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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 2020. 8. 27. 4:01
기계유씨 시조 유삼재의 묘
강일 이규관 ・ 2019. 10. 21. 13:36
소재지: 경북 포항시 북구 기계면 미현리 산 1-1( 283 )
기계유씨 시조 묘
시조공 묘의 재실인 부운재 좌측 9부 능선에 있다.
재실을 기준으로 1.7km를 가파른 능성을 따라 힘들게 올라야 시조공 묘에 도착할 수 있다.
숨이 턱까지 차며 올라온 힘들었던 과정이 묘에 도착하는 순간 주변사의 장중함에 사라진다.
상하장으로 조성된 묘다.
앞의 묘가 시조 유삼재의 묘로 알려져 있고, 뒷 묘에 대한 기록은 없다.
소생의 추측으로 뒷에 묘는 시조공 부인의 묘가 아니겠는가 추측해 본다.
왜냐하면 두 묘 모두 진혈에 점혈 되었기 때문이다.
지기를 체득한 풍수지사가 아니면 쉽게 점혈할 수 없는 곳이다.
결혈의 형태는 종형(縱形)의 일원혈판(一員穴坂)으로 결혈이 되었다.
혈의 크기는 직경 6M이고, 시조공 묘로써 손색이 없는 상당한 부혈지지다.
위의 묘역에도 천혈 인혈 지혈로 결혈 되었다.
천혈 인혈에 점혈을 하였는 지, 인혈 지혈에 점혈을 하였는 지는 각자의 상상에 맞긴다.
왜냐하면 외진 곳이기 때문에 투장(偸葬)을 염여하기 때문이다.
창령조씨 시조 공 묘가 상하장으로 점혈을 하였다.
(참조 177 창령조씨 시조 조계룡의 묘)
출처: 한국자생풍수연구소 덕후 조성복 선생님의 카페에서
기계유씨유래
유씨(兪氏)의 시조는 유삼재(兪三宰)이고, 신라조(新羅朝)에 아찬(阿湌)을 역임했다. 기계유씨(杞溪兪氏) 을사보(乙巳譜)에 보면 자(字)와 호(號)는 전하지 않고, 세차(歲次) 역시 상세히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신라 말에 유의신(兪義臣)이 신라의 세신(世臣)이라 고려(高麗)에 불복(不服)하자 그를 기계현(杞溪縣) 호장(戶長)에 강속(降屬)시킴으로써 후손들이 그 곳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기계현(杞溪縣)은 지금의 영일군(迎日郡) 기계면(杞溪面)의 고현(古縣)으로 시조의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저 있고 시조 이래 상고(上古)의 세거지(世居地)로 전해지고 있다. 이 유허비(遺墟碑)는 정조(正祖) 19년 서기 1795년 후손인 경산부윤(慶山府尹). 유한모(兪漢謨)가 현지 노인(老人)의 말을 듣고 옛날 유씨(兪氏)들이 사용했다는 우물터에 세웠다.
기계유씨(杞溪兪氏) 자손으로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인물은 유여해(兪汝諧)이다. 유여해는 유의신(兪義臣)의 증손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史實)은 유의신(兪義臣)으로부터 300 여년 뒤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최항(崔沆)이 하동(河東) 감무(監務) 노성(盧成)을 죽이다. 노성(盧成)은 급제(及第)하여, 유여해(兪汝諧) 등과 더불어 시(詩)를 지어 최항(崔沆)을 비방(誹謗)하였다고 하여 마침내 노성(盧成)을 죽이고 유여해(兪汝諧) 등을 해도(海島)에 유배시켰다”라고 기록(記錄)하고 있다.
기계(杞溪)의 연혁(沿革)
기계현(杞溪縣)은 경상북도 영일군에 있었던 지명이다. 본래 신라(新羅)의 모혜현(芼兮縣-化雞縣)을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기계(杞溪)로 고쳐 의창군(義昌郡)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 현종(顯宗) 9년 서기 1018년 경주(慶州)로 이속(移屬)했다가 후에 없앴다. 기계(杞溪)에 세거하는 중요 성씨로는 유(兪), 이(李), 윤(尹)씨 등이 있다.
주요 세거지와 변천
기계유씨 상계(上系)의 세거지(世居地)가 기계(杞溪)라 하여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일찍이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일군(迎日郡) 기계(杞溪)에 터를 잡아 세거(世居)했다고 믿어진다. 유여해(兪汝諧)의 자손(子孫)들인 동정공파(同正公波)는 유형무(兪逈務)의 증손(曾孫) 유선(兪善)의 후손(後孫)들이 충청남도(忠淸南道) 연기(燕岐)을 세천지(世阡地)로 지키고 있음으로 그곳에 세거(世居)했던 것 같고 유선(兪善)의 동생 유신(兪信)의 후손(後孫)들은 개성(開城)과 양주(楊洲), 충주(忠州), 중원(中原), 음성(陰城) 등지(等地)에 산거(散居)했다고 믿어진다. 유형무(兪逈務)의 현손(玄孫)인 유동노(兪東老)의 대 이래로 일부는 충청남도(忠淸南道) 당진(唐津)에 정착하였던 것 같다.
전서공(典書公) 유천경(兪千慶)의 6대손 유영(兪英)의 대를 전후(前後)하여 전북 익산(益山)에 정착(定着)하였고, 유천경(兪千慶)의 7대손 유사달(兪嗣達) 유사원(兪嗣元)의 대 이래로 충남 논산, 경남 울주(蔚州) 언양(彦陽) 등지에 유천경(兪千慶)의 증손(曾孫) 유세걸(兪世傑) 이래로 경북 영일군(迎日郡) 오천(烏川) 등지에 세거의 터를 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군기시사공(軍器寺事公) 유성리(兪成利)의 손자 유효통(兪孝通)의 후손들은 경기 충남 일원과 경상도에 유효전(兪孝全), 유숙생(兪淑生), 유원기(兪原器)의 후손들은 충남 부여(夫餘), 황해도 해주(海州), 전남 함평(咸平) 등지에 세장지(世葬地)로 삼고 있음으로 대체로 이들 지역(地域)에 산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부사정(副司正) 유성보(兪成甫)의 자손들은 충청남도 천안(天安) 및 천원군(天原郡)과 경기도 평택(平澤), 화성(華城), 전라남도 광주(光州) 등지에 산거하고 있고, 유성리(兪成利)의 동생 유성복(兪成福)의 자손들이 가장 번성하여 유성복(兪成福) 이래로 8개파로 분파되어 기계유씨(杞溪兪氏) 전체 인구의 75%를 차지하여 전국에 산거하고 있다. 특히 경기도 안성(安城), 고양(高陽), 광주(廣州), 충청북도 진천(鎭川), 보은(報恩), 충청남도 서천(舒川)의 비인(庇仁)과 부여(夫餘), 청양(靑陽) 등지에 많이 살고 있다.
주부공(主簿公) 유득수(兪得洙)의 아들 유정(兪挺)의 대 이래 경상북도 고령(高靈)에 살다가 일부가 유정(兪挺)의 10대손인 유팽강(兪彭絳) 이래로 경상남도 거제(巨濟)로 옮겨 살았고, 그 밖에 자손들은 달성(達城)의 현풍(玄風)과 합천(陜川) 등지에도 살았다.
월성군(月城君) 유승추(兪承樞)의 현손(玄孫) 사륙신(死六臣) 유응부(兪應孚)가 세조조에 극형에 처해졌음으로 그의 둘째 아들인 유사성(兪思誠)이 숙부 유응신(兪應信)과 함께 북쪽으로 가서 화(禍)를 면하게 되었던 사실이 을사보(乙巳譜)에 보인다. 이 무렵부터 자손들은 함경북도 일대에 세거하였다. 유사성(兪思誠)의 후손들은 함경북도 경흥(慶興)에 유응신(兪應信)의 후손들은 부령(富寧)에 터를 잡았고 그 중 일부가 명천(明川), 안변(安邊)을 거쳐 충청남도 대전(大田)으로 옮겨가서 살았다. 장사랑(將士郞) 유보(兪甫)의 자손은 경상남도 함양(咸陽) 등지에 살았다.
1930년 대에 와서 기계유씨 자손들은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중부면(中部面) 충청남도 연기군(燕岐郡) 서면(西面), 경상북도 봉화군(奉化郡) 중부면(中部面), 경상남도 진양군(晉陽郡) 나동면(奈洞面), 함경북도 부령군(富寧郡) 삼해면(三海面), 관해면(觀海面) 경흥군(慶興郡) 풍해면(豊海面)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오늘날 기계유씨 자손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은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동부면(東部面) 하산곡리(下山谷里)로 170여 가구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에 기계유씨가 처음 발을 들인 것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여 충목공(忠穆公) 유홍(兪泓)이 수도(首都) 한성(漢城)이 함락 위기에 처하자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함께 지원병(志願兵) 모집을 위해 강원도와 함경도 등지로 출정(出征)하여 최초 야영(野營)했던 곳이 이로 이 마을 검단산(黔丹山) 계곡이었다. 유홍(兪泓)은 유성복(兪成福)의 6대손이며 유여림(兪汝霖)의 손자이다. 후에 수도 한성이 함락되고 왕비를 해주(海州)로 피신시킨 뒤 그곳에서 별세했다. 그의 아들 유대술(兪大述)과 유대건(兪大建) 형제가 아버지 묘를 고양(高陽)에서 검단산(黔丹山) 기슭기로 이장(移葬)하고 이 마을에 터를 굳혀 살았던 것이 하산곡리(下山谷里) 유씨(兪氏)마을의 시작이다.
유씨(兪氏) 씨족사 개요
기계유씨는 자고(自古)로 청족(淸族)이라 세상에 일컬어 왔는데 사실(史實)을 고찰해보면 기계유씨(杞溪兪氏) 사람들이 탐관오리(貪官汚吏)의 추명(醜名)을 남긴 사람은 드물었다. 매사에 중용(中庸)을 취하고 대체로 조촐한 선비의 관구(觀矩)를 넘지 않는 것이 시조 이래 기계유씨(杞溪兪氏)의 전통인 것이다. 권세(權勢)를 일족(一族)의 수중(手中)에 모으고 국정(國政)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한 적은 없음으로 평범한 역사였음에는 틀림없는 사실(事實)이지만 그것이 자랑해야 할 평범이요 처양(闡揚)되어 마땅한 역사이다.
유씨(兪氏)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경주(慶州), 고흥(高興), 진주(晉州) 창원(昌原) 무안(務安) 등 32개의 관향(貫鄕)이 있으나 총인구 178,209명중 기계(杞溪)가 113,340명으로 대종(大宗)을 이루고 유씨(兪氏)의 63%를 차지하고 있다.
기계유씨(杞溪兪氏)는 고려(高麗) 전기에는 벼슬에 뜻이 없어 여러대에 걸쳐 은둔생활을 했고, 고려(高麗) 후기에 이르러 일족(一族)이 경기도 남부지방으로 이주하면서 벼슬에 뜻을 두게되어 유득선(兪得善)이 좌복야(左僕射), 유선(兪僐)이 판도판서(版圖判書), 유승계(兪承桂)가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여 3대가 기계유씨(杞溪兪氏)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유승계(兪承桂)의 아들 유천경(兪千慶)이 전서(典書), 유성리(兪成利)가 군기시사(軍器寺事) 유성보(兪成甫)가 부정(副正), 유성복(兪成福)이 사재감(司宰監) 판사(判事) 등 4형제가 고려가 망하기 전에 관직에 올라 명성을 떨쳤다.
조선조에 들어와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유성리(兪成利)의 손자 유효통(兪孝通)이다. 그는 정인지(鄭麟趾)와 함께 중과(重科)에 장원하고 세종조(世宗朝)에 집현전(集賢殿) 제학(提學)이 되었으며 의학자(醫學者)로 전의감(典醫監) 정(正) 노중례(盧重禮)와 더불어「향약채집원령(鄕藥採集月令)을 저술(著述)했다. 「향약채집원령(鄕藥採集月令)은 우리나라 약용식물(藥用植物)을 맨 처음 정리한 의서(醫書)로서 식물 이른을 우리말로 기록함으로써 일상생활에 쉽게 약을 사용할 수 있게 저술되었다. 유효통(兪孝通)은 그의 장자 유목노(兪牧老)의 처가 영의정(領議政) 황보인(皇甫仁)의 딸이었던 관계로 수양대군 이유(李瑜) 일당에 의해 황보인(皇甫仁)이 참살을 당한 뒤 박해를 받았다. 같은 시대 기계유씨는 우리나라 역사상 충절을 상징하는 사륙신(死六臣) 유응부(兪應孚) 장군을 배출했다. 그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평안도 절제사(節制使)를 거쳐 중추부(中樞部) 지사(知事)에 올랐다. 정이품(正二品)에 올랐던 1445년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과 단종(端宗) 복위(復位)를 모의(謀議)하고 면나라 사신을 초대하는 연회장소에서 세조를 살해하는 소임을 맡았으나 김질(金礩)의 배신으로 탄로되어 심한 고문 끝에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숨을 거두었다. 문신을 국문(鞠問)할 때 장군에게 “너는 무엇을 하려 했느냐”고 물으니 “한 칼로 조카를 죽이고 본 임금을 복위(復位)시키려 했다.” 고 대답했다. 세조(世祖)가 노하여 살가죽을 벗기고 부젓가락으로 살을 지지는 고문을 내렸으나, 얼굴 빛 하나 변치 않고 부젓가락이 식으면 다시 달구어 오라고 호통(號筒)을 치며 끝내 굴복(屈伏)치 않았다. 학문과 무예를 겸비한 의절파 학자로 기골(氣骨)이 장대(長大)하고 활쏘기가 뛰어 났으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간밤에 불던 바람 눈서리 치단 말까 낙낙장송 다기울어 지단 말까 하물며 못다핀 꽃이야 꽃이야 일러무삼하리오” 그가 남긴 유명한 시귀절은 의절을 지킨 지성인의 고뇌를 대변한다. 유흥부는 관직이 재상의 반열에 으르렀어도 청렴결백하여 가난을 동반했고 때로는 먹을 양식조차 끼니 대기가 어려웠다고 전해진다. 그가 죽던 날 가족들은 살아서 편히 산적이 없고 죽어서 대화(大禍)를 남겼다고 호곡(號哭)했다는 것이다.
유응부(兪應孚)는 숙종조(肅宗朝)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고 과천(果川)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洪州)의 노은서원(魯恩書院), 연산(連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대구(大邱)의 낙빈서원(洛濱書院), 의성(義城) 강령(康翎) 충렬사(忠烈祠), 영월(寧越) 창렬사(彰烈祀)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오늘날도 그 뜻을 기리는 후손과 후학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유진(兪鎭)은 세조조(世祖朝)에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으며 특히 역학(易學)에 깊었다. 뇌계(뇌溪) 유호인(兪好仁)은 점필제(佔畢齊)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성종조에 문과(文科)에 등과하여 호당에 뽑히고 관직이 교리(校理)에 이르렀는데 성종(成宗)의 극진한 총애(寵愛)를 밭았다. 그는 시문에 능하고 충효(忠孝), 시문(詩文) 필력(筆力)을 겸하여 삼절(三絶)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유성복(兪成福)의 손자요 유효통(兪孝通)의 재종제(再從弟)인 유해(兪解)는 성삼문(成三問) 아버지와 동서(同壻)로 세종조(世宗朝)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였으나 조졸(早卒)하였다. 조선조에 기계유씨 명문청족으로 이름을 떨친 이는 유해(兪解)의 자손(子孫)들이다. 그의 아들 유기창(兪起昌)은 성삼문(成三問)과 이종사촌(姨從四寸)인 관계로 화가 인척(姻戚)에까지 미쳐 젊어서는 도피 생활을 하다가 성종조(成宗朝)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여러 지방관을 거쳐 충추부 첨지사에 이르렀다. 연산조(燕山朝) 말 왕의 난폭한 정치를 간하다가 죽은 영의정(領議政) 성준(成俊)의 친당(親黨)으로 몰려 거제도(巨濟島)로 유배되었다. 유기창은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조정에서 공조참의로 제수(除授)되었으나 불사(不仕)하고 향리(鄕吏)로 돌아왔다. 연산조(燕山朝)의 4절신(四節臣)이라 일컬렀다. 후에 충청도 유림이 중심이 되어 충청남도 서천군(舒川郡) 비인면(庇仁面) 청절사(淸節祀)를 창건하고 유기창(兪起昌)과 그의 아들 유여림(兪汝霖)을 배향하여 추모하고 있다.
기계유씨(杞溪兪氏) 중조흥(中興祖) 정당(政堂) 유여림(兪汝霖)(1476~1538)이 연산조(燕山朝)에 문과(文科)에 등과하여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벼슬길에 나서 사간(司諫)이 되었을 때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다. 그는 심연원(沈連源)과 함께 정암(靜庵) 조광조(趙匡祖) 등과 함께 처벌해줄 것을 계(啓)하다 파직(罷職)되었다. 후에 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되어 김안로(金安老)의 죄를 논핵(論劾)하다 파직(罷職)되어 향리(鄕吏)로 추방되었다. 7년 후에 예조판서(禮曹判書)로 기용(起用)되었으나 얼마 후 졸하였다. 그는 천성이 담박(澹泊)하고 부귀영화(富貴榮華)를 꺼려 7년간 은둔생활(隱遁生活)을 할 때에도 평범한 촌노(村老)와 같았다 한다. 조선(朝鮮) 중기(中期) 이후 이름을 빚낸 기계유씨(杞溪兪氏) 사람들은 거의가 이 분의 후손으로 그를 기계유씨(杞溪兪氏) 중흥조(中興祖)라 일컫는다.
유여린(兪汝霖)의 아우 유여주(兪汝舟)는 중종조(中宗朝)에 조광조의 주장하여 설치한 현양과(賢良科)에 등과(登科)하였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 후 향리(鄕里)인 비인(庇仁)으로 낙향(落鄕)하여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그의 부인 김씨는 윤여주의 아호를 따서 임벽당김씨(林碧堂金氏)라 하는데 신사임당(申師任堂), 허난설헌(許蘭雪軒)과 더불어 조선조(朝鮮朝) 3대 여류시인(女流詩人)으로 꼽힌다.
유여림(兪汝霖)의 아들 유강(兪絳)은 중종조에 문과에 등과하여 관직에 나갔으나 관로가 순탄치 못했다. 품성이 부정을 보고 참지 못하는 천성으로 당시 외척(外戚) 권신(權臣) 윤원형(尹元衡)을 논핵(論劾)하다 여러번 지방 관찰사로 축출되는 등 고비를 넘기고 윤원형이 죽은 뒤 한성판윤, 형조(刑曹) 및 호조(戶曹) 판서(判書)를 역임하고 시호(諡號)는 숙민(肅敏)이다. 유홍은 입조 30년 동안 한번도 권신의 문앞에 발을 들여놓은 일이 없었다는 것으로써 자손들에게 올바른 몸가짐을 가져야 한다는 엄한 교훈을 남겼다.
손자 유홍(兪泓)은 명종조(明宗朝)에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여 한림(翰林)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함경도, 평안도 등 5도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자 이조(吏曹)판서(判書)와 참찬(參贊)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다. 시문(詩文)에 능하고 그가 과거(科擧)의 시관(試官)이 되었을 때 응시자 중 율곡 이이의 답안이 소과와 대과에서 뛰어났다. 그러나 시관회의(試官會議)에서 다른 모든 시관(試官)들은 이이가 불문(佛門)에 들어갔던 과오(過誤)가 있음으로 이이를 장원(壯元)으로 뽑을 수 없다고 주장하자 공은 옛날 성현(聖賢)들에게도 젊은 날 과오가 있는데 이제 이이의 젊은 날의 과오를 문제삼는 것은 오히려 여러분에게 더 큰 문제가 있다“고 논박(論駁)하여 이이를 장원으로 뽑았다. 광국1등공신과 평난2등공신으로 책록(策錄)되고 기성부원군(杞城府院君)에 피봉(皮封)되고 시호(諡號)는 충목(忠穆)이다.
유여림(兪汝霖)의 증손 중에는 유대수(兪大修), 유대진(兪大進) 유대기(兪大祺) 유대정(兪大禎) 유대일(兪大逸) 등이 출중(出衆)하여 선조조(宣祖朝)와 광해조(光海朝)에 걸쳐 크게 활약하였다. 유홍(兪泓)의 손자 유백증(兪伯曾)은 광해조(光海朝)에 문과(文科)에 등과하였으나 난정에 벼슬을 즐겨워 하지 않고 폐모사건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갔다.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하여 3등공신이 되어 사간(司諫)에 특배(特拜)되었는데 이 때부터 그의 논핵(論劾)과 직간(直諫)은 조정을 진동시켰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호종(扈從) 협수사(協守使)로써 대신들의 오국(誤國)을 통박(痛迫)하며 척화를 주장했다, 시호(諡號)가 충경(忠景)이다. 유강(兪絳)의 증손 유성증(兪省曾)은 광해조(光海朝)에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등과하였으나 광해말 호조(戶曹) 좌랑(佐郞)으로써 이이첨(李爾瞻)을 공박(攻駁)하는 영남(嶺南) 유생(儒生)들의 소(蔬)를 대작(代作)했다는 혐의로 하옥되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석방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강화도(江華島) 파수(把守) 대장(大將)으로 분전(奮戰)하였으나 함락(陷落)되었다. 참의(參議)와 도승지(都承知)를 거쳐 강원도(江原道)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했다. 유성증(兪省曾)은 두 이들 유황(兪榥), 유철(兪㯙)과 재종(再從姪) 유계(兪棨)가 인조(仁祖) 11년 서기 1633년에 함께 등과(登科)했다.
유계(兪棨)는 신독제(愼獨齊) 김집(金集)의 문인(門人)으로 호는 시남(市南)이라 하여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동춘당(東春堂) 송준길(宋浚吉) 등과 더불어 충청도 산림오현(山林五賢)이라 불렀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척화(斥和)를 주장하다가 임천(林川)에 유배되고 효종(孝宗) 초에 인조(仁祖)의 시호(諡號) 문제(問題)로 함경도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다가 방면된 후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했다. 현종(顯宗) 초에는 예론(禮論) 시비(是非)에 송시열과 동조(同調)했으며 도덕(道德) 절의(節義) 학문(學文) 문장(文章)이 세인의 추앙(推仰)을 받았다.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고 전국 여러 서원에 배향(配享)되었다. 저서(著書)로는「강거문답(江居問答)」「가례원류(家禮源流)」「시남집(市南集)」 등이 남아 있다.
영정조시대의 기계인은 황금기를 맞는다. 유척기(兪拓基)는 호는 지수제(知守齊)이고 영조(英祖) 15년 서기 1739년 우의정(右議政)이 되고 이어 영의정(領議政)이 되어 영조(英祖)의 중흥사업(中興事業)에 주역(主役)이 되었으며 30년간 노론(老論) 집권당의 영수(領袖)로써 군림했다. 그의 영향력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종질 유언호(兪彦鎬)를 좌의정(左議政)에 사위 윤서동(尹薯東)은 우의정(右議政)에 조중회(趙重晦)는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제수하게 하여 정조(正祖)시대 노론(老論) 청류파(淸流派)로 이어진다. 유언호(兪彦鎬)는 호당(湖當)에 뽑힌 존재일 뿐 아니라 백부(伯父) 유최기(兪最基) 당숙(堂叔) 유척기(兪拓基)의 후광(後光)으로 정조(正祖) 초기 새로 설치된 규장각(奎章閣)의 직제학(直提學)으로 정조(正祖)의 신임을 크게 받았다. 개성유수(開城留守)를 자원(自願)하여 부임(赴任)해 곤궁에 빠진 연암(燕岩) 박지원(朴趾源)을 구해주기도 했으며 정조(正祖) 묘정(廟廷)에 배향(配享)되었다.
기계유씨(杞溪兪氏)는 조선조(朝鮮朝)에 84명이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고 3명의 상신(相臣)과 12명의 판서(判書)를 배출했으며 학문(學問)과 시화(詩畵)에도 쟁쟁한 인물을 많이 현출(顯出)했다. 학문 분야는 시남(市南) 유계(兪棨)를 비롯해 겸산(兼山) 유숙기(兪肅基), 대제(大齊) 유언집(兪彦集) 봉서(鳳棲) 유신환(兪莘煥) 등(等)은 기계유씨(杞溪兪氏) 일문의 4대유학자(4大儒學者) 일뿐 아니라 우리나라 유학사(儒學史)에 찬연(燦然)한 업적(業績)을 남긴 석학(碩學)이다
한말(韓末)에 와서는「서유견문(西遊見聞)」의 필자 구당(矩堂) 유길준(兪吉濬)을 들 수 있다. 열강(列强)의 틈바구니에서 풍운(風雲)이 소용돌이치던 조선말기 이 땅의 선각자로 일본과 미국 유학생 1호로 기록한 것이 유길준이다. 그는 갑오경장(甲午更張) 후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내부대신(內部大臣)을 지내면서 음력을 폐지하고 종두법을 시행하고 우편제도를 실시하고 단발령 등 시행하는 개혁정치를 시행했다. 그 후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내각(內閣)이 붕괴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1907년 순종(純宗)의 특사령(特赦令)으로 귀국하여 도산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흥사단(興士團)을 창설하고 교육과 계몽을 선도(先導)하고 국민 경제의 자활활동(自活活動)에 앞장섰다. 그가 미국에서 귀국하였을 때 보수파(保守派)에 의해 구금(拘禁)되어 포장(捕將) 한규설(韓圭卨) 집에 유폐(幽閉)되었다가 백록동(白鹿洞) 취운정(翠雲亭)으로 옮겨 그곳에서「서유견문(西遊見聞)」 등 많은 저서(著書)를 저술했다.
현대에는 현민(玄民) 유진오(兪鎭午)가 법학(法學)과 문학(文學)의 개척자(開拓者) 역할을 담당하였고, 헌법(憲法)을 기초하여 건국에 공헌했으며 교육자로써 정치인으로 큰 업적을 남겨 한국 현대사의 거목으로 우뚝하다.
출처: 성씨뉴스닷컴
[출처] 대한민국 성씨 시조묘 간산기 시리즈 22. 기계유씨 시조 유삼재의 묘|작성자 강일 이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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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성씨 시조묘 간산기 시리즈 22. 기계유씨 시조 유삼재의 묘
소재지: 경북 포항시 북구 기계면 미현리 산 1-1( 283 ) 기계유씨 시조 묘시조공 묘의 재실인 부운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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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기계유씨 시조 유삼재의 묘|작성자 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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