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처럼 포용력 있는 생명체도 없을 거예요. 벼락이 쳐도, 벌레가 먹어도 묵묵히 모든 것을 허용하잖아요. 게다가 나무들은 아무리 급해도 스스로 병원을 찾는 법이 없을 정도로 배짱이 두둑한 녀석들이죠.”
일본 최초의 여성 나무의사인 쓰카모토 코나미 ‘아시카가 플라워파크’ 원장. 그의 옆에는 항상 나무 치료를 위한 왕진 가방이 놓여 있다. 나무환자가 찾아오는 법이 없으니 전화를 받는 대로 어디든 달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1년에 3분의 2 이상을 왕진과 강연으로 객지에서 생활하는 그에게 휴일이란 신년 연휴가 전부다. 그 정월 초하루마저 남편과 함께 전국의 사찰과 신사의 고목을 보러 간다니 나무에 푹 빠진 나무의사라 아니할 수 없다.
1992년, 마흔 둘의 나이에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나무의사 국가시험에 합격한 그는 토양과 이식, 외과수술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일인자다. 일본에서 나무의사 국가시험 제도가 시작된 것은 1991년. 7년 이상 수목의 보전, 보호, 진단, 치료에 종사한 사람들이 국립연수센터에서 15일간 합숙을 하며 생리생태, 병충해, 토양, 유전자학, 뿌리 외과수술 등 10여 과목의 시험을 치러야 한다.
그가 나무의사로 세상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수령 1000년의 후피향나무 이식에 성공하면서.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포기한 이식에 성공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의 실력을 세상에 다시 각인시킨 것은 그가 원장으로 일하고 있는 돗치기현의 ‘아시카가 플라워파크’의 등나무 이식. 직경 4m, 넓이 600㎡, 무게 15t의 수령 130년이 넘는 등나무를 토양 조성에서부터 이식까지 종합수술을 완벽하게 처리하면서였다.
“등나무는 다른 나무보다 민감해 이식이 어려운데다 이식지가 습지대여서 실패할 확률이 높아 전문가들이 손을 저었던 작업이었어요. 등나무는 직경 2m가 넘으면 이식이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죠.”
이론적인 벽을 초월한 셈이다.
“밤낮없이 등나무와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등나무에게 ‘너는 어떻게 하면 움직이니?’하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답이 나오더라고요.”
습지대인 땅을 2~3m씩 파내고 돌로 배수로를 만들었다. 그 위에 흙을 쌓아 땅을 정비했다. 땅속에 매립한 숯만도 260t을 넘었다니 공사 규모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토지 정비에만 수억 엔이 들었다 한다. 이렇게 해서 소생한 등나무 이야기는 《기적의 나무》라는 그림책으로도 소개됐다.
도쿄에서 북쪽으로 90여 km, 그를 만나기 위해 전철과 버스를 수차례 갈아타며 아시카가 플라워파크를 찾았다. 손에 가위를 든 작업복 차림으로 맞는 그의 눈빛은 명징하고 부드러웠다. 항상 자연에 묻혀 사는 사람이어서 그렇지 싶다. 보통 남자 손의 1.5배는 되어 보이는 손마디가 그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함께 걷는 동안에도 풀을 뽑는 등 손이 쉴 틈이 없었다.
“이곳의 자랑은 세계 최고 등나무와 일본 제1의 입장객 수입니다.”
한 그루에 피는 꽃이 15만 송이. 이런 등나무가 290그루나 된다. 그 꽃이 한꺼번에 피면 장관일 수밖에 없다. 4월 중순에서 5월 상순 사이 이 등나무 꽃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하루 6만~ 7만 명이 모여든다.
그가 돌보고 있는 아시카가 플라워파크의 등나무.
이곳에서 연간 120일 원장으로 근무하는 그는 나머지 시간을 쪼개 치료를 기다리는 나무환자를 찾아 전국을 다니며 왕진을 한다. 집에서 지낼 수 있는 날이 거의 없어 남편의 불만도 만만치 않다.
“조경사업을 하는 남편을 만나 나무를 알게 됐고, 남편한테 모든 것을 배웠어요. 그러니 남편은 제 스승인 셈이죠. 그래서 모든 게 당신 때문이라고 우겼더니 그 후론 아무 말을 안 하더라고요.(호호호)”
남편은 명문 조경사의 3대손으로 조경사업을 하고 있다. 친정집 정원을 손질하러 온 남편을 만나 스물 둘에 결혼했다. 고교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던 그는 결혼과 함께 남편 일을 도우면서 나무의 세계에 입문했다.
“사무실을 지키다 보면 곳곳에서 왕진을 요청하는 전화가 걸려 왔어요. 그때마다 남편에게 묻고 책을 보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다 나무의 매력에 푹 빠져 버렸어요.” 조경사 남편과 결혼한 후 나무 세계에 입문
서른다섯 살 때는 여성의 시각에서 조경을 해보겠다며 조경 컨설팅 회사를 세웠다. 일본에서 조경업은 금녀의 장인세계. 남자가 99.9%인 이곳에 발을 들여놓자 ‘건방진 여자’라고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남편의 후원이 한몫했다고 한다.
“생물학적으로도 만드는 작업은 남성이 뛰어나지만 ‘생명’을 돌보고 기르는 것은 여성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해요.”
4000여 가지에 달한다는 나무의 병. 그는 화학약품 사용을 되도록 자제하고 자연치유를 꾀한다. 자연의 생명력을 믿기 때문이다. 그녀의 치료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 술과 숯이다. 사람도 뼈가 부러지면 깁스를 하듯 나무에도 깁스를 하고, 지푸라기 대신 두꺼운 이불로 감싸기도 한다.
“30여 년 나무만 보고 살다 보니 이젠 보기만 해도 어디가 아픈지 알 수 있어요. 나무도 아프면 사람처럼 온갖 표정으로 아프다고 말을 해요. 그래서 사람하고 똑같이 대하죠. 흙을 치료하고 난 후에는 반드시 맨발로 감도를 확인하고, 환부는 맨손으로 만지면서 병 상태를 확인하지요.”
그의 별명은 ‘등나무 바보’. 등나무 치료와 이식 분야에서 그를 능가할 전문가는 일본에 없다. “일본의 나무는 ‘벚꽃나무’가 아니라 ‘등나무’”라고 할 정도로 등나무의 매력에 푹 빠진 그를 보고 사람들이 지어 준 것이다. 그는 나무 이식을 인간의 장기 이식에 비유한다. 이식하는 데 보통 3년이 걸리는데, 흙 속 수십m까지 뻗어 있는 뿌리를 매년 3분의 1씩 절단해 이식용 뿌리를 만든다. 준비가 완료되면 나무의 내피에 상처가 가지 않도록 크레인의 와이어를 끼울 곳에 깁스를 해서 튼튼하게 만든다. 나무 원통보다 20~30배 이상 땅속 깊숙이 길게 뻗어 있는 뿌리를 5분의 1 정도 남을 때까지 잘라야 하기에 이식 후에도 한동안 밤잠을 설친다.
“사람으로 말하면 장기를 잘라 낸 것이기 때문에 수술 후 케어가 중요해요. 이때를 소홀히 하면 죽는 경우가 많아요.”
그는 어떤 악조건에 있는 나무를 살리는 일도 거절한 적이 없다.
“불가능한 이유를 열거하지 않고 치료가 가능한 이유를 찾지요. 단 0.1%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그 가능성을 열거하면서 방법을 찾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뭔가 방법이 나오거든요. 그다음은 엄마와 같은 따뜻한 마음과 정열이 필요하죠.”
조경업을 시작할 때는 모든 식물이 정원을 장식하는 하나의 부품으로 생각됐다는 그. 하지만 나무의사가 된 지금은 인간과 똑같은 하나의 생명체로 보인단다. 한 남자의 아내이자 세 자녀의 어머니, 다섯 손자의 할머니인 그는 이제 환갑이 멀지 않다. 그러나 그는 지칠 줄 모른다.
“결국 구극의 길에 도달하지 못한다 해도 그곳을 향해 나아가는 것. 0.1%의 가능성이 있다면 포기하지 않고 추구하는 것. 그것이 장인정신이라 생각해요.”