔다. 행여 이 길이 아니더라도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했던 강한 자신감은 시간의 흐름 위에서 마모되어갔고, 녹이 슬어 주름 패여갔다. 다시 매어 올린 가방에 어깨는 내려앉았다. 옷깃을 여민 뒤 가로등 밑으로 움츠리고 걸었다.
#5
고도를 낮춘 태양이 오후의 사무실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신입사원 시절 40대 초반의 M 부장은 어느새 환갑을 바라보고 있었고 하얗게 센 머리가 초가을 광선에 반짝거렸다. M 부장이 물었다. S 가 구원받을 수 있을까? 구원을 받거나 받지 못하거나 할 것입니다. 나는 대답했다. 결혼한 두 딸과 큰 아들로 미뤄봤을 때 환갑은 넘어선 S. '아크죠코리아' 의 CEO 로서 횡령배임의 의혹과 차별, 갑질, 모독, 부적절한 언사가 일상화 된 S. '아크죠'는 다국적 글로벌 기업으로 국내합작법인인 '아크죠코리아'를 1980년 출범시켰다. ‘아크죠코리아’는 이후 40년간, IMF 및 리만브라더스 사태 등 여러차례의 위기를 겪었지만 이익률 측면에서는 승승장구했다. 직원들은 두자리 순이익목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했으며, 그 두자리 숫자를 위해 임원들은 각자의 방에 앉아서 직원들을 감아댔다. 마냥 세워놓은 채 눈을 부라리기도, 조롱하기도, 괴성을 지르기도, 마냥 입을 다물고 있기도 하였다. 누군가는 개가 사람 잡는 소리가 들린다는 우스게 소리로 한숨 쉬었다. 부산 소재 본사 사무실은 아침 출근 업무를 시작하는 8시 반 '국민체조'를 틀었고 전 직원은 일제히 일어나 약속된 동작으로 몸을 움직였으며, 구호를 외쳤다. “열정으로 끈기로, 아크죠 화이팅”, “다함께 초심으로, 아크죠 화이팅”. 매일 반복되는 문구였음에도, 매일 반복하여 뭐라고 외쳐야 하는지 서로들 물어댔다.
#6
이거 안 적는 이유가 뭐야. 자넨 왜 안 적었나. 대표이사 S가 '직원 건강 일지 (COVID-14)' 라고 적힌 A4 용지를 휘둘며 얼굴 안면에 들이댔다. S 의 백색 마스크의 코와이어 위로 붉은 실핏줄이 불거진 흰자가 선명했다. 길다랗게 늘어선 파티션 라인 위로 황파일에 묶인 일지 다발들이 펄럭거렸다. 적겠습니다. 그게 아니고 왜 안적었냐고 묻잖아. 방금 적었습니다. 이 사람이 무슨 소리야. 지난 한 달 동안 적은 내용이 없잖아. 외근을 다니다보니... 자네 나랑 말장난하나. 외근을 다녀왔으면 다시 적어야 할 것 아닌가. 적겠습니다. 적으면 되죠. 금방도 적었습니다. 사무실을 채우고 있던 움직임들이 멈추었다. S 의 눈동자가 커지면서 흰자 위 실핏줄이 굵어진다. S 는 홱 등을 돌려 황파일을 흔들고 다니며 목소리를 높였다. 먹먹해진 가슴을 진정시키며 자리에 가서 앉으니 파티션 너머 창밖 하늘이 보인다. 회색빛 도시에 겨울이 내리려는지 바삭거리며 말라간다. 창밖으로 내려다 보이는 도로는 길게 줄선 차량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 정수기 물에 인스턴트 커피를 뜯어 잔을 채운 후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히 처박고 잠든 컴퓨터의 대기화면을 깨웠다. 습관적으로 아웃룩을 클릭해본다. 커피가 들이키기 좋게 미지근해지길 기다리며, 메일 박스를 열어 손가락을 얹어 본다. 창밖은 스치고 지나간 겨울 바람의 손길에 메말라가고, 도시의 거리는 브레이크등이 켜진 줄 선 차량으로 가득하며, 키보드 옆 커피는 식어간다.
#7
지난 6월 초. '아크죠'의 GLT 멤버 9명이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룹 주요 계열사 대표로 구성된 Group Leader Team, 즉 글로벌 경영진이다. S 는 인천공항에서 시내로 이동해 그들을 만날 예정이었다. 조수석에 앉은 그는 구두를 벗고 발가락 양말을 드러내어 대시보드 위로 걸쳤고, 입에 문 이쑤시개를 실룩거리다 주름진 시선을 길가로 옮겼다. 기온이 올라 눅진해 진 인도는 한 낮의 태양으로 달궈져 있었고, 얇아진 옷차림의 젊은 여성 서너명이 새하얀 쇄골 위로 브래지어 끈을 드러내는 색색의 반팔 티셔츠를 입고 걸었다. 내가 너 나이만 됐어도 저런 애들을 먹을 수 있을텐데. S 가 말했다. 나는 운전대에 손을 얹고 신호를 기다리며 일전에 그가 한국을 방문한 경영진 급 외국인들의 화대를 지불하였다는 얘기를 떠올렸다. S 는 그룹 경영진들과의 미팅을 마무리하고 서울 시내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이쑤시개는 그의 충실한 청소부들이었다. 그는 입 안의 전리품들을 열심히 끌어 모았다. 새끼 손가락 손톱 크기 보다는 조금 작게, 둥글게 빚어내어 테이블 위 하얀 식탁보 위로 진열했다. 충분한 식사와 적당한 음주. 그는 같은 호텔에서 묵고 있던 협력사 팀장 룸을 찾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 하의를 모두 벗어내린 후 말했다. 나는 보여준 사람에게는 숨길 것이 없다. 라는 당연한 얘기를 당당하게 내뱉었다. 손님 앞에서 바지를 벗어내리고, 축 쳐진 성기를 덜렁거리면, 더 이상 숨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이빨 사이에 남아 있던 고깃덩어리로 전리품을 빚어내는 그 부단한 노력과, 다리 사이에서 흔들거리는 아랫도리의 상상력을 통해서...어둠에서 바지를 내리고 빛으로 끌어올려질 수 있다는 것인데.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훗날 만난 협력사 팀장은 그 개새끼가. 시발새끼가.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말을 잇지 못했다.
#8
그날 밤 나는 호텔 뒷편으로 걸어나왔다. 여름을 앞둔 서울의 밤하늘은 수증기로 가득찬 듯 시야가 흐렸다. 시티타워 근처에서 R 에게 전화하여 저녁은 먹었냐고 물었다. R 은 모태부터 지금까지 40년간 신앙 생활을 지속하고 있었다. 얼마전 아크죠코리아를 퇴사해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 이직은 낯설었고, 서울은 붐볐다. 그녀는 텍사스 소재 화학 공인 인증 기관에서 오랜 기간 일해 온 브라운씨가 보내 준 성서의 한 구절을 떠올리며, 소속과 연대감을 찾고 있었다.
시편 66장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들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두셨으며..’
창조주가 그물을 만들어, 우리를 시험으로 끌어들이고, 은을 제련해내듯이 단련한다는 내용이다. 그 때 나는 사각의 사무실 공간을 어지럽게 채우고 있는 거미줄과 거기에 걸려 바둥거리는 동료들이 떠올랐다. 그것들은 누구의 것인가. S 의 아랫도리 사이로 풀어낸, 마구잡이로 엮어 놓은 그물인가, 그렇지 않다면 R 을 구원한다던 그 하나님이 준비해 놓은 것인가. 나는 가끔 그 모든 것들의 변덕스러움에 당황하곤 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빚어 에덴이라는 동산에서 짝짓게하고. 선악을 구분한 죄로 쫓아내고. 노예로 얻어 맞게하고. 때린 자들에게 저주를 내리며. 맞은 자들을 떠돌게 하다 불모지에 정착시키고. 육화된 인간으로 다가오고. 죽어버리고. 다시 살아나서 떠나가고. 돌아 올 것이다. 이런 영구적인 밀어냄과 당김의 과정이 역사이고 이 삶의 본질이라니. 알 수 없는 말이다
#9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옥상으로 통하는 22층 계단실에서 회계팀 과장이 읖조렸다. 그룹에서 보낸 재무 담당 임원 Mr. Ken 이 입국 후 2주의 자가격리를 마치고 사무실을 방문 중이었다. 마...저는 더 이상 못 버티겠습니다. 다 터트리고 갈랍니다. 이런 회사에서 같이 썩어갈 순 없습니다. 담배를 끼운 검지와 중지 사이가 넓어지고 좁아지며 부들거렸다. 코로나로 Travel Ban 이라카드만 저게 뭡니까. 사람 모가지 짜를라고 격리되면서 까지 기어 들어오는데. Ken 은 그룹 소속 변호사와 인사팀을 대동해 회계 및 재무 관련 인원들과 연 사흘 면담을 진행했다. 이후 피면담자들은 사내 ERP 시스템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반납했고 대부분의 업무가 중국을 중심으로 흡수 통합되었다.
#10
책을 유심히 보고 계시네요. 아뇨. 반납대 위에 올려져 있길래 그냥 집어보았습니다. 갑작스런 질문에 손사레를 치며 답하니 A는 다시 물었다. 그새 얼굴이 많이 타신 것 같애요. 아 네 그런가요. 최근 산에 좀 다녀서인지...등산을 좋아하시나봐요. 호기심 어린 그녀의 표정 뒤로 도서관 회전문을 힘껏 밀고 드는 아이가 보였다. 너무 세게 돌아가면 빠져 나오기 힘들텐데. 얼마전에 테이크 아웃 커피 받아 나오셨죠? 요 앞 에서. 네? 아 그 집은 가끔씩 들립니다. 혹시 모르는 사이에 실수를 했나 싶어 기억을 더듬는데, 단행본실 사서가 걸어와 잠시 주춤하다 반납대를 정리한다. 단 한 번의 눈빛에, 말 한마디에, 연(緣) 은 생겨나 얽히고 얽혀져 이어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호의나 적의에서도 인연은 생겨나 마음에 파동을 남긴다. 물건 하나를 가지게 되면 버려야 할 수고가 인연으로 따라와 끝까지 연연하게 된다. 소유하는 순간 상실의 두려움이 생기는 사랑처럼. 사랑이 두려움을 수반하는 것과 같이, 생겨난 연(緣)은 소멸할 때까지 공간에서 그 존재를 분명히 하며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고 차지한다. 글 한 자에도, 한 자를 써 내리기 전 머뭇거림에도 연(緣) 은 생겨나서 머무른다. 나의 존재가 끊임없이 연을 만들어 매듭 위에 매듭이 얹혀간다.
#11
대쉬보드에 밝혀진 외기 온도가 17도를 가르킨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계절이 새벽 산책로 위 여며 맨 옷차림을 통해 가늠될 수 있었다. 누리마루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웨스틴호텔 옆길로 걸어 해안가로 들어섰다. 바다 위 검은 어둠이 갈라지는 틈에서 붉은 물감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바다는 일렁이는 수면 위로 해를 뱉어냈다. 어둠과 수평선은 정지한 듯 맞닿아 있었고, 그 사이에서 솟아오르는 붉은 태양은 난데 없어 보였다. 웻수트를 입고 물에 몸을 담그니 지퍼선을 따라 며칠새 차가워진 수온이 느껴졌다. 동백섬을 오른편에 두고 팔을 저어 수중방파제 구조물까지 진행하였다. 해는 고도를 높이며 파도에 빛을 난반사시킨다. 날카로운 섬광은 고글을 투과해 눈을 찌른다. 혀 끝까지 파고드는 염수의 짜가움이 성가셨다. 행여 해파리 촉수가 이 불청객의 발목을 감는다면 칼에 베인 듯 뜨거울 것이다. 구조물을 돌아나갈 때 호흡을 위해 들어 올린 머리 위로 해는 더욱 더 치솟고 있었다.
선유자익 (善游者溺)
헤엄 잘 치는 놈 물에서 죽고, 나무 잘 타는 놈 떨어져 죽고, 산 잘 타는 놈 숲에서 죽는다. 만약 죽을 장소를 정할 수 있다면 그 곳이 산이나 바다일 수 있을까. 그 조차도 내가 엮은 인연 (因緣)에서 비롯한 욕심, 집착일까. 소멸을 통해 인연에서 자유로워지기를 생각하면서, 소멸하는 방법에 다시 집착함으로 다른 인연을 만들고 있다. 이 지리하고 무거운 사슬 사슬들이 끌리는 소리는 그칠 새 없어 조급하다.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났기에 연(緣) 을 만들어 가는 이 숙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인가.
#12
아파트 편의점 뒷편 벤치로 나가 앉아 술과 담배를 샀다. 겨울로 향하는 밤은 어두웠고, 서늘했다. 휴대폰 불빛이 눈가를 밝혔다. 아크죠그룹 계열사 노조에서 올린 포스팅를 보았다. 제목이 "앜소리" 였다.
"Ak소리 : 아크죠 그룹은 2008년 리먼브러더스발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무리한 인수합병을 시행했고, 그 이후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2017년경에는 무시할 수 없는 지분을 가지고 있던, 행동주의 헤지펀드로부터 적대적 M&A 수용을 요구받았고, 이를 아크죠그룹이 거부하자, 헤지펀드사는 거액의 소송을 제기를 했으며 최고 경영자 사퇴를 지시했다. 이후 아크죠는 캐쉬카우 역할을 했던 특수사업분야를 십수조원에 매각하여 주주들에게 할당했으며, 동시에 직원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구조조정을 몇차례 단행했다. 해당 프로젝트마다 별칭을 붙였다."
나는 기억한다. 그 프로젝트들의 이름들을. Propeller (추진력), Mars(화성), Saturn (토성), Horizon (지평선너머), Prism (빛의스펙트럼). 사람을 잘라내는 추진력으로 지구를 벗어나고, 화성을 거쳐, 토성까지 이르러 사업의 지평과 스펙트럼을 넓히겠다는 내용인데, 잘려나간 사람들의 피와 상처를 오롯이 에너지로 전환시킬 수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나는 보고 있다. 떠난 사람들, 잘려나간 사람들, 반쯤 잘린 채 덜렁거리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밀어내고 있는 사람들이 한데 뒤엉켜 있었다. 머리가 탈색된 사람, 머리가 빠진 사람, 나사가 빠진 사람, 뒷목을 움켜잡고 쓰러지는 사람, 가슴을 조이며 넘어가는 사람, 수면제를 움켜쥐고 도망치는 자, 눈이 멀어가는 자, 복부를 가른자, 목을 가른자, 장기를 들어낸자, 눈알을 파서 보려는 자, 잠들지 못하는 자, 귀가 멀어지는 자...이러한 병든자, 중독자, 도망자들이 사각 큐브의 사무실 안에서 거미줄에 걸려 불안하게 매달려 있었으며, 이들을 둘러싼 회색빛 도시는 팽창하고 있었다. S 는 거미줄에 걸린 이들을 "똥파리 같은 새끼들" 이라는 별칭으로 불렀고, 그 똥파리들 때문에 "Ping 돌겠다"고 말했다.
#13
나는 휴대폰 뒤집어 보며 Apple 의 창업자를 떠올렸다. 그는 입양된 후 양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 집 차고에서, 0과 1. 명멸하는 2진수. 있음과 없음으로 구성된 세상을 그리다가, 결국은 하나의 수용 시설 혹은 장비를 만들었다. 인간의 사고를 이진수로 흉내내는 개인용 컴퓨터. 최초라는 단어가 따라다니는 그 시설장비의 이름을 맥 (Mac) 라고 지었고, 회사의 이름을 Apple 이라고 지었는대, 회사 로고 CI 의 사과는 베어먹은 사과인지, 썩었기 때문에 베어진 사과인지 알 수 없었다. 그 후 30년 동안 그는 회사에서 쫓겨나기도 했으며 다시 재입사하기도 했다. 보다 견고한 수용 시설을 조성했는데, 그 시설 명칭 앞에 i 를 붙여서, iPhone, iPad 라고 했다. 대학졸업식 축사에서 이진수와 같은 말을 했는데, 뒤를 돌아보면 과거가 서로 연결되어 현재를 구성한다는 0-1 그 이진수 같은 인과관계를 말했다. 불치병이 재발하였고 죽었다. 그 축사에서 Stay hungry, Stay foolish 라는 말을 하였다. 굶주리면서 그냥 그렇게 바보 마냥 할일을 하라는 얘기로 들리는데, 그러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었던 것인가. 사과를 베어 먹고 버려진, 이 원죄의 세상이 i 로 비유되는 상상력으로, 구원될 수도 있다는 믿음을 가졌었나. 그 시설은 좁았고, 수용자들은 배고파했고 어리석게 머물렀다. 나 역시도 하루 일과 중 2~3 시간을 그 수용 시설에 머물렀다. iPhone, iPad 를 옮겨다니며 때론 Air 를 붙인 Mac 에 머무르기도 하였는데, 사각의 수용시설에 Air 를 붙이는 상상력이 가소로웠다.
#14
아크죠 그룹어플을 통해 내부윤리경영사이트에 접속했다. 해당 페이지 이름은 Code of Speak Up (COS). 우리말로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 의아했다. "말하는 법"이라고 하면 근접한 표현일까. 유럽 소재 서버를 두고 있는 아크죠그룹의 COS 페이지, 대한민국 고용노동부, 경찰청, 국세청, 행정안전부, 국가인권위원회의 질문과 답변 게시판에 같은 내용의 질문을 올렸고, S 의 메일 계정으로 복사하여 같은 질문을 붙여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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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신경쓰고 있을 거라고 들었소
- 뇌물 및 부패방지 (기업 경영 윤리)
- 사기
- 괴롭힘
-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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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괜찮아? 구원받을 수 있을까?
#15
내 앞에 거대한 바다가 일렁이고 있어, 너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너에게 닿지 못한다.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난 나는 슬프고 엉긴 눈을 붉히지만, 세계는 일관성 있게 무심하다. 나는 무엇이길래 이다지도 흔들리며, 세계는 무엇이라서 항상성을 유지하는가. 아크죠 그룹도, 이회장도, S 마저도. 나의 몸이다. 하지만 내 것은 아닌 몸. 나의 삶이다. 하지만 내 것은 아닌 삶. 울었다. 내 것이 아닌 내 인생이 서글퍼서, 단 몇마디로 요약되어 버리는 그 인생이 허접해서 목놓아 울었다.
#16
며칠 간 맑게 개었던 하늘이 먹구름으로 주름졌다. 1호선 지상철이 지나가는 고가 아래를 온천천이 흐른다. 하천을 따라 뻗은 산책로를 걸으며 구정물이 흘렀던 어린 시절 그 곳을 떠올렸다. 상류에 위치한 섬유 공장들에서 흘러나온 오수로 하천은 늘 회색이었다. 대형 스티로폼 판을 구해온 아이들은 고무타는 냄새가 피어오르는 하천 위로 보트 삼아 띄웠다. 하천 위 고가로 달리는 기차는 지하철이라고 불렸는데, 지하가 아니라 머리 위를 달리는 이유에 어리둥절했다. 해가 고도를 낮추면 고가를 받치고 있는 원통형 시멘트 기둥들이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눈금자로 깔렸다. 명륜 초등학교를 걸어 나와 명륜4 라고 적힌 지하철 역사 출구를 지나고, 하나, 둘, 셋, 넷, 다섯... 기둥 스무 개를 세면 집에 다다랐다. 지하철이 고가 구간을 내달려오며 커지는 소리, 멀어지며 작아지는 소리를 서너번 들은 후엔 어김없이 셋방 가구 쪽 담벼락 근처였다. 부엌과 방 하나씩으로 세든 가구들이 붙어 철문 하나를 공유하고 있었다. 초등 2학년 동생은 언제나 해가 저문 후 철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버지는 징역을 받고 내년 초에 출소였다. 둑방길을 걸으며 아무도 없을 단칸방을 생각해보았다. 부엌을 지나 미닫이 문을 열면 식당일을 나가기 전 어머니가 차려놓은 팔각 교자상 위로 알록달록한 밥상보가 덮혀져 있을 것이었다. 동생이 잠드는 시간까지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부재도 어머니의 부재도 잠든 동생도 느껴지지 않는 시간이 되면 나도 잠이 들었다. 휠체어에 앉은 채 밝아지는 시야를 확인했던 그 아침을 떠올렸다. 내가 누운 카트를 싣고 119 구급차는 이제 일흔이 넘은 노인이 미리 알려 놓은 병원으로 향했다. 예약이 되었다고 했으나 병원에 도착한 후 직원들의 반응을 보니 예약은 당사자가 하는 것이었다. 안면식이 꽤 있는 병원장이라고 했으나 원장과 우연히 마주쳤을 때 그것 역시 확인할 수 있는 정황적 증거가 없었다.
행님아. 아버지는 풍이 좀 쎄다이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한 거 하나도 없데이. 나의 존재 원인을 소멸해가는 아버지에게서 찾으려는 부질없는 시도를 부단히 지속한다. 기대고 기대하면서 아버지라는 모습을 찾으려고 한다. 그 모습을 찾아서 나도 가지려고 한다. 2년 전 여름 재송동 부산은행 사거리에서 아버지를 태우기 위해 차를 세워놓고 있었다. 정오의 해는 수직으로 내리때려 아스팔트가 눅진하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내가 몰고 온 차를 두리번 거리며 찾으며 건널목에 서있는 그의 구두 앞으로 짧은 스커트에 하얗게 드러난 여성의 두 다리가 지나간다. 흔들리는 둔부로 거슬러 오르는 그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나의 동질감이 안타까웠다.
#17
두 달 뒤 대기는 얼어붙고 세상은 한 해를 마무리하며 부산할 것이다. 부산대학교 대운동장 트랙 안으로 펼쳐진 인공잔디 위에는 회사명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쌀쌀해진 저녁을 스무명 남짓 뛰어 다니고 있다. 몸을 풀고 트랙 안으로 들어가 몸을 전진시킨다. 눈 앞으로 뻗은 주로와 굴릴 수 있는 두 다리를 동시에 감각한다. 달릴 수 있도록 허락된 시간에 안도했다. 허락된 시간이 소진되어 죽음이 목전에 와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의연할 수 있을까. 적잖이 당황할 것이다. 기다린 죽음을 맞는 것과 죽음이 찾아오는 것 둘 중 택할 수 있다면 전자를 택하고 싶었다.
#18
고도를 높여 금정산 주능선에 다다를 수록 파스텔톤의 푸른 하늘이 머리 위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로 비추인다. 정상에 이르니 서있기 힘들 정도의 강풍이 불어댔다. 창공은 하얗게 눈부셨다. 빛과 바람에 눈이 시렸다. 얼굴을 좌측으로 돌리는데 어깨 위로 검은 사슬이 보였다. 초점을 바로 하려 실눈을 뜨니 검은 사슬은 창공에 정지한 듯 붙어 있었다. 산객들의 펄럭거리는 바람막이와 자세를 낮추는 부산한 움직임 위로 정지한 검은 사슬. 눈부신 창공에 부착되어 있다가 순간 박리된 듯 발 아래로 떨어졌다. 어디갔을까. 아래로 시선을 돌리니 동공이 커지고 검은 사슬의 정체가 눈에 들어온다. 까마귀는 잎이 떨어지기 시작한 나뭇 가지 하나를 골라 흑자주빛 깃털에 내려 앉는 노곤한 가을볕을 받아내고 있었다. 고당봉을 내려와 미륵사로 향했다. 땅 속으로 갈라져 뻗은 뿌리줄기, 나무틍의 부드러움, 흙바닥의 탄성과 돌뿌리의 날카로움이 걸음 걸음 전해져왔다. 산길을 덮고 있는 나무 뿌리등은 때로는 감고, 때로는 뚫어서 살 길을 내었다. 가을은 매달려 있는 잎, 떨어져 잠이 든 잎, 잠에서 깨지 못한 채 서걱거리며 부서지는 잎들을 공존시키고 있었다. 미륵사 아래 개울에서는 낙차하는 물의 낙폭과 튀는 물방울이 반사시키는 빛이 공존했으며, 축축한 녹색 이끼와 그 생명력이 공존했다. 뒤딛는 발에 실리는 무게와 끌어 올리는 발의 무게를 느끼며 미륵사에 도착했다. 좌선바위 아래서 솟아오르는 물은 부드러웠고, 흐르는 땀은 짠내가 가득했다. 그렇다. 내 차는 뒷차일 수도 있다. 떠나간 앞차에 연연하는 것이 집착이다. 미련을 두는 인연은 집착을. 집착은 착각과 착오를. 착각과 착오는 허깨비를 만든다. 허깨비는 쫓으면 쫓을 수록 화, 분노를 부르고, 화와 분노는 사고를, 사고는 불운과 불행을 부른다. 태양의 동서 이동을 살피며 오랫동안 미륵사에 앉았다. 아침을 서두르며 얼굴을 내밀었던 해가 어느덧 낙동강 서편으로 기울며 금정산 능선 위로 어둠을 불러온다. 어둠은 염화전 뒷편 덩어리지며 갈라진 좌선바위의 틈을 어둠으로 메웠다. 빛은 틈을 드러내고, 어둠은 틈을 메워준다. 빛은 구분하고 어둠은 전체를 완성시킨다. 어둠이 깔리자 갈려진 미륵봉 바위들이 하나의 전체로서 깨어났다. 어둠을 두려워 하기 앞서 어두운 마음을 두려워 하라 어두운 곳을 살피기 앞서 어두운 마음을 살펴라.
#19
이른 새벽 노고단을 거쳐 반야봉에 이르러 일출을 기다렸다. 지리산 능선을 치닫고 오르는 북풍은 세상의 모든 구름을 쓸어가고 있었다. 같은 날 오전 국내 재계 1위 그룹 회장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네 키스 때문에 오늘 xx 했어.” 라는 성매매 의혹 영상과 간소한 가족장으로 치뤄진다는 그의 장례식 발표는 쉽게 연합되지 않았다. 계열사 사장 명의로 은밀하게 조성된 빌라에서 아랫도리를 내어 맡겼을 이회장의 어투와 일대기에 방영된 임원진 워크샵의 마이크에 대고 말하는 모습은 서로 유리되어 있다. 워크샵에서 이 회장은 "200~300년 전에는 10만~20만명이 군주와 왕족을 먹여 살렸지만, 21세기는 탁월한 한 명의 천재가 10만~20만명의 직원을 먹여 살린다“고 힘주어 말했는데, 그건 천재로 불리는 탁월성이 타인을 살리려고 할 때 가능한 것이었고, 반대의 경우라면 한 명이 수십만명을 죽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나는 아랫도리를 내어 맡긴 이회장과 아랫도리를 내려 감출 것이 없다 했던 S 와의 연계성이 명확하지 않아 당황스럽다. 하지만 그가 누워 있던 병상과 내가 앉아 있던 반야봉은 삶의 끝과 어둠의 끝은 기어이 오고 만다는 정다운 동질감에서 서로 통했다. 해가 떠오르는 천왕봉 쪽 능선은 지구 위로 검게 엎드린 거대 파충류의 등뼈 같았다. 그 우측 검푸른 바탕 위를 다홍빛으로 물들이며 해가 머리를 내밀었다. 낼름거리는 붉은 혓바닥으로 어둠을 핥아먹는 태양을 보며 눈시울이 차올랐는데,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다시금 시작되는 이 세계의 무심함 때문인지, 각막을 때리는 시린 바람 때문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소주를 담아간 물병 마개를 돌리니 에탄올의 싸한 냄새가 차가운 새벽 공기를 갈라내며 코를 찌른다. 두 다리로 버텨 착지를 바로 잡고 바람에 휘청이는 몸을 지탱했다. 맞잡고 기댄 오른팔에 반야봉 정상석의 차가운 요철이 전해져 왔다. 왼손을 뻗어 술을 갈지자 부으며 빌었다. 다름과 차이를 아는 지혜를 얻을 수 있도록. 바른 호흡을 하고, 바르게 먹고 바르게 자고 바르게 싸고 곧바르게 앉아 곧바르게 서고 바른 길을 걷도록. 내가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 마음이 소멸되도록. 나와, 내가 만든 인연이 소멸해서, 이 허무한 인과관계의 덫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나 자신과 세계를 속이고 속았던 죄를 속죄 받을 수 있기를.
智異山.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를 얻게 된다고 해서 지리산. 그 지혜는 지리 (智異). 바로 다름을 아는 것, 차이를 아는 것,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발췌 : 위키백과)
#에필로그
몸을 움직여 생각을 펴고 싶었다. 짧게 쓰고 싶었으나 길어진 문장에 실망하진 않는다. 투명하게 적으려 했으나, 그럴 수 없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다. 이야기가 일상에 기반했으나 실상에 미치진 못했다. 내가 나와 좀 더 멀어져야 실상에 가깝게 적어보리라. 전국이 영하권에 들어서면서 코로나 감염자가 1,000 명을 넘나든다. 기온 뿐만 아니라 생활 영역 곳곳이 얼어붙어 있다. 코로나만 바이러스가 아니다. 서로에 대한 분노, 오해, 차별, 두려움은 면역도 백신도 없는 것들이기에 무섭다. 한 해를 보름 남기고 동지를 기다리고 있다. 어둠이 길긴 하지만 그 시작과 끝은 매혹적이다. 동지를 지나 어둠이 짧아지며 새해가 곧 앞이다.
첫댓글 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을 읽는 줄 알았습니다.
ㅋㅋ그러고 보니 운동일지 픽션 버젼이네요. 새해에는 운지 기록하면서 안 좋은 습관 어떻게 좀 안녕할려구요😅감사합니다
@키도리 (이상영_장전동) 베르베르의 소설처럼 전개되는 치밀한 구성력... 역시 문학도이십니다
재미로 최고의 작가이십니다. ^^
재미로 덕분입니다😅
오랜만에 책한권 정독 했어요 ㅎ
근데 마음 한구석이 묵직 합니다...
큭 ㅠㅜ 저도 묵직합니다. 재미로 달리고 운동하면 묵직한 게 살살 풀리더라구요. 올한해도 재미로 힘! 입니다
정독 시간내어서 한번 해보겠습니다 한글인데 어렵네요 ㅎㅎ
재미로 적은 글이라 재미로 휙 읽혀야 하는데 아직 부족하네요 ㅋ
눈을 뗄수가 없네요.
헉!! 안 본 눈 사드리겠습니다 ㅋ
음...일단 키도리님께는 미안한마음을 먼저 전하며....ㅋ
길어서 드믄드믄 훌터보기만...
담엔 음성이나 동영상으로 읆퍼주시거나 짧게 요약해주시면 밥사드릴께요.ㅋㅋ
오디오북? 좋은 아이디어 감사합니다. 새해에 태철님따라 산에 함 가야할텐데 ㅎㅎ
오늘도 일찍자긴 다 틀렸군!..ㅋ
비마님따라 마하사 올라가고 싶네요.ㅎㅎ
엄마가 책을 열심히 많이 읽어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셨는데..
아..ㅠㅠ..책 좀 읽을껄..
에고 요즘 삶이 유난히 빡빡해서 책 읽을 틈 만들기가 근육 만들기만큼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ㅠㅜ 화이팅입니다
음...
40대 가장들이 격는 직장 생활 이겠죠?
어딜가나 기득권 세력들은 있기는 마련이고 그기에 대항하는 이 도 있더군요..
키도리님.
책을 많이 읽는 분 같으네요^^;
글 빨이 훌륭한 거 같아요..
그렇게 겪으면서 쪼금 커 가는 것 같습니다😅아카드님 감사합니다. 새해에도 화이팅🎵
이 정도 글솜씨면 푸광에게 구박도 안당하고 여친신청자들이 번호표 받고 대기하고 있었을텐데
봄이오면 수수달 흥행 예감.🔥🔥순번발행기 준비해놓겠습니다!
생각없이 열었다가 발목잡혔네요.
키도리님 글 잘쓰시네요.
책한권 써보시죠.
마음이 무거워지는 글이지만 중간중간 운동으로 풀어내는(아니 다시 조이는건가?) 애환이 짠하네요.
자주 올려주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ㅋㅋ 맛점하시구요. 춥고 셩장도 안하고 코로나도 쎄고하지만, 재미로 이기자.!~~이번 달도 즐런입니다
재미로에 있기가 너무 힘든다
운동도 해야하고 글도 읽어야하고 댓글도 쓰야하고 ㅎ
재주가 좋아요
무엇하나 쉬운게 없내여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