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과 행복'은 동의어
대철중학교
교사 고 귀 숙
무너졌다. 한 순간에 육신과 영혼이 산산
조각이 나버렸다. 그렇게 응급차에 실려 생사의 갈림길에 서던 2004년 9월 4일은 악몽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그 죽음의 문턱에서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남편이었고, 그 남편의 품에 안겨 분초를 다투어 실려 간 그 응급실에서 깊은 죽음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하루가 지난 후였다. 가물가물한 정신 속에서 나의 존재가 실존해 있다는 어렴풋한 기억과 함께 기억의 저편
언저리에서 희미하게나마 떠오르는 절규만이 소름끼치도록 전율한다.
중환자실…….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백의의 천사와 산소마스크를
쓴 채 덩그러니 누워 있는,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환자들 속에 나도 있었다. 그렇게 교통사고로 중환자실에서 희미하게나마 목숨이 붙어 있었던
거다.
그 후로 병원생활이 시작이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정신이 들어갈수록 상처투성이의 얼굴과 걸을 수조차 있을지
모르는 부서진 양다리를 보는 순간, 살아 있다는 것만도 축복이라 생각했던 그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억울하고 분노가 치밀어 견딜 수
없었다. 이때부터 우울증과 정신적 방황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 때, 남편은 이 모든 것들을 녹여준 사람이다. 그 남편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이 때 나는 많은 것을 생각했다. ‘가족 안에서 부부’ 그 부부는 그 가정의 행복과 불행을 걸머진 사람임을 깨닫게
되었다. 가정의 행복과, 그 집안의 행복은 부부가 얼마나 행복한가에 달려 있음을 절감했다.
남편은 나의 전부였다. 부모님도
자식들과 형제도 크나큰 위안은 되었지만 남편을 대신해줄 수는 없었다. 서산과 천안을 오가면서, 보조침대에서 새우잠을 자면서도 따뜻한 미소를
남편은 잃지 않았다. 얼마만큼 시간이 경과하여 간병인이 도와주었는데 남편의 자리를 채워주지는 못했다. 남편이 기다려지고, 그리워 견딜 수 없을
때 전화를 하면 그는 어김없이 퇴근 후에 서산에서 천안까지 달려와 나와 함께 한 후, 새벽같이 직장을 향해 달려갔다.
그렇게
3개월이 흘러갔고, 어느 정도 안정을 취할 무렵, 서산의료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게 되었다. 남편도 이곳에서 출퇴근을 하였다. 낮에는 간병인에게
맡기고 퇴근 후부터 아침까지 남편과 함께 병상의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병원 밥을 먹기 싫다’는 나를 위해 매일 밥을 해 날랐다. 선천적으로
부지런한 남편은 병원과 집을 오가며 부지런히 아침과 점심밥을 해가지고 왔다. 그 밥은 늘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밥이었고 내가 좋아하는
찌개가 있었다. 나와 함께 아침을 먹고, 간병인에게 점심을 부탁하고 학교로 출근한 후 퇴근하여 저녁밥을 다시 해오는 과정을 되풀이 하면서도 늘
따뜻한 미소와 여유로 나를 안정시켜 주었다.
그렇게 1개월의 서산의료원 생활이 끝나고 통원치료에 들어갔다. 남편은 병원에서 이미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간병인들과 간호사, 함께하였던 환자와 가족들 사이에 1등 남편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2005년
삼성생명이 주최하는 ‘아내의 날’에 전국 글쓰기 공모에 참여해보라는 부탁으로 ‘부부, 그 아름다움’이란 제목으로 응모한 것이 차상에 입상하여 그
부상으로 우리가족 4명이 2박3일의 일정으로 제주도 여행을 함께할 수 있는 행운도 얻었다. 예심을 통과한 글 500편 속에서 입상한 그 글은
모두의 심금을 울려 놓기에 충분했다.
나는 많은 것을 잃었다. 그러나 또 많은 것을 얻었다. 그 동안 남편은 직장과 사회생활을
이유로 가정은 소홀했었다. 그것이 늘 불만이었다. 그러나 이 번 사건을 통해서 남편은 가정으로 돌아왔고, 많은 시간을 나와함께 하고 있다.
투병생활 1년이 끝나고 다시 직장생활로 돌아 왔지만 온 몸이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부서진 다리는 지금도 석고상처럼 차갑고 내 뼈와 살이
아니다. 그런 나를 위해 매일 다리를 주무르고 마사지 하는 일을 한 번도 거르지 않는다.
어느 날 남편은, 나를 산으로 데려갔다.
지금부터 등산을 하잔다. 평지에서 걷는 것조차 힘든 상황에 등산은 생각도 못한 발상이지만 낮은 산에서부터 함께하기 시작했다. 주말과 공휴일은
어김없이 산을 향하고 있었다. 등산이라기보다 재활치료를 해주는 치료사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처음에는 너무 힘들고 고달팠지만, 그리고 너무
고통스러워 포기하고 싶었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면 다시 산을 오르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은 할 수 있어, 대단해,
자랑스러워’ 이렇게 이야기 하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 말을 믿고 나는 열심히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이를 악물고 산을 올랐다.
낮은 곳에서부터 점점 높은 곳으로, 몇 개월의 시간이 흘렀을 때는 웬만한 산도 두렵지 않았다. 나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 하지만
남편이 옆에 있을 때는 두렵지 않았다. 우리 지역에 있는 산에서부터 점점 먼 곳으로,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지리산도, 한라산도 두렵지 않았다.
사랑의 힘이 그렇게 만들었다.
꿈도 꿀 수 없었던 등산, 그토록 산을 좋아하여 틈만 있으면 산행을 하였던 나 자신을 찾아주기 위한
배려였음을 왜 모르겠는가? 그렇게 남편과 나는 우리가족 안에서 ‘부부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 것이다. 사랑도 함께할 때 그
기쁨이 배가되는 것이다. 함께 한다는 것은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고, 받아드리는 것이다. 가족은 함께 하는데 의미가 있다. 동행이 수반되지 않는
가정은 이미 완전한 가정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나의 아픔을 통하여 ‘함께’하는 가정이 만들어졌다. 혹시라도 내가 소외될까봐
늘 나를 배려하는 쪽으로 모든 것을 맞추어 주었다. 동행이다. 그 동행에 아이들도 같이 참여하여 온 가족이 함께하며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아 갔던
것이다.
아직도 건강을 회복하기엔 멀었지만 정신적으로는 너무 행복하다. 아픔을 통하여 새롭게 발견한 남편의 배려, 그로인한 가족의
소중함이 만들어졌으니까. 병상에서 신부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이 가슴을 울린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지만 되돌아보니 그 의미의
오묘함을 깨닫게 된다. ‘신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깊이 사랑하는 이에게 더 많은 시련과 고통을 주십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고통을 주느냐고 항의도 했었다. 그러나 그 분의 그 높은 뜻을 우리가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지금은
알 수 있다. 우리에게는 위기도 있었다. 부족한 것이 없는 데도, 늘 허전하고 비어 있는 듯 한 썰렁한 가정, 늘 자기 일에 바빠 가족 공동체를
이룰 수 없었던 우리..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나는 나대로 따로 따로 사는 이질집단 속에서, 따뜻하고 온화함이 점점 사라져
가는 와중에 하느님이 가한 철퇴……. 그 의미가 무엇이었던가?
우리는 다시, 결혼당시 하느님께 서약했던 그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플 때나, 병들 때나,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늘 당신과 함께 하겠다’는 그 동행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가족은 동반자다. 동행자다.
행복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함께 살면서 우리는 그 중요성을 잃고 가정이 해체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함께 하는 것은, 행복의 시발이다. 함께하지 않고 가정의 행복을 만들 수는 없다. 함께 한다는 것은 생각과 행동을 같이 한다는
의미다. 아픔을 통해서 다시 되찾은 ‘동행’과 ‘행복’은 동의어임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가족은 함께 하는 것이고, 그 동행을
통해서 행복한 가정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던 우리가족은 지상의 천당이다. 천당이 된 것이다.
'행복한 가족' 글쓰기 공모 최우수 및 동상수상(서산교육청. 충청남도교육청)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