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시 연구
-문복희, 가천대학교 교수
1. 서론
안도현은 1984년「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동아일보에 당선되고, 이듬해 이를 표제작으로 한 첫 시집『서울로 가는 전봉준』(민음사)을 발간한 이후 시력 30년에 이르는 현재까지 매우 왕성하게 시작 활동을 해온 시인이다. 그 왕성함은 시집 총 10권으로 증명되는 양적 풍성함에 그치지 않는다.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임화문학상 등 다수 문학상 수상도 그의 명성에 걸맞은 성과라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시는 그에게 ‘연탄 시인’이라는 ‘따뜻한 칭호’를 가지게 한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의 「너에게 묻는다」를 비롯해 「연탄 한 장」「간격」「살구꽃 지는 날」「겨울 강가에서」「무식한 놈」「석류」「우리가 눈발이라면」「제비꽃에 대하여」「천길」「포도밭 도둑」 등 10여 편이 2012년 2학기 현재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돼 있을 만큼 성가를 올리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기획적인 장르’로 발표한 우화 『연어』가 이른바 ‘대형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른 것에 호응하면서 그의 시 또한 시집 발간 즉시 반응이 두드러지는 현상을 낳아왔다.
20세기 종반에서 21세기 이른 초반에 이르는 시기에 양과 질의 면에서, 그리고 가치 평가와 독자 호응 면에서 이처럼 높은 위치를 점한 예는 흔치 않다. 이에 따라, 인상 깊은 시집 발간으로 문단의 관심을 모으던 초기부터 대중적인 인기를 크게 모으게 된 1990년 중후반을 지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평이나 문예지의 특집 작가론 등의 다양한 현장 비평이 그의 시를 향해 이루어졌다. 나아가 2000년대 들어서는 교과서 수록 시인으로 문학교육계의 전문 연구의 대상이 되어 왔고, 근자에 이르러서는 새로운 문화적 코드의 하나인 ‘힐링’의 주제로도 역시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안도현의 시는 대개 등단 초기인 1980년대 중반 당대의 민중주의적 문학관의 연장선에서 왕조 중심의 역사관과 고도성장 사회 시스템의 그늘에서 소외된 인물과 서민들에 대한 연민을 공동체의식으로 드러내면서 주목받아 왔다. 그 후 점차 고단한 일상에 대한 연민과 자연친화적 세계에 대한 동경을 특유의 서정적 언어 감각으로 노래하면서 한국 시단에서 엄혹한 리얼리즘의 세계와 이를 감싸는 낭만적 서정의 세계를 아울러 거느리고 있는 중요 시인으로 자리매김되었다. 또한 생태 환경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진 21세기에는 문명 세계가 훼손한 자연에 주목하여, 자잘하지만 생생한 일상을 에워싼 주변 동식물의 움직임을 미묘한 언어적 질감으로 포착함으로써 그 생명력을 옹호해 오고 있다.
이런 시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체로 삶에 뿌리를 둔 일상의 풍경을 따뜻한 그리움의 정서로 드러낸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예를 들어 그의 동년배 시인이자 연구가인 정끝별은 그의 시의 특징을 그리움의 정서를 주조로 하고 있다는 것, 삶에 뿌리를 둔 일상의 모습을 시화하고 있다는 것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그의 시에서 자연 이미지 묘사를 중요한 특징으로 짚고 있는 금동철은 그 이미지가 ‘사람들 사이의 사랑을 형상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사랑의 정서를 자연 이미지로 표현하는 일이야말로 ‘서정시의 본류’라고 설명하고 있다. 역시 안도현 시의 기본 정서가 그리움에 있다고 밝힌 홍용희는 그것이 소멸해 가는 기억의 세계에 대한 것일 뿐 아니라 나아가 미지의 세계에 대한 것으로 변주되기도 한다고 파악하고 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그리움의 정서를 주조로 한 안도현의 시가 그것을 이미지화하는 과정에서 자연에 대한 관심을 두드러지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다. 1990년대 이후, 적어도 제4시집에 해당하는 『외롭고 높고 쓸쓸한』(1994) 이후 어떤 시집을 봐도 안도현은 여느 시인 이상으로 자연, 생태에 눈을 돌리고 있다.
금동철의 지적처럼 그 점은 어쩌면 모든 서정시의 본류적 특징이기도 하겠지만, 안도현의 ‘자연 이미지’는 다른 어떤 서정시에서보다 집요하고 구체적이며, 그것이 또한 보기 드문 시적 성과를 낳는다는 점에서 특별한 주목을 요한다. 이 연구는 이렇듯, 민중주의적 공동체의식에 뿌리를 두어온 안도현의 시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을 배경으로 자연의 생명성을 노래하면서 유달리 높은 성취를 내는 과정을 분석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이 점은 단순히 안도현 시 연구의 일환에 머물지 않고 21세기 한국시에서 서정성이 어떻게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에 대해 그 가능성을 탐색하는 일이기도 하다.
2. 일상과 자연의 합일
안도현 시의 방법적 미학은 평범한 일상인 듯하면서도 우리가 놓치고 있는 삶의 모양새와, 사소한 몸짓인 듯하면서도 우리가 무심코 지나고 있는 자연의 움직임을 포착해 이 둘을 서로 연계함으로써 작은 존재의 위대한 힘을 보여주는 데서 얻어진다. 이를테면 “수백 년 전 나는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마을에 나타난 나 어린 계집 하나를 지극히 사랑하였네 나는 계집을 분(盆)에다 심어 방 안에 들였네”(「매화꽃 묵둘레」)에서처럼 ‘빨간 목도리를 두는 계집의 출현’과 그녀에 대한 동경이라는 일상의 스토리가 ‘방 안에 들인 분’이라는 자연을 내재하고 있다.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내 몸에 들어올 때가 있네
도꼬마리의 까실까실한 씨앗이라든가
내 겨드랑이에 슬쩍 닿는 민석이의 손가락이라든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찾아와서 나를 갈아엎는
치통이라든가
귀틀집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라든가
수업 끝난 오후의 자장면 냄새 같은 거
내 몸에 들어와서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마구 양푼 같은 내 가슴을 긁어댈 때가 있네
사내도 혼자 울고 싶을 때가 있네
고대광실 구름 같은 집이 아니라
구름 위에 실컷 웅크리고 있다가
때가 오면 천하를 때릴 천둥 번개 소리가 아니라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내 몸에 들어오면
나는 견딜 수 없이 서러워져
소주 한 잔 마시러 가네
소주,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내 몸이 저의 감옥인 줄도 모르고
내 몸에 들어와서
나를 뜨겁게 껴안을 때가 있네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전문
일상을 평범하게 사는 가운데 문득 마음을 들뜨게 하는 어떤 색다른 느낌 같은 것을 가질 때가 있다. 뭔지 모르게 나를 전과 다르게 움직이게 하는 그것에 대해 시인은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라 명명했다. 그것은 퇴근 후 가진 소박한 술자리에서 간단히 들이켠 소주 한 잔이기도 하고, 우연히 날아와 살을 간지럽히는 까실까실한 도꼬마리 씨앗 하나일 수도 있다. 바로, 그 소주와 도꼬마리 사이에, 일상과 자연 사이에 이 시가 놓여 있는 셈이다.
그런데 그 일상과 그것에 파고든 작은 자연의 움직임이 서로 그렇게 어울리면서 ‘뜨겁게 껴안는 모습’이 바로 안도현만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소한 소재가 큰 비중으로 다루어지기는 어려운 일이다. 일상에서 우리가 사소하게 지나치는 아주 작고 하찮은 것들을 안도현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그 모든 것들을 자신의 마음으로 끌고 들어와 뜨겁게 껴안으면서 그 동안 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던 그들의 소중한 세계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고 그것을 시로 나타내려고 한다. 물론 그 표현은 이미 관습적인 차원을 넘어선다. 덕분에 작고 하찮은 것이 어느새 따뜻하고 감동적인 정서로 치환되기에 이른다.
이처럼 안도현의 시는 일상의 자리에 자연이 들어서면서 그 어울림으로 하나의 작은 우주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물론 그의 남다른 언어 감각이 그 성공의 주요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의 시의 근저에 자연 환경을 정복해온 인간의 욕망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너, 문득 떠나고 싶을 때 있지?
마른 코딱지 같은 생활 따위 눈 딱 감고 떼어내고 말이야
비로소 여행이란,
인생의 쓴맛 본 자들이 떠나는 것이니까
세상이 우리를 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 스스로 세상을 한번쯤 내동댕이쳐 보는 거야
오른쪽 옆구리에 변산 앞바다를 끼고 모항에 가는 거야
부안읍에서 버스로 삼십 분쯤 달리면
객지밥 먹다가 석삼년 만에 제 집에 드는 한량처럼
거드럭거리는 바다가 보일 거야
먼 데서 오신 것 같은데 통성명이나 하자고,
조용하고 깨끗한 방도 있다고,
바다는 너의 옷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대수롭지 않은 듯 한 마디 던지면 돼
모항에 가는 길이라고 말이야
모항을 아는 것은
변산의 똥구멍까지 속속들이 다 안다는 뜻이거든
모항 가는 길은 우리들 생이 그래왔듯이
구불구불하지, 이 길을 말하자면
좌편향과 우편향을 극복하는 길이기도 한데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드는 싸움에 나섰다가 지친 너는,
너는 비록 지쳤으나
승리하지 못했으나 그러나, 지지는 않았지
저 잘난 세상쯤이냐 수평선 위에 하늘 한쪽으로 걸어두고
가는 길에 변산 해수욕장이나 채석강 쪽에서 잠시
바람 속에 마음을 말려도 좋을 거야
그러나 지체하지는 말아야 해
모항에 도착하기 전에 풍경에 취하는 것은
그야말로 촌스러우니까
조금만 더 가면 훌륭한 게 나올 거라는
믿기 싫지만, 그래도 던져버릴 수 없는 희망이
여기까지 우리를 데리고 온 것처럼
모항도 그렇게 가는 거야
모항에 도착하면
바다를 껴안고 하룻밤 잘 수 있을 거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너는 물어 오겠지
아니, 몸에다 마음을 비벼 넣어 섞는 그런 것을
꼭 누가 시시콜콜 가르쳐 줘야 아나?
걱정하지 마, 모항이 보이는 길 위에 서기만 하면
이미 모항이 네 몸속에 들어와 있을 테니까
-「모항으로 가는 길」전문
이 시의 화자는 고단한 삶의 변두리로 밀려난 친구에게 변산 바닷가 모항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 준다. 친구는 ‘좌편향’에 상처받고 ‘우편향’에 버림받은 일상에 지쳐 떠밀리듯 화자가 말하는 길에 놓여 있다. 세상은 그를 지치게 했으나 그러나 그는 ‘던져버릴 수 없는 희망’을 안고 그 길을 찾아 나선다.
변산의 변두리로 들어서면서 그는 조금씩 바닷내음에 젖는다. 그 젖음이, 길의 끝이자 바다의 시작인 모퉁이 해안마을 모항에 들면서 만나는 바다와의 진정한 동침을 가능하게 한다. 일상을 비껴난 자리에 자연이 들어와 한 몸을 이루는 정황이 이 시에 펼쳐져 있는 셈이다. 안도현 시에서 일상의 자리에 자연이 들어서고 그 자연이 인간과 하나의 몸으로 합체되는 예는 매우 흔하다. 앞서 금동철의 말처럼 자연의 이미지가 감정을 대체하는 것이 ‘서정시의 본류’라는 지적은 손쉽지만, 그러나 안도현은 그 자연이 인간의 살아가는 일상에 깊이 연계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럴 때 모항이나 부안, 변산, 채석강 같은 지명이나 장소는 그 일상과 자연 사이를 매개하는 구체적인 공간으로 제공된다. 그곳은 바다나 강, 또는 길이나 숲 같은 보편적인 공간에 비해 아주 구체적으로 친밀감을 불러일으킨다. 마지막 연에서 친구는 모항에 도착하여 바다를 껴안고 하룻밤을 잔다.
몸에다 마음을 비벼 넣어 섞은 후, 모항이 몸속에 들어와 한 몸이 된다. 바다와 사람의 몸이 하나가 되고 모항이라는 자연이 신체의 일부가 된다. 인간과 자연이 한 몸이다. 남녀의 성(性)과 관련한 이미지를 사용하여 마치 남녀가 한 몸뚱어리가 된 것처럼 모항에 가면 나는 자연인 ‘바다’를 껴안고 몸과 마음을 섞는다. 육체와 마음을 떼어놓지 않는다. 여기서 모항은 단순한 지역적 공간이 아니라 자연과의 생명적 교감을 형성해주는 공간이다. 그곳에서 자연과 일상은 하나가 된다.
3. 인간과 자연의 조화와 상생
안도현이 일관되게 추구하는 사랑의 세계는 생명의 소중성과 기쁨이 넘치는 자연 세계이며 조화와 균형을 통한 교감의 세계이다. 그의 시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거나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모든 만물이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균형을 이루는 조화의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다.
그가 발표한 시작들에서 보여주는 이러한 시세계는 최근의 시작들에서 더 구체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현실 속에서 찾아내고 있으며, 단순한 생명 사상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의 소중성과 모든 사물에 대한 사랑의 단계로 열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질적인 사랑의 가치와 생명의 소중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무와 나무가 모여 각종 생물들이 더불어 사는 무성한 숲이 되듯이, 그의 시작품들이 안락한 쉼터의 역할을 하고 있다.
시인은 자신이 생명의 리듬을 깨뜨리고 자연의 순환 체계를 무너뜨린 산업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모든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는 인식에 도달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 깨달음과 인식을 환경운동이나 생태주의운동 등의 직접적인 활동을 통하지 않고 시에서 자연 소재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시인은 몸으로 행동하기보다는 언어로 표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배설물이 사람의 몸속에 있는 한 배설물의 범주에 들어올 수 없고 배설물의 존재는 사실상 배설된 이후에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듯 언어로 나오지 않은 채 시인 내면에 머물러 있는 시란 아직 시의 범주에 들어올 수 없는 것과 같다. ‘시는 시인 내면의 물질성 혹은 육체성의 발현이다. 배설물은 그것을 배설한 사람의 특성과 성격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몸에서 떨어져 나온 이후로도 얼마 동안은 여전히 몸의 일부분’이다.
시인은 자연이나 환경, 나아가서는 생태계가 생명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시인은 생명의 아름다움, 생명의 힘, 생명의 순환 원리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소중한 가치임을 일깨우는 근원적인 생태주의자이다. 거기에는 인간도 자연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명사상이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문학은 환경이나 생태계의 문제를 주제로 다루는 장르가 아니다. 문학은 모든 생명의 본질을 규명하고 그것들의 관계가 보여주는 질서를 구축하고 그 가치를 회복시키는 근원적인 장르라 할 수 있다. 문학은 작가나 시인, 등장인물이나 시적 화자와 같은 사람이 다른 생명체와 맺고 있는 관계를 통해서 환경과 생태계, 나아가서는 자연에 대한 감각과 의식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언어의 복합체이다. 따라서 인간 중심적인 환경의 문제나 생명 중심적인 생태계 문제나 모두 문학의 근원적인 문제로 제시하고 그것을 의식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안도현도 생명의 소중성과 기쁨이 넘치는 자연 세계를 추구하며, 조화와 균형을 통한 교감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내 무덤에는 그리움만
소금처럼 하얗게 남게 하소서
-「사랑」부분
이 시에서 보여주는 사랑의 형태는 소금처럼 하얗게 남는 그리움의 모습이다. 시를 각각 물질적 상상력의 산물로 보고 소재를 중심으로 분석한다면, 이 시에서 소금은 시인 내면의 그리움이 분비되어 고체화된 것이다. 눈으로 볼 수 없는 내면의 그리움이 구체적인 소금으로 나타난 것이다. 제목과 연관하여 보면 나의 사랑은 곧 그리움이다. 실제 닿을 수 없는 사랑을 소금처럼 하얗게 실체화하고 있다. 그 사랑이 소금처럼 남게 해달라는 소망이다. 무덤이야말로 자연과 인간이 교감하는 공간이다.
무덤은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장소이며, 삶과 죽음이 만나는 공간이다. 그 무덤에는 현실적인 것, 세속적인 것은 남지 말고 그리움만 소금이 되어 남게 해달라는 것이다. 무덤과 그리움은 곧 자연과 인간의 조화이다.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 바다를 건너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 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바닷가 우체국」부분
우체국은 그리움과 그리움, 기다림과 기다림이 교신하는 영원한 장소이다. 우체국의 발길은 세상의 어느 곳으로도 잇닿아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길이/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다시 갈래갈래 흩어”진다. 그것은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훌쩍 먼 바다를 건너기도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체국은 그리움과 기다림의 애틋한 긴장이 지속적으로 살고 있는 집이다. 우체국에는 세상의 모든 것이 모인다. 파도 소리, 수평선, 해변의 벼랑 끝, 골짜기, 바다 등 자연 소재들이 모였다 흩어지는 교감의 장소이다. 그래서 화자는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생각한다.” 우체국은 채워졌다가 비워지는 기능을 한다.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흩어지는 행위는 가득 찼다 비워지는 분비물의 유사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안도현 시 세계가 그리움의 시학에 근거하고 있음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작품도 그리움이 긴장감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진행되고 있다. 그의 그리움이 닿는 곳은 과거는 물론 미래형의 시간 의식에 이르기까지 두루 포괄된다. 그의 이러한 그리움은 외로움과 함께 과거 ․ 현재 ․ 미래형에 걸친 시간 의식의 깊은 심연에까지 이른다.
다시 말해, 그의 그리움의 대상에 대한 형상화는 감성적인 정감의 차원을 넘어서서, 본질적인 삶의 단계로 확장되어 내면의 깊이로 나아가고 있다. 그의 시세계는 미세한 언어 감각을 살리고 있다. 아울러 삶의 본원적인 깊이와 무게에 대한 인상을 보여 주며 수평선이나 먼 바다와 같은 자연물과 함께 한다. 그의 시는 그리움의 정서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가’리라는 기다림의 정서와 함께 담기기도 한다. 특히 이러한 정서는 직접적으로 드러나기보다는 자연, 혹은 환경을 통해 나타난다.
그의 시「이 가을에는」에서도 “내 몸 바깥에는/ 바람이 불고요/ 겨드랑이 아래로 낙엽지는 소리 나고요// 이 가을에는/ 그래야/ 안쪽이 따뜻해지는가 봅니다”라고 따뜻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다. 따뜻함은 사랑의 속성이다. 몸 바깥에 바람이 불고, 겨드랑이 아래 낙엽 지는 소리가 난다는 것은 인간의 신체 일부와 자연의 미세한 감각이 닿아 있다는 근거이다. 몸 바깥을 통해 지각한 바람의 세계를 몸 안으로 끌고 와 따뜻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시의 마지막 행에서 소주가 내 몸에 들어와 뜨겁게 나를 껴안는 행위는 작고 하찮은 것에도 시선을 주는 사랑의 시학이 안도현 시의 중심에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장꾼들이
점심때 좌판 옆에
둘러앉아 밥을 먹으니
그 주변이 둥그렇고
따뜻합니다
-「장날」전문
이 시에도 따뜻한 인간관계가 풍경화처럼 그려지고 있다. 이 시가 착상의 평이함과 표현의 소박함을 떨쳐버리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읽는 사람의 마음에 진솔하게 와 닿는 것은 시인이 시에 지나치게 많은 것을 위탁하지 않았기 때문에 얻어진 결과일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희망한다고 달성될 수 있는 경지는 아니다. 거기엔 지난 시절을 거쳐오면서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던 다양한 일상의 모습들이 보이지 않는 밑거름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을 비롯해서 안도현의 다른 시들이 따뜻한 사랑에의 공감과 안온함을 주는 것이다.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들선들 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연탄 한 장」 전문
연탄은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으면 하염없이 뜨거워져서 모든 것을 품어주는 따스한 존재가 된다. 그것은 따스한 밥과 국물을 먹으면서도 몰랐던 사랑이라 할 수 있다. 눈이 내려 미끄러운 세상에 관심을 기울이며, 그 누구라도 미끄러지지 않고 마음 놓고 걸어갈 수 있도록 보살펴주는 따스한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눈 내린 겨울날, 연탄은 산산이 으깨어져서 추운 겨울을 이겨내려는 사람들의 치열한 삶에 사랑을 베풀겠다는 의지를 암시하기도 한다. 사랑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주변의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에 대해 눈을 돌린다. 추운 겨울 눈이 내려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인간들에게 진정으로 따스한 마음을 보내는 것이다. 추상적인 사랑의 표현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랑을 지속적으로 보이고 있다. 이것이 인간사랑, 생명사랑의 정신이다.
그의 시는 지구가 인간만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아닌 인간 주변에 있는 자연과 함께 삶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준다. 즉 자연의 존재를 인간의 존재와 같이 느끼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인간중심적인 것에서 우리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기회를 발견하게 한다. 특히 인간과 밀접한 자연은 우리 인간의 삶과 비교하여 삶의 양식과 태도를 보여주기도 한다. 자연과 인간이 잘 어우러진 시 「옆모습」을 보자
나무는 나무하고 서로 마주보지 않으며
등 돌리고 밤새 우는 법도 없다
나무는 사랑하면 그냥,
옆모습만 보여준다
옆모습이란 말, 얼마나 좋아
옆모습, 옆모습, 자꾸 말하다보면
옆구리가 시큰거리잖아
앞모습과 뒷모습이
그렇게 반반씩
들어앉아 있는 거
당신하고
나하고는
옆모습을 단 하루라도
오랫동안 바라보자
사나흘이라도 바라보자
-「옆모습」 전문
안도현의 시에 나타나는 나무는 그의 풍부한 시적 상상력을 통해 다양한 존재로 표면화된다. 생명의 원천으로 인간의 삶에 모태가 되기도 하고, 인간이 닮고자하는 대상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갖가지 자연물과 어울리면서 인간의 품으로 들어와 인간과 자연의 융합을 추구하기도 한다. 결국 인간은 인간끼리만 사는 세상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자연에 대한 그의 시적 인식은 나무로부터 출발하여 꽃, 강, 눈 등 온갖 크고 작은 자연물들과 어울리며 서로를 보듬고 사랑하는 따뜻한 세계를 만들어간다. 이는 곧 자연과 자연,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사랑으로 확대되어 함께 사는 조화와 균형의 세계로 나아간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의「옆모습」이라는 시는 나무의 상징적 특성과 깊은 사랑의 세계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앞모습과 뒷모습을 반반씩 가지고 있는 나무는 서로를 사랑하되 조화를 이루면서 너무 가까이도 너무 멀리도 하지 않는 옆모습의 관계이다. 나무라는 소재를 통해 사랑과 조화라는 삶의 태도로 확대되고 있다.
이처럼 나무는 그의 시에서 소재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자연친화적 성향을 가지며 생명의 원천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즉 자연과 인간이 사랑을 통해 함께 어우러지고 있다. 이러한 시의 특징은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배설물 중 똥을 통해 형상화되어 있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소재 중 똥은 비움과 채움의 원리를 보여주고 있다.
인간은 기계문명을 발달시킴으로써 자연의 순환 원리를 무너뜨리고 있다. 이에 반해 똥이라는 배설물은 단순한 배설 행위가 아니라, 비우고 채우는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순환의 원리를 지속하고 있다. 시인은 똥의 미학을 통해 자연의 순환 원리가 생명의 가치와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일깨워 주고 있다. 다음 장에서 자연의 순환 구조를 통해 생명성과 인간의 사랑이 어떻게 유지되는지 살피도록 한다
4. 비움과 채움의 순환 구조
분비와 배설을 일상적으로 단순하게 생각하면 내 몸에서 배출되는 지저분하고 더러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분비와 배설은 몸의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생리 현상이다. 그것은 의지와는 관계없이 일어나지만,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몸의 표현이며, 몸의 욕구가 담겨 있는 행위’임에 분명하다.
똥이라는 것을 순수하게 생리적인 차원에서 보면 몸에서 배출되는 더러운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 똥처럼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 실체도 드물다. 인간은 삶과 죽음, 먹는 것과 싸는 것의 양면을 생각할 수 있다. 먹는 것을 예로 들어 보면 ‘밥’은 요리라는 과정을 통해 꾸밀 수 있는 문명의 산물이다. 그러나 ‘똥’은 내 몸의 긴 위장과 장기를 통과하면서 형성되는 자연물이다.
똥은 문명적 행위에 의하여 조작될 수 없는 자연의 산물이다. 먹는 것에 따라 결정되며 내 몸의 상태에 따라 결정된다. 배설물은 음식 섭취에서 배출에 이르기까지 생명 탄생의 과정처럼 몸의 순환 고리로 이어진다. 배설의 노고는 산고(産苦)와 다르지 않으며 배설과 탄생은 같은 층위로 설명될 수 있다. 배설물과 관련된 말은 미풍양속과 예의범절에 저항하는 언어이자 시가 인간이 추구하는 극도의 의식의 상징이듯 ‘자아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인간 신체의 작용은 정직한 것이며 분비물은 그 육체의 상태를 숨김없이 그대로 반영한다. 그러므로 분비물은 그 육체와 이형동체이며 육체는 그 분비물을 통해서 추정 가능한 것이 된다. 이러한 분비와 배설 작용은 단순한 신체적 작용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순환 원리로 설명될 수 있다. 비움과 채움이라는 자연스러운 원리를 통해 생명의 힘이 생긴다. 즉 분비와 배설은 생명력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만 두세 살의 아동은 몸이 자라면서 자기 몸속에 있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가령 대변과 소변은 자신의 몸 ‘안’에 있다. 아이는 자신의 몸 안에 있는 것을 자신의 소유물 내지 자기 신체의 일부로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있어 똥은 아이들 자신의 신체의 일부이다. 똥은 몸의 자연스럽고 건강한 생리이며 양상이다.
특히 쾌변은 섭취물의 소화 작용이 왕성하고 신진대사가 원활하다는 표식으로, 건강한 육체를 위한 필요조건이며 건강한 육체임을 대변하는 물증이기도 하다. 그 배설은 소멸과 재생, 비움과 채움의 밀고 당기는 역학을 아는 배설이다. 그러면 이 배설의 미학이 안도현의 시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다음 시를 통해 살펴보도록 한다.
봄똥, 생각하면
전라도에 눌러앉아 살고 싶어진다.
봄이 당도하기 전에 봄똥, 봄똥 발음하다가 보면
입술도 동그랗게 만들어주는
봄똥, 텃밭에 나가 잔설 헤치고
마른 비늘 같은 겨울을 툭툭 털어내고
솎아 먹는
봄똥, 찬물에 흔들어 씻어서는 된장에 쌈 싸서 먹는
봄똥, 입 안에 알싸하게 푸른 물이 고이는
봄똥, 봄똥으로 점심을 푸지게 먹고 나서는
텃밭가에 쭈그리고 앉아
정말로 거시기를 덜렁덜렁거리며
한 무더기 똥을 누고 싶어진다.
-「봄똥」전문
이 작품은 봄똥이라는 단어를 반복하여 발음하면서 언어의 재미와 리듬감을 획득하고 있다. 봄똥이라는 단어에서 똥의 의미를 발견하고 봄똥과 똥을 연결시킨 언어적 유희도 돋보이는 부분이다. 봄똥으로 점심밥 푸지게 먹고 텃밭가에 앉아 한 무더기 똥을 누고 싶은 화자는 텃밭을 일구는 농촌의 모습을 그리워하고 있다. 사실 배설물은 신체의 생명 활동이 유지되는 한 끊임없이 생성되고 배출되는 것이다. 따라서 배설물은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시인은 호젓하고 자유로운 배설의 공간으로 텃밭가를 찾는다. 거기서 한 무더기 똥을 누는 쾌감을 맛보고자 한다. 이것은 단순히 배설될 때의 쾌감에 몰입하는 것만은 아니다. 똥은 쾌감보다는 봄똥이라는 음식과 관련되어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봄똥이라는 배추의 어린 순과 배설물은 사실 순환적 구조로 본다면 흙을 통해 만날 수 있는 하나의 고리 사슬이다. 먹는 것과 배설, 비움과 채움의 순환 고리의 원리와 연결된다. 그렇다면 밥과 몸과 똥은 서로 떼어 낼 수 없을 만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밥과 똥의 관계가 비워야 채워지고 채워야 비워지는 의미가 아니더라도 밥에서 나온 똥은 곧 생산, 탄생, 창조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더구나 밥과 똥은 생태학과 연관시켜 보면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옛날 사람들이나 요즈음 사람들 대부분이 똥을 무척 더러운 것으로 생각한다. ‘똥은 말라도 구리다’라는 표현도 있고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한다’는 속담도 있다. 현대인들은 아파트의 화장실을 잘 꾸며놓지만 그 변기 아래 하수구에서는 어김없이 배설물이 흐른다. 그러나 똥은 인간의 생명과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뿐만 아니라 파리나 구더기 또는 개처럼 인간의 똥을 먹고 사는 생물체도 있다. 이렇듯 먹이의 사슬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똥은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밥과 다름없다.
다음 시 「똥차」와 「똥개」 2편에서도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두어 달에 한 번 씩 학교에
똥차가 온다
햇볕이 변소 지붕에 골고루 널린 날을 택해
부릉부릉 운동장을 힘차게 질러온다
개도 안 먹는다는 선생 똥을
교과서나 공책 찢어 쓰윽 닦은 아이들 똥을
빨대로 콜라 빨 듯 시원히 바닥낸다
수업시간에도 냄새가 교실을 적시지만
우리 어디 제 코만 싸잡을 일이다냐
비우면서 그리하여 가득 채우는 일
대명천지에 똥차는 와서
진정 참다운 일
가르쳐주고 간다
-「똥차」 전문
똥개가 되고 싶어 봄날에는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따뜻한 똥을 찾아
동네방네 쏘다니다가
복숭아같이 엉덩이 굵은 암캐 만나면
그녀와 함께 킁킁대며
오랑캐꽃 들길 따라 걷고 싶어
모락모락 김이 나는 혀끝에 침이 도는
똥을 찾아 어슬렁거리다가
물어뜯고 싶어 손이 하얀
가슴에 똥이 가득 찬 어느 놈이
냄새난다고 똥 치운다고 법석 떤다면
그놈 손목부터 물어뜯고 싶어
부르르 치떨며 팽개치며
우리들 귀한 밥을 지키고 나면
그녀가 아지랑이처럼 꼬리 흔드는 것을
보고 싶어 봄날에는
똥개가 되고 싶어
-「똥개」 전문
‘똥차’는 가득 찬 똥을 비워주는 단순한 똥차가 아니다. 두 달에 한 번 씩 오는 똥차는 개도 안 먹는다는 선생의 똥과 아이들의 똥을 섞어서 채워 놓은 학교 변소를 ‘비우면서 그리하여 가득 채우는 일’을 한다. 똥은 사람의 배설물로서 깨끗하지 못하다는 인식이 강하다. 그래서 똥에 관한 속담이나 비유는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똥은 덮어도 냄새가 난다’는 말처럼 ‘수업시간에도 냄새가 교실을 적시’는 똥이지만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똥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긍정적인 교훈으로 바뀌고 있다.
대명천지에 똥차가 와서 ‘진정 참다운 일을 가르쳐주고’ 가는 것이다. 똥차는 콜라를 빨대로 빨듯 자기 몸에 똥을 가득 채우고 간다. 자기가 채워지면 학교 변소는 비워지게 된다. 비워야 비로소 채워지는 원리, 채워지면 다시 비워야 하는 이치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비움과 채움의 밀고 당기는 역학 원리와 함께 자연의 순환을 인간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시인은 똥을 매개로 하여 주제를 이끌어 내고 있다. 똥을 소재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낸 것이다. 안도현의 시 세계에서 똥은 생명으로 부활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김지하가 일찍이 “똥만 보면 못 견디게 베먹고 싶어”(「똥」)로 노래했듯이 안도현도 「똥개」에서 ‘모락모락 김이 나는 혀끝에 침이 도는/ 똥을 찾아 어슬렁거리는’ 똥개의 식성을 전경화하고 있다. 똥을 베어 먹고 싶다는 것은 시적 화자가 정신 질환이거나 식욕에 무슨 이상이 생겨서가 아니다. 시적 화자가 음식을 칼로 베어 먹듯이 똥을 베어 먹고 싶다고 하는 것은 음식과 똥을 동일시하는 행위이다. 똥을 음식처럼 먹고 싶다는 것은 똥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아니다. 내 몸에 똥을 다시 받아들이겠다는 친근감의 표현이다.
이러한 똥과 흙의 관계는 안도현의 산문「똥은 똥이다」에서도 드러난다. “똥을 눈다는 것은 자연으로부터 입을 통해 섭취한 것을 몸에서 걸러낸 뒤 그 찌꺼기를 다시 자연으로 되돌려주는 행위다. 자연의 어머니인 대지는 절대로 똥을 밀어내거나 홀대하지 않는다. 대지는 똥뿐만 아니라 똥 냄새까지도 흡수한다. 그리고 그 땅에서 식물의 뿌리와 허리를 튼튼하게 키운다. 대지의 모성애는 그렇게 거리낌없이 똥을 빨아들임으로써 발휘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똥이 지닌 재생과 부활의 의미를 설명하는 자료로서, 똥에 대한 일상적 정서를 산문으로 서술한 글이다.
나 오래 참았다
저리 비켜라
말 시키지 마라
선운사 뒷간에 똥 떨어지는 소리
-「동백꽃 지는 날」 전문
이 시는 ‘똥’을 청각적 이미지로 묘사하고 있다. 선운사 뒷간에 똥 떨어지는 소리는 자연의 소리이다. 그런데 대지가 똥을 거부할 때가 있다. 시멘트나 아스팔트 같은 문명의 이기는 땅에서 기운을 뺏어 똥을 거부하게 한다. 그것은 대체로 급격한 도시화와 함께 진행된다. 똥을 받아들일 능력을 상실한 도시의 땅은 똥 냄새까지도 끌어안지 못한다. 재래식 화장실이 아니면 똥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가 없다. 소리의 속성은 시가 생동성을 갖게 하는데 있다. 뒷간에 똥 떨어지는 소리는 시인이 경험했던 물리적 환경을 연상하게 한다. 선운사 뒷간에서의 현장의 아름다움이 생명력을 가진 소리의 언어로 재창조된 것이다. 마지막 행에 똥 떨어지는 소리를 배치하여 여운을 남기고 있는 작품이다.
시인이 직접 생태주의나 환경론을 내세우지 않았지만, 그의 시에서는 자연의 원리를 소중히 여기고 생명을 존중하는 사랑이 녹아 있다. 즉,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거나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모든 만물이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균형을 이루는 조화의 세계를 만들어 가기를 원하고 있다. 시인은 똥의 비움과 채움의 순환 원리를 통해 생명의 힘을 보여준다. 시인에게 똥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 생명력을 주는 가치 있는 소재이다. 자연의 원리를 담고 있는 똥은 인간의 일부이다. 인간도 우주 속에 살아가는 존재로 볼 때, 자연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똥이 생명력의 원천이라면, 똥의 순환 원리는 생명을 존중하고 자연을 소중히 여기는 사상과 무관하지 않다.
5. 결론
지금까지 안도현의 시에서 생명의 소중성과 인간사랑, 자연과 인간의 조화에 대해 살펴보았다. 안도현의 시편들은 자연의 존재와 생명의 가치를 인정하며, 자연과 인간의 유기적 관계를 형상화하고 있다. 안도현은 일상의 사물에서 사랑의 의미와 생명의 힘, 생명성을 발견하여 새로운 언어로 그의 시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안도현은 그의 시에서 일상과 자연이 합일되고 인간과 자연이 조화와 상생을 통해 어떻게 사랑의 세계를 실현해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제2장과 3장에서 생명의 소중성과 인간에 대한 사랑, 그리움의 미학이 일상적 소재를 통해 어떻게 형상화되고 있는지를 고찰하였다.「모항으로 가는 길」,「바닷가 우체국」,「이 가을에는」,「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사랑」 등의 작품에서 생명의 가치와 사랑의 의미를 돼지우리, 우체국, 장꾼 등 주변에 작고 하찮게 존재하는 소재들을 통해 다양한 층위로 나타내고 있었다. 그의 시는 사랑의 따뜻한 속성과 생명 의식의 반영이며 표상이었다.
이러한 특징을 바탕으로 그의 시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시적 가치를 밝히는 데 있어 ‘똥’이라는 소재는 아주 중요하고 특징적인 인상을 제공한다. 특히 본고의 후반부 4장에서 시에 소재로 등장하는 분비물과 배설물 중 똥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그의 시 세계를 살펴보았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시에 나타나는 분비와 배설의 행위를 몸의 생리 작용으로서의 비움과 채움의 순환 구조로 파악하였다. 특히 똥을 소재로 한 그의 시 「봄똥」에서 보여지는 밥과 똥의 관계는 비워야 채워지고, 채워야 비워지는 순환적 구조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의 시에 나오는 배설은 소멸과 재생, 비움과 채움의 밀고 당기는 역학을 아는 배설이다. 이 배설의 미학은 안도현의 시에서 주제를 이끌어내는 기능을 하고 있었다. 똥은 인간의 생명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그의 시에 근본 흐름을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그의 시「똥차」에서 똥은 비움과 채움의 원리와 함께 자연의 순환을 인간에게 가르치는 소재로 드러난다. 시인은 이렇게 똥을 매개로 하여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내고 있었다. 그 외에 「똥개」,「동백꽃 지는 날」등에서 시인은 똥의 비움과 채움의 원리를 통해 생명의 힘을 보여준다. 시인에게 똥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 생명력을 주는 소재이다. 자연의 원리를 담고 있는 똥은 인간의 일부로 표현되고 있다. 그의 시에서 똥은 생명력의 원천이었다. 그래서 똥의 순환 원리는 생명을 존중하고 자연을 소중히 여기는 사상과 무관하지 않았다.
안도현 시에서 똥은 순수한 자연의 산물로 묘사되거나, 비움과 채움의 순환 구조를 통해 자연의 근원적 원리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 나타난 똥은 삶과 죽음, 먹는 것과 싸는 것의 양면성을 담고 있었다. ‘똥’은 위장과 장기를 통과하면서 형성되는 자연의 산물로서, 똥이야말로 문명적 행위에 의하여 조작될 수 없는 자연 그 자체라는 사고가 근간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렇게 똥이라는 소재는 안도현의 시에서 인간과 자연을 조화와 상생으로 이끄는 중심 소재이며, 생명으로 부활하는 대상이었다.
안도현의 시에서 일관적으로 보여주는 세계는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사랑의 세계이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인간과 자연이 서로 교감하는 세계이다. 즉, 그의 시세계는 자연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사랑의 의미와 생명의 소중성을 지향하고 있었다. 따라서 안도현의 시는 자연과 인간의 균형 관계를 유지하며, 생명의 가치를 추구하는 문학적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