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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석기 시대의 신앙 생활 답 ⑤
신석기 시대에는 농경과 정착 생활을 하게 되면서 인간은 자연의 섭리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농사에 큰 영향을 끼치는 자연 현상이나 자연물에도 정령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이 생겨났는데, 여기에는 풍요로운 생산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 중에서도 태양과 물에 대한 숭배가 으뜸이었다.
또,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영혼 숭배와 조상 숭배가 나타났고, 영혼이나 하늘을 인간과 연결시켜 주는 존재인 무당과 그 주술을 믿는 샤머니즘도 있었다. 그리고 자기 부족의 기원을 특정한 동식물과 연결시켜 그것을 숭배하는 토테미즘도 있었다.
이 시대의 예술품으로는 주로 흙을 빚어 구운 얼굴 모습이나 동물의 모양을 새긴 조각품, 조개 껍데기 가면, 조가비 또는 짐승의 뼈나 이빨로 만든 치레걸이 등이 있었다.
ㄱ - 청동기 시대, ㄴ - 철기 시대의 모습이다.
2. 돌무지 덧널무덤의 특징 답 ④
문제에 제시된 무덤에 돌무지+덧널이라고 나와 있으니 돌무지덧널무덤이다.
천마도까지 표시되어 있으니 경주에 있는 천마총이다.
돌무지덧널무덤은 신라에서 주로 만든 무덤으로, 지상이나 지하에 시신과 껴묻거리를 넣은 나무덧널을 설치하고 그 위에 냇돌을 쌓은 다음에 흙으로 덮었다. 무덤 구조를 보면 알겠지만 따로 돌방이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무덤의 부장품을 도굴하기 위해서는 무덤 전체를 파헤쳐야 하므로 도굴이 어려워 후대까지 많은 껴묻거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① 벽돌무덤인 백제 무령왕릉에 대한 설명이다.
② 고구려 돌무지무덤 중에 대표적인 것이 장군총이다.
이의 영향을 받은 백제의 무덤으로 송파 석촌동 고분이 있다.
③ 고구려와 백제의 굴식 돌방무덤에 대한 설명이다.
⑤ 통일신라 들어 봉토 주위를 둘레돌로 두르고, 12지 신상(쥐, 소, 범,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을 조각
하는 독특한 양식이 새롭게 나타났다.
3. 구석기 시대의 유물 답 ②
뼈 도구 사용, 사냥과 채집, 이동 생활, 공주 석장리와 충북 단양 수양개 유적은 모두 구석기 시대의 유물과 유적지이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동물의 뼈나 뿔로 만든 뼈 도구와 뗀석기를 가지고 사냥과 채집을 하면서 생활하였다. 처음에는 찍개 같은 도구를 가지고 여러 가지 용도로 썼으나, 점차 뗀석기를 제작하는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용도가 뚜렷한 작은 석기들을 만들게 되었다. 이 중에서 주먹도끼, 찍개, 팔매돌 등은 사냥 도구이고, 긁개, 밀개 등은 대표적인 조리 도구이다.
구석기 시대 후기에 이르러 대표적인 석기로 슴베찌르개를 사용하였으며, 석회암이나 동물의 뼈 또는 뿔 등을 이용하여 조각품을 만들었다.
① 청동기 시대에 곡식의 이삭을 자르는 데 사용한 반달 돌칼이라는 농기구이다.
② 구석기인들이 사용한 슴베찌르개이다.
이는 슴베(자루 속에 박히는 부분)가 달린 찌르개로서, 창의 기능을 하였다.
③ 신석기인들이 곡식이나 나무 열매 등을 가는데 사용한 갈돌과 갈판이다.
④ 청동기 시대에 사용된 비파형 동검이라는 무기이다.
⑤ 철기 시대에 사용된 다양한 철제 무기들이다.
4. 고대 국가(중앙 집권 국가)의 특징 답 ①
철기 문화의 보급과 이에 따른 생산력의 증대를 토대로 성장한 여러 소국은 그 중에서 우세한 집단의 족장을 왕으로 하는 연맹 왕국을 이루었다. 왕은 자기 집단 내부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다른 집단에 대한 지배력을키워 나갔다.
이 과정에서 주변 지역을 활발하게 정복하여 영역을 확대하였고, 정복 과정에서 성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왕권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왕권이 강화되면서 율령을 반포하여 관등제를 정비하고 관복제를 도입하는 등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고, 집단의 통합을 강화하기 위하여 불교를 받아들여 중앙 집권적인 고대 국가가 형성되었다.
ㄷ - 부여의 사출도는 연맹 왕국의 특징을 보여준다.
부여의 부여에는 왕 아래에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와 대사자, 사자 등의 관리가 있었다.
이들 가(加)는 저마다 따로 행정구획인 사출도를 다스리고 있어서, 왕이 직접 통치하는 중앙과 합쳐 5부를 이루었다.
가들은 왕을 추대하기도 하였고, 수해나 한해를 입어 오곡이 잘 익지 않으면 그 책임을 왕에게 묻기도 하였을 정도로
세력이 강하였다.
ㄹ - 3성 6부제는 수, 당에서 운용된 제도로, 이의 도입은 고대 국가 성립 이후의 일이다.
5. 분황사탑 답 ⑤
경주에 남아 있는 삼국 시대의 석탑,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탑은 분황사탑 밖에는 없다.
고구려는 주로 목탑을 건립했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없다.
백제의 미륵사지 석탑은 서탑만 일부가 남아 있는데, 목탑의 모습을 많이 지니고 있다. 이를 계승한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이 부여에 남아 있다.
신라의 탑으로는 황룡사 9층탑과 분황사탑이 유명하다. 분황사탑은 석재를 벽돌 모양으로 만들어 쌓은 탑으로, 지금은 3층까지만 남아 있으나 탑의 층 비율로 추정해 봤을 때 원래 7층이나 9층탑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① 익산에 있는 백제의 미륵사지 석탑이다.
② 부여에 있는 백제의 정림사지 5층 석탑이다.
③ 경주에 있는 통일신라의 불국사 3층 석탑이다.
④ 강원도 양양에 있는 통일신라의 진전사지 3층 석탑이다.
⑤ 경주에 있는 신라의 분황사탑이다.
6. 문무왕(661~681)의 업적 답 ④
동해의 큰 바위(대왕암)에 장사를 지냈다는 것, 죽은 뒤에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어 국가를 수호한다고 유언을 남긴 왕은 문무왕이다.
문무왕은 무열왕을 이어받아 삼국 통일에 나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이어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심을 드러낸 당군을 몰아 내기 위한 전쟁에 나섰다. 결국 당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크게 물리쳤으며. 당의 수군을 금강 하류 기벌포에서 물리치고 신라는 드디어 대동강 이남 땅에서 당군을 완전히 몰아냄으로써 통일을 이룩하였다(676).
① 태종 무열왕(김춘추), ② 법흥왕, ③ 내물 마립간, ⑤ 진흥왕에 대한 설명이다.
7. 백제의 사회 모습 답 ①
백제는 한강 유역의 토착 세력과 고구려 계통의 유이민 세력의 결합으로 성립되었기 때문에 언어, 풍속, 의복은 고구려와 큰 차이가 없었다. 백제는 일찍부터 중국과 교류하며 선진 문화를 수용하였고 중국의 남북조 시대에는 주로 남조와 교류하였다.
백제 사람은 상무적인 기풍이 있어서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하고, 형법의 적용이 엄격한 점은 고구려와 비슷하였다. 반역한 자나 전쟁터에서 퇴각한 군사 및 살인자는 목을 베었고, 도둑질한 자는 귀양 보냄과 동시에 2배를 물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국가의 재물을 횡령했을 때에는 3배를 배상하고, 죽을 때까지 금고형에 처하였다.
백제의 지배층은 왕족인 부여씨와 8성의 귀족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중국의 고전과 역사책을 즐겨 읽고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하였으며, 관청의 실무에도 밝았다. 투호와 바둑 및 장기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백제 지배층이 즐기던 오락이었다.
① 도둑질한 자는 귀양 보냄과 동시에 2배를 물게 하였다.
12배 배상법은 부여와 고구려의 사회 모습이다.
8. 신라 말의 왕위 쟁탈전 답 ①
8세기 후반 이후, 진골 귀족들은 경제 기반을 확대하여 사병을 거느리고 권력 싸움을 벌였다. 중앙의 권력 다툼은 혜공왕(765~780) 때 시작되었다. 혜공왕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면서 이때부터 귀족들의 본격적인 권력 다툼이 일어났다. 전국의 96각간들이 3년 동안 서로 싸우는 대공의 난(768)이 일어났으며, 김양상이 김지정의 난(780)을 진압하고 혜공왕을 죽인 뒤 선덕왕에 오르면서 무열왕계의 왕위 세습이 끊어졌다.
이후 신라에서는 왕위 다툼이 심해져서 150여 년 동안에 20명의 왕이 바뀌는 큰 혼란이 일어나 왕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9세기 전반에는 웅주(공주) 도독 김헌창(무열왕의 후손으로서 내물왕의 후손인 원성왕과의 왕위 다툼에서 패한 김주원의 아들)이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고(822), 그의 아들 김범문이 한산에 도읍하고 저항을 계속했으니 역시 실패하였다.
청해진을 지키던 장보고도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들었으나 실패하였다(846). 이 모두가 중앙에서 벌어진 왕위 다툼과 관련하여 일어난 것이었다.
중앙 귀족들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치열해지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연합적인 정치가 운영되었다. 지방 세력들도 왕위 쟁탈전에 가담하여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② 북원(원주)의 양길, 죽주(죽산)의 기훤, 완산주(전주)의 견훤, 궁예 등이 대표적이다.
③ 신라 말의 농민 반란으로는 상주 지방을 근거로 하여 일어난 원종과 애노의 난(889), 경주 서남부 지방에서 발생한 적
고적의 난((896)이 대표적이다.
④ 주류성에서 일어난 왕족 복신과 승려 도침, 임존성에서 일어난 흑지상지가 대표적이다.
⑤ 고려 무신 정권기에 일어난 전주 관노의 난, 만적의 난 등이 대표적이다.
9. 신라 중대 왕권의 전제화 답 ⑤
통일 이후 신문왕은 김흠돌의 모역 사건을 계기로 귀족 세력을 숙청하여 진골 귀족 세력이 약화되고 왕권이 전제화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이 시기에는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집사부의 장관인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다. 또한 중앙 정치 기구와 군사 조직을 정비하고, 9주 5소경 체제의 지방 행정 조직을 완비하였다. 그리고 토지 제도를 바꾸어 문무 관리에게 관료전을 지급하고, 귀족의 경제 기반이었던 식읍을 제한하고 녹읍도 폐지하였다. 성덕왕 때에는 백성들에게 정전을 지급하였다. 아울러 이전부터 시행해 오던 구휼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런 조치는 귀족에 대한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고 농민 경제를 안정시키려는 것이었다.
갑 - 신문왕~성덕왕 시기는 왕권이 전제화 되었던 때이다.
을 - 이 시기는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집사부의 장관인 시중의 기능이 강화되고,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
하던 상대등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병 - 식읍과 녹읍의 폐지, 정전 지급을 통해 국가의 농민 지배력은 강화되었다.
정 - 식읍(食邑)은 왕족, 공신 등에게 준 토지와 가호로서, 조세를 수취하고 노동력을 징발할 권리를 부여하였으며,
녹읍(祿邑)은 관료 귀족에게 지급한 일정 지역의 토지로서, 조세를 수취할 뿐만 아니라 그 토지에 딸린 노동력을 징
발할 수 있었다. 이 시기 식읍과 녹읍을 폐지하자 귀족들은 농민들을 징발하기가 어려워졌다.
10. 묘청의 서경 천동 운동(1135~36) 답 ②
이자겸의 난 이후, 인종은 정치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 관리들과 묘청, 정지상을 중심으로 한 지방 출신의 개혁적 관리들 사이에 대립이 벌어졌다.
묘청 세력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평양)으로 도읍을 옮겨, 보수적인 개경의 문벌 귀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자주적인 혁신 정치를 시행하려 하였다. 이들은 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을 짓고, 황제를 칭할 것과 금을 정벌하자고 주장하였다.
반면, 김부식이 중심이 된 개경 귀족 세력은 유교 이념에 충실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확립하자고 하였다. 묘청 세력은 서경 천도를 통한 정권 장악이 어렵게 되자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으나(1135), 김부식이 이끈 관군의 공격으로 약 1년 만에 진압되고 말았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문벌 귀족 사회 내부의 분열과 지역 세력 간의 대립, 풍수지리설이 결부된 자주적 전통 사상과 사대적 유교 정치 사상의 충돌, 고구려 계승 이념에 대한 이견과 갈등 등이 얽혀 일어난 것으로, 귀족 사회 내부의 모순을 드러낸 것이었다.
② 무신의 권력 장악은 무신정변(1170)을 통해서이다.
11. 태조 왕건의 정책 답 ④
태조 왕건은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고자 하는 의욕으로 강력한 북진 정책을 추진하여 평양을 서경으로 삼고,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적극 개발하였다. 그 결과, 여진족을 축출하면서 청천강에서 영흥에 이르는 국경선을 확보할 수 있었다.
궁예를 축출하고 왕위에 오른 뒤 태조는 호족이 지나치게 세금을 거두지 못하도록 하고, 조세 제도를 합리적으로 조정하여 세율을 10분의 1로 낮추어 농민의 생활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이어 태봉의 관제를 중심으로 신라와 중국의 제도를 참고하여 정치 제도를 마련하고, 개국 공신과 지방의 호족을 관리로 등용하였다. 유력한 호족과는 혼인을 통하여 관계를 깊게 다져 갔다. 또, 지방 호족을 견제하고 지방 통치를 보완하기 위하여 사심관과 기인 제도를 활용하였다. 그리고 정계와 계백료서를 지어 관리가 지켜야 할 규범을 제시하였다. 아울러 후대 왕들이 지켜야 할 정책 방향을 제시한 훈요 10조를 남기기도 하였다.
①, ③ 광종의 정책이었다.
② 별무반을 설치한 때는 숙종,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족을 정벌한 것은 예종 때이다.
⑤ 지방에 12목을 설치하고 최초로 지방관을 파견한 것은 성종 때이다.
12. 고려 후기 원 간섭기의 사실 답 ⑤
몽골과 강화하고(1260) 개경으로 환도(1270)한 이후, 고려는 두 차례 실시된 원의 일본 원정에 군대와 물자의 제공을 강요받았다. 또, 철령 이북에 쌍성총관부, 자비령 이북에 동녕부,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라는 원의 통치 기구가 설립되어 넓은 영토를 빼앗기기도 하였다.
원 간섭기 고려의 국왕은 원의 공주와 결혼하여 원 황제의 부마가 되었고, 왕실의 호칭과 격이 부마국에 걸맞은 것으로 바뀌었다. 아울러 관제도 개편되고 격도 낮아졌다. 원은 일본 원정을 준비하기 위하여 설치했던 정동행성을 계속 유지하여 내정 간섭 기구로 삼았고, 군사적으로는 만호부를 설치하여 고려의 군사 조직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다루가치라는 감찰관을 파견하여 내정을 간섭하였다. 원에 공녀를 보내고 매를 징발하기 위해서 응방이라는 특수 기관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원의 내정 간섭으로 고려는 자주성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원의 압력과 친원파의 책동으로 인해 정치는 비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
① 조선 세조 때(1466)의 일이다.
② 고려 무신 정권기 최충헌의 노비 만적이 일으킨 난이다(1198).
③ 김부식의 삼국사기 편찬은 고려 인종 때(1145)이다.
④ 천리장성 축조(1033~1044)는 덕종, 정종 때이다.
13. 고려의 문화재 답 ③
(가) 고려 시대 건축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는 주심포 양식과 배흘림 기둥 양식을 간직한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예산 수덕사 대웅전이 있다. 그리고 고려 후기에는 다포식 건물도 등장하여 조선 시대 건축에 큰 영향을 끼쳤다. 황해도 사리원의 성불사 응진전은 고려 시대 다포식 건물로 유명하다.
(나) 고려 시대의 석탑은 신라 양식을 일부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조형 감각을 가미하여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다각 다층탑이 많았고, 안정감은 부족하나 자연스러운 모습을 띠었다. 개성 불일사 5층 석탑과 오대산 월정사 팔각 9층 석탑이 유명하며, 고려 후기의 경천사 10층 석탑은 원의 석탑을 본뜬 것으로, 조선 시대로 이어졌다. 지역에 따라서 고대 삼국의 전통을 계승한 석탑이 조성되기도 하였다.
(다) 법주사 팔상전은 금산사 미륵전, 화엄사 각황전과 함께 조선 후기인 17세기의 건축물이다.
(라) 몽골 침략으로 소실된 초조대장경을 대신하여 고종 때에는 대장경을 다시 만들었다.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16년 만에 이룩한 재조대장경은 현재 합천 해인사에 보존되어 있다. 8만 장이 넘는 목판이므로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른다.
(마) 고려 초기에는 하남 하사창동 철조 석가 여래 좌상(광주 춘궁리 철불) 같은 대형 철불이 많이 조성되었다. 논산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이나 안동 이천동 석불처럼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지역 특색이 잘 드러난 거대한 불상도 조성되었다. 또, 부석사 소조 여래 좌상같이 신라 시대 양식을 계승한 걸작도 있다.
14. 의천과 지눌의 불교 사상 답 ③
의천은 11세기에 이미 종파적 분열상을 보인 고려 불교계에서 교단 통합 운동을 펼쳤다. 그는 흥왕사를 근거지로 삼아 화엄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 하려 하였으며, 또 선종을 통합하기 위하여 국청사를 창건하여 천태종을 창시하였다. 이를 뒷받침할 사상적 바탕으로 의천은 이론의 연마와 실천을 아울러 강조하는 교관겸수를 제창하였다.
무신 집권기에 지눌은 명리에 집착하는 당시 불교계의 타락상을 비판하였다. 그는 승려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독경과 선 수행, 노동에 고루 힘쓰자는 개혁 운동인 수선사 결사를 제창하였다. 송광사에 중심을 둔 수선사 결사 운동은 개혁적인 승려들과 지방민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지눌은 선과 교학이 근본에 있어 둘이 아니라는 사상 체계인 정혜쌍수를 사상적 바탕으로 철저한 수행을 선도하였다. 또, 지눌은 내가 곧 부처라는 깨달음을 위한 노력과 함께, 꾸준한 수행으로 깨달음의 확인을 아울러 강조한 돈오점수를 주장하였다.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포용하여 교와 선의 대립을 극복하고자 한 지눌의 논리는 고려 불교가 지향하던 선교 일치 사상을 완성한 것이었다.
ㄱ - 풍수지리설은 신라 말 도선이 도입하였다.
ㄹ - 의천과 관련된 설명이다. 의천은 고려는 물론이고 송과 요의 대장경에 대한 주석서를 모아 교장을 편찬하였다.
이를 위하여 목록인 신편제종교장총록을 만들고, 교장도감을 설치하여 10여년에 걸쳐 신라인의 저술을 포함한 4700
여 권의 전적을 간행하였다.
15. 고려 시대의 과거제 답 ④
고려 시대의 관리는 과거와 음서를 통하여 등용되었다.
문관을 뽑는 문과 시험으로 제술과와 명경과가 있었다. 제술과는 문학적 재능과 정책 등을 시험하고, 명경과는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 능력을 시험하여 뽑았다.
또. 과거 외에 국가에 공을 세운 사람이나 고위 관료의 자제를 시험 없이 관리로 뽑는 음서제도도 발달하였다. 그 밖에 기술관을 뽑는 잡과와 승직자를 뽑기 위한 승과도 있었다. 한편, 무관을 뽑는 무과는 시행되지 않았으므로 무예나 신체 조건이 뛰어난 사람을 따로 뽑아 무반 관료로 충원하였다.
정 - 공신과 종실의 자손, 5품 이상의 고위 관료의 자손 등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도 관료가 될 수 있는 음서의 혜택을
받아 관료로서의 지위를 세습하기도 하였다. 이는 고려의 관료 체제가 귀족적 특성을 지녔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16. 세종 시기 쓰시마 섬 정벌 답 ④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에 대한 토벌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이루어졌다. 고려 말인 1389년(창왕 2) 박위가 쓰시마 섬을 정벌하였으며, 1419년(세종 1) 이종무는, 병선 227척, 병사 1만 7000 명을 이끌고 쓰시마 섬을 토벌하여 왜구의 근절을 약속받고 돌아왔다.
17. 신진 사대부의 분화(온간 개화파와 급진 개혁파) 답 ②
(가)는 급진 개혁파, (나)는 온건 개혁파의 주장이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고 본격적인 개혁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신진 사대부 사이에는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다른 의견이 존재하였다. 이색, 정몽주 등 대다수의 온건 개혁파는 고려 왕조의틀 안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비리의 핵심 세력을 제거하고 대토지 사유는 정리하되, 왕조 질서를 파괴하거나 전면적인 토지 개혁에는 반대하였다. 반면, 정도전 등 급진 개혁파는 고려 왕조를 부정하는 역성 혁명을 주장하고, 권세가에 의한 토지 사유를 축소시키려 하였다.
급진 개혁파는 창왕을 몰아 내고 공양왕을 세우면서 정치적 실권을 잡았다. 이들은 역성 혁명을 반대하던 정몽주를 비롯한 온건 개혁파를 제거하였다. 이로써 이성계는 공양왕의 왕위를 물려받아 조선을 건국하였다(1392).
ㄴ - 급진 개혁파는 과전법을 실시하였다.
전시과는 무신 정권기를 거치면서 붕괴되었다.
ㄷ - 급진 개화파로는 정도전, 조준 등이 대표적이며, 정몽주, 이색은 온건 개혁파 인물이다.
18. 세종 시기 과학 기구의 제작 목적 답 ①
조선 초 세종 때를 전후한 이 시기의 과학 기술은 우리나라 역사상 특기할 정도로 뛰어났다. 당시의 집권층은 부국강병과 민생 안정을 위하여 과학기술이 중요하다고 인식하였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과학 기술은 국가적 지원을 받아 크게 발전하였다.
이 시기에는 천문학, 농업과 관련된 각종 기구를 발명, 제작하였다. 천체 관측 기구로 혼의와 간의를 제작하고, 시간 측정 기구로 물시계인 자격루와 해시계인 앙부일구 등이 만들어졌다.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만들어(1441) 전국 각지의 강우량을 측정하였고, 토지 측량 기구인 인지의와 규형을 제작하여 토지 측량과 지도 제작에 활용하였다.
또한,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하여 농사직설, 금양잡록 등 농서를 간행, 보급하였다. 특히, 농사직설은 우리나라 풍토에 맞는 씨앗의 저장법, 토질의 개량법, 모내기법 등 농민의 실제 경험을 종합하여 편찬하였다.
19. 조선 전기의 사회 모습 답 ④
조선 시대에는 경국대전과 대명률로 대표되는 법전에 의해 형벌과 민사에 관한 사항을 규율하였다. 이 중에서 형벌에 관한 사항은 대부분 대명률의 적용을 받았다. 형벌은 태, 장, 도, 유, 사의 5종이 기본으로 시행되었다.
조선의 사법 기관은 행정 기관과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다. 중앙에는 관리의 잘못이나 중대한 사건을 재판하는 사헌부, 의금부, 형조와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는 한성부, 그리고 노비에 관련된 문제를 처리하는 장례원이 있었다. 지방에서는 관찰사와 수령이 각각 관할 구역 내의 사법권을 가졌다. 재판에 불만이 있을 때에는 사건의 내용에 따라 다른 관청이나 상부 관청에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었고, 신문고나 징을 쳐서 임금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법도 있었다.
한편, 조선 시대에 농민의 생활이 자주 어려움을 당하자, 국가에서는 의창, 상평창 등을 설치하고 환곡제를 실시하여 이들을 구제하였다. 향촌 사회에서 자치적으로 실시된 사창 제도는 양반 지주들이 향촌의 농민 생활을 안정시켜 양반 중심의 향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① 지방에서는 관찰사와 수령이 각각 관할 구역 내의 사법권을 가졌다.
② 노비에 관련된 소송 문제는 장례원에서 처리하였다.
③ 조선 시대에는 형벌에 관한 사항은 대부분 대명률의 적용을 받았다.
④ 제위보는 고려 시대에 기금을 마련한 뒤 이자로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조선 시대 빈민 구제 기구로는 의창이 설치되었다.
⑤ 태종 때부터 호패법을 실시하여 전국의 인구 동태를 파악하였으며, 이를 조세 징수와 군역 부과에 활용하였다.
호패는 오늘날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것으로 16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가지고 다녔던 신분 증명패이다.
20. 유학 교육 기관의 변천(국학) 답 ②
통일 신라에서는 신문왕 때 국학이라는 유학 교육 기관을 설립하였다. 그후, 경덕왕 때에는 국학을 태학으로 고치고 박사와 조교를 두어 논어와 효경 등의 유교 경전을 가르쳤다.
21. 조선 시대 양반 계층 답 ④
제시된 그림은 서원 배치도와 서원에서 봄·가을로 행해지던 향음주례이다.
서원을 세운 이들은 양반 유림들이다. 서원은 이름난 선비나 공신을 숭배하고 그 덕행을 추모하였고, 유생이 한 자리에 모여 학문을 닦고 연구함으로써 향촌 사회의 교화에 공헌하였다.
양반은 토지와 노비를 많이 소유하고 과거, 음서, 천거 등을 통하여 국가의 고위 관직을 독점하였다. 양반은 경제적으로는 지주층이며, 정치적으로는 관료층으로서, 생산에는 종사하지 않고 오직 현직 또는 예비 관료로 활동하거나 유학자로서의 소양과 자질을 닦는 데 힘썼다.
조선은 각종 법률과 제도로써 양반의 신분적 특권을 제도화 하였다. 무엇보다도 양반은 군역을 비롯한 각종 국역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①, ③ 중인에 대한 설명이다.
② 양반들은 주로 문과에 응시하였다.
⑤ 노비에 대한 설명이다.
22.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 답 ⑤
㉠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두고, 거북선을 앞세워 사천, 한산도 앞 바다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은 수군의 활약으로 제해권을 장악해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전라도 곡창 지대와 황해안을 지킬 수 있었다.
㉡ 수군과 의병의 승전으로 조선은 전쟁 초기의 수세에서 벗어나 반격을 시작하였다.
아울러 명의 원군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하였으며, 관군과 백성이 합심하여 행주산성 등
에서 적의 대규모 공격을 물리쳤다.
㉢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만 명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
그리고 기근과 질병으로 인구가 크게 줄어들었다.
㉣ 왜군의 약탈과 방화로 불국사, 서적, 실록 등 수많은 문화재가 손실되었다.
토지 대장과 호적의 대부분이 없어져 국가 재정이 궁핍해지고, 식량도 부족해졌다.
㉤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결사 항전한 것은 병자호란이다.
선조는 임진왜란 때 왜군의 침입을 피해 멀리 의주까지 피난을 갔었다.
23. 정조의 정책 답 ①
장용영을 설치한 것은 정조이다.
정조는 적극적인 탕평책을 추진하여 영조 때에 세력을 키워 온 척신과 환관 등을 제거하고 그 동안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소론과 남인 계열도 중용하였다.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중에서 유능한 인사를 재교육하는 초계문신 제도를 실시하고, 규장각을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였다.
그리고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왕권을 뒷받침하는 군사적 기반을 갖추었다. 더 나아가 수원으로 사도 세자의 묘를 옮기고 화성을 세워 정치적·군사적 기능을 부여함과 동시에, 상공인을 유치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상징적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또, 수령이 군현 단위의 향약을 직접 주관하게 하여 지방 사림의 영향력을 줄이고 수령의 권한을 강화 하였다.
정조는 민생의 안정과 문화 부흥에도 힘썼다. 정조는 서얼과 노비에 대한 차별을 완화하였으며, 재정 수입을 늘리고 상공업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자유로운 상업 행위를 허락하는 통공 정책(通共政策)을 시행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제도와 그것의 운영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또, 왕조의 통치 규범을 전반적으로 재정리하기 위하여 대전통편을 편찬하였다. 그 밖에, 외교 문서를 정리한 동문휘고, 국가각 기관의 기능을 정리한 탁지지, 추관지 등과 병법서인 무예도보통지 등을 편찬하여 문물 제도를 재정비하였다.
②, ④ 영조가 실시한 정책이다.
③ 비변사를 처음 설치한 것은 중종 때이다.
⑤ 고종 때의 일이다.
24. 중농학파 실학자들의 공통된 주장 답 ②
반계수록은 유형원, 성호사설은 이익, 경세유표는 정약용의 저서이다.
이들은 모두 조선 후기에 농업 중심의 개혁론을 제시한 실학자들로, 이들은 공통적으로 농민 생활의 안정을 위한 토지 제도의 개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유형원은 균전론을 내세워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이익은 유형원의 실학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많은 제자를 길러 내 학파를 형성하였다. 그는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 제도 개혁론으로 한전론을 주장하고, 나라를 좀먹는 여섯 가지의 폐단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실학을 집대성한 최대의 학자는 정약용으로, 지방 행정의 개혁에 대하여 쓴 목민심서, 중앙 행정의 개혁에 대하여 쓴 경세유표 등을 비롯하여 50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 그는 토지 제도의 개혁론으로 여전론을 처음에 내세웠다가 후에 정전제를 현실에 맞게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① 실학자들은 양반 문벌 제도의 폐단을 지적하였지만, 신분 제도 폐지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③ 이익은 화폐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폐전론을 주장하였다.
④, ⑤ 박지원, 박제가 등의 중상학파 실학자들의 주장이다.
25. 조선 후기 문화의 새 경향 답 ②
조선 후기에는 서당 교육이 보급되고, 서민의 경제적·신분적 지위가 향상됨에 따라 서민 문화가 대두하였다. 문학 분야에서는 한글 소설과 사설시조가 유행하였는데, 이는 문학의 저변이 서민층에까지 확대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춤과 노래 및 사설로 서민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어 표현한 판소리와 탈춤은 서민 문화를 확대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회화에서는 그 저변이 확대되어 풍속화와 민화가 유행하였다.
② 분청사기는 고려 말~조선 전기에 유행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백자가 민간에까지 널리 사용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청화 백자가 유행하는 가운데 형태가 다양해지고, 안료도 청화, 철화, 진사 등으로 다채로웠는데, 제기와 문방구 등
생활 용품이 많았다. 이와 함께 서민들은 옹기를 많이 사용하였다.
26. 흥선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의 목적 답 ④
고종이 즉위(1863)한 시기, 안에서는 전국 각지의 농민들이 봉기하고, 밖에서는 서양 세력이 통상 수교를 요구하며 위협적으로 접근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어린 고종을 대신해 정치적 실권을 잡은 흥선 대원군은 안으로는 내정을 개혁하여 왕권을 강화하면서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밖으로는 서양 세력의 침략에 통상 수교 거부 정책으로 단호하게 대응하였다. 즉,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 경복궁 중건, 비변사 폐지,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 회복, 대전회통 편찬 등으로 왕권을 강화하였다. 또, 붕당의 근거지로 인식되어 온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철폐하는 동시에, 농민 봉기의 원인으로 지목된 삼정을 개혁하여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려 노력하였다.
①, ⑤ 재정 확충을 위해 가장 힘쓴 것이 삼정의 개혁이었다.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기 위해 양전을 실시하고,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였으며, 환곡제를 폐지
하고 사창제를 실시하였다.
② 안동 김씨 등 세도 가문을 몰아내고 문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였다.
③ 외세 침략에 대비해 삼수병을 강화하고 강화도 등에 포대를 쌓고 해안 경비를 강화하였으며, 전국의 포수를 모집하여
군사력을 증강하였다.
④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27. 신미양요(1871)와 관련된 자료 답 ⑤
병인양요(1866)에 앞서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 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 가까이 와서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다 분노한 평양의 관민에 의해 불에 탄 사건이 있었다.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미국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하였다(신미양요, 1871). 이에 맞서 어재연이 이끈 조선군은 광성보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한때 광성보를 점령하였던 미군은 조선 군민의 강력한 저항에 버티지 못하고 물러갔다.
이때 어재연 장군의 수(帥)자기가 미군이 가져갔는데, 최근에 이를 우리나라에 영구 임대 형식으로 돌려줬다.
28. 운요 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 답 ②
1873년에 고종의 친정으로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고 민씨 세력이 집권하면서 개항과 통상 무역을 주장하는 집단이 정치적으로 성장하였다. 이런 움직임 속에서 일본은 한반도 침략을 노리며 운요 호 사건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어 문호를 개방하였다(1876). 강화도 조약의 정식 명칭은 조·일 수호 조규이고, 병자 수호 조약이라고도 한다. 강화도 조약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지만, 부산 및 다른 두 곳을 개항해야 했으며, 일본에 치외법권과 해안 측량권 등을 내준 점에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 조약에 이어 일본 상품에 대한 무관세, 조선 양곡의 무제한 유출 등을 규정한 조․일 통상 장정(조․일 무역 규칙)을 맺었다(1876).
① 일본에 대한 배상금 지불과 관련된 조약은 임오군란의 결과 체결된 제물포 조약(1882), 갑신정변 후 체결된 한성 조약
(1884)이다.
③ 임오군란 직후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맺고 임오군란 중에 일본측이 입은 피해에 대한 배상금을 지불하였으며,
나아가 일본 공사관의 경비를 구실로 일본군이 서울에 주둔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④, ⑤ 1876년에 체결된 조․일 무역 규칙을 개정하여 1873년에 체결된 새 조․일 통상 장정과 관련된 내용이다.
29. 조선 후기 상품 화폐 경제 발달의 배경 답 ①
조선 후기에는 상품의 유통이 활성화되었다. 부세 및 소작료의 금납화, 인구의 자연 증가와 인구의 도시 유입도 상품 화폐 경제의 진전을 더욱 촉진하였다.
조선 후기 상업 활동의 주역은 공인과 사상이었다. 처음에는 공인이 상업 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이후에는 사상이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사상의 활동은 주로 칠패, 송파 등 도성 주변에서 이루어졌지만, 개성(송상), 평양(유상), 의주(만상), 동래(내상) 등 지방 도시에서도 활발하였다. 그들은 각 지방의 장시를 연결하면서 물품을 교역하고, 각지에 지점을 두어 상권을 확장하였다.
대표적인 사상인 개성의 송상은 전국에 지점을 설치하여 활동 기반을 강화하였는데, 주로 인삼을 재배, 판매하고 대외 무역에도 깊이 관여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그리고 서울의 경강 상인은 운송업에 종사하면서 거상으로 성장하였다. 그들은 선박의 건조 등 생산 분야에까지 진출하여 활동 분야를 넓히기도 하였다.
또한 이 시기 농민들도 장시가 점차 증가하여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쌀, 목화, 채소, 담배, 약초 등 시장에 팔기 위한 상품 작물을 재배하였다.
①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공인이라는 어용 상인이 나타났다.
이들은 관청에서 공가를 미리 받아 필요한 물품을 사서 납부하였다.
공인이 시장에서 많은 물품을 구매하였으므로 상품 수요가 증가하였다.
농민도 대동세를 내기 위하여 토산물을 시장에 내다 팔아 쌀, 베, 돈을 마련하였다.
이와 같이 물품의 수요와 공급이 증가하면서 상품 화폐 경제가 한층 발전하였다.
② 조선 후기에는 직파법 대신 모내기법이 일반화되었다.
③ 소작료 납부 방식은 수확량의 일정 비율을 소작료로 내는 방식(타조법)에서 일정 액수를 소작료로 내는 방식(도조법)
으로 바뀌어 갔다.
④ 해동통보는 고려 시대에 유통된 화폐이며, 조선 후기에는 상평통보가 널리 사용되었다.
⑤ 관영 수공업이 쇠퇴하고 민영 수공업이 발달하였다.
30. 고대~조선 후기의 문화유산 답 ④ ① 광개토 대왕릉비는 대왕 사후 2년 뒤(414)에 장수왕이 국내성(통구)에 건립한 것이다. 장방형 기둥의 4면에 예서체로 1775자가 새겨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건국의 시조인 추모(주몽)의 이야기, 광개토 대왕의 영토 확장, 광개토 대왕의 무덤을 수호, 관리하는 묘지기 330호의 출신 지역 이름이 나타나 있다. ② 김홍도는 산수화, 기록화, 신선도 등을 많이 그렸지만, 정감어린 풍속화가 유명하다. 그는 밭갈이, 추수, 씨름, 서당 등에서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소탈하고 익살스러운 필치로 그렸다. ③ 통일신라 때 인공 석굴로 만들어진 석굴암은 중앙에 있는 본존불과 주위의 보살상을 비롯한 부조들도 매우 뛰어나다. 석굴암은 불국사와 함께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④ 청화 백자는 조선 후기에 많이 만들어져 유행한 도자기로, 코발트 성분을 안료로 하여 푸른색 무늬를 넣은 백자이다. 청화 백자는 상감법(그릇 표면을 파낸 자리에 백토, 흑토를 메워 무늬를 내는 방법)이 아니라 도자기 표면에 푸른색이 나는 안료로 그림을 그려 넣었다. ⑤ 서산 마애 삼존불상(서산 용현리 마애여래 삼존상)은 ‘백제의 미소’라 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얼굴 모습이 특징이다.
31. 박영효(1861∼1939)의 활동 답 ④
제시된 인물은 ‘일본에 수신사로 가면서 태극기 제작’과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이라는 내용을 통해 박영효임을 알 수 있다.
박영효는 개화 사상가 박규수의 사랑을 출입하면서 개화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아 1879년경 김옥균, 서광범 등과 개화당을 조직하였다.
1882년 9월 임오군란의 사후 수습을 일본 정부와 협의하기 위한 특명 전권대신 겸 제3차 수신사로 임명되어 종사관 서광범 등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일본으로 건너가는 배 위에서 태극기를 제작, 일본에 도착한 직후부터 사용하였다.
1883년 초 귀국한 뒤 한성 판윤에 임명되어 박문국, 순경부, 치도국(治道局) 등을 설치하여 신문 발간과 신식 경찰제도의 도입, 도로 정비 사업 등 여러 개화 시책을 폈다. 그의 노력으로 한성순보가 창간되었다.
1884년 12월 김옥균, 서광범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청군의 개입으로 정변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88년 초 일본에서 고종에게 국정 전반에 관해 장문의 개혁 상소인 ‘개화상소(건백서(建白書)라고도 함)’를 올렸다.
1893년 일본의 유력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동경에 친린의숙이라는 사립 학교를 세워 유학생들의 교육에 힘을 썼다.
1894년 봄 동학 농민군의 봉기를 계기로 청․일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정부의 주선으로 그 해 8월 귀국하였다. 그 뒤 조선 정부에 친일 세력을 만들려는 일본공사 이노우에의 지원을 받아 수립된 제2차 김홍집 내각의 내부대신으로 취임하였다.
1895년 삼국 간섭으로 일본 세력이 퇴조하자 김홍집파를 내각에서 퇴진시킨 뒤 독자적으로 제2차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역모를 꾀하였다는 혐의를 받자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 뒤 상소를 통해 자신의 역모 혐의의 부당함을 고종에게 호소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1900년 쿠데타 음모를 지시하였다가 사전에 발각됨으로써 궐석 재판 결과 교수형이 선고되었다.
1907년 고종의 특사 조칙을 제수 받아 정계에 복귀하였다. 이어 헤이그 특사 사건을 계기로 궁내부 대신에 임명되어,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 내각의 고종 양위 압력을 무마시키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10년 국권 피탈 후 일제가 회유 정책의 일환으로 수여한 후작의 작위를 받았다.
3·1 운동 이후에는 일제의 문화 통치에 순응하여 친일 내지 개량주의적 단체와 관계를 맺었다.
1920년 동아일보사 초대 사장에 취임하였다.
1926년 중추원 의장, 1932년 일본 귀족원 의원을 지냈으며, 1939년 중추원 부의장 재직 중 죽었다.
①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뒤에 제중원)을 세운 이는 선교사인 알렌이다.
② 유길준, ③ 서재필, ⑤ 유길준, 부들러에 해당하는 설명이다.
32. 대한 제국의 정책(환구단과 지계 발급) 답 ④
환구단은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올리고 하늘에 제를 올렸던 장소이고, 지계(地契)는 대한 제국이 조세 수입을 늘리고 근대적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해 발행한 토지 소유권을 증명하는 문서이다.
대한 제국은 대한국 국제를 제정하여 황권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옛 제도를 근본으로 하고 새로운 제도를 참작한다.”라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개혁 방향 아래 근대 국가로 발전하기 위한 여러 가지 개혁을 추진하였다. 특히, 산업의 발전과 교육의 진흥에 힘을 기울였다.
농민 생활의 안정과 재정 확보, 근대적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해 1898년에 양지아문(量地衙門)을 설치하고, 토지를 새로이 측량하여 토지 소유권을 증명하는 문서, 즉 지계(地契)를 발행하였으며, 상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각종 회사와 공장을 설립하였다. 또, 새로운 기술자와 경영인의 양성을 위해 상공 학교, 광무 학교 등의 실업 학교와 의학교 등 각종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와 같은 정부의 정책으로, 개인이 생산 공장을 설립하여 운영하기도 하였으며, 많은 사립 학교가 설립되었다.
한편,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여 자주적으로 국가를 지키기 위해 군제를 개편하여 궁궐과 서울을 지키는 군대를 증강하였고, 지방에도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정책은 집권층의 보수적 성향과 열강의 간섭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④ 통리기무아문은 개화 정책 실시 초기인 1880년에 설치된 기구였다.
33. 몸뻬의 확산 배경 답 ③
중·일 전쟁 이후 일제는 국가 총동원법(1938)을 제정하여 본격적인 인력과 물자의 수탈에 나섰다. 1940년대 들어 전시 체제가 되면서부터는 남녀의 의복도 각각의 소속 집단에 따라 제복을 착용케 하였다. 남자들은 한복이나 양복 대신 국방색 국민복을 입고, 전투모에 각반을 차도록 했으며, 여자는 치마 대신 일본 농촌 여성의 작업복인 몸뻬라는 바지를 입도록 통일시켰다. 이 시기 일제는 수십만 명의 여성들을 군수 공장 등에 전쟁 물자 조달에 동원하였다.
①, ②, ④ 19세기 후반에 나타난 모습이다.
34. 조선책략과 영남 만인소 답 ④
(가)는 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김홍집이 가지고 온 <조선책략>과 그 내용 중의 일부이다. 이 책은 황 쭌셴이라는 중국의 외교관이 동아시아의 정세와 조선의 외교 정책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쓴 것이다. 주요 내용은, 러시아 세력이 남쪽으로 침투하는 상황에서 조선이 이를 막기 위해서는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의 외교를 추진하면서 서양의 기술과 제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종은 이 책의 내용에 큰 관심을 가지고 서양과 수교하려는 뜻을 가졌으며, 이를 복사하여 관리와 유생들에게 배포하도록 하였다.
(나)는 개화 정책이 추진되고 <조선책략>이 유포되자 영남 유생들이 이만손을 중심으로 올린 집단 상소인 영남 만인소이다. 유생들은 영남 만인소를 통해 <조선책략>의 내용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ㄱ - 2차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김홍집이 가지고 들어왔다.
ㄷ - 척화비는 흥선 대원군이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물리치고 전국에 세운 것이다.
35. 우리나라 근대식 우편 업무의 시작 답 ③
우리나라에서 근대식 우편 업무를 위해 우정총국을 설치한 시기는 1884년의 일이다.
1884년 10월, 급진 개화파(개화당)는 같은 개화당의 홍영식이 책임자로 있던 이 우정총국 낙성 축하연을 기회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우편 제도는 갑신정변으로 말미암아 한동안 실시되지 못하다가 1895년에 들어 비로소 시작되었다. 이후 만국 우편 연합에도 가입하여 외국과 우편을 주고받게 되었다.
36.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 답 ④
금속 공출, 신사 참배 강요는 민족 말살 통치 시기의 모습이다.
1930년대에 일제는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한반도를 대륙 침략의 병참 기지로 삼았다. 1940년대에는 태평양 전쟁을 도발하면서 인적·물적 자원의 수탈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 시기 일제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완전히 말살 하려는 황국 신민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일제는 내선 일체의 구호를 내세워 우리 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또, 성과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고쳐 쓰도록 하고, 황국 신민 서사 암송, 궁성 요배, 신사 참배 등을 강요하였다.
특히, 일제는 강제 징용으로 한국인 노동력을 착취하였고, 학도 지원병 제도, 징병 제도 등을 실시하여 수많은 우리 젊은이를 전쟁에 동원하였다. 또, 젊은 여성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여 군수 공장 등에서 혹사시켰으며, 그 중 일부는 전선으로 끌고 가 일본군 위안부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다.
ㄱ - 회사령은 헌병 경찰 통치 시기(1910~1919)인 1910년에 제정하였다.
ㄷ - 산미 증식 계획(1920~1934)이 시작된 시기는 이른바 문화 정책이 실시된 1920년이다.
37. 한말~일제 강점기의 철도 부설의 특징 답 ⑤
일본은 대륙 침략을 위해 한반도의 남북을 연결할 철도 부설에 주력하였는데, 결국 서울과 부산, 서울과 의주, 서울과 인천을 잇는 철도 부설권을 모두 차지하였다. 철도 부설권을 차지한 후 경인선을 개통하고(1899) 이어 러·일 전쟁 중 일본이 군사적 목적으로 경부선(1905), 경의선(1906)을 개통하였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토지가 철도 부지로 수용되면서 민중의 생활 기반을 파괴했기 때문에 철도에 대한 민중의 반감은 매우 컸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호남선을 개통(1914)하여 X자형 철도망을 완성하였다.
ㄱ - 경인선이 가장 먼저 개통되었다.
경인선은 1899년, 경부선은 1905년에 개통되었다.
ㄴ - 제시된 철도 중 일제 강점기에 개통된 철도는 호남선밖에 없다.
38. 무단 통치 시기(1910~1919)의 모습 답 ②
문제에 제시된 가상 대화 내용 중, ‘헌병 경찰’, ‘태형’, ‘교사가 제복에 칼을 찼다’는 내용을 통해 무단 통치(헌병 경찰 통치) 시기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여 우리 민족을 강압적으로 통치하였다. 일본의 육․ 해군 대장 중에서 임명된 조선 총독은 행정권은 물론, 사법권과 군사권 등 모든 권한을 가지는 절대적인 지위에 있었다
1910년대에 일제는 무단 통치를 행하여 한국인의 모든 정치 활동 금지는 물론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 같은 기본권을 빼앗고, 헌병 경찰과 헌병 보조원을 전국에 배치하여 경찰의 임무를 맡겼으며 즉결 처분권을 부여하여 우리 민족을 태형에 처하기도 하였다.그리고 한민족을 위협하고 굴복시키기 위해 교원들에게도 제복을 입고 칼을 차도록 하였다.
이 시기 경제 분야에서는 토지 조사 사업(1912~1918)을 통해 토지를 약탈하고, 회사령을 공포하여(1910) 한국인의 기업 활동을 억제하고, 한국 민족 자본의 성장을 억압하였다. 인삼, 소금, 담배 등은 전매제도를 실시하여 조선총독부의 수입으로 삼았으며, 삼림, 광산, 어업도 일본인들이 독점해 갔다. 그리고 경제 수탈을 위해 필요한 철도와 도로, 항만과 통신 등의 시설도 갖추었다.
한편 이 시기 일제의 교육 정책도 그들의 식민지 지배에 순종하는 한국인을 만들기 위한 목적에 맞춰 추진하였다. 제1차 조선 교육령(1911)을 발표해 일본어를 중심으로 교과목을 편성하였으며, 한국인에게 고등 교육을 받을 기회를 주지 않았다. 한국인에게는 부려먹기에 적당한 만큼의 초보적인 기술과 실무적인 내용만을 가르쳤다.
① 경성 제국 대학은 민립 대학 설립 운동에 대응하기 위한 성격을 가지고 1924년에 설립되었다.
이 시기 일제는 이른바 문화 정책을 실시하였다.
③ 배재 학당은 1885년, 이화 학당은 1886년에 설립되었다.
④ 원산 학사는 1883년에 설립되었다.
⑤ 민족 말살 정책 시기(1931~1945)의 모습이다.
39. 임오군란의 전개 답 ③
정부의 개화 정책이 추진되는 군사 제도도 개편되어 종래의 구식 군대인 5군영을 2영으로 축소하고 새로이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였다(1881). 이러한 가운데 2영에 소속된 구식 군인들은 신식 군대인 별기군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낮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구식 군인들이 한동안 밀렸던 급료로 모래와 겨가 섞인 쌀을 받게 되자, 그들의 불만은 일시에 폭발하여 선혜청을 습격하면서 난이 전개되었다. 이들은 정부 고관들의 집을 습격하고, 일본 공사관을 공격하였으며, 별기군의 일본인 군사 교관을 살해하였다(임오군란, 1882). 구식 군인들과 민중이 합세해 궁궐로 쳐들어오자 민비(후에 명상황후)는 서울을 탈출해 충주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의 집으로 피난을 갔다.구식 군인들의 요청으로 흥선 대원군이 일시 정권을 잡았으나 조선에 세력을 침투시킬 기회를 엿보던 청이 민씨 정권의 요청으로 군대를 보내 난을 진압하고 흥선 대원군을 납치해 감으로써 민씨 세력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임오군란 진압을 계기로 청은 조선에 군사 고문과 외교 고문 등을 파견하여 내정에 간섭하였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은 일본의 강압으로 제물포 조약을 맺게 된다. 이 조약으로 조선은 일본에게 임오군란 중에 일본측이 입은 피해에 대한 배상금 지불, 일본 공사관의 경비를 구실로 일본군이 서울에 주둔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제물포 조약 후 박영효가 일본에 3차 수신사로 파견되었는데, 이때 태극기가 처음 사용되었다.
③ 전주성 점령은 동학 농민 운동과 관련 있는 사건이다.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정부는 농민군과 전주 화약을 맺게 된다.
40. 만주와 간도에서 활동한 독립군 부대 답 ⑤
이 문제는 1920~1930년대 이 지역에서의 항일 독립 운동 부대의 지도를 직접 보는 것이 가장 좋은 해설일 것 같다.
⑤ 한국 광복군은 중국 관내의 충칭에서 창설되었다(1940).
41. 일제 강점기 문맹 퇴치 운동 답 ②
제시된 내용은 동알보사가 주도한 브나로드 운동의 홍보 자료이다.
1920년대 후반부터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궁핍한 농촌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문제들을 우선 해결하자는 취지 아래 농촌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여기에 앞장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문맹 퇴치, 생활 개선 등 농촌의 당면 문제들을 일제가 허용하는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해결하려 하였다.
조선일보는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는 구호와 함께 한글 교재를 보급하고, 전국 순회 강연을 개최하면서 문자 보급 운동을 전개하였다(1929). 동아일보도 1931년부터 ‘브나로드 운동’이란 이름을 내세워 농촌 계몽 운동을 전개했는데, 당시 여름 방학을 맞이한 학생들을 모아 행사를 기획하고 교재를 공급하였다. 브나로드 운동은 1935년 일제에 의해 금지당할 때까지 4년 동안 5,700여 명이 참여하였다.
① ‘혁명은 부억으로부터’는 <신여성> 1931년 신년호에 실린 이경원(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의 나애)의 글로,
여성 운동과 관련된 것이다.
③ 어린이날 표어로, 소년 운동과 관련된 자료이다.
④ 일제 강점기에 백정들이 사회적 차별을 없애기 위해 마련한 형평 대회를 알리는 포스터이다.
⑤ 물산 장려 운동 10주년 기념 포스터이다.
42. 의열단의 의거 활동 답 ①
문제에 제시된 의거 활동을 벌인 단체는 의열단이다.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의거를 일으켜 민족의 독립 의지를 고취하고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려 한 활동도 전개되었다. 이들은 개별적으로 활동하거나, 김원봉의 의열단, 김구의 한인 애국단에서 활동하면서 식민 통치 기관을 파괴하거나 일본인 고관, 친일 인사들을 처단하였다.
의열단은 1919년 만주 길림에서 김원봉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다. 그들은 끊임없는 개인 폭력 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려는 목적으로 조선 총독부의 고위 관리나 친일파 거두 등을 처단하고, 조선 총독부나 경찰서, 동양 척식 주식 회사 등 식민지 착취 기관을 파괴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 부산 경찰서를 시작으로 밀양 경찰서, 종로 경찰서, 조선 총독부, 도쿄의 일본 왕궁, 동양 척식 주식 회사 등에 폭탄을 던지는 거사를 감행하였다.
김원봉의 요청에 따라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 혁명 선언’에는 의열단의 행동 강령과 개인 폭력 투쟁을 통해 민중 직접 혁명을 달성하려는 의열단의 목표가 잘 드러나 있다.
② 구월산대는 1920년에 황해도 신천에서 조직되었던 독립 운동 단체이다.
이 밖에도 이 시기 국내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무장 항일 단체로는 평북 의주 천마산을 근거로 활동한 천마산대,
평북 의주 동암산을 근거로 활동한 보합단 등이 있다.
③ 대한 광복회는 박상진, 김좌진 등 의병 계열과 애국 계몽 운동 계열의 비밀 결사들이 통합하여 결성하였다(1915).
독립군을 길러 일제를 몰아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복벽주의를 극복하고 근대 국민 국가의 수립을 지향하였다.
이를 위해 군대식 조직을 갖추었으며, 국내는 물론 만주에도 지부를 설치하고 독립군 양성에 노력하였다.
독립 전쟁에 필요한 군자금 마련을 위해 일제의 재산을 빼앗고 부호들에게 의연금을 걷었으며, 협조하지 않는 친일
부호를 처단하기도 하였다.
④ 독립의군부는 최익현과 의병을 일으켰다가 붙잡힌 임병찬이 쓰시마 유배에서 풀려난 후 고종의 밀지를 받고 전국의
의병장과 유생들을 모아 조직(1912)한 비밀 결사이다.
이 단체는 복벽주의 이념에 따라 국권을 회복한 후 고종을 복위시키려는 목표를 세우고, 이를 위해 전국적인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조직이 발각되어 해체되었다.
⑤ 한인 애국단은 1931년 김구가 조직한 의열 단체이다.
43. 한말 애국 계몽 운동 답 ②
이 문제는 을사조약을 전후한 시기에 전개된 정치, 경제, 교육, 언론, 역사 분야의 애국 계몽 운동을 생각하면 된다.
독립 협회 해산 후 가장 먼저 조직된 애국 계몽 운동 단체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좌절시킨 보안회였다(1904). 보안회가 해산되자, 독립 협회 출신의 인사들이 헌정 연구회를 조직(1905)하여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였다. 그들은 근대적인 입헌 의회 제도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 개혁을 주장하였다.을사조약 이후 통감부에 의해 한국인의 정치 활동이 금지되자, 헌정 연구회의 중심 인물들은 새로이 대한 자강회를 조직하였다(1906). 대한자강회는 전국 각지에 지회를 설립하고 월보를 간행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강제 퇴위에 반대하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펴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되었다. 이후 대한 자강회를 계승하여 대한 협회가 조직되어 활동하였다(1907)
정치 활동에 대한 통감부의 억압이 날로 심해져 정치 단체들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비밀리에 안창호, 이승훈, 양기탁 등이 중심이 되어 신민회를 조직하였다(1907). 신민회는 국권 회복과 공화 정치 체제의 국민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여, 국내에서 문화적, 경제적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면서 점차 국외에서 독립군 기지의 건설 등 군사적 실력 양성을 꾀하였다. 이에 따라 국내에서는 대성학교와 오산학교를 설립하였고, 자기 회사와 태극 서관을 운영하였으며,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국민 계몽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그리고 만주 삼원보에 한인 집단 거주지를 만들어 학교와 군사 학교를 세워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였다. 신민회는 105인 사건으로 해체되었다(1911).
한편 애국 계몽 운동 시기에 신채호, 박은식 등의 활약에 힘입어 근대 계몽 사학이 성립되었다. 이들은 민족 의식과 애국심을 키우고, 민족의 주체성을 세우고자 역사 연구를 활발히 전개하였다. 특히, 나라를 구한 위인의 전기를 써서 보급하고, 외국의 건국과 흥망의 역사서를 번역하여 민족의 독립 의지와 역사 의식을 높이려 하였다.
① 대한 자강회가 발행한 월보이다.
② 한글 맞춤법 통일안은 조선어 학회(1931~1942)가 1933년에 제정하였다.
③ 대한 매일 신보(1904~1910)는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고, 고종의 친서를 게재하였으며, 국채 보상 운동을 적극적
으로 후원하는 등 항일 언론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④ 을지문덕전은 신채호가 1908년에 쓴 위인전이다.
⑤ 대성학교는 신민회의 안창호가 1907년에 평양에 세운 학교이다.
44.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활동 답 ③
(가)에 들어갈 정부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이다.
3·1 운동을 계기로 서울과 연해주, 상하이에 각각 정부가 조직되었고, 마침내 이를 통합하여 상하이에 대한 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다(1919. 9.).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근대적 헌법을 갖추고, 민주 공화제와 대통령제를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 국무총리에 이동휘를 선임하였다. 그리고 입법 기관인 임시 의정원, 사법기관인 법원, 행정 기관인 국무원을 두어 3권 분립 헌정 체제를 갖추었다.
임시 정부는 국내외의 민족 독립 운동을 조직적이고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연통제와 교통국 등을 통하여 독립 운동 자금 모금과 정보 수집에 활용하였다.
외교적으로는 파리 강화 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여 독립을 주장하였고, 미국에 구미 위원부를 두어 이승만을 중심으로 외교 활동을 전개하여 한국 독립 문제를 국제 여론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또한, 애국 공채를 발행하고, 기관지로 독립 신문을 간행하였으며, 사료 편찬소를 두어 한·일 관계 사료집을 간행하였다.
ㄱ - 블라디보스토크에 수립된 대한 국민 의회에 대한 설명이다.
ㄹ - 자유시 참변 이후 독립군은 다시 만주로 돌아와 통합 운동을 추진하여,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3부를 조직하였다.
이 가운데 참의부만 임시 정부가 직할하였다.
45. 김구의 통일 정부 수립 운동 답 ⑤
제시된 자료는 김구의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글로, 김구가 1948년 2월 남북 대표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38선을 넘기 전 한 연설이다.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 결정된 한반도에 임시 민주 정부 수립을 논의하기 위한 두 차례의 미·소 공동 위원회가 성과 없이 결렬된 후, 한반도 문제는 미국에 의해 유엔에 이관되었다. 1947년 11월 유엔 총회에서는 유엔 감시 아래 인구 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를 통한 한국 통일안을 가결하였다. 그러나 소련이 이에 반대하자, 유엔 소총회는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활동이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치르기로 하였다. 이에 분단을 우려한 김구, 김규식 등은 북한의 김일성, 김두봉 등과 평양에서 남북 지도자 회의를 개최하였지만 실패하였다(1948. 4.).
46. 유신 헌법의 특징 답 ①
1967년 선거에서 재선된 박정희는 3선 개헌을 강행하고(1969) 3선에 성공하였다(1971).
1972년에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한 후 경제 난국 극복과 평화 통일 대비를 명분으로 비상 계엄을 선포하여 국회를 해산하였으며,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명분을 내세워 10월 유신을 단행하였다.
이후 유신 헌법을 공포하였는데, 유신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임기 6년으로 중임 제한이 없으며,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 선출하고, 국회의원 3분의 1을 추천할 수 있다. 또, 법관 인사권, 국회 해산권을 비롯하여 국민의 기본권마저 제한할 수 있는 긴급 조치권을 가졌다. 이와 같이 유신 체제는 박정희의 종신 집권을 실현시키고 대통령의 권한을 비정상적으로 강화하여 민주주의를 기만한 권위주의적 독재 체제였다.이 시기 정부에서는 유신 체제를 부정하고 헌법을 비방하거나 개정을 요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는 긴급 조치를 잇따라 발표하였다. 그러나 양심적 지식인, 학생, 종교인 등은 이에 저항하며 민주화를 요구하였다. 마침내 박정희 대통령은 10·26 사태로 피살되었고, 유신 체제는 종말을 고하였다(1979).
②, ⑤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뒤 허정 과도 정부가 수립되어 제정한 3차 개헌(1960) 헌법의 내용이다.
③ 대통령 직선제 개헌은 이승만 정부 시기의 1차 개헌(발췌 개헌, 1952), 그리고 6월 민주 항쟁으로 전두환 정부 시기에 이뤄진 9차 개헌(1987) 때의 일이다.
④ 유신 체제 붕괴 후 권력을 잡은 전두환은 통일 주체 국민 회의를 통해 제11대 대통령에 선출(1980)된 후 유신 헌법을 고쳐 선거인단이 7년 단임의 대통령을 간접 선출하는 8차 개헌을 단행하였다(1980). 이 헌법에 의해 전두환은 다시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1981. 2.).
47. 6월 민주 항쟁(1987)에 개한 탐구 활동 답 ③
‘이한열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자’, ‘호헌 철폐, 독재 타도, 민주 쟁취’라는 구호를 통해 제시된 사진은 6월 민주 항쟁(1987. 6) 당시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전두환 정부의 강압적인 통치하에서도 계속된 민주화 요구는, 1987년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1987. 1)과 4·13 호헌 조치(1987. 4)를 계기로 6월 민주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1987년 6월 9일 연세대에서 민주화 시위 도중 이한열이 체류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은 6월 민주 항쟁에 불을 지폈다. 이에 따라 직선제 개헌과 민주 헌법 제정을 요구하는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결국, 정부는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여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였고, 여야 합의에 의해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이 마련되었다.
ㄱ - 6·3 시위(1964)와 관련 있다.
박정희 정부가 한·일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면서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와 배상 문제, 약탈 문화재 반환 등이
외면되자, 대학생들은 ‘굴욕적 대일 외교 반대’, ‘불법적 친일 정권 퇴진’을 주장하며 6·3 시위를 벌였다(1964).
ㄹ - 10·26 사태(1979)로 유신 체제가 막을 내리자 국민은 민주화를 요구하였으나, 12·12 사태로 군사권을 장악한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이를 억압하였다.
계엄령 철폐와 김대중 석방을 요구하며 일어난 5·18 민주화 운동도 무장 군인을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48. 3·1 운동과 관련된 자료 답 ③
제4관에 대한 설명 내용은 3·1 운동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들어갈 내용은 3․1 운동의 배경, 진행, 결과와 관련된 사진 자료여야 한다.
① 일본에서는 도쿄 유학생들이 2·8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여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였다.
2·8 독립 선언의 소식은 국내의 민족 대표들이 3·1 운동을 준비하는 데 큰 자극을 주었다.
② 거족적인 민족 운동을 준비하던 중 고종 황제가 서거하자 일제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져 국민들이 크게 분노하였다.
이에 종교계 인사들로 구성된 민족 대표와 학생들은 고종의 국장일(3. 3)을 즈음해 많은 군중들이 모일 것을 예상하고
3월 1일에 대규모 시위를 통해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릴 것을 계획하였다.
③ 조선 혁명 선언은 김원봉의 요청에 따라 신채호가 작성(1923)한 것으로, 의열단의 행동 강령과 개인 폭력 투쟁을 통해
민중 직접 혁명을 달성하려는 의열단의 목표가 나타나 있다.
④ 3·1 운동 당시 어린 나이로 충남 천안 아우내(병천)에서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던 유관순은 구속되어 서대문 형무
소에서 순국하였다.
⑤ 3·1 독립 선언서는 우리 민족의 완전한 자주 독립 의지를 국내외에 분명하게 밝힌 것으로, 최남선이 기초하고(공약 삼
장은 한용운) 손병희를 비롯한 33인의 민족 대표가 공동으로 서명하였다.
49. 을사의병을 일으킨 최익현 답 ⑤
을사늑약에 반발해 을사의병이 일어날 당시 최익현도 제자들을 모아 전라북도 태인에서 봉기하여 정읍·순창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관군이 출동하자, 최익현은 관군에게 의병에 합류할 것을 간곡히 권하였으나, 관군의 공격으로 인솔 의병이 와해되어 결국 체포되었다. 이후 쓰시마 섬으로 유배된 최익현은 적이 주는 음식물을 먹을 수 없다며 단식을 하다 그곳에서 순국하였다.
50. 19세기 후반의 여러 사실 답 ④
(가)~(다) 모두 100주년 기념 우표이다.
(가) 헤이그 특사 사건은 1907년,
(나)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은 1882년,
(다) 독립신문 창간은 1896년의 일이다.
따라서 이를 시기적으로 연결하면 (나)-(다)-(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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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대단하십니다.
많은 도움받고 갑니다. 감사해요^^
정확하고 꼼꼼한 해설에 머리속에 쏙쏙 들어갑니다.ㅎㅎ 감사합니다~~^^.
왜 다른 회는 뛰어두셨나요?? 제가 못찾는건가요오....??해설은 정말 좋은뎁...
정말 감사합니다. 다시 복습하고 있습니다.
해설 감사합니다.^^
명쾌한 문제풀이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