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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버림받은 사내
10월 중순의 어느 날.
비스듬한 오후의 햇살을 받은 잔디밭 한쪽은 이미 그늘이 졌고
교정 안은 정적에 덮여가는 시간이다.
도서관 앞에 서서 바람에 흩날리는 은행잎을 한동안 바라보던 김상철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굵은 눈썹 밑의 날카로운 눈빛과 꾹 다물린 입술이 강한 인상을 주는 얼굴이었다.
이윽고 어깨를 편 그는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와 정문을 향해 발을 옮겼다
. 바람에 날리는 낙엽이 맨땅을 훑고 지나면서 메마른 소리를 냈다.
그가 학교 정문 맞은편의 미도 카페에 들어선 것은 6시 5분 전이었다.
이미 환하게 불을 밝힌 카페 안은 손님이 가득 차 있었으므로
그는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 곧 벽 쪽에 앉아 있는 한지은의 옆모습이 보였는데
자주색 정장 차림으로 불빛을 받은 귀걸이가 반짝거렸다.
성큼 다가간 김상철이 앞자리에 앉자 그녀가 머리를 들었다.
골똘한 생각에서 깨어 난 듯 멍한 표정이었다.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J
그가 묻자 한지은은 앞에 놓인 커피잔을 다소곳이 쥐었다.
그녀는 국제여대 4학년으로 같은 졸업반이었지만
김상철의 군복무 기간만큼 어린 스물 둘이었다
. 종업원이 다가왔으므로 김상철은 커피를 시켰다.
「난 영어보다 일어가 떨어져.」
테이블 위에 팔을 기댄 김상철이 덤덤하게 한지은을 바라보았다.
「특히 회화보다 문법이 말이야.」
두 달밖에 남지 않은 취업시험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러자 한지은이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상철씨, 왜 아버지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
퍼뜩 머리를 든 김상철이 그녀를 쏘아보았다.
얼굴이 굳어진 한지은이 말을 이었다.
「어젯밤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나뿐만이 아니야, 엄마는 지금도 누워 계셔.」
「너무해, 나한테까지 비밀로 하다니‥‥‥」
「드디어 탄로가 났군.」
굳어진 얼굴로 입술만 벌리면서 김상철이 웃었다.
「가능하다면 끝까지 감추고 싶었는데.」
「그래서, 그것 따지려고 만나자고 한 거야?J
「우리 집안이 어떤 상황이 되어 있는지는 잘 알 거야.」
한지은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져 있었다.
「지난달에 우리 집에 왔을 때 상철 씨는 거짓말을 했어.
아버지가 시골에 계신다고.」
「대전은 서울보다 시골이거든.」
김상철의 아버지 김영환은 지금 대전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었다.
작년 가을,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세무공무원 비리사건의 공범으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아랫입술을 깨문 한지은은 시선을 내린 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긴 속눈쌥 밑으로 곧은 콧날이 뻗은 서구형의 얼굴이었다.
김상철은 찻잔을 들어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 한지은을 만난 지는 2년이 채 안 되었지만
그것은 김상철의 모든 삶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요즘은 그녀를 만나는 것만이 유일한 기쁨이다.
김상철은 찻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널 속여서. 그리고 네 부모님한테도,」
「그래, 언제 탄로날지 항상 불안했지만 내 스스로 말할 용기가 없었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어?J
「무엇을 이해한단 말이야?J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넌 신문도 안 봤니? 그때 사람들의 이야기도 못 들었어?
나는 전철 안이나 식당에서
이런 놈들은 총살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지내왔어.
이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감추는 수밖에 없었어.
아버지가 저지른 일이니까 자식은 상관없다는 이해나 동정은 받고 싶지도 않고.」
「난 그런 돈으로 학비를 내고 용돈을 썼으니까 모른다고 할 처지도 못 돼.」
「가능한 한 숨기는 수밖에 없었어, 살아가려면.
하지만 언젠가는 들통이 나겠지, 지금처럼.」
잠자코 있던 한지은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상철씨가 정직하지 못하다고만 하셨어.」
「유감이라고 말씀 드려.」
김상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먼저 갈게.」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희미하게 웃음 떤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잘 지내.」
한 시간 후, 김상철은 영등포의 떠들썩한 음식점 안에서 안인석과 마주앉아 있었다.
안인석은 그와 고등학교 동창으로 전공은 다르지만 같은 대학이다.
얼굴선이 곱고 해사한 그는 김상철과는 성격도 대조적이었지만
둘이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단짝이었다.
안인석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야, 너 왜 이렇게 마셔? 무슨 일 있어?」
소주 한 병을 혼자 금방 비운 김상철이 두 병째를 따르고 있다.
「무슨 일은, 뻔한 일이지.」
김상철이 머리를 돌려 옆쪽 테이블을 쏘아보았다.
사내 네 명이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떠들썩한 소음을 내고 있었다.
말끝마다 욕설을 뱉고 목청껏 소리를 질러 댔는데
주위의 손님들은 이맛살을 찡그리면서도 나서는 사람이 없다.
김상철이 안인석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지은이가 아버지 일을 알게 되었어.」
「지은이가 말이야?J
상체를 앞으로 숙인 안인석의 눈이 커졌다.
아마 김상철의 집안 사정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안인석일 것이다.
그는 김상철이 한지은에게도 아버지 사건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 뭐라고 그래?J
「지은이만 아는 게 아니고 그쪽 집안에서 모두 알게 되었단 말이다」
「날더러 정직하지 못하다고 했다는데, 지은이 아버지가
어머니는 자리를 펴고 누웠고.」
「젠장, 잠자려고 누웠겠지, 정직하게 말했다면 상 주려고 했다더냐?」
안인석이 소주잔을 들어 반쯤 마시고 내려놓았다.
「그래, 지은이는 어때?J
「어쩌긴, 헤어졌지.」
「헤어진 건 알아, 네가 지금 혼자 있는 것을 보면.」
말은 가볍게 받았지만 안인석의 시산이 긴장되어 갔다.
「상철아, 너, 설마.」
「앞으로 만나지 않을 거다.」
「언젠가는 끝날 일이었어. 아버지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부터.」
「아마 그랬겠지. 날 만나자고 했던 걸 보면, 이해하고 자시고 할 상황이 아니니까.」
「내 형편에 그 여자는 과분했어.」
「이 자식아, 쓸데없는 소리 말아,」
그러자 술잔을 내려놓은 김상철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네 놈이 어떻게 안단 말이냐? 내 미래를.」
「그래, 하긴 그렇다. 」
머리를 끄덕인 안인석이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 달분 미리 가져 왔다. 」
「고맙다.」
봉투를 집어넣은 김상철이 술잔을 들었다.
아버지가 구속된 후로 안인석은 김상철에게 매달 150만 원의 생활비를 건네주고 있었다.
김상철의 어머니는 그가 고둥학생 두 팀의 가정교사를 해서 벌어오는 돈으로 안다
. 10억이 넘는 세금을 횡령했다고 발표된 김영환 씨가
항소심에서 추징금 4억에 징역 5년을 언도받은 바람에 집안은 거덜이 난 것이다.
안인석의 부친 안문세 박사는 강남 영동대로에 있는 문세병원의 원장이다
. 안박사는 안인석의 씀씀이가 헤퍼진 것을 알았지만
공사가 다망하여 미처 캐묻지 못하고 있었다.
옆자리의 사내들이 다시 왁자하게 소리치며 웃었고
그 위압적인 분위기에 음식점 안이 조용해졌다
. 김상철 비슷한 나이로 보였지만 모두 짧은 머리에 체격이 컸고
가끔씩 주위를 훑는 시선들이 매서웠다.
건달일 것이다.
아마도 근처의 나이트클럽이나 오락장을 무대로 노는 주먹들로 보였다.
「하지만 난 지지 않을 것이다.」
단숨에 술잔을 비운 김상철이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고는
안인석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돌려 옆자리의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야, 이 새끼들아, 좀 조용히 못해?J
그의 말이 끝나자 음식점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김상철을 바라보았는데 네 사내도 예외가 아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김상철이 사내들의 식탁 앞에 가 섰다.
「일어나는 놈 있으면 죽인다. 먼저 말을 하는 놈이 있어도 그 놈부터 죽인다.」
그러자 안쪽에 앉아있던 눈이 가늘게 찢어진 사내가 벌컥 의자를 제끼며 일어났다.
그 순간 김상철의 몸이 쉽겨지듯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발이 날아가 사내의 턱을 차올렸다.
그리고는 떨어져 내리면서 옆에서 몸을 세우는 사내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내려쳤다.
한손으로 탁자를 짚은 김상철의 몸이 다시 제자리에 바로 섰을 때
턱을 채인 사내는 의자와 함께 땅바닥에 누워 있었고
뒤통수를 찍힌 사내는 식탁 위에 코를 박고 엎어져서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면 죽어.」
남은 두 사내를 손가락 끝으로 가리키며 김상철이 낮게 말했다.
음식점 안은 기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김상철이 안인석에게로 눈만을 돌렸다.
「계산해라, 가자.」
그리고는 다시 두 사내를 바라보았다.
「너 이 새끼들, 내가 누군지 알아?.
누군지 알 리가 없는 두 사내가 얼이 빠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 이 새끼들, 작년에 신문도 안 봤어?‥ TV도 안 봤느냔 말이다?」
그러자 안인석이 그의 팔을 끌었다.
「그만 가자.」
「이 새끼들, 대한민국이 떠들썩했는데도 나를 몰라본단 말야?J
그는 안인석에게 끌려 음식점을 나왔다.
밖은 화려하고 혼잡한 영등포의 번화가였다.
서두르며 김상철을 끌고 인파를 헤쳐 나가던 안인석이
뒤를 힐끔거리더니 이윽고 걸음을 늦추었다.
「나 참, 기가 막혀서.」
그가 김상철을 흘겨보았다.
「칠려면 그냥 치지, 왜 그 따위 공갈을 치는 거야?.
「무슨 공갈?」
술이 깬 얼굴로 김상철이 그의 시선을 받았다.
「왜, 내가 틀린 말 했냐 ? ‥」
다음 날 아침 ,
가방에 도시락을 넣던 어머니가 갑자기 손을 멈추더니 눈을 감았다.
작은 체격에 몸도 약해서 근래에 들어 자주 일을 쉬었으면서도
병원에는 한사코 가지 않으려고 한다.
옷을 입던 김상철이 어머니에게로 다가갔다.
「어머니, 또 아파요?J
어머니가 눈을 떴다.
「아니다. 조금 피곤해서.」
「병원에 가자니까 그러네. 정말 왜 이러시는 거요?」
「아픈 데가 있어야 갈 거 아니냐? 본래 몸이 약해서 그런다.」
「그러니까 병원에 가셔야 해요. 오늘 나하고 같이 갑시다.」
「오늘은 일 때문에 안 돼.」
어머니가 그에게 가방을 건네주었다.
쉰둘이면 아직 팔팔한 나이였는데
어머니의 피부는 거칠었고 주름살이 깊어서 환갑이 지난 노인처럼 보인다.
어머니도 나갈 채비를 했다. 작년부터 파출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 이번 아버지 면회는 제가 갈 테니까 어머니는 쉬세요.」
김상철의 말에 어머니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얘 좀 봐, 난 가만 있으면 가슴이 떨리고 어지러워, 움직여야 돼.」
「글쎄, 그러니까 집에서 쉬시라니까요.」
「안 된다.」
머리를 저으며 어머니가 단호하게 말했다.
「너의 아버지는 내가 봐야 한다.」
마치 주일날 교회에 가는 사람처럼 어머니는 빠짐없이 교도소에 면회를 갔고
그것이 다음 면회일까지의 정신적인 양식이 되어 온 것이다.
입맛을 다신 김상철은 가방에 책을 담아 넣고는 일어섰다.
심성이 여린 어머니에게 이러한 시련은 몸과 마음 모두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그들의 전셋집은 방 두 칸에 주방과 화장실이 나란히 붙은 15평형의 연립주택이었다.
아직 박스를 풀지 않은 세간이 이쪽저쪽에 가득 쌓여져 있는 사이를 지나
김상철은 현관으로 나왔다.
봉천동의 달동네이기는 하지만 재산 모두를 처분하여 추징금을 내고
전세금이 남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 어머니가 뒤따라 왔다.
「아버지는 죄가 없어, 모두 과장하고 조서기가 해먹은 거야.」
「누가 그걸 몰라요?J
신을 멘 김상철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 새끼들이 조금씩 건네준 돈을 영문도 모르게 받았다고 해도 공범이 된다니까, 어머니는 참.」
「그래도 억울해. 조서기 그놈은 추징금을 내고도 빌딩 한 채가 남았다는데.」
아침 7시 30분이어서 여동생 민희는 아직 자고 있는지 방에서는 기척이 없다.
어머니를 닳아 내성적인 성격인데다가
아버지의 사건이 터지고 학교까지 휴학하게 되자 좀체로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다
. 밖으로 나오자 찬 아침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찻길이 멀어서인지 매연이 덜 섞인 시린 공기가 폐에 스며들었으므로
김상철은 어깨를 펴고 숨을 들이마셨다.
김상철이 체육관 앞의 나무 벤치로 다가가자 한지은이 머리를 들었다.
짙은 색 바바리코트 차림의 한지은은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어깨를 움츠리고 있다.
「오랜만이구나.」
옆자리에 앉은 김상철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학교 앞에서 그렇게 혜어진 지 보름 만이었다.
그동안 서로 전화 한 통 주고받지 않았다.
「운동하고 있다고 해서. 도서관에 갔더니 …」
조금 파리해진 얼굴의 한지은이 말했다.
「우리 나가, 밖으로.」
「아니, 난 한 시 간쯤 더 있어야 돼. 시범경기가 있거든.」
거절하기가 미안했는지
김상철은 운동으로 상기된 얼굴에 다소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시험공부 때문에 몇 달간 운동에 게으름을 피웠는데도 몸이 잘 풀려.
그래, 스트레스가 싹 풀리는 기분이야.」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끌려 합기도를 배웠는데 지금은 공인 5단이었다.
그러나 단수를 높이기로 마음만 먹었다면 7단도 거뜬하게 딸 실력이었다.
대학 2학년 때 중량급 한국 챔피언을 따내었고
군에 들어가서는 해병대의 무술교관을 지냈다.
그러나 복학 후에는 가끔 체육관이나 도장에 나가 몸을 풀었을 뿐 학업에 전념해 왔다
. 아버지의 말대로 운동은 정신과 몸의 균형과 건강을 위한 것이었고
미래를 위해서는 취업준비가 당면과제였던 것이다.
김상철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바쁘다는 시늉이어서 건성이다.
「그래. 무슨 일이야? 여기까지 찾아온 건‥」
「꼭 말해야 될 것 같아서.」
김상철을 올려다보던 한지은이 고개를 떨구었다.
「나, 중절수술 했어 사흘 전에.」
「아, 그랬었지 .」
기억이 난다는 듯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생리가 한 달 동안 끊겼다고 한 것이 20일쯤 전이었으니
태아는 3개월쯤 되어 있었을 것이다.
「미안하다, 내가 같이 가주는 건데.」
「관계를 끊자니 이것저것 정리할 것이 많았구만. 그래, 몸은 괜찮아?」
구두 끝을 내려다본 채 입을 열지 않는 한지은의 어깨를 그가 가볍게 쳤다.
「궁상떨지 말고 돌아가, 이제.」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 돼?J
그러자 김상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잘못했다고 빌기라도 할까? 아니면 기회를 달라고 매달려 울까?J
「혼자서도 잘 정리하면서 나한테 바라는 것이 뭐야?
네 마음이 개운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지?」
「난 그저 ‥」
「넌 영리한 애야. 타산이 빠르고, 그래서 손해를 보지 않는 여자지.」
「알았어.」
자리에서 일어선 한지은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횐 봉투 하나를 꺼내 그의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아버지가 오신다는 걸 내가 대신 온 거야.
아버지는 사람을 시켜서 상철 씨 집안을 알아보셨어. 그래서 이걸‥」
「이게 뭔데?J
얇은 봉투를 손에 쥔 김상철이 한지은을 바라보았다.
「뭐야? 이거?J
「돈이야. 2천만 원이 들었어.」
「생활에 보태 쓰라고.」
머리를 끄덕인 김상철이 봉투를 한지은의 코트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돈을 보니까 목구멍 안에서 손이 나을 것 같지만 안 받겠어.」
「받을 이유도 없고,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러니 가지고 가,」
「이건 호의야. 단지, 우리 집안의‥)
「상철 씨가 이러리라 짐작했지만 아버지가 굳이 ‥」
「돈은 안 받겠지만 그 호의는 충분히 이해한다고 전해.
그리고 염려하실 것 없다고도 전하고.」
일어선 그는 한지은을 향해 웃었다.
「아버지가 돈 먹고 교도소에 계신데 자식이 대를 이어 돈을 먹을 수는 없지.」
근대그룹은 계열사가 40여 개에 임직원의 숫자만 해도 10만 명이 넘었고
해외 지사와 현지 법인을 합하면 200개가 넘는다.
또한 외국에 세운 현지 공장도 수십 개여서
그룹 전체의 1년 매출액이 20조 원 가깝게 되는 한국의 최대 그룹이었다
. 55년 전, 철공소의 인부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강우진 회장은
지금도 정력적으로 그룹을 이끌고 있었는데
물론 경영방식은 옛날과 달랐다
. 그룹을 연계성이 있는 품목별 소그룹으로 나누어 소그룹 회장이 있고,
각 소그룹은 종합적인 전략에 따라 계열사를 지휘하는 것이다.
자동차, 중공업, 전자, 건설, 상사, 유통의
6개 소그룹으로 나누어진 방대한 조직을 통괄하는 것은 물론 강회장이다.
그는 지금도 한 달에 한 번 그룹장 회의를 주재하면서 그룹을 관리하고 있었다.
또한 한 달에 열흘은 해외의 사업체를 시찰하면서 맹렬한 활동을 한다.
강회장이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날 저녁이다
. 모처럼 모인 가족들과 식사를 마친 강회장은
4형제 중 장남인 강용식과 함께 서재로 들어섰다.
강용식은 중공업 그룹의 그룹장으로 조선의 회장도 겸임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개발에 적극 찬성이야.
한·러 합작 자동차 공장의 계약만 끝낸다면 우리에게 개발권을 주겠다는 거다.」
소파에 앉은 강회장이 서두르듯 말하자 강용식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 실장한테서 들었습니다, 아버님.」
「우리는 대한민국의 면적보다 큰 땅을 가질 수가 있단 말이다.」
「예, 45만 평방킬로니까 남북한을 합한 면적보다 두 배도 넘습니다.」
「내일 청와대에 들어가야겠다.」
「아버님.」
자리를 고쳐 앉은 강용식이 헛기침을 했다.
50대 초반으로 이제 경영자로서의 관록이 붙은 강용식이었지만
강회장 앞에서는 언제나 조심스럽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뺨을 맞는 것이 예사라는 소문도 있었으나
지금은 강회장에게 제일 신임을 받는 자식이다.
「먼저 시베리아 지역을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러시아 쪽에서 보여준 슬라이드 사진만 가지고는 대뜸 계약하기가‥」
강용식이 말하자 강회장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까짓 나무가 조금 적으면 어때? 그
땐 땅을 갈아서 옥수수를 심지. 끝도 없는 옥수수밭을 만든단 말이다.」
「그러실 바에는 기후와 조건이 더 좋은 땅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긴 그렇군.」
「청와대에 들어가시는 건 조금 보류하시고
조사단을 파견해서 임차될 땅에 대한 정밀점검을 시켜야 합니다.」
강회장이 입맛을 다셨다.
「러시아 쪽은 서두르고 있는데 몇 달쯤 보류시켜야겠군.」
「러시아 쪽에는 로비를 하겠습니다.」
강회장이 모스크바에 간 것은 시베리아의 땅을 임차하기 위해서였다.
광활한 시베리아 대륙은 아직도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미개척지로 남아 있었는데
풍부한 자연자원을 지닌 땅이었다.
그가 임차 후보지 중에서 고른 지역은 주그주르 산맥 옆쪽의 광활한 무인지대로
원목뿐만 아니라 갖가지 광물질이 풍부하다고 알려져 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조사단을 구성해서 보내야겠다.
아니, 조사단으로는 약해.
지금도 호랑이가 나오고 산적들이 있다는 곳이야.
그렇지, 개척단이라고 해야 옳다.」
강회장의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가 이런 기풍으로 근대그룹을 성장시켜 왔으므로
그의 심복들 중에는 산적 두목 같은 무리들이 많다.
강용식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러시아 정부에 개척단을 파견한다는 통보를 하고 허락을 받겠습니다.
그리고 한국 정부에도.」
「빌어먹을.」
강회장의 얼굴이 다시 찌푸려졌다
. 받아들이는 러시아 정부보다
보내는 이쪽 정부가 더 까다로울 것이라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것도 청와대에 말해야겠군. 그 말 많은 놈들한테.」
「허락이 날 겁니다, 아버님. 러시아 정부가 허락해 주면 말입니다.」
「그렇지, 그게 순서지. 러시아의 신경을 거스를 배짱이 있는 놈은 없지, 이곳에.」
강회장이 만족한 듯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시베리아의 땅을 50년 임차한다는 것은 그곳의 주인이 된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강회장과 그 다음 세대, 그리고 손주의 세대까지
그 땅에서 살다가 뼈를 묻게 되어도 남을 기간인 것이다.
남북한을 합한 면적의 두 배가 넘는 땅이 강씨 일문의 땅이 되는 것이다.
그곳에 도시를 짓고, 공장과 학교,
그리고 산적을 막는 군대도 키울 수가 있을 것이다.
강회장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 영감의 로비는 당할 자가 없어
. 멧돼지처럼 달려 들어가는 것 같았는데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 사이에 뱀이 되어서 상대방을 감고 있단 말이야.」
조영규 실장이 테 없는 안경을 추겨 올리며 말을 이었다.
「주그주르 산맥 지역은 원목뿐만이 아니라
광물질도 풍부하다고 소문이 났지만 정확한 근거가 없어,
정밀조사를 토대로 한 것이 아니란 말이야.
그런 곳에 투자할 돈으로 전자단지를 몇 개 더 세우는 게 나아.」
「강회장은 꽤 집착하는 모양입니다.」
앞에 앉은 최선호 전무가 말했다.
그는 비서실의 개발담당 팀장이었는데
직급은 전무이나 계열사로 내려가면 사장급이었다.
비서실장 조영규도 사장직급으로 오성그룹의 회장단 회의에
간사로 참석하고 있는 것이다.
조영규가 입을 열었다.
「우린 아직 시베리아 땅이라든가 유전 개발 같은 것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
다른 일이 산적해 있단 말이야,」
조영규는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오전 10시 5분 전이었다.
10시 30분에 전자그룹 회장과 함께 미국의 파인사 회장을 만나기로 했으므로
회장에게 준비를 시켜야 했지만 5분쯤 더 기다리기로 했다.
아마 회장은 반도체 공장 증설에 관한 계획서를 검토하고 있을 것이다
. 오성그룹이 전자 분야에서 세계의 초일류기업으로 성장한 것은
선대의 김상모 회장이 기반을 구축했지만
2대째인 김호경 회장의 집념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첨단분야의 산업을 개발, 발전시키는 것만이
회사를 살아남게 하는 방법이라고 믿고 있었다.
「땅 넓이가 남북한 합친 면적의 두 배나 된다면서요?J
최선호는 강우진 회장의 시베리아 개척 프로젝트에 마음을 빼앗긴 모양이었다.
「임차기간이 50년이라면 영국이 홍콩을 빌린 것만은 못하지만
자기 땅이라고 해도 되겠는데요,
그렇지 않습니까?J
「그렇게 생각해도 되겠지.」
「우리 회장님께서는 그걸 알고 계시는지요?J
「내가 어제 간략하게 말씀드렸어. 그랬더니 아무 말씀 없으시더군.」
잠자코 머리를 끄덕인 최선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실망하는 표정이었다.
50대 초반의 최선호는 적극적인 성격으로
반도체에 대한 자료나 정보를 수집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사내였다.
그가 거느리는 개발팀 안에는 CIA나 모사드 특공대에 못지않는 A반이 있었는데
평시에 그들은 회장의 경호를 맡기도 했다.
최선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조영규는 자리에게 일어섰다.
회장실로 들어서자 테이블 위에 두 팔을 얹고 앉아 있던 김호경 회장이 머리를 들었다.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던 표정이었다.
「회장님, 파인사의 그렌트 회장과 10시 30분에 약속이 있으십니다.」
「알고 있어요,」
각진 얼굴이었지만 목소리는 부드럽다.
「그런데 조 실장, 어제 이야기한 근대의 시베리아개발 건 말인데…」
「네, 회장님 .」
긴장한 조영규가 그를 바라보았다.
건성으로 들은 줄 알았는데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회장이 말을 이었다.
「그 프로젝트를 알아보도록 하시오.」
「알아보시라면, 저 ‥」
「조사를 해요. 그곳이 가능성이 있는지.」
「예, 가능성을 조사하겠습니다. 」
「물론 근대 쪽에는 비밀로 하고.」
「물론입니다, 회장님.」
「러시아와 한국 정부 양쪽의 입장도 알아보도록 하고, 계약조건도 함께.」
「알겠습니다. 그러면 러시아가 내놓은 다른 임차지역도 함께 조사를 해도 좋겠습니까?J
그러자 한동안 조영규를 바라보던 회장이 희미한 웃음을 띠우면서 머리를 저었다
.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조영규는 머리를 숙였다.
회장의 의도를 안 것이다.
회장은 러시아의 땅 임차 같은 것은 처음부터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가 우려하는 것은 근대그룹의 팽창이다.
그리고 근대그룹과 러시아와의 밀착인 것이다.
*
대전 교도소의 면회실에서 김상철은 아버지 김영환을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유리벽에 둥근 구멍이 총알자국처럼 뚫린 통화구로 다투듯 말하는
면회자와 수감자들은 모두 쫓기는 표정이었다.
시멘트벽에 부딪친 말소리들이 웅웅 떠다니면서
방 안은 울림소리로 가득 차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제각기 목소리들을 높인다.
그러다가 양쪽에 서 있던 교도관의 주의를 받고
다시 말소리가 낮아지는 것이 반복되고 있다.
김상철이 입을 통화구에 가져다 댔다.
「아버지, 건강하셔야 돼요.」
「오냐, 고맙다. 」
볼이 홀쭉하게 여윈 김영환 씨가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횐 머리가 반쯤 섞인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겼고
깔끔하게 면도를 했지만 시선 끝은 무디어져 있었다.
「아버지, 책 가져왔어요.」
「그래, 고맙다.」
「아버지, 저, 근대그룹에 들어 갈 생각입니다.」
이미 근대그룹에 지원서는 제출했고 입사시험은 20일 후인 12월 1일이다.
「아버지 .」
김상철이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는 아버지를 존경합니다.」
김영환 씨의 먼 허공을 향하던 시선에 초점이 잡혀졌다.
그러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를 믿습니다.」
「나는‥」
김영환 씨가 헛기침을 했다.
「상철아, 나는 공금인 줄 알면서 받아썼다.
세금을 탕감해 준 것도 돌아올 돈을 기대했기 때문이야.」
김영환 씨가 유리벽에 바짝 얼굴을 댔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검찰이나 법원에서는 몰랐다고 했지만 알고 받아쓴 거야
. 난 내 자식 앞에서까지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전에 대여섯 번 면회를 왔었지만 아버지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긴장한 김상철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너한테만은 꼭 말하고 싶었다.」
아버지의 입술 끝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유리벽에 얼굴을 바짝 붙인 그가 말을 이었다.
「강한 자만이 사는 세상이다.
이 애비의 인생은 실패작이다.
하지만 너는 이겨야 한다. 성공해야 된다.」
「아버지.」
「절대로 좌절하지 말아라
. 이 애비의 전과가 네 장래에 지장이 될 것이다.
그때에는 단호하게 나를 부정해라. 나를 욕하고 매도하고 아예 지워 버려라.」
「아버지.」
김상철의 두 눈도 부릅떠져 있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세상사람 모두가 욕한다면 그놈들을 상대로 싸우지요.」
「이런 바보 같은 놈!」
아버지가 버럭 소리를 치자 교도관이 주의를 주었다.
「내말을 알아듣지 못했단 말이냐?
애비가 김영환이라는 걸 알게 하면 안 된단 말이다. 절대로.」
「떳떳하게 말한다고 해서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 사회라는 것은.」
「난 너를 어릴 적부터 강하게 키웠다
. 하지만 너는 아직 타협을 모른다
. 상철아, 이기려면 타협을 해라,
너무 곧으면 부러지는 법이다. 굽혔다가 나중에 기회를 보아라,」
「알겠어요, 아버지.」
거의 얼굴을 맞댄 김상철이 말했다.
「타협하지요, 굽히겠습니다. 이기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하겠습니다.」
「네 엄마와 동생을 잘 부탁한다.」
「기운을 내세요. 아버지.」
면회시간이 끝났다는 벨이 울렸으나 그들은 얼굴을 마주댄 채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어머니가 쓰러진 것은 김상철이 면회를 다녀온 나흘 후였다.
함께 방을 쓰는 민희가 아침이 되었는데도 일어나지 않는 어머니를 깨우다가
의식을 잃은 것을 발견한 것이다.
어머니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면서 김상철은 이를 악물었다.
겹쳐오는 시련에 대한 분노와 함께 견디어 내겠다는 투지가 끓어올랐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병명은 자궁암이었다.
의사는 이런 상태가 되도록 방치해둔 환자와 가족들의 무지에
혀를 내두르는 표정을 했다.
중환자실에 입원한 어머니를 두 남매가 간병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낮 시간은 민회가 맡고 밤에는 김상철이 병실을 지켰다.
일주일째 되는 날 아침이다.
교대하러 온 민희와 김상철이 병실 밖에서 마주보고 섰다.
「수술은 닷새 후로 잡혔다.」
김상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몸이 약해져서 의사가 걱정을 하더라. 하지만 잘 되겠지.」
「뭐라고 했는데? 위험하대?J
민희가 목소리를 떨자 김상철이 웃으며 머리를 저었다.
「의사들이나 변호사들은 원래 그래.
우선 어렵고 힘들다고 하는 거야.
그래야 책임도 덜고 생색도 나는 법이니까,」
「오빠, 돈은? 수술비가‥」
「걱정 마라, 내가 모아둔 돈이 있다.」
김상철이 민희의 어깨에 두 손을 올려놓았다.
「네가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어. 넌 기운만 차리면 돼. 알았니?」
민회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준 김상철이 몸을 돌렸다.
한 시 간쯤 후에 그는 천호동의 대로변에서
거대한 철골 구조물을 올리고 있는 빌딩 공사장 안으로 들어섰다
. 작업 인부를 체크하고 있던 반장이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저 친구, 이제 오는구만.」
화이버를 젖힌 반장이 손짓을 해서 그를 가까이 불렀다.
「이봐, 장씨가 오늘 안 나왔어. 그래서 자네가 대신 올라가 줘야겠어.」
「제가요?J
김상철이 붉은색 철근빔만이 얽혀져 있는 빌딩의 골격을 올려다보았다.
15층까지 어제 놓여졌으니 오늘은 16층을 쌓을 차례였다.
그러나 이제까지 잔일을 거들려고 아래위로 오르내렸을 뿐
위에서 작업을 한 적은 없는 것이다.
「자네는 이씨 보조야. 이씨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반장이 자르듯 말하자 김상철은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요, 뭐.」
「배짱만 있으면 돼. 그리고 허리에 로프를 매고,」
「알았습니다.」
반장이 만족한 듯 웃었다.
「일당이 2만 원이나 차이가 난단 말이야. 저 병신들은 죽어야 돼.」
크레인으로 끌어올린 거대한 빔을 가로 세로로 맞추어 끼우는 작업이었는데
보기에는 간단한 것 같지만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크레인 기사와 호흡이 맞아야 했고
첫째로 폭이 50센티도 안 되는 빔 위를 걸어 다녀야 한다.
그것은 15층 높이에서 줄을 타는 것과 같은 상황이어서
초보자들은 아예 올라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입에 담배를 문 이씨가 다가왔다.
40대 중반으로 철근조립 기술자여서 반장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 봐, 김 군. 내가 자네를 데리고 일하겠다고 했어.」
「저를 왜요?J
「자네 하체가 든든해서,」
이씨가 턱으로 김상철의 하반신을 가리켰다.
「척 보면 알지, 자넨 연장도 튼실할 거야.」
「하체가 든든해야 돼, 위에서 일하려면,」
그러자 반장이 이를 드러내며 맞장구를 쳤다.
「암먼, 여자 위에서도 마찬가지여.」
*
창으로 다가간 이유미가 커튼을 젖히자
눈부신 햇살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유리창을 배경으로 드러난 그녀의 나신도 빛살에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안인석은 눈을 가늘게 떴다.
「벌써 아홉 시야, 일어나.」
그녀가 다가왔는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단단하게 솟은 젖가슴이 탄력으로 떨리듯 흔들렸다.
「어서 일어나, 아침 먹으러 가게.」
강남의 조그만 호텔방 안이다
. 어젯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나서 가까운 곳에 있던 이곳에 들어온 것이다.
이유미가 침대 위에 걸터앉더니 그를 내려다보았다.
「남자가 왜 이렇게 비실거려?」
「야, 30분만 더 있다가. 너무 일러.」
이맛살을 찌푸린 안인석이 손을 뻗어 그녀의 젖가슴을 쥐었다.
「무슨 바쁜 일이 있다고 그래?」
「난 게으른 남자가 싫어.」
안인석의 손을 털어낸 이유미가 일어나 팬티와 브래지어를 찾아 걸쳤다.
그녀는 쌍꺼풀이 진 또렷한 눈망울을 가진 미인으로
몸매도 미끈해서 문리대 안에서 모르는 남학생이 없다.
또한 그녀는 여러 가지 소문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는데
담당교수와 호텔에 들어갔다든지,
방송국의 PD와 동거를 했다는 등 야릇한 것도 많았지만
본인은 해명이나 변명 같은 것도 하려 하지 않았다.
이유미는 안인석의 애인으로 영문과 클래스메이트였다.
성격이 밝고 붙임성이 있어서
안인석의 부모는 그녀를 며느리감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모처럼의 의견일치를 보았던 터였다.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이유미의 아버지도
물론 안인석을 사윗감으로 인정하고 있었으므로
둘의 외박은 이제 반쯤은 공공연하게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이유미가 밤늦게 어머니한테 전화를 해서
'나, 지금 인석씨하고 같이 있어' 하고서 외박하는 식이다.
그래서 양쪽 집안은 지난달에 어머니끼리 한번 인사를 나누었고
내년 중으로 결혼식을 올리자는 구두 약속까지 하게 되었다.
안인석이 침대 옆의 탁자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누운 채 다이얼을 누른 그는 한동안 귀에 대고 있던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이 자식, 시험이 내일 모렌데 어디 간 거야?.
혼자소리로 투덜거리자 이유미가 침대에서 일어나 옆쪽의 의자에 앉았다.
「왜, 전화를 안 받아?J
「응, 아무래도 여동생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김상철은 도서관에도, 체육관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밤에 집으로 전화를 하면 여동생이 받는데 한결같이 모른다고만 하는 것이다.
이유미가 탁자 위에 놓인 담배를 집어 입에 물었다.
「어디 놀러 갔겠지, 뭐.」
「팔자 좋은 소리 그만해.」
이맛살을 찌푸린 안인석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럴 형편이 아니야, 그놈은.」
「난 그 사람이 싫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은 그녀가 말을 이었다.
「자기 친구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런 분위기의 남자는 질색이야.」
「네가 윌 안다고 그래? 걔에 대해서.」
「분위기가 싫다고 그랬지, 내가 윌 안다고 했어? 알 필요도 없는 사람이고.」
「분위기가 어때서?J
「질겨. 그리고 어둡고, 때로는 섬뜩할 때가 있어. 그 눈빛이 무서워.」
「상철 씨 애인은 그런 남자가 좋은지 모르지만 난 아냐.」
안인석이 시트를 젖히고 일어섰다. 알몸이다
. 바닥에 떨어진 팬티를 주워 입은 그가 이유미를 바라보았다.
「그 자식은 애인도 떨어졌어, 지금.」
「아니, 왜?J
「글쎄, 네 말대로 그 여자도 그런 분위기가 질색이었는지 모르지,」
한지은과도 서너 번 같이 만난 적이 있었던 이유미가 멍한 얼굴이 되었다.
*
벽에 걸린 시계는 오전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전 9시 30분.
유장석 이사는 비서실의 소파에서 일어섰다.
각진 턱에 눈매가 예리했고 키는 보통이었지만 어깨가 넓다.
그는 비서실장 이남호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 섰다.
「실장님, 시간 되었는데 들어갈까요?J
「가만.」
이남호가 서둘러 책상에서 일어섰다.
「내가 여쭤보고 올 테니 기다려.」
회장실은 바로 옆방이다.
그가 회장실로 들어가자 유장석은 들고 있던 파일을 겨드랑이에 끼고는
넥타이의 매듭을 치켜 올렸다
. 근대건설에 입사하여 이사가 될 때까지 20년을 근무했지만
회장실로 들어가는 것도 처음이고 회장과 독대하는 것도 처음이다.
그는 날이 선 바지의 주름과 잘 닦여진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회장실의 문이 열리더니 이남호가 나왔다.
「유 이사, 들어와.」
유장석은 헛기침을 조그맣게 하고는 배에 힘을 주었다.
어제 오후 회장실로 출두하라는 지시를 받고
현재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세 곳의 공사장 현황을 꼼꼼히 점검해 보았었다.
진척률은 계획대로였고 사고가 한 건 있었지만 부상자는 경상인데다 노조문제도 없었다
. 그리고 자금문제나 금전비리도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강우진 회장은 서류를 보고 있었는데
이남호와 유장석이 테이블 앞에 다가가 섰는데도 머리를 들지 않았다.
회장실은 예상보다 좁았다.
회장 옆쪽 벽에 붙은 책장은 낡아서 옷칠이 벗겨졌고
반대편의 철제 캐비닛은 공사 현장에서도 쓰지 않을 정도로 녹이 슬어 있었다.
유장석은 침을 끌어 모아 삼켰다.
영동의 공사 현장에 있는 자신의 현장소장 사무실보다도 옹색한 방이었다.
이윽고 강 회장이 머리를 들었다.
「어, 왔나. 거기 앉아라.」
걸걸한 목청으로 말하며 강회장이 턱을 들어 옆쪽의 소파를 가리켰다
. 그리고는 자신도 일어서서 소파에 다가가 앉았다.
「너, 나하고 사우디에서 만났지? 그게 어디더라, 담맘인가?」
강회장이 말하자 앞에 얀은 유장석이 허리를 폈다.
「쥬베일입니다. 회장님.」
「그렇지, 쥬베일이었다. 넌 그때 하역담당 졸자였지, 20년쯤 전이니까.」
회장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가 좋아하는 대화중의 하나는 옛날의 무용담이다. 회장이 손으로 그를 가리켰다.
「넌 물에 빠진 장비를 구한다고 물속으로 잠수해 들어갔어, 그렇지?J
잠자코 머리를 숙인 유장석을 향해 회장의 말이 이어졌다.
「너는 두 번이나 들어갔는데도 빈손으로 나왔어. 얼굴이 시퍼렇게 되어선.」
「가만, 빠진 장비가 뭐더라?J
「트럭 엔진부속이었습니다. 회장님.」
「세 번째 네가 들어가려는 것을 내가 말렸다, 그렇지?」
「예, 회장님 .」
「내가 목숨을 아끼라고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나?J
「아닙니다, 회장님.」
「그럼 뭐라고 했는데?J
「네놈이 죽으면 돈이 더 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회장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랬을 것이다.
나는 내가 보고 있었기 때문에 네가 만용을 부리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 놈들이 대부분이지.」
「그런데 너는 내가 떠난 후에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꺼냈더구만.」
「그래서 너를 기억한 것이다.」
회장이 헛기침을 하고는 소파에서 허리를 뗐다.
어느새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나는 내 일생의 숙원사업으로 시베리아의 땅을 임차해서 개간할 생각이다.
자네는 모스크바 지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지?」
「예, 회장님.」
「러시아어는 잘 하나?J
「좀 합니다.」
강 회장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직 그놈의 땅을 사진만 보았지 답사해 보지 못했어.
이건 마치 백 년 전에 미국으로 이민간 우리 조상이
사진만 보고 색시를 데려온 것과 비슷한 꼴이 될 것 같단 말이야.」
「네가 이 일을 맡아라. 필요한 인원과 장비를 최대한 지원해 줄 테니
네가 끌고 시베리아로 가란 말이다, 알겠어?」
「알겠습니다.」
그러자 얼굴에 웃음을 띤 강회장이 이남호를 바라보았다.
그것 보라는 표정이다.
「그곳은 위험한 곳이야.
산적이 있고 요즘은 군에서 이탈한 무리들이 무장 강도 집단을 이루고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짐승도 많고, 호랑이 같은.」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곳을 철저히 조사하는 거야
. 지질, 광맥, 그리고 원목의 상태 등 모든 것을,
여러 분야의 전문가를 데려가야 하는데 네가 총책임자다.」
「예, 회장님 .」
「너는 개척단장으로 상무 승진을 시키겠다.
한 달 동안 여기 이 실장과 함께 개척단을 구성하도록 해.
출발은 12월 20일로 잡는다.」
강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났으므로 이남호와 유장석은 따라 일어섰다.
유장석에게로 손을 내민 강회장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아마 그곳에서 물속에 들어갈 일은 없을 게다. 강이 모두 얼었다거든.」
*
김상철이 나타난 것은 처음으로 서울에 물이 언 날로,
입사시험을 사흘 앞둔 11월 27일이었다.
전화를 받은 안인석이 한달음에 약속장소인 카페로 달려왔다.
저녁 무렵이어서 카페에는 손님이 많았다.
「이 새끼, 어떻게 된 거야? 너 어디 있었어?」
그러자 김상철이 수척해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며 웃었다.
「서울에 있었지, 어디 갈 데가 있나?」
「이 새끼야, 그럼 왜 연락을 안 해?」
「어머니가 입원해서 병원에 있었다.
네 놈 걱정시키기 싫어서 민희한테는 여행 떠났다고 이르라 시켰고,」
놀라 눈을 치켜 뜬 안인석이 머리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어디가 아프신 거냐? 이젠 괜찮으셔?」
「수술이 끝나서 조금 나아지셨다. 하지만‥‥‥」
그리고는 김상철이 말머리를 돌렸다.
「그동안 공부를 못했어. 마무리를 했어야 되는데 야단났다.」
「기본실력이 있으니 넌 염려 없어, 인마. 네가 떨어진다면 붙을 놈이 없다.」
근대그룹의 1차 시험은 외국어와 상식이다.
거기에다 대학 4년의 성적을 참조하여 평가를 내리는 것이다.
다른 기업처럼 1차에서 서류전형으로 골라내고
2차에서 시험을 치는 방식이 아닌 것은
학점이 좋다고 쓸 만한 재목이 된다는 법은 없다는 강회장의 주장 때문이었다.
덕분에 경쟁률은 30 대 1이 넘어서 시험장만 해도 십여 개가 되었다.
「그런데 어머니 병원은 어디냐? 내가 문병을 가야겠는데.」
안인석이 다시 말머리를 돌리자 김상철이 머리를 저었다.
「시험이나 끝나고. 지금은 안정을 해야 돼. 걱정해 줘서 고맙다.」
「망할 자식, 날 친구로 생각했다면 진즉 이야기를 해주었어야지.」
「번번이 신세만 지기 싫었어.」
김상철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공사판에 나가 수술비를 보탰지.
반달쯤 일했는데 수당까지 합쳐서 백만 원 가깝게 벌었다.」
「너 설마 날 비꼬는 건 아니겠지?J
「그럴 리가 있나? 다른 놈이라면 몰라도 안인석이한테는 아니다.」
안인석이 시계를 들여다보는 시늉을 했다.
「네 전화를 받고 유미도 이쪽으로 나오라고 했어. 걔도 네 걱정을 했다. 」
「난 지금 병원에 가봐야 돼. 잠간 네 얼굴만 보려고 나온 참이다.」
「시간 다 됐어, 10분만 기다려.」
「너희들끼리 있어, 난 갈 테니까.」
김상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른 사람한테 다시 중언부언 말 늘어놓기 피곤해서 그런다.」
「야 인마, 걔도 네 걱정 했다니까.」
「고맙다고 전해라.」
그러면서 몸을 돌린 김상철의 눈에
카페 입구로 들어서는 이유미의 화사한 모습이 들어왔다.
저녁이나 먹고 헤어지자고 안인석이 끌고 간 곳은 근처의 경양식집이었는데
모두 저녁 생각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술을 마셨다.
두 병째의 양주를 반쯤 비웠을 때 잔에 술을 채우는 김상철을 향해 이유미가 물었다.
「상철 씨, 내가 친구 소개시켜 줄까요? 괜찮은 애가 있는데.」
순간 안인석의 몸이 굳어졌지만 김상철은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저 자식이 또 입을 놀렸구만. 내가 지은이하고 헤어졌다는 걸 들은 모양이군.」
「말하면 어때요? 그게 무슨 비밀인가요?J
이유미가 테이블 위에 두 팔을 포개 얹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어때요? 소개시켜 줄까요?」
「고맙지만 싫어. 여유도 없고.」
「그럴수록 필요한 것 아녜요? 여자가.」
「아니, 오히려 짐만 되는 것 같아서.」
이유미가 힐끗 안인석을 바라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경양식집이었지만 이곳저곳의 테이블은 술을 마시는 손님들로 차 있었다.
술병을 든 김상철이 이유미의 잔에 술을 채웠다
「인석이가 또 나에 대해서 뭐라고 합디까?」
안인석이 눈을 치켜떴다.
「야, 인마,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쓸데없는 소리 말고 술이나 마셔.」
「우리 아버지 이야기는 하지 않습디까?」
「야, 상철아.」
김상철이 당황한 표정의 안인석을 바라보며 웃었다.
「인마, 그것까지 얘기해 줘야 여자 소개시켜 준다는 말이 안 나을 것 아냐?J
「그만해 둬, 인마.」
이제는 안인석도 화가 난 표정이다.
「넌 피해망상이야, 신경과민이라구.」
「내가 그랬다면 벌써 정신병원에 갔을 것이다.」
술잔을 든 김상철이 한 모금에 술을 삼켰다.
「넌 유미 씨한테 내 이야기를 모두 해 주도록 해.」
「무슨 이야긴데 그래요?」
이유미의 얼굴도 굳어져 있었다.
「내가 실수한 것 있어요?J
김상철이 머 리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버지 이야기는 뭐죠?J
「나중에 인석이한테 들어요.」
가라앉은 분위기를 끌어올릴 화제도 없었고
모두 의욕도 나지 않았으므로 술좌석은 끝이 났다.
경양식집을 나와 김상철과 헤어진 안인석과 이유미는
택시 정류장으로 다가갔다.
「재수 없어, 정말.」
안인석의 팔을 낀 이유미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버지 이야기는 뭐야? 말해 봐, 무슨 일인지.」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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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요~~~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즐독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감사요
~♡♥♡~즐,독.하고있읍니다 .감사!!!~♡♥♡~
ㅈㄷ
감사합니다
즐감요~^^
기대가 많이 되네요!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잘보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굿..................
즐~~**..**~~감~~~~~~!!
즐감요~~~ ! 감사합니다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요~~~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